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2월 19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Margaret K 2021. 2. 19. 07:23

2021년 2월 19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Can the wedding guests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혼인잔치.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윗 임금은 가장 모범적인 임금이요 훌륭한 성군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습니다. 사무엘기 하권 7장에서 그는 나탄 예언자에게서 자신의 왕권이 영원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을 듣게 됩니다. 그 약속을 들은 다윗은 어떠하였을까요?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러나 사무엘기 하권 11장에서는 자기 부하의 아내를 탐하고, 그것을 감추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여 결국에는 부하를 죽이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화답송으로 만나는 시편은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의 머리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휘자에게. 시편. 다윗. 그가 밧 세바와 정을 통한 뒤 예언자 나탄이 그에게 왔을 때”(시편 51[50],1-2). 이 시편에서 다윗 임금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합니다. 하느님 자비에 호소합니다. 호소하는 가운데 그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습니다.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께서 업신여기지 않으신다는 그 강한 믿음이 그를 다시 일으켜 줍니다.
다윗 임금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백성을 잘 통치하였거나 하느님께 한결같은 모습으로 충실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임금이자 성군으로 기억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여 그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참으로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잘하는 것보다 부족함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와 부족함이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아설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우리의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일’ 가는 사람이 되려 하면 온 세상 사람이 ‘경쟁자’가 되지만, ‘유일’한 사람이란 걸 아는 순간에 우리 각자가 ‘소중한 존재’가 된다. ‘넘버 원’이 되기 위해 살면 1등의 왕좌는 하나뿐이라 1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불행해지지만, ‘온리 원’이 되면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만든다.


어느 책(전대진, ‘실컷 울고나니 배고파졌어요’ 중에서)에서 읽은 구절입니다. ‘제일’ 가는 사람, ‘넘버 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사실 ‘제일’ 가는 사람, ‘넘버 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 ‘제일’과 ‘넘버 원’이 되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이 최고의 자리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일’과 ‘넘버 원’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수학만큼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늘 100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1~2개 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괜히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또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1~2개만 틀려도 아주 잘한 것인데 말이지요. 이렇게 ‘제일’과 ‘넘버 원’은 피곤합니다.

‘유일’한 사람인 우리입니다. 그리고 ‘온리 원’인 우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 모두 소중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이 단식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열심하다는 사람은 모두 예외 없이 단식했던 것입니다. 특히 바리사이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아주 열심히 단식했습니다. 그들이 단식하는 이유는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단식이 아니라, 율법에 단식하라고 되어 있으니까 단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단식이 아니라, 자신이 아주 열심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단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짐짓 자랑하는 마음으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며 비교의 말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식적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단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래서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단식을 원하십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속과 희생의 마음으로 단식을 몇 차례 하게 됩니다. 이번 단식은 형식적이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나를 드러내기 위한 단식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단식, 희생과 보속의 마음에서 나오는 단식 등 참 단식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헬렌 켈러).


로또 같은 사람

아내가 남편의 눈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용히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내게 로또 같은 사람이야.”

이 말에 남편은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로또는 많은 이가 좋아하는 뜻밖의 행운이잖아요. 이렇게 자신을 뜻밖의 행운으로 여기는 아내의 말에 크게 기뻤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고마워.”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응…. 어쩌면 이렇게도 안 맞는지.”

아내의 로또 같다는 말은 좋은 말일까요? 나쁜 말일까요? 처음에는 좋은 말처럼 생각했지만, 결국은 안 좋은 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말도 나쁜 말이 될 수도 있고, 나쁜 말도 좋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좋게 했던 말도 상대에게 나쁜 말로 변할 수도 있고, 나쁜 말도 자신의 의도와 달리 좋은 말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 철저히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생깁니다.

 못이 십자가에만 박혀야 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어제는 우리 자신을 죽이는 못 세 개가 ‘기도-단식-자선’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단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왜 그 못 세 개를 꼭 십자가에만 박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당신 자리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이유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똑같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내가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가 내가 됩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당신이 ‘주인공’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죽임이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목적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히틀러는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채식주의자였고 운동을 열심히 하였고 동물 애호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가 아닌 나라를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자신에게 못을 박되 십자가가 아닌 나라 위에 박은 것입니다. 그런 삶은 자신을 죽이지 않는 삶보다 더 안 좋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에게 어떤 지인이 최미라 씨가 유방암에 걸려 홀로 죽어가니 방문을 해 주십사고 청했습니다. 수녀님이 호스피스 병동의 간호부장과 함께 자매님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가슴에 거즈와 헌 옷을 덕지덕지 붙여서 덮어 놓고 누워있는 자매를 발견했습니다. 간호부장이 거즈를 떼려고 하자 곧바로 거친 말을 내뱉었습니다. 


“아, × ×, 더럽게 아프네!”


자매님의 가슴은 곪아 문드러져 있었고 구더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자매님은 욕을 한 것이 미안했는지 자신이 워낙 험하게 살아와 그렇다며 수녀님에게 사과했고 수녀님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돌봐주는 가족이 없느냐고 묻자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자매님은 무서운 아버지와 무력한 어머니 밑에서 7남매 중 맏딸로 자랐습니다. 18세 때 동네 청년과 몰래 연애를 하다 발각되어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어머니가 말렸지만, 남자들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자매님은 집을 도망쳐 나와 유일하게 그녀를 받아주는 한 술집에서 술을 따르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엔 몸을 파는 여자들을 통해 돈을 버는 포주 일까지 하였습니다. 


자매는 그런 자신도 세례를 받아 하느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수녀님은 오히려 죄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세례 준비를 시켰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외우라고 시켰는데 욕을 세 번 정도 섞으며 간신히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큰 반감을 보였습니다. 아버지라는 말만 나와도 두려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수녀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참으로 자상하신 분이라고 잘 설득해 주었습니다. 


찰고 때 신부님이 주님의 기도를 시켜보자 자매님은 간신히 욕을 섞지 않고 외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마귀를 끊어버립니까?”라는 질문이 나오자 당황했습니다. 그런 준비는 미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에이, × ×, 뭐라는 거야?”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수녀님은 그건 긍정의 의미라고 신부님을 설득하려 했지만, 신부님은 단호한 대답을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었고 자매님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에이 주책없이! 죄송해요. 수녀님. 이렇게 좋은 날 눈물이나 짜고! 40년을 못 본 가족들이 갑자기 왜 보고 싶은 건지. 에이, 주책바가지!”


수녀님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자매에게 가족과 만남을 주선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며 40년 동안이나 관계를 끊은 가족을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자매는 그동안 가족에게 편지를 쓰고 붙이지 못한 것들을 모아놓았는데 라면 상자로 다섯 개나 되었습니다. 


수녀님은 수소문 끝에 자매의 형제들을 찾았고 남동생과 여동생 세 명이 자매님을 찾아왔습니다. 형제들 모두 자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몸이 아파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마리아 자매는 자신의 집을 팔아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고 형제들은 어렵게 산 누나의 재산을 안 받으려 했지만, 마리아 자매는 받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수녀님. 형제들이 나 죽은 다음에 나를 이야기할 때, 집안 망신시키고 죽은 미운 언니, 누나가 될까 봐 너무 두려웠어요. 그래도 내가 살면서 죄만 짓고 살지 않았다는 것,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자 혼자 살 길이 막막해서 술집에서 일했고 포주로 산 건 맞아요. 그래도요, 저 술집에 온 아가씨들은 꼭 어릴 때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엄마처럼 대해 주려고 했었어요. 제가 이 재산 주면서 동생들한테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라고 약속받아냈습니다.”


자매는 형제들을 만난 1주일 뒤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았고 형제들은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신들에게 써 놓은 그 많은 편지를 읽으면서 누나이자 언니의 떠남을 가슴 아파했습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최미라 씨의 가슴에 생긴 암은 그녀에게 세 개의 못이 되어주었습니다. 더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못이 십자가에 박혀 마리아로 새로 태어나도록 이끈 분은 베드로 수녀님입니다. 암에 걸려 몸이 죽어가도, 그래서 더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도, 그것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과 선교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 못만 가지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 박는 이유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함입니다. 사제가 미사 때 십자가에 못 박힌 형태로 기도하는 것도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신랑이요 머리가 되시기 위해 기다리십니다. 요한은 묵시록에서 하늘 나라에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묵시 20,4)을 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은총의 세 못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되어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사랑한다고 고백합시다. 그래야 모든 것이 완성됩니다. 이 일이 마리아 자매가 40년 동안 걸어온 길입니다. 십자가가 곧 ‘40’입니다. 


“저는 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합니다.”

 -조재형신부-


주일 아침 미사를 하기 전에 산보를 하였습니다잘 보이던 신호등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제의실에서 제의를 입으면서 알았습니다안경을 집에 놓고 왔습니다경본도 흐릿하게 보였고성당에 계신 교우분들의 모습도 흐릿하게 보였습니다그날 제독서의 내용은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 생각하니 세상이 흐릿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제가 안경을 놓고 온 것이었습니다미사 후에 숙소에 와서 안경을 다시 쓰니 세상이 다시 선명하게 보였습니다맞습니다세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세상을 탓하고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이것이 사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은 서로의 아픔과 마음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목감기가 심해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양성반응이 나왔던 신부님이 쓴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제목은 감염자입니다신부님께서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교우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나의 숨소리 나의 손길 나의 몸짓 흔적 모두가 위험과 기피의 대상

불결한 바이러스에 오염되었으니 격리 정화의 시간을 거쳐야한다

나는 위험하니 가까이 오지 마세요외쳐대는 성서의 나병환자처럼

나 땜에 덩그러니 텅 비워버린 성당에서 Mea Culpa Mea Culpa(내 탓이요내 탓이요.)

 

난생처음 유배인지 격리인지 정화와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매일같이 정신없던 사제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쉴 새 없이 울리던 폰도 수없이 들락거리던 사람들도 

이제 이집은 감염자의 집이라 주의 경계의 집이 되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의 병고와 고통 받는 이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나눈다면서도 남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수 없었는데

이렇게 내 몸뚱아리 아파보면 아맞아이렇게 아팠고 이렇게 두려웠을 거야그 많은 이들이 참 어떻게 견디었을까그 아프고 힘든 시간들

 

삶은 그 자체로 어쩌면 영웅적이야 

뭐 세상에 이름 내고 높은데 올라가 엄청난 일을 이루고 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아픔 고통 병 헤어짐 속에 얼마나 엄청난 용기와 신앙을 필요로 하는지 코로나로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려나."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斷食)’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견월망지(見月望指)’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달 쪽을 향해 손짓을 했더니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율법을 지켜야 하는 근본적인 의미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비유의 말씀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지 말고참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단식이라는 그릇도 중요합니다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담는 것입니다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자비희생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보내기에는 남아있는 우리의 날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양승국신부-

 

추운 날씨에 일주일간 계속된 큰 행사를 성황리에 마친 젊은 형제들과 젊은 자원 봉사자들이 너무 고마워서 당시 유행하던 고기부페집에 들어갔을 때가 기억납니다.

  

다들 한참때인 젊은이들이어서 그런지, 얼마나 맛있고 야무지게들 먹던지, 보고 있는 제 마음이 다 흐뭇해졌습니다. 저는 고기 몇 점 먹지 않았지만 그들이 먹고 있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십여명이 우르르 들어갈 때만 해도 엄청 환영하시던 사장님이셨는데, 내어놓는 족족 초토화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막 화를 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방에서 투덜거리는 말씀을 제가 듣고 혼자서 엄청 웃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지난번 레스링 선수들보다 더하다!”

  

잔치에 초대한 주인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은 아무래도 초대받은 사람들이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겠지요.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칭찬하고 정말 잘 먹었노라고 감사를 표할 때일 것입니다. 잔뜩 차려진 음식 앞에 손님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정신 줄 놓고 먹을 때 주인도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신이 날 것입니다. 

 

숱한 고민과 갖은 정성 끝에 이런저런 음식을 잔뜩 차려놓았는데, 어떤 사람이 깨작깨작 먹는다든지, 요즘 다이어트중이라며 한 젓가락만 먹고 딴청 피운다든지, 요즘 금식기도 중이라며 아무리 음식을 권해도 고개를 흔든다면 초대한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어쩌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위해 준비한 풍성한 천상잔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구약시대는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약시대는 한 마디로 잔치의 순간입니다. 축제와 환희의 기간입니다.

  

이토록 흥겨운 순간, 보속과 단식, 눈물과 통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기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흥겹게 춤추며 잔치를 즐길 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우리 각자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감격하면서 즐기는 기간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단식은 지금이 아니라 다른 때 하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9장 15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혼인잔치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이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단식 시기의 적절성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조만간 신랑을 빼앗길 날,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때는 단식해야 마땅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게 되면, 너무나도 당연히 혼인잔치나 축제는 재개(再開)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단식 행위로는 부족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기꺼이 참여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과 함께 기쁘게 죽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이루어지는 단식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실 단식이며, 이번 사순 시기에 필요한 단식입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보내기에는 남아있는 우리의 날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남아있는 삶을 최대한 만끽해야겠습니다. 기쁨과 감사, 찬미와 사랑의 날로 하루하루를 장식해야겠습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을 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것도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 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단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식으로 모은 곡식을 모아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자비의 특별희년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자비”를 “복음의 뛰는 심장”(12항)이라고 또,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25항)이라고 말하면서 교회는 이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단식이란 <레위기>(16,29-3)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깨끗한 새로운 삶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는 오늘날의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를 밝혀줍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사랑의 단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의미의 단식입니다.

곧 구약의 ‘속죄의 단식’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와 자비와 희망의 단식’이야말로 새 시대에 행하는 새로운 단식이요, 새 부대에 담아야 할 새 포도주가 됩니다.

결국, 단식은 이미 베풀어진 주님의 자비에 대한 우리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자비의 얼굴]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9항)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마태 9,14)

 

주님!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 속 부자유의 멍에를 풀고 불의의 결박을 부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육적인 욕망을 끊어라

 -반영억신부-


저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 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인의 단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가 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 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내용, 알맹이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법이나 규정 안에 녹아있는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마태9,14).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법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따라서 단식을 통하여 모아진 정성은 반드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을 때 잘해!”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단 식

 -송영진신부-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신부는 하느님 백성, 신랑은 예수님, 신랑 친구는 세례자 요한 자신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기쁜 일이고,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신 것도 기쁜 일입니다.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에게로 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지만(요한 1,35-39),

그냥 요한 곁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단식’에 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을 본받아서 자주

단식을 했고,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 차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는(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참회의 단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단식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미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우리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아니라 ‘주인공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손님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세례자 요한이 한 말을

인용해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인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원래 ‘기쁨의 종교’이고, 신앙생활은 원래 ‘기쁨의 생활’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생활이고,

예수님의 기쁨 안에서 살면서 우리의 기쁨도 충만하게 되는 생활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자체가 ‘기쁨의 생활’입니다.

 

3) 믿음이 흔들리거나, 믿음이 부족하면 기쁨을 잃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해결 방법은 더욱더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4) 만일에 죄 속에서 산다면, 또는 죄를 짓고 나서 제대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기쁨을 잃게 됩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참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나서 이런 기도를 바쳤습니다.

“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 주소서. 제가 깨끗해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 기쁨과 즐거움을 제가 맛보게

해 주소서. 당신께서 부수셨던 뼈들이 기뻐 뛰리이다(시편 51,9-10).”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시편 51,13-14).”

회개는 죄로 인해 잃어버린 ‘신앙생활의 참 기쁨’을 되찾으려는 노력입니다.

 

5) ‘단식은 회개의 표시이기도 하고, 회개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날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우리가 신랑을 빼앗길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랑을 떠나는 일은 많습니다.

믿음이 흔들려서 떠나거나, 죄를 지어서 떠나거나......

예수님께서는 늘 계시던 그 자리에 계시는데, 우리가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을

하면서 떠나기도 하고, 죄를 지어서 아예 멀리 멀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 신랑에게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회개를 하는데,

단식은 회개의 한 방법이 됩니다.

 

6)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방종한 생활을 하던 작은아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굶주림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루카 15,13-17).

물론 그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회개하려고 단식한 것은 아닙니다.

순서가 거꾸로 되긴 했지만,

어떻든 작은아들의 이야기는 단식의 효과를 잘 나타냅니다.

 

7)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서 라자로가 굶주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날마다 배불리 먹고 마시며 즐겼습니다.)

그는 저승에 가서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자기의 죄를 깨달았는데,

자기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형제들에게는 미리 경고해서

형제들만은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비유에는 그 형제들의 뒷이야기가 안 나오지만,

그들이 ‘고통스러운 곳’에 가는 것을 두려워해서 회개를 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라자로처럼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어 주는 일이고,

또 부자처럼 날마다 배불리 먹고 마시는 일을 멈추는 일입니다.

즉 그들은 단식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배불리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회개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된 일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배불리 먹고 마시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배불리 먹고 마시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라자로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나의 식탁에 그들을 앉히고 함께 먹는 것.

만일에 내가 먼저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음식을 나누어 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사랑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함께 먹거나 함께 굶거나.>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조욱현신부-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하느님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 하신다.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함께 계실 때의 기쁨과 그분께서 계시는 동안, 즉 마음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거룩한 양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명의 양식에 굶주리며 버려질 것이라는 말이다. 신랑을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는 단식행위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신들 또한 ‘하느님께 이보다 더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하면서 자위하는 교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를 오늘 독서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 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이 말씀은 오늘의 모든 위선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며, 그 당신의 그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단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경 필사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무수히 들어온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쳤고 법조문만 지키는 율법주의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단식과 금육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이 사순시기에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 15)

-한상우신부-


잔치도
공감도 모두

가장
좋은 것만을
내놓으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삶이라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마음과의
만남이다.

서로의 마음을
아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야말로
믿음의 잔치요
믿음의
단식이다.

믿음도
단식도
안과 밖을
비워내는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속일 수 없는
우리들
현실이다.

이 현실은
우리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된다.

단식은
말이아닌
행동이다.

너무 많은
생각속에
살고있다.

좋은 실천이
좋은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잔치의 시간과
신랑을 빼앗기고
슬퍼하는 단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잔치의 식탁과
단식의
식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본다.

관계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비워야
더 깊어지는
관계이다.

사순시기는
비워내는
믿음의
시간이다.

하느님으로
채우기위해
비워내는 것이다.

비워내는 것이
내려놓고
맡기는 믿음임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우리의
생활안에서

우리의
관계안에서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단식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마태 9,14)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율법이 정한 정결례와 고신극기에 충실했습니다. 그들 눈에는 먹보요 술꾼인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다지 열심해 보이지 않는 제자들이 당연히 못마땅합니다.

"단식을 많이 한다"는 것이 굶는 횟수를 의미하는지, 많은 걸 포기한다는 뜻인지 좀 모호하게 들립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때"로 응수하시니 단식의 의미가 점점 더 확대되는 듯합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마태 9,15)

지금 제자들은(인류는) 신랑과 함께 있습니다. 신랑이신 하느님이 신부인 당신 백성을 찾아와 함께하고 계시는 순간이지요. 혼인잔치에서는 누구도 굶지 않습니다. 울거나 비통해하지도 않지요. 하느님께서 베푸신 술과 음식과 춤과 음악으로 마음껏 기뻐하며 축복을 빌어주는 때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인류는 현세에서 물리적으로 신랑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분을 수난과 죽음으로 잃어버리는 날이 곧 닥쳐올 것이고, 또 그분이 본래의 자리인 성부 오른편으로 올라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현세에 계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분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가난하고 비참한 이들 안에 친히 거하실 것이기에 세상이 영영 그분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을 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주님께서 진정한 단식, 당신이 바라시는 단식에 대해 매우 소상하고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 이쯤되면 단식은 단순히 먹는 것을 중지하는 행위로 끝나지 않는 듯하지요.

주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은 그저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멈추는 행위를 넘어서, 인간 존재가 자기의 모든 감각으로 탐하고 취해온 온갖 것을 멈추는 수행의 경지입니다. 혼자서만 배부르게 누리던 음식은 물론 재물과 명예, 우월감과 교만, 권력과 욕망, 안정과 평화까지도 내려놓는 멈춤이 곧 단식입니다.  

그런데 이 멈춤이 단순히 일시적인 정지로 그치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잠시 무엇을 안 한다고 누가 이롭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멈춤이 비움과 나눔, 가난한 이들과 같아지는 단계까지 가야 주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단식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빼앗기고, 또 그분을 그분 본래의 자리로 보내드립니다. 떠나신 신랑의 자리에는 그분께서 당신과 동일시하시는 가난한 이들이 남았지요. 주님께서 당신은 가시고, 당신 대신 그들을 남기신 것입니다. 가장 작고 가난한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당신께 한 것이라는 최후의 심판 비유가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단식은 작은 이들 안에 계신 우리의 신랑을 위한 사랑의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과 외모 관리를 위한 다이어트로서의 단식을 넘어, 극기와 참회의 증명을 넘어, 자신의 이기심과 아집과 교만까지 비워내어 이웃의 빈 곳을 채워주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이사 58,8)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9)

올바른 단식을 실천하는 이에게는 주님께서 엄청난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존재를 비워 타인을 채우는 이들의 헌신을 허공에 흩어버리지도, 잊지도 않으시지요. 그들은 고통 중에 우선 순위로 응답을 받을 것이고 고통의 흔적 또한 자취조차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광범위하게 단식을 실천하며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가 베푼 나눔과 연민과 연대, 희생과 인내와 섬김, 격려와 탄식과 눈물까지 자신의 안위를 향하지 않았던 모든 움직임을 주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위한 단식으로 받아들여 주셨으니까요.

마음껏 단식하고 힘껏 사랑하라고 이 사순절이 은총의 장으로 우리 앞에 펼쳐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작은 영혼들을 하나도 그냥 되돌려 보내지 않고, 하나도 놓치지 않는 나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으로 이 은총의 시기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고 여러분의 영혼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아멘.

 단식, 많이가 아니라 잘

 -김찬선신부-


“저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회개의 사순절에 실천해야 할 것으로 단식, 자선, 기도

이 세 가지를 권면하는데 그것은 그제 읽은 복음말씀대로입니다.

 

사실 회개한 사람과 성인들은 예외 없이 이 세 가지를 잘한 사람들이기에

우리도 회개하여 성인이 되려면 이 세 가지 실천을 잘해야 하는데

이 세 가지 중 오늘은 단식에 집중하여 교회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들은 단식을 많이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단식을 아무리 많이 하였어도 어떻게 많이 했다고 주님 앞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단식을 많이 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이 중요한 거야!’라고 흔히 얘기하듯

단식도 많이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환갑이 되던 해에 서품 30주년이 겹쳐 자연스럽게

제 인생과 수도 생활을 함께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때 든 생각이

제가 60년을 그리고 사제생활 30년을 참 열심히 살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열심히는 살았는데 잘 산 것은 아니었다는 반성이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열심히’가 아니라 ‘잘’이어야 한다고 마음먹었지요.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이 중요하고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그런 조로 얘기합니다.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요,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요,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 사랑을 거스르지요.

내 배 부르기 위해 남의 입의 것 빼앗고,

높이 오르기 위해 남을 짓밟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잘하는 단식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음식을 끊는 것보다 욕망을 끊는 것이요,

욕망을 끊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겁니다.

 

내 입에 넣기 위해 남의 것 빼앗던 우리가

내 입에 들어갈 것으로 자선을 실천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단식인데

그러나 오늘 주님은 여기서도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신랑을 위한 친구의 단식을 가장 완전한 단식의 예로 제시하십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가 먼저고 음식은 늘 2차적인 겁니다.

사람보다 먹는 것이 중요한 식도락가는 맛에 탐닉하지만

사랑이 중요한 사람은 맛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즘 와서 저의 최고의 식탁은 맛집에 가서 먹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정성껏 준비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와 맛있게 먹어주는 식탁이고,

그래서 협동조합을 시작하고 센터가 마련되면 이런 식탁을 마련할 것입니다.

 

한 주일에 한 번 열두 분의 조합원을 번갈아 초대하여 미사를 봉헌한 후

제가 준비한 식탁에서 주님과 제자들처럼 사랑의 나눔을 하는 겁니다.

 

음식은 내 배를 채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라고 있는 것이니

사랑을 배운 우리는 누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쁘게 축하하며 먹고,

안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넘어가지 않아서 먹지 않습니다.

 

세월호 단식투쟁을 할 때 옆에서 폭식한 사람들처럼 그래서도 문제지만

좋은 일에 같이 기뻐해주기를 바라는 사람 앞에서 단식하는 것도 문제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단식하시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2월 2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