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2021년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3,14-21)
For 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that the world might be saved through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세상이 어둠으로 덮여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인가 빛이 나타나고 조그마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옵니다.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빛이 이제 세상으로 퍼져 나갑니다. 한 사람에게서 바로 옆 사람에게, 또 그 사람은 자신의 옆 사람에게 그 빛을 전합니다. 어둠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곳이 이제 모든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조그마한 빛으로 환히 밝혀집니다. 얼마 뒤에 있을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에 거행할 ‘빛의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위의 작은 이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 이기적인 무관심으로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자신이 더 얻고 많이 가지고자 누군가를 짓밟고 뭉개며, 이 과정에서 써먹은 거짓과 술수는 미덕이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분열과 분쟁은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약하지만 한 줄기의 빛으로 어둠을 이겨 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만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나누어 받고 그 빛대로 살아갈 때, 그리고 그 빛을 한 사람씩 나누어 가질 때에야 비로소 세상은 점차 밝아집니다. 나 혼자만 밝아진다고 좋아하기보다는 그 빛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환히 밝아질 것입니다.
어둠을 이겨 내는 방법은 오직 그 방법뿐입니다. 누군가는 그리스도의 빛을 손안에 받았지만, 어둠이 좋다며 그 빛을 꺼리고 외면합니다. 어떤 이는 빛을 받았지만, 빛을 어떻게 전할지 몰라 함지 속에 넣어 둡니다. 또 다른 이는 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시다며 갓을 씌워 빛을 가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러 빛으로 오셨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 빛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해 버립니다. 이것이 곧 심판입니다. 심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갈라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지금 심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들여다 봅시다.
십자가 주님을 바라보며 나의 죄를 보십시오
-키엣 대주교-
기둥 위에 매달린 모세의 구리뱀을 보라고 하신 것처럼 새 생명을 얻으려면 십자가를 보아야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나의 죄를 바라 보는 것입니다.
그 옛날 먼 길을 가느라 지친 백성들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사람들을 죽게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하시며 뱀에 물린 자가 그것을 보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리뱀을 보듯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합니다.
죄는 영혼을 파괴하고 왜곡되고 추악하게 만들고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주님을 올려다 볼수 조차없는 죄를 지은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영광을 위해 당신은 치욕을 당하셨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당신은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어둠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려 주시기위해 당신은 높은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나의 죄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치욕과 고통,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나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죄의 깨달음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당신 사랑을 증거하시기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까? 수도 없이 많은 죄를 겹겹이 쌓아 어둠속에 숨겨둔 나약한 인간일뿐인 우리를 위해 왜 당신께서는 그런 무모한 사랑을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 볼수록 점점 쌓여가는 나의 죄를 깨달습니다. 나의 죄를 깨달을 때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지 깨달게 됩니다.
사막에서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게되는 순간 자신들을 구원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것을 깨달게 됩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주님께 구원받기 위해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주님의 은총없이 죄의 어둠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없이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나약한 인간입니다. 진실된 참회만이 주님의 은총을 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끝에는 어둠과 희망의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을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가는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저희를 주님 곁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1. 주님께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 되새겨 보십시오
2. 주님의 구원이 필요한 나약한 사람입니까?
3.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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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능지수(IQ)가 높으면 될까요? 그런데 이 지능지수는 20%의 영향만을 준다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역경지수(AQ)와 감성지수(EQ)라고 합니다. 감성지수는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절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마음의 지능지수입니다. 그리고 역경지수(AQ)는 역경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해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지수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일 중요한 지수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지능지수인 것처럼 생각해서 “너 IQ가 어떻게 돼?”라고 묻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경지수라고 합니다. 이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이 확실한 성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적개심을 가지고 복수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으로는 역경지수가 높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감정지수가 떨어져서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다시는 이런 불행이 반복되면 안 된다”라는 마음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 자체에 사로잡혀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쉽게 포기하면서 어렵고 힘들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역경지수를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감정지수도 올라가면서 더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해서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시지요. 즉, 죄라는 독사에게 물린 사람은 누구나 주님만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보여줍니다. 위대한 의사이신 주님께서는 죄로 인해서 곪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몸을 굽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세상에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당연히 실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유혹은 참으로 많습니다.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힘을 직접 체험했지만, 광야에서 하느님을 배신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섰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죄의 유혹에서 주님의 일을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줍니다. 계속 주님의 일을 포기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주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구원의 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역경지수를 높여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인이 이렇게 글을 쓴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뼈를 깎는 아픔과 피를 말리는 고통이 따른다.”
맞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창작은 어려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고통을 안고서 과연 아름다운 시,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주는 시를 쓸 수 있을까요? 본인 스스로가 이렇게 힘든데 말이지요.
의무감에 가득 차서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글 쓰는 것 자체가 즐겁다면 어떨까요? 물론 좋아하는 글만을 쓸 수도 없겠지요. 때로는 비판과 한이 담긴 글을 써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순간에도 한 가지가 있어야 행복하게 글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사랑에 빠져라.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러면 사랑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머무는 사랑의 사람이 되면 어떨까요? 스스로도 행복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응 믿어야 하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불뱀에 물렸던 사람들이 구리뱀을 보고 치유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이 구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다 심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다 불뱀에 물려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하지만 죄에 물든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느님 외아들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얻어집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구리뱀을 보고 치유를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먼저 모세의 말을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구리뱀의 이름이 곧 모세인 것입니다.
국어사전에서 ‘이름’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어떤 사물이나 단체를 다른 것과 구별하여 부르는 일정한 칭호”라고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이름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을 일컫는 칭호입니다. 누가 내 이름을 종이에 써서 태워버렸다고 해서 내가 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분은 나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이 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는 실존 인물 ‘제리 콘론’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아일랜드 인 제리 콘론이 망나니처럼 살기는 하였지만 큰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 폭탄 테러범으로 무기징역을 살게 됩니다. 이때 영국은 무고한 그의 아버지까지 감옥에 가둡니다. 아버지는 14년간 기도로 잘 참아냈지만 결국 감옥에서 숨집니다. 만약 제리 콘론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영원히 죄인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싸워 무죄를 입증하고 자신과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싸운 결과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 자체는 아니지만 그 사람의 존재를 품고 있는 그릇과 같고 그 사람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영광을 받으면 그 이름의 주체도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리뱀을 보고 구원을 받았던 이들은 결국 구리뱀의 이름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구리뱀을 계시한 인물이 누구인지 압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아버지를 품고 계시고 아버지를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품고 있으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은 그리스도의 계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곧, ‘교회’입니다. 교회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우리는 매 주일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보편 된 교회를 믿으며”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이기 때문에 교회를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려면 먼저 가톨릭교회를 믿어야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겨울왕국 2’에서 안나가 동굴에 갇혀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눈사람 올라프의 희생 덕분으로 한 줄기 빛을 봅니다. 올라프는 마치 언니 엘사의 분신과 같습니다. 엘사의 목숨이 끊어지면 올라프도 죽습니다. 엘사가 올라프를 안나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가 동굴에 갇혀 죽지 않도록. 올라프는 무한 긍정 에너지로 엘사에게 빛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움직일 힘도 없었던 안나는 엘사와 올라프의 희생 덕분으로 힘을 얻어 그 동굴을 빠져나옵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은 그 동굴 속과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올라프와 같고 엘사와 동굴 속으로 비치는 빛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구원이 없습니다. 다른 구원의 중개자도 없습니다. 올라프를 거쳐야 엘사에게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 자체가 빛이라 믿는 사람들, 혹은 빛으로 나아갈 길이 여러 개라 말하는 사람들, 혹은 교회 없이 빛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면 자신도 빛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외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것 외에는 구원이 없고, 그 믿음은 당신께로 이끌도록 파견하신 교회에 대한 믿음에 근거합니다. 교회가 구원자이신 분께로 이끄는 유일한 길임을 믿어야, 교회 울타리 안으로 사람들을 이끌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선교의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흐리멍덩한 교리에 휩쓸리지 맙시다. 교회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CCC, 846)

-조재형신부-
2019년 안식년을 지내면서 동창신부님과 이탈리아에 있는 ‘돌로미테’로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10일 동안 산장에서 자면서 산행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출발하면 다음 산장까지 오후 4시쯤 도착하였습니다. 점심은 산행 중에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친구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것은 고단하고, 힘든 일입니다. 산행의 피곤함을 덜어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들에 핀 꽃을 보면서,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일행과 담소를 나누면서 피곤함을 잊습니다. 산행을 이끄는 대장은 적당한 시간에 모두가 지쳐갈 무렵에 쉬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20분 정도 쉬면서 물도 마시고, 짐도 다시 정리하고, 신발 끈도 다시 묶었습니다. 쉬는 시간이 없다면 산행은 고행(苦行)으로 끝날 것입니다. 잠시 쉬는 시간이 있기에 산행은 지난 날의 삶을 돌아보는 수행(修行)이 됩니다.
군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서 매년 유격훈련을 받습니다. 유격훈련에는 계급이 필요 없습니다. 모두가 훈련병입니다. 줄을 타고 오르기도 하고, 기구에 매달려 계곡을 건너기도 하고, 줄에 의지해서 절벽에서 내려오기도 합니다. 훈련을 받기 전에는 체조를 합니다. 조교는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서 체조에 구령을 붙이도록 하였습니다. 마지막 번호에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소리가 나면 체조의 숫자는 배로 늘어났습니다. 고된 훈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의 진한 전우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훈련 중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호랑이 같은 조교도 그때는 담배를 나눠 피우는 전우가 됩니다. 장기자랑을 하기도 합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고된 훈련의 피곤함을 달랩니다. 유격훈련에 흘리는 땀방울은 전쟁에서 흘릴 피와 같다고 합니다.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은 사순시기를 지내는 교구민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난해 사순 시기에 우리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미사의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갑작스러운 상황이 우리 모두의 삶을 혼돈으로 내몰았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하고 힘든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회개의 시간인 이 사순 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고통을 동반하지만 그 고통 역시 무의미하지 않고 때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고난과 고통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먼 훗날 코로나19는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인류에게 잠시 뒤를 보게 하였던 성찰의 시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오늘 사순 제4 주일의 말씀은 고된 산행 중에 잠시 쉬는 시간처럼, 유격훈련 중에 잠시 쉬는 시간처럼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폭풍우를 이겨낸 사람이 더 깊고,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인생은 폭풍우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폭풍우를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이제 곧 유배의 시간이 지나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고난이 끝날 것이라고 희망을 전해 줍니다.
오늘 복음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과 같습니다. 해가 뜨면 곧 말라버리는 이슬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이영근신부-
오늘은 사순 4주일로, “기쁨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입당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즐거워하여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으로 기뻐 뛰며 흡족해 하리라.”
그리고 <제1독서>에서 역대기 저자는 주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잃고 성전은 파괴되고 이방인의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 유배를 끝내주시는 기쁨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실현한 구원과 그리스도께서 실현한 부활을 함께 노래하며, 우리를 기쁨에로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말해줍니다.
흔히 말하는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 혹은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이 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왜 오셨고, 무엇을 하셨는지를 한 마디로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 한 마디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여기에는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그 사명의 기원과 본질이 “하느님의 사랑”임을 천명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이나,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줍니다(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사랑한 나머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친다).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려고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세상과 모든 사람들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축복의 자리요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혹 우리는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속정신”과 ‘어둠’입니다.
그것은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같은 것들 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사는 이타적인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곧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그렇습니다. 세상에 빛은 이미 왔고,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구원의 삶과 사랑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빛이 비추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이 감겨있어 빛을 보고 못한 따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피앗’의 응답이 구원을 불러옵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그러니 <시편>(36,11)의 말씀처럼, 빛으로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빛이 오면 어둠은 물려갈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어둠을 볼 수 있음은 이미 빛이 비추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둠인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둠을 바라보기보다 어둠을 비추어주는 빛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사실, 어둠은 어둠을 보며 어둠으로 이끌지만, 빛은 빛을 보며 빛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이미 세상에 왔고,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며, 기뻐합니다. 오늘도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운 하루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양손을 못에 내어주고 가슴을 열어 창을 받아들이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송영진신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4-17).”
1)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또 베드로 사도는 최고의회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는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2)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기력한 패배로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승리라고,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일은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은,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기 때문에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일과 비슷합니다.>
3)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목적’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모두 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냥 ‘믿음’은 아니고,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사람의 아들 안에서’ 라는 말은,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밖’에서는(예수님이 아니면)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4)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을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마태 22,37).
그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일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에도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회개와 구원만을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바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32).”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되찾은 양의 비유’를 보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 기뻐한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15,7).
우리의 회개와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도, 하느님께도 ‘큰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느님께서 크게 슬퍼하신다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8-21).”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시고(마태 12,20),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십니다(마태 18,12).
그래서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격이 많이 부족하고, 노력도 많이 부족하더라도,
정말로 구제불능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버림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기를 희망하지 않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만이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 심판을 선택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끝까지 구원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회개하려고 애를 쓰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기쁨의 장미주일로 표현되고 있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어렵고 힘든 결실을 촉구하는 엄숙함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빛으로써 세상에 보내 주셨다. 이 빛을 피해 숨는 것은 이미 심판을, 즉 죽음의 판결을 받는 것이다. 역대기 하권에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이유를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 하느님의 비탄에 찬 간절한 호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약속의 하느님께서는 키루스의 해방칙령을 통해 한 가닥 희망을 보여주신다. 이것으로 바빌론 유배가 끝난다. 오늘의 전례가 “기쁨”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1독서의 이 마지막 키루스의 해방칙령 때문일 것이다.
복음: 요한 3,14-21: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복음에서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심판의 주제가 전개되고 있다. 그 심판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심’으로써 드러난다. 인간이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 속에 살 때,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 반대로 그 사랑의 선물에 대해 문을 닫을 때는 자신 안에만 있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먼 사람이 되고 구원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 되고 만다. 주위의 모든 것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는 때, 어둠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다.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나를 심판으로 이끄는 것이다. ‘높이 들리심’이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리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높이 들릴’ 수 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새로 남’이란 오로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며, 예수님의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도 높이 들릴 수 있다. 예수께서 수난이 가까웠을 때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라고 하신 것은 당신 사랑의 힘을 확인시켜 줄 뿐 아니라,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 앞에서 ‘높이 들리신’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다. 즉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통해 계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 어떤 면에서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느님의 사랑이 심판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이고,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죽음을 담보로 우리 인간의 구원을 택하셨다. 즉 인간에 대한 심판은 바로 이 사랑의 위대함에서 오는 것이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빛을 거절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생명까지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 심판의 선포는 바로 인간 자신이 하는 것이다.우리가 빛을 외면할 때는 자기 자신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에 대해 그 빛을 탓할 수는 없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19-20절). 우리의 행실이 드러날까 봐 빛을 멀리하는 것, 즉 심판을 피하려고 빛을 멀리하는 것 그 자체가 더 무서운 심판이 된다. 빛을 멀리한다는 것은 어둠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단죄받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1요한 4,16 참조)을 믿지 않을뿐더러, 그의 아집과 오만불손한 자만으로부터 그를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2독서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보다는 해방의 행복한 결과에 주안점을 두고 ‘기쁨’으로 초대한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 2,4-6). 이처럼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은 사순절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하느님의 빛을 더욱 가까이하는 삶이 되어 ‘높이 들리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과 더불어 변화될 수 있는 삶을 바치기로 하고, 또한 이 사순시기가 우리가 높이 들리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로 되어야 한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영광,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한상우신부-
봄이
왔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셨다.
우리와 함께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호흡하신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 세상에
오셨다.
사람의 아들은
세상의 아픔을
피하지 않으셨다.
사랑으로
우리 곁에
계시며
아픔속에서도
삶의 맛을
함께 하셨다.
우리의 죄까지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셨다.
우리의 약함까지
사랑하게 하시는
참된 구원이다.
구원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가르쳐준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괴로움을
치유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게하신다.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의
절망까지
이겨내게
하신다.
구원이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사랑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귀한
자녀임을
깨닫게 하신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을
완성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인간은 배신하고
하느님은 끝까지
사랑하신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되었다.
구원은
실천이다.
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사랑을 주셨다.
구원은 이제
하느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저마다의
삶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이 사순시기가
십자가의 상처를
바라보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드린다.
하느님께서
오심으로
구원이
시작되었다.
십자가
사건은
구원의
절정이다.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다.
새로운 삶을
주시는
분이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알려 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요한 3,14)
이 말씀은 민수기에 언급된 광야 사건을 가리킵니다(민수 21,4-9 참조). 물이 없다고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는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백성을 물어 죽이자, 모세의 간청으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해결책이 구리 뱀이었지요.
방금 전의 불신앙을 거두고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본 사람은 불 뱀에 물렸더라도 목숨을 건집니다. 그래서 이 일화는 불신에서 믿음으로 돌아선 이들에게 내린 자비와 구원의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모세처럼 민족에게 해방을 선사한 또 다른 메시아가 등장합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일으키셨다."(2역대 36,22)
주님의 말씀이 이방인 임금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민족 출신이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라 불리는 키루스를 통해 이루어진 이 해방 사건은 정통 유다인들은 물론 우리까지도 놀라게 만들며 고정관념의 허를 찌릅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
간결한 이 명령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을 선사했을지요! 키루스는 이방신인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주 하늘의 하느님"으로 칭하며, 그분에게서 받은 임무를 기꺼이 수행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누구를 통해서 올지 모르는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믿고, 순종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모세의 구리 뱀처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당신의 외아들이십니다. 이를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이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
믿는 것만으로 심판받지 않는다니 하느님의 관대한 배포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진정한 주님의 종, 메시아라 믿고 고백하는 이는 주님께서도 무한히 믿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를 천상 잔치에 들이기 위한 절차나 거름망이 불필요하다는 뜻도 되겠지요.
제2독서에서는 그 믿음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에페 2,8)
우리 구원은 먼저, 은총을 통해 옵니다. 우리 편에서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달렸다는 의미지요. 구원은 또 믿음을 통해서 옵니다. 자신이 구원받았음은 믿음을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유한 재물의 수량이나 건강 지수, 권력이나 명예 등을 구원이라고 하지 않지요. 이것들은 믿음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측량이 가능한 것들이니까요.
믿음 또한 구원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자신을 좀 더 알아갈수록 별볼일 없는 죄인의 실존과 맞닥뜨리기 마련이지만,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허락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희망할 수 있습니다.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입당송)
믿음과 은총을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오늘 미사는 그래서 이렇게 기쁨의 독려로 열린 것입니다. 교회가 전례 안에서 기나긴 사순 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잠시 쉼표를 찍고 기뻐하라며 숨 돌릴 틈을 주시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자신의 나약하고 죄스러운 모습으로 슬프고 우울하다면 오늘의 말씀에 더 깊이 머물러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실패자처럼 보이는 자신의 실존이 새로운 눈으로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은총이 충만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에페 2,10)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복된 오늘 하루를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당신을 주님이라 믿고 고백하는 우리로 인해 그분도 기쁘실 겁니다. 아멘.

말씀 나누기 - 사순 제4주일-덕분에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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