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27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3. 27. 06:43

2021년 3월 27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
요한 11,45-56)

 

“You know nothing,
nor do you consider that it is better for you
that one man should die instead of the people,
so that the whole nation may not peris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세상을 보고 있자면, 분노가 솟구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여 정의와 공정이라는 필수적 가치를 팽개쳐 버립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 거짓으로 일관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사회는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작은 희생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기며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이천 년 전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표징과 사랑은 보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에만 몰두하며 희생양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힘으로, 교묘한 술책과 모함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오늘 복음 내용은 사순 시기의 마지막을 보내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 온 우리 자신에게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만은 관대합니다. 하느님의 가치와 사랑을 외면할 때도 많았습니다.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해 주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아주 샅샅이 살피면서도 이기심으로 말미암은 나의 행동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방종하였고 게을렀습니다. 잘못을 숨기고 실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다른 이들을 탓하면서 핑계를 대었습니다.
복음을 읽으며 분노하였고 세상을 보며 분노하였으니, 이제 스스로를 보며 분노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더 나은 나로, 더 나은 사회로, 더 나은 신앙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해 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기쁜 부활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커서 **가 될 거야.”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 ‘**’에는 자신이 되고 싶은 직업이 채워졌지요. 교수, 의사, 판사, 경찰, 소방관, 운동선수 등등….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룬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꿈을 이뤘으니까 행복할까요? 실제로는 꿈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런 줄 몰랐다면서 말과 함께 행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50년 이상 살아온 제 경험을 생각해볼 때, 어떤 일이나 다 똑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일이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되었을 때는, 그 일이 어렸을 때의 내 꿈이었다 하더라도 똑같이 지겹고 힘들어집니다.

자신의 꿈을 단순히 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일 안에서는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렸을 때의 꿈은 세상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만큼 나의 의미와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로 받아들이게 될 때는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나이 먹는 것이 서럽다고 말하게 됩니다. 꿈을 하나의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일이 아니라 행복으로 나아가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세상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세상의 일만 좇은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굳은 믿음으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일로만 예수님을 마주하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한을 지닌 분과 자신들이 감히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분의 권능이 입증되는 것에는 눈을 감아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 체제 안에서 유지되는 자기들 나라의 한시적인 권한과 성전에 의지하며, 예수님이 반역을 꾸민다는 터무니없는 고발을 했습니다. 역시 세상의 일로 예수님의 활동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그랬습니다.

카야파의 예언 역시 하느님의 의미를 보지 않으면서 했던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시대에는 대사제의 직책을 로마인들이 뽑을 정도로 선정 과정이 썩어 있었다고 합니다. 즉, 그는 세상의 일을 하는 사람이지 하느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정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의미를 찾지 못하니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무언가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괴테).



인간에게는 3개의 뇌가 있다고 합니다.

제1의 뇌(뇌간). 일명 파충류의 뇌. 생명 유지를 위한 부분.

제2의 뇌(대뇌변연계). 일명 포유류의 뇌. 감정, 식욕, 성욕, 단기기억에 관한 부분을 담당.

제3의 뇌(대뇌피질) 영장류의 뇌. 기획, 충동 조절, 이성적 판단, 행복감을 느낌.

이 중에서 뇌간과 대뇌변연계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그러나 제3의 뇌인 대뇌피질은 사춘기부터 시작해서 27~30세쯤에 완성됩니다. 이를 철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남자는 포유류의 뇌가 발달합니다. 생존본능, 종족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를 못해서 계속 움직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왜 이렇게 정신없냐고 하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이를 위한 대리만족으로 게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와 달라서 포유류의 뇌가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얌전하고 이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대뇌피질인 영장류의 뇌를 활성화하는 비결은 ‘몰입’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놀이를 통해, 청년 시절에는 사랑을 통해, 장년 시절에는 일을 통해 대뇌피질이 활성화되면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뇌를 알면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긴 회의가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유다 지도자들이 의회에 모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내용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분을 믿게 되면 로마인들이 자신의 나라를 짓밟게 되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을 멸망하게 만든 것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오늘의 회의 때문이었습니다. 살자고 한 회의가 멸망으로 이끈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안에 성령께서 좋은 의견을 주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회의 의장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라고 평가합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성령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멸망의 길로 가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회의를 합니다. 회의는 모두가 잘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회의들이 결국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는 탁상공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정에서도 회의하고, 본당에서도 하고, 직장에서도 하고, 나라에서도 하는 게 회의인데 이 회의가 좋은 결정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절실한 준비가 무엇일까요? 바로 ‘좋은 분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긴’ 회의입니다. 긴 회의 안에는 교만이란 것이 녹아있습니다. 길게 회의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내리라는 인본주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의가 길어지면 분위기는 나빠집니다. 기분이 좋을 때 빨리 끝내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고대 국가 프리기아(Phrygia)의 고르디아스왕은 자신의 전차에 아주 복잡한 매듭을 묶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매듭을 푸는 자가 세계를 정복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남겼습니다. 수백 년 동안 많은 사람이 매듭을 풀기 위해 애를 썼지만, 너무 복잡하게 묶인 매듭을 푸는 자는 없었습니다.

      이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정복한 여세를 몰아 소아시아 지역까지 정복하며 고르디움에 이르렀고, 매듭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단숨에 전차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 매듭을 풀려고 했지만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나, 알렉산더는 갑자기 칼을 꺼내서 전차에 묶인 매듭을 단숨에 잘라 버렸습니다. 매듭은 전차에서 풀리게 되었고, 고르디아스의 예언처럼 훗날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장차 ‘리더’가 될 사람이라면 자신의 기분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리더가 기분이 나쁘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 기분을 받아 모두 기분이 나빠지고 우울해집니다.

 

      오늘의 회의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두려움과 걱정, 그리고 근심과 미움이 뒤섞여 있었고 카야파는 그런 안 좋은 기분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오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회의에 관한 이런 유명한 연구가 있다고 합니다. 돈을 잘 버는 팀은 회의를 잘 운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의를 어떻게 잘 운영했다는 말일까요? 운영자의 능력도 있겠지만, 잘 운영되는 회의는 부정적인 언어보다 긍정적인 언어가 최소한 3배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정의 언어란 칭찬과 이해, 공감을 위한 질문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회의는 분위기도 좋고 결국엔 돈도 잘 버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 회의 장면을 보면 ‘저런 분위기에서는 좋은 판단이 나올 수 없겠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 이유는 오늘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유다 지도자들의 회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결정이 나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좋은 판단은 좋은 기분에서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회의는 ‘짧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오래 할수록 좋은 결과를 내나요? ‘장고 끝에 악수 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10년 연애를 하고 재고 잰 끝에 결혼하여 1년 뒤 이혼하기도 합니다. 혹은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하였는데, 의외로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을 오래 하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생각을 많이 할수록 기분이 안 좋아지고 그러면 잘 되자고 한 회의가 멸망으로 이끄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기분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와가 뱀과 대화할수록 기분이 좋아졌나요? ‘왜 다 주시지 선악과는 바치라고 하셨나?’라며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 자기 생각에 신뢰를 두는 행위는 하느님을 덜 믿는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많이 하면 왜 기분이 좋아질 수 없는지를 말하겠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자신들이 하는 지금의 판단에 달렸습니다. 판단은 기분에 좌지우지됩니다. 그런데 기분은 욕구에 달려있습니다. 욕구가 생기면 기분이 안 좋아집니다. 두려움이 커집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잃게 될 두려움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는 판단들은 잘못되게 되어있습니다. 생각은 이 욕구들을 성장시킵니다. 하와가 뱀과 대화할수록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커진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고 단순하게 결정합시다. 기도는 오래 하고 결정은 빨리 내립시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해당하고 공동체의 회의에도 해당합니다. 기도를 자주, 그리고 오래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맡기기보다는 인간의 능력에 집착하는 교만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잘 될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오늘 복음의 산헤드린 회의였습니다.

 -조재형신부-


미국의 화성 탐사선 퍼시비어런스호가 화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지구에서 화성까지 4억 7천만 킬로미터를 7개월 동안 날아갔다고 합니다지금의 화성은 생명이 살기에는 척박한 환경이라고 합니다영하 60도에서 영하 166도의 기온이라고 합니다그러나 과학자들은 화성을 지구와 같은 환경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Terraforming)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화성과 태양 사이에 거대한 반사경을 세우면 화성의 온도가 올라 갈 수 있다고 합니다화성에 대기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화성에 고체로 있는 이산화탄소를 방출시키면 대기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화성과 태양 사이에 인공자기장을 만든다고 합니다화성에 자기장이 생기면 태양풍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물론 기술과 자본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문득 생각합니다지구의 환경을 잘 보존하고가꾸면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과학자들은 왜 화성으로 탐사선을 보내고화성의 환경을 지구와 비슷하게 만들려고 할까요인류가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고화성의 환경을 지구처럼 만들려는 것은 인류에게 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생각의 지평이 넓어질 것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33년 전의 일입니다그런데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면서 운동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입니다찬란한 역사가 미래를 향해서 굴러가는 것 같았습니다언젠가 화성으로 휴가를 가는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인류는 또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 꿈은 아브라함이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그 꿈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너면서 시작되었습니다그 꿈은 갈릴래아의 어부들이 그물을 버리고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시작되었습니다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을 이야기하였습니다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꿈입니다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 꿈을 말씀과 표징으로 보여주었습니다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기존의 질서와 계명을 뛰어넘는 권위입니다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가야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가야파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가야파는 어떤 사람일까요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그 힘과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자신의 조직을 키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자신의 힘과 능력을 이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입니다자신의 힘과 능력을 이용해서 가난한 이들의 것을 빼앗는 사람입니다우리는 요즘 이런 가야파를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종교영화연극대학병원정치검찰군에도 가야파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길 5처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키레네 사람 시몬을 묵상하게 됩니다키레네 사람 시몬은 어떤 사람일까요깨어 있는 사람입니다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불의에 대항하고정의를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입니다소유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입니다우리는 이런 키레네 사람 시몬을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지진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현장에서내전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장에서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키레네 사람 시몬을 볼 수 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능력을 이웃을 위해서 사용합니다기꺼이 타인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독서는 새로운 세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을까요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

-이영근신부-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결정적인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결정적인 사건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는지 그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곧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이기로 결정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던 중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에 다다랐을 때에 생긴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생긴 일입니다.

곧 엠마오에서 라자로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의 표징,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라자로의 장례식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지도자들은 민심이 동요된 것을 두려워하여 최고 의회 곧 산헤드린을 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메세아가 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이 로마제국에게는 위협이 되고 당시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종교도자들에게도 위기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정과정이 참으로 묘합니다.

바로 그 결정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통해 밝혀줍니다.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이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이 온 백성을 위한 대속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의 죽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는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2)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이는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재로서 예언한 것”(요한 11, 51)임을 밝혀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오묘하게도 기회주의자인 가야파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그리하여,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백성들을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다리며 파스카를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순시기”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의 파스카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분의 죽음과 영광을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해야 할까요?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아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반영억신부-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 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담아 행하였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임 없이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복음: 요한 11,45-56: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조욱현신부-


죽은 라자로를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소문이 퍼지자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한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요.”(47-48절). 그들은 세상의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주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정말 성전과 백성을 걱정해서 이런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염려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이 민중봉기라도 하게 되면 로마의 진압을 받게 되고, 성전은 파괴되며, 유다민족은 완전히 지배를 당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생각하였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사람들이 보았고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예수님을 견제하기 위해, 그 사태를 수습하려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때 대사제 가야파가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49-50절)하고 말하였다. 이것은 대사제로서 예언한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흩어져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는다는 예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행위로서의 의미가 있다. 이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태어날 것이다.

 

하여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이해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행위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성찰해 보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안전과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있는 예수라는 존재를 없애야 한다는 결정이 나도록 당시의 상황을 몰고 갔던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죽일 방법만 찾았고 이제는 그렇게 하기로 결의하고,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들어간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진위를 가리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명예나 안위에 우선을 두고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기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을 사는 다른 무죄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고 있지나 않은가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을 보면서 나를 반성하며,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의 잘못을 범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요한 11, 50)

-한상우신부-


소중한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악순환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삐그덕거릴때마다
희생양을 만들면
남아있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거꾸로
뒤집으면
역사는
우리자신을
향하는
이야기이다.

잘되면
자기노력
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우리들 나쁜
습관이다.

자기중심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건강한 관계이다.

여전히 어리석고
여전히 이기적인
우리들 마음이다.

관계를
오염시키고
훼손시키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자신이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도
우리자신이다.

소중한 것을
놓치며 우리는
살고있다.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성장을 위한
삶은 우리
내면에서
시작한다.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십자가는
희생양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참된 사랑이다.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관점을 바꾸는
은총의 시간이다.

십자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모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된다.

십자가를 통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기적인 삶과
자기중심적인
관계를
바꾸게 하는
십자가의
참된 사랑이다.

사랑은
희생양이
아닌
십자가와
함께하는
사랑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사명이 보다 명확히 드러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요한 11,47)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에 대해 들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걱정합니다. 예수님께 표징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하던 이들이 이제 와서 표징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니 아이러니합니다.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요한 11,51-52)
요한 복음사가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낫다'는 그 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이야기를 이렇게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무사할 것은 물론, 온 인류가 죄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주님의 죽음을 통해 인종과 언어와 민족과 문화를 달리하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모일 것이라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아 그분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한 아버지의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아래로 모여든 인류는 이 형제애를 회복하여 하나의 민족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 한 민족을 만드신다는 주님의 뜻이 선포됩니다.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에제 37,22)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에제 37,24)
이 예언은 비단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는 다윗 집안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흩어져 살던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의 사랑으로 다시 모으시어 한 민족이 되게 해 주신다는 의미 또한 포함하고 있지요. 온 인류는 한 아버지의 한 형제, 한 임금의 한 백성, 한 목자의 양떼로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에제 37,26)
성전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어 구심점이 되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거처 주위로 모여든 우리는 영원히 그분의 백성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씀은 이 하느님 현존이 지상에서 천상으로 이어질  축복임을 확증해 줍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한 형제, 한 백성이고,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아멘!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그리스도 죽음에 넘겨지셨네."(영성체송)
성주간을 시작하기에 앞서 말씀께서 예수님의 사명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십니다. 이 기억을 붙잡고 당신과 함께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걷자고 초대하시는 동시에,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다독이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주간을 하루 앞두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은 온전히 우리를 위한 사랑의 길이니 우리도 사랑을 다해 주님 곁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이 말씀 묵상을 중심으로 연결된 우리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나아갑시다.  

 살아있는 복음들로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주제는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지금 백성들이 흩어져 있다는 말씀인 것이고,

관건은 주님께서 어떻게 이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느냐 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에제키엘 예언서의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당신 성전을 사람들 가운데,

곧 우리들 가운데 두시겠답니다.

 

이는 우리의 생각이나 예상과 다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을 산 꼭데기에 세우고

사람들이 그리로 찾아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어서 하느님을 찾아

스스로 산 꼭데기까지 오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랬으면 흩어지지도 않았을 테지요?

 

문제는 사람들 손이 깨끗하거나 마음이 정하지도 않고,

정신이 헛 군데에 가 있어 그것을 찾아 흩어진 겁니다.

그러니 모이라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모으기 위해 몸소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이것이고,

한 곳에 계시지 않고 공생활 내내 돌아다니신 이유가 이것이며,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이유가 이것이고,

프란치스코에게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고 하신 이유도 이것이지요.

 

오늘 에제키엘서 말씀처럼 찾아가는 교회,

사람들 가운데 있는 성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프란치스칸 은둔소들이 다른 운둔소들과 달리 마음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한다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좀 다르지만, 클라라 수녀원들이

다른 봉쇄 관상 수녀원들과 달리 마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사람들 가운데로 가는 것이고,

아니, 아예 살아있는 복음들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있는 복음이 되려면 오늘 복음의 예언처럼

희생양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4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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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읽으며 분노하였고 세상을 보며 분노하였으니, 이제 스스로를 보며 분노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더 나은 나로, 더 나은 사회로, 더 나은 신앙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해 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기쁜 부활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최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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