2021년 4월 20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2021년 4월 20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6,30-35)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hunger,
and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thir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요한 복음서 6장은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야기,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야기,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의 배경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입니다. 빵의 기적은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갈릴래아 호수 동쪽 지역, 벳사이다에서 이루어집니다. 저녁이 되어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널 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다음 날 호수의 서쪽 지역이며 유다인들이 모여 사는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당신께서 생명의 빵이시라고 가르치십니다.
빵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이 이교도 지역에서 유다인 지역으로 물을 건너 공간을 이동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을 연상하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간 것과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기적들이 일어난 시기도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요한 6,4)였습니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짐승의 희생으로 얻은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 죽음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이 죽음은 성찬례의 의미를 설명해 주며, 예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심을 빵의 표징을 통하여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7.2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군중은 의심하며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요한 6,30-31). 군중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듯이, 새로운 메시아는 하늘에서 만나보다 더 큰 풍요를 주리라고 여겼기에 예수님께 더 큰 일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생명의 빵”이요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빵이었다면, 당신께서는 온 세상을 위한, 온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처음 해외 성지순례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보름 동안의 해외성지 순례였기에 준비할 것이 많았고 또 가방의 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집트 순례를 마치고 육로로 이스라엘을 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입국 심사를 하는 사람이 갑자기 제 가방을 열라는 것입니다. 난감했습니다. 이집트 순례를 하면서 입었던 속옷이 검은 비닐봉지 안에 담겨 있었고, 그날 새벽 시나이산에 다녀온 뒤라 급하게 짐을 싸서 가방 안이 너무 지저분했던 것입니다. 검색원은 검은 봉지 안의 속옷까지 일일이 쏟아내면서 살펴보았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때 다짐을 했습니다. 여행 짐을 늘 잘 정리하겠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20년 동안 가방 하나만큼은 잘 정리해서 다니고 있습니다.
훗날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가게 되면 우리의 모든 죄가 환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때 어떨까요? 너무 부끄러울 것만 같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받겠지만,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 유다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주님께서는 유다의 죄도 용서하셨지만, 스스로 용서하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그 나라에서 잘 살아갈 방안을 지금부터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 마음의 짐을 깨끗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죄로 지저분한 내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면서 지금을 주님 뜻에 맞게 잘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도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군중은 아직도 믿음이 모자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가르치십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밝히며, 군중의 덧없는 생각을 빵과 포도주에서 서서히 당신의 참된 몸과 피로 돌릴 기회를 찾아내십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신 그분은 우리의 유일한 생필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와 생명을 주는 유일한 참된 빵이시며, 만나는 예시였을 뿐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모시는 이만이 새롭게 되고 계속해서 잘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앞서 말씀드렸듯이 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부끄러워서 고개조차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으려면 마음의 정리가 지금 당장 필요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제일 많이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냥 쓰기만 하면 되지 다른 무엇을 할까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글을 쓰기 위해 제일 많이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읽는 것’입니다. 제가 쓴 글도 몇 번씩 다시 읽어야겠지만, 다른 사람의 글도 많이 읽어야 제 글을 좀 더 잘 쓸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가수에게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노래를 많이 부를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이 가수는 “노래를 많이 들어요.”라고 대답합니다. 노래 부르는 가수 역시 잘 부르기 위해는 먼저 많이 들어야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사, 기도와 묵상, 그리고 희생과 선행을 실천하면 될까요? 물론 우리가 충실히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잘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알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야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성체가 매력을 잃는 이유: 배부르기 때문에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먹고 마시면 절대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이 말씀은 육체의 양식을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배고프고 목마르지 않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배고픔은 무엇일까요? 영혼의 양식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실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부어주시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받지 못하면 배고픔에 시달립니다.
남들이 보면 아무런 걱정 근심이 없을 것 같은 어떤 자매님이 밤마다 일어나 왠지 모를 공허함에 눈물을 흘린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배고픔입니다. 피조물 안에서는 사랑이 솟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랑이고, 하느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영혼은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사람은 이 공허감을 육체적인 배고픔으로 착각하여 세상 것으로 채워 넣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배고픔은 영영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당신께 초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오랜 시간 성체를 영해 온 사람들도 여전히 미사에 참례하기보다는 TV 미사도 나쁘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동안 한 번도 성체가 그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거나 해갈시켜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육의 배고픔과 영의 배고픔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육으로 배부른 것이 영적으로도 배부른 것으로 착각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려면 그래서 필연적으로 육의 배고픔을 추구해야 합니다. 육이 배부르면 자신이 배부르다고 여겨 예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빈 윌리엄스는 어린 시절 소심하고 뚱뚱해서 친구가 없었습니다. 이런 아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엄마는 서로 웃기는 경연으로 윌리엄스의 개그본능을 일깨웠습니다. 윌리엄스는 혼자 장난감으로 역할놀이를 하며 연기 능력과 함께 개그 능력도 키웠습니다. 덕분에 성장하면서 출연한 배역마다 그의 연기는 빛을 발했고 작품들은 흥행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뇌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말은 어눌해졌고 순발력은 떨어졌습니다. 당연히 그가 출연하는 드라마가 바닥을 치게 됩니다. 그에게 닥쳤던 병은 파킨슨과 치매였습니다. 그는 “이젠 웃기는 법을 잊어버렸어.”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찾는 사랑은 우리 마음까지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 사랑을 세상 것에서 찾다 보면 로빈 윌리엄스와 같이 가진 것을 잃는 고통을 견뎌낼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랑을 추구하는 이유는 영혼이 배고프기 때문인데 그것이 육체로 채워진다고 여기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는데 음식만 먹는 꼴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는 육체는 채워지지 않아도 영혼만 채워지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혼에 채워지는 사랑의 중요성을 알려면 육체의 필요를 끊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김혜자 씨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전쟁 난민을 위한 봉사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다 쓰러져가는 움막으로 들어갔을 때 흑인 여성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몸을 눌러보니 누르는 자리마다 역겨운 고름이 흘러나왔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숨을 쉬고 있는 것조차 기적으로 여겨졌습니다. 의사는 김혜자 씨와 몇 시간에 걸쳐 소독약으로 그녀의 몸을 닦고 고름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이 일을 다 마쳤을 때 30대 중반의 그녀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치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그녀는 마지막에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신창이인 몸을 닦아주었을 때 뜻밖에도 그녀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처음의 괴로웠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빛이 나는 얼굴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김혜자 씨와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행복해요.”
[출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더숲]
육체가 더는 제 역할을 할 수 없고 음식을 먹을 힘이 없을 때도 사람은 ‘사랑’에 목마르고 배고파합니다. 육체가 다 망가졌어도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와 영혼 중 어느 것을 먼저 채워야 할지 명확해집니다. 영혼을 채우면 행복해지고 그러면 그 채워준 사람에게 보답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 것에 배부르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그 배부름이 자신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것을 알려면 육체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이 배부르려면 육체는 배고파야 하고, 영혼이 물을 마시려면 육체는 목말라야 합니다. 요즘 이런 절제의 덕이 사라져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을 당신께 초대하실 때 큰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육체가 배고프고 목마를 때, 그래서 세상 것으로는 더는 채울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가 사랑을 찾을 수 있을 때입니다. 성체가 나에게 매력이 있어지는 때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만족도 얻을 수 없음을 느낄 때임을 잊지 맙시다.

-조재형신부-
제가 있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에는 5명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문사의 모든 업무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모든 문서는 저의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회계업무도 저의 이름으로 결재가 됩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 성당을 다니면서 ‘신문홍보’를 하는 것이 주된 업무입니다. 작년과 올해까지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신문홍보를 다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문 제작에 3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편집을 담당하는 분은 한국에서 오는 기사와 미주 지역에서 오는 기사를 선택해서 신문의 지면을 만들고 있습니다. 취재를 담당하는 분은 미주 지역의 소식을 찾아냅니다. 한인 공동체의 주보를 참조하기도 하고, 특집 기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회개를 담당하는 분은 수입과 지출을 기록합니다. 작년 한해는 수입보다는 지출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정부의 지원이 있어서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저와 직원들의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십니다. 저마다 삶의 자리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지만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가톨릭 신앙’입니다. 매주 월요일 직원미사를 하면서 한 주간을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사람들은 지배한다는 말과 다스린다는 말을 폭력으로 억압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착취하고, 빼앗아도 좋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배와 착취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신분, 계층, 세대, 이념, 피부, 성으로 차별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모두가 평화롭게 가진 것을 나누었고, 특히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돌보았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삶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페스탈로치는 신앙의 원천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류의 아버지이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죽음이 없다. 인류의 순수한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그리고 감사와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 이것이 신앙의 원천이다.” 페스탈로치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인간, 그리스도, 시인, 모든 것을 남에게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축복이 있을 지어다. 그의 이름에 축복이 있을 지어다.” 삶은 사름의 준말이고, 사름은 사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삶은 사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줌의 재로 남은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삶은 고난의 순간에도, 죽음에 이를지라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부활의 꽃이 피고,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주다주다 못해 줘서는 안 될 당신의 살과 피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의 주님!
-양승국신부-
매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소중한 말씀과 교회의 보물인 성사(聖事) 생활에 충실할 때, 우리 삶은 그리스도 신자에게 걸맞는 품위와 영적 풍요로움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이 땅 위에서부터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미리 앞당겨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첫번째 독서인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스테파노가 그랬습니다.
스테파노는 분기탱천한 적대자들의 공격으로 죽음 앞에 내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뒤로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당당하고 용감하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증언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행전 7장 56절)
매일 기쁘게 말씀과 성찬의 식탁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있으니 역경과 고통, 박해와 죽음 앞에서도 초긍정 마인드를 유지합니다.
포악한 적대자들의 폭력 앞에서도 복수하거나 응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힘과 에너지로 인한 기적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그랬습니다. 적대자들이 자신을 향해 살상용 돌을 집어던지는 와중에도 그는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행전 7장 59절)
죽어가면서도 스테파노는 눈을 부릅뜨고 적대자들을 노려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큰 소리로 주님께 그들의 선처를 부탁드렸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행전 7장 60절)
그 모든 배경에 주님께서 매일 건네주시는 생명의 빵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복음 6장 34절)
집회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에게 오너라, 나를 원하는 이들아. 와서 내 열매를 배불리 먹어라. 나를 기억함은 꿀보다 달고 나를 차지함은 꿀송이보다 달다. 나를 먹는 이들은 더욱 배고프고 나를 마시는 이들은 더욱 목마르리라.”(집회서 24장 19~21절)
진리나 지혜의 깊은 내면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그 맛에서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에 맛들이는 사람 역시 그분을 떠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욕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점점 더 당신 가까이 다가서고, 점점 더 당신께 깊이 몰입하기를, 결국 우리가 온전히 당신과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우리 역시 예수님을 향한 더 큰 갈증과, 더 큰 열망을 지니게 됩니다.
평생토록 자비와 은총을 흘러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풍요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주다주다 못해 줘서는 안 될 당신의 살과 피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되풀이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역시 가난한 이웃들과 가진 바를 관대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형제들을 위해 아낌없이 우리의 시간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들, 고통 받는 이웃들 싫다고 해도 쫓아가서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서 몰려든 군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라고 말씀하셨는데, 군중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묻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미게 하시렵니까?”(요한 6,30)라고 표징을 요구 장면으로부터 오늘 <복음>은 시작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이 빵은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사되고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더 이상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며,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빵을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러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먹는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명으로 주어진 빵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을 위한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듯,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받아먹은 하늘에서 선사된 빵을 세상에 생명으로 다시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증거 되는 부활의 삶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이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진정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이신 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할 일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주님!
부서져 먹히게 하소서!
부서져 먹히는 빵이 되고서야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혀 형제들 안에서 사라져버리게 하소서!
먹혀 사라지고서야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영적 목마름으로 허기지면
-반영억신부-
일반적으로 세상의 것은 ‘이것, 저것 다 해봐도 결국은 싫증이 납니다. 물론 취미생활로 한 곳에 투신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신비롭고 깊어만 집니다. 그러니 세상 것에 매이지 마십시오. 세상 것은, 결국 그의 혼을 유혹할 뿐입니다.’천상 것에 마음을 두고 하느님만을 갈망해 보십시오. 자유를 얻게 됩니다.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려 준 분은 모세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만나를 내려 주신 분보다는 만나, 즉 빵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는 단순히 육적 배고픔을 없애주는 음식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표징이었습니다. 빵과 물고기라는 표징 너머의 사랑을 깨닫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하자“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외에는 보이는 게 없는 군중에게 스스로 빵이 되겠다는 일종의 ‘눈높이’식 깨우침을 주시고자 당신이 빵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의 빵이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성녀 체칠리아는“영원을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하고 말합니다. 현세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천상 것을 바라며 영원한 것을 준비하며 투신해야 합니다. 농사 준비를 하더라도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서 봄부터 씨를 뿌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흘리는데 영생을 위해서 그만한 대가를 감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인간의 공로 이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십니다. 영생은 무상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비워내야 하며 온전히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께 맡기오니 당신 뜻대로 하소서.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 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시고 여인이 그것을 거절하자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하시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했듯이 그리고 여인이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하고 간청했듯이 우리도 영원의 빵을, 생명의 물을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영적 목마름으로 허기를 느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허기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빵이십니다. 과거에 한때 주신 빵이 아니라 지금 내려 주시는 빵입니다.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16,9). 그러므로‘우리의 앞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해 주실 것입니다.’ 빵이 아니라 빵을 주시는 분에게 시선의 초점을 두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에 오직 순명할 따름이요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최대 걸림돌은 바로 목이 뻣뻣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을 희망하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2-33).”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만나’는 분명히 ‘기적의 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하고
‘썩어 없어질 양식’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탓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나’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보지 않고,
‘만나’를 ‘몸을 위한 음식’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몸의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이 충실하게 당신의 뜻을 실행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에 대해서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6).”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
당시 사람들은 ‘만나’를 ‘기운만 떨어지게 하는 양식’,
‘보잘것없고 진저리가 나는 양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날마다 ‘만나’만 먹는 것이 지겨워서 그랬을까?
탈출기에서 처음 ‘만나’가 내릴 때의 장면을 보면, 광야에서 굶어죽지 않도록
하늘에서 직접 양식을 내려 주신 하느님께 사람들이 감사드렸다는 말도 없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도 없습니다(탈출 16장).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격하게 불평했던 사람들인데,
‘만나’를 받아먹을 때에는 감동도 감사도 기쁨도 없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늘 하루 배불리 먹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를 보면,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말은 있는데, 예수님께 감사드렸다는 말도 없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더 있지만, 그 모습도 감사와 찬양과는 상관없는 모습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빵의 기적’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날마다 계속되었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날마다 ‘기적의 빵’을 먹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에 그랬다면 사람들은 지겹다고 하면서 ‘기적의 빵’을 싫어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빵’의 경우에도, ‘만나’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몸’만 생각한다면 ‘썩어 없어질 양식’으로 그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참된 빵’, ‘하느님의 빵’, ‘생명의 빵’이라는 말은 모두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참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참된 빵’이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안 믿는 사람들의 생명은 ‘거짓(가짜) 생명’인가?
‘거짓(가짜) 생명’은 아니고, ‘참 생명’의 반대는 ‘시한부 생명’입니다.
‘시한부 생명’은 죽으면 끝나버릴 생명이기 때문에 ‘참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참 생명’은 죽어도 끝나지 않을 생명입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하늘에서 오는 ‘하늘의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빵’이신 분입니다.
‘하늘의 생명’의 반대는 ‘지상의 생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물질적인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코린 15,44).>
구세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분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반대는 ‘허무한 생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썩는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코린 15,53).>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에게 오는 사람”이라는 말과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뒤의 57절에는 “나를 먹는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가는’ 것은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는 점에서 ‘믿는다.’가 ‘먹는다.’로 표현됩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라는 말과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도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고통, 절망, 슬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행복과 완전한 기쁨과 완전한 평화를 영원히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고픔’과 ‘목마름’은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과 기쁨과 평화는 죽은 다음에나,
또는 최후의 심판이 끝난 다음에나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누리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생활입니다.)
물론 온전히 누리는 것은 아니고,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만일에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멈추면?
그러면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신앙생활을 아예 하지 않은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신앙생활을 했다면,
전혀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면,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연옥은 중간 단계의 장소가 아니라, 보속을 하는 곳이고,
하느님 나라의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대기 장소입니다.)

복음: 요한 6,30-35: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29절)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시자, 군중들은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30절) 말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1절)고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즉 모세보다 더 위대한 기적을 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빵’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32절) 그 말씀을 듣자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라고 한다. 그들은 아직도 그 빵을 우리가 먹는 빵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리고 광야에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분은 당신의 몸과 피를 그들에게 주시기 전에 그들의 입을 당신의 빵과 포도주에 익숙하게 하려 하셨다. 그들에게 당신의 살아 있는 몸과 피를 충만히 누리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썩어 없어질 빵과 포도주를 충분히 맛보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성체성사라고 하는 최고의 선물을 주시려고 작은 것들을 공짜로 주셨다. 빵과 포도주의 기적 의미를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기에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빵이시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절) 하셨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있으면서 그분의 몸과 떨어지지 않기를 청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양식으로서의 빵을 청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확실히 배불리 먹이고 완전하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이야말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만나,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시다. (베들레헴: 빵의 집)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하느님의 빵, 곧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피, 곧 썩어 없어지지 않을 사랑을 음료로 마시기를 원합니다.”(로마 7) 이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킨다. 성찬례의 빵이 거기에 내리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이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이다. 그래서 이 빵은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그 빵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은 사제로서 매일 당신의 말씀으로 그것을 축성하시기 때문이다. 이 빵은 그래서 신자들의 양식이 되었다. 이 빵으로 참 생명을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 33)
-한상우신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하늘의 모습을
알려준다.
내려오는 길이
사랑의
설레이는
길이다.
하늘의 모습은
참되고
생명으로
가득차 있다.
생명은
생명으로
만나고
생명으로
소통한다.
세상을
사랑하시어
생명의
빵으로
오신다.
생명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생명의 빵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생명의 빵은
한계가 없다.
참된
사랑으로
우리는
사랑받는
생명이
되었다.
새롭게
사는 법을
배운다.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하느님과
한 몸이 되는
생명의 빵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다.
하늘의
사랑은
간절하다.
그 간절한
사랑을
먹으며
우리는 오늘을
살아간다.
우리는 또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얻는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
우릴 사랑으로
만든다.
생명의 빵으로
만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요한 6,30)
군중이 예수님께 믿을 근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틀렸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구원을 '뭔가 기적을 보여 주면 우리도 믿어 보겠다'는 식의 선심성 거래처럼 여기지만,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우리의 관계는 거래가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시니 접점이 비켜갑니다. 구약의 기적을 고집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만나처럼 먹고도 결국 죽는 육신의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는 빵이 곧 당신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아직 유다인들의 의식 수준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분명히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생명의 빵!" 예수님은 이 세상이라는 광야를 걷는 백성에게 당신의 말씀과 몸을 영원한 양식으로 내어 주십니다. 그분은 당장의 목숨도 살리고, 영원히 살게도 하는 그런 양식이십니다.
제1독서는 스테파노의 순교 대목입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사도 7,55)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도 스테파노는 성령에 힘입어 담대하고 평온합니다. 지금 그 자리에서 오히려 분노하고 요동치는 이들은 화를 견디지 못해 이를 갈며 스테파노를 고발하는 무리입니다.
일촉즉발의 순간, 스테파노는 하늘의 옥좌를 관상합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당신의 충실한 종에게 친히 영광의 모습을 계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를 성삼위와의 일치로 끌어올려 주신 것이지요.
스테파노가 이 극치의 거룩함을 눈으로 보고 선포하는 순간, 악에 받친 이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익혀온 것 외에는 보지 않기로, 듣지 않기로 완고히 마음을 먹고 하느님의 영광 앞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의 몸을 헐어 사랑하는 이에게 먹이로 내어주는 어리석고 약한 하느님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스테파노와 함께 당신 백성에게서 거부를 당하십니다.
스테파노의 용감한 죽음은 그의 생명이 지상 것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 증거를 우리는 '순교'라고 부르지요. 세상 평판과 이해관계에 일희일비하며, 이득에 감사할 줄 모르고 더,더,더를 외치며 손톱만한 손해에도 죽을 듯 절망하는 이들에게는 참 이상한 선택이 되겠지요.
"내가 생명의 빵이다."
지상의 삶, 육신의 삶으로 모든 생명이 끝난다고 여기며 현세에 골몰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분명 세상이 현혹하고 도발시키는 욕망과는 상반되는 가치지요.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 지상에서도 살고, 또 천상 하느님 나라에서도 살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욕정과 탐욕, 이기심과 오만으로 반짝 누리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당신 생명을 바쳐 우리에게 남겨 주신 '말씀과 성체'는 이 광야에서 지상 순례길을 걷는 우리에게 만나와 같습니다. 단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양식이지요. 말씀에 머무르고 성체를 모시며 살아가는 우리는 육적인 삶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착하고 성실한 종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되씹고 곱씹어 양분으로 받아 먹고, 예수님의 몸을 영해 그분이 되어 가는 일치의 여정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과 성체로 배부르고 충만한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꼴 보기 싫은 사람을 어떻게?
-김찬선신부-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오늘 스테파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주한 스테파노와 사람들이 너무도 대조적인데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에 비해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충만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더더욱 대조가 선명합니다.
우선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분노가 충만한 데 비해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는 얄미울 정도로 태평합니다.
어제 사도행전의 끝부분은 이렇게 그 상황을 묘사하지요.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스테파노 때문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 있고
그래서 그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것에 비해
스테파노의 얼굴이 천사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는 열린 하늘을 보는 데 비해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하늘을 보지 않고 스테파노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보는 얼굴과 적 또는 원수를 보는 얼굴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과 싸우는 사람의 얼굴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스테파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니 그것을 보는 그들은
얼마나 더 비참하고 얼마나 더 화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그 분노는 의지로 누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고,
급기야는 그런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지게 됩니다.
그 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고 그래서 그대로 놔둘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스테파노의 눈에는 참으로 가엾습니다.
제대로 기도를 하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미운 사람이 있을 때 미운 사람 때문에 기도할 수 없고
그래서 기도하는 동안만이라도 그 사람을 생각에서 지워버리려고 하는데,
다시 말해서 없애버리려고 하는데 스테파노는 하늘을 보면서
이들도 보고 그렇지만 분노로 보지 않고 연민으로 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 중에 지워버리려는 것은 사람들이 돌을 던져
스테파노를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꼴 보기 싫어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꼴 보기 싫다는 말이 있는데 꼴 보기 싫을 때 우리가 하는 행동은
-얼굴을 돌리는 것, 곧 외면하는 것,
-내 생각에서 지워버리는 것,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
-아예 죽여 없애 버리는 것 등이지요.
우리는 힘이 없어서 꼴 보기를 싫은 사람을 어디로 보내버릴 수 없고,
살인할 정도로 악랄하지도 않아서 그를 죽여 없애 버리지는 못하지만
외면하거나 생각에서 지워 버리려고는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기도하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스테파노처럼 연민으로 바라보고 용서해 줄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단계까지 오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단계까지 오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기도하면 기도를 통해 하느님 사랑에 오를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앞서 얘기한 것과 반대로 하면 될 것입니다.
그들을 외면한 채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기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의지적으로 기도를 할 때 우리의 사랑이 차츰
하느님 사랑으로 자랄 것임을 믿고 희망하며 노력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6,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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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메시아는 하늘에서 만나보다 더 큰 풍요를 주리라고 여겼기에 예수님께 더 큰 일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생명의 빵”이요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빵이었다면, 당신께서는 온 세상을 위한, 온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서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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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순수한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그리고 감사와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 이것이 신앙의 원천이다.” 페스탈로치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인간, 그리스도, 시인, 모든 것을 남에게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축복이 있을 지어다. 그의 이름에 축복이 있을 지어다.” 삶은 사름의 준말이고, 사름은 사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삶은 사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줌의 재로 남은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사라지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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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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