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2일 금요일 설
2021년 2월 12일 금요일 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5-40)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새해의 첫날을 시작해 봅니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계획을 세웁니다. 금연, 금주, 다이어트 등.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희망을 품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작심삼일로 그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결심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함께 응원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복을 바라고, 또 복을 비는 행위는 우리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그들의 전통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우선 이스라엘에서 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복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복이 다른 사람에게 내릴 수 있도록 빌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설렘과 희망을 품고 축복 가득한 새해 벽두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복을 빌어 주고, 어떤 복을 바라고 있나요? 저마다 바라는 복의 모습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면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복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청해 보면 어떨까요? 새해 첫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 산악부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부가 되어서도 계속 등산을 좋아할까요? 사실 신부가 된 뒤에는 산에 간 기억이 몇 번 없습니다. 아마 10번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했던 등산에 대한 재미를 잃었을까요? 곰곰이 생각하니 ‘속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학생 때는 체력이 좋아서 거의 산을 뛰어다녔습니다. 심지어 산 정상까지 누가 빨리 다녀오는지를 산악반 동기와 내기했던 기억도 많습니다. 등산을 이렇게 속도전으로 하니 산의 또 다른 맛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얼마나 빨리 정상에 다녀오느냐만 관심사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 꾸준히 운동하지 않았고 또 등산도 자주 하지 않다 보니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이 상태에서 산을 뛰어 올라갈 수 있을까요? 제가 가졌던 등산의 목적인 ‘속도’를 채울 수 없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등산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속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그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면서 걷는 산책과 상쾌한 바람을 느끼는 자전거 하이킹은 계속하게 됩니다. 체력 문제보다 주변을 바라보려는 넓은 마음만 있으면 되니까요.
주님께 다가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빠른 응답만 요구하면 금세 주님한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곳 안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느끼려고 노력하면 오랫동안 커다란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오랫동안 함께 하는 것, 오랫동안 주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커다란 준비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간의 만족만을 원하고, 짧은 노력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빠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입니다. 올 한 해도 주님께서는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빠른 응답만을 요구하고, 크고 화려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요구해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복음에 나오듯이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는 사람만이 올 한 해의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언제나 깨어 준비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속도를 요구하는 종이 아닌, 긴 시간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을 갖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올 한 해를 멋지게 만들면 어떨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KFC 할아버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커넬 할랜드 샌더스로 40대에 닭튀김을 만들어 팔며 요식업에 뛰어들었지만, 화재로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65세 노인이 되었을 때, 이제 가진 돈은 105불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낡아빠진 트럭을 끌고 다니며 자신의 조리법을 팔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았습니다. 1008번이나 식당에서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결과, 드디어 1009번째 자신의 조리법을 받아들인 식당을 찾았습니다. 이 노력이 지금의 KFC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상황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이도 많고, 돈도 없고, 사람들의 외면까지…. 정말로 포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또다시 맞이하는 새해입니다. 많은 좌절과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설날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배, 세뱃돈, 선물, 복 받으세요. 덕담, 떡국, 고향방문, 씨름대회”가 떠오릅니다. 신앙인들은 연도를 바치고, 설날 미사에 참례합니다. 설날을 기억하는 것은 조상들에게 감사드리고,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모여서 안부를 전하고, 정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세배를 받으시고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을 기원해 주셨고, 수도자와 성직자의 길을 가는 동생수녀와 제게는 늘 겸손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손자들에게는 직장생활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년에 어머니께서 아버님이 계신 하느님 나라로 가셨으니 이제 덕담을 들을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아버님과 함께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가슴이 찡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1월 17일에 나온 ‘미카엘의 순례일기’입니다. 13세기 중반의 프라하에는 베드로라는 신부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사제의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는데, 고민의 한가운데에는 미사 중 변화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에 대한 의심이 있었습니다. 작고 동그란 밀떡과 검붉은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축성을 통해 평범한 음식이 살아있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로마로 순례를 결심합니다. 베드로 성인의 유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시기를 간구했는데도 여전히 성체의 거룩한 신비에 대한 의심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순례에 큰 기대를 걸었던 베드로 신부님은 크게 상심한 채 발길을 돌렸습니다.
로마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볼세나에는 성녀 크리스티나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열 명 남짓 둘러앉아 전례를 행할 수 있는 작은 경당이 있는데, 베드로 신부님도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깊은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 누룩 없이 만들어진 흰색 제병을 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양성체를 하는 순간, 갑자기 성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붉은 피는 베드로 신부님의 손을 적시고 흘러내려 그 밑의 성체포까지 빨갛게 물들였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이 사건이 분명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한 기적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1290년 사람들은 이 놀라운 기적의 성체포를 보관하고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으며, 300년 후 그 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은경축을 맞이하면서 한국에서 신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온 사제가 있었습니다. 볼세나의 성체포 기적 성당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신자들과 함께 순례를 가는 길이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습니다. 성체포 성당에서 미사가 시작되었고 말씀이 선포된 후, 강론대에 오른 신부님은 고개를 떨구고 한참이나 서 있기만 하였습니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신부님은 말을 하였습니다. 매우 짧은 강론이었습니다. ‘저 역시 베드로 신부님과 같은 의심을 떨치지 못한 채 은경축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얼마나 의심하면서 살았는지 여러분은 모르십니다.’ 신부님의 눈물과 신자들의 흐느낌이, 수면 위에 떨어진 물방울의 파동처럼 작은 경당 안에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부족한 사제가 열심한 신자들 앞에 서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지순례를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5처를 묵상하면서, 6처를 묵상하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신자들은 기꺼이 시몬이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지극한 정성으로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저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가식과 위선으로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신자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고, 은총이 가득한 ‘십자가의 길’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설날을 맞으면서 바라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면 좋겠습니다. 그 이유를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연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설날입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희망에 찬 또 다른 출발점입니다!
-양승국신부-
코로나19 팬데믹이 수천년간 내려온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 풍속도까지 뒤바뀌게 했습니다. 그 얼마나 정겨웠습니까? 평소 각자 삶의 자리에서 발버둥치다가 오랜만에 고향집에 모여 오손도손, 알콜달콩 밤늦도록 시간가는줄 모르고 쌓인 정담을 나누던 시절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선책을 찾는 것이 도리겠지요.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 함께 한 자리에 모이지는 못할지라도 영상통화나 SNS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설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더 간절한 마음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기도해드리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라는 성경 말씀이 오늘따라 어찌 그리 피부로 와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가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영원할 것 같았던 탄탄했던 가족 구조가 언제 그랬냐는듯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앞 세대가 한명 한명 떠나고 허물어지자 신기하게도 다음 세대가 바통을 이어받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의 든든한 보루셨던 할머님께서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허무하게도 먼저 떠나가셨습니다. 제게는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든든했던, 마치 슈퍼맨 같았던 아버지께서도 자동차 시동 꺼지듯이 스르르 사라지셨습니다. 듬직하고 자랑스러웠던 형조차 뭐가 그리도 급했던지 작별 인사조차 못하고 황급히 건너갔습니다. 따지고보니 저는 어느덧 가계 구조 안에서 최상위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꿈을 꾸는데, 먼저 떠나신 할머님, 아버님, 형, 이모, 고모, 사촌 누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다들 큰 강 건너편에 계셨습니다. 깜짝 놀란 것은 이모, 고모, 사촌 누나들의 너무 고운 것이었습니다. 이팔청춘 때의 얼굴이었습니다. 까르르 웃으면서 저에게 빨리 건너오라는 듯이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저는 “오늘은 내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라는 말씀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수시로 하게 되는 수많은 착각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참 많은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듯 합니다.
예를 들면? “이 음식은 칼로리가 그렇게 높지 않을거야. 마음껏 먹어도 괜찮을거야!” “통장에 얼마나 잔고가 남아있을까? 아직 많이 남아있겠지?”
“나는 절대 착각하지 않을거야!”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거야.” “하느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을거야!”
다양한 착각 중에서도 가장 큰 착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이라고 여기는 착각입니다. 적어도 죽음이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착각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난다긴다 해도 대자연의 순환주기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그 누구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하느님 측의 마지막 초대 앞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마음같아서는 가는 세월을 꼭 붙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웬걸, 잠깐 한눈 팔다보면 순식간에 70이요 80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 백번 생각해봐도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수명이 길다 하더라도 100세를 넘기기 힘듭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할지라도 백일 붉은 꽃이 없습니다. 오늘의 아름다움, 지금 이순간의 상승무드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이 꿈결 같은 행복, 이 순간의 축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도 잘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순환의 법칙은 때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순간, 꽃 같은 젊음도 가고, 인생의 절정기도 가고, 그 좋았던 시절도 가고, 결국 우리 앞에 남게 되는 것은 시들고 메마른 육체, 그리고 임박한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예외적으로 특별대우를 받게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바처럼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달리 죽음에 대한 시각이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 죽음으로 인해 끝입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순간, 그간 일궈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다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시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은 결코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을 일깨워줍니다. 죽음은 나약한 우리 인간과 사랑 지극한 하느님이 온전히 합일되는 감사의 순간입니다. 죽음은 부족한 우리 존재가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충만히 실현되고 완성되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신앙인들과는 달리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힘입어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절망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희망에 찬 또 다른 출발점입니다.

-이영근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이는 진정 복된 이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르크,브라크하)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설”인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사실, 축복을 빌어주면 빌어주는 이에게 축복이 먼저 옵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비는 행위는 이미 ‘축복을 비는 축복’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상대를 축복해주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위하는 마음’(호의, 선의)을 북돋으십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설”을 맞이하여 축복을 빕니다.
용솟음치는 ‘축복’이 먼 하늘로부터
무수한 시간을 달려와
“설”이라는 고귀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베푸신 ‘축복’이
날마다 온몸에 사랑의 지문을 새겨 주고
가슴 속을 따뜻하게 지펴 줄 것입니다.
꺼지지도, 식지도 않는 변함없는 보살핌으로 감싸며
멈추지도, 지치지도 않는 줄기찬 사랑을 퍼부어 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한 삶의 반려자가 되어 주고
하는 일마다 전폭적인 사랑과 신뢰로 지지하고 성원해 줄 것입니다.
혹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들 때가 있더라도
늘 다정한 벗이 되어 주고 사랑을 강화시켜 주며
올 한해를 사는 힘과 용기의 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저희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인 “축복”을 건네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이 축복을 받은 이들이 한 해 내내 참된 행복 안에 머무르고
또한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저희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복을 빌어주는 사람
-반영억신부-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데에 근신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설빔을 해 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고 한 해를 살아갈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덕담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입니다. 사실 명절을 기다려온 것은 서로의 만남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만남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덕담도 성경말씀으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설 명절에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하며‘통통,통통’복을 받으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1.의사소통, 2.운수대통, 3.만사형통. 4.쓰레기통입니다. 서로의 의사소통을 잘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통해야 합니다. 잘 통하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으면 아픕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잘하시길 빕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립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열어주신 길에 장애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는데 있어서 하는 일 마다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든 것을 담고 품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되시길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여기다가 '전화한통'을 덧붙입니다. 자주 인사하고 먼저 안부 전하는 '전화한통'입니다.
예전에는 세뱃돈과 설빔을 받는 기쁨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의 만남에 의미를 두고 고향을 찾게 됩니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병이 생기기도 했지만 고유명절은 그래도 가족의 유대관계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명절이 되면 도심으로 나가있던 삼촌과 누나를 기다렸습니다. 명절에는 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용돈을 얻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선물이나 돈의 액수가 줄어들면 마음속으로는 서운해 하였습니다. 그저 공짜로 받는 주제에 주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크게 받으면 다음에 받을 때는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게 되고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받았으나 감사할 수 없으니 줄때도 잘 줘야 하고 받을 때도 잘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짜로 언제든지 주십니다. 알맞게 주십니다. 그러나 내 잣대로 재고는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면서 투덜댑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 받은 것에 감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이 또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명절의 의미는 바로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마련하시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합니다.
바로 명절의 두 번째 의미는 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르신께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 치례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순간순간을 늘 깨어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오복의 첫 번째는 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두 번째는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세 번째로는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또, 네 번째로는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큰 행복으로 여겼던 이 오복(五福)을 염원하기 위해 새 집을 지으면서 상량(上梁)을 할 때는 대들보 밑에다가 "하늘의 세 가지 빛에 응하여 인간 세계엔 오복을 갖춘다"는 뜻의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비인간지오복(備人間之五福)"이라는 글귀를 써 넣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맙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복을 받았다 해도 일시적입니다. 믿는이들은 영원한 복을 추구합니다. 참으로 복 중의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을 주관하시고 천상의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세성을 넘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이미 하느님을 차지하시고 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복을 결코 잃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에는 “너희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머리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복을 받으시길 희망합니다.
시편에서는“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고 하였습니다. 만사형통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아론 집안에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낮은 사람들에게도 높은 사람에게도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께서 너희를, 너희와 너희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리라. 너희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께”(시편115,11-15). 복을 주시는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복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명절귀신
명절 때 쫄쫄 굶은 조상 귀신들이 모여
서로 신세를 한탄했다.
씩씩거리며 한 조상귀신이 말했다.
“설날 제사 음식 먹으러 후손 집에 가보니,
아, 글쎄 이 녀석들이 교통체증 때문에
처갓집에 갈 때 차 막힌다고,
새벽에 벌써 지들끼리 편한 시간에
차례를 지내버렸지 뭔가?
가보니 설거지도 끝나고 다 가버리고 없었어,”
두 번째 분통터진 조상귀신이 말했다.
“자넨 그래도 나은 편이여,
나는 후손 집에 가보니 집이 텅 비었더라구.
알고보니 해외여행 가서 거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거야.
거길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가누?”
아까부터 찡그리고 앉은 다른 조상귀신,
"상은 잘 받았는데
택배로 온 음식이 죄다 상해서
그냥 물만 한 그릇 먹고 왔어."
뿔난 또 다른 귀신,
"나쁜 놈들!
호텔에서 지낸다기에 거기까지 따라 갔더니,
전부 프라스틱 음식으로 차려서 이빨만 다치고 왔네."
열 받은 다른 조상귀신이 힘없이 말했다.
“난 말야. 아예 후손 집에 가지도 않았어.
후손들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후손 집에 갈 필요없이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갔었지.”
“그래, 인터넷으로라도 차례상을 받았나?”
“먼저 카페에 회원가입을 해야 된다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가입을 하노?
귀신이라고 가입을 시켜 줘야지!
에이 망할 놈들!”ㅎㅎㅎ
@@ 설날 속터지는 女子들 한탄!!.
1. 엎으러지면 코 닿을것 같이 가깝게 살면서도
명절 때 면 꼭 늦게 오는 동서.
2. 형편이 어렵다며 늘 빈손으로 와서는
지그집에 갈때는 이것저것 싸가는 동서.
3. 온몸이 쑤셔서 한 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눈치 없이 고스톱을 계속 치고 있는 남편.
4. 술이 잔뜩 취했으면서도 안 취했다고 우기면서 가는 손님 붙잡는 남편.
5. 시댁에는 금방 갔다 오면서 친정에 일찍 와서는
이 참견 저 참견하는 시누이.
6. 넓은 마당에서 잘 뛰어 놀다가 꼭 부침개 부칠때 와서는
식용유 뒤엎어 놓는 철없는 조카.
7. 기름 냄새 맡으며 간신히 부쳐놓은 부침개를
날름 집어 먹어버리는 시동생.
8. 며느리는 친정에 안 보내면서 시집간 딸은
빨리 안온 다며 찻길 막힌다고 빨리 오라고 전화하는 시어머님.
9. 시댁에는 30만원, 친정에는 10만원으로 차별하는 남편.
10. 시집에 늦게 와서는 '동서 수고한다.' 는
말 대신 '아직도 일하고 있어! 하며 큰소리치는 형님.
11. 막상 가려고 하면 '한 잔 더하자'며 술상 봐 오라는 시아버님.
@@ 마누라의 3金 ? 현금, 지금, 입금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중요한 ‘세 가지 금’이 있다.
돈을 상징하는 황금.
음식을 상징하는 소금.
그리고 시간을 상징하는 지금. 이 세 가지다.
남편이 마누라에게 이 말이 너무 멋있어서 문자 퀴즈를 냈다.
“여보야… 세상 살아가는 데 중요한 3가지 금을 뭐라 생각하노??”
잠시 후 마누라한테서 답문자가 왔다. “현금, 지금, 입금.”
이 문자를 보고 남편이 허덕거리며 다시 문자를 보냈다.
“방금, 쬐금, 입금.”

깨어 있어라.
-송영진신부-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5-40).”
1)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라.”, “한눈팔지 마라.”,
“딴 생각에 빠져 있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깨어 있는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그들 곁에서 시중을
들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입니다.
종말과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니 그날의 심판을 잘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 준비는 곧 회개입니다.)
종말의 심판을 잘 준비하는 일은 종말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종말이 닥치면, 곧바로 심판이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준비할 시간이(회개할 시간이) 아예 없습니다.
2) 예수님 말씀은, 종말과 재림이 아닌 상황에서도,
즉 평소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늘 깨어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총)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한눈팔지 않고, 딴 생각에 빠져 있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총)을 받을 준비를 잘하고 있는 사람이 잘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청할 때에는 간절하게 청하면서도,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려고 할 때에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주시는 것을 못 받게 됩니다.
그 경우에 자기가 받지 않아서 못 받았으면서도
하느님께서 기도를 안 들어 주신다고 불평합니다.
<미사참례를 예로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미사 시간 내내 졸다가, 또는 딴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성찬의 전례 시간은 이미 다 지나가버렸고, 영성체를 할 기회를 놓쳤다면,
그 상황에서 영성체를 하게 해 달라고 조를 수 있는가?
자기가 잘못해서 영성체를 못 한 것에 대해서 누구 탓을 할 수 있는가?
하느님의 복(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또는 받을 준비를 안 한 사람에게도
자동적으로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복(은총)을 받고 싶으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묵시록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묵시 3,19-21).”
예수님께서 ‘언제’ 문을 두드리실지, 그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냥 가버리실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문을 열어드리는 일은 우리가 합니다.
만일에 딴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듣고,
그래서 제때에 문을 열어드리지 못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시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모두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데, 무한정 기다리신다는 뜻은 아니고,
언제인지는 몰라도 ‘하느님께서 정하신 어떤 시점까지만’입니다.
어떻든 은총은, 늘 깨어 있으면서,
그것을 받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4)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는
인사말도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받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으십시오.”
라는 격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우리는 ‘내가’ 받기를 바라는 ‘복’이 정말로 ‘복’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선을 주시는데 뱀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아닌지,
달걀을 주시는데 전갈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아닌지,
좋은 것을 주시는데 그것은 안 받으려고 하고 나쁜 것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아닌지, 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루카 11,11-13).
잠언에 나오는 다음 기도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이 기도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권고에 연결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8-10).”
전에 한때 우리나라에서 “부자 되세요.” 라는 인사말이
새해 인사로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IMF 체제에서 모진 고통을 겪은 뒤라서 그런 인사말이 유행한 것인데,
그 사정은 이해가 가지만, 만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 되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악’이고, 그 ‘악’을 인사말로 삼는 것은
축복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은 선에서 비롯되어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고,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을 빌어주는 일도 선을 빌어주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복을 받은 줄 알았는데 악한 결과로 끝난다면,
그것은 복을 받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 루카 12,35-40: “준비하고 있어라!”
-조욱현신부-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 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행복하게 한 해를 살아갈 지혜를 일러줍니다. 복음의 "깨어 있음", 제1독서의 "축복의 소명", 그리고 제2독서의 "하느님 중심성"입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한 해를 시작하는 설에 우리 민족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 가신 조상들을 기립니다. 새로운 시간을 열면서 다가올 미래를 두근두근 기대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또 언젠가 맞게될 죽음을 상기하는 것은 지혜롭고 의미 깊은 전통입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
각자의 마지막 날과 세상의 마지막 날은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오직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만 아시는 그날 그 시간은, 그래서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교만하게 살아가는 이들까지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게 만들지요. 그렇기에 하느님 계획에 대한 무지는 오히려 인간에게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
예수님께서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이들이 행복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깨어 있음"은 물리적으로 잠에서 벗어난 상태라기보다, 영적인 각성 상태입니다. 깨어 있는 이들은 자신의 근원과 목적지를 인식합니다. 하느님의 숨이 아니면 흙의 먼지와 같이 보잘것없고 미소한 존재임을 아는 겸손에,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존엄함이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이들이지요.
깨어 있는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을 기억합니다. 기억은 그 은총과 환희와 감사를 현재화해서 살아가게 하지요. 하느님과 누린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면서, 지금 여기서 그 사랑을 살아가는 것이 곧 깨어 있음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깨어 있는 영혼을 본 주인의 기쁨이 이렇게 표현되다니 놀랍지요! 종과 주인의 세속적 주종 관계를 생각하면 마치 종과 주인 사이의 신분이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요. 강생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낡고 병든 계급 관념을 깨뜨리고 내려오신 신비입니다. 주인이 깨어 기다리던 종에게 해 주는 섬김의 모습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고 싶어 늘 준비하고 계신 사랑입니다. 그분은 언제라도 그렇게 해 주고 싶어 노심초사 기다리십니다. 이 기다림은 그래서 그분과 우리, 쌍방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제인 아론 집안에 내리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복을 지향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주님께서 사제들에게 축복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들이 백성을 향해, 주님께 복을 받고 그분 얼굴을 마주하며 은혜와 평화를 누리라고 빌어 줄 때,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서로를 축복해 주는 이 아름다운 소명은 직무사제직에 불리운 이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편 사제직으로 불리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 누구나 축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축복은 타인을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축복을 빌어 주는 이들에게도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축복하는 마음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니까요.
제2독서에서는 우리 삶이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들려 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5)
치열한 물질주의적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족의 미래와 직업, 재산과 관련해 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동동거리지요. 하지만 재산이나 건강, 커리어 등 기껏 쌓은 공든 탑이 계획과는 상관없이 일순간 무너져 버린 허무한 경험을 자신에게든 타인에게서든 목도한 적이 없지 않을 겁니다. 그 중심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제 능력이나 우연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모든 것 뒤로 당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의 겸손을 몰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얕은 꾀와 조급한 계획, 엉성한 실행력에도 불구하고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외면한 채, 제 능력인양 오만하고 교만하게 하느님과 세상을 낮추어 보기 일쑤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면"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이제부터 우리의 계획이나 지향 앞에 늘 이 말씀을 새겨넣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살라는 뜻이 아니지요. 모든 일이 그분께 달렸다는 듯이 겸손하게 의탁하고, 모든 일이 나에게 달렸다는 듯이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대림시기 첫 날, 1월 1일, 그리고 오늘까지 우리에게 벌써 새로움의 은총이 세 차례나 주어졌습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사랑을 향해 깨어 준비하며,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있어 올해의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이고, 주님도 뿌듯하고 기쁘실 겁니다.
아론의 측복으로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새해 주님 복 많이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아멘.

축복과 강복
-김찬선신부-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오늘 창세기 말씀을 요약하면 '너희가 축복하면 내가 강복하리라'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이웃에게 축복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강복하신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준다는 뜻이고 강복이란 복을 내려준다는 뜻이니
강복은 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복 주시길 비는 축복은 우리의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복을 내려줄 수 없고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빌어주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복을 비는데 다시 말해서 축복하는데 자가 축복은 불성립입니다.
물론 나 자신을 위해 복 주십사고 주님께 청할 수는 있고,
나를 위해 복을 빌어달라고 이웃에게 청할 수도 있지만
축복은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것이 정상이고 그래야 그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설 명절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하는 것이나
오늘 창세기의 말씀처럼 올 한해 축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올 한해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게 하는 대단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부자되라고 빌거나 건강하라고 비는 것보다 좋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부자되는 것이나 건강하기를 비는 것도 축복중의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축복의 시작이요 끝이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올해 복권에 당첨되라고 빌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요?
로또 당첨자들의 말로를 보면 그것은 축복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올해 우리는 진정 행복을 빌어주는 축복자들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오늘 세배드릴 때도 건성으로 복을 빌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것은 남을 위해서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그러해야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그러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올 한해
내 입에서 말끝마다 저주가 나온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불행입니까?
축복을 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이 되지만 나에게 더 행복이 되는 것처럼
저주도 그에게 불행을 선사하기 이전에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자기 안에 행복은 하나도 없고
나올 것이 저주밖에 없는 사람이 저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올 한해 오늘 창세기 말씀처럼
주님께 복을 빌고 청하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을 향하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께 청하는 사람은 청할 것이 있을 때만 주님을 찾게 되기 쉽지만
주님을 향하는 사람은 늘 주님을 찾고
늘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여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라면
주님을 향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여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기에
더 완전한 행복임에 의심할 여지 없겠지요?!
아무튼 올해도 여러분 모두 주님으로 인해 행복한 한해가 되시길 빕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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