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7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2021년 4월 7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그 두 제자는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루가 24,13-35)
he took bread, said the blessing,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With tha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눈이 가리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까이에서 함께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눈이 가리어 알아보지 못할까요? 가려 있는 우리의 눈은 언제 열릴 수 있을까요? 집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는 절망하거나 실패하였을 때입니다. 엠마오로 걸어가는 제자들은 과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 주실 줄 알았던, 그래서 자기 생애를 내맡겼던 분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의 눈이 가려집니다. 그렇게 걷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무슨 일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믿고 따랐던 예수님, 말씀과 행동에는 힘이 있어 마치 모세를 보는 듯하였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켰듯이, 그분께서 로마 점령군에게서 구해 주시리라 믿었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을 함께 다스릴 줄 알았는데, 그만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수난과 영광에 대하여 들은 제자들은 지금까지 영광만 누리고자 하였던 자신의 욕망의 길과 죽음까지 내어 주시는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을 가리던 비늘이 떨어져 나갑니다.
성경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온 생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에 이르는 사랑, 이 고단하고 힘든 사랑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마음이 타오르고 눈이 열립니다.
과테말라에서 고통받는 아이들과 함께 사는 한 신부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냐면, ‘내가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으로 함께하고 일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 때예요.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랑이 고난받는 것인 줄 몰랐니? 고난 다음에 영광이 온다고!’ 힘겨움이 찾아올 때, 이 단순한 이치를 왜 자꾸만 잊게 될까요?”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이가 목청껏 울고 있습니다. 얼굴까지 새빨개지면서까지 말입니다. 이때 주변의 이목을 강렬하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 엄마는 서둘러 구석으로 가서 아기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그 뒤에 이 아기는 어떠했을까요?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이 지금 기분 좋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가 왜 울었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아이는 이런 표현을 한 것이 아닐까요?
“저 지금 굉장히 불편해요. 저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불편함이 사라지자, “저 너무 기분 좋아요.”라면서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불편함을 울음으로 외친 이 아기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선 잘한 것일까요? 잘못된 것일까요? 자신의 무력함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오히려 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이 아기처럼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편함, 어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언제까지 고백해야 할까요? 당연히 해결될 때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간절하게 기도로서 고백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해결되지 않았을 때 쉽게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불평불만으로 터뜨립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님께서 도움을 주셔도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자세는 끝까지 주님께 고백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두 제자는 슬픔에 젖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에 실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자, 더는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옆에 계셔도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할 것 없이 주님을 찾고 주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나의 청원이 들어줄 때만 알아볼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여전히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들이 매우 힘들다고 하지만, 더 어려운 시간을 겪은 곳은 종교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개신교 측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와서 개신교 쪽에서도 스스로 “자기들의 모습이 부끄럽다”라고 말합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사람을 살려야 하는 종교가 사람을 죽이는 종교처럼 비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비판이 더욱 커졌습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는 어머니에게 딸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당에 왜 나가요? 교회가 얼마나 부패했는데요?”
그러면서 어머니가 성당에 가지 않게 하려고 교회의 세속적인 모습, 상업적인 모습들을 계속 말하면서 열심히 비판했습니다. 한참을 듣던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 뭐 눈에는 X 밖에 안 뵌다더니, 넌 어째서 그런 것밖에 못 보니? 난 예수님 한 분만 보여서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더라.”
교회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망스러운 모습이 교회 전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서 교회 전부를 봤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판을 하기 전에, 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약의 주제는 나의 십자가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음에도 믿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며 ‘성경’을 뜨겁게 설명해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어떤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바로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설명해 주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대로 국가를 재건해 줄 다윗과 같은 메시아 상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이 갈비뼈를 내어놓는 것이나, 아벨이 피를 흘려야 하는 이유나, 바위의 옆구리가 뚫려야 하는 것, 구리뱀이 장대에 들려야 하는 것 등의 내용이 메시아의 수난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성경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자신들 숙소에 초대합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봅니다. 이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교회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머묾’은 신약성경의 주제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셨듯이, 당신은 교회를 파견하시며 교회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머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낯선 예수님을 자신들의 집에 맞아들였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아 교회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머무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이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약의 주제가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한다면, 신약의 주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나의 죽음’입니다. 이 방향에서 벗어난 해석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점점 벗어나게 만듭니다.
영화 ‘미나리’(2021)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춰 읽어야 하는지 상징적인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미나리는 한 한국 가정이 미국에 정착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미나리가 어디에서나 잘 정착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이 가정은 아직 미국에 정착하기 어려워하며 큰 위기를 겪습니다. 이 힘든 상황에서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미국으로 초청합니다.
아이들은 좀처럼 할머니를 할머니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들은 할머니를 가뜩이나 힘든 자신의 집에 민폐를 끼치는 사람 정도로만 인식합니다. 그래서 손자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오줌을 물이라고 속여 먹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가진 재산을 다 딸에게 주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문화적 차이로 할머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막내 데이빗이 다쳤을 때는 잘 치료해주고 잠자기 무서울 때는 안아줍니다.
할머니가 병에 걸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피와 같은 1년 농사를 태워 버렸을 때, 아이들은 도망치고 싶은 할머니를 떠나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그리스도를 떠나지 못하게 막는 엠마오의 제자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보려 한다면 구약의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입니다. 모든 내용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신약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구약성경이 손자 데이빗의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신약성경은 할머니의 처지에서 보아야 합니다. 할머니는 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1년 농사를 다 태워버리는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함께 머물러야 할 가족의 반대 방향으로 걷습니다. 그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 머물 힘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손주들이 할머니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한 가족에 머물 힘은 내가 그 가정을 위해 공헌한 것보다 ‘자비’에 있습니다. 물론 할머니가 먼저 그 가족에게 자비를 베풀었기에 가족도 할머니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할머니라는 것만으로도 그 가족에 머물 자격이 있습니다.
신약의 목적이 교회에 머물게 함인데 교회에 머물려면 내가 교회에 공헌한 것보다 바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자비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줄 모를 때는 그 자비도 믿지 못합니다. 신약의 새로운 계약이란 이 자비의 계약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대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를 교회에 머물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어떠한 시선으로 읽어야 하는지 일깨워줍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묵상해도 이 초점을 잃으면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처럼 구약에서 메시아의 수난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오줌을 마시라고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용서가 있는 교회에 머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할까요? 나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지 않으셨으면 그 자비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웃을 위해 그리스도처럼 빵이 되지 못할 때 새로운 계약상 그 사람은 진정으로 교회에 머물 힘을 잃게 됩니다. 성체 성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은 나도 그런 사랑을 베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모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다시 그리스도 공동체에 진정으로 머물기 위해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하고 ‘신약성경에서는 나도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코로나19 이후의 국제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각 나라가 봉쇄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코로나19 초기에 대부분의 나라는 봉쇄조치를 취했습니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봉쇄조치는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데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백신의 개발이 늦어지고, 코로나19의 전파가 더욱 확산되었다면 봉쇄조치는 더 길어졌을 겁니다. 미국의 주도로 코로나19를 잠재운다면 제2의 ‘PAX AMERICANA'가 시작될 수 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제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중국의 주도로 코로나19를 잠재운다면 ’PAX CINICA'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중국은 코로나19 초기에는 혼란이 있었지만 코로나19를 일찍 종식시켰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중국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서는 협력(Cooperation)하고, 무역에 대해서는 경쟁(Competition)하고, 인권과 가치에 대해서는 분쟁(Confliction)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중국도 코로나19를 종식시키지 못한다면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대처한 나라들과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PAX UNIVERSALIS'라고 합니다.
강한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으로 국제사회의 질서를 유지했던 적이 있습니다. 역사는 당시를 ‘PAX ROMANA'라고 부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the roads lead to Rome.)’라는 말이 있습니다. 2,000년 전에 로마는 예술, 문화, 건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로마는 종교적인 통합을 이루었고, 교회는 로마의 제도와 법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로마가 이루어놓은 길을 따라서 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정치와 종교를 통합한 로마는 인류의 문명을 한 차원 높일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로마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위대한 업적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끈질긴 노력 끝에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사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뉴욕에 오면 뉴욕의 법과 질서를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전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PAX CHRISTIANA'입니다. 삶의 중심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돈도 없었습니다. 힘도 없었습니다. 문화적인 역량도 없었습니다. 조직과 제도도 없었습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있었습니다. 그것이 박해를 이겨내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힘과 세상의 가치가 교회에 들어오면 언제나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웅장하게 건축된 성전은 교회를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완벽한 제도와 교리가 교회를 지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헌신했던 신앙인들이 교회의 주춧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우리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돈이 없어도, 힘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우리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성가 ‘엠마우스’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주님의 이집에 모셔 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이야기마저 하시며
우리와 한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밤바람 차갑고 문풍지 떠나 주님의 음성이 호롱불 되고
주님의 손길은 따스하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영근신부-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무너졌다고 여긴 까닭에 절망하고 슬퍼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깊어져야 하고, 변화되어야 하고, 정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눈이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그리고 이는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렉시오 디비나)의 세 과정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지성을 동반하여 깨달아 알아듣고,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실현함으로서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는 일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아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송영진신부-
엠마오로 가는 길은 ‘실망’과 ‘포기’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믿음’과 ‘희망’과 ‘기쁨’의 길입니다.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두 제자는 예수님 덕분에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9-24)”
여기서 “기대하였습니다.” 라는 말은,
“기대했는데 실망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믿었고,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허망하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이신 분”이
십자가형을 당한 일 자체도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당하는 모습’이 너무 무기력했다는 점도 크게 실망하게 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십자가 수난 과정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하느님의 힘’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는 말은,
두 제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두 제자는 로마제국이 예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을 보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희망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일이 전개되었습니다.
두 제자의 ‘실망’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1)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긴 했지만, 메시아이신 분이
무기력하게 죽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실망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진짜로 메시아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십자가 수난을 당할 때, 아니면 수난을 당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박해자들을 제압하셨어야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실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두 제자는 자신들이 직접 체험한 ‘예수님의 힘’을 ‘하느님의 힘’으로 믿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힘’으로 로마제국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수난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서 실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4)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체험한 ‘예수님의 힘’이
‘하느님의 힘’은 아니었나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실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든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가,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문에
크게 실망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갔습니다.>
주일 아침에 있었던 일도 두 제자에게는 기대와 실망이 반복된 일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여자들이 전하는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께서 정말로
부활하셨을까?” 라고 기대를 했는데, 무덤에 직접 가서 확인한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시 실망했습니다.
(두 제자는 부활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
실망감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는데(루카 24,27),
아마도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을 바치신 일이라고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전해 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진실이라는 것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두 제자는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들의 ‘실망과 포기’가 ‘새로운 믿음과 희망’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냅니다.
두 제자가 완전히 변화된 때는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29-31).”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3-35).”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마음이 열렸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양들을 먹이시는 목자이신 분’, ‘생명의 주님이신 분’의 모습을 보았고,
그 모습에서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두 제자가 당신을 알아보자마자 사라지셨을까?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점은 두 제자가 전혀 놀라지 않았고,
기쁨에 가득 차서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확신한다면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은,
새로운 믿음과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서 신앙여정을 다시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참된 신앙인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복음: 루카 24,13-35: 엠마오의 제자들
-조욱현신부-
두 제자가 길을 가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유대인들의 불의한 짓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모르고 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함께 걸으시면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신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절) 제자들은 눈으로 그분을 보았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스승님께서 그들과 함께 길을 가신다. 그분이 바로 길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걷고 있지 못했다. 그분은 그들이 길을 벗어나 헤매고 있음을 아셨다.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18절) 그리고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좌절과 상처를 감추지 않고 곧장 의사이신 그분께 모두 털어놓았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그들의 모든 바람을 수포가 되게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려고 성경을 풀이해 주신다. 그들이 실망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미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풀이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신 다음에야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아직 빛을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다.
떼어진 빵 조각이 눈을 열어주는 열쇠다. 엠마오의 식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인 동시에 성사로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교회의 성찬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이 담긴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사라지신 것은 이제부터 말씀과 성찬 안에서 믿음으로 당신을 모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 빵은 우리가 매일 먹는 빵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된 빵이다. 두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게 한 것도 그 빵이었다.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그분께서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성체성사로 그분을 알아봄으로써 하나가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오늘 복음 역시, 이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다른 제자들과 나누기 위해 얼마나 서둘렀는가를 볼 수 있다. 즉 예루살렘까지 ‘30리 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 대한 체험을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때 완전히 자기의 체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 31)
-한상우신부-
부활하신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히려
단순하고
소박한 우리
일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난다.
거꾸로
뒤집어 보면
우리 일상은
그야말로
놀라운
신비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차고 넘치는
주님의
사랑이다.
내어주시는
주님 사랑이
바로
부활이다.
사랑에도
쉼이 필요하다.
멈추었다
가는 쉼도
길을 가는
여정안에
참으로
소중하다.
부활은
특별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기에
특별한 것이다.
우리의
보는 눈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길에서 주님을
다시 만난다.
나누시는
말씀과
나누시는
빵 안에
부활이 있다.
말씀과 빵의
따뜻한
초대이다.
따뜻한 초대가
따뜻한
부활이 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사랑은
엠마오의
저녁처럼
주님과 함께
편히 쉬는 것이다.
동행과 휴식
사이에 다시
타오르는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다.
눈이 열리는
것이 부활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통해 미사의 흐름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5)
예수님의 사랑의 제사인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마음을 모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미사는 주님 현존의 잔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6-17)
예루살렘에서 겪은 실패 체험으로 낙담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질문을 통해 그들 마음의 고통을 끌어내어 주십니다. 마치 미사가 시작되면 구원의 신비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 참회의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 앞에 나서기 죄스럽고 부끄러운 모습, 죄악과 걱정, 근심을 그분께 내보이며 자비를 청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루카 24,19)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미사 때 우리가 바치는 신앙 고백과는 달리 그들의 신앙 고백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난과 죽음의 희생을 잊은 자기본위적인 기대였기에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믿고 희망한 대로의 결과를 손에 쥐지 못했지요. 그래서 침통하고 낙담했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이는 말씀의 전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독서자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내용이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요.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듭니다. 그들이 혼자서 더 멀리 가시려는 듯 보이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거처와 식탁에 초대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열리고 더 관대해진 듯 하지요. 미사의 봉헌 예식에서 우리는 은총을 얻은 바를 주님께 정성껏 바치고 또 가난한 이웃과 기꺼이 나눕니다. 손을 내미는 마음이 곧 봉헌이지요.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0-31)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빵은 그분께서 내어 주시는 당신의 몸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을 모시면서 그분의 현존을 누리지요.
"그러나 그분께서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1)
예수님께서 사라지십니다. 하지만 두 제자의 심장과 영혼, 존재 안에 깊이 각인되시지요. 미사 때 성체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심으로써 당신의 형체는 사라지지만, 우리 안에 녹아들고 흡수되어 우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영한 성체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길이 남아 우리가 그분과 하나되고, 종래에는 그분이 되게 해 줍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엠마오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빵을 받은 뒤에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말씀의 식탁과 성체성사는 각각 그 자체로도 완전하지만,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두 식탁에 온전히 참여하는 이들의 지혜와 통찰을 강화하여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5)
이제 파견과 선포의 때입니다. 예루살렘이 두렵고 깨진 꿈에 실망해서 고향을 향하던 이들이 가던 길을 돌이켜 수난의 도성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에게 선포하지요.
이는 미사를 마치며 세상으로 파견되는 우리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축 처진 어깨와 복잡한 마음, 무거운 발걸음이나마 주님을 향해 말씀과 성찬에 식탁에 참여하는 이는 은총으로 변모되어 그 사랑을 선포하는 이가 됩니다. 오늘 엠마오 제자들이 체험했듯, 미사는 곧 파견의 잔치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파견받은 이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구걸하는 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물질적인 희사를 바랐지만 그들이 가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파견된 이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지요. 그리고 이 나눔은 그에게 당장의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건강을 되돌려 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한때의 두려움과 무지와 의혹을 딛고, 주님 이름에 의지해 주님의 능력을 전하는 진정한 사도로 거듭납니다. 미사를 마치고 파견되는 우리가 비록 가진 것 없고 능력 또한 미소해도, 우리가 가진 오직 하나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무한한 능력을 믿으며 담대히 나아갈 때 반드시 그분께서 일하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쩌면 우리의 영적 여정 안에서 엠마오 제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와 동행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하고 역동적인 깨달음의 여정을 충만히 걸으시길 기원합니다. "무슨 일이냐?" 하시는 예수님께 눈과 귀,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마음을 쏟아놓읍시다. 그분께서 격려하시고 도와주시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도 역시,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같은 영의 같은 운명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가 한 일은 기시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평행 이론과도 같은 느낌을 줍니다.
기시감이란 전에 본 것을 다시 보는듯한 느낌을 말하는 것이고,
평행 이론이란 시간과 장소가 다른 두 사람 사이에
비슷한 일이 벌어지거나 그런 운명을 말하는 거지요.
이를테면 미국의 두 대통령 에이브라함과 케네디 대통령은
100년의 시차를 두고 대통령이 되고 암살당하는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한 것이 많은 운명이었다는 거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한 일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일과 거의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던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지요.
두 분 다 당사자들이 청하지도 않는데 환자와 불구자를 고쳐주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평행 이론처럼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운명이고
같은 일을 하게끔 되어있었기에 그리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아니면 베드로가 한 것은 스승이 하신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한 거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만일 그런 것이라면 베드로는 어쩌면 아주 무모한 것을 따라 한 것입니다.
따라 할 것이 따로 있지 어찌 병자를 고쳐주는 일을 따라 하는 겁니까?
고쳐주겠다고 했다가 못 고쳐줄 수도 있는데
아주 자신 있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청하지도 않은 사람을 고쳐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주님과 같은 운명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같이하고, 가신 길을 같이 갑니다.
같은 운명이기를 거부하여 잠시 주님을 배반한 적도 있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배반한 것을 꼬집어
세 번 물으시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 양 떼를 돌보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이미 그렇게 하기로 선택을 한 대로 한 것일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의 선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선택한다고 제가 주님처럼 병자를 고쳐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주님처럼 사랑하겠다거나
그래서 주님처럼 수난을 당하거나 죽는 그런 겁니다.
그러나 부활의 힘이나 치유의 능력은 선택이 아니라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셔야지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같이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파견하실 때
주신 것이고,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을 받으면서 받은 능력일 것입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는
말처럼 베드로는 실로 주님 외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소유할 때 주님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주님의 모든 것을 따라 하게 되는 것이며,
주님을 소유하기 위해 다른 것은 하나도 소유하지 않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도 이것을 묵상하고
스승 엘리야의 영을 받은 엘리사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베드로처럼,
주님의 영을 받고 주님을 소유한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그 두 제자는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루가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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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수난과 영광에 대하여 들은 제자들은 지금까지 영광만 누리고자 하였던 자신의 욕망의 길과 죽음까지 내어 주시는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을 가리던 비늘이 떨어져 나갑니다.
성경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온 생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에 이르는 사랑, 이 고단하고 힘든 사랑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마음이 타오르고 눈이 열립니다.
. ‘너! 사랑이 고난받는 것인 줄 몰랐니? 고난 다음에 영광이 온다고!’ 힘겨움이 찾아올 때, 이 단순한 이치를 왜 자꾸만 잊게 될까요?”
-서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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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은,
새로운 믿음과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서 신앙여정을 다시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참된 신앙인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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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시는 말씀과
나누시는 빵 안에 부활이 있다.
눈이 열리는 것이 부활이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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