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31일 성주간 수요일
2021년 3월 31일 성주간 수요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14-25)
"Surely it is not I, L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저는 교회의 사람입니다.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강의하고 그 복음 말씀에 젖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의문이 듭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나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과 또 그분의 말씀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더 드러내고 유명해지고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나의 앞에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한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내가 너무 나대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고민과 질문은 나태하고 오만하였던 저의 정신을 맑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언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 예언이 저에게는 미래의 일이 아닌 이미 행한 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자신의 것을 채웠던 사람은 유다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처럼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그런 저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어쩌면 복음을 묵상하며 쓰고 있는 이 글도 예수님을 팔아 내 배를 채우려고 하는 배반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우리는 정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을 버릴 때, 핑계를 내려놓고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되새길 때 우리의 실수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어른들이 길에서 다투는 모습을 종종 봤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워낙 투철한 신고 정신과 피할 수 없는 스마트폰에 의한 촬영으로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싸울 수 없는 환경이 되었지요. 하지만 예전에는 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꼭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말입니다. 당연히 누구인지 모릅니다.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닐까요?
알아보지 못하기에 화가 더 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제가 누군지 알아요?”라고 묻는다면 어떨까요? 아마 기가 막힐 것입니다. 당연한 질문을 하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자녀는 부모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나를 잘 알고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하는 질문입니다. 믿음 없는 상태, 그래서 싸움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자신에 대해 계속해서 말합니다. 지금 얼마나 힘든지, 너무 어려워서 당연히 도움을 줘야 하지 않냐고 말합니다. 마치 “제가 누군지 알아요?”라고 묻는 것만 같습니다. 바로 믿음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주님과의 관계가 호의적일 수가 없습니다.
무교절 첫날은 축제일 전날 저녁, 예수님과 제자들은 파스카 축제를 지냅니다. 축제 음식을 차릴 집도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기꺼이 고통을 당하려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려고 그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시지요. 믿음 없는 유다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혼란스러워하자, 예수님께서는 그가 유다임을 밝히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넘긴 진짜 배반자는 악마일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이 아니라 ‘스승님’이라고 부름으로써 믿음이 없었음을 보여주면서 스스로 단죄한 셈이 되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 유다도 배반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과연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 주님과 친밀한 관계 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는 관계를 만들고 있을까요?
내일부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게 되는 성삼일을 보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누군가가 냄새나는 쓰레기를 줬습니다. 이 쓰레기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보관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미련 없이 버릴 것입니다.
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간직할수록 내게서 냄새가 진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 삶 안에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버리지 못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들과의 갈등도 있고, 너무 많은 욕심과 이기심 역시 나를 힘들게 합니다. 미움과 분노를 하고 있을 때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3월의 마지막인 오늘, 내가 버려야 할 것을 떠올리면서 곧 있을 예수님의 부활을 잘 맞이했으면 합니다.

집착이 일어나는 근원적 원인: 하느님 위에 서는 맛
-전삼용신부-
가리옷 유다는 상처를 받고 폭풍우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만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방법이 은화 서른 냥이었습니다. 그는 상처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많이 받아 고통스러운 상태라 더는 고통스럽지 않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상처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트남 출신 승려 틱낫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래전 나는 폐에서 피가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나는 수시로 피를 뱉어야만 했다. 지금 숨을 쉬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폐가 세균에 감염되었던 때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쉬는 매번의 숨마다 너무 맛있고, 너무 좋다.”
폐에 바이러스가 감염되었을 폭풍과 같은 때를 두려워하여 지금 그것으로부터 피하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 사람도 있겠고, 그 상처를 이용해 지금의 빗속에서도 기분 좋게 춤을 출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의 행복은 상처를 주님께서 필요해서 주셨다고 소화를 한 사람과 그것을 소화하지 못해 아직도 체해 있는 사람과의 차이에서 생깁니다. 하느님을 좋은 분으로 믿으면 옛 상처가 소화되고 지금의 빗속에서 춤을 출 수 있지만, 하느님을 나쁜 분으로 여기면 폭풍 속에서 살려고만 버팁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것이 전부라고 그것에만 집착하고 매달리게 됩니다. 가리옷 유다에게는 그것이 은전 삼십 냥이었습니다.
어떤 스승과 제자가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묵고 갈 집을 발견하지 못하던 찰나에 한 허름한 오두막을 발견합니다. 둘은 그 집 주인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부부와 자녀들이 쉴 공간도 부족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쉴 곳을 내어주었습니다. 스승은 가장에게 물었습니다.
“이 황량한 들판에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십니까?”
“예, 저희에게는 여읜 암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젖을 짜서 우유를 마시기도 하고 치즈를 만들어 장에 가서 팔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 암소 덕분으로 겨우겨우 연명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둘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잠시 가다가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암소를 절벽에서 떨어뜨려라.”
제자는 놀랐습니다. 그러나 항상 스승에서 순종하던 착한 제자이기에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몇 년 뒤 제자 혼자 다시 그 길을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그 집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허름하던 집은 없고 좋은 집이 지어져 있었으며 화단에 꽃과 나무들이 심겨있었습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이 이사 온 것으로 여기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가족이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묻자 가장이 설명했습니다.
“네, 두 분이 떠나시던 날 아침 저희 암소가 그만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살길이 막막한 저희는 죽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돌밭에 약초를 뿌렸는데 그것이 잘 된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여 밭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의외로 농사도 잘 되어 이렇게 잘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암소가 죽은 것은 저희에게 큰 복이 되었습니다.”
[출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유튜브 채널, ‘책읽는 다락방 J’]
지푸라기를 잡고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물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어서면 허리밖에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폭풍처럼 여겨지는 근저에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심겨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있으면 여읜 암소 한 마리에 집착합니다. 폭풍 속에서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가리옷 유다에게는 은전 삼십 냥입니다. 폭풍우 속에서 그것을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는 왜 하느님을 좋은 분으로, 누구는 무자비한 분으로 여기게 되는 것일까요? 이지선 같은 자매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얼굴과 몸에 큰 상처로 살면서도 어떻게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을 좋은 분으로 여기고 싶은 마음 안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사실 폭풍 속에서 사는 이유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비판하며 하느님이 된, 아니 하느님을 넘어선 자신을 즐기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리옷 유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을 비판하며 높아지려는 나의 교만을 보아야 하고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믿고 행복하려고 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러면 주님께서 은총을 주십니다. 행복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누가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대부분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는 맛에 길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행복해지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할 것을 찾을 것입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이라 믿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감사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십니다. 그 눈으로 지금이 폭풍우가 아니라 그저 비가 내리는 것일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이 나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주님이 좋으신 분으로 믿고자 원하기만 한다면 이제 빗속에서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만이 은전 삼십 냥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집착은 두려움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폭풍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그저 빗속에서 어떻게 춤출 것인가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춤의 맛을 더해 주기 위해 하늘에서 물을 뿌려주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1910년 8월 22일은 조선은 일본에 의해서 ‘합방’되었습니다. 어느덧 111년이 지났습니다. ‘한일합방, 경술국치’라고 이야기합니다. 부모님은 일제 강점기를 사셨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국제적인 흐름을 읽지 못하고, 근대화의 길을 걷지 못했던 조선의 정부의 책임입니다.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에 대한 의존입니다. 자주의 길을 걷지 못하는 나라는 약소국의 비애를 겪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침략입니다. 이미 일본은 자국의 힘이 강해지면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임진왜란을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명치유신을 통해서 힘을 키운 일본은 조선을 향해서 침략의 야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36년 동안 일제 강점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우리민족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통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였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돌아보면서 ‘친일파(親日派)’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친일파는 일본에 의지해서 일신의 양명을 도모하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친일파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동족을 괴롭히고, 팔아먹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친일파는 ‘내선일체’라는 말을 입에 달며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친일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었습니다. 친(親)은 부친(父親), 모친(母親), 양친(養親), 선친(先親)과 같이 부모에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친일파는 일본을 부모로 섬기면서 사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그는 논문에서 조선의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계약서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직도 생존해 계신 위안부 어르신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학술적으로 근거가 없는 허위주장입니다. 저명한 학자들은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규탄성명을 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일부 교수들은 램지어 교수의 논문을 지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지 7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친일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고통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면 주님께서 지고 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입니다. 유다는 바리사이파를 부모처럼 생각했습니다. 대사제를 부모처럼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부모처럼 생각했습니다. 친바리사이파, 친대사제파, 친로마파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고 하셨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숨어버린 제자들입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죽는 것보다 필요하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던 대사제 가야파입니다. 무고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던 빌라도입니다. 시류에 편승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파스카의 성삼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삼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의 몸가짐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우리를 악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비우는 무소유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창자에서 느끼는 무기력을 침묵의 은총으로 받아들임을 통해 새로운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래전 회의 참석차 로마에 머물 때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엄청난 추모객들이 거의 로마를 침입하다시피 했었는데, 수많은 인파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교황님의 동포인 폴란드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큰 그룹을 지어 다니면서 외치던 구호가 있었는데 “Subito Santo!”였습니다. 우리 말로 바꾸자면 “지금 당장 성인품에 올립시다!”였습니다.
지금 현존하는 우리와 동시대 인물 가운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이상으로 만민으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듬뿍 받고 계시는 분, 돌아가시면 아마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인품에 오르실 분이 있으니,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연구하고 또 연구할 때마다 오늘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분 역시 젊은 시절 좌충우돌하고 방황하던 흑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르골료 신부는 38세의 나이에 예수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관구장으로 취임합니다. 젊은 혈기에 얼마나 잘해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경험과 연륜이 부족했던 베르골료 신부는 자신과 철저하게 다른 형제들을 아우르며 함께 걸어가는 과정에서 미성숙이 드러났습니다.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리더십으로 인해 관구내 형제들과의 관계 안에서 깊은 상처를 주고 받았는데, 그러한 갈등은 관구장 퇴임 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습니다.
마침내 베르골료 신부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관구관과 멀리 떨어진 코르도바란 곳으로 이른바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1990년~1992년 만 2년간 그는 협소하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머물러야 했는데, 거기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고백성사와 영적지도, 기도와 독서 뿐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베르골료 신부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예수회 잡지 치빌타 카톨리카와 가진 대담에서 자신의 흑역사를 있는 그대로 고백한 것입니다.
“코르도바에서 저는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거기서 저는 많이 기도했고, 독서하며 글을 상당히 썼으며 저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저의 권위적이고 신속한 결정 방식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성찰했습니다.”
당시 베르골료 신부가 혹독한 나날을 보냈었는데, 그러나 반대로 그가 얼마나 은혜로운 체험을 했었는지는, 다음의 회고를 통해서 잘 알수 있습니다.
“유배의 단절이 부과한 고통스런 고독과 ‘창자에서 느끼는 무기력’을 ‘침묵의 은총’으로서 받아들임을 통해 저는 새로운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박병관 신부, 신학전망, 2020년 봄호 참조)
이런 밑바닥 체험을 절절히 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셨기에, 만민 앞에서 겸허하고 솔직하게 고백하실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죄인입니다. 주님으로 부터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오늘도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의 불행한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생각할수록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사실 스승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회개하기를, 돌아서기를 기다렸습니다.
최측근 제자들에게도 저 녀석이 배신을 꿈꾸고 있다고 정보를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철저히 함구하셨으면, 제자들은 다들 근심하며 저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오 복음 26장 22절)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 존재이기에 누구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생각과는 전혀 반대의 엉뚱한 사고를 칠 가능성도 있습니다.유다처럼 주님을 배신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진리 한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동시에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슴치며 돌아서는 그 자리에 늘 주님께서 환한 얼굴로 두팔 벌리고 계십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은전 30냥에 팔려 배신당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배신자에게 마지막까지 인정을 베푸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유다야, 네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마지막까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묻지만, 그는 “주님”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가 올리브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하고 여전히 그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사랑을 끝까지 외면하고 맙니다. 그는 뒤늦게 후회는 했지만, 결국 자책과 죄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그것은 단순히 은전 30냥에 대한 탐욕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이 먼저 유다를 배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유다가 바라고 원했던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먼저 유다의 이상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그릇된 관념, 곧 선입감과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고집한 까닭입니다. 완고함이란 이처럼 무섭습니다. 곧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관념을 믿고 섬긴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파괴시키는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진정한 혁명가는 자신이 먼저 혁명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혁명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을 쫒는 자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24)
이 말씀은 비단 유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유다처럼,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을 배신하는 줄을 알면서도 악에 조정당하고 있고, 오늘도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건져주십시오.”라고 자비를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주님!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게 하소서.
생각을 움켜잡기보다, 생각에 붙잡히기보다, 생각을 바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조정 당하게 하소서.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마태: 26,14-25: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조욱현신부-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없애려 하는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15절) 하자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주었고 그때부터 유다는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유다는 바로 최후의 만찬 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 혼자 계실 때 그 일을 했다. 진리의 말씀이 배반당하는 시간은 그분 곁에 충실한 지지자들이 거의 없는 바로 그때다. “무교절 첫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17절) 제자들은 모여서 파스카 만찬을 나눌만한 집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세속적인 재산을 모두 포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개”라는 사람을 찾아가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18절) 하며 축제를 준비하게 하신다. 그 아무개는 주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인 첫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우리 자신도 이제는 주님을 위해 손님방을 마련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셔서 파스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만찬 전에 그분은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하시며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이 말씀 때문에 나머지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유다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제자들은 자신에 관하여 묻고 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2절) 이 근심을 없애주시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3절)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근심에서 구해 주고자 결정하셨을 때, 유다의 정체를 밝히신다. 유다는 시간을 주었지만 변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4절) 유다는 악마의 도구로 쓰이고 말았다. 이 불행은 유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넘겨지신 것은 악마 때문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데 도구가 된 자들도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25절) 하고 묻는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라고 했고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한다. 주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을 배반한 정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25절)고 하시며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으로 유다를 책망하신다. 이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 앞에서 빛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리는 말이다.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그분을 따르고 있는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마태 26, 21)
-한상우신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성주간이다.
삶의 기쁨은
구원의
기쁨으로
나가야한다.
옛모습이
죽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다.
가장 귀한 것은
소중한 관계이다.
소중한 관계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관계이다.
소중한 관계는
사고 팔 수 있는
상품매매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맺는
하느님과의
관계또한
우리 힘만으로
깊어질 수 없다.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모르고 사는
정반대의
우리들
삶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이다.
이 만남의
여정또한
수난과 부활의
여정을 걸어간다.
매순간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부활은
있을 수 없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의
이름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자아정립이
필요한
십자가의
여정이다.
십자가의
참된 여정이란
십자가를
팔아넘기는
여정이 아니라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
함께 죽는
사랑의 여정이다.
참된 사랑은
이기심을
내려놓는
기도에서
시작한다.
착한 척하는
가짜
기도가 아닌
살아있는
나눔의 참된
기도가
십자가이다.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고
움직임보다
멈춤이
더 중요하듯
이 성주간은
우리자아가
진실로 죽는
십자가의
참된 체험이길
기도드린다.
십자가의
죽음이
가장 진실된
하느님
체험임을
믿고 따른다.
참된 변화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죄인인 우리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마태 26,2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을 던지십니다. 행여 농담으로 들을까 싶으신지 "진실로"라고 못을 박으셨지요.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26)
이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스승께 여쭙니다. 유다를 제외하고는, 자기 속을 샅샅이 살펴봐도 그런 생각을 떠올린 적이 없으니, 남들도 자기와 같을 거라 여겼을 겁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분과 누린 행복한 만찬이 갑자기 의혹과 두려움으로 요동칩니다. 이때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소리를 맞추어 짐짓 모르는 척, 같은 질문을 던지지요.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를 들려 줍니다.
"그분께서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이사 50,4)
주님의 종은 주님의 뜻을 압니다. 그분께서 몸소 일깨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침마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밤새 정화되고 비워져 다시 새로워진 마음과 영혼을 가리킵니다.
매번 새로워진 존재의 귀에 주님께서 변함없이, 반복해서, 인내로이, 충실하게 당신의 뜻을 속삭이십니다. 주님의 종은 이를 듣고 깨우쳐 그 길로 나아가지요. 그런데 안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현실인지 오늘 예수님을 통해 느낍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25)
예수님은 다 아시면서도 유다를 열두 제자로 포용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에게 친절하셨고 정성을 다하셨지요. 자기 욕망과 그릇된 선택으로 방향타를 놓쳐버린 유다를 무한히 연민하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앎이 감정을 우선하지도, 사랑을 약화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마태 26,24)
이것이 예수님의 신념입니다. 당신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셨고, 그 아버지의 뜻은 성경에 이미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분은 악역일지라도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이에게 실망하지 않으셨고, 분노나 미움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셨지요. 이 풍진 세상에서 오만 부류의 사람들과 얽혀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염두에 두고 청해야 할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이사 50,5)
귀가 열리면 눈과 마음도 열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게 됩니다. 거역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지요. 아니, 거역할 수 없고 물러설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경청하는 이의 존재에 깊숙히 스며들어 자신을 사로잡으신 분과 하나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의 앎은 단죄가 아니라 사랑을 부릅니다. 예수님께 앎과 사랑은 하나지요. 그래서 그분은 부족하고 죄인이면서 염치까지 없는 우리를 다 아시면서도 사랑을 쏟아 주십니다. 이 성주간,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며 몸과 마음을 정화해 나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앎과 사랑이야말로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덧붙여, 주님과의 일치로 나아가는 우리를 더욱 단련시키고자 유다처럼 가시도 되어 주고 걸림돌도 되어 주는 이들 너머로 주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는 관대한 사랑 또한 청합시다. 저마다 무겁고 버거운 실존을 지고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연민이 필요한 형제요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할 자 누구인가?"(이사 50,9)
오늘은 이 말씀을 꼭 붙잡고 담대히 주님과 함께 나아가시길 축원합니다.

말씀 나누기 - 성주간 수요일-제자의 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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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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