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16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3. 16. 06:57

2021 3월 16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낫기를 원하느냐?'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1-3ㄱ.5-16)


"Do you want to be well?" 

"Rise, take up your mat, and wal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요한 복음서에는 표징에 대한 이야기가 일곱 번 나옵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표징 이야기(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는 예수님 이야기)와 세 번째 표징 이야기(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이야기)는 연달아 나옵니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가 표징과 기적의 의미를 이해하는 좋은 묵상 거리입니다. 두 번째 표징 이야기에서, 기적을 체험하기 위한 시작은 간절한 바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를 발견하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인 벳자타 못의 치유 이야기는 그 시작점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기적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져 움직일 수 없는 병자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온몸이 마비되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 사람의 간절함과 의향을 물어보십니다. 아무런 의욕도 열정도 없는 사람에게 기적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기적은 더 나아지는 자신과 공동체를 위하여, 서로 함께 행복해지는 세상을 위하여 열정을 가지고 의욕을 내뿜을 때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말씀 대신에 병자가 해야 하는 일을 요구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스스로 일어날 수 없다고 포기하거나 두려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유다인으로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들것을 들고 걸어가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그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은 우리의 열정과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안일함과 두려움, 기존의 울타리를 깨뜨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에서 결코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열정과 의욕이 가득한 첫 발걸음을 응원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버섯’을 사려면 슈퍼마켓에서 어느 매장으로 가야 할까요? 1번) 과일/채소 매장, 2번) 정육/계란류 매장, 3번) 냉장/냉동/간편식 매장 4번) 과자/스낵/시리얼 매장. 당연히 1번 과일/채소 매장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버섯은 ‘식물’일까요? 사실 버섯은 ‘균’계의 진균류로, 식물도 동물도 아닙니다. 식물처럼 광합성을 해서 살지도 않고, 동물처럼 먹이를 얻으려고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는 ‘동물’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육 매장에 가서 ‘버섯’을 찾지 않습니다. 겉모습만을 보면 식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겉모습 너머의 진실을 보지 못한 채 어리석음의 길에 들어섭니다. 과거 예수님을 반대했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배움이 부족했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기도가 부족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문제는 자기의 틀에서 벗어나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하느님은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 활동하십니다. 그런데 나의 부족한 앎으로 하느님을 판단하고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은 벳자타 못에서 치유된 병자의 이야기입니다.

벳자타 못에서 사제들은 희생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씻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거룩한 못의 물이 출렁일 때 천사가 내려와 신체의 질병이 치유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즉, 불평하지 않고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지금까지 나를 지고 있던 육체를 다스리고 모든 선행 안에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살라는 촉구입니다.

그는 이 요구를 충실히 따릅니다. 들것을 들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지적에,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셨음을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이 고백으로 그는 영혼까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진정한 자유와 큰 기쁨을 주시는, 즉 나를 이롭게 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다인처럼 나를 구속하고 힘들게 하는 잘못된 세속적 말만 듣고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 방향으로 깊이 사랑하면 다른 모든 방향으로의 사랑도 깊어진다(안네-소피 스웨친).


어머니의 김치찌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어머니 표 김치찌개입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 먹는 김치찌개도 좋지만, 어머니께서 해 주신 김치찌개와는 전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김치찌개의 맛은 어떤 것보다도 좋았고 큰 행복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맛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작년에 주님 곁으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의 김치찌개가 더 그립습니다.

어머니께서 김치찌개를 해 주셨을 때, 솔직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었습니다. 아쉬움과 함께 소중한 기억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이며, 자신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작은 것에도 의미를 찾으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신의 장벽을 넘는 법:  장벽 앞까지 와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일곱 가지 표징 중 세 번째, 벳자타 병자의 치유입니다. 요한복음은 신학적으로 매우 치밀한 전개를 보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표징부터 다시 살펴보면 이번 표징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표징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 마리아의 믿음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믿음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왕실 관리의 아들을 치유해주시는 두 번째 표징이 나옵니다. 왕실 관리는 갈릴래아 사람들과는 달리 ‘용기와 끈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표징이 이뤄지는 곳은 ‘양 문’ 곁이고, ‘벳자타’는 ‘자비(올리브)의 집’, 혹은 ‘베데스다’로 ‘은총의 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양 무리가 있는 문은 그리스도이시고 그 문으로 들어오면 ‘교회’가 됩니다. 곧, 벳자타 병자는 교회에 들어오기 직전의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그리스도를 알지는 못했지만, 병을 고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컸습니다. 38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병이 치유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 번째 표징은 ‘용기와 끈기’가 숫자로 치면 ‘38’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구원의 숫자인 ‘40’을 채우려면 ‘은총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이는 마치 롯이 소돔 땅의 멸망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두’ 천사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과 같습니다.

 

      죄를 이기면 구원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병보다도 ‘죄’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고 하시는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종교적으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용기와 끈기’가 있는 사람들은 당신 친히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나자렛 사람들이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따르면서도 죄에서 벗어나기를 용기 있게 바라지도 않았고 끈기 있게 노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표징도 주어질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한 사람이 말한 ‘천재를 이기는 방법’(체인지 그라운드 채널)에 관한 짧은 내용이 있습니다. 소개해 봅니다.

 

      “살다 보면 꼭 한번 재수가 좋든지 나쁘든지 천재를 만나게 되는데, 대부분 사람은 이 천재와 경쟁하다가 상처투성이가 되든지, 아니면 자신의 길을 포기해버린다. 즉, 평생 주눅 들어 살면서 자신의 재능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고, 평생 못 가본 길을 동경하며 살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추월할 수 없는 천재를 만난다는 것은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다.

 

      어릴 적 동네 어른들은 나를 그림 신동이라 불렀다. 학교에서도 그 재능을 인정받아 만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내 실력은 동료들과 다를 바 없는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중에 한두 명의 천재는 꼭 있었다. 천재들은 한 달 내내 술만 마시고 있다가도 며칠 휘갈겨서 가져오는 원고로 내 원고를 휴지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타고난 재능에 대해 원망을 하며 이를 악물고 그 친구와 경쟁도 해 봤지만, 내게 남는 건 깊은 상처뿐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길이 점차 멀게만 느껴질수록 현실 또한 서서히 타협을 강요했지만 나는 오히려 만화에 미쳐버리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재들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천재들은 항상 앞서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앞서가는 도중에 세상살이가 시시하다고 느낄 즈음, 인간이 넘지 못할 ‘신의 장벽’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그들은 좌절과 방황을 겪으며 인생의 시계추를 멈춰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단 하나다. 천재를 먼저 보내놓고, 앞으로 몇 년이 걸리든 반드시 이뤄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꾸준히 걸어 나가 어느 날 멈춰버린 그 천재를 추월하는 것이다.

 

      천재를 만나면 먼저 보내주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상처 입을 필요가 없다. 작가의 길은 장거리 마라톤이지 단거리 승부가 아니니까. 나는 만화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매일 스케치북을 들고 10장의 크로키를 그려라. 1년이면 3,500장, 10년이면 3만 5,000장의 그림이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그려보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좋은 글도 쓰고 싶다면,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 메모를 하면 된다. 가장 정직하게 내면세계를 파고 들어가는 설득력과 온갖 상상의 아이디어와 줄거리를 갖게 된다. 자신만이 경험한 가장 진솔한 이야기는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만화가 이두호 선생은 항상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이 말은 언제나 내게 감동을 준다. 평생을 작가로서 생활하려면 지치지 않는 집중력과 지구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나 같은 사람은 그저 잠들기 전에 한 장의 그림만 더 그리면 된다. 해지기 전에 딱 한 걸음만 더 걷다 보면 어느 날 자신이 바라던 모습과 만나게 될 것이다.”

 

      만화가 이현세 씨의 말입니다. 그의 말 중에 ‘신의 장벽’이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천재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신의 장벽’입니다. 오늘 벳자타 연못의 병자가 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신만이 그의 자비로 그 문을 열어주셔서 당신 양 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돕는 자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신이 찾아와서 그 장벽을 넘겨줍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이 ‘38’이고, 그러면 신이 ‘2’를 줍니다. 자기를 스스로 돕는 것이 ‘38’이고, 그 사람에게 신이 마지막 퍼즐을 맞춰주시는 것이 ‘2’입니다.

 

      오늘 복음은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죄를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와 그 죄를 이기려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그 장벽을 넘겨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이 이전에 누워있던 자리를 이젠 들고 다닐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내가 의지하여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것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당신 목숨을 거십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심지어 사업가들도 그렇게 합니다. 고 정주영 회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국내 최고 재벌 자리에 오른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나는 일할 때 목숨을 걸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죄를 이기기 위해 ‘38’을 채워야 합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기 위해 우리 목숨을 거는 숫자입니다. 그때 ‘2’를 그분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는 죄를 이기기 위해 목숨을 거는 그런 사람을 위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당신 목숨입니다. 이렇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조재형신부-


가톨릭평화신문에서 매년 신앙체험수기를 공모합니다올해도 신앙체험수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신앙체험수기를 읽으면서 이 시대의 욥기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가톨릭평화신문 홈페이지의 기사보기에서 2월 21일을 검색하시면 읽을 수 있습니다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04년부터 2020년까지 16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마치 욥이 시험을 받아 재산을 잃어버리고자녀들은 실종되고본인은 병들어 고생하였던 것처럼 효성이 깊던 형제님은 친구의 보증을 잘못서서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되었습니다돌을 굴려 올리지만 다시 내려오는 돌을 평생 들어오려야 했던 시지피스처럼 형제님은 조금 나아지면 새로운 고통의 돌이 어깨를 짓눌렀습니다형제님이 깊은 수렁 같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천사와 같은 아내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사제와 수도자들의 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본당 공동체의 따뜻한 위로와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절망의 순간에도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했던 형제님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7년 우리나라는 ‘IMF'를 경험했습니다정말 많은 사람이 욥처럼 고난을 받았습니다잘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었습니다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야 했습니다집을 잃어버리고거리로 나가야 했습니다잘못도 없는데 IMF는 마치 스나미처럼 우리나라를 덮쳤습니다사랑하는 부모님이 갑자기 거리로 나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부모님을 위해서 대출을 17%의 이자로 해야 했습니다잘나가던 사업은 하루아침에 부도가 났고아직 어린 아이들은 옥탑 방에서 영문도 모른 체 지내야 했습니다그 깊은 수렁이 2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성실함으로 빚을 갚아나갔고탕감 받았습니다아이들은 직장인이 되었습니다언제나 말없이 응원해 주던 아내가 있었습니다드디어 20년 만에 작은 집을 마련하였고사제를 모시고 축성하였습니다욥처럼 시련과 고통을 감내하고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기면서 살았습니다좋은 것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면 나쁜 것을 주신 주님께도 감사드리면서 살았습니다주변을 보면 긴 겨울을 이겨내고따뜻한 봄을 맞이하는 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그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은 신앙입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성서는 우리에게 절망에서 희망을 보았던 신앙체험 수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따뜻한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했던 신앙체험 수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예수님의 비유는 아름다운 신앙체험 수기입니다방탕했던 생활을 뉘우치고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아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돌아온 동생 때문에 화가 난 큰 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아름다운 신앙체험 수기입니다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보였던 백인대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그저 한마디만 하시면 된다고 합니다굳이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합니다이방인의 뜨거운 믿음을 봅니다이 또한 아름다운 신앙체험입니다베드로의 이야기도 있습니다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하였습니다예수님을 위해서 천막을 만들겠다고 하였습니다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그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닭이 울었고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신앙의 눈으로 보면 성서는 온통 신앙체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물과 관련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2번 나옵니다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기도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셨고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사마리아 여인과도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예수님께서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 네가 마시는 물은 곧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물이 힘이 있고물이 영적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예수님께서 물을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물은 단순히 정화하는 것만이 아니라우리를 하느님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오늘 복음에서 38년 동안 병고에 시달렸던 사람을 치유시켜 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꼭 물속으로 들어가서 씻어야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주님을 믿고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주 하느님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부단히 어제의 나와 결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누구라도 심정이 비슷해집니다.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가운데 ‘양문’이라고 있었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양들과 양치기들이 드나들던 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바로 옆에는 벳자타라고 불리는 유명한 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유명해진 이유는 다른 연못처럼 고요하지 않고 어느 순간 물이 출렁거리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다량의 물이 갑작스레 유입되거나 빠져나가는 순간, 수면이 출렁거렸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물에 가장 먼저 뛰어들면 치유의 은총을 입게 된다는 속설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벳자타 연못 가에는 언제나 수많은 중환자들과 보호자들로 우굴거렸습니다. 다들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물이 출렁거리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연못을 둘러보시다가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예수님 눈에 띤 사람은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벳자타에서 가장 왕고참이었습니다. 

 

38년간이나 중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평생토록 병마에 시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보호자도 없이 하릴없이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이 출렁거려도 넣어줄 보호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환자들가운데서 가장 가련하고 불행한 환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과 연민의 마음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소동이라도 일어날까봐 조용히 다가가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묻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복음 5장 6절)

 

“선생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당연히 건강해지고 싶습니다. 제 두 발로 한번 똑바로 서보고 죽는게 소원입니다. 그러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 복음 5장 7절)

  

예수님께서는 그를 번쩍 들어 벳자타 연못에 넣어주시지 않습니다. 그저 한 말씀으로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복음 5장 8절)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의 속박과 부자유의 삶을 청산하고 해방과 자유의 길을 걸어가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제한적인 삶의 방식,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보다 넓은 세계, 또 다른 넓은 지평의 삶에로 넘어가라는 초대입니다. 

 

안식일에 발생한 환자의 치유는 유다인들에게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38년 동안이나 고생했던 환자의 치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었습니다. 그저 안식일법을 어긴 예수님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죄와 악습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바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부단히 어제의 나와 결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이 있었습니다.

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 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당신 사랑의 표지로 말입니다.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의 표징, 생명의 표징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치 야곱이 축복의 징표로 간직했던 엉덩이뼈의 상처처럼,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사순을 살되, 부활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순은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닌,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드러내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핑계없는 무덤 없다

 -반영억신부-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거리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 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대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 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건강해 지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누구에게나 자신의 병이 가장 절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 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거리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더 나쁜 일

 -송영진신부-


요한복음 5장에 있는,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

전반부만 보면,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는 병자를(사실상 불치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병을 앓고 있는 병자를) 가엾게 여기셔서

당신의 권한과 권능으로 고쳐 주신 이야기이고,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병자 치유 이야기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평범한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후반부를 보면, 그 병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이 이야기는 다른 치유 이야기들과는 구분되는,

특별한 이야기가 됩니다.

(‘치유의 은총’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병자의 ‘배반’과 ‘배은망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0-16).”

 

1) 그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그래서 예수님께 아무런 간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기대한 것은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자기를 못 속에 넣어 주는 것, 그런 정도였습니다(요한 5,7).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사람을 고쳐 주셨을까?

그의 처지가 너무나도 가엾고 딱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2) 이야기를 보면, 그 병자가 예수님께 감사드렸다는 말도 없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전후 상황을 보면, 복음서 저자가 그의 감사와 찬양을 생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치유의 은총이 은총인 줄 몰랐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은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우연히 얻은 행운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긴 세월 동안 병을 앓으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원망과 미움이 너무 깊어져서, 병이 치유된 뒤에 하느님께 감사드리거나

하느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병 때문에 너무 지쳐서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병에 걸려서 긴 세월 동안 병고에 시달릴 때,

그 ‘병고’ 자체가 감사드릴 일도 아니고, 은총도 아니지만,

그러나 병고 때문에 더 많이 하느님의 섭리를 묵상하게 되고,

더 깊이 회개하게 되고, 더 자주 기도하게 되었다면,

우리가 받고 있는 큰 은총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병고 덕분에 신앙이 더욱 성숙해지는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도 은총이 됩니다.>

 

3)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몸의 건강을 되찾은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라는 말씀은,

그가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일시적인 진통 효과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완전한 치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더 나쁜 일’이라는 말은,

‘긴 세월 동안 병을 앓으면서 누워 있었던 것보다 더 나쁜 일’,

즉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다시는’이라는 말은, 그가 죄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또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치유의 은총’을 주실 때,

‘용서의 은총’도 함께 주셨음을 암시합니다.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은 다음에 건강관리를 소홀히 해서

다시 병에 걸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다음에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고

다시 죄를 짓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4)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은 예수님과 헤어지자마자 자기를 ‘안식일을 어긴 죄인’으로 만든 사람은

예수라고 유대인들에게 가서 신고했다.” 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중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은 기쁨보다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나는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고쳐 주려면

안식일이 아닌 날에 고쳐 주지,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고쳐 주어서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가?” 라고 예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그의 행동은 ‘배은망덕’, 즉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를 배반한 일이고,

‘더 나쁜 일’이 일어나는 쪽을 선택한 일이고, 명백하게 죄를 지은 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거스르는 일 자체가 죄입니다.

<그 병자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어떤 눈먼 사람’은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요한 9,36-38).”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뜬 그 사람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몰랐고, 안 믿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은총이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바로 믿었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한 9,31-33).

그는 바리사이들의 박해를 받아도, 또 회당에서 쫓겨났어도(요한 9,34),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더욱 강한 태도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복음: 요한 5,1-16: 건강해지고 싶으냐?

 -조욱현신부-


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가 등장한다. 환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38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시고 다가가신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하고 물으신다. 환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환자의 청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누워있는 병자에게 선뜻 다가가신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신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 “일어나라!”라는 것은 치유를 내린다는 뜻이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말씀은 치유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들것을 들고”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죄에 억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너 자신을 잘 다스리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사랑해야 하는 주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직 주님께 도달하지 못했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있다. 그 이웃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들것을 지고 걸어갔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10절) 한다. 즉, 치유를 기다릴 순 없었다 해도 왜 들것을 지고 가라고 하였는가? 이다. 그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의 권위 뒤로 숨는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11절) ‘나를 치유해 주신 분의 명령을 내가 따르지 않을 이유가 뭐요?’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치유 받은 남자를 성전에서 만나신 예수께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14절)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온 그가 죄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어 그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뜻도 내포되어있다.

 

어제까지 우리는 들것에 누워있던, 물이 출렁거려도 우리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곁에 계시다. 우리를 들것에서 일으키셨다. 또한 들것을 들고 우리가 입은 은혜를 확인했다. 다시는 들것에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항상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가야 한다.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 6)

-한상우신부-


벳자타 연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

특별함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건강한 믿음의
시작이다.

우리는 그저
소중한
한 사람일
뿐이다.

누구보다
우월하지
않아도 괜찮다.

최악의 상황을
최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이시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건강한 삶의
시작이다.

시작이
반(半)이다.

다시 일어나는
시간이다.

다시 믿음을
찾는 사순이다.

모두가
건강하길
진심으로
바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신다.

우리의 아픔을
알아주시는
주님이시다.

다시 우리의
아프고 병든 삶을
건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아픔이다.

건강한 삶의
시작은
아픈 이 사실을
먼저 우리자신이
받아들이는 데
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예수님과의
만남은 아프고
병든 나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
자기개방이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가 된
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건강한 삶의
출발은 나의
이야기를
주님께
하는 것이다.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건강한 삶은
주님께
내려놓는
삶이다.

들 것을
주님께
내려놓으니

들 것을 들고
걸어갈 힘을
주신다.

살려주시는
주님이시다.

사순시기는
가야 할 길을
다시 만나는
선물의 시간이다.

베자타 연못이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
맡기고
내려놓는
건강한 믿음이
우리를 다시
건강하게 만든다.

욕심이 아닌
내려놓는
오늘이다.

봄꽃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가에 있던 한 병자에게 물으십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나 병을 앓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니 이 물음은 사실 치유 하나 바라고 벳자타 못가에 머무르는 병자에게 물어보나마나 한 너무 당연한 질문이지요.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5,7)
그는 오랜 세월 여기서 여전히 이러고 있는 이유로 답을 대신합니다. 말하자면, 건강해지고 싶기는 한데, 물이 출렁거릴 때 자기가 내려가 물에 몸을 담그도록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예수님께서 마치 그의 볼멘 소리를 못 들으셨다는 듯이 명령하십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치유의 물이라는 매개체를 초월합니다.

제1독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의 환시 대목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에제 47,12)
세상 구석구석 만물의 뿌리마다 흘러들어가 모든 피조물을 되살리고, 잎을 어루만져 윤기를 더하며 열매를 풍요롭게 하는 생수의 흐름과 감촉을 관상합니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차고 넘치는 이 대목은 성전이시고 또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라고 노래합니다.

복음의 벳자타 못가 기적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성전에서 백성을 향해 '목마른 사람은 다 당신께 와서 마시라'고 외치실 것입니다.(요한 7,37 참조)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든 피조물을 되살립니다. 이 물이 곧 우리가 받은 성령입니다.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기쁘게 마셔라."(입당송)
우리의 주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물가로 초대하십니다. 부자건 가난한 이건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은 성령과 말씀, 성사로 우리를 지탱하고 계십니다.

주시는 분이 기꺼이 내어주시니, 우리도 눈치 볼 것 없이 기쁘게 마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부족한 죄인이어도, 그분께서 우리의 메마르고 어둡고 각박해진 영혼에 잔잔히 닿고 깊숙이 스며드시면 다시 생기를 되찾을 것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생명이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생명을 건네신 이상, 우리는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운이 나쁘다고 변명하며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말하는 꼭 그 방법이 아니어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그분이 곧 생명이시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생명이신 주님을 흠뻑 마시고 생기를 되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가 받은 세례로, 성사의 은총으로, 우리가 행하는 자선과 나눔의 사랑으로 우리는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신 성령 안을 헤엄치고 있답니다. 그 생명을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채우고 마음껏 즐기시며 싱싱하게 되살아나시길 빕니다. 벌떡 일어나십시오. 벗님을 무겁게 만들던 들것을 걷어들고 힘차게 걸어가십시오. 주님께서 함께하실 겁니다. 아멘.

 나도 성전의 물?

 -김찬선신부-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어는 물이고,

물은 물이로되 살리고 열매 맺게 하는 생명의 물입니다.

 

실로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물이 없는 별에는 생명이 없고

그래서 과학자들은 우주 어디에 지구처럼

물이 있는 별이 있는지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물이 생명의 물은 아닙니다.

오염된 물, 폐수장의 물은 오히려 생명을 죽이고,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성전의 물만 생명의 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성전의 물을 세상에 흘려보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또는 매주일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가정으로 파견되고, 직장으로 파견되고, 세상으로 파견되는데

우리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입니까?

 

사실 요즘 암울합니다.

세상은 지금 종교를 비판합니다.

성당들과 교회들이 성전이 아니라 오폐수장이라고 말입니다.

 

과거 ‘천주교’ 하면 가난한 한 사람들 편에 서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설을 정말 사랑으로 그리고 깨끗하게 운영하였으며,

사제나 수도자는 자신을 세상과 교회를 위해 봉헌한 사람들로 여겼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천주교도 영리사업을 크게 하고,

천주교도 교회 운영 시설에서 정의롭지 않으며,

사제와 수도자들이 세상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지 않고,

사제와 수도자들도 세속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폭력적이고

그리고 성적인 문제들이 많다고 집요하게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우리 성전의 물을 그들이 정화 하겠다고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먼저 예루살렘성전에서 38년 병자가 치유되는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성전은 생명이 치유되는 공간입니까?

그리고 나는 성전에서 치유를 받습니까?

 

매일 미사의 영성체 때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매일 또는 주일 미사를 드림으로써

말씀과 성체로 영혼이 치유 받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독서 에제키엘서의 비유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성전의 물이 되어 세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물입니까?

 

우리의 가정은 복음화되었고 생명이 넘칩니까?

아니면 지금 우리 가정 안에서 누군가가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출근을 하면서 직장에 복음을 들고 생명을 갖고 갑니까?

아니면 직장에서 십자성호 하나 당당하게 긋지 못하고

세속인들과 똑같이 싸우고 나쁜짓하고 그럽니까?

 

예수님은 오늘 당신이 성전의 물이셨습니다.

38년 동안 앓던 병자는 성전의 물에 들어가 치유되려고 하였으나

주님은 물에 들어갈 필요 없이 당신이 고쳐주심으로써

당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요, 성전의 물이셨습니다.

 

우리도 성전의 물입니다.

우리가 성전의 물이어야 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3월 24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낫기를 원하느냐?'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1-3ㄱ.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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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가 이현세 씨의 말입니다. 그의 말 중에 ‘신의 장벽’이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천재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신의 장벽’입니다. 오늘 벳자타 연못의 병자가 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신만이 그의 자비로 그 문을 열어주셔서 당신 양 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돕는 자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신이 찾아와서 그 장벽을 넘겨줍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이 ‘38’이고, 그러면 신이 ‘2’를 줍니다. 자기를 스스로 돕는 것이 ‘38’이고, 그 사람에게 신이 마지막 퍼즐을 맞춰주시는 것이 ‘2’입니다.


      오늘 복음은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죄를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와 그 죄를 이기려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그 장벽을 넘겨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이 이전에 누워있던 자리를 이젠 들고 다닐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내가 의지하여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것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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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발생한 환자의 치유는 유다인들에게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38년 동안이나 고생했던 환자의 치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었습니다. 그저 안식일법을 어긴 예수님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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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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