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2월 9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2. 9. 07:36

2021년 2월 9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마르코 7,1-13)


You disregard God's commandment 
but cling to human tradi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조금은 따분하고 지루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창조된 순서대로 피조물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순서대로 빛, 물과 하늘, 땅과 식물들, 빛물체, 바다 생물과 새, 땅의 생물들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휴식하시며 복을 내리셨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창조된 피조물이 무엇인가요? 바로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가장 마지막에 창조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가장 소중하므로 마지막에 창조된 것입니다.
창조의 순서는 인간을 위한 모든 공간이 마련되고 채워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삼라만상의 설계 작업이 마무리된 뒤에, 인간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소중함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시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피조물은 사람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심의 창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모두 “제 종류대로”(창세 1,11.12.21.24.25) 만드셨지만, 사람만은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고, 온갖 생물을 다스릴 권한도 부여하십니다. 하느님 창조 활동의 중심에 바로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애정, 그 사랑의 이야기가 창조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나의 모습에, 이웃의 모습에 하느님의 모습이 함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 그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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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이 살았던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면서 그때가 좋았다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때로 되돌아가면 좋을까요?

언젠가 우리나라의 7~80년대를 연상하게 만드는 개발 도상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버스를 탔는데 바닥에 구멍이 나서 바닥에서 흙먼지가 실내로 풀풀 날립니다.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보였습니다. 공중화장실은 너무나 지저분해서 들어가서 일을 보기에는 엄청난 인내심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묵고 있는 호텔에서만 인터넷이 가능했고, 그나마 거의 접속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나라에 와서 하루 이틀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서 ‘우리도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함이 가득했습니다. 훨씬 더 발전된 우리나라에 빨리 가고 싶었습니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할 때, 그 ‘나 때’가 과연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어렵고 힘든 시기를 살았었다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말일 뿐입니다.

물론 ‘나 때’가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을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그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임을 그리고 가장 의미 있는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바르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들은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으며, 이것이 율법을 잘 보존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세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 역시 ‘사랑’이 가장 윗자리에 있습니다. 이 사랑을 외면한 모든 전통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매여서 살면서, ‘바리사이법’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법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빼 버리고 어떤 것은 덧붙이면서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사람의 전통만을 지키다 보니 ‘사랑’이 제외되어 있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사랑을 다해 부모를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라는 말만 하면 제대로 공경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과거의 잘못된 전통에 매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사랑하면서 지금을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니 눈길에서는 함부로 걷지 마라(이양연).


적절한 거리

저는 개 몇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 개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특히 겨울이 되면 세 마리가 꽉 붙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개의 부드러운 털에 의해서 서로 붙어있으면 정말로 따뜻합니다. 문득 고슴도치는 어떨까 싶었습니다.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서로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지요.

이들은 추위를 느끼면 서로 가까이 다가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내 가시에 찔려 아픔을 피하려 다시금 서로 떨어집니다. 이렇게 고슴도치는 추위와 아픔 사이를 왕복하다가 마침내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절묘한 거리를 찾아서 유지하게 됩니다.

인간관계 안에서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너무 가까이도 또 너무 멀리 떨어져도 안 됩니다. 너무 가까우면 집착에 빠질 수가 있고, 너무 멀리 떨어지면 무관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거리를 어떻게 맞출 수가 있을까요? 이를 위해 더 많이 만나야 합니다. 

 빛과 어둠은 통합될 수 없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시비 거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고 먹는 것이 건강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들은 겉은 하느님의 율법을 따른다고는 하나 마음은 자기 욕망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따르면서도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을 하지만 사실 자기 욕망을 따르는 이들은 남을 겉모습만으로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거스르는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 사람 안에 두 본성이 결국 공존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이 빛과 통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성을 받아들이려면 인성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버리고 신성을 선택하신 방법입니다. 요즘 인간의 통합에 대해 말하며 마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자아를 통합하면 해결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사람의 마음 안에 이 악한 것들이 나오는 원천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 어둠으로부터 탈출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에게 요한 형제님이라는 분이 메일을 보내왔는데, 이분은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 없음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빛으로 나아오기 위해 어둠을 버리셨습니다. 이분의 사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저는 50여 년간 남부럽지 않게 가위에 눌려 고생했습니다. 눈을 떠 보니 어둠 속에 시커먼 그림자 같은 사람이 제 가슴 위에 올라타서 누르고 있더라고요. 그때 이후로 너무 무서워서 가위가 눌리더라도 절대 눈을 뜨지 못한답니다. 저 같은 경우 언제 가위가 눌리냐면 술 진탕 먹은 다음 날 잘 때 꼭 어김없이 눌리더라고요(술 먹은 당일은 안 눌림).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강요로 억지로 성당에 다녔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술 때문에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와의 결혼 때문에 세례를 받게 된 아내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제가 냉담 중 가위눌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 같아요. 가위눌림은 점점 심해져 나중엔 소름 끼치는 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제 허벅지도 누가 만지고, 꼬집고 하는 등 정말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날 마신 술이 안 깬 상태에서 갑자기 안방에 있는 철로 된 십자고상이 보이는 것이에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예수님 머리 위에 ‘INRI’란 글자가 보였습니다. 저는 비몽사몽 간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아, 이 자식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면 곱게 죽이지, 왜 이런 걸 달아놨어!’ 하며 펜치를 가지고 INRI 표를 뜯어냈습니다. 제 마음속에 제가 다른 건 못 해 드려도 이런 모욕은 없애야지 하는 맘에 그랬던 거 같아요.

그 이후로 아내를 따라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하지 않고 스마트폰만 보다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그날도 아내 위한답시고 미사를 갔었는데, 그날 제 귀에 신부님이 읽으시는 복음 말씀 중에 (요한복음 21장)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시는 대목을 읽으실 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제 마음속에 영성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내는 고해성사부터 하라고 했지만 저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었고 눈 주위가 뜨거워지며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 후 고해성사를 보았고 지금은 평일 매일 미사를 참여하며 매일 영성체를 합니다. 이때쯤 그 좋아하는 술도 끊게 되었습니다. 4년이 지났는데 이때부터 너무너무 신기하게 가위눌림이 사라졌어요. 지금은 절대로 예수님을 놓치고 싶지 않아 매일매일 기도합니다. ‘제가 부족하고 예수님의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저를 절대 버리지 마십시오, 아버지!’ 하고요.”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반되는 둘이 한 주체에 공존할 수 없다. ... ‘빛이 어둠과 무슨 사귐이 있겠습니까?’(2코린 6,14) ...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영혼이 먼저 애집을 쫓아버리지 않고는 하느님과의 합일의 빛이 그 안에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가르멜의 산길』, 4,2)

      빛과 어둠의 이원론이 허물어지면 바리사이들처럼 자기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게 살면서도 율법을 지킨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 사귈 수 없습니다. 어둠을 섬기며 빛을 따르려는 이들은 자기 합리화에 바쁩니다. 결국엔 사랑의 계명을 어깁니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고 미워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악을 섬긴다는 증거입니다. 가톨릭교리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빛과 어둠의 이원론입니다. 빛과 어둠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인간 미움의 본성에서 하느님 사랑의 본성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우연히 이현주 목사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강의 중에 후배와의 일화를 소개하였습니다후배와 인사동에서 차를 마시기 위해서 지하철로 내려갔습니다마침 차가 들어오기에 후배는 뛰어갔습니다목사님은 뛰고 싶지 않아서 걸어갔고결국 후배는 차 안으로 들어갔지만 목사님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겨우 다시나온 후배의 얼굴에는 화가 있었습니다후배의 얼굴에는 왜 같이 뛰지 않았느냐는 질책이 있었습니다그럴 때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화는 불과 같아서 장작을 넣어주지 않으면 곧 사그라지기 마련입니다후배의 얼굴이 다시 평온해지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꼭 그렇게 뛰어가야 했는가이번 차가 막차인가우리가 그렇게 바쁜가인사동의 찻집이 어디로 가는가남들이 다 뛰어간다고 나도 그렇게 뛰어가야 하는가?” 생각해보니 저도 그런 적이 많았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라는 말로 나의 잘못을 합리화한 적이 있었습니다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게을리 했었습니다사람에게는 꼭 기억할 수 있는 날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하나는 세상에 태어난 날입니다이날은 누구나 아는 날입니다다른 하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깨닫는 날입니다이날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모두가 알지 못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노자의 공통점을 이야기 하였습니다하나는 예수님과 노자는 자연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서 자연을 이야기하셨습니다하늘의 새와 들의 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그들은 수고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먹이고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하느님을 닮은 사람도 그렇게 해 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그러니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노자는 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움직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평평한 곳에서는 호수가 되고기울어진 곳에서는 흘러 넓은 바다로 간다고 하였습니다개울은 소리가 나지만 넓은 강물은 소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세상의 모든 물이 바다로 모이고바다는 넘치는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바다는 넓고 깊기 때문입니다생각해 보니 콘크리트에 쌓인 세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사람이 만든 것들 속에 파묻혀 살고 있었습니다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던 세상을 너무나 쉽게 파괴하고 있습니다우리의 형제요 자매인 소중한 생명의 터전을 빼앗았습니다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삶의 터전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노자는 어린아이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어린아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어린아이에게는 순수함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노자는 젖먹이가 스승이라고 하였습니다젖먹이는 엄마와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엄마의 몸속에서 탯줄로 연결되었었기 때문입니다젖먹이에게 엄마는 우주요엄마는 곧 젖먹이입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통해서 하느님의 의로움과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눈은 볼 수 있다고 자랑하는 법이 없습니다귀는 들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법이 없습니다발은 걸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법이 없습니다우리 몸의 지체는 몸을 위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다입은 먹는 것을 사유하지 않습니다온전히 목구멍을 통해서 내려 보냅니다항문은 더러운 변을 내보낸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묵묵히 주어진 일을 수행합니다생각해보니 너무 많은 것들을 쌓아놓고 있었습니다욕심시기분노원망을 쌓아 놓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였습니다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합니다먼저 이야기를 듣고왜 그렇게 했는지 묻지도 않고 먼저 단죄를 하였습니다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우리들 역시 짧은 시간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날까지우리는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은 교만입니다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옆에 있는 분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비슷한 점은 무엇인지그러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은 빈껍데기 일뿐입니다!

-양승국신부-

 

수십년 전 손톱보다 작은 도움을 드렸던 분께서, 그때 일을 잊지 않으시고 정성스런 손편지를 보내주셨는데, 편지를 읽는 내내 큰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그 어떤 선물보다 값진 선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하느님 앞에 이웃 앞에 별로 한 것이 없다는 송구스런 마음에 마음이 씁쓸했었는데, 그 한장의 편지로 인해 제 마음이 순식간에 뒤바뀌더군요. 그래도 헛살지는 않았다는 마음도 들면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정성이 담긴 말 한마디, 마음과 영혼이 담긴 말 한 마디가 오늘 우리에게 더욱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빚을 갚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말의 홍수 시대입니다. 방송이나 SNS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얼마나 많은 말들이 떠돌아다니는지 모릅니다. 때로 실수로 내뱉은 한 마디 말이 일파만파 퍼져나가 누군가를 깊은 구렁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입술로는 뭐든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루 만에 만리장성까지 쌓을 정도입니다. 사랑한다, 노력한다, 기도한다, 믿습니다... 정말 입술로는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이 거기에 마음, 진실성이 담겨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사라진 언어, 영혼이 떠난 육체, 마음이 사라진 신앙, 진실성이 결여된 종교는 거짓된 신앙, 사이비 종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오늘도 진실한 마음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담기지 않은 미사와 전례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마음이 없는 기도, 감동이 사라진 신앙, 정성이 담기지 않은 전례, 그것처럼 웃기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왕 바치는 기도 지극정성으로 드려야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분향 같은 제사가 될 것이며 그분께 영광과 찬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외적인 것들,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이 쓰일 때 마다 겉보다는 내면, 외형보다 마음을 중요시 여기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을 떠올려야겠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향한 우리의 올곧고 순수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인간의 겸손한 마음을 맞갖은 제물로 받으십니다.

 

미사를 집전할 때도 비슷한 체험을 많이 합니다. 세월이 흘러 연륜이 쌓이다보니 마치 프로처럼, 또는 이벤트 회사 직원처럼 미사를 집전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미사경문을 읽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데 가 있습니다. 마음과 정성이 결여된 행사, 갖은 분심 속에 기계적으로 해치우는 전례행위를 보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도 합니다.

  

한번은 돈보스코께서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 마음은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의 미래를 활짝 열어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이 홀로 설수 있도록 도와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픈 마음입니다. 결국 청소년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참 스승은 청소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을 극진히 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자식 같고, 친구 같고, 연인 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마음이 없는 교사들은 어떻습니까? 그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급여를 받으니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대상자일 뿐입니다. 의무감에서 싫어도 대면해야할 생계의 도구일 뿐입니다. 마음이 없다보니, 마음이 가지 않다보니 자주 짜증납니다. 그의 미래에는 별 관심도 없습니다. 그가 어찌되든 세월 가고,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마음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은 빈껍데기 일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가 준엄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코 복음 7장 6`8절) 

 

몸의 정결을 위해 손도 씻지만 마음도 깨끗히 씻어야겠습니다. 참회의 표현으로 옷도 찢지만, 마음을 찢고, 마음으로 울어야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진정한 경배를 주님께 드려야겠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이영근신부-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지가 바로 주방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또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하고,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하여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7-9)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의 정신’과 ‘하느님의 뜻’에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헛되이 섬겨서는 안 된다

 -반영억신부-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적인 생명양식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미사전례 때에 참회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전통을 고집하면서 알맹이를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신 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 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 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봐야 하느냐?”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 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 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해야 하는 일, 해도 되는 일, 하고 싶은 일

 -송영진신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말은,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고 식사를 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결 예식’은 하느님의 계명이 아니라,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지키고 있던 ‘일상생활 지침’을 가리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것을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상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옛날의 유명한 랍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물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비난했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질문은

“당신의 제자들이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는 것을 보니,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죄인들이다.” 라는 뜻이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위선자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십니다.

1)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하는 것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마음에 없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위선’이고,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는 죄입니다.

2) 그들이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규정’이고,

따라서 그것만 지키는 것은 하느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입니다.

(헛되이 섬긴다는 말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하느님의 계명부터 잘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지금 너희가 말하고 있는 정결 예식은

‘사람의 규정’일 뿐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정결 예식 같은 ‘사람의 규정’은 안 지켜도 죄가 안 되는 규정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는 상관없는 규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안 지킨 제자들을 죄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3) 사람의 전통만(규정만) 지키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안 지키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따라서 지금 죄인이라고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9-13)”

 

누구든지 주님께 어떤 서원을 했다면 그것을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율법’입니다(민수 30,3).

‘코르반’ 관습은 바로 이 율법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어떤 물품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면,

아무도 그 물품을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관습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가운데에서 부모 봉양을 싫어하는 자들이

코르반 관습을 악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코르반으로 선언하고서는,

실제로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지도 않으면서 부모 봉양을 회피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핑계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짓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 제2계명과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제4계명을 동시에 어기는 ‘큰 죄’입니다.

(신성모독죄와 불효죄를 동시에 짓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면서

코르반 관습을 언급하신 것은 그들이 바로 그런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신앙인은 ‘해야 하는 일’과 '안 해도 되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계명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정한 규정이라도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모두가 합의해서 정한 규칙이라면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즉 선과 악에 관한 문제가 아닌

관습이나 전통들은 안 지켜도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은 ‘안 해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2) 신앙인은 ‘하면 안 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 죄가 되는 일, 사랑을 거스르는 일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자기 혼자서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을 지키는 것은 그 자신만의 일로 그치지만,

그것을 지키라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마실 물도 부족했던 당시의 그 지역 사람들에게 ‘정결 예식’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큰 고통을 주는 일, 즉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3) 신앙인은 어떤 일을 할 때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기준은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도 죄가 되는 일이라면 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하기 싫은 일이라도 선과 사랑을 실현하는 일이라면(해야 하는 일이라면)

스스로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선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그 경우에는 우선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바꿔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경우에도,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한다면 공로가 되지 않고,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노동을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마음부터 먼저 바꿔야 하는데, 마음을 바꾸는 것, 그것이 곧 회개입니다.)

 복음: 마르 7,1-13: 조상들의 전통

-조욱현신부-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루카 18,12 참조), 의례적으로 놋그릇과 접시와 잔을 닦고(참조: 마태 23,25; 마르 7,4), 십일조를 바치고 맏물을 봉헌했으며(참조: 마태 23,23; 루카 11,42), 많은 기도문을 바쳤다(루카 5,33 참조). 그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즉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여 있어서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 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제4계명, 신명 5,16).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21,17; 레위 20,9) 하면서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부모가 굶주리는 데도 그 자녀는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게걸스레 먹어 치울 제물을 봉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느님께 바쳤다는 핑계로 부모께 대한 의무를 쉽게 저버리는 썩은 서약이 되어 버렸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교회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이 있다. 이 법들은 우리의 신앙성숙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며 지켜야 한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 9)

-한상우신부-


살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다.

삶의 기준과
삶의 질서가
필요한
우리들
관계이다.

계명은
삶의 길이며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이다.

우리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위선과
모순을 보게된다.

계명을
저버리면

빛과
소금이라는
우리의
정체성마저
잃게된다.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주신다.

진실로
사랑하는
삶이다.

거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사랑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뜻이다.

거짓과
이기심이
사랑의 계명을
망가뜨린다.

계명은
삶의 본질을
일깨워준다.

현실과
이상과의
거리

전통과
계명과의
괴리속에서

바로세워야
할 것은
우리자신의
삶이다.

모순과
이중성의
삶에서 벗어나

정직한
내면의
계명을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빛좋은
개살구처럼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아름답지 않는
삶이 아닌

겉과 속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삶이
계명의 삶이다.

아름다운 삶이
그리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있다.

먼저
우리자신이
계명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길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구원의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바리사이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 예수님 제자들을 보고 불평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예절은 조상들에게서 전해져 내려온 전통입니다. 요즘같은 감염병 시대의 손씻기와는 좀 다른, 제의적으로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한 의미를 담고 있지요.
 

"너희 위선자들"(마르 7,6)

예수님께서 전통을 운운하며 트집을 잡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전한 대로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상태가 곧 위선입니다.

하느님이나 사람보다 율법의 문자와 전통을 우선하는 이를 위선자라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내와 자기 희생, 헌신이 필요하기에 마냥 수월하다 할 수 없는데 비해, 문자와 전통은 마음과 온기를 섞지 않아도 메뉴얼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럴듯해 보인다는 점이 다릅니다.

제1독서는 어제에 이어 세상 창조 이야기의 후반부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21)

창조 기사를 읽고 듣고 묵상하다 보면,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을 바라보며 "참 좋다~~"고 하시는 하느님의 탄성에 우리 마음도 덩달아 기쁘고 흥겨워집니다.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은 이렇듯 보편적입니다. 누구도 제외하지 않으시지요. 풀 한 포기와 꽃 한 송이, 온갖 생물과 짐승들, 그리고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는 모든 이가 "좋구나!" 하시는 그분 기쁨의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입니다. 모든 존재가 하느님께 귀하고 소중하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은 그분을 닮고 그분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은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헌신을 다른 존재에게도 베풀 수 있어 더욱 특별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과 인류를 향합니다. 그렇기에 복음 속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내내 고수하고 주장하는 조상들의 전통은 오히려 그들을 선민 사상의 장벽 안에 가두어 구원의 보편성과 새로움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물과 제물을 바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예배하는 이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몸을 씻는 여러 가지 예식과 관련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새 질서의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만 부과된 법규일 따름입니다."(히브 9,9-10)

옛 것에 고착되어 안주하는 이는 새로움에 저항하기 쉽습니다. 전통에 대한 충실성으로 그럴듯하게 포장은 했지만 실상 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심과 분리할 수 없이 덩어리져 있기에, 악이 이 부분을 건드리면 결국 생명의 주인을 죽이기까지 할 정도로 강력해지지요. 

예수님의 강생과 함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은 이스라엘 민족이 조상 때부터 지켜 온 전통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법, 온 인류를 구원할 온전하고 보편적인 새로운 계약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옛 것에 집착해 새로운 모습으로 오시는 그분을 몰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우리 모두는 어떤 이념이나 관습, 전통보다 더없이 존귀하고 존엄하니까요. 문자와 관습의 공식에 매이지 않고,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는데 마음과 온기와 정성을 다하며, 하느님 모상으로 완성되어 가는 벗님을 응원하며 축복합니다. 그런 벗님을 보고 하느님께서 흐뭇해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참 좋구나!" 

 생태적 회심

 -김찬선신부-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오늘 첫째 독서 창세기는 어제에 이어 천지 창조 얘기입니다.

그리고 인간까지 창조하신 다음에는

모든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합니다.

 

인간 창조 이전에 다른 것의 창조 때 그저 좋았다고 한 것과 비교하여

참으로 좋은 그러니까 인간의 창조로 인해 모든 좋은 것이 완성됐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을 보시고도

하느님께서는 "참 좋았다."라고 하실지 의문이 듭니다.

 

왜냐면 하느님 뜻대로 된 선을 파괴하니 그것은 죄악,

그러니까 죄로 인해 하느님의 선을 악으로 만드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전서부터 저는 Humanism인본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물론 인류애적인 인본주의도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신본주의를 부정합니다.

하느님 본위가 아니라 인간 본위라는 뜻이지요.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뜻이고요.

 

그러니 '좋다-나쁘다.'의 기준도 '하느님 보시기에'가 아니라

'인간이 보기에' 더 안 좋게는 '내가 보기에'입니다.

 

인간 본위는 다른 피조물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인간 본위로 하느님의 창조물을 이용하고, 소유하고, 파괴합니다.

 

요즘 코로나의 원인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규명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그래서 얼마 전에는 전문가들이 중국 우한에 가서 조사도 했지요.

 

이 조사를 통해서 생태계의 파괴가 코로나의 원인 또는 이유라고 결과가

나올지 어쩔지 모르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신학적 생태론 차원에서

그리고 생태학의 주보인 프란치스코를 사부로 모시는 우리는

프란치스칸 생태론 차원에서 그 원인과 이유를 찾고 반성해야 할 것이고,

이것이 생태적 회심과 생태적 회개 운동에로 발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본주의의 문제 말고도 또 봐야 하고 더 봐야 할 것은

자기중심 또는 이기주의의 문제입니다.

 

인본주의는 그래도 인류애를 얘기하지만, 이기주의는 자기 중심이기에

당연히 인간 서로가 자기중심으로 이용하고, 소유하고, 파괴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이웃을 자기중심으로 좋다고 하거나 싫다고 하며,

좋아하는 사람은 선이라고 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악이라고 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소유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쓰레기 버리듯

또는 유기견 버리듯 버려버립니다.

 

이렇게 하여 사랑해야 하고, 사랑함으로써 완성해야 할 하느님의 선들을

소유하거나 소유하기 싫은 것은 버리거나 파괴해버리는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나인지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을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좋은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지 성찰하고 반성하여

생태적 회심을 하고 회개 운동도 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2월 12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마르코 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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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은 하느님의 율법을 따른다고는 하나 마음은 자기 욕망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따르면서도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을 하지만 사실 자기 욕망을 따르는 이들은 남을 겉모습만으로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거스르는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 사람 안에 두 본성이 결국 공존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이 빛과 통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성을 받아들이려면 인성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버리고 신성을 선택하신 방법입니다. 요즘 인간의 통합에 대해 말하며 마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자아를 통합하면 해결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사람의 마음 안에 이 악한 것들이 나오는 원천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 어둠으로부터 탈출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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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노자의 공통점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노자는 자연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서 자연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늘의 새와 들의 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수고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먹이고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도 그렇게 해 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노자는 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움직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평평한 곳에서는 호수가 되고, 기울어진 곳에서는 흘러 넓은 바다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개울은 소리가 나지만 넓은 강물은 소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듣고, 왜 그렇게 했는지 묻지도 않고 먼저 단죄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짧은 시간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날까지, 우리는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은 교만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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