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Margaret K 2021. 3. 25. 06:24

2021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처럼 성모님의 모태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의 날짜는 예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역산한 것이다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루카 1,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세상에는 지금도 삶과 죽음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는 사고로, 전쟁으로, 무관심으로, 미움과 욕심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그런데 또 어딘가에서는 사랑으로, 믿음으로, 위로와 배려로, 희생으로 또 다른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의 삶에도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고, 또 우리 곁에 삶과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아 갑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시기심과 질투로, 이기심과 욕심으로 누군가를 짓밟고 죽이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배려하며 위로하고 안아 주면서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저마다 행동으로 삶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사순 시기, 유다인들의 시기와 욕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이 사순 시기에 생명의 탄생을, 새로운 구원의 삶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생명의 탄생 예고에도 우리네 하루처럼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의 알림은 젊은 약혼녀의 죽음을 뜻합니다. 천사를 보고 죽음의 두려움을 체험한 마리아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더 편하고 더 안정적인 삶을 살고자 마리아는 아무런 응답도 행동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거부하였다면 그 마음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미고 군중을 선동하였던 유다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입니다. 자신만 살려고 누군가를 죽이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놓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살리게 됩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길을 갈 수도 있고, 아니면 희생과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 두렵지만 믿고 내어놓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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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톤 전 구간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포기하는 구간은 언제일 것 같습니까? 체력적으로 힘든 마지막 구간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5~10km 지점이라고 합니다. 이때 가장 많은 낙오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오히려 30km 지점을 지나서는 낙오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가득해서 초반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30km 지점을 지나면,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에 낙오하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삶을 많은 사람이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실제로 삶 안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5~10km 구간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인내를 갖고 사는 사람은 30km 지점을 달리는 중입니다. 이들은 포기라는 말을 아예 잊은 상태입니다.

마라톤을 시작했다가 곧바로 포기하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마라톤이 내게 맞지 않아. 나는 수영을 할 거야. 나는 사이클을 할 거야….’ 그러나 다른 것을 해도 초반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들고 지쳐서 숨이 턱 밑까지 왔을 때, 비로소 포기라는 단어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포기’라는 단어를 아예 내 생각에서 지워버려야 합니다.

성모님도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것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인해 무조건 순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라는 특별한 인사를 받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특별함은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일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데 함께 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와 달리 성모님께서는 놀랐지만 의심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의 물음은 그녀의 동정 서원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동정 잉태라는 거룩한 신비에 대한 숙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순명은 마지막 말씀에서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성모님의 믿음을 다시금 묵상했으면 합니다. 주님의 일을 포기하지 않는 성모님의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내게 마지막 순간이 올 때도 기쁘게 눈감을 수 있지 않을까?(이해인 수녀)


금붕어

금붕어는 보통 5cm의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조그마한 어항에 관상용으로 키웁니다. 그런데 만약 이 금붕어가 계속 자란다면 어떨까요? 어항의 크기도 맞지 않겠지만, 금붕어가 크면 도저히 아름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2020년 8월 8일, 인도네시아의 ‘토바’라는 호수에서 무게 15kg 크기가 1m가 넘는 거대 금붕어가 잡혔습니다. 직접 잡은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붕어는 아름답다고 말해야 하는데, 징그럽다고 말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금붕어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두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닐까요?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 보시기에 징그러운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의 삶을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긍정은 여러 부정의 결과이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자께서 성모 마리아 태중에 구세주로 잉태하신 날입니다. 이 구원의 결정적인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성모님의 긍정(Amen = Fiat)입니다. 긍정이 곧 잉태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커다란 가르침을 줍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무언가 되어가는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이셨지만 그분의 긍정으로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성모님께 함부로 대하는 것은 인간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과 하나 되어 계신 하느님께도 함부로 대하는 것이기에 독성죄가 됩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무언가 되어가는 방법이 ‘긍정’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시며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긍정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인간의 품위를 넘어서 하느님과 한 몸인 지위까지 오르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긍정’은 항상 ‘부정’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 실패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게 더 중요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선생님들은 아이들 미래의 ‘꿈’을 명확히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가졌던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그 꿈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꿈을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어디가 깨졌는지 찾고 그것들을 수리해 나가는 게 우선일까요? 물은 붓지 않아도 됩니다. 언젠가는 비가 와서 독이 채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깨진 곳을 수리하는 것을 게을리하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어렸을 때 천재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려주지 않으면 그 모든 축복이 오히려 저주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의 문장가 왕안석은 ‘상중영(중영이란 사람의 경우를 슬퍼함)’이란 제목으로 글을 써서 무엇이 천재적인 능력을 망치게 만드는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강서성 금계현에 방중영이란 아이는 집안 대대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글공부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아이는 붓과 벼루, 종이를 달라고 하더니 부모님께 효도하고 가족이 서로 합심하자는 내용의 시를 거침없이 썼습니다. 다른 시제를 주어도 척척 문장을 적어 내는데 그 내용과 운율이 기가 막히게 매끄러웠답니다.

      이에 부모님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방중영을 신동이라며 입이 마르게 칭찬했고, 현에서는 중영의 아버지에게 큰 상을 내렸습니다. 지방의 권력가들은 중영이 커서 큰 인물이 되면 훗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미리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중영의 아버지는 점점 돈에 욕심이 생겨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중영의 재주를 보이고 돈을 벌었습니다. 중영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에게 돈을 벌어주는 일을 하게 되어 이런 삶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오랜 시간 아버지와 함께 밖으로 떠돌다가 중영은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영재발굴단’에서 ‘우주를 보는 천재 소년’ ‘강범진’군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그림 실력으로 초등학교 때 이미 영화제작사가 그에게 관심을 가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 그림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모두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획일화된 입시경쟁에서 범진군의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학교를 자퇴시키고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만의 독특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방중영의 아버지와 강범진군의 어머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범진군의 어머니는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명확히 알려주었습니다. 방중영의 아버지는 돈에 대한 욕심을 갖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인지 몰랐습니다. 재능만 닦아나가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는 아무리 재능이 많이 들어와도 그것들을 다 흘려버리게 만듭니다.

 

      구약의 요셉이 능력이 많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죄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포티파르의 아내가 그를 유혹할 때, 그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기에 뿌리쳤습니다. 이 능력이 결국엔 모든 이를 살리는 은총이 담길 그릇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아이들에게 꿈을 이야기해도 결국 게임이 왜 안 좋은지, 경쟁이 왜 나쁜지, 안 좋은 동영상을 보거나 지나친 호기심으로 왜 죄를 지으면 안 되는지를 알려주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해야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세상 구원을 위한 메시아를 잉태하실 수 있으셨던 결정적인 이유는 ‘원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원죄는 세속-육신-마귀입니다. 아무리 좋은 능력이 있더라도 그것을 자기만을 위해 써먹으려 했다면 성모님일지라도 구원자를 잉태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연간 35만 명의 소아마비 환자들을 위해 자신이 개발한 백신을 무료로 뿌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조너스 소크’(Jonas Salk)입니다. 1955년 4월, 원자폭탄만큼이나 미국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소아마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발표할 때, 기업들은 앞다투어 그 백신 특허권을 자신에게 팔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때 조너스 소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특허 같은 건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만약 소아마비 백신에 대한 특허를 냈다면 수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신 제조 방법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다른 백신을 만들겠다며 다시 연구실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분이 원죄 없으신 성모님과 가장 닮은 분입니다. 이분이 머리가 좋아 백신을 만든 것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온 인류에게 그 사람을 통해 필요한 은총을 주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꾸준히 하면 성공합니다. 타고난 천재만 할 수 있다는 체스 세계 챔피언을 세 자매 모두 만든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재능이 온 세상에 유익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성모님이나 조너스 소크처럼 죄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렇기만 하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분명 온 세상을 유익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여러분에게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지요작년에 어머니는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이제 어머니는 사진과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강한 어머니였습니다피치 못할 사정으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셨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는 연탄배달쌀 배달을 하셨습니다. 6년 동안 밥장사를 하였습니다집에서 밥과 반찬을 만들어서 구청까지 들고 갔습니다형들과 저도 함께 했습니다어머니의 젊은 날의 고생은 나중에 잦은 병치레의 원인이 되었습니다이사를 가도 어머니는 모든 짐을 혼자서 옮겼습니다어머니 혼자의 힘으로 오랜 전세살이를 마치고 우리 집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아버지는 바깥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아버지의 자리와 권위를 늘 지켜주셨습니다.

 

충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기도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학교는 가지 않아도 야단치지 않았지만성당엘 가지 않으면 야단을 치셨습니다어머니의 강함은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어머니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신앙 때문이었습니다성당에서 반장으로 봉사하였고돌아가시기 전에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수도자와 성직자의 어머니이기에 더욱 기도하였고겸손하였습니다돌아가신 어르신들을 위한 연도를 꼭 기억하였고제게도 미사를 봉헌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제가 작은 본당의 신부로 있을 때는 3년 동안 밥을 해주셨습니다방문 교리도 하였고환자 방문도 하였습니다어머니는 대녀들의 신앙을 챙겨주었습니다부족한 제가 사제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도 어머니 기도의 힘입니다.

 

꿈이 있던 여인이었습니다어머니는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배움의 기회를 잃었습니다어머니의 꿈은 많이 배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어머니는 많이 배웠던 아버지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세상의 기준으로 아버지를 보지 않았고신앙의 기준으로 아버지를 보았습니다강직하고지혜로운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앙 안에서 두 분은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습니다수도자와 성직자의 부모가 되신 것을 감사하였고기뻐하였습니다꿈이 있었기에 어머니는 고통 중에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꿈이 있었기에 어머니는 가난함에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꿈이 있었기에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잘 마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기쁘게 가셨습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천사 가브리엘이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했고마리아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한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교회는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과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다어떤 것들이 있을까요교회는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공경합니다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면서 삼위일체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마리아에 대한 지극한 공경입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어머니에게 요한 사도를 아들로 부탁했습니다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지기에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는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를 복되신 동정녀로 공경합니다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인한 잉태였기에 마리아는 동정녀라고 교회의 전승은 이야기합니다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마리아의 몸에서 임마누엘’ 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하와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죄의 결과는 죽음이 되었습니다그러나 마리아의 순종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예수님께서는 죄죽음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동정녀는 생물학적인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은 동정녀가 아닙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르고하느님께 의지하면서 동정을 지키는 사람을 동정녀라고 하였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정결하게 사는 이들이 동정녀입니다.

 

마리아는 강한 어머니이며 신앙의 여성입니다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마리아는 예수님 십자가를 함께 지셨습니다십자가에 내려진 예수님을 무덤에 묻기 전에 마리아는 가슴에 묻었습니다초대교회 사도들에게 마리아는 힘들 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두려울 때는 용기가 되었습니다예수님을 잉태하고마리아는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인류의 구원을 위한 당찬 여인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엘리사벳은 구세주의 어머니를 알아보았고태중의 아이까지 축복하였습니다마리아는 구름 속에 있는 고귀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천상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는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동정녀이기 전에천주의 모친이기 전에 마리아는 강한 어머니였고신앙의 여성이었습니다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면서 마리아의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함입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마리아의 깨달음은 세 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나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분의 희망 안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입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반영억신부-


저는 3월17일 청원군 노인복지관 관장을 겸임하는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왜 저에게는 이러한 십자가를 주십니까? 지금도 벅찬데.....거두어달라고 청해야 하나요?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하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짊어지고 갈 힘도 주시리라 믿으며 순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순명을 하라고,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강론을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교구에는 정기적인 사제 인사이동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인사권자인 주교님께서 발표하기도 전에 신부님들 사이에는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서 누가 어디로 갈 것이라고 인사이동을 다 합니다. 그러나 막상 인사발령 공문을 받으면 의외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해마다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인사권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사제로 서품 받으면서 독신과 순명을 서약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가난한 삶을 살 것을 살 것을 권고 받습니다. 그렇다면 주교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삶의 자리가 복된 곳이고, 그곳에서 기쁨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 서운함을 갖기도 합니다. 주어진 현실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이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순명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1,37) 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부르심, 응답>

 -송영진신부-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28-31)”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8).”
 
1) ‘예수님 탄생 예고’는 일방적인 명령이나 통고가 아니라,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로 너를 선택하셨다.
너는 이 부르심에 응답하겠느냐?”)
이 부르심에 응답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마리아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일입니다.
(응답하지 못하겠다고 대답해도 죄가 되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 없는 로봇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셨습니다.
 
2) “천사가 직접 나타나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면, 무슨 부르심이든지 간에
나도 금방 응답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세의 경우,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집트로 가서 백성을 구하라고
말씀하시자(탈출 3,7-10), 그는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탈출 4,10.13).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시라는 모세의 말은,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말입니다.
<말솜씨가 없다는 것은 핑계이고, 살인을 하고 도망친 입장에서(탈출 2,12.15)
이집트로 되돌아가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파라오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몹시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2).”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인사말도
모세의 경우처럼 ‘약속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3) 판관 기드온의 경우,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판관 6,15).”
기드온은 자기가 가장 약한 지파의 가장 약한 씨족에 속해 있다는 것과
또 자기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지 못하고서 의심하는 말을 먼저 했고,
자기가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판관 6,17).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가 청하는 대로 표징을 보여 주시긴 했는데,
그 표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라는 약속입니다(판관 6,16).
 
4)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경우, 그는 천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하고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루카 1,18).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을 한 것은,
메시아의 선구자가 될 요한의 아버지가 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한 것인데,
즈카르야는 자신과 아내의 나이가 많다는 점 때문에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고,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가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즈카르야의 경우는 기드온의 경우와 비슷한데, 즈카르야가 얻은 표징은,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아기가 태어난 뒤에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일입니다.)
모세, 기드온, 즈카르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하느님 쪽의 설득과 설명이 필요할 때도 많고,
사람 쪽에서 오랫동안 심사숙고와 고민을 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5) 마리아의 경우,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는데(루카 1,34),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라고
부정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사의 대답을 보면,
천사는 아기의 잉태 과정과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루카 1,35-37).
(35절-37절에 있는 천사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대답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마리아의 질문은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저는 미혼이고 동정녀인데,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로 해석됩니다.
 
6) 천사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마리아가 응답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생각은 ‘고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대한 ‘묵상’입니다.
사실 천사가 전해 준 일은, 마리아 입장에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
원한 적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관한 말씀을 듣자마자 금방 응답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깊이 생각하고
결심하고 응답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일방적으로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는 말만 하고서 곧바로 떠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응답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응답을 듣고 나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7)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부르심이 주어집니다.
그 부르심이 평소에 원하던 일에 관한 부르심일 수도 있고,
원하던 것과는 다를 수도 있고,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나의 인간적인 판단들과 소망들을
모두 내려놓고서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일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렵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고, 훌륭한 일이 됩니다.
(마리아의 경우는 인간의 상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한 위대한 응답입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조욱현신부-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사람이 되시는 위대한 사실을 오늘 복음은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곧 인간의 차원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들어 올려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룰 수 있게 하였고, 그 마리아의 자세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된다.

 

복음: 루카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새로운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35절)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물 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신 분도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아들이신 말씀을 잉태하시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낳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한다. 나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올바로 따를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고 자신을 버리는 고통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낳아줄 수 있을 것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기도드립니다.(루카 1, 38)

-한상우신부-


사람이
있는 곳에
주님도
계신다.

여기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주님께서 오신다.

주님의 탄생
예고는
설레이는
희망의
탄생이다.

희망은 진짜와
진심을 나누는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이다.

그래서
모두를
살린다.

하느님
사랑의 방식은
언제나
살아있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말씀의 접촉은
소통의 힘찬
시작이 된다.

마리아는
말씀과 함께
말씀의
길을 걸어간다.

소통은
탄생이다.

하느님께서
희망의 대화를
시작하신다.

희망은
참으로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희망의 뒷면에는
구체적인 사랑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이기적이지
않기에
길이 되신다.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다.

같이와
함께 사이에
말씀이 있고
말씀의
탄생이 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따르는
은총의 사순이다.

이루어져야 할
이루어질
하느님 말씀의
탄생 예고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말씀의 탄생이
있다.

말씀의 여정은
주님의 여정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구원을 위한 순종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는 천사가 들려 준 잉태 소식에 놀라지만 이내 순종합니다. 율법을 익혀온 유다의 처녀로서 혼전 잉태로 벌어질 후폭풍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제1독서서는 일찌기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언급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주실 이 표징은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이었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통해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감추어진 신비였지요.

자신들을 이민족의 압제에서 구해 줄 메시아, 다윗의 영화를 되찾아 줄 번영의 메시아를 깨어 기다리는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마리아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하지만 천사의 발현부터 처녀 잉태의 예고까지 마리아가 맞닥뜨린 현실은 이미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과정을 넘어섰기에 그녀는 놀라고 의문스럽고 두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두려움을 딛고 고백한 응답은 그저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하세요." 하는 식의 수동적 동의가 아닙니다.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분명히 끝을 맺지요. 이는 자신도 동의와 수용을 넘어 간절히 열망하고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며 그래서 창조적인 순종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율법에 따라 바치는 황소와 염소의 피를 원하지도 기꺼워하지 않으심을 아십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의례는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열정과 진정성을 잃은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스스로" 아버지께 완전한 제물로 드리시는 데 기꺼이 순종하십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육화하심으로써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조건으로 시작하십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져 초능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동떨어진 신이 아니라, 육신을 취한 이로써 그 실존을 몸소 겪으며 성장하고 활동하다 죽으셨지요.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의 제사로 원죄의 상처로 허덕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순종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었기 때문이지요.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입니다. 은총, 기쁨, 주님의 현존이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는 우리의 현실이지요. 때로는 천재지변이나 불가항력적 사건으로, 때로는 우리 각자의 죄와 나약함으로, 때로는 관계적 환경적 한계로 먹구름이 드리우고 안개에 싸여 정말 우리가 그런 사람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기도 하지만, 우리의 현실 맞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맞게 건네시는 말씀에 귀기울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마리아와 함께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주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요. 대축일 함께 기뻐하며 기꺼운 순종의 행복을 아는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겸손과 순종으로 구원 사업에 협력하신 마리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징표와 예고

 -김찬선신부-


우리 전례는 오늘 주님 탄생 예고 축일 전례 독서로 동정녀가

임마누엘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하는 이사야서를 선택했는데

여기서 주님은 아하즈에게 하늘의 표징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신약의 주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사악한 세대라고 응답하신 것처럼 사악한 것인데,

그렇다면 표징을 청하라는 말씀이 주님의 진심일까요?

아하즈를 떠보는 말씀이 아닐까요?

 

떠보는 말씀이 아니라 진심일 겁니다.

아하즈는 하늘의 징표조차 구하지 않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징표를 청한다는 것은 그래도 믿으려는 마음이 한 구석이라도

있는 사람일 텐데 이 인물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은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하느님 힘에 의탁하는 인물이 아니라

당시 이민족의 최강자인 아씨리아의 도움에 의지하려던 사람이기에

예언자를 통하여 표징을 청하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고,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그럴듯하게 위선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 중에는 하늘의 징표를 청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늘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하늘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나

하늘의 힘이 이 땅에 개입하는 것을 싫어하고

철저하게 이 땅의 힘의 논리에만 골몰하는 사람은 하늘을 안 쳐다봅니다.

 

이런 그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지도 않는 표징을 보여주신다며

동정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을 낳게 될 거라고 예고하십니다.

이것은 징표를 보여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예고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늘을 믿지도, 쳐다보지도, 징표를 청하지도 않는 자에게

엄청난 예보를 하느님께서 하시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보는 아하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믿음이 대단한

사람일지라도 믿기 힘든 예고이고 그래서 아하즈가 아니라

마리아도 이런 것을 청하지 않았을 것이고 예고의 말씀이 있었을 때

마리아도 바로 믿을 수 없었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은 인간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청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언감생심 우리 인간이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철저히 하느님의 주도하심이고 그래서 완전히 하느님 은총이지요.

 

그러므로 이 은총을 믿고 받는 사람 그러니까 마리아와 같은 사람만

임마누엘 하느님이 함께 계시게 되겠지요.

 

그런데 역사적인 임마누엘 예고는 아하즈와 성모 마리아께 주어졌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임마누엘 예고는 계속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전에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감히 생각지도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이젠 우리도 임마누엘 하느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아하즈처럼 되시겠습니까?

성모 마리아처럼 되시겠습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