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5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2021년 2월 25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오 7,7-12)
Do to others whatever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십니다. 시편의 기도자는 “제가 부르짖던 날 제게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만드시어 제 영혼에 힘이 솟았습니다.”(시편 138[137],3)라고 고백하고, 오늘 독서와 복음도 청원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따라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청원을 아룁니다. 그렇게 우리가 청원을 드리면 하느님께서 항상 들어주셨나요?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의 청원을 들어주신 기억보다, 들어주시지 않으셨던 기억이 더 많지 않은가요? 청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체험으로 우리의 청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판단하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 신앙의 자존감을 우리 스스로 낮추게 됩니다. ‘내가 아직 부족한 신앙인이라서’ 또는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또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돌을 달라고, 뱀을 달라고 청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돌과 뱀을 주겠습니까? 우리는 돌과 뱀이 아닌 빵과 생선을 주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돌을 달라고 청한다고 무조건 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돌을 달라고 청하여도 빵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다시 묻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였던가요? 내가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까? 이 질문과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도 함께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광물로 알려진 ‘다이아몬드’. 이 다이아몬드의 원소 기호는 따로 없습니다. 탄소와 탄소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 다이아몬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한다면 주기율표상 6번, 원자기호 C인 탄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다이아몬드와 마찬가지로 원자기호 C인 탄소로 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숯입니다.
탄소에 엄청난 온도와 압력을 오랫동안 가하게 되면 다이아몬드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숯이 된다고 합니다. 이 다이아몬드와 숯을 보면서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랜 시간을 고통과 시련으로 다져진 사람은 다이아몬드처럼 튼튼하고 그 삶 자체가 아름다워집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제대로 승화하지 못해서 절망과 좌절에 빠지는 사람은 그저 단순한 숯의 모습에서 멈출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이도 고통과 시련이 자신에게 찾아오길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이 하나도 없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고통과 시련 없이는 숯에서 멈춰지고 맙니다. 다이아몬드가 되고자 한다면 고통과 시련이 찾아왔을 때, 열정을 가지고 정면에서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이나 시련 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피할 것이 아니라 이겨낼 방향을 찾는 삶이 필요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청하지 않고 찾지도 않으며 또 두드리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문이 저절로 열리기만 바라는 요행만을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의 노력이 담긴 열정은 전혀 없이, 원하는 것만 얻으려는 욕심을 통해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더 많이 주고 싶어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청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문도 두드리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좋은 것들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성장을 위해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고통과 시련을 주셨다고 불평불만만 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의 선물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청하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냥 무턱대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외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열정이 담긴 노력, 특히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열정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를 더욱더 단련시킬 것이며 이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만날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숯이 아닌 다이아몬드처럼 귀하고 아름답게 변합니다.


벌써 30년이 넘은 학력고사 때의 이야기를 동창 신부들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학력고사 볼 때는 입학하려는 대학교에서 시험을 봤습니다. 그래서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신학교 대강당에서 시험을 봤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 입학할 대학에 가서 시험을 치렀냐고 합니다.
진실은 신학교 대강의실에서 시험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대학 진학 눈치 보기를 없애겠다고 입학할 대학에 미리 지원하고 그 대학에서 시험을 보게 했었던 것이지요.
모두가 체험했던 분명한 사실이지만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예전의 기억을 자기 안에서 수정해 놓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기억을 수정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나에 대한 믿음을 100%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100% 믿음은 오로지 주님밖에 없습니다.

막힌 기도, 뚫린 기도, 흐르는 기도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 중, 청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황금률이 따릅니다. 황금률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입니다. 청하라고 하면서 주라고 하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나 이는 청하는 것이 막히지 않고 흐르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흐르지 않으면 막힌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은총이 흐르기를 원하시지 고여서 쓸모없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부산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새벽이 되면 성당 문을 수녀님이 열어야 했는데 일주일 전부터 한 남자가 문 앞에서 서성였습니다. 그날도 조심스레 문을 여는데 그 남자가 다가왔고 수녀님은 조금 두려웠지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성모상 앞에서 기도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10남매를 둔 가장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채소와 전기밥솥 등 돈 될 것은 다 가져다 파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뇌종양으로 6개월밖에 못 산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신자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기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매일같이 그렇게 기도하는 형제에게 수녀님은 미사에도 한 번 참석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 형제는 그래도 되느냐며 미사에 참례하고 미사가 끝나자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내와 10남매 모두 예비자 교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6개월을 받아야 했지만, 사정상 3개월 만에 세례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날부터 형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저녁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매일 와서 바쳤습니다.
세례 예식을 앞두고 미사 예물에 대해 말할 때 그 형제는 아내와 함께 가게에서 그날 하루 버는 돈을 다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비싼 전기밥솥이 팔려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쌀과 연탄 등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아내는 수녀님이 조금만 바치라고 하셨으니까 1/3만 바치자고 제안했고 형제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아내가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아내가 꿈에서 보따리를 들고 가는데 어떤 여자가 자꾸 그 보따리 내놓으라고 쫓아왔고 안 주려고 도망치다 낭떠러지 앞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아내는 아무래도 그 돈이 자신들의 것이 아닌 것 같다며 다 봉헌하자고 했습니다.
가정 사정을 잘 아는데 너무 큰돈을 가져온 수녀님은 그중 1/10만 떼서 받고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그들은 받지 않으려 했고 본당 신부님이 막아섰습니다. 신부님은 돈으로 되돌려주면 안 받으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주라고 했고, 그들은 생필품과 중학생이 되는 아이의 등록금까지 본인들이 낸 것보다 두 배 이상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세례 당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형제가 양형 성체를 할 때 그 입속으로 환한 빛이 들어가는 것이 사진에 찍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뇌종양이 치유되었고 모든 아이를 다 키울 때까지 이후 2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사진은 아직 신앙이 오래되지 않은 형제에게 교만함을 줄까 봐 신부님과 수녀님만 가지고 예비자 교리 때마다 성체 신심을 가지도록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기도는 3단계로 나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단계는 위 형제가 신자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막힌 기도’의 단계입니다. 어머니라고 고백할 수 없으며 어머니께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뚫린 기도’의 단계입니다. 세례를 받아 죄를 용서받고 올바른 관계로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이 오는 단계는 ‘흐르는 기도’의 단계입니다. 나에게 오는 은총을 나만을 위함이 아니라 흘려보낼 줄 아는 단계입니다. 위 형제는 하느님께 자신의 것을 봉헌함으로써 자신의 은총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누가 나의 소중한 것이 한 사람에게 막혀 썩어버리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마치 층계로 된 논에 물을 대는 지주와 같이 그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기를 원하는 하인의 논으로 물줄기를 내는 것처럼 주님도 더 많은 당신 백성에게 은총이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받고 싶으면 내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먼저 내어놓을 수 없다면 누구에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은 은총을 주시기 전에 먼저 봉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선악과나무, 즉 십일조를 바치는 중요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흐르게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청합시다. 그러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주실 리 없고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주실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우리도 남에게 해 줍시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대로 내가 먼저 주님께 그렇게 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흐르는 기도가 되고 모든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우연한 기회에 ‘체질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토양체질’이라고 합니다. 설명을 들으니 제가 하는 행동, 저의 성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비슷한 것으로는 ‘애니어그램과 MBTI'가 있습니다. ‘애니어그램과 MBTI’가 주로 성격을 분석한다면, 체질검사는 성격과 건강을 함께 분석하였습니다. 체질에 맞는 음식과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이 있다고 합니다. 가솔린차와 경유차는 각기 맞는 기름을 넣어야 하듯이, 체질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성격과 몸을 이해하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체질에 대한 분석입니다. “성격이 급한 편입니다. 부지런하며, 센스가 좋습니다. 일을 벌려놓지만 뒤처리를 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는 것을 먼저 말하고, 생각을 나중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자리에 오래 있는 것을 싫어하고, 움직이며 활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는 성격입니다. 토양체질의 건강법이라면 항상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한국에 있을 때입니다. 제주도에서 중견사제 연수를 하면서 주말에는 서울에 올라와서 강의를 하곤 하였습니다. 하루에 3번 강의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길음동 수녀원, 해방촌 성당, 아론의 집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곳 뉴욕에서도 신문사의 일을 하지만 다른 일도 마다하지 않는 편입니다. 6개월 넘게 부르클린 한인 성당 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지난주부터는 롱아일랜드 한인 성당도 도와주고 있습니다. 퀸즈 한인 성당에서는 사순특강을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일을 좋아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통해서 힘을 얻는 체질이라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갈 수 없는 상황이라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선 할 수 있는 일은 개선하고, 개선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지만 개선할 수 있는 것과 개선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의 체질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주님께 의탁하면서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도록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연기하지만 뒤에는 많은 분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대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장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품을 홍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는 관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감독이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박수를 받으면서 늘 함께하는 이들에게 박수의 영광을 돌리곤 합니다. 부족한 저를 도구로 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백신이 나왔고 많은 분들이 백신을 맞고 있습입니다. 치료제도 나온다고 합니다. 예전의 일상이 시작될 것입니다. 부르클린 성당에도 새로 신부님이 오실 것입니다. 롱아일랜드 신부님도 휴가를 다녀올 것입니다.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이고, 화사한 꽃들이 추운 겨울과 인사하며 반갑게 자리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겨울도 봄에게 인사를 하며 떠날 것입니다. 저도 본연의 업무인 신문홍보로 이곳저곳을 다닐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
-이영근신부-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주님께서는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청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수도승의 다른 이름이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하십니다.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께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께서 이처럼,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하오니,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희망하는 바를 희망하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소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7)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가장 강력한 힘
-반영억신부-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케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 해서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먹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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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기도, 황금률
-송영진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7-12).”
1)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하더라도 믿음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믿는다면, 믿는 대로 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단순한 이 말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정말로 믿고, 간절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는데도,
기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할 때가 있고,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길 때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문제는, ‘지금 내가 청하는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인가?’입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면,
이 말이 말장난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나의 절박한 상황과 심정을 모두 하느님께 말씀드리되,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가 정답입니다.
2)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되기만 한다면, 신앙생활은 아주 쉬운 생활이 됩니다.
그게 아니니까 신앙생활이 늘 어려운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앞일은 주님께 맡기고, 더 큰 믿음으로,
더 간절하게 기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은총을,
또는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가장 좋은 은총을 받았음을
깨닫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얻기만 한다면, 신앙생활은 정말로 ‘신나는 생활’이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은총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기도’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 말씀은 아무거나 청하라는 뜻은 아니고,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되,
기도를 하는 그 순간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으면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불안해하면서, 또는 결과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은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믿음만 확실하다면, 기도하는 순간부터 ‘평화’를 얻게 됩니다.
기도함으로써 얻는 평화는 기도가 이루어진 것만큼이나 큰 은총입니다.
3)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라는
‘황금률’은 신앙생활의 기본정신이기도 하고, 기도의 기본정신이기도 합니다.
(기도할 때에는 황금률을 실천하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라는 말씀은,
황금률이 ‘사랑의 이중 계명’에 연결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황금률에 있는 ‘남’이라는 말은, 하느님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인 경우, 황금률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려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을 너희가 먼저 하느님께 해 드려라.”가 됩니다.
(“청한 것을 받은 다음에 그대로 해 드려라.”가 아니라,
“너희가 먼저 해 드려라.”입니다.
사랑은 항상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세속의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우리가 실천하는 것입니다(마태 7,21).
(돈으로 은총을 사려고 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충실한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사람의 기본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또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은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간절하고 끈질기게 기도만 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기도 하고,
이기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4) 이웃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물론 하느님도 ‘남’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웃을 향해서 황금률을 실천하는 일은,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이 경우에도 ‘내가 먼저’ 라는 원칙은 지켜져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하는 것을 본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겠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가 먼저
저 사람에게 사랑을 준다.”입니다.
‘사랑’은 받고 나서 받은 만큼 갚는 일이 아닙니다.
또 대가를 바라는 일도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으로 그냥 주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없어도, 주면서 기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루카복음 10장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이
대표적인 모범인데, 그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말 한 마디, 표정 하나,
작은 행동 하나라도 사랑을 담아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반대로, 작은 말실수나 가벼운 농담 한 번이, 또는 무심코 한 작은 행동 한 번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웃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나도 모르게 큰 죄를 지은 일입니다.)

복음: 마태 7,7-12: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조욱현신부-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기도를 잘 아는 민족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듣는 귀가 말하는 입 가까이 붙어있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까이 계셔 들어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요구를 내놓을 줄 아는 이를 더 사랑하신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라고 가르쳐 주신다.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하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아라.’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려라.’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즉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9-11절) 하신다.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요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 11)
-한상우신부-
매순간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에
기도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웃고 우는
우리들과 함께
공감하신다.
기도는
공감이다.
간절하고도
절박한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주신다.
기도는
뜨거운
생명이다.
일말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을
알게되고
기도로
삶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들의
삶을
우리들의
일상을
봉헌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기도는
우리 삶에서
잃어버린
하느님을
다시 만나는
은총이다.
은총은
우리 일상에서
잃어버린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게한다.
은총을
간절히
바라기에
우리는
하느님 자녀이다.
기도는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겸손되이
깨닫게한다.
사람과 기도
간절함과
하느님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
이시기에
매순간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는
사랑이시다.
눈물이
미소가 되고
기쁨이 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에 대해 들려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기도는 이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기도하는 이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또 기꺼이 들어 주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그분께 머무르는 것이 기도니까요.
"좋은 것"
그런데 우리가 청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다고 여기시는 것이 꼭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좋은 것"을 허락하시는 순간에 대해서도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시차가 발생할 수 있지요. 기도하는 이는 그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다 "좋은 것"이고, 그것을 주시는 "때" 역시 가장 적합한 때임을 믿고 기다립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에스테르 왕비가 드리는 처절한 기도를 들려 줍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 4,17-25)
이방인 임금의 왕비로 간택된 에스테르는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는 재상 하만의 음모 앞에서 갈등하다가, 자신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먼저 주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
에스테르는 민족의 명운을 걸고 임금에게 하만의 흉계를 알려야 합니다. 이방 민족의 궁궐에서 도와줄 누구도 없이 지혜와 용기를 다해 악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 그녀에게 오직 주님만이 유일한 의지이고 피신처십니다.
그런데 "주님밖에 없음"은 에스테르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실존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 삶을 헤쳐나가면서 가족과 가문, 단체나 소속, 재물과 인맥 등 나름 갖가지 안전장치를 구축하고 살아가지만 모든 사람은 결국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순간을 비켜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그동안 믿었던 뒷배나 보루가 신기루처럼 물러나거나 사라지는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하던 건강과 사람과 재물이 얼마나 허무한 환영이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 닥칠 때, 인간의 실존을 인식하고 살아온 이와 그렇지 않은 이와의 차이는 무척 클 것입니다. 그때가 누군가에게는 은총의 순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절망과 추락의 때가 될 수 있습니다.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마태 7,7)*
예수님은 아버지께 매달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반드시 주시리라고 확신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청하고 찾아야 할까요? 다 받는다니 아무거나 청해도 되는 걸까요? 그 답은 오늘 복음 대목 끝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우리가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아버지께 청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 바라는 것을 어쩌면 타인이 나에게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바라면, 우리 자신이 남에게 평화가 되어야 하고, 주님의 은총을 바란다면 우리 역시 남에게 선물이 되어야 하지요. 재물과 안정을 청한다면, 우리가 타인의 재물과 안정을 돌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청한 바가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와 그대로 멈추어 버린다면 아직 그 기도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받은 응답을 타인과 나누고 공유하며 그에게 유익이 될 때 비로소 기도의 열매가 영글고 기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밖에는 우리를 도와줄 누구도 없는 것처럼 간절히, 맹렬히, 지치지 않고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기도의 열매는 우리 개개인뿐 아니라 모두를 위한 선물이니, 공동선을 위해 필요하고 요긴한 것을 청하면 더욱 좋겠지요. 골방에서 주님과 함께 머무르며 기도로 무르익어가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계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절 실 함 만큼
-김찬선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정말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만 된다면 못할 것이 무엇일까?
그러나 청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찾기 위해서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두드리기 위해서는 앞의 겸손과 열망에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겸손과 열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절실함입니다.
곤궁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우리는 청하는 겸손이 생기고
찾는 열망이 생기고
두드리는 용기가 생깁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의 에스테르 왕비가 이런 경우입니다.
죽게 되었을 때 아무에게도 청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 편에서 이런 절실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이것도 무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두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선이시라는 것과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실 선을 가지신 분이시고
그 선을 주실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너희가 악해도”하고 주님은 먼저 말씀하십니다.
선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으니 인간도 선이지만
결핍이 있는 선이고 그래서 최고선이신 하느님께 비하면 악입니다.
줄 수 있는 선이 하느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에
보통의 인간은 자기 자식한테 밖에는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깡패도 자기는 나쁜 짓을 해도 자기 자식은 착하기를 바라고
남에게는 나쁜 짓을 해도 자기 자식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줍니다.
이것이 아비 된 자의 마음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이고 사랑의 마음인 것이지요.
인간 아비가 이러하니 하늘 아비는 이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눈에 선이 아니라 악이 주어진 것 같아도
내가 몰라보는 것이지 사실은 선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에스테르는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에 무엇이 더 나에게 좋은 것인지 아십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 무지하여 악한 선을 달라고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선한 악을 주시곤 합니다.
예를 들자면 담배를 좋아하여 담배를 달라는 자식에게
아비는 절대로 담배를 주지 않고 싫다는 빵을 주십니다.
당장은 좋으니 담배가 선이지만 사실은 나에게 나쁜 것, 악이지요.
당장은 싫으니 빵이 악이지만 사실은 나에게 좋은 것, 선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어련히 알아서 주시는
이 선한 악에 맛들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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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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