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2. 11. 07:32

2021 2 11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

(마르7,24-30)

 

Lord,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scraps.
Then he said to her,

For saying this,

 you may go.
The demon has gone out of your daughter.

 


가나안 여인의 믿음.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이방 여인의 만남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 봅니다. 만약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면, 만약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만약 자신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예수님께 청하지 않았다면, 만약 예수님께 들은 모욕적인 말에 기분이 상하여서 예수님을 바로 떠났다면 어떠하였을까요. 네 번의 ‘만약’ 가운데 하나라도 이루어졌다면, 그녀는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닌, 네 번에 걸친 ‘만약’이라는 관문을 이 여인은 통과합니다. 네 번의 관문은 그것이 진행될수록 점점 견디기 어려워집니다. 적극적으로 찾아 듣지 않아도 소문은 들려옵니다. 철저하게 수동적인 자세입니다.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갈 때부터 능동적인 행동이 됩니다. 얼마나 먼 거리를 걸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인이 이방인 남자인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 예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문은 절정을 향하여 갑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는 예수님의 모욕이 남았습니다. 점점 어려워지는 관문이었지만, 그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이것을 통과합니다.
이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가 보여 준 것처럼, 예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길에도 ‘만약’이라는 관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앞에 놓인 관문을 이겨 낼 수 있을 만큼 견고한가요? 아니면 나의 귀찮음과 불편함 때문에, 또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모욕감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여정을 쉽게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몇 개의 관문이 우리 앞에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만약’의 관문을 넘어서야만 우리는 예수님과 진실된 만남을, 아울러 그분께서 선사하시는 구원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맞춤법 책을 자주 봅니다. 많은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쓴 글이 제 글을 읽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분명히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에서만 50년 이상을 살면서, 50년 넘게 한국말만 써왔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쓸 때 자신이 없어지곤 합니다. 조금이라도 신경 쓰지 않으면 예전에 잘못 알고 있었던 맞춤법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국문과에 다니고 있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학생의 글을 보았는데, 맞춤법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맞춤법이 틀렸다고 말해주니, 깜짝 놀라면서 무척이나 부끄러워합니다. 국문과에 다니고 있어도 실수할 수 있는데도, 이 점을 인정하기가 창피했나 봅니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배우면서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합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의 오류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겸손의 삶이 아닌, 주님께서 너무나도 싫어하는 교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부인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셔서 숨어계셨다고 전하지요. 그런데도 소문을 듣고 이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이교도인데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비록 이교도였지만 이 여인이 특별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재산이 많거나 그 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빽’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특별한 사람을 강아지에 비유합니다. 기분이 좋았을까요? 화가 나서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인은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겸손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겸손함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주님께서는 교만의 삶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겸손의 삶으로 당신께 굳은 믿음을 보이길 원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매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가리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나의 변화

고해소에 많은 사람이 남의 죄를 이야기합니다. 배우자 때문에, 자녀 때문에, 부모 때문에, 친구 때문에, 성당 교우 때문에…. 지금 마음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너무 밉다는 것이지요. 결국 그 사람만 없었으면 이렇게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원망입니다.

남의 죄를 말하지 말라고 하지만, 너무 힘든데 어떻게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문제는 이렇게 말한다 해도 잠시 속이 시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문제의 해결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봐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면서 나의 변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바뀌면 많은 부분의 해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상대방의 변화만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침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신 내가 변화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보인다면 힘있게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좋은 결과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남의 변화를 바라는 기도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나의 변화를, 힘차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나로 변화되길 청해야 합니다.

 악을 몰아낼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악령 들린 딸을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신다기보다는 이방 여인의 믿음이 더 강렬하게 드러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그녀의 청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만이 사람의 ‘고장 난 영’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귀’가 들린 딸의 상태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 직전에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라고 하셨고,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이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라 하십니다. 이는 실로 악령이 들린 것과 다름없는 삶입니다.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마음의 악한 영을 쫓아내는 방법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 캘리포니아주에 한 금광을 채굴하는 촌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금광촌에는 싸움과 강도, 술 취함과 도박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거칠고 교육받지 못한 광부들만 사는 그 금광촌의 주민은 단 한 명의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한 명뿐인 여자가 아기를 낳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죽고 어린아이만 살아남았으니 광부들은 어떻게 아기를 처리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아기를 기르기로 했습니다.

 

우선 아기를 나무 상자 안에 누이고 때와 기름이 잔뜩 묻은 수건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재우기에는 나무 상자가 너무 더러워 140㎞나 떨어진 도시에 사람을 보내 아기 침대를 사 오게 했습니다. 아기가 덮고 자는 더러운 수건도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광부들은 다시 사람을 도시로 보내 이번에는 아기가 입을 옷과 담요를 사 오게 했습니다. 광부들은 아기가 잠자는 방의 마루를 물과 비누로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매일 아침 광부들은 금광에 들어가기 전에 아기를 한번 안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손이 너무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비누를 사서 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더러운 욕도 삼가게 되었고 자라는 아기를 위해 황폐한 금광촌에 꽃도 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가 한 아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한 아기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어른들에게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기를 사랑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 마음에서 사랑이 샘솟아 그 사람들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희망과 믿음의 날개를 가진 새와도 같습니다. 아기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과 그렇게 사랑하면 더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이 두 날개가 없다면 사랑은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그리스도만큼 사랑받을 자격이 있으신 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도 사랑하지 못하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려면 그분이 먼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으면 희망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은 모든 것을 해 주실 것인데, 내가 사랑하시는 분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그분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희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마치 금광촌의 사람들처럼 마음에서 돈과 쾌락과 싸움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방법입니다.

 

      물론 마을 사람들이 아기를 사랑하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기는 먹고 싸고 우는 것밖에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방 여인에게 모진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분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결국 딸의 악령이 사라졌습니다.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얻어내는 힘은 내 안에서 사랑이 솟구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저도 돈 많이 벌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악령인 줄도 모르고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쓰시겠다고 아무리 불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 행복은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사랑해주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었습니다. 열 권이나 되는 두꺼운 책이니 그만큼 그분을 더 잘 알고 그러면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서 제가 정화됨을 느꼈습니다. 삼구를 자아내는 악령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급기야 그분을 위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도 생겨서 사제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큰 죄인으로 살아가기는 하지만, 그때보다는 훨씬 죄에서 벗어난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면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더 사랑하려고 노력합시다.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우리 마음의 악한 때를 벗겨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조재형신부-


동북부 엠이 봉사자 피정을 으로 하였습니다묵주기도미사와 강의나눔을 같이 하였습니다이제는 영상으로 하는 피정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갑니다강의 중에 스님과 여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불교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입니다오랜 시간 사찰에서 염불하고목탁을 치고설법하던 스님이 있었습니다그 옆에는 주막에서 오랜 시간 웃음을 팔고술을 팔고안주를 팔던 여인이 있었습니다사람들은 두 사람이 죽었을 때 스님은 극락으로 가고여인은 지옥으로 갔을 거로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스님은 지옥으로 갔고여인은 극락으로 갔습니다두 사람의 지향과 갈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스님은 목탁을 치지만 마음은 주막에 가서 술을 먹고 싶었고여인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여인은 술은 팔지만마음은 스님을 부러워했습니다스님처럼 염불을 외우고사찰에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스님의 염불은 공염불이 되었지만여인의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고성전에서 지내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이야기하셨습니다그들의 모습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자신들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고 하셨습니다단식은 하지만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셨습니다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고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세리들을 받아 주셨고복음을 전하는 제자로 삼으셨습니다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생각과 기준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르고하느님의 의를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스님과 여인의 이야기를 한 것도 위선과 가식에 머물지 말고진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다는 의미였습니다사제를 비롯해서 봉사자들은 타성에 젖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나눔 시간에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듣고잠시 웃었습니다한 형제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럼 골프장에서 운동하면서 하느님 생각하면 되나요?” 형제님은 주막과 골프장이 같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마음입니다진심은 어디에서나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6)”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능력지혜업적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저는 사랑없이 단 한순간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자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고통받고 있는 자녀들을 향한 각별한 사랑을 지니고 계신 성모님께서 이런저런 병고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계신 형제자매들을 따뜻히 위로하고 안아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능력과 치유의 주님께서 환자들의 고달픈 삶에 언제나 함께 하시며, 그 아픈 상처를 당신 자비의 손길로 오래오래 어루만져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고통 당하실 때 주님께서도 함께 고통 당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분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당신 친히 짊어지고 계심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과 결합될 때 그 고통은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통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대답은 여러분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용감히 증언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루르드 발현의 목격자 벨라뎃다는 목격자라는 이유 하나로 유명세도 탔지만 지속적이고도 혹독한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1866년 7월 8일, 22세 되던 날 느베르 애덕 수녀회에 입회해서 평생토록 침묵과 기도, 희생과 봉사 속에 수도생활을 해나가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셨을 때의 나이는 14살이었습니다. 가난한 시골 루르드에서도 찢어질듯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지극히 평범한 벨라뎃다였습니다. 사람들은 목격자 벨라뎃다에게 자주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모님께서 왜 하필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셨다고 생각합니까?”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성모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게 발현하신 이유는 제가 백치처럼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성모님께서 저보다 더 무식한 사람을 발견하셨다면 아마도 그 사람을 선택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저를 마당 한 구석에 놓여있는 빗자루처럼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빗자루로 마당을 다 쓸고 나면 그 빗자루를 중앙에 두지 않습니다. 원래 있던 자리, 마당 한 구석으로 원위치시키지 않겠습니까? 저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마당 한 구석에 놓여있는 빗자루 같은 사람.

  

노년에 다다른 벨라뎃다 수녀님이 한번은 자신의 일생을 총정리하며 감사기도를 바치셨는데, 그 감사기도 안에는 성모님 발현 목격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답이 잘 들어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발현하심에도 감사드리지만, 발현하지 않으심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제가 성모님을 이용해 큰돈을 벌고 있다고 의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억력이 나빠 아무리 노력해도 암기할수 없었던 제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서원식후 애덕회 수녀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저를 귀여운 딸로서 안아주신 대신, 마리 벨라뎃다 수녀님이라고 불렀을 때, 마음이 아팠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요셉피나 원장수녀님이 저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 갖은 폭언과 차별, 굴욕의 방 처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 여자가 정녕 그 벨라뎃다인가?' 라고 말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저라는 것과, 마치 희귀한 동물 대하듯, 바라본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제 눈앞에 나타나실 때도 감사드리지만, 나타나지 않으실 때도 감사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서 현존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랑없이 단 한순간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이러한 냉혹한 처사에 당혹스럽고 저항감마저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냉혹한 처사는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강아지”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강아지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의 은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도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주님!

거절당하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그 순간이, 당신께서 저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믿음과 사랑을 더 깊게 끌어당기심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의 자비를 믿고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아멘.

 포기하지 않는 믿음

-반영억신부-


어떤 생선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습니다. 결국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천하고 부정한 사람임을 인정한 여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먼 저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르 7,24-30).”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여자의 간절함, 겸손, 끈질김 등만 보고,

여자의 변화를 보지 못하면, 이야기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청한 은총도 주셨지만, 청하지 않은 은총도 주셨습니다.

여자가 청한 은총은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청하지 않았지만 얻은 은총은 여자 자신이 신앙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더 크고, 더 중요한 은총입니다.

 

1) ‘티로 지역, 이교도,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강아지들’이라는 말은,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에 속한 사람, 즉 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없었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일과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잘하신다는 소문입니다.

그 여자는 소문을 듣고서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기대감’으로 찾아왔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단계는 아니지만,

절박한 상황이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2)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이 말씀은 그 여자가 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자녀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먼저’ 라는 말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나중에’ 주겠다.”

라는 뜻이 아니라, ‘못 준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은총을 청하려면 먼저 하느님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먼저’ 라는 말을 구원사업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로,

즉 ‘유대인들 먼저, 이방인들은 나중에’, 또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먼저,

안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고,

하느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이 그런 순서로 구원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을 먼저 들었든지 나중에 들었든지 간에

구원의 은총을 받으려면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상을 숭배하거나 미신을 믿는 상태로는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3)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또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개들과 마술쟁이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묵시 22,14-15).”

여기서 ‘옳지 않다.’ 라는 말은, ‘못 준다.’ 라는 뜻입니다.

<뒤의 29절-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 여자의 간청을 들어 주셨는데,

만일에 여자가 우상 숭배자에서 신앙인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일을,

즉 ‘옳지 않은 일’을 하신 셈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바라신 대로 여자가 신앙인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자가 변화된 후에 그 여자의 간청을 들어 주신 일은 ‘옳은 일’이 됩니다.>

 

4)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강아지들도’ 라는 말은, 자기가 강아지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말이고,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겸손과 간절함만 보시고 간청을 들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여자의 말은, “제가 강아지라는 것을(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로 해석됩니다.

 

<이 말을 무슨 흥정이나 거래 같은 말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흥정을 한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가 어리석은 일이었음을 깨닫고,

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처음에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청할 때에는

자기가 섬기는 우상들에게 비는 것과 같은 태도로 예수님께 간청했을 텐데,

그것이 크게 잘못된 일이었음을 깨닫고 뉘우쳤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상에게 비는 것처럼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은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우상으로 격하시키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간청하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이 만물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도 없이 간청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5) 복음서에는 ‘간절함’만 있고,

믿음은 부족했거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좀 더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9장에 나오는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간절하게 청했지만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습니다(마르 9,22-23).

마르코복음 1장에 나오는 병자는 예수님의 권능은 믿었지만,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습니다(마르 1,40-41).

믿음이란, 예수님의 신원과 권능과 자비를 모두 믿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궁극적인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예수님께 소원을 비는 것만으로는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원을 들어주는 자동응답기가 아닙니다.

 복음: 마르 7,24-30: 강아지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조욱현신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이 불쾌하게 여기자 주님께서는 티로 지방으로 가신 것 같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계실 수가 없었다.”(24절) 그분은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우리와 같은 한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끈질긴 간청으로 주님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티로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개”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개”라는 표현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아마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하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 생활의 자세인가? 마치 유대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우리의 원의를 갖고 기도할 때에 얼마나 조바심을 해왔고, 또 귀에 거슬리는 처사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 이 여인의 모습보다는 화를 낸다든지 즉시 그 사람을 향하여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욕을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하여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의 태도는 다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그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신다.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말씀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귀중한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 28)

-한상우신부-


부스러기의
절실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겸손으로
절실했던
올챙이 때의
첫마음을
기억한다.

절실함으로
다시 시작하는

신앙의
나날들이다.

절실함이
우리 신앙을
바꾸어
놓는다.

절실함은
아픔을 향한
매순간의
지극한
사랑이다.

나약하고
빈곤한
부스러기에서
우리는
출발한다.

신앙은
단순하다.

주님의
뜻만이 삶의
본질이다.

본질을 알기에
본질을
향하는 것이
신앙이다.

예수님께서는
절실한
이들에게
당신 나라를
보여주신다.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아픔을 통하여
기쁨으로 나가는
것이 우리 삶의
여정이다.

부스러기의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부스러기는
이 상황을
탓하지 않는다.

부스러기는
이 상황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오히려
부스러가
우리 현실을
껴안는다.

부스러기가
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는
해답이다.

교만한
신앙이 아닌
낮아지고
작아진

부스러기가
우리를 울린다.

부스러기
사이로
하느님의
힘찬 사랑이
시작되었다.

큰 것만
바라보고
집착하는
우리들에게

부스러기로
다시 우리
신앙을
치유하신다.

절박한
부스러기의
힘을 믿는다.

매달리는
절박함이
기도이며
사랑이며
성장의 은총이다.

부스러기의
절박함이
우리 모두를
살게한다.

병자들의
절박함을
들어주시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드린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만남이 그려집니다.
 

"주 하느님께서 ...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불리리라.'"(창세 2,23)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알맞는 협력자를 만들어 주십니다. 아담은 여인을 보는 순간 기쁨에 차서 외치지요. 신부를 만난 신랑의 환호입니다. 모든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도 "자기에게 알맞는 협력자를 찾지" 못한 그에게 정말로 행복한 순간이 되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이방 민족과의 만남이 그려집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마르 7,25-26)

오늘 예수님 앞에 달려온 이방 여인은 모든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신랑이신 하느님의 신부였지만, 신약 시대 이후 그리스도의 신부는 이스라엘의 담장을 넘어 모든 이방인을 포함하는 교회로 확장됩니다.

그 여인은 마귀 들린 딸을 가진, 참으로 절박한 사연을 안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자기네가 섬기는 우상의 힘으로는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엎드린 그녀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관상합니다.

그녀와 마귀에 시달리는 딸에 대한 연민, 그리고 어떤 연유에서건 당신 앞으로 나아온 이방인에 대한 반가움이 섞여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순간은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당신의 신부가 된 이방인 교회를 맞이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서는 오늘 제1독서 속의 아담처럼 기쁨이 솟구치며 사랑이 마구 솟아났을 것 같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우리가 익히 아는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표현이지요. 예수님은 짐짓 단호하게 이런 말씀으로 당신 앞에 나아온 이방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는 동시에, 여기까지가 바로 구약 시대 백성의 신앙이고 흐름이었음을 드러내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철저히 을의 입장인 이방 여인이 비장하게 자기의 의견을 피력할 때 예수님이 내심 얼마나 대견하셨을지 느껴집니다. 그녀의 신앙 고백 안에는, 비록 이스라엘 민족보다 주님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분의 자비는 이제 만민에게 유효하다는, 여느 신학자 못지 않은 내용이 담겨 있으니까요. 이 고백은 신약 시대 이후의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신뢰에 찬 고백이 될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 7,29)

그녀는 자신이 믿고 청한 그대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실제로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가고 없었지요. 이 또한 의미심장한 상징을 지닙니다. 그녀 집, 그녀의 민족에게서 우상이 떠나갔다는 뜻도 담겨있으니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해후를 기다리는 신부로서 설렘과 기쁨을 미리 맛봅니다. 아담이 기쁨에 차서 부르짖었듯이 예수님도 그녀의 의연하고 적극적인 신앙 고백에 참으로 기쁘셨을 터이고, 당신 앞에 나아오는 우리 모든 보잘것없는 이방 죄인들도 무한히 환대하실 테니까요.

설날 연휴를 시작하는 사랑하는 벗님! 아무 자격 없는 우리 가족에게도 활짝 열린 구원에 감사하는  연휴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상태가 어떻든, 우리가 청하는 바가 무엇이든 우리를 맞이하는 그분의 기쁨이 곧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니, 신뢰 가득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 엎드립시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이 말씀에는 굳게 믿는 우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내가 믿고 바라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남녀가 협력할 것이 뭘꼬?

 -김찬선신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

 

오늘 창세기 말씀에서 대충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거지만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은데 왜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는 건지

그 의미를 뜯어보면 좀 이상한 점이 있어 그냥 넘어가기가 어렵습니다.

 

협력자란 번역이 맞는 번역인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는 데 힘이 달린다면 협력자가 필요하겠지만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라면 협력자가 아니라

알맞은 짝을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래서일까 이전 번역은 '거들 짝'이라고 번역을 하였고 영어는 Patner로

번역을 하였는데 이것을 '상대'로 번역하면 어떨까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있다는 것은 상대할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얘기할 상대,

사랑할 상대,

싸울 상대,

미워할 상대가 없는 것이고 그것이 혼자인 거지요.

 

혼자인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좋지 않고 나쁜 것입니다.

물론 간혹 혼자 있는 것이 좋을 때가 있지요.

 

며칠 전 복음에서 음식을 들 시간조차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자고 하셨는데 그런때,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하느님과 단독자로 만나려고 할 때,

이런때는 기간적으로 혼자 있을 필요가 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잠시 혼자 있을 필요가 있지요.

 

그러나 이런 것이 아니라 관계를 잘 맺지 못해서 혼자 있거나

만사가 다 귀찮고 누구도 다 싫어서 혼자 있거나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 혼자 있는 것이라면 안 되지요.

그러므로 고독은 좋을 수도 있지만 고립은 언제나 나쁩니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에서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알맞은 상대가 필요하다고 한 것은

그러니 아무라도 같이 있으면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상대로 짐승들을 주셨지만 사람은 그들에게서 알맞은

상대/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요즘 사람보다 반려동물을 자신의 상대로 삼는 사람들이 많지만

짐승이 사람에게 상대는 될 수 있어도 알맞은 상대는 아니고, 그러니

사람보다 짐승을 또는 사람 대신 짐승을 상대로 삼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짐승이 사람의 알맞은 협력자는 될 수 없는 거지만

그렇다고 창세기가 의미하는 알맞은 협력자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의 알맞은 협력자는 짐승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이며

남자에게 진정 알맞은 협력자는 여자라는 것을 창세기는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새 번역이 옛날의 '거들 짝' 대신 굳이 '협력자'로 번역한 뜻은

그저 외롭지 않게 해줄 상대를 넘어서 뭔가 협력해야 할 상대를 말하는

것인데 그 협력도 사람과 사람의 협력 또는 남자와 남자의 협력 차원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협력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와 남자의 협력이 아니라 남녀의 협력이라는 것이 뭐겠습니까?

 

나라를 세우고, 전쟁을 하고, 집을 짓는 등의 일에는 남자가 남자의

알맞은 협력자이겠지만 하느님의 창조를 이어가는 일에는 남자가

여자의 알맞은 협력자이고 남자에게는 여자가 알맞은 협력자지요.

 

이런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을 이어갈 남녀가 많아지기를 비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2월 14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