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3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2021년 2월 23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오 6,7-15)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주일 미사에 참례하면, 미사가 참으로 재미없고,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유일하게 기쁘던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아는 기도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호경도 제대로 긋지 못하고, 다른 기도문은 물론이고 신자들이 응답하는 부분의 기도는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주님의 기도만은 누구보다 큰 소리로 외워서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시던 부모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봉헌할 때가 되면 늘 제게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시간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위풍당당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부모님께서는 매우 기쁘게 웃으시며 그 모습을 바라보셨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는 빈말의 되풀이가 아니며, 말을 많이 해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빈말의 되풀이가 아니요 기도의 핵심이 담긴 기도,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기도할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고 …….” 그런데 막상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다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시작한 기도는 어느새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끝이 나고 말지요.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신 기도가 형식적인 기도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바친 어린이의 기도를 웃으면서 기쁘게 쳐다보던 부모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하느님 앞에 어린이요 자녀인 우리가 기도를 바치면, 부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웃으시면서 우리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의탁하는 마음으로 “아빠, 아버지”께 우리의 기도로 웃음을 드려 보면 어떨까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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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월드컵 그리고 기타 스포츠 경기를 보면 재미있는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홈그라운드의 잇점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우리나라는 금12, 은10, 동11 이라는 역대 최고의 성적을 냈습니다. 그때의 순위는 자그마치 4위였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에는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한 것을 뛰어넘어서 4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뒤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때에만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예산탈락을 했습니다.
홈경기에 강점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편파 판정 때문일까요? 그것보다는 승리를 염원하는 사람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지지해주는 사람 앞에서 능력을 더 많이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함께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을 분명히 높여줍니다. 그러나 함께하기보다 나만을 위한 삶을 사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도 많을까요? 그래서 자신의 원래 능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각자의 능력을 더 발휘할 수 있도록 서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을 우리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바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특히 빈말만 되풀이하면서 말만 많이 하는 사람들의 기도 모습을 보시고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면서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처음부터 당시의 사람들은 의아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글쎄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훼’라는 이름보다 ‘아도나이’라는 주님이라는 뜻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다니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자녀뿐입니다. 자녀가 아닌 사람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당신은 내 자녀가 아닌데 왜 아버지라고 부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가까운 관계, 친밀한 관계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누군가를 응원할 때, 가족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응원하겠습니까? 더 가까운 사람에게 응원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 편이 되셔서 응원해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가지고 힘차게 또 기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자기 편이 없는 것처럼 온갖 불평불만을 간직할까요?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제자들이 “선생님! 인생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사과나무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각자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사과 하나씩을 골라서 따오게. 단, 선택은 딱 한 번뿐이므로 지나왔던 사과나무밭으로 다시 돌아가서 바꿀 수 없네.”
제자들은 유심히 관찰하면서 가장 크고 좋다고 생각되는 사과를 하나씩 골라서 따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후회합니다.
“왜, 자기가 고른 사과가 만족스럽지 못한가?”라고 소크라테스가 묻자, 어떤 제자는 “선생님! 저는 너무 늦게 사과를 따서 처음에 보았던 좋은 사과를 놓쳤습니다.”라고 말했고, 또 다른 제자는 “저는 너무 일찍 사과를 따서 나중에 본 좋은 사과를 놓쳤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한 번만 기회를 더 달라고 청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인생은 언제나 한 번의 선택을 해야 한다.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다. 그리고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번뿐인 선택이 완벽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수가 있더라도 자신의 선택 결과를 감당하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많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때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기보다는 그 선택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무언가 청할 때 주모송부터 바쳐야 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사순절 때 실천해야 하는 기도-자선-단식 중,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도의 방법은 많을지라도 성경은 ‘주님의 기도’만을 권장합니다. 주님의 기도가 모든 기도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하느님께서 왜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시지 않고 아벨의 제물만을 받아들이셨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카인의 제물은 먹다 남은 곡식이었고 아벨은 좋은 양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분도 계시고, 더 황당하게는 하느님께서 채식보다는 육식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의 제사는 곧 기도입니다. 기도는 축복을 청하는 것입니다. 축복을 청할 때 카인보다 아벨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는 아벨은 은총 지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농부였습니다. 처음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신 것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아담에게는 농사일을 시키셨습니다. 농사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가 하는 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고 카인은 그 이후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란 마치 세례를 주는 것처럼 선교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일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선악과에 손을 댄 아담은 남을 사랑하는 일보다는 소유하는 일에 집착합니다. 자기 손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사람은 저주받은 땅에서 고생은 하지만 충분한 소출은 얻어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그에게 축복을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춘추시대 미소년 미자하는 잘생긴 외모 덕분에 일찍부터 위나라 영공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는 궁궐에 머무르면서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미자하의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전갈을 받고 어머니를 뵙기 위해 미자하는 영공을 핑계로 왕이 타고 다니는 전용 마차를 타고 대궐 문을 나가게 됩니다. 위나라의 법에 따르면 왕의 마차를 함부로 타다 적발되면 손발을 자르는 형벌에 처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신하들이 미자하를 비판하자 영공은 오히려 그를 위중한 어머니를 위한 효도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다른 날, 영공과 미자하가 궁궐 산책을 하던 중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를 발견해 미자하가 한입 먹고는 영공에게 매우 달다며 건네줍니다. 신하들이 미자하의 행동을 비판하며 처벌을 요구하자 영공은 오히려 그를 칭찬합니다. 얼마나 본인을 생각했으면 그 맛있는 복숭아를 다 먹지 않고 자기에게 건네주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 아름다웠던 미자하도 나이가 들고 아름다움이 예전만 같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미색이 퇴색하자 영공의 총애도 식어갑니다. 결국, 영공은 지난날 왕의 마차를 함부로 이용하고 먹다 남은 복숭아를 왕에게 건넨 일을 문제 삼아 그를 내쫓아버립니다.
여기에서 여도지죄(餘桃之罪: 먹다 남은 복숭아의 죄)라는 고사성어가 생겼습니다. 미자하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영공의 마음이 변하여 화를 당한 것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미자하가 영공의 마음에 들 때는 무엇을 해도 괜찮았습니다. 영공은 무슨 청이든 다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여쁘게 보이지 않자 아주 작은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무엇을 청해도 영공은 들어줄 마음이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철모르는 어린이일 때는 마냥 예뻐 보여서 조금만 칭얼대면 부모가 웬만하면 다 들어줍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면 부모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제 부모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도 청하기만 한다면 부모가 자녀에게 이용당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부모님께 원하는 것을 물을 때, “그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 돼요.”라고만 말할 것입니다. 내 뜻보다 부모의 뜻을 먼저 헤아리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와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그렇게 부모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성모송은 어머니를 통해 바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에게 잘하는 자녀에게 더 잘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머니로 세워주신 성모님을 통해 드리는 기도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더욱 명확히 해 줍니다. 물론 영광송은 모든 것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다시 다짐하는 것이니, 하느님 자녀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자세는 주모송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렇기에 무언가 청할 때, 그 청하는 것을 어린이처럼 칭얼대기보다는 부모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수 있게 주모송으로 그분의 뜻을 먼저 헤아려드려야 합니다.
성녀 제르투르다에게 사람들이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성녀 제르뚜르다는 그 기도를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알아서 그 기도들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이에 그 이유를 물으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했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카인인 상태로 청하는지, 아벨인 상태로 청하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카인에서 아벨로 옮겨가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분 뜻을 먼저 헤아릴 때 농사를 짓던 아담에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담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서 가장 기본 되는 구절이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에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신 것입니다.
무언가 청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알리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뜻에 관심을 가지는 당신 자녀인가, 아니면 요구만 하는 외부인인가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기도로 우리가 그분의 모든 은혜를 당연히 받아야만 하는 은총 지위로 이끌어주는 유일한 문입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서는 한국 브랜드의 차를 많이 보았습니다. 현대, 기아, 쌍용, 삼성 브랜드의 차가 많고, 외국차는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입니다. 이곳 뉴욕의 거리는 자동차의 전시장과 같습니다. 여러 나라의 차를 볼 수 있습니다. 거리에서 많이 보는 차는 일본 브랜드의 차지만 한국 브랜드의 차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브랜드의 차 중에 ‘텔루라이드(Telluride)’는 현지인들 사이에도 평가가 좋다고 합니다. 차를 사려면 기다려야하고, 판매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주어야 살 수 있다고도 합니다. 차의 이름이 미국 콜로라도 주에 있는 도시 이름과 같다고 합니다. 차의 이름, 기능, 디자인, 안전성, 연비가 좋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브랜드의 차가 가격 경쟁력 때문에 팔리기보다는 우수한 성능과 디자인 때문에 많이 팔리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신학교에서 모임이 있을 때입니다. 신학교 뒤에는 낙산이 있는데 낙산 꼭대기에 허름한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 냉면을 팔았습니다. 간판도 없었습니다. 집 앞에 국기를 거는 깃대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냉면 집을 ‘깃대봉’이라고 불렀습니다. 간판도 없었고, 집도 허름했고, 산을 올라가야 했는데도 사람들이 자주 찾았습니다. 냉면이 맛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뒤에 깃대봉 냉면집은 산 아래에 ‘깃대봉 냉면’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차렸습니다. 살얼음이 떠있는 알싸하게 매운 냉면 맛이 생각납니다. 문득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중요한 것은 아버지 뜻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입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면 ‘주기도문 성당’을 방문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장소입니다. 그곳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된 ‘주님의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에게는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미사 중에도 함께 바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는 청원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청하며,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의 자세를 성찰하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마라. 매일 매일 땅에 것만 생각하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언제나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전혀 아들, 딸답게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제 이름만 내려고 발버둥 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마라 오로지 황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모든 것이 네 뜻대로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고 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여전히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인 줄 알면서도 매일 죄 지으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빤히 보면서도 피하려 하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주님의 기도는 정말 아름다운 청원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보는 것처럼, 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이영근신부-
기도의 원형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기도가 어디를 향하여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아버지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이는 다 알고 계시니, 더 이상 청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다 아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상 필요한 것은 청하지도 않고, 오히려 필요하지도 않는 것을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내가 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바라고 있는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 바라야 할 것을, 곧 참 된 것을 바라고 있는가?’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 하시면서,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고,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먼저 “아빠, 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아빠, 아버지”라고 기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으로써,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십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당신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들로서 “아빠, 아버지”께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기도의 열쇠 말을 “아빠, 아버지” 입니다.
그리하여 시편작가의 노래를 실현하십니다.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2)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동시에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졌습니다.
“아들”로서, <첫 번째>의 삶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삶입니다.
“아빠, 아버지”께 기도하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그 삶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을 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도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오로지 아빠 아버지께 속해 있는 자녀로서,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 길을 가는 일입니다.
곧 아들의 길을 걷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반영억신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 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을 다해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희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주님의 기도
-송영진신부-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1) 여기서 ‘빈말’은 마음이 아니라 입술로만 바치는 형식적인 기도,
쓸데없이 수식어만 길게 늘어놓는 기도, 믿음 없이 바치는 기도를 뜻합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안 믿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라는 말씀은,
우상숭배자들의 기도 모습을 가리키는 말씀인데,
실속 없이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그들의 전례나 기도는 모두
헛된 것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을 닮지 마라.”는 “기도할 때에 그들처럼 하지 마라.”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자유기도’를 바친다고 하면서,
그럴듯한 말을 잔뜩 늘어놓을 때가 있는데, 그런 기도는 모두 빈말입니다.
(빈말 가운데 대표적인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서, 또 ‘삶’으로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는 말만 자꾸 반복하는 것은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입니다.)
2)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래서 너희가 기도하지 않아도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제때에 주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기도의 이유와 목적’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우리 사정을 모르고 계시는 하느님께 그것을 알려드리는 일도 아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는(또는 주시려고 하지 않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하는 일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데, 기도는 바로 그것을 제때에, 제대로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은혜를 받았는데도 받은 줄도 모르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헛일로 만들어버린 사람입니다(요한 5,1-15).
루카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은혜 속에서 살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는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합니다(루카 15,29).
그런 경우는 이미 받은 은혜를 그 자신이 헛일로 만드는 일이고,
더 받게 될 은혜를 스스로 버리는 일입니다.>
3) 사순 시기는 그동안 바친 기도들이
혹시 빈말은 아니었는지 반성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빈말이 아닌, 진심으로 기도를 바치려고 노력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진심으로, ‘온 삶’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알곡’이고,
빈말만 되풀이하는 사람은 ‘쭉정이’입니다(마태 3,12).
‘회개’는 쭉정이에서 알곡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9-15).”
1) ‘주님의 기도’는 ‘빈말’이 아닌 ‘참 기도’의 모범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쓸데없는 수식어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고,
꼭 필요한 말만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니라 입술로만 바친다면, 또 ‘실천 없이’ 바친다면,
‘주님의 기도’도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2)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잘 받기 위한 준비” 라는 말은,
‘주님의 기도’에도 적용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일, 아버지의 나라가 오는 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은 모두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고,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그 은혜를 잘 받으려고 준비하는 일입니다.
이 ‘준비’는 ‘말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는 ‘삶으로’ 실천하면서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온 세상에 거룩히 드러날 수 있도록, 또 아버지의 나라가
하루라도 빨리 올 수 있도록, 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신앙인들도 협력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3)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을 물리치는 일, 악에서 구원 받는 일도 모두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이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는 것은
그 은혜를 잘 받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나눔 실천’과 함께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나 혼자 먹을’ 양식을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먹을’ 양식을 청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만 하고 ‘나눔’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기도는 ‘빈말’입니다.
용서를 청하는 기도도 ‘용서의 실천’과 함께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만일에 남을 용서하지 않고 있으면, 용서를 청하는 기도는 ‘빈말’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못 받게 됩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용서의 은혜를 안 받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데도 받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유혹과 악을 물리치는 일도,
기도하면서 동시에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복음: 마태 6,7-15: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조욱현신부-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7절) 말을 많이 할수록 하느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도를 길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기복적인 기도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기도를 바치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내려주실 마음이 드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가르쳐 드려야 할 분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얻어야 할 분이시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긴 기도가 아니라, 참된 마음이다. 참으로 우리가 그분께 항상 감사를 드리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항상 제때 내려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9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며, 믿음의 어머니인 교회에서 우리가 받고 그분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 안에서 나날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흠 없이 열심히 살아 우리의 삶으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10절)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먼저 우리 안에 서고 하느님께서 그 나라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시민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안에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의 모습에 따라 나와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10절)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하며, 당신의 뜻이라는 힘과 그 뜻을 실행하는 능력을 주십사 청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은 그분께서 자녀로 삼으신 이들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11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청한다. 이것은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로써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식으로 주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이 양식은 딱 하루에 충분한 만큼 주어진다. 이 양식은 ‘내일을 위한’, ‘영원을 위한’ 양식을 뜻하며 물질로 바뀌지 않는 양식을 말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12절) 우리는 매일 죄를 지으며 산다. 그러기에 죄의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이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그것은 소홀히 할 때 앞에서 한 청원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계약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13절) 또한 우리는 이미 저지른 죄의 용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이끌려 가도록 두지 마십사고 청하는 것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기도는 앞의 모든 청원과 기도를 간결하게 요약하는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신다면, 우리는 모든 어려움에서 확실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 이 기도를 하면 더 청할 것이 없다. 악에 대해 하느님께 보호를 청하고 그것을 받게 되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호자로 둔 셈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주님의 기도를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중에서 용서에 관한 것을 특별히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로 우리가 자비로워지기를 바라신다. 사실 이 용서는 주님과 계약을 맺는 듯한 말로 청하고 있다.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계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청원 전체가 헛일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14-15절)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용서는 그래서 잘못한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이제 용서하면서 하느님과의 이 계약을 성실히 지키도록 하는 사순시기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말씀과 인간 말의 대비를 보여 주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주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저 헛되이 허공으로 흩어져 스러지는 말씀은 없습니다. 주님의 생각과 의지, 그리고 말씀과 완성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마태 6,7)
안타깝게도 인간의 말은 빈말의 되풀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말은 길어지고 거짓은 늘어나며 의미는 희석되기 일쑤지요.
예수님은 하느님께 무언가를 아뢸 때 말의 양, 즉 기도의 길이보다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기도 내용이 사랑의 고백이건 절박한 청원이건 세상을 위한 전구이건 본질은 미사여구가 아니라 기도하는 이의 마음이지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그런데 이미 아버지는 기도하는 이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마음을 두드리며 말을 걸어오는 이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그 당사자보다 더 잘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기도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주님의 기도라 일컫는 기도를 알려 주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가 청할 바는 이 기도 안에 다 들어 있지요.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과 악에서 보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지향들 안에는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을 위한 아버지의 바람이 이러하시니, 우리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를 청함으로써 기도 안에서 그분과 일치합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마태 6,14)
정성껏 주님의 기도를 바치다가도 가끔씩은 이 대목에서 멈칫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고통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마음이 준비되지 않아 미처 용서하지 못한 이는 아버지께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뜻일까요? 우리의 아버지가, "요놈, 용서를 하나 안 하나 두고 보자. 네가 용서하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 하면서 팔짱 끼고 감시하는 분이실까요?
용서하는 것과 용서 받음이 같이 간다고 받아들이면 용서에 대한 우리의 무게가 좀 줄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하기 힘든 용서를 애써서 실천한 이는 이미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용서받았음을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용서함과 용서 받음의 선후 관계가 모호해질 정도지요. 확실한 건 우리 중 누구도 용서에서 제외된 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용서해서 용서 받은 건지, 용서 받아서 용서한 건지 계산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용서의 축복 안에 하나로 녹아 있습니다.
주님 앞의 머무름이 길어지고 기도가 깊어질수록 마음은 더 진해지고 말은 줄어듭니다. 이제는 기도의 언어가 얕은 웅덩이에서 튀어오르는 물방울처럼 가볍지 않고, 저 땅 깊은 곳에 스며들어 싹을 밀어 올리는 진중한 에너지로 응집되니,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우리의 말은 더이상 빈말이 아니라 아버지 마음과 하나되는 말씀이 되어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정성껏 봉헌하며 그 안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 기도 안에서 아버지와 일치하고 이웃과 일치하며 세상 모든 피조물과 일치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씨부렁거리지 말기
-김찬선신부-
기도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정의가 바로 ‘기도는 대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화는 서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니
기도의 한 부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한 부분은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을 아뢰는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미사에서 1독서는 비처럼 내리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해,
복음은 하느님께 어떻게 말씀을 아뢰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합니다.
먼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기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그리고 대화의 훈련이 되어 있거나 예의가 있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대화가 아니라 일반적인 대화에 있어서도
자기말만 짓떠들어대지 않고 들으려고 하고 그리고 경청을 합니다.
들으려는 자세를 가졌을 뿐 아니라 들을 줄 아는 능력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이러하다면 하느님과의 대화에서는 더더욱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들을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지만
들을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도무지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해가 갑니다.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할 말이 너무 많고
반대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랄까 여백은 없습니다.
화난 사람, 억울한 사람, 이기고픈 사람, 자랑하고픈 사람, 가르치고픈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듣는 것에 있어서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비처럼 내려와도 하나도 스며들지 않고
다 흘러내려가고 말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씀은 뜻을 반드시 완수하고야 만다는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비,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그렇습니다. 한 번 온 비와 눈은 하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도 당신 말씀을 거두어들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사랑을 포기하지만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야 이루어지겠지요?
다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의 말을 아뢰는 기도>에 대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기도 해야지만
우리의 말을 잘 아뢰기도 해야 되는데
그런데 이 말을 청원기도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치 중요한 청탁을 해야 하는데 말을 잘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아마 우리가 청탁은 잘 할 것이고 그래서 청원기도는 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말씀이 청탁밖에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자식이 부모에게 노상 달라는 말밖에 없으면 되겠습니까?
성숙한 자녀라면 이제 감사의 표현도 하고
동등한 대화의 파트너로서 격조 있는 사랑의 표현도 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빈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이 빈 말이 아닙니까?
청할 것 외에는 감사할 것도, 찬미할 것도, 사랑 고백할 것도 없는데
뭔가 말을 해야 하니 하느님께 빈 말을 하는 것입니다.
빈 감사의 말,
빈 찬미의 말,
빈 사랑의 고백을 씨부렁거리면 그것이 기도가 되겠습니까?
씨부렁거린다는 표현이 좀 거칠기는 한데 빈말은 원래 씨부렁거리는 거지요.
씨부렁거리지 않고 기도를 좀 하는 우리가 되기로 합시다. 오늘부터!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오 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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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자녀뿐입니다. 자녀가 아닌 사람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당신은 내 자녀가 아닌데 왜 아버지라고 부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가까운 관계, 친밀한 관계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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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의 제사는 곧 기도입니다. 기도는 축복을 청하는 것입니다. 축복을 청할 때 카인보다 아벨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는 아벨은 은총 지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농부였습니다. 처음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신 것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아담에게는 농사일을 시키셨습니다. 농사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가 하는 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고 카인은 그 이후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란 마치 세례를 주는 것처럼 선교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일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선악과에 손을 댄 아담은 남을 사랑하는 일보다는 소유하는 일에 집착합니다. 자기 손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사람은 저주받은 땅에서 고생은 하지만 충분한 소출은 얻어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그에게 축복을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카인인 상태로 청하는지, 아벨인 상태로 청하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카인에서 아벨로 옮겨가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분 뜻을 먼저 헤아릴 때 농사를 짓던 아담에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담으로 바뀝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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