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Margaret K 2021. 2. 22. 08:29

2021 2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먼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마태16,13-19) 


He said to them,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Simon Peter said in reply,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Jesus said to him in reply, “Blessed are you, Simon son of Jonah.
For flesh and blood has not revealed this to you,

but my heavenly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오늘 기념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와는 제법 큰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우리 삶의 자리와 베드로 사도좌와의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도 그렇게 가깝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님이나,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님들과 성직자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주일만 간신히 지킨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에게는 이 축일이 큰 의미로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심은 교황님과 주교님들을 비롯한 성직자, 수도자들의 신앙심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온전히 삶을 투신하면서 살기에는 생각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다반사가 예수님보다 더 크고 중요하게 다가올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부족한 신앙인이라고 자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신앙인이기에, 부족해 보이는 신앙인이기에 오늘의 축일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적 없으셨던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반석 삼아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럼 베드로 사도는 위대한 인물이었을까요? 우리는 그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어부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지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다가도 풍랑을 바라보고 두려워서 물에 빠지고,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인공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체험한 예수님의 첫 제자가 베드로이기에,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우리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06년 여름밤, 여덟 살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길을 건너다가 트럭에 치였습니다. 트럭은 소년을 9m 정도 끌고 간 뒤에야 멈췄습니다. 아이는 트럭 밑에 끼어 있는 상태였지요. 그런데 이 사고를 본 한 중년의 노동자가 달려와서 트럭 프레임을 움켜쥐고서 차 앞쪽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것도 차 아래의 소년을 끌어낼 수 있도록 45초간 잡고 있었답니다.


사실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데드리프트 세계 기록은 500kg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트럭의 무게는 1,500~1,800kg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역도선수도 아니었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을 했느냐고 기자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렇게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도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닐 것입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저 애가 내 아들이라면? 당장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움을 줘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인간의 길은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들의 생각을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질문은 가르침을 시작하셨을 때가 아니라,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을 전해주신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성장을 보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생각은 아예 물어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그들을 따르고 있기에, 예수님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으려면 그들의 생각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아예 무시해버립니다. 나쁜 동기로만 가득 찬 종교지도자들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나쁜 동기로만 가득하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도 던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고, 또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열정과 사랑이 있어야만 주님의 질문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만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는 이기적인 위선자의 모습 말이지요.

철저하게 사랑을 따르는 사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 베드로와 같은 정답도 말할 수가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칫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아홉 가지의 잘못을 찾아 꾸짖기보다는 단 한 가지라도 잘한 일을 발견하여 칭찬하여 주는 것이 그 사람을 올바르게 인도하는데 큰 힘이 될 수 있다(앤드류 카네기).


임계점

버너 위에 물이 가득 담긴 물 주전자를 올려놓았습니다. 아직 끓지 않고 있을 때 물의 온도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린 뒤에 물이 펄펄 끓습니다. 이 순간의 온도를 우리는 확실하게 압니다. 맞습니다. 100도입니다.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끓으면서 액체 상태의 물을 기체 상태의 수증기로 바꿔놓습니다.

바로 1도의 차이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임계점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열심히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혹시 그 임계점을 넘어서지 못해서 실패를 맞이했던 것이 아닐까요?

임계점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임계점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노력 안에서 얻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는 분명히 많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노력해보고 힘차게 실천하는 삶이 우리가 원하는 성공에 가깝게 만들어 줍니다.

 원숭이는 사람의 것을 양도받을 수 없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하늘나라 열쇠를 맡긴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무엇보다 베드로 교회에 우리가 머물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면 교회가 존재하는 이상 베드로도 그 교회 밑에 항상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교회라는 건물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이 진정 베드로인가?’는 확인해야 합니다. 베드로 교회라면 분명 베드로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사용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죄 때문에 하늘 나라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그 권한만 있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권한을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주시는 분이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만약 자신에게 그 권한을 주시는 분을 보통 인간으로 보았다면 그런 권한을 주셔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개신교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포기했습니다. 스스로 교회가 하느님 자녀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람들 모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 아들로 알아보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죄 용서의 권한을 양도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인간이 원숭이를 보듯 했다면 그 권한을 양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원숭이가 인간을 보듯 했다면 그 권한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같은 수준끼리만 권한의 양도가 가능합니다.

 

      1973년 11월, 오클라호마의 연구소에서 새끼 침팬지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님 침스키. 님은 허버트 박사의 프로젝트를 위해 강제로 어미와 이별한 후 스테파니의 집에 맡겨져 ‘인간의 아이’처럼 길러집니다. 당시 언어가 인간이란 종족만이 가진 권한이라는 이론에 반박하기 위한 실험이었습니다.

      스테파니의 딸 제니와 함께 성장한 님은 언어 교육을 위해 허버트 박사 연구팀의 로라에게 맡겨지고, 수화를 통해 기본적인 단어들을 배우며 놀라운 능력을 선보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자 거센 힘을 종종 휘두르며 침팬지의 야성을 드러냅니다. 사람을 공격하여 볼이 뚫릴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실험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허버트 박사는 프로젝트를 중단합니다. 님이 수화를 통해 단어를 배웠지만, 그 단어를 조합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더 큰 님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허버트 박사는 님을 오클라호마 침팬지 연구소로 돌려보냅니다. 님은 그곳에서 다른 침팬지들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단독 우리에 갇혀 살게 됩니다.

 

      어느날 유년 시절 자신을 키워주었던 스테파니가 찾아옵니다. 농장주의 만류에도 스테파니는 님을 만나겠다고 우리 안으로 들어갔고 죽기 직전까지 님은 보복을 가합니다. 오히려 버려진 자신과 놀아주었던 사육장의 밥이 찾아오자 그는 반겼습니다.

 

      님에게 사람의 말을 배우는 것은 지옥과 같은 고통이었고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 자신과 놀아준 밥은 천국이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고 하여 동물에게 이양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이양하는 것은 그 가치를 아는 대상에게만 가능한데 하느님 나라의 열쇠도 인간이 아닌 하느님 아들의 수준에만 이양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야 그 권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아들로 볼 수 있는 눈은 하느님의 아들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특별한 분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그분을 하느님 자신으로 볼 시력을 지닌 사람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당신을 소개하셔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로 볼 줄 압니다.

 

      베드로의 이 시각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과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블랙’(2005)에서 자신이 짐승인 줄로만 알았던 한 소녀가 한 스승을 만나 인간의 부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로 모든 것을 새로 보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의 부모가 인간이라면 자신도 인간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풀과 나무, 꽃과 물이 모두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존에만 집착했던 때와는 다르게 각 물체가 다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이렇듯 나의 정체성이 나의 시각을 좌우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들로 새로 태어난 베드로에게 당신의 권한을 이양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아들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이양받고 그것을 행사합니다. 그 권한은 “하늘 나라의 열쇠”입니다. 본인이 아직 인간의 자녀라고 믿는 사람에게만 이 열쇠를 맡길 수 있으십니다. 반대로 이 권한을 거부한다는 말은 하느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나 혹은 하느님께서 당신 권한을 당신 아드님께 주실 수 없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줄 수 없겠습니까?

 

      인간이 원숭이에게 어떠한 권한을 받겠습니까? 혹은 원숭이가 인간에게 어떠한 권한을 이양받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만이 인간의 권한을 이양받을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권한을 이양받았다면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베드로에게 거룩한 것을 주셨다면 교회가 개들은 아니란 뜻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권한을 행사한다면 그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또한, 스스로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권한을 거부한다면 스스로 거룩한 것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기셨고,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학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랠래아 호숫가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이웃사랑은 실천적이며,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웃이 빠진 사랑은 감성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는 기초적인 수단이지만, 이웃사랑에서 ‘사랑’만 강조하면 공정과 정의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웃사랑은 정의와 공정의 실현이라는 백신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자선과 나눔이라는 치료제가 필요합니다. 자선과 나눔은 지금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고 필요한 애덕의 실천입니다. 정의와 공정은 굶주린 사람이 빵을 만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고, 굶주렸던 사람이 정의와 공정을 실현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빵을 주는 자선과 나눔도 실현해야 하지만, 빵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일식집에서 스시를 만들었던 분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전에 TV 프로그램에서 스시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번에 스시를 만드는데 정확하게 쌀의 숫자가 일치했습니다. 매번 스시를 만들 때마다 밥알의 숫자가 변동이 없었습니다. 대단한 내공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제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밥알의 숫자를 매번 같게 하는 것은 기술입니다. 진정한 스시는 만들기 전에 손님을 보는 것입니다. 손님이 체격이 좋고, 잘 먹을 것 같으면 밥을 더 많이 담고, 큰 스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손님이 마르고, 적게 먹을 것 같으면 밥을 조금 담고 작은 스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스시를 만들기 전에 꼭 손님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스시는 기술이 아니라 예술입니다.” 형제님의 말에는 스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학은 증상을 없애는 방향으로 치료를 합니다. 효과가 빠르고, 신속한 치료가 가능합니다. 증상을 없애기 위해서 약을 쓰고, 수술을 하고, 방사선을 사용하고, 제거하기도 합니다. 동양의학은 증상의 원인을 없애는 방향으로 치료합니다. 환자가 기력을 회복하여 증상이 완화되도록 합니다.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침을 놓고, 보약을 쓰고, 부황을 뜨고, 뜸을 뜨기도 합니다. 서양의학도, 동양의학도 사람의 건강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인류의 유산입니다. 지금 아픈 사람의 증상을 없애는 것도 필요한 치료방법입니다. 지금 아픈 사람이 그 원인을 알아서 스스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중요한 치료방법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교우들의 아픔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교우들이 주님께 나갈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양승국신부-

 

함께 사는 형제가 제 성격에 딱 맞다며 별명을 하나 지어줬는데 ‘조급’ 양신부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천하태평같고 여유만만해 보이지만, 같이 살아보니 엄청 급하답니다. 

 

미사 입퇴장 할때도 광속이라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답니다. 바깥 일도 천천히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아무 말도 않고 그냥 혼자서 다 해버린답니다. 따지고 보니 그런 구석이 없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 사도도 비슷하신 것 같습니다. 수제자답게 진중하게 생각도 해보고, 여유있게 움직이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께서 질문을 던질 때면 다른 제자들에게 기회를 줘도 좋을텐데, 제일 먼저 나서서 대답하다가 늘 점수 왕창 깎아 먹기 일쑤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성격은 공으로 표현하자면 럭비공이었습니다. 축구공이나 농구공은 바닥에 튀면 대충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이 됩니다. 그러나 타원형인 럭비공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좌충우돌, 우왕좌왕, 천방지축, 티격태격의 명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수난 직전 적대자들과 대치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순히 병사들에게 붙잡히십니다. 아버지의 때가 왔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는 칼을 뽑아 대사제 종의 귀를 내리쳐 잘라버립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잘라진 귀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아프다고 울부짖는 대사제의 종의 모습을 상상해보셨습니까? 귀를 잘랐기 망정이지 목이라도 쳤으면 살인자가 될 뻔 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는 예측 불가능한 돌출행동으로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공동체 멤버들을 당혹스럽게 하는데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허물 이 너무 많아 부적격자로 보이는 베드로를 수제자요 반석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쉼없이 흔들리던 그를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나약하기 그지 없는 한 인간 존재, 그래서 언제나 좌충우돌, 흔들리던 시몬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맡기시고, 천국의 열쇠까지 맡겨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큰 마음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처럼 지상 생활 내내 쉼없이 흔들렸던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스승님으로부터 잦은 질타를 받던 ‘관심 사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정확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 죄, 인간적인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흔들렸지만 흔들릴 때 마다 겸손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저는 당신 제자로서 부당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시몬 베드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의 기반 위에 각고의 노력을 더해, 마침내 그 어떤 세찬 비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존재 자체로 오늘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겸손함입니다. 그러한 겸손의 덕 위에 부단히 자신의 결핍, 나약함, 부족함이 무엇인지 알아가려는 솔직한 자기 인식을 위한 노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우선,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곧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또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열쇠”는 권한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이제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주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할입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의 축제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권한”이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오직 하늘에서 오는 그 “매고 푸는” 능력으로 모든 형제들에게 믿음을 굳게 해 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과 신앙으로 일치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으뜸중의 으뜸

 -반영억신부-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더냐?”(마태16,13)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하고 물으셨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16,16) 라고 한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을 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텔레비전 시청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시간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 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에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너희는 왜 나의 제자가 되었느냐?”, “왜 나를 따라다니느냐?”,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같은 질문이 모두 합해져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제자들의 생각을 물어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물어보는, 즉 제자들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제자들의 믿음을 몰라서 물으신 것은 아닙니다.)

 

2)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저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대답은, “저희는 구세주이신 스승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습니다.(스승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저희가 스승님에게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또는

“너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우리는 이미 베드로 사도가 말한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머리로는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대답은(예수님에게 바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바람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그 단계에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끝까지 그런 것만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희망은 ‘세속의 복’이 아니라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당면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희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단계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언제든지 망설임 없이 그렇게 ‘진심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너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너는 복된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복된 사람’이 된 것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그를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 라는 말씀은,

그의 신앙고백은 인간적인 지식이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셔서

그에게 계시를 내려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가 깨닫고 믿고 고백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신앙고백은 그 자신이 자유의지로 그 은총에 응답한 일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어떻든 그가 사도들을 대표해서 신앙고백을 하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4)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당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은,

그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고,

동시에 ‘베드로 사도’ 라는 한 사람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합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바로 그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 사도”를 반석으로 삼으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일에서 ‘신앙고백’과 ‘베드로 사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베드로 사도가 신앙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은 반석 자격을 잃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라는

특정 개인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뒤에 베드로 사도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나라.” 라고 혼나는 일이

생겼을 때에도(마태 16,23), 또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일이 생겼을 때에도(마태 26,69-74),

예수님께서는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일들은 신앙고백과는 상관없는 일들, 즉 베드로 사도가 판단을 잘못했거나

용기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5)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교회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저승의 세력’이라는 말을, ‘죽음의 세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악의 세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죽음의 세력’이라면 예수님 말씀은

‘교회의 영원성’에 대한 약속이고, ‘악의 세력’이라면 적대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두 가지 뜻이 모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교회 전체를 향한 약속이기도 하고,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 사도를 향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그리고 이 약속은 신앙인 각 개인을 향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전체 교회든지 개인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면서

마음대로 막 산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다는 말씀은, 당신의 권한을 ‘위임’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위임’이기 때문에 그 권한 행사는 전적으로

주님 뜻에 합당하게 행사되어야 합니다.

(그 권한 행사는 ‘하늘의 뜻’을 지상에서 대행하는 일입니다.

하늘이 땅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땅이 하늘에 종속됩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 19)
-한상우신부-


복음의 진리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많은
사도좌들을
기억한다.

사도좌는
힘겨운
직분이다.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자가
바로 사도좌라는
직분이다.

하느님의
교회안에서
사도좌는
사도좌의
무거운
역할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봉사자의
선두에 서서
앞장서 나가시는
분이 바로
사도좌이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직접 찾아가신다.

사랑과 지혜가
필요한 삶이다.

교황님의
삶이란
그리스도의
사명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기도와 실천의
삶이다.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신다.

신앙의 기쁨은
함께하는
기쁨이다.

복음을
바탕으로 하는
개혁과 변화는
열정과 참여를
통한 신앙의
선물이다.

다시금 신앙이
무엇인지를
묻게된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 본질이다.

하느님의
힘으로
교회는
사랑으로
일치할 것임을
믿는다.

이 사순시기는
각자의
직분으로
돌아가
기도하고
사랑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시기이다.

은총이 큰만큼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무게도 크다.

교황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듯

우리들은
교황님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느님의 백성은
심장과 머리
손과 발의
기능처럼
하나의 몸이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교회이다.

그 교회안에
은총과 성장
회개와 변화가
있다.

주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은총과
평화를 주소서.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조욱현신부-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모든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한다. 베드로 사도좌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갈릴래아 바다 동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요르단강의 상류이며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이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용히 대화하실 수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물으신다. 제자들의 대답은 여러 가지가 나왔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 이렇게 물으신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을 먼저 묻지 않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물으신다. 그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보았으며 주님과 함께 기적을 행한 제자들의 답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는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대답하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부름으로써,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생명 자체이시므로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음을 나타낸다. 그 육신은 나약하여 죽었지만, 곧 다시 살아났다. 그 안에 거하시는 말씀을 죽음은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이 반석은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신앙이다. 주님께서는 이 반석이라는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가장 먼저 이 신앙을 고백한 사람을 이 이름으로 부르시며, 장차 그의 것이 될 권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의 공통적인 이 고백을 베드로가 가장 중요시할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갖는 열쇠는 바로 교회가 갖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그 상속자이다. 여기에 들지 못한 사람은 거룩한 것들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는 결코 흔들리지도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바위이시다. 그래서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는 이 이름을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자세는 어떤가?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나에게 있어 그분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하며, 그 답을 각자의 생활과 믿음에서 각자가 발견하고 고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답이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바로 당신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교황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더욱 일치하고 그분이 더욱 많은 봉사를 잘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베드로 사도가 당신의 신앙고백으로 이러한 직책을 가지셨고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셨다면, 이제 우리도 올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언제나 하나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으뜸,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교회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교회 직분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히 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예수님께서 당신을 누구라 여기는지 제자들에게 묻자 베드로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신원이 정확히 드러난 이 대답에 예수님께서 매우 흡족해 하시면서 베드로를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베드로가 발설한 정답이 그 자신의 지식이나 생각에 기인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는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불어넣어 주신 영께서 그를 채우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니까요.

하느님에게서 오는 생각을 따르는 일이 늘 당연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성령께 마음을 열고 있지 않으면 얕은 상식이나 꾀로 주님에게서 오는 영의 움직임에 귀를 막고 제 것을 하느님 생각인 양 고집할 수도 있지요. 안타깝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을 통해 드러난 베드로의 약함을 모르지 않으나, 이 순간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고백한 베드로의 단순한 신앙에 마음이 끌립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그런 그의 투박하지만 충실한 기질을 보시고 그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8-19)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에는 베드로의 직분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직분을 주시는 주체는 철저히 예수님이시지요.

"내가 ... 세울 터인즉." 교회를 세우는 이는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내 교회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분을 머리로 하는 몸이지요.
"나는 ... 주겠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에게 문지기의 소임이 맡겨졌을 뿐, 하늘 나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시지요.

"너는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워 주어라."(입당송)

그런데 성 베드로 사도좌를 기념하는 오늘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고 그분 곁을 떠났던 슬픈 사건의 기억에서 출발합니다. 인간 베드로는 비겁하고 나약했지만, 그를 부르시어 직분을 맡기시고 그 자리에 세워주신 분은 모든 것을 떠안으실 만큼 크고 충실하신 분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아는 그 베드로 사도가 목자의 직분을 수행하는 다른 원로들에게 간곡히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1베드 5,1)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죽음까지 수락하여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기에 이처럼 말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 자신의 인간적 배경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을 제 것으로 수락했기에 주어지는 권한입니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1베드 5,2)

목자의 첫째 직무는 "으뜸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사랑을 다해 맡겨진 양 떼를 돌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렇게 합니다. 목자는 늘 자기 안위나 이익에 앞서 양 떼를 떠올리고 그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약한 자신을 택하시어 당신 뜻을 불어넣어주신 은총의 체험으로 죄스럽고 부족하나마 맡겨진 직무를 충실히 채워가며 주님의 교회를 지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인간적 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양들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 목자들과, 저마다의 자리에서 충실히 소명을 채워가는 우리 모두를 기억하며 응원하는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베드로 사도를 이어 주님의 교회를 돌보고 이끄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면 좋겠지요. 교황님부터 세상 끝 이름 모를 형제까지 온 세상의 목자와 양들이 함께 기쁘고 흡족하고 행복한 오늘이 되길 축원합니다.   

 사랑의 무류성

 -김찬선신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반석 삼아 당신 교회를 세웠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긴 역사 안에서 그랬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사도 베드로가 과연 반석이 될만한지에 대해서입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면

반석이 될 만하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선택은 실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아니고 반석이 될 만한 다른 사람은 있는가?

야고보 사도나 요한 사도는 좀 나은가?

아니면 바오로 사도는 될 만한가?

 

좀 나을지는 모르지만 반석 되기에 어림없기는 마찬가지지요.

어느 인간이 주님 교회의 반석이 될 만하겠습니까?

주님 교회의 반석은 주님 자신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 3장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다른 반석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반석 삼으신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이 말씀에서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주님은 우선 당신이 손수 세우시겠다고,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 바로 당신 자신임을 강력하게 천명하십니다.

 

다음은 내 교회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교회이니 당신이 확실하게 챙기실 것입니다.

세우는 분도 당신이시고 유지하는 분도 당신이시라는 것입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당신이 확실히 교회를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에게서 이탈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님과 사랑의 결합을 하고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 교회를 사랑하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로 오르시기 전 베드로에게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께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바탕 삼아

당신의 양떼를 잘 돌보라고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님 교회의 반석이 되는 것은

그의 능력이나 완전성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것이고,

사랑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알았기에 교회의 원로들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양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사랑의 자발성과 사랑의 무류성입니다.

사랑을 하면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고 스스로 자진해서 하며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것을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 곧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할 때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나이 70이 되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곧

마음 가는 대로 해도 하늘의 법을 거스르지 않게 된다고 하고,

아오스딩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하는 거겠죠?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16,13-19) 

---

비록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당신을 소개하셔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로 볼 줄 압니다.

베드로의 이 시각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과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블랙’(2005)에서 자신이 짐승인 줄로만 알았던 한 소녀가 한 스승을 만나 인간의 부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로 모든 것을 새로 보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의 부모가 인간이라면 자신도 인간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풀과 나무, 꽃과 물이 모두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존에만 집착했던 때와는 다르게 각 물체가 다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이렇듯 나의 정체성이 나의 시각을 좌우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들로 새로 태어난 베드로에게 당신의 권한을 이양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아들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이양받고 그것을 행사합니다

-전삼용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