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9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2021년 3월 9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 18,21-35)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강의 시간에 이런 질문을 던졌던 기억이 납니다. “본당에서 가장 작은 이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범위를 조금 좁혀서 다시 질문해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와 신자 가운데 누가 더 작은 이일까요?” 강의를 듣는 신자들은 자신들이 더 작은 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제가 신자들보다 작은 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야 하는 사람이 사제입니다. 자신보다 신자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현실은 다를 수 있지만, 사제는 어떤 이들의 말처럼 갑이 아니라 을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약자이며 가장 작은 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덜 가졌고, 더 고생하고 있으며, 더 아프고 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자신만을 향하게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은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들과 셈을 하는 임금은 자신보다 강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금은 종들을 모두 약자라고 생각하기에 잘못을 하거나 주인의 명령을 어기더라도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받은 종은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약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더 큰 빚을 지고 있고, 임금에게 고초를 겪었기에 자신을 약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괘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배은망덕한 채무자로만 생각합니다. 그에게 용서와 자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와 아픔, 힘겨운 인내와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면 누가 가장 작은 이인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다면 받은 것들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원칙과는 거리가 너무 커 보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경쟁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혹시 유치원에서부터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경쟁의 시작입니다. 다른 학생과의 비교를 바탕으로 점수가 매겨지지요. 이 시간이 중학교, 고등학교 여기에 대학교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서 끝나도 꽤 긴 시간을 경쟁에 쏟아부었다고 할 수 있는데, 취업과 승진을 위해 계속해서 경쟁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가족을 비롯해 가까운 사람, 아니면 나와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이에게만 사랑을 주려고 합니다.
이런 차별적인 사랑을 하기에 미움이라는 감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여전히 경쟁 속에서 이기는 것을 최고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상황에서 마음의 병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진정한 가치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사랑을 ‘우리가 하나라는 그 느낌이 바로 사랑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하나라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아닌 하나라는 느낌을 늘 느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마음의 병을 없애고 진정한 가치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셨던 무조건적인 사랑을 묵상하게 됩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바로 ‘용서’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과 자애를 비롯한 모든 일에서 당신처럼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바로 용서의 모습입니다.
카인을 해친 자는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도록 정해졌고,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앙갚음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앙갚음할 마음을 내려놓고 대신 그만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노여움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속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노여워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일흔일곱이라는 숫자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아담에서 예수님께 이르는 세대를 일흔일곱으로 루카 사도가 나누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즉, 한 세대도 빠지지 않는 용서라는 것으로, 용서 안 될 죄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조건적인 사랑으로는 마음의 병을 없앨 수 없습니다. 오직 용서라는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문제를 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맞추기 위해서는 풍속화의 원조라고 하는 피터 브뤼겔의 ‘시골의 결혼잔치(1568)’를 봐야 합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긴 시간을 줄 수 없습니다. 딱 15초만 봐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아주 자세히 봐야 합니다.
이번에는 단순한 사각형이 하얀 도화지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문제를 낼 것이니, 15초 동안 보십시오. 아주 자세히 봐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 15초의 시간을 생각해보세요. 아마 피터 브뤼겔의 그림을 보는 15초는 짧게 느껴질 것이고, 단순한 사각형을 보는 15초는 길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분주하게 그리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1991년 독일에서는 ‘직장이나 가정에서 종종 분주함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25%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49%는 일정이 빠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수치가 어떻게 변했는지 2001년에 다시 조사했습니다. 35%가 ‘그렇다’라고 대답했으며, 60%는 일정이 빠듯하다고 말했습니다. 빠른 노동의 속도, 장비의 발전, 인원의 증가, 그래서 노동 시간도 줄어들었지만, 더 분주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많은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순한 삶이 필요합니다. 여유로운 삶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용서의 완성은 그 사람과의 관계 회복으로 얻는 기쁨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용서’가 주제입니다. 베드로는 하루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 못 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평생 한두 가지 잘못 한 것이지 하루에도 일곱 번씩이나 잘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베드로가 무척 화가 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만 탈렌트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수조 원을 탕감받은 사람이 수천만 원 빚을 진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면 하느님도 정의상 다시 수조 원을 갚으라고 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일만 탈렌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가 씻긴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 누군가 사업에 실패하여 부도가 났을 때 돈 많은 사람이 그냥 100억을 거저 주려 하는데 그 사람이 100만 원 빚진 사람을 재판에 걸면 100억 주려는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더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용서가 결코 빚진 것을 탕감해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빚을 탕감해준다는 것은 이전의 빚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 모든 죄를 잊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의 완성은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다시 회복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일만 탈렌트를 탕감해 준 임금은 그 빚 때문에 자신에게 오지 못하는 사람과 다시 회복되는 관계 때문에 기쁩니다. 또한, 그 탕감받은 사람이 누군가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을 보면 더 기쁠 것입니다. 용서의 궁극적 목적은 관계의 회복에 있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의 마지막 부분에는 ‘가시밭길 위의 보속’이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모니카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평생 여섯 동생을 키우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하며 살았고 결혼도 하지 못했습니다. 유방암에 걸렸지만, 돈이 없어 치료도 못 받고 병만 키우다 도저히 안 되어 이젠 혼자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게 해 달라며 찾아온 것입니다. 동생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고 하여 연락도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돈도 없고 그러면 조금 더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술을 거부했습니다. 동생들을 위해 살 만큼 살았으니 빨리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수녀님은 삶의 의욕이 없는 그 자매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수술비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자매님은 온종일 기도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성모님께서 “딸아, 내가 다 안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매는 주인집에서 일할 때 음식을 몰래 가져다 동생들에게 준 사실을 성모님께서 다 안다고 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은 주인에게도 이미 용서를 받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둑질한 것이 창피해 고해성사는 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수녀님은 병자성사 때 고해성사를 하라고 했지만, 창피해서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에게 미리 그 사실을 말씀드렸고 신부님도 고해성사 중에 그 죄는 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대신 그 이야기를 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수녀님께 말했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수술을 잘 받고 70세가 넘기까지 잘 사셨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동생들을 위해 행한 작은 죄까지도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자신도 남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자매는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에게 보답하지 않는 동생들을 다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기 싫고 빨리 죽고 싶은 만큼 삶에 의욕과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 그만큼 용서받은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너무 엄하신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도 동생들을 용서하는 것이 그만큼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삶이 너무 어려워 그냥 죽는 것을 원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미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상대가 나에게 한 일을 잊는 것이고 그것을 넘어서서 상대와 함께 있어도 기뻐야 합니다. 기쁨이 없으면 용서도 진정으로 할 수 없고 한 것도 아닙니다. 미운 사람을 안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어도 행복할 만큼 일만 탈렌트 탕감 받은 사실을 즐겨야 합니다.
마리아 고레티 성녀는 자신을 찌른 사람을 용서하느냐는 사제의 질문에 죽어가면서도 “저는 그분을 용서할 뿐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함께 살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이유는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또한 쉽지는 않겠지만 용서의 최종 목적지는 그 원수와 같은 사람과의 기쁜 관계 회복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한국과 미국 성당의 장례를 보면서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보게 됩니다. 고인을 추모하며 연도를 바치고, 장례미사를 하는 것은 비슷합니다. 한국은 3일 장을 하면서 추모객들이 빈소를 찾아와 조문할 수 있도록 합니다. 고인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얻기를 바라며 가능하면 자주 연도를 바칩니다. 조문객들이 식사 할 수 있도록 음식을 마련합니다. 입관 예절과 출관 예절은 가족들 위주로 합니다.
미국은 ‘Viewing'이라는 예절을 합니다.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며, 조문객들이 함께 연도를 합니다. 연도를 마치면 고인에게 다가와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고인의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코로나19로 지금은 하지 않지만 대부분 유족들과 포옹을 합니다. 고인의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화면에 고인의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여 줍니다. 고인의 젊은 시절, 중년의 모습, 노년의 모습과 가족들의 사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니다. 이 생에서 마지막으로 고인의 모습을 보며 기도합니다. 고인의 삶을 추모하는 영상을 보며 천상에서도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Viewing' 예절에서 고인의 젊은 시절, 중년의 모습, 노년의 모습과 가족들의 사진을 보면서 고인을 추모하듯이, 다니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사악, 이스라엘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성인들의 통공을 바라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듯이, 조상들을 벗으로, 종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여기셨듯이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기를 청합니다. 연도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기도는 ‘성인 호칭 기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성모님의 특별한 전구를 청합니다. 천사들의 도움을 청합니다. 12사도와 교부들의 전구를 청합니다. 은수자와 수도자의 전구를 청합니다. 모든 성인과 성녀의 전구를 청합니다. 비록 나의 힘만으로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성인들의 전구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어로 용서는 ‘Forgiveness'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 용서이지만,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도 용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것을 일곱 번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기다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뉘우치는 사람까지 받아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리며, 우리들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이지만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가능해집니다!
-양승국신부-
복음서를 읽고 묵상하다보면 우리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자동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언제나 우리가 좀 더 잘 되기를, 우리가 좀 더 큰 나무로 성장하기를, 우리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촉구하시며 격려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진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애틋한 사랑이 없다면 관심도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어떻게 하든, 무얼하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성장이나 변화나 회개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애지중지하시다보니 언제나 자극하시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마 베드로 사도가 수제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어떤 다른 제자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던가 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누가 가장 치열한 경쟁자였던 요한 사도, 아니면 이미 마음이 딴데로 가 있었던 배반자 유다가 아니었을까? 짐작은 갑니다.
아무튼 제대로 한번 크게 언쟁을 했던지, 화가 잔뜩 난 베드로 사도가 씩씩대며 스승님께 와서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오 복음 18장 21절)
베드로 사도는 한두번도 아니고 일곱번 용서면 충분하겠지? 생각하고 넉넉잡아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을 완전히 뛰어 넘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18장 22절)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위 말씀을 통해 베드로 사도와 오늘 우리에게 초대장 하나를 내미신 것입니다. 용서의 사도직을 실천하라는 초대장입니다.
나자렛에서의 오랜 숨은 생활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의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인간 관계 안에서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상처를 몸소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깊이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용서 없이 활기차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이 없다는 것, 용서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이나 축복도 없다는 것, 용서없이 삶의 기쁨이나 보람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그 어려운 용서의 장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저 역시 그 오랜 세월 성찰하고 기도해왔지만 아직도 용서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참으로 힘든 일이 용서하는 일입니다. 백번 천번도 더 용서하자고 다짐하지만, 말처럼 쉽게 되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일이 용서입니다. 저 위쪽의 도움,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결국 용서에 앞서 가장 중요한 노력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이영근신부-
‘사순시기’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그 한편에는 “회개”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가지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
이는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혹은 몇 번 해보고 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받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무한히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그렇게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끝까지’ 용서하라고만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를 깨우쳐주시고, 그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그 답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줍니다. 곧 비유 속의 ‘악한 종’이 왜 자신에게 빚진 이를 용서하지 못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비유 속의 임금은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의 빛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33)
그렇습니다. 그 ‘악한 종’이 동료를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한 데 있었습니다. 곧 ‘자신의 빚이 먼저 다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용서와 자비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에도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하기에 앞서, 오히려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받았음을 ‘먼저’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우리가 잘못을 고백하고 인정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이는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고 그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곧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용서를 청하지 않는다고 해도 미루지도 말고, 용서를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며,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이는 사랑과 진실한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먼저’ 용서하고, 일흔 일곱 번까지, 곧 끝까지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참아 달라’는 형제의 간청에 어떻게 하는지요? 당연히 참아 줄뿐 아니라, 청하지도 않은 용서까지도 하는지요? 혹 오히려 잘못을 들추며 질타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고, 끝까지 용서하되, ‘먼저’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먼저’ ‘끝까지’ ‘진정으로’ 용서받았음에 감사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꺾이고 또 꺾이어도 결코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멘.

나는 용서받아야 할 죄인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능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 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피조물로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깊은 곳을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아니 내가 부족함과 허물을 안고 살아 왔음에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전히 사랑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인정한다면 용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분을 사기지 못해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져 죽이려할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특별히 많이 나타나는 병, 홧병은 용서하지 못해서 오는 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나 자신을 위해서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이용한 악의 세력과 싸워야지 그 사람과 대적할 일은 결코 아닙니다. 억지로 용서하려 하지 말고 동안에 받은 은혜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만큼은 용서의 자유를 누리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용서
-반영억신부-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횟수를 정하지 말고 무한정 용서해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용서를 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제가 형제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일곱 번까지는 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나는 형제를 무한정 용서하는 것을 대단히 어렵게 생각하고 있지만,
누군가가 이미 나를 그렇게 무한정 용서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있을 수도 있다고 표현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많습니다.)
사실 겉으로는 잘 표시가 나지 않더라도, 바로 그렇게
용서와 자비를 받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혹시라도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남을 용서할 일은 많았지만,
남에게 용서청할 일은 한 적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교만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한정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이
무한정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회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과 실천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면,
그 죄는 점점 더 ‘큰 죄’가 됩니다.
‘소죄’라도 계속 쌓이면 ‘대죄’가 됩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마태 18,24-30).”
1)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 저도 남의 잘못을 용서하겠습니다.” 라는
기도가 아니라, “저희가 지금 용서를 실천하고 있으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용서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용서를 실천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를 ‘주님의 기도’에 맞추어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의 간청을 매정한 종이 들어주지 않은 일이
먼저 있었고, 임금에게 끌려가서 제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그러면 임금은 그에게, “너는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면서도
어찌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느냐?” 라고 말할 것입니다.
2) 그 종과 동료 사이의 일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로,
임금과 그 종 사이의 일은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생기는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심판 때에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려면
‘지금’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간청할 자격을 잃게 됩니다.
(내가 지금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다면,
나중에 하느님 앞에 섰을 때에 그 형제가 나를 위해서 변호해 줄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지금 형제에게 무자비하다면,
나중에 그 형제는 나의 죄를 고발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은 그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3) ‘매정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그 종이 애원을 할 때에는
한없이 자비로운 모습이었다가 그가 자기 동료에게 매정하게 행동한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대단히 엄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임금의 변덕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면서 동시에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심판대에 설 때에는 하느님의 정의를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시는 분이지만(마태 18,14),
마지막 심판 때에는 완벽하게 정의를 실현하시는 분입니다(마태 25,31-46).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수 있는 기회는 지금입니다.
나중에 심판대에 선 다음에는 그런 기회 자체가 없습니다.
4)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시는 것도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자비와 용서를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천하는 회개는 용서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고해성사를 보아야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받은 용서를 우리 자신이 스스로 저버리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용서를 취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 하는 것도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마태 18,33).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이미 받은 용서의 은혜를 스스로 버리는 일입니다.

복음: 마태 18,21-35: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베드로가 주님께 제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22절)고 하셨다. 일흔일곱이라는 수의 신비는 이 특별한 수가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았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많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가 우리에게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께 한없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에게 일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과 셈을 시작한다. 종은 많은 돈을 맡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많은 돈을 잃은 듯하다. 이익을 내기는커녕 엄청난 돈을 잃어 많은 빚을 지고 말았다. 임금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탕감받는 빚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려 줌으로써 그를 가르치고자 했다. 그도 그와 같은 자비의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했는가?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완전히 철저하게 소외되는 것을 뜻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 7,23; 루카 13,27)라는 가차 없이 무서운 말을 듣는 사람들이다.
종은 무릎을 꿇고 참아달라고 탄원한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27절) 주인은 종이 이 일에서 배워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자신의 불행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그가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탕감해 주기는커녕 참아주지도 않고 그를 옥에 가두어 빚을 갚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는 영원히 고문 형리에게 맡겨졌다는 뜻이다. 그는 결코 그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하느님을 이렇게 사악한 사람의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 형제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 21)
-한상우신부-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계신다.
삶이
용서이다.
용서의
역사를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삶을
아는 것은
용서를
아는 것이며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용서의
관계이다.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묻게된다.
절실한
물음 안에
절실한
용서가 있다.
용서는
연민을
안고있다.
회개의 삶은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용서의 삶이다.
용서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마음을
만나는 치열한
여정이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결코 용서를
체험할 수 없다.
하느님 나라의
체험은 용서를
통한 치유이다.
용서는
먼저
우리자신의
삶을 치유한다.
용서와 회개는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여정을
걸어간다.
우리의 삶이
그래도
살만한 삶이
되는 것은
용서가 있기
때문이다.
용서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것은
용서이다.
사람의 여정은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용서의 여정을
걸어간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용서이다.
참된 회개는
마음으로부터의
참된 용서임을
이 사순시기에
다시 배운다.
고통을
치유하는
용서이다.
하느님을
되찾는
용서이다.
봄을
만나게 하는
용서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자비를 이야기하십니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마태 18,27)
자비는 가엾은 마음에서 우러납니다. 주인이 탕감해 준 빚 만 탈렌트는 어마어마한 액수지요. 그 종과 가족이 평생 노예살이를 해도 갚기 어려운 금액이니 주인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이제 모든 게 주인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주인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물질적 손해를 앞섭니다. 엎드려 빌며 사정하는 종에 대한 연민으로 더 이상 계산하거나 따지지 않고 그 무게를 덜어준 것이지요. 자비는 득실에는 눈을 감고 앙심은 털어버리고 그저 마음을 따라갑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는 어느새 하느님 마음을 소유하게 되지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마태 18,33)
이처럼 한없이 통 크고 관대한 주인이지만, 그렇다고 종에게 바라는 것이 일절 없지는 않습니다. 종은 자신이 받은 자비에 힘입어 자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한다면 그래야 하니까요. 이것이 바로 주인이 암묵적으로 종에게 기대한 부분일 겁니다. 자비는 자비를 낳아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간절한 기도를 들려 줍니다.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다니 3,35)
아자르야는 바빌론 유배 후 궁정에서 지내게 된 이스라엘의 젊은이들 중 하나입니다. 이 기도는 그와 동료들이 우상 숭배를 거부하다가 불가마에 던져졌을 때 바친 기도입니다.
죽음의 나락 한가운데에 떨어진 그는 겸손을 다해 자비를 간청합니다. 하느님 백성이 이방 민족에 몰락하게 된 이유를 자신들의 죄에서 찾으며, 주님께서 처음 계약을 맺어 주신 선조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기억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들의 불행의 원인을 주님께 돌리지 않습니다. 주님께 함부로 구원을 강요하지도 않지요. 자신의 죄악과 부족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리시는 주님의 자비를 아는 이의 겸손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할 것은 위기 모면이나 성공, 재물이나 안락한 삶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자비임을 잘 보여주는 기도지요.
어쩌면 우리가 받은 주님의 자비는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비를 입는 순간 죄의 빚은 탕감될지 몰라도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숙제는 남은, 그런 빚 말입니다. 자비를 입은 이가 자비를 베풀 때 비로소 자비하신 하느님의 뜻이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용서와 자비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가 혹 우리 주변에 없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여태 받아온 자비를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 자비 덕분에 이만큼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다면 자비의 사람이 될 준비는 충분합니다. 용기를 내어 자비를 실천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나를 위해서 하는 용서
-김찬선신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오늘은 복음을 읽다가 “용서해주다”는 말에 새삼 눈길이 갔습니다.
“용서하다”가 아니고 “용서해주다”는 표현을 썼는데
용서는 남에게 해주는 것인가에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일을 해주고, 기도를 해주고 등 베푸는 의미가 있지요.
그러나 용서는 남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제겐 강합니다.
내가 용서를 청해야 하는 존재인데,
내가 감히 누구를 용서해준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과 더불어
혹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저의 용렬함 때문이기에
저의 용렬함 때문에 그에게 안 좋은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죄송스럽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고, 가지는 것은
제가 꽤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순전히 저의 실리를 위해서입니다.
어떤 실리입니까?
용서를 못하고 있으면 괴로운 것은 저입니다.
용서를 못하는 동안 상처를 입는 것은 그가 아니고 저입니다.
칼을 품고 있으면 제가 상처를 입지 그가 입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많은 경우, 저는 그를 용서 못해 괴로워하는데
그는 제가 그런지도 모르고 천하태평입니다.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혹 내가 용서하지 않고 있음을 상대가 알게 되고
그래서 그도 조금은 괴로워할지라도
용서받지 못한 사람보다 용서치 못한 사람이 더 괴롭습니다.
그는 언뜻언뜻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늘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용서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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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약자이며 가장 작은 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덜 가졌고, 더 고생하고 있으며, 더 아프고 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자신만을 향하게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은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들과 셈을 하는 임금은 자신보다 강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금은 종들을 모두 약자라고 생각하기에 잘못을 하거나 주인의 명령을 어기더라도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받은 종은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약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더 큰 빚을 지고 있고, 임금에게 고초를 겪었기에 자신을 약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괘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배은망덕한 채무자로만 생각합니다. 그에게 용서와 자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와 아픔, 힘겨운 인내와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면 누가 가장 작은 이인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다면 받은 것들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최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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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흔일곱이라는 숫자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아담에서 예수님께 이르는 세대를 일흔일곱으로 루카 사도가 나누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즉, 한 세대도 빠지지 않는 용서라는 것으로, 용서 안 될 죄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조건적인 사랑으로는 마음의 병을 없앨 수 없습니다. 오직 용서라는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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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그 ‘악한 종’이 동료를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한 데 있었습니다. 곧 ‘자신의 빚이 먼저 다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용서와 자비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에도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하기에 앞서, 오히려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받았음을 ‘먼저’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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