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5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2021년 3월 15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예수께서 “집에 돌아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요한 4,43-54)
Jesus said to him,
"You may go; your son will live."
The man believed
what Jesus said to him and lef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하느님의 표징과 기적을 체험해 보았습니까? 간절히 기도하였던 일과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체험, 머리로 아무리 이해하려 하여도 이해되지 않는 일을 우리는 표징과 이적이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이상한 언어로 말하기도 하고 놀라운 능력과 기운으로 병을 고치는 체험, 이 또한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표징과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갈까요? 아니면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실망과 좌절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기 전에 그분의 표징과 기적을 체험해야만 믿겠다는 일종의 거래로 우리의 신앙을 전락시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왕실 관리는 아들의 치유라는 불가능한 일을 예수님께 청합니다. 자신에게도 기적을 보여 주십사고, 예수님을 찾아가서는 아들이 있는 곳으로 함께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청을 거절하셨다기보다는 왕실 관리가 청한 방법을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가지 않으시고 그저 말씀만 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그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방법을 믿고 떠나갑니다. 만약 그 이방인이 계속하여 자신의 방법만을 요구하였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시선으로 계속 예수님께 요구하였다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기적은 믿어야지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기적은 우리의 삶에서 이미 일어났지만 우리의 시선과 방법 때문에 그 기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하루를 바라본다면 일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길이고 섭리며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야기하시고 놀라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잊고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더 사랑하라고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주님께서 다 마련해 주셨습니다. 야훼 이레.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전거를 오랫동안 타고 있습니다. 요즘이야 무리하지 않고 자전거를 편하게 타고 있지만, 예전에는 먼 거리를 갔다 오기도 했고 험한 산에 가기도 했습니다. 사실 산이나 도로의 오르막길을 오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위안을 받는 것은,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내리막길을 달릴 때는 얼마나 신나는지 모릅니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시원한 바람을 가로지르며 아래로 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힘든 오르막길에서 다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신나는 내리막길에서는 많이 다칩니다. 저 역시 자전거 타다가 다쳤을 때를 떠올리면 모두가 편한 내리막길에서였습니다.
예전에 등산할 때, 산악반 선배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올라갈 때는 아주 힘이 들어. 그런데 힘이 덜 드는 내려올 때가 훨씬 위험해.”
등산도 자전거 타는 것도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나를 힘들게 하는 가장 위험한 순간인 것 같지만, 가장 위험했을 때는 편안함을 느끼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될 때였습니다. 안일한 마음을 갖게 하고, 이로써 교만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왕실 관리는 헤로데 조정의 관리이거나 유대아에 파견된 로마 황제의 신하일 것입니다. 그를 종들이 마중 나왔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을 볼 때 그가 높은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꾸짖으시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직접 아들을 만나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볼 때, 아직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종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순간에 아들이 치유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실 관리였던 아버지 역시 치유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불신의 마음에서 굳은 믿음을 갖춘 참 신앙인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우리가 실망할 방법으로 들어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겸손의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곧바로 응답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보다는 가장 적당한 시간에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기다림을 가져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주님을 굳게 믿게 되는 커다란 기쁨과 행복의 시간이 아닐까요?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에게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인생은 그런 거야.”
실제로 “인생은 그런 거야.”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호전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인생은 그런 거야. 나는 운도 지지리 없어.”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현실과 함께 살고 이 위에 굳게 서야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실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참 많아 보입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부정적인 나를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인생은 그런 거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남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게 하는 두 필수 요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서의 두 번째 표징입니다. 첫 번째 표징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있었습니다. 요한은 첫 번째 표징과 연결하라는 의미로 ‘다시’라는 말을 쓰며 이렇게 정보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또한, 이런 정보도 줍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여기서 ‘카파르나움’으로 대표되는 갈릴래아는 다른 복음에서 ‘나자렛’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실제로는 믿을 마음이 없으면서 표징만 요구하는 바리사이-율법학자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들이 첫 번째 표징을 일으키게 했던 성모 마리아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오늘 왕실 관리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으로는 믿기가 부족했으나 왕실 관리는 그 표징들로 자신 안에서 ‘용기와 끈기’를 뽑아냈습니다.
그는 왕실 관리이면서도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용기’를 보였고 예수님의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청하는 ‘끈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믿음이 없이 예수님께 청했던 것일까요? 그가 예루살렘에서 보거나 들은 예수님의 표징들은 완전한 믿음을 그에게 주지는 못했습니다. 남의 믿음으로 생겨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그 표징이 나의 것이 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종합하여 나에게서 ‘용기와 끈기’를 뽑아내야만 합니다.
미국 심리학자 에릭슨이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만 시간은 하루 3시간씩 훈련할 경우 10년이고, 하루 10시간이면 3년이 걸립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와 아마추어 연주자 간 실력 차이는 대부분 연주, 연습 시간에서 비롯되고, 우수한 집단은 연습 시간이 1만 시간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타고난 재능보다는 인내와 끈기가 그 사람을 성공으로 이끈다는 결론입니다.
‘1만 시간’을 투자할 용기와 그 시간 동안 지치지 않을 ‘끈기’는 바로 누군가의 성공을 보았기 때문에 나옵니다. 타인들이 이뤄낸 것은 그들의 표징입니다. 일단 그들의 표징을 보지 않으면 아무리 100만 시간을 투자해도 그 자리일 뿐입니다. 움직이기는 하나 목적지가 없으면 빙빙 돌 뿐입니다. 남의 성공을 보고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이제, 그 성공이 나의 성공이 되게 만들기 위해 나도 ‘용기와 끈기’를 끌어내야만 합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는 하느님의 뜻에 일반 대학을 자퇴하고 신학교에 입학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그리고 신학교에서 끝까지 버틸 끈기를 내지 못했다면 지금 가지게 된 그 작은 저만의 믿음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를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서 본 열 가지 재앙은 그저 모세의 표징이었습니다. 그 표징을 보고 홍해를 건널 용기와 광야를 이겨낼 끈기가 없었다면 성막 위에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표징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용기가 ‘세례’의 필수 요소라고 한다면 끈기는 ‘견진’에 필요하고, 그렇게 가지게 되는 믿음이 ‘성체성사’의 준비가 됩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표징은 나의 용기와 끈기를 끌어내면 그 역할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닮으려 해도 닮기 불가능합니다.
어느 날 몇몇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일단 돌아가서 매일 팔 돌리기 300번을 해 보게. 그렇게 한 달을 채우거든 그때 다시 나를 찾아오게나.”였습니다. 젊은이들은 ‘아니 팔 돌리기와 학문이 무슨 상관이 있지?’라며 의아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절반의 인원만 다시 소크라테스를 찾아왔습니다.
“잘했네. 좋아. 다시 한 달을 해 보게.”
또다시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소크라테스를 찾아온 젊은이는 지난달보다 3분의 1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한 끝에 1년이 지난 후에도 소크라테스에게 자문하러 온 젊은이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바로 ‘플라톤’입니다.
진정한 표징은 남이 일으킨 표징이 아니라 내가 일으킨 표징이어야 합니다. 내가 일으킨 표징만이 진정한 믿음을 줍니다. 표징을 일으키기 위한 용기와 끈기는 타인이 일으킨 표징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그러니 믿는 것이 있으면 용기를 내고 용기를 냈다면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커넬 샌더스”는 트럭에서 자며 환갑이 넘어서 시작한 튀김 닭 사업을 위해 ‘1,008’번의 거절을 버텨낼 수 있었기에 ‘KFC 프라이드치킨’ 창업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실베스터 스탤론”은 1,500번의 거절 끝에 자신을 20여 차례나 거절했던 감독에 의해 첫 주연을 맡게 되었습니다. 영국 수상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윈스턴 처칠이 해로우 스쿨 졸업식에서 이런 연설을 하였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대, 절대, 절대,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조재형신부-
지난 재의 수요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세 곳의 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2019년 8월 뉴욕에 도착해서 매주 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신문사 옆의 퀸즈 정하상 바오로 성당, 작년 8월부터 매주 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부르클린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당, 지난 2월 14일부터 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롱아일랜드 한인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은 한국에서 신부님이 파견 될 것이기에 5월 까지만 도와 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롱아일랜드 성당은 신부님이 곧 귀국하시니 다음 주까지만 도와 드리면 될 것입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3번의 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올해 사제 서품 30년이 되는 해라서 주님께서 특별히 재의 수요일 미사를 3번 봉헌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세 곳의 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받은 느낌이 있습니다. 퀸즈 한인 성당은 모든 것이 잘 조직된 백화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성당의 규모도 크고, 교우들도 많았습니다. 성당 안이 부족해서 친교실에서도 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롱아일랜드 한인 성당은 마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잘 정비된 모습이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은 동네 편의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모두가 가족 같았고, 친근했습니다. 퀸즈 한인 성당은 한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에 있습니다. 롱아일랜드 성당은 백인이 많이 사는 동네에 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은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 곳의 한인 성당을 사랑하십니다. 세 곳의 한인 성당도 모두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장소와 규모는 두 번째입니다. 정성과 마음이 첫 번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새 하늘 과 새 땅은 눈에 보이는 시간과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던 마구간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믿음으로 치유되었던 실로암 연못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자캐오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강도당한 이웃을 정성껏 돌보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어드리고, 정성껏 씻어 주었던 마리아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다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왕실 관리가 한 일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은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한 주간 충실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눈물은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 원거리 비대면 치료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의료진이 환자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거리가 떨어진 상태에서도 진료는 물론이고 치료까지 하는 시스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원거리 비대면 치료를 실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에 머무시는 동안 한 왕실 관리가 황급히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보니, 한걸음에 달려온 것입니다.
왕실 관리는 아들이 처한 위기 상황 앞에 체면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예수님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복음 4장 49절)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아들의 상태는 위중한데,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카나와 환자가 누워있는 카파르나움은 33Km 떨어져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도보로 간다면 적어도 7~8시간은 걸릴 거리였습니다. 낙타나 나귀를 타고 간다할지라도 네다섯 시간은 잡아야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즉시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치유와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원거리 비대면 치료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복음 4장 50절)
한 인간 한 인간의 개인적인 필요성에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가 크게 돋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달려오느라 기진맥진한 아버지를 눈여겨보십니다. 아들을 향한 각별한 사랑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그의 믿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아직 예수님 당신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물끄러미 바라보십니다.
왕실관리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는 아직 한참 낮았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의 기적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든지 다 현존하시는 멀티 플레이어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33km나 되는 장거리를 죽어라고 뛰어가지 않으셔도 원격치유가 가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였기에 예수님을 향해 집요하게 같이 가달라고 졸라대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졸라대지 않을 수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늑장부리다간 아들과는 영영 이별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탁이 아니라 거의 협박수준입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 왕실 관리였지만, 그의 간절한 눈망울과 그의 찢어지는 가슴을 예수님께서는 차마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아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확인한 가족들과 종들은 얼마나 기뻤던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왕실관리에게 알리기 위해 동네어귀까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비탄으로 가득 찼던 집안은 순식간에 축제분위기로 돌아섰습니다. 한바탕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눈앞에서도 똑같이 벌어질 풍경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힘겹게 견뎌나가고 있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큰 슬픔에 잠겨있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큰 십자가에 허덕이고 있지만, 머지않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큰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눈물은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이영근신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일련의 표징과 증거, 곧 일곱 개의 표징과 일곱 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증거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징이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신성을 증거 하는 하느님의 계시가 구체화 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파스카에 집결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순시기’의 한 가운데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전례주년에 따라 ‘기쁨주일’이 지나고, 이제 십자가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전례력에 따른 말씀’은 오히려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의 빛을 점점 더 밝게 비춥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행하신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두 번째 표징’입니다.
이 역시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아픈 아들로 절망에 빠져있던 왕실관리가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찾아가 기쁨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가파르나움에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왕실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은 그의 희망과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굳이 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백인대장과는 사뭇 달랐던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하실 때에,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루카 7,7)고 신앙을 고백하는데 반해서, 그는 단지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가야만 치유하실 수 있는 정도로만, 혹은 죽기 전에 치유해야만 되는 정도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는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직 표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종들이 와서 아들이 나은 것을 알려 주었을 때,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표징과 이적을 보고서” 비로소 온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병든 아들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하시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두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믿음이 불완전할지라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실관리 아들을 살리신 이 ‘두 번째 표징’은 믿는 이들에게는 확증을 주기 위함이요,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당신이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이제 “표징과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주님!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몰아내소서.
사랑받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완고함을 몰아내소서.
제 삶이 믿음과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주님,
믿음이 부족하오니, 도와주십시오.
의혹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치유하소서.
믿음 없이 청하기만 하고 돌아서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 주님,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구원을 부른 고통
-반영억신부-
왕실의 한 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앓아누웠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예수님께 쫓아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관리는 예수님께 관심도 없던 사람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기적을 행하실 때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에게 고통이 왔기 때문에 위신 체면 다 버리고 예수님께 달려와서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닥친 시련은 불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주님,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8-49). 하며 사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거라.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는 예수님의 응답을 얻어냈고 그 시간에 아이는 나았습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 사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 때문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관리를 애원하게 했고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면박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는 말씀에 두 말 없이 믿음을 걸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통이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왕실의 관리의 믿음이 만나서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요한4,53).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주십니다”(야고5,10). 시련과 고통은 은총의 기회이고 기적을 낳는 원천입니다.
믿음 없이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제서 밤을 지새가며 기도하고 부산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우리의 간청에 당신의 계획마저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시길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낫게 해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지혜16,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4,12-13).
그러므로 내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심을 믿고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로마12,12). “아무것도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고통은 결코 죄의 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부활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이제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고통 이라할지라도....이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욱 튼튼하여지고 아름다워지길 빕니다. 우리는 믿음의 특권에서 오는 고난의 특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곧 영광의 특권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기도란? 1. 하느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영적인 포복이다. 2. 세상 욕심의 발전소가 아니라 욕망의 불을 끄는 소방서이다. 3. 기도가 없을 때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무거워지고, 기도가 있을 때 마음은 성령과 천상의 것으로 충만하다. 4. 세상에서 가장 줄을 잘 서는 방법이다. 5. 세상의 성공에는 후유증이 따르나 기도에는 후유증도 뒤탈도 전혀 없다. 6. 세상의 모든 후원에는 용수철처럼 조건이 달려 있지만 기도에는 기도하는 사람을 하느님 아버지께 매어다는 용수철이 달려 있다. 7. 기도 없는 곳에 사람만 일하고, 기도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일하신다. 8. ‘노력 더하기 노력’이 아니라 나의 ‘노력 곱하기 노력’이다. 9. 기도가 없는 곳은 마귀의 잔치집이고, 기도가 있는 곳은 마귀의 초상집이다. 10. 하느님은 기도에 응답하시고, 기도하는 사람은 삶으로 하느님께 응답한다.

믿 음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46-50).”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왕실 관리의 믿음을 끌어올려 주신 이야기입니다.
또는, 초보 단계의 믿음만 가지고 있었던 어떤 왕실 관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들이 예수님 덕분에 치유된 일은 부수적인 이야기입니다.)
1) 이 이야기에 나오는 왕실 관리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은 믿었던 것 같은데,
그 믿음이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원하는 결과를 얻어야만 믿겠다는 태도를 버리고
결과를 보기 전이라도 믿는 믿음을 가져라.”
(2) “표징과 이적만을 믿는 단계에서 벗어나서
‘말씀’을 믿는 단계로 올라가려고 노력하여라.”
마르코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 말씀의 핵심은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가 아니라,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입니다.
결과를 보기 전이라도, 또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더라도, 믿어야 합니다.
사실 믿음이란 ‘모르는 일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나 아는 일이라면, 믿음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들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자기가 원했던 것과 다른 결과가 생기더라도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나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그것만을 지금 당장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2) 왕실 관리의 입장에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 ‘거절’로 들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를 ‘어떤 이교도 여자의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마르 7,27-28).”
여기서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우상숭배자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예수님 말씀은,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녀가 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강아지들도 부스러기는 먹는다는 여자의 응답에는,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간청을 들어주시기 전에, 그 여자에게 ‘믿음의 은총’을
먼저 주셨는데, 사실 ‘믿음의 은총’이 더 크고, 더 중요한 은총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고 우상숭배를 계속하겠다고
고집 부렸다면, 그 여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왕실 관리의 경우에도,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라는
그의 말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믿겠습니다.”,
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그가 “우선 먼저 제 아들을 살려주시면, 그 다음에 믿겠습니다.” 라고
고집 부렸다면,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은총 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3)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라는 말은,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았어도, 또 원하는 결과를 아직 얻지 못했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단계로 올라섰음을 나타냅니다.
‘말씀’만 들었을 뿐이고, 결과를 아직 모른다고 해도,
그 말씀대로 된다고 믿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뒤의 5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 4,53).”
여기서 ‘그의 믿음’과 ‘그의 온 집안의 믿음’은 구분됩니다.
‘그가’ 믿게 되었다는 말은,
“자신의 믿음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로 해석됩니다.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는 말은, “그의 증언을 듣고서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로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다 낫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총이란 무엇인가?’, 또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묵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내가 원하는 그것을, 원하는 그대로 주시는 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일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그것을, 원하는 그대로 받아내는 수단이 아니라,
모든 일은 다 주님 뜻대로 된다는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전적인 의탁’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주님께서 주실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은 모든 신앙인의 숙제입니다.)>

복음: 요한 4,43-54: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 갈릴래아의 카나에 가셨을 때, 카파르나움의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한다. 카파르나움은 카나에서 80리 정도 되는 먼 거리였다. 예수님은 애원하는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하고 말씀하셨다. 그 고관은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 종들을 만났다. 아들이 완쾌되었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먼 길을 찾아와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이 고관의 자세를 살펴보자.
우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고관이 일개 목수에 지나지 않는 예수님께 오기 위해서 먼 거리를 고생하며 찾아왔고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표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8절) 하시면서 왕실 관리를 가르치신다. 사실 그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9절) 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기 때문에 아이가 죽으면 예수님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기적들은 무엇보다 영혼을 위한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들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해 주신다. 우리가 당신의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 때문에 당신께 귀 기울이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기적은 믿는 이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과 믿음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는 기적을 기다리기보다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가셔야 아들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이 관리를 도와주신다. 예수님은 관리에게 “가거라.”는 말씀으로 왕실 관리의 믿음을 알아주셨고,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사랑과 권위로 그의 소망을 이루어주시고 계시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50절) 여기서 믿었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그는 처음부터 불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리는 대신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각부터 물어보았다. 그 시각이 예수님께서 아이가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와 온 가족들이 믿게 되었다.”(53절) 한다.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두 사람이 치유를 받았다. 왕실 관리에게는 뜻밖의 믿음이 생겼고, 아이는 육체적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지난날을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혜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보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자리에 모시고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요한 4, 50)
-한상우신부-
겨울의 끝은
새로운
봄의 시작이다.
생명의
새로운
봄날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되살리시는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실천하신다.
가본 적이
없는 길을
주님께서
먼저
걸어가신다.
죽음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죽음조차
주님에게서
분리될 수 없는
생명이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죽음의 관계가
아니라 생명의
관계이다.
일상을
되살려
놓으시는
주님이시다.
생명을
되살리시는
주님이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하느님의
생명을 결코
가로막을 수
없다.
구원의
여정이란
다름아닌
생명을 되찾는
여정이다.
오늘이 바로
생명을 되찾는
오늘이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다.
죽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다.
죽기에
되살리는
십자가의
봄이 있다.
우리의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랑의 시작은
오늘의 삶에
감사하는
것이다.
삶이
생명이다.
생명의
새날이다.
되살아나는
오늘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과 기적의 관계를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 가셨을 때, 한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시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지요.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심을 표징 유무와 효력으로 가늠하려 한 듯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9)
지금 병든 아이의 아버지는 몹시 절박하고 다급합니다. 그가 믿기 때문이지요. 그는 예수님이 자기 아들에게 가시기만 하면, 예수님을 모셔가기만 하면 아들이 치유되리라 굳게 믿기에 지금 한시가 급한 겁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
그 아버지의 간청에서 진정한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를 아들에게로 보내십니다. 그의 믿음이 이룬 바를 확인하게 해 주시려는 겁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50)
애초 그 사람의 의도는 예수님을 아들이 앓아 누워 있는 카파르나움까지 모셔가려는 것이었지요. 물론 목적은 아들의 치유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나았다니, 예수님을 모셔갈 필요가 없게 되어 버렸네요. 주님이 반드시 눈앞에 계셔야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여긴 그의 인간적 믿음이 이제 훌쩍 자랄 것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언제 들어도 행복하고 가슴 뿌듯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이 선포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 65,17)
황폐해진 땅, 무너진 성전, 모진 유배살이로 절망한 백성에게 주님의 약속은 새 희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모든 실패와 불행의 원인인 자기들의 죄악과 부정을 주님께서 깨끗이 잊어 주신다고 하시니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을 누리려면, 믿어야 합니다. 그저 '진짜 그럴 수 있을까? 어디, 한번 보자. 아님 말고...' 하는 식으로 물러앉아 지켜보는 관찰자나 방관자는 설령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서, 제 존재 안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감지하지 못할 것이니까요. 새 창조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이사 65,18)
기쁨과 즐거움은, 꿈이 무너져 버린 우리의 삶에도 빛이 스며들고 있으며, 그 빛이 꼭 지금은 아니어도 언젠가 반드시 우리를 일으켜 세울 것임을 믿는 이에게서 볼 수 있는 표징입니다. 이 약속은 믿지 않는 이에게는 죽은 문자로 남지만 믿는 이에게 반드시 실현되는 기적입니다.
표징과 믿음과 기쁨. 이 셋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 영적 여정을 함께 동행하는 벗들입니다. 꼭 순서를 정하지 않아도 모두 잘 있는지, 어느 것이 빠졌는지, 인간적으로 치우침은 없는지 감지하면서 그 균형 안을 걷는 것이 신앙의 순례길인 듯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고통스럽고 절박한 아픔을 주님께 겸손히 아뢰고, 그분의 처방이 꼭 우리가 바라던 바가 아니어도 굳게 믿으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믿는 이에게는 표징과 기쁨이 함께할 것이니, 믿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믿기에 기쁘고 행복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사순 4주 월요일-믿음의 여정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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