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4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2021년 4월 14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요한 3,16-21)
whoever lives the truth comes to the light,
so that his works may be clearly seen as done in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말씀입니까? 믿는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비둘기 모양의 성령께서 내려오시며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 1,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시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본성으로 모든 것을내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 내어 주시는 분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까지 내어 주십니다.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시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를 닮은 아드님께서는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찾아 만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것을 온전히 내어 주십니다. 마침내 당신 생애의 결정체인 몸을 내어 주실 뿐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 주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그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우리는 이제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아파하는 이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께서 저를 죽기까지 사랑하심을 받아들입니다.’라는 뜻으로 십자 성호를 그어 몸에 새깁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아멘.”이라고 응답함으로써 ‘저도 이웃에게 나아가 내어 주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요즘에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학교에서 예방접종을 맞았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주사는 너무나 큰 공포였습니다. 막상 맞고 나면 별것 아닌데, 맞기 직전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결핵 예방주사인 불주사 맞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냥 보통 주사 맞는 것도 힘든데, 주삿바늘을 알코올 불에 소독하여 접종하는 주사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당시는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일회용 주사기 대신 유리 주삿바늘을 소독해서 재사용했던 것입니다). 차례대로 나와 주사를 맞는데, 제 접종 차례는 반에서 거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제 앞에 있는 친구들이 주사를 맞고 비명을 지르고, 또 울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제 차례가 가까워지면서 공포심도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제일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 맨 처음 주사를 맞은 아이일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은 더 커집니다. 따라서 걱정을 빨리 내려놓는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바로 먼저 마주하면서,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걱정을 마주하면 별거 아닐 때가 더 많았습니다. 주사 맞는 것처럼 말이지요.
세상 안에서 걱정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만 하면 아마 걱정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만 갑니다. 따라서 빨리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걱정을 줄이고 힘차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약한 내게 힘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인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즉, 심판이 아닌 구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심판을 먼저 생각하며 걱정합니다. 이제까지 지은 죄의 무게를 생각하면, 구원보다는 심판에 더 가까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구원에 맞춰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집니다. 걱정하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그분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고 그분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된 자비만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굳은 믿음과 진정한 참회로 주님과 늘 함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이 참 빠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간을 의식하고 바라보고 있으면 천천히 가는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시간을 잊고 있으면 빨리 지나갑니다.
어느 책에서 ‘세상에서 가장 시간 안 가는 3대 케이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컵라면 익기를 기다리는 시간, 플랭크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시간, 전역을 기다리는 시간.
이 시간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시간을 의식하고 바라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결국, 시간이 너무 빨라서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니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시간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시간을 바라보며 중요한 것을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다 여유있게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와 진리를 실천하는 자: 육체를 살리려는 자와 영혼을 살리려는 자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도 역시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이 대화의 핵심은 ‘성령으로 새로 남’입니다. 새로 나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이 구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빛으로 나아옵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악을 저지르는 자’와 ‘진리를 실천하는 자’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누가 악을 저지르는 자이고, 누가 진리를 실천하는 자일까요? 결국, 진리를 실천하는 자는 빛에 머물게 되고 악을 실천하는 자는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고양이 ‘준팔이’는 버려진 고양이 보호소에서 석 달 넘게 먹지도 않고 밖으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억지로 음식을 넣어도 토하고 뱉어냅니다. 몸무게는 발견될 당시의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주인에게 버려졌다는 마음의 병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살려는 의지가 없어서 자발적 거식증에 걸린 것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먹는 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이때 준팔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뮤지컬 배우 배다해 씨입니다.
“고양이가 밥을 안 먹을 정도면 자기가 죽겠다는 마음을 거의 먹은 상태랑 다름없거든요. 한 명은 널 버렸을지 몰라도 널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다해 씨는 준팔이를 처음 만났을 때 생각보다 더 말라있는 준팔이를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날수록 준팔이는 자신의 몸을 맡기기도 하고 손을 내밀기도 합니다. 몸이 약해서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지만 다해 씨가 와 있을 때는 편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렇게 지낸 1주일 뒤 준팔이는 스스로 다해 씨를 향해 먼저 다가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먹이는 거부합니다. 목소리를 통해 보지 못할 때도 준팔이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렇게 두 주일이 지나자 준팔이는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삼 개월 만에 처음으로 먹이를 먹게 됩니다. 더 감사한 것은 준팔이가 다른 고양이 친구들과 사람들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처: ‘주인 잃고 단식 중인 고양이, 준팔이’, 유튜브 채널, ‘SBS STORY’]
고양이 보호소에는 버려진 고양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다해 씨의 관심을 끈 것은 준팔이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배다해 씨가 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고양이는 준팔이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고양이들은 준팔이의 음식까지 뺏어 먹습니다. 그러나 준팔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사랑이 아니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랑을 찾으니 사랑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것이 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영혼도 살려고 하고 육체도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영혼은 사랑을 먹어야만 살고 육체는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만약 영혼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준팔이처럼 육체를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혹은 육체를 살리려고 하는 자는 하느님 사랑에 관심이 없습니다. 영혼은 하늘에서 온 것이고 육체는 땅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복합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안에는 이미 어떤 긴장이 깃들어 있으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 일종의 싸움이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실상 죄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며, 죄의 결과 중의 하나이자, 동시에 죄를 확증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영적 투쟁의 일부분이다.”(2516)
육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육체의 욕망이 생존 이상으로 높아지면 영혼의 생존에 신경 쓸 에너지까지 빼앗깁니다. 따라서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육의 생존에 치중하는 사람과 영혼의 생존에 치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영혼의 생존을 위해 사랑이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고 그것과 상관없이 육체의 생존에만 치중하는 사람은 어둠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 영혼이 바라는 사랑을 찾는 사람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심판에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행복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영원히 살고 행복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인 행복과 육체적인 생존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사랑이 갑니다. 사람은 40일 밥은 굶어도 사랑은 단 3일 굶어도 죽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서 사형수 윤수는 자신을 사랑해 준 유일한 유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는 게 지옥 같았는데…. 내…. 살고 싶어졌습니다.”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고 올라오는 물고기는 오징어밖에 없습니다. 생존도 중요하지만 빛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빛이 아니면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없어야 합니다. 육체를 살리느라 사랑을 찾는 것을 잊지 맙시다. 심지어 고양이도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리가 먹을 것, 누릴 것, 세상 것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며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판은 사랑을 바라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사람이 십자가 사랑으로 나아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보다 큰 사랑이 없고 이것보다 큰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악이란 육체의 행복에만 치중하며 영혼은 돌보지 않는 삶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조재형신부-
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사유하는 커피’가 있습니다. 제가 즐겨 읽는 지면입니다. 커피를 통해서 철학적인, 문학적인, 신학적인 주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3월 21일 지면에는 ‘커피에서는 부활이 무엇일까?’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의미를 헤아리지 않고 활용하다가 영영 본뜻에서 멀어진 단어들을 소개하였습니다. ‘마누라’는 조선 시대에는 임금을 이르는 극존칭어였다고 합니다.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에는 ‘왕, 왕대비, 세자, 세자빈’ 등 궁중의 높은 인물을 뜻하는 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표현이 되었지만 요즘 부부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족하(足下)’는 상대보다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었습니다. 폐하, 전하, 저하와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요즘은 형제재매의 자식을 부르는 ‘조카’가 되었습니다. ‘서방님’도 벼슬하지 못하고 책방에서 공부하는 사람에서 남편을 일컫다가 남편의 동생을 이르는 호칭으로 쓰임이 바뀌었습니다. 장인과 장모가 사위를 부르는 호칭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말은 시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부활((Resurrection of Christ)입니다. 부활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복권(Reinstate)과 사면(Clemency)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억울하게 벼슬에서 쫓겨났거나, 감옥에 갇혔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을 후대에 사면하거나, 직위를 복권하기도 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이 중세에 다시 등장하여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바뀌는 재생을 뜻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있습니다. 르네상스는 근대 서구사회의 사상과 철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패션과 문화, 예술, 건축에서 회상, 회고, 추억이라는 뜻의 복고(Retrospect)가 있습니다.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과거의 체제, 전통 등을 그리워하여 그것을 본뜨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감각을 현대와 접목하여 현대적 감성에 맞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보는 ‘부활(賦活)’은 공매도 부활, 비트코인 부활, 트럼프 부활과 같은 말로 사용됩니다. 그런 부활은 활력을 주고, 생기를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復活)’과는 한글 표기와 발음은 같지만 뜻은 다른 말입니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부활은 묵은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소생(蘇生)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선은 언제나 악을 이긴다.”는 이치를 말해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단순히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거듭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부활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은 과학과 이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부활은 체험과 삶의 영역입니다. 미사전례에서 사제는 ‘신앙의 신비여!’라고 경문을 읽습니다. 교우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라고 응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권능과 힘을 가지셨지만 오직 그 힘과 권능을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힘을 가졌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매를 맞았을 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진리가 사도들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임과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체제의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를 같은 것들 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이처럼,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 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피앗’의 응답이 구원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양손을 못에 내어주고 가슴을 열어 창을 받아들이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송영진신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6-21).”
1)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착하고, 죄 안 짓고,
순하고, 말을 잘 들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45).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자녀’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당신의 집으로 들어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마태 18,14).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구원받기를 포기하거나,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을 가리킵니다.
2) <외아들을 내주시어>
이 말씀의 표현만 보면,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고,
아들 예수님에게만 모든 짐을 떠맡기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내주신 일은 당신 자신을 내주신 일과 같습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아들들이 모두 집에 들어와서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뿐입니다.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떠났다가 뉘우치고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아들을 내버려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밖’에 있는 큰아들을 타이르기 위해서 간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분명히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기 전에도, 떠난 후에도,
작은아들을 타이르기 위해서 무척 애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작은아들을 찾아가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타이르고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은아들이 죄를 뉘우친 것은 단순히 ‘배고픔’ 때문만은 아니고,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모든 사람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애를 쓰신 일은,
사실상 아버지 하느님께서 애를 쓰신 일입니다.
3)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먼 고장으로 떠난 것은
방탕하게 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5,13).
분명히,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작은아들 자신이 떠났습니다.
그것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모습입니다.
큰아들의 경우, 방탕하게 살다가 온 작은아들에게 아버지가 벌을 내리기는커녕
잔치를 벌이는 것이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는데(루카 15,28),
분명히, 아버지가 큰아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큰아들 자신이 안 들어갔습니다.
그 모습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선택한) 모습입니다.
4)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말을 보면(루카 15,29-30),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아버지가 너무 쉽게 작은아들을 용서하고
잔치를 벌인 일 때문만은 아니고, 자기가 친구들과 즐기지도 못하고
종처럼 일만 한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처럼 방탕하게 살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는 불평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작은아들은 행동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고,
큰아들은 마음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작은아들만 죄를 지었다고 판단하겠지만,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행동으로 죄를 지었든지 마음으로 죄를 지었든지 간에
두 아들이 똑같은 죄인입니다(마태 5,28).
화를 내면서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큰아들의 모습은,
“빛을 미워하면서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 모습이고,
그 모습은 그의 내부에 ‘악’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이렇게 타이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1-32).”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말은,
아버지가 큰아들을 종처럼 부려먹은 것은 아니라는 것과
친구들과 세속적으로 즐기는 것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입니다.
(세속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영원한 행복을
비교한다면, 세속의 즐거움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라는 말에는,
만일에 큰아들이 끝까지 화를 내면서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면,
큰아들도 ‘죽은 아들(잃은 아들)’이 된다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라는 말은, 세속의 헛된 즐거움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라는 권고입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는다면,
자기가 화를 낸 것이 잘못이었음을 뉘우칠 것이고, 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5)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작은아들은 악을 저지르는 동안에는 ‘아버지의 집’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빛을 미워하면서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회개한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부터 했습니다(루카 15,18).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은,
진리를 실천하면서 빛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회개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갈 것입니다.
따라서 ‘빛을 향해서’(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일 자체가
‘구원의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 요한 3,16-21: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조욱현신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줄곧 그분의 마음을 상해 드렸는데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 그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귀중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이 헐벗고 나그네 되었을 때도 우리는 못 본 체했고, 무엇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 첫 번째 오심은 이미 지났고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 두 번째는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이 첫 번째 오심은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두 번째 오시기 전까지는 심판하시는 대신에 용서를 베푸시며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심판받을 필요가 없고, 믿지 않는 자들은 불신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판은 이미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판받을 사람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유혹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기도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은 이러하다. 그들은 어둠을 떠나 빛으로 달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빛이 자신에게 오는데도 빛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눈이 먼 것을 빛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원이나 멸망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21절)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행이다. 선은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선은 당연히 드러나며 그것을 기뻐한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나아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빛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선행하고, 단식하고 베풂으로써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바른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다. 여기서 올바른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며, 빛의 자녀로 영광의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즉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구원의 골자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 구절이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우리 구원의 시작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우리가 구원받는 조건은 믿음이라는 의미지요.
당신의 생명을 헐어 우리를 지으신 창조가 그랬던 것처럼, 구원 역시 희생의 사랑, 비우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창조와 마찬가지로 구원도 주님과 우리의 역동적인 상호 관계 안에서 완성되어 갑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만물을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시고 피조물은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처럼, 주님은 목숨을 바쳐 구원하시고 우리는 그분을 충실히 믿고 따름으로써 구원을 얻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불신과 심판은 전후 관계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엉켜있습니다. 은총으로 허락된 믿음의 기회 앞에서 완고히 믿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는 스스로 구원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과 다름없지요. 스스로를 어둠에 가두고 자기중심적인 오만을 고수하는 자체가 어둠과 죄악을 구원의 자리에 놓았다는 뜻입니다. 심판이 멸망을 부르는 게 아니라 불신 상태가 이미 심판받았음을 증거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1)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는 빛을 향합니다. 예수님이 곧 빛이시지요. 믿음은 우리를 빛 가운데에 머무르게 합니다. 비록 자기 허물과 삶의 고통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어도, 주님을 믿기에 희망할 수 있고, 그분 사랑을 알기에 그 자신도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합니다. 믿는 이는 믿음으로써 이미 구원 상태를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의 모습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여라.' 이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사도 5,20)
"감옥"은 어둠의 영역을, "이른 아침 성전"은 빛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기득권자들의 시기심으로 어둠에 갇힌 그들을 주님의 천사가 다시 빛으로 꺼내어 주지요.
그런데 권력에 의해 합법적으로 풀려난 상태가 아니라면 조용히 숨는 것이 후일을 도모하며 안전을 지키는 상식일 터인데 제자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공적인 장소로 되돌아가 말씀을 선포하지요. 빛을 선택하는 이에게 투옥이나 박해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빛 한가운데 서서 빛이신 분을 선포하는 이들로 인해 수석 사제들은 몹시 당황해합니다. 그들이 아는 "무식하고 평범한" 이들이 빛 안에서 그 자신이 빛이 되어 있음을 목도하는 자체가 적잖은 충격이니까요.
빛이 어둠을 동요시키고 있습니다. 이 동요가 구원으로 이어지려면, 그들이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며 진리에 귀를 막을 것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인해 진동하고 균열을 일으키는 내면을 직시하고, 빛이 스며들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모든 것의 시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출발점만 정확히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빛 안에 있습니다. 구원에 머무는 구원의 상태를 누리는 중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따뜻한 봄햇살을 받으며 산책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빛살처럼 쏟아지는 주님의 사랑을 믿고, 믿기에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때로는 아프고 힘겨워도 우리가 받는 사랑이 있어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이 빛이시고 진리이시니, 우리가 아무리 부족한 죄인이어도 그분 안에서는 우리가 충만하고 온전하답니다. 빛 안에서 빛이 되어 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김찬선신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구원을 받을 것인가, 심판을 받을 것인가?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지 오늘 우리는 요구받습니다.
둘 중의 어느 것을 선택할 거냐고 요구받으면
우리는 당연히 구원을 선택하지 심판을 선택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의 우리는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면 심판을 받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심판을 받았습니까?
개신교 신자들은 아주 당당히 구원을 받았다고 얘기하고,
어떤 때는 무례할 정도로 우리에게 구원받았는지 묻는데
우리도 그들처럼 구원받고 있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구원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구원은 받아야지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 안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안 받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당신이 오셨다고 얘기하시니
하느님이 구원을 주시는데도 우리가 안 받는 게 되는 거지요.
오늘 주님 말씀을 분석해보면 주님은 마치 우편배달부와 같습니다.
우편배달부가 편지나 소포를 가져오면 그것을 우리가 수령해야하는데
우리가 수취인거부를 하면 아무리 배달이 되어도 수령이 안 되는 거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외 없이 모두에게 구원을 분명히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배달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확실한 구원배달부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구원을 수취인거부를 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취인거부를 한다면 왜 할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첫째는 구원이 구원을 필요치 않은 경우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이 필요치 않고,
충분히 행복치 않더라도 이 세상의 성공을 꿈꾸는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실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심지어 신자들조차 하느님의 구원이 아닌 다른 구원,
세상에서의 구원, 세속적인 구원을 찾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구원을 받지 않고 자기가 얻으려는 경우입니다.
구원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얻는 거라는
그런 믿음과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은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원치도 찾지도 않겠지요.
사실 하느님의 구원이라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구원을 그저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심판을 받는 것에 대해 봐야 하는데
구원을 받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 거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을 선택하지 않음이 곧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을 선택하지 않음이 곧 심판을 선택하는 거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아무도 심판을 선택치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선택치 않는데 하느님께서 주시시기에
어쩔 수 없이 심판받는 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을 좋아서 선택치는 않지만 선택하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께서 심판치 않으시는데도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얘깁니다.
사랑의 충고를 미움의 꾸지람이라고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고
은총으로 주시는 고통을 벌이라고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인간 간의 다른 오해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하지만
구원과 심판의 오해는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함을 생각게 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요한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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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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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먼 고장으로 떠난 것은 방탕하게 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5,13).
분명히,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작은아들 자신이 떠났습니다.
그것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모습입니다.
큰아들의 경우, 방탕하게 살다가 온 작은아들에게 아버지가 벌을 내리기는커녕 잔치를 벌이는 것이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는데(루카 15,28),
분명히, 아버지가 큰아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큰아들 자신이 안 들어갔습니다.
그 모습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선택한) 모습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작은아들은 악을 저지르는 동안에는 ‘아버지의 집’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빛을 미워하면서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회개한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부터 했습니다(루카 15,18).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은, 진리를 실천하면서 빛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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