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2021년 2월 16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르8,14~21)
Watch out,
guard against the leaven of the Pharisees
and the leaven of Her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창세기 홍수 이야기의 도입 부분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는 것과,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인류의 첫 번째 범죄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사건이었고, 둘째는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사건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제 인간의 죄악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기에 ‘악이 세상에 많아졌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참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하여 악이 세상에 들어오고, 악은 점점 많아지고, 참 좋았던 세상이 악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를 1장부터 읽어 온 독자라면 참 좋은 세상이 악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의 확장성이 독서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우리 자신도 이러한 죄의 확장성을 이미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단 한 번, 딱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한 번의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한 또 다른 거짓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다시 다른 거짓말을 하도록 만듭니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죄악이 가진 위험성과 무서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가들은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요. ‘죄의 뿌리’를 뽑는 것은, 아예 첫걸음을 내딛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작은 합리화는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후회하시어 마음 아파하시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 때문에 하느님께서 후회하시고 마음 아파하시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떻게 하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할까요? 당연히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남자라면 꼭 다녀와야 한다고 말하는 곳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군대’입니다. 이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가고 싶지도 않고 또 싫어해서 군대 제대 후에 군대 꿈을 꾸면 악몽을 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군 생활 내내 불행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싫어하는 곳이지만 행복의 순간도 있었고 또 만족의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떤 곳 안에서도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가 있으며, 그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하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 행복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어떤 행복이십니까? 주님께서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시는데, 우리는 크고 불확실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찾은 이유는 믿음을 배워 익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그분을 옭아매기 위해서였지요. 이렇게 믿음을 추구하지 않는 그들을 주님께서는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한 그들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룩을 말씀하셨다고 자기들에게 빵이 없음을 걱정합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을 그들은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모습은 믿음을 갖춘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 없음이 곧 위선자의 길로 이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통렬히 꾸짖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빵이 없다는 눈앞의 현실이 해결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행복은 눈앞의 현실에 대한 만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에서 오는 의미 있는 삶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위 ‘소확행’이라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식사 예절을 엄격하게 따지는 주임신부가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너무나도 좋으신 주임신부인데, 식사할 때만 되면 식사 예절이 중요하다면서 과묵해지십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면서 조용히 식사하십니다.
어느 날 점심, 함께 식사하던 보좌신부가 주임신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버럭 화를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식사 중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보좌신부는 너무 놀라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지요. 식사 후에 주임신부는 보좌신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러자 보좌신부는 아주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제가 말하려고 할 때, 신부님 음식에 벌레가 들어 있었거든요.”
사실 우리나라 식사 예절을 보면 식사할 때 말을 삼가라고 하지요. ‘밥 먹을 때 말을 많이 하면 복이 빠져나간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말을 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예절 때문에 꼭 필요한 말까지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일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나눔의 공동체가 신적 존재의 증거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하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배로 가져온 빵이 한 개밖에 없어서 그런 말씀 하시는가 보다.’라고 수군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5천 명, 4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 일곱 광주리가 남은 것을 보고도 당신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을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이 기적이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게 할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 본성으로 태어납니다. 생존 욕구만을 지녀 나눌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족과 자기 것을 나누어 앞으로 먹을 것을 공동으로 비축하는 바이러스나, 기생충, 모기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이것들은 오로지 자기만 압니다.
그런 결과 이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가족 공동체가 이뤄지려면 그 구성원이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 내어줄 수 있는 본성으로 탈바꿈돼야 합니다. 부모는 서로서로 자기 것을 나누고 자녀들도 그렇게 가르침으로써 가족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의 힘만으로는 가족보다 더 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어떤 커다란 공동체가 마치 가족과 같이 함께 나눌 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 그 속에서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더 큰 사랑의 존재를 발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소임을 하고 있을 때, 곤지암에서 온 안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혼자 묵주기도만 열심히 하고 수녀님이 와서 인사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를 찾아오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그냥 할머니 옆에서 묵주기도 1단 함께 해 주고 자리를 뜨곤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일이 있어서 함께 할 수 없었는데 다음에 갔을 때는 “아니,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어딜 갈 땐 간다고 말을 하고 갔었어야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사랑을 충분히 받아보지 않아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사랑받고 있음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시집을 가서 29세 때 자식 없이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친정집도 가난해서 연락이 끊겼고 형제들도 다 죽었습니다. 할머니는 머리에 비단을 이고 장사하셨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계실 땐 힘들어서 짜증도 났지만 혼자 되니 너무 적막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대세를 받았고 그때 할머니도 안나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집에 성모상을 놓고 기도를 드리는데 외로움이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시어머니처럼 대하며 살았습니다. 밥도 한 그릇 더 차려놓고 대화하고, 비단을 팔아서 번 돈을 반반으로 나누어 반은 성모상 밑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이 들어서 자기 돈과 비단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상 밑의 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니, 집 잘 보라고 했더니 자기 돈만 지키고 내 돈은 가져가게 내버려 뒀어요?”라며 성모님께 호통을 치셨습니다. 뉘어놓고 매도 때렸습니다. 며칠 뒤 한 청년이 비단과 돈을 가져와 무릎을 꿇고 “제가 아무리 이곳을 벗어나려 해도 계속 이 집 문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할머니는 청년이 딱해서 취직도 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79세에 방광암이 들어 이렇게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검사를 받으러 병실을 비울 때는 수녀님에게 작은 보따리를 맡겼습니다. 그 보따리 안에는 통장과 폐물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수녀님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고 몇 번을 권해드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신이 평생 모은 돈인데 왜 남에게 주느냐며 수녀님을 “도둑년”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수녀님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줄 알고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할머니가 마음을 열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할머니는 며칠 뒤 눈물을 흘리며 꿈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친정어머니인지, 큰언니인지 모르겠지만 참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가 왔다 가셨어. 갑자기 내 손을 잡고서는 ‘안나야 놀러 가자.’라고 하시는 거야. 놀러 가는 집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나에게 도움을 줬던 집들이었어. 집안에 알곡으로 가득 차 있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집으로 들어왔는데 알곡은 없고 짚단 하나만 달랑 있는 거야. 내가 왜 우리 집만 이러냐고 따졌는데 그 여인이 ‘넌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한테 다 얻어먹고 살았지. 그런데 네가 남들에게 베푼 것은 짚단 하나밖에 없더구나.’ ‘짚단은 뭐지?’ 내가 한참을 생각해보니 기억이 났어. 내가 어렸을 때 앞집 송아지가 하도 울기에 우리 집 짚단을 준 기억이 난 거야. 수녀야, 어쩌면 좋냐! 난 베푼 게 없어. 우짤꼬!”
수녀님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정말 줄 사람이 없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양자가 한 명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집에 들어와 비단과 돈을 훔쳤던 그 청년이었습니다. 이후 청년을 양자로 삼았었고 6년을 함께 살다가 결혼해서 잘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주 찾아오지만 자기 시부모처럼 그 아이에게 짐이 될까 봐 알리지 않고 병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당시 핸드폰도 없을 때라 양아들도 연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녀님은 그 아들에게 전화했고 온 가족이 할머니를 보러 왔습니다. 아들은 보자마자 울면서 6개월 동안 팔방으로 찾아다녔다고, 이러신 줄 몰라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당신 유산을 아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묵주를 수녀님에게도 주며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게 이렇게 마음이 꽉 차고 기쁜지 몰랐어.”
그러며 “우리 엄마 같기도 하고 큰언니 같기도 한 그 여인이 성모님이셨던 것 같아.”라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셨고, 양아들 가족도 할머니의 유지에 따라 모두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안나 할머니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남편의 사랑도 받았고 어쩌면 시부모의 사랑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으면 썩어버릴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가족 아닌 이에게 내어줄 만큼의 사랑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사랑이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모기 안에서 무슨 사랑이 솟아나서 서로 나누겠습니까? 분명 우리 부모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으로 우리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수만 명이 되는 커다란 공동체가 그렇게 서로 나누며 배불리 먹고도 음식이 많이 남을 정도로 나눌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을 넘어서는 엄청난 사랑이 그 공동체에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눔의 공동체 자체가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의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모가 있다는 증거인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작은 가족 공동체의 창조자이고 하느님은 교회 공동체의 창조자이십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수많은 부모도 포함됩니다.
제가 오산 성당에서 주임 신부를 할 때 첫 주일 헌금은 무조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때 신자들은 다른 어떤 주일보다 더 많은 돈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나누어줄 돈이 흘러넘쳤습니다. 각자 사는 것이 빠듯하지만 이웃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힘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있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가족이 부모가 존재하고 그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나눔의 공동체인 교회 자체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사랑 자체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도 또 다른 표징을 보이라면 이는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닌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가족을 사랑하게 될 수 없고, 하느님 없이 가족 아닌 사람들과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80,000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100세 시대에 은퇴하면 50년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50년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80,000시간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한 글자로 줄이면 ‘나’라고 합니다. 두 글자로 줄이면 ‘또 나’라고 합니다. 세 글자로 줄이면 ‘역시 나’라고 합니다. 네 글자로 줄이면 ‘그래도 나’라고 합니다. 다섯 글자로 줄이면 ‘다시 봐도 나’라고 합니다. 내가 선을 베풀고 사랑하면서 살면 나의 앞길에는 보상의 삶이 주어질 것입니다. 내가 악을 행하고 미워하면서 살면 나의 앞길에는 보복의 삶이 주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은퇴를 하면 내가 가졌던 직책과 직업은 없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둘러싼 것들이 없어지면서 외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본래의 나로 돌아와서 자유롭다고 합니다. 은퇴를 뜻하는 영어는 ‘Retire'입니다. 이것은 자동차의 바퀴를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평생 3권의 책을 쓰게 된다고 합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라는 책, 지금 주어진 현재라는 책, 앞으로 다가올 미래라는 책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면 그것이 미래의 책이 될 것입니다. 인생은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다리의 방향이 중요한 것입니다. 권력, 성공, 재물을 향해서 빨리 가면 갈수록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욕심, 시기, 교만을 향해서 사다리를 놓으면 추락하기 마련입니다. 방향이 틀렸다면 잠시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잘못 놓인 사다리에 있다면 내려오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사다리를 다시 옮길 수 있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삶의 방향을 바꾸어서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사울은 말에서 내려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웠던 신학적인 주제 중에 “이미와 아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밀알의 비유, 씨 뿌리는 이의 비유,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는 모두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는 희망과 미래가 있을 수 있고, 근심과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 더 많은 표징을 보여주길 바라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걱정을 하던 제자들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도 때로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걱정과 근심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오늘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구원의 방주는 무엇일까요? 성공, 명예, 권력은 결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할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근심, 걱정, 두려움은 결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할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누추한 구유로 오셨던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기꺼이 지고 가셨던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신앙은 단순히 衣食住를 해결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되면 해결 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신앙은 명예, 권력, 재물, 건강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꾸준한 노력과 운동으로 성취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몸으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요한 3, 16)”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짓고 살아가는...
-이영근신부-
지금만 그런줄 알았는데, 예수님 시대에도 특별한 표징만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봅니다. 몰지각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장탄식이 제 귓전까지 들려오는 듯 합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코 복음 8장 12절)
해도해도 너무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명확하고도 뚜렷한 표징이었습니다. 죽어가는 불치병 환자들을 말씀 한 마디로 치유시켜주셨습니다. 이미 죽은지 사흘된 사람마저 되살려주셨습니다.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먹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노골적으로 또 다른 표징, 더 큰 표징, 더 신비스럽고 강력한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과 몰염치함에 크게 실망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뒤로 하고 호수 건너편으로 넘어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분명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어디 가나 특별한 현상을 찾습니다. 대규모 신앙 행사에 참석하면, 오늘은 뭐 없나? 하고 하늘만 올려다 봅니다. 촛불을 켜고 기도할 때도, 촛농이 조금만 이상하게 녹아내려도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지역 교구장님의 정식 교령에 의해 미사, 전례, 성사 집전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순명하며 선량한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교회 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나주 추종자들 역시 그렇습니다.
2011년 3월 30일자 공식 서한을 통해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나주 문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을 내린 바 있습니다. “율리아의 추종자들이 기적의 사례들이라고 보내온 것들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심과는 거의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또한 신앙교리성은 나주의 기적이라고 알려진 사건들에 대해 교황청의 입장이 광주대교구 교구장의 입장과 동일하다는 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주 추종자들은 교황청이 조만간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승인할 것이라는 허위사실을 계속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거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판단 유보’니 ‘순례 허용’이라고 강조합니다. 더 새빨간 거짓말이니 절대로 속아넘어가시면 안됩니다.
그들이 단골로 써먹는 미끼가 있습니다. 유치찬란함의 끝판왕입니다. 피눈물, 참젖, 황금향유, 율신액(창시자의 소변)...그런 어이없는 대상들이 치유와 은총, 축복과 구원의 아주 중요한 도구랍니다.
이토록 어색하고 불편한 신심을 아직도 추종하고 따라다니는 분들의 조속한 회심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가 지니고 있는 가장 1차적인 모습은 공번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모습,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거나 부담스럽다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편안하다면 방향성이 괜찮은 것입니다.
특별하고 신비스런 표징이나 기적에 너무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에 펼쳐졌던 표징이나 기적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이제 공은 우리 손에 넘어왔습니다. 표징과 기적은 이제 우리 손으로 행할 때가 온 것입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주신 것, 하루 하루 하느님 은총 속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표징이요 기적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짓고 살아가는 것, 대단한 표징입니다. 나도 힘겹지만 나보다 더 힘겨운 이웃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 엄청난 기적입니다.

복음<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4-21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누룩
-반영억신부-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13,33). 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질 것이고, 반대로 나쁜 것에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누룩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들은 선해 보이시만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자녀가 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지나치게 엄격함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온순함이 선물입니다. 선함, 너그러움, 용서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사고방식, 행태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셨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참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가 부럽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나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꼭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바리사이, 헤로데의 누룩이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등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을 부풀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쌓여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우리와 주님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의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오늘 한 발 주님께로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믿 음
-송영진신부-
‘믿음’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단계는 ‘머리로만 믿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상태입니다.
(그냥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계는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알고 있는 단계인데, 아직은 ‘믿음’의 시작일 뿐이고,
그 믿음을 ‘진정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 두 번째 단계는 ‘마음으로 믿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이해가 되든지 되지 않든지 간에
자기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하는 상태입니다.
(그 진리를 인간의 이론으로는 증명할 수 없더라도 믿음이 바뀌지 않습니다.)
이 단계는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이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확신하는 단계인데, 그런 확신이 있어야 비로소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3) 세 번째 단계는 ‘온 삶으로 믿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충실하게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삶 전체가 완전히 변화되어 있는
상태인데, 이 단계는 믿음과 삶이(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 있고,
삶 속에 믿음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단계입니다.
4)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믿음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는 단계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마르 8,14-16).”
‘바리사이들의 누룩’은 현세주의적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뜻하고,
‘헤로데의 누룩’은 물질주의적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뜻합니다.
(‘누룩’은 ‘나쁜 영향력’을 뜻합니다.)
두 가지를 합하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보다는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고,
또 현세에서 복을 누리는 것만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이기도 하고,
또 그들처럼 살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처럼 살면 안 되는 것은,
그들이 걷는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처럼 사는 것은
‘멸망으로 이끄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문이 넓고 그 길이 널찍하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좋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내세에서 어찌되든지 간에 지금 당장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지혜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의 누룩에 물들어 있는 것이고,
‘멸망으로 이끄는 문’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누룩이라는 말에서 빵을 연상하면서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기준으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의 누룩에
물들어 있는 모습이고,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도 ‘머리로만 믿는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실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상황인데,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주님은 바로 얼마 전에 빵 몇 개로 수천 명의 군중을 먹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17-19).”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의 위력’을 직접 보았고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걱정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로만 생각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머리로는 믿지만 마음으로는 믿지 못하고, 삶의 변화도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권능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믿음이 부족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까? (왜 굶는 것을 걱정했을까?)
예수님께서 제자들만을 위해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굶주림의 고통’을 너무 심하게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믿음’이란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1) 신앙인은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걱정할 일이 생겨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2) 주님을 믿기 때문에 걱정을 안 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할 일도 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걱정을 안 하는 것과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2테살 3,10).”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까지 주님께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각자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하고,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3) 모든 일을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까지 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대단히 오만한 태도이고, 그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님께 간청하는 사람입니다.

복음: 마르 8,14-21: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15절) 하신다. 유다인들에게 누룩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악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사용하던 누룩이란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이 사용하는 누룩은 바로 빵을 구울 때 다음에 빵을 굽기 위하여, 밀가루 반죽을 조금 떼어놓아 발효되게 한다. 즉 썩힌다. 이것을 또 빵을 구울 때 사용하는 것이다. 썩는다는 의미에서 악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조심하라는 누룩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되는 인간성의 병폐, 부패의 요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이란, 예수님께 어제 복음에서 요구한 메시아적인 징표이다. 그것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현세적인 태평성대를 바라는 것이다. 헤로데의 누룩이란 권력과 부귀를 통한 자신의 영달을 말한다. 즉 지상에서의 권세와 재력과 무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현세적인 승리, 현세적인 안락이었다. 이러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의미하지만, 복음에서는 밝히지 않는다. 이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만을 생각하면서 그 빵이 없으면 굶주린다는 생각밖에 못 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신다. 몇 번이나 빵의 기적을 상기시켜 주신다. 즉 당신과 함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것을 여러 가지 행적으로 보여주셨으나 백성도(6,14-15), 종교와 정계의 지도자들도(2,6.16.24; 3,6.22; 6,16; 7,5) 친척들도(3,21.31-35), 고향 사람들도(6,1-6), 그리고 제자들도(4,13.40; 6,52; 7,18; 8,17-21) 이해하지 못하였다. 모두 눈먼 소경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뜻으로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신다(8,22-26). 그 소경처럼 시력을 되찾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된다(8,27-30).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그 체험을 통해서 잘 알 것이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고 의지하여야 할 것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그것으로 지금의 자신이 있음을 생각하며, 의욕을 가지고 현세적인 누룩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나는 지금 어떠한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깊이 느끼며,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켜나가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의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악표양의 누룩을 모두 버리고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는 누룩의 모습을 갖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 15)
-한상우신부-
첨가물이
많을수록
본연의 맛을
죽인다.
욕심은
모든 것을
죽인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또한
욕심이 아닌
순수한
관계이길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부패와 발효
순수와 불순
사이를
걸어가고 있다.
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시는 분은
바리사이들의
누룩이 아니라
헤로데의
누룩이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일상의 삶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다.
하느님께
속한 이들은
누룩없이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들이다.
성체성사는
순수한
만남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의
성사이다.
이 만남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다.
욕심을
겸손되이
내려놓게 한는
은총의
성체성사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빵이
되시어 우리와
소통하신다.
함께 하시는
기쁨이 삶의
핵심이다.
허세와
거짓의
누룩을 뺀
이심전심의
관계이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먼저 위하신다.
언제나
관계의 기본은
존중과 신뢰이다.
건강한 관계는
서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성체성사는
너를
변화시키기 위한
성사가 아니라
나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
순수한 은총의
성사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관계의 빵이
되셨다.
소통의 핵심은
누룩이 아닌
가면이 아닌
일상생활의
가장 진실한
나눔이다.
이 것이
빵이며
참된
사랑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선을 있는 그대로의 선으로 보지 않는 악의, 그리고 탐욕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디를 가든 맞닥뜨려야 하는 걸림돌이기도 하지요.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근거렸다."(마르 8,16)
빵을 부풀게 하는 "누룩"에 문자 그대로 꽂친 제자들은 하필 그날따라 제대로 챙기지 못한 빵 생각에 불안해지고 맙니다. 배가 이미 물 위에 있으니 당장 해결할 방법도 없지요. 이러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동문서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할 겁니다.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마르 8,4-17-18)
"기억"은 당시의 감사와 찬미를 오늘 이 순간에 재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기억"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현재화하는 축복이지요.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가득 남았던 열두 광주리의 빵, 사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가득 남았던 일곱 광주리의 빵 앞에서 놀라고 흥분했던 기억을 제자들은 벌써 잊은 걸까요?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한 배에 계시는데 왜 그들은 아직도 근심하고 불안해 할까요...
얼핏 나약하고 유약하게도 보이는 제자들의 태도를 예수님은 역으로 '완고함'이라 진단하십니다. 이 완고함은, 감사의 기억은 쉽게 망각하고, 오히려 현실의 근심에 집착하여 그 아슬아슬한 긴장을 즐기며 만족과 감사에서 자신을 떼어놓는 악입니다. 완고한 마음은 하느님의 지혜도 사랑도 깨닫기 어렵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려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5-6)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인간이 주님께서 금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탐하여 취한 결과로 에덴동산에서 내쫓긴 뒤, 세상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어지러워집니다.
"내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창세 7,1)
성경 저자는 노아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의롭고 흠 없는 사람"(창세 6,9)이라 전합니다. 구체적으로 노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경이 세세히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창세 7,5)라는 말 안에 모든 걸 담았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배를 짓고 짐승들을 모으며 그분께 순명한 노아에게서, 여전히 완고하고 은총에 무딘 제자들을 이끌고 배에 올라, 타락한 세상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인류를 모으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단순한 믿음과 온전한 의탁으로 세상을 구한 의로움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감염병으로 더 어려워진 팍팍한 삶과 각박해진 세상 속에서 근심할 일도 많고 불안할 일도 넘치지요. 그런데 우리가 시선을 은총과 감사의 기억에서 떼어 어둠을 향하는 순간, 내내 도사리던 완고함이 마음에 냉큼 들어와 자리를 잡을지도 모릅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일수록 복잡함을 내려놓고 그저 단순히 의탁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들 때, 오히려 영혼의 힘을 짜내어 고맙고 은혜로웠던 일들을 떠올리며 주님께 눈을 들어 봅시다. 우리 삶 구비구비에 맺힌 은총의 열매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고, 영육에 생기를 되찾아 줄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화답송)
있는 힘을 다하여 산란하고 근심스러운 현실을 헤쳐나가고 있는 벗님 여러분을 위해 진심을 다해 기도하며, 주님의 이 말씀을 선물로 드립니다. 이 말씀이 벗님 여러분께 참 마음의 위로가 되시길 바랍니다. 힘들 때일수록 무조건 감사하고 또 감사하십시오. 어느새 마음이 평화로 가득 찰 것입니다. 아멘.

하느님의 후회.
-김찬선신부-
오늘 창세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낳고, 낳은 것을 후회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자식은 낳지 말아야 하는데 잘못 낳았다고 후회하는 것 말입니다.
아마 한 번쯤은 또는 스쳐가는 생각으로 그런 후회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후회하시고,
이런 자식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셨을 것입니다.
또 한때 그런 적이 있었더라도 지금은 그런 생각을 않으실 겁니다.
예를 들어 장애아를 둔 부모에게 그 장애아 없으면 좋겠냐고 물으면
그 부모는 한때 왜 이런 아이가 내게 태어났을까 생각하고,
지나치는 생각으로 이런 아이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분도
펄쩍 뛰며 잘났다고 하는 그 어떤 자식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할 겁니다.
그러므로 만일 부모가 자기 자녀에 대해 후회를 한다면
그 후회는 못나고 죄지은 자식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자녀의 죄와 허물을 오히려 자기의 탓으로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부모가 이러하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 대해 더 그러시겠지요.
하느님의 후회는 인간을 괜히 창조했다는 후회도 아니고,
괜히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후회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후회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당신의 창조의 허물을 다 당신의 것으로 떠안는 후회이며
과거의 실수에 머무는 인간의 과거 지향적 후회와는 다른
그러니 앞으로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창조적인 후회입니다.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다.
어제 원죄는 그 근원적인 탓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하느님께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 죄의 책임을 쩨쩨하게 인간에게 돌리지 않고,
근원적인 책임은 다 당신에게 있다고 인정하시지만
그렇다고 자유의지를 주신 당신 사랑의 본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제는 우리 인간이 자유의지를 당신 사랑의 목적에 맞게 쓰도록
요구할 것은 요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창조에도 결함은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신처럼 만드실 수는 있지만 신으로 만드실 수는 없습니다.
신이란 창조될 수 없기에 하느님도 인간을 신으로 창조하실 수는 없고,
다만 당신 모습대로,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과 똑같이 완전할 수는 없어도 사랑할 수는 있고
하느님과 똑같이 자유로울 수는 없어도 자유의지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유의지로 당신을 거부할 수 있게도 하셨지만
사실은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의지가 참으로 자유롭도록,
그리고 우리의 자유의지가 참으로 사랑을 지향하도록
우리의 의지 안에서 교만과 욕심은 쓸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비를 내리시어 모든 것을 쓸어버리신 40일은
우리 안에서 이런 것들을 쓸어버리는 정화의 40일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는 말씀은
인간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이며
파괴적인 격정이 아니라 창조적인 애정이고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야겠다는 재창조의 의지입니다.
내일서부터 지내게 되는 이 정화의 40일을 우리는 잘 보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