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8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2021년 3월 8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가 4,24ㄴ-30)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native pla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같은 학교에서 십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공부하고 생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젊음의 열정을 함께 불태웠고 서로의 꿈을 응원해 주던 친구들입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생활합니다. 화려한 대도시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친구도 있고, 한적하고 조용하지만 인심 좋고 가족 같은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친구도 있고, 기관에서 좀 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들과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마다 삶의 자리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들의 삶이 부러울까요? 그냥 너무 행복해서 투정하는 소리 같이 들립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내가 그들보다 못난 것이 무엇일까?’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듭니다. 내 자리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늘어납니다. 나를 이곳에 보낸 사람이 원망스럽습니다.
누군가와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평과 불만, 원망과 짜증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라는 악의 씨앗이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잡습니다. 그 악의 씨앗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주위 사람들의 고마움을 가려 버립니다. 내가 받아 누리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을 잊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나자렛 사람들 마음에도 악마의 씨앗이 자리를 잡고 싹을 틔웁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삶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늘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제 그들은 악마에게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뿐 아니라 자신들까지도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아 버립니다. 어둠이 그들을 뒤덮어 버립니다.
악은 어둠처럼 조용히 찾아옵니다. 그 세력은 빠르게 마음을 잠식해 갑니다. 어둠을 없애는 방법은 빛을 밝히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그리스도의 삶과 가치를 고민하고 묵상할 때 우리는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악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 주지 마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잔 루이즈 칼망(Jeanne Louise Calment)은 1875년 2월 21일에 태어나 122세였던 1997년 8월 4일에 사망했습니다. 장수하셨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녀는 85세부터 펜싱을 시작했고, 110세까지 자전거를 탔다고 합니다. 이렇게 운동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녀는 21세부터 117세까지 흡연을 했다는 것입니다. 담배가 몸에 아주 안 좋다고 하지만, 그녀는 100년 가까이 담배를 피우면서도 영화배우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사셨습니다. 단순히 오래만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중 최고령 생존자였던 리처드 오버틴은 112세까지 사셨습니다. 그에게 장수비결을 묻자, 담배(하루 10개피)와 위스키 그리고 커피(설탕 세 스푼을 넣은 커피)를 말했습니다. 모두 건강하고는 거리가 있는 조건입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 미리 단정하는 삶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열정적으로 그리고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이 거룩한 예언자나 아주 비범한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기준에 예수님을 놓고 보니,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쭉 봐 왔지만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확신을 깨버리십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맞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관습에 얽매여서는 주님이 옆에 계심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주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열린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열린 마음을 갖고 열정적으로 지금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기적’ 같은 일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당연’한 일상을 ‘기적’이라 여깁니다.
이 삶의 태도 하나가 행, 불행을 나눕니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입니다. 태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갖추느냐가 이렇게 중요한데도 자신의 태도를 바꾸기보다는 ‘기적’ 같은 일만을 요구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행복해하지 못하고, 불행의 길만을 쫓았습니다.
이런 바른 태도를 갖추려면 우선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실천해야지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육체적 접촉입니다.

미음 받을 용기는 소속감에서 나온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실 뻔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당시는 가문과 동향인들의 공동체가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가족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미움에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단한 ‘홀로서기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홀로서기의 힘’이란 무엇일까요? 어른으로서 세상 어떤 힘에도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힘입니다. 나를 돈으로 유혹해도 내 가치관과 맞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고, 나를 명예나 인기, 혹은 애정으로 유혹해도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힘입니다.
이 홀로서기의 힘이 부족한 사람들은 어떤 것에든 집착합니다. 자신이 휘청거리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사람들을 등쳐먹는 사기꾼들도 많이 생깁니다.
찰스 폰지는 최초 다단계 금융사기 발명가입니다. 처음엔 자신도 이것이 먹힐 줄 알았습니다. 그는 ‘45일 안에 50%, 90일 안에 100%’의 수익을 무조건 올릴 수 있는 투자를 사람들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통용되는 국제반신우표권(IRC)이라는 것을 사서 통화가치가 높은 미국에서 팔면 무려 300%나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투자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문제는 미국에서 그렇게 많이 수입된 IRC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IRC를 팔 수 없게 되자 새로운 투자자들의 돈을 이미 투자한 사람들에게 갚는 식으로 더 투자자들을 늘렸습니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투자자들이 더 많이 늘어나라는 법도 없습니다. 투자자들이 줄어들자 기존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지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사기극으로 인해 8개월 동안 5개의 은행이 파산했고,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의 액수의 돈이 증발해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4~2008년까지 조희팔 씨가 전국에 10여 개의 피라미드 업체를 차리고 의료기기 대여업으로 30~40%의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속여서 3만여 명의 투자자를 모았고 4조 원을 가로챈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로 남는 것은 고통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홀로 설 줄 모르고 세상 것에 집착하고 휘둘리는 이유는 홀로 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만들어줄 가족과 같은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홀로 설 힘은 가족공동체의 소속감에서만 나옵니다. 아이들이 어디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부모와 형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하기에 아이들은 세상 유혹에 혹하는 일이 없습니다. 부모와 형제라는 공동체가 아이들이 세상에서 홀로 설 수 있게 만드는 근원적 힘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새끼 원숭이가 젖을 주는 철사로 된 엄마보다 젖은 주지 않아도 따듯함을 주는 수건으로 감긴 것을 엄마 원숭이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원숭이는 살아갈 힘을 먹는 것보다 소속감에서 더 얻으려 한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원숭이가 그렇다면 사람은 더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부모님이 주는 힘, 가족이 주는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보다도 친구 공동체에 더 속하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결혼하면 자신이 만든 가족을 위해 부모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배우자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소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어야 세상 어떤 애정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힘을 줍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공동체는 그런 힘을 주는데 지쳐있는 모습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신천지에 빠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어렵고 적응하기 힘들 때 교회공동체는 어떠한 힘도 주지 못했습니다. 병이 들고 힘들어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2~3년 동안 자신이 신천지인지 밝히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듯하게 말해주는 상담 선생님에게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다른 친구들도 소개해 주며 힘을 주었습니다. 세상 어떤 공동체에서도 힘을 얻지 못할 때 따듯함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니 보통사람 같으면 어떻게 그 집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삶의 힘은 사랑의 공동체에서 나옵니다.
물론 위 자매는 신천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가톨릭에서 힘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신천지인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들과의 관계를 끊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신천지에 가지 말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에서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소공동체’라는 좋은 제도가 있지만 실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소공동체가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띠어야 소속감과 홀로 설 힘, 더 나아가 미움 받을 힘을 줄 수 있는데 지금의 소공동체는 그런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번 봅시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4-47)
이 모습이 하느님을 부모로 둔 교회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이상입니다. 이처럼 완전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을지라도 교회 안에서 가족이라는 따듯함을 느낄 수 없다면 성당에 나오더라도 여전히 세상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소속감이 큰 것과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은 비례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성령, 그리고 사도단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당신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 공동체의 힘으로 동향인들이 당신을 다 미워해도 당당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살아갈 힘은 바로 가족공동체의 소속감에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은 다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본당 공동체에 십일조를 하는 것을 넘어서서 소공동체도 서로 가족과 같은 따듯함을 줄 수 있는 나눔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복음 묵상 나누기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그 실천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오는 힘이 없이는 교회도 힘을 잃고 그러면 응집력이 약해져 성당에 나오는 숫자도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코로나 시기가 교회공동체의 쇄신을 추구하는데 매우 적합한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본래 성찬(하느님과 하나 됨)과 만찬(형제들 간의 친교)은 하나였습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말라고 할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신천지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따듯한 공동체가 준비되어 있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서 교포사목으로 오신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10개월 정도 늦게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먼저 온 선배로서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영화대사 중에 ‘살아있네’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신부님은 눈빛이 살아 있었습니다. 마치 물을 만나 물고기 같았습니다. 거침이 없었고, 걱정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요리도 잘 하고, 본당을 소개하면서 앞으로의 계획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님과 대화를 하면서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부님은 예전에 호주에서 5년 동안 현지인들을 위한 사목을 하였다고 합니다. 영어에 어려움이 없었고, 외국 생활에서의 적응에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예전에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준비된 교포사목 신부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님과 신부님께서 함께 하실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저도 16년 전에 캐나다에서 3년 지냈었습니다. 그 경험이 미국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캐나다의 제도와 문화는 미국과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포사목 신부님들은 준비가 덜 되었어도 주교님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파리 외방선교회 신부님들도 조선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먼 길을 기꺼이 떠나올 수 있었습니다. 외모가 달랐고, 언어가 달랐지만 신부님들은 열정적으로 사목하였고, 순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말이 서툴러도, 문화의 차이가 있어도, 음식이 맞지 않아도 대부분의 교포사목 신부님들은 잘 적응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파리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이 그랬듯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토비야가 맡겨진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천사 라파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협조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하면 엉킨 매듭이 하나둘 풀리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 주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십자가의 무게를 견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갈등과 분란은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믿지 않았습니다.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선행을 베풀었던 사렙타의 과부는 기근 중에서도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겸손했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신앙의 길도 멀고 험난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감사드리며, 기뻐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걷다보면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느끼며, 세상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감동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 삶 속에 완결되기까지 고독하고 쓸쓸한 길을 계속 걸어가야겠습니다!
-양승국싡부-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셨습니다.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호형호제하던 사람들, 사랑했던 사람들, 고마운 인연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고향 사람들에게도 꼭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고을에서보다도 훨씬 강도높게 복음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찮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저 사람은 우리집 건너편에서 살았던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아닌가? 우리 어머니와 별반 다를바가 없는 평범한 여인이었는데...”하면서 도무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냉랭하면서도 완고한 고향 사람들의 태도 앞에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차근차근 친절하게 설명해도 끝끝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수용하지 않는 고향 사람들의 소극적인 자세 앞에 예수님께서는 태도를 바꾸십니다. 적극적인 강공 모드로 돌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복음 4장 24~27절)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자부심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으시고 거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대기근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잘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면하시고, 한 이방인에게 먼저 극진한 사랑을 베푸셨음을, 수많은 이스라엘의 나병환자들은 제쳐두고 이방인 나병환자를 치유해주셨음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크나큰 수모요 상처였습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길길이 뛰고 이를 갈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작당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살해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르르 예수님을 향해 몰려든 그들은 일단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몰았습니다. 소나 돼지 몰듯이 말입니다. 깎아지르는 절벽까지 예수님을 끌고 간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님을 떨어트려 추락사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지혜로움과 민첩함이 크게 돋보입니다. 하실 말씀 시원하게 다 하신 예수님, 유다인들의 속을 긁어놓을데로 다 긁어놓은 예수님께서는,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시고, 재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신 후 홀연히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동족으로부터 환영은 고사하고, 협박당하고 벼랑 끝까지 내몰리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정말이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역 중에도 이런 반역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쿨하십니다.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유유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당신 삶 속에 완결되기까지 메시아로서의 고독하고 쓸쓸한 길을 계속 걸어가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으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를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주님! 오늘 제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저에게서 결코 당신을 배척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따라 걷게 하소서. 아멘.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반영억신부-
현대를 지식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난데없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병 중에 가장 못된 병은 '자페증'이랍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병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으면 다른 사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굴곡 되게 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이 너무 강해 갈 길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우리의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달리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정보는 흘려버릴 수 있지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선입견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정보에 상관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지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품을 키워야 합니다.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하지 않고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 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가르침 뿐 아니라 이웃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면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꿀도 약이라면 쓰다.’고 합니다. 충고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마음 속 깊이 스며들지만 우둔한 사람의 귀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고를 하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자렛 사람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4ㄴ-27).”
1) 여기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 것은 환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에 대한 편견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을 꾸짖으신 것은,
환영받지 못한 것이 서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나자렛 사람들도 ‘잃은 양들’이었는데,
그들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했고, 그들 스스로 목자를 등지고
‘떠나버린 양들’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언급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내린다.”, 또 “은총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는데도 자기들이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받고 있다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회개하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만이 구원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후손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살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자체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상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은 분명히 중요하고 고귀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도 않고, 신앙생활도 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헛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8-30).”
1) 나자렛 사람들은 왜 화가 났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 즉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이스라엘로 귀화해야 하고,
유대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언급하시면서
“하느님의 은총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내린다.”고 말씀하시자, 이 말씀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 특별히 선택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예수님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만 선택하셨을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생각은 맞습니다(창세 12,1).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만 선택하셨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
나자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2)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희는 이방인들만도 못한 자들이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래서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내렸는지를 먼저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은총이 내린 일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도 없는
이방인들일 뿐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생각입니다.
하느님께서 분별없는 일을 하셨다고 마음대로 판단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다른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것을 볼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느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된다고 투덜거리기도 하고,
그것은 겉으로만 은총으로 보일 뿐이고 실제로는 은총이 아닐 것이라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을 깎아내리면서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잘못된 성경 지식, 오만한 자존심,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시기, 질투 등은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위험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 자체로 죄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고,
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분별력을 잃게 만들고,
이성보다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회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반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위하여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믿음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그런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다.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박해로, 죽음에로까지 가게 하는 인간의 잔인성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지식으로, 혹은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만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 30)
-한상우신부-
비난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선입견이
만들어
놓은 아픈
우리의
현실이다.
지나친
과신은
언제나
금물이다.
나의 시각과
관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선입견은
더더욱
소중한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걸림돌이 된다.
우리를
겸손으로
초대하시며
새 길을 여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진실을 가리는
선입견의
꺼풀을
벗겨내신다.
남의 삶에
소금을 뿌리는
삶이 아닌
축복하는
기도의 삶이
되게한다.
선입견은
또다른
폭력이다.
구원의 역사는
편견이
만들어가는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만들어가는
가능성의
역사이다.
중요한 것은
출신배경이
아닌 건강한
삶의 방식이다.
너무나 많은
비판과 비난
험담과 왜곡의
피곤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사순시기는
과감하게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시간이다.
십자가의
겉모습이
아닌
십자가의
마음을
만나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선입견을
가로질러
복음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떠나가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을 알아보는 안목에 대해 들려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가르치실 때 그분의 출신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이 못마땅해하자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근본이 모호한 목수 출신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설픈 앎이 편견이 되어 오히려 구원을 방해하는 형국이지요.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루카 4,26)
"시리아 사람 나아만"(루카 4,27)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나자렛 사람들에게 믿음과 순종으로 구원 받은 구약의 두 인물을 예로 들어 주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아듣고 돌아서기보다 불에 기름을 붇듯 분노해 들고 일어나지요.
사렙타의 과부는 오랜 기근 때문에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다가, 엘리야 예언자가 명한 대로 음식을 만들어 먼저 그에게 대접한 이방 여인입니다. 그 덕에 그녀의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되었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게 되었지요.(1열왕 17,8-16 참조) 그리고 시리아의 나아만의 순종에 대해서는 오늘 제1독서의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2열왕 5,3)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2열왕 5,13)
시리아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장수 나아만은 먼저 어린 히브리 노예 소녀의 조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예언자에게 기대한 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해 분개할 때에도 부하들의 권유에 귀를 기울이지요.
고통스런 육신에 온전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구원의 소식이 누구를 통해서 오든, 설령 가장 힘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를 통해서일지라도 귀를 기울이는 나아만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지요.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2열왕 5,14)
결국 나아만은 엘리사의 명에 순종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전쟁 포로인 히브리 노예 소녀의 진언에서 시작된 구원의 길이 나아만의 순종으로 열매를 맺고,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라는 이방인의 놀라운 고백으로 마무리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까?"(화답송)
시편 저자는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워하며 뵈올 날을 고대하는 영혼의 갈망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는 하느님의 얼굴은 이 지상의 순례길에서 직접 뵈올 수는 없지요. 그것은 천상 본향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된 복락이니 잠시 참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순례 여정 안에 있는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려 종종 우리 편에서 얼토당토않게 여길만한 이들의 얼굴을 빌리십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세상이 부여한 신분도 위상도 없는 이, 배경을 뻔히 알아 신뢰할 수 없는 이들처럼 겸손으로 유연하게 열린 마음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알아챌 수 없는 이들의 얼굴로, 그들의 목소리로 다가오시지요.
사렙타의 과부나 시리아의 나아만처럼 순히 듣고 따름으로 구원을 얻을 수도 있고, 나자렛 주민들처럼 은총을 걷어찬 것도 모자라 은총의 주님을 죽이려 할 수도 있습니다. 믿고 순종하는 겸손에 따라 결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누구를 통해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시고 사랑의 목소리를 들려 주시는지 깨어 귀기울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으면 의외의 인물이 다가와도 놀랄 일이 없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 다가오시는 주님을 경청하고 환대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생각에서 믿음으로
-김찬선신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인도를 방문하였을 때 저는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이나 정서를 뛰어넘는 것들 때문이었지요.
그중 하나가 강가 강(갠지스 강)에 갔을 때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이 강을 성스러운 강이라고 생각하기에
죽기 전에 꼭 한 번 이 강을 성지순례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저도 마침 그곳 바라나시 대학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힌두 사원과 강가 강을 가봤습니다.
역시 수많은 순례자로 붐볐는데
여기저기서 시신을 화장하고 있는 가운데
순례자들은 강가 강에 들어가 몸을 씻고 심지어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릅니다.
돈이 많으면 장작을 많이 사서 시신을 완전히 태워 강에 뿌리지만
돈 없는 사람은 조금 태우다 시신을 버리고
아주 가난한 사람은 그냥 시신을 강에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배를 빌려 강 한 가운데로 저어가서 보니
사람 시신이 강을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그 물에 몸을 씻고 그 물을 성수라며 먹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저 물로 씻고 피부병이 생기지 않을까,
저 물을 마시고 각가지 병이 생기기나 않을까 걱정을 하는데
그들은 깨끗함과 더러움의 인간적인 구별을
성스런 강이라는 믿음 하나로 간단히 넘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이 믿음과 초월의 관계입니다.
하느님을 믿을 때 우린 인간적 어리석은 생각들을 초월케 됩니다.
우리는 나아만처럼 인간의 손이 치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고치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거기다가 손까지 정성껏 얹어주면 더 잘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러운 물로 씻으면 병이 나고
깨끗한 물로 씻으면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고 과학적으로는 더더욱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꼭 그런 것이 아니고
영성적으로 보면 더더욱 그렇지 않습니다.
고쳐 주시고 씻어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사람의 정성과 손의 재주가 중요하지 않고
물의 깨끗함과 더러움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고치신다는 것을 믿고,
물이 아니라 성령께서 씻어주신다는 것을 믿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으로 고치고 씻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인간의 생각과 걱정과 의지 따위를 가볍게 초월할 수 있고
우리에게는 고쳐짐과 씻어짐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아만은 생각에서 믿음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믿음으로 생각을 벗어나고 하느님께로 올라가고 넘어갔습니다.
엘리사가 한 것은 다만 그 생각을 깬 것입니다.
이 사순절,
우리도 생각에서 믿음으로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많은 생각들, 고정관념들을 깨야겠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또 다른 한 측면일 듯싶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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