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5일 연중 제 4주 금요일
2021년 2월 5일 연중 제 4주 금요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가타 성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 동정으로 살았다. 아가타는 철저하게 동정을 지킨 나머지 그녀와 혼인하고 싶어 하던 지방 관리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데키우스 황제 박해 기간(249-251년)에 순교한 아가타 성녀에 대한 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전파되었다.
★★★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6,14-29)
King Herod heard about Jesus,
for his fame had become widespread,
and people were saying,
“John the Bapt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at is why mighty powers are at work in him.”
Others were saying, “He is Elijah”;
still others, “He is a prophet like any of the prophets.”
But when Herod learned of it, he said,
“It is John whom I beheaded. He has been raised u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구약의 구원 역사를 마무리하며, 신약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루카 16,16)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헤로데라는 권력자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참수를 당합니다. 이는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의 삶과 비슷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는 이사야의 선포를 수용합니다(마르 1,2-4 참조). 그 옛날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칩니다. 이사야와 세례자 요한은 삶의 마지막 모습도 닮았습니다. 이사야는 므나쎄 임금의 폭정을 거슬러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가 참수를 당하였고,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 임금에게 참수를 당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과 외침은 참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이나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약한 사람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기에 고려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생계에 대한 걱정, 돌보아야 하는 가족들,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얽히고설켜서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렇게 약한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예언자적 삶을 살아갈 수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들려오는 예언자적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요? 그 음성과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나를 변화시켜 봅시다. 나만을 위하고 나만을 향하였던 마음을 주님께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외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행복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언제 행복할까요? 어떤 이는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라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행복한 사람 옆에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그 밖에 많은 행복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자 로버트 에먼스와 에드 디너의 연구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한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삶에 대한 만족감, 둘째, 긍정적인 정서를 자주 느끼는 것, 셋째, 부정적인 정서를 적게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부정적인 정서를 줄이면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 좋은 점을 더 빨리, 그리고 자주 발견하는 사람은 삶에 대한 만족감도 올라가서 행복해집니다. 이 모든 조건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늘 외적인 조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나의 해결보다 외적인 해결을 바라보니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헤로데 임금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임금으로 권력의 힘이 막강했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모두 가진 것처럼 보이는 헤로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면서 불안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그에게 부정적인 정서가 가득하므로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왕실 가족의 타락한 윤리 형태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목이 잘리는 순교를 하게 된 이유에는 헤로데의 작은 맹세가 시작이었습니다.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작은 맹세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커다란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맹세도 다 들어줄 수 있다는 착각, 그 착각이 그를 큰 죄인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합니다. 단 한 번의 커다란 행복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소소한 긍정적 정서를 여러분 느끼는 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입니다.
물론 부정적 정서를 없애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긍정적 정서를 늘려서 부정적 정서를 흐리게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차가운 물에 뜨거운 물을 계속 부으면 차가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작은 죄도 범하지 않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함으로 무장한 사람만이 계속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합니다. 행복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행복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행복은 바라는 게 없는 상태’라고 말했나 봅니다.
커다란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피정을 다녀온 후 자기 전에 그날 있었던 행복 체험 한 가지를 반드시 적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울한 감정이 가득했을 때, 자신이 써왔던 행복 일기를 펼쳤지요. 그런데 이제까지 썼던 행복을 보면서 재미있는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썼던 행복이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상 안의 작은 기쁨들이 모여서 행복한 나를 만들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행복은 바라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다가오는 행복을 찾고 그 행복을 누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기 위해서는?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모세와 같은 예언자 등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헤로데는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요한을 대신해 보복할 것이라 믿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피해의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려고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자신이 그러면 남도 그런 줄 압니다.
나자렛 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그 공동체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욕구가 악이요 눈을 가리게 만들어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매슬로는 “망치를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망치를 내려놓기 전에는 그리스도 공동체까지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종교에 대해서 본다면 “모든 종교는 다 돈 벌려고 장사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돈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결국 구원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은 ‘욕망’입니다. 욕망에 휘둘리는 사람은 그 욕망을 채울 수 없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장애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눈이 멀어버립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도 이 욕망 때문입니다. 그는 요한을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 살려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헤로디아에 대한 욕정과 자존심이 요한을 죽이게 했습니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메시아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자기들 자존심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잔 다르크(1412-31)는 17살의 나이에 100년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을 종식한 주인공입니다. 신앙심이 두터운 잔 다르크는 13세 때 처음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 성인과 천사들을 봅니다. 성인들은 잔 다르크에게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있는 영국군을 물리치고 프랑스의 황태자를 전통 관례에 따라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우라는 사명을 줍니다.
글도 모르고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잔 다르크가 영국군을 몰아내고 한 사람을 국왕으로 앉히라는 사명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을 믿고 또 그렇게 했기에 교회에서 그녀가 받은 계시가 진짜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잔 다르크는 엄청난 성곽에서 소리치는 영국군을 직접 나서서 섬멸하고 영국군이 점령한 지역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프랑스에서 영국군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랭스에게 황제가 대관식을 하게 만듭니다. 군인은 물론이요, 모든 프랑스가 잔 다르크를 성녀로 추앙합니다.
마지막 남은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을 때 지원군이 필요했지만 새 황제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습니다. 황제가 되니 더는 잔 다르크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황제는 영국과의 화평을 원합니다. 영국은 잔 다르크를 사로잡아 프랑스에 큰돈을 받고 넘기려 했으나 프랑스는 거절합니다. 황제가 되기 전엔 잔 다르크의 계시를 믿는 듯했지만, 필요가 없어지자 토사구팽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영국의 패배를 안겨준 잔 다르크를 영국은 가만히 놔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형 죄목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잔 다르크는 자신의 칼로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습니다. 전술과 함께 사기를 북돋운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들과의 논쟁에서 하나도 밀리지 않습니다. 주교는 잔 다르크의 고해성사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종교보다 정치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합당한 죄목도 없이 헛된 환상에 사로잡힌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잔 다르크는 화형에 처합니다. 그때 나이 19세였습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나라에서도 버려졌고, 적국에서도 버려졌으며, 심지어 교회에서도 버려졌습니다. 무려 500년이 지나서야 그녀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잔 다르크는 정치에 그렇게 희생되었지만 100년이라는 긴 전쟁을 종식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린 소녀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러한 일을 하셨을 수밖에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하고,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고 합니다. 헤로데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각자의 욕망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처럼 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게 하고 그리스도와 참 교회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빼앗습니다.
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바오로처럼 하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빛으로 자신의 욕망이 불타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이들의 공동체에 머물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저도 처음엔 성당에 다니면서도 뱀의 욕구를 쫓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다 읽고는 닮고 싶은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책을 다 읽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닮고 싶어졌습니다. 이는 욕구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공동체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나의 뜻을 채워줄 도구로 보였던 것이고 이후에는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닮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동체로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나를 바꾸고 구원해 줄 공동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욕망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어둔 밤’의 길입니다. 나의 모든 욕망을 죽일 때 하늘의 빛이 보입니다. 그 빛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안내합니다. 나의 욕망들을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눈은 영원히 가려져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주객이 전도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인격과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외모와 재산을 보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성당 안에 제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당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많은 학원을 다닙니다. 피아노 학원, 태권도 도장, 영어 학원을 다닙니다. 좋은 선생님을 모시고 가정에서 배우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교리를 배우고, 성인전을 읽고, 기도하고, 미사 참례하는 것을 가르치는 데는 소홀 한 것 같습니다. 물은 “H2O"라고 배우면서 물이 가지는 의미가 상업적으로 퇴색되는 것 같습니다. 물은 공업용수, 지하수, 상업용수, 하수, 상수, 생수와 같이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물은 단순히 사고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은 신앙 안에서도 성사를 드러내는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은 정화의 상징에서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의 물은 눈먼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물 위를 걷고, 폭풍을 잔잔하게 하는 모습은 두려움을 이기는 주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물은 사랑과 나눔 그리고 진정한 섬김을 보여 줍니다. 성체성사의 성혈을 이루는 포도주와 물은 하느님 안으로 일치되는 모든 피조물의 희망을 드러내고, 세례성사의 물과 성령을 통해서 인간은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객이 전도 되었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는 안식일이라는 ‘틀’에 사람들을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세리, 창녀, 병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도 하십니다. 주인이 보낸 하인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외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소작인의 본분을 망각하였습니다. 주인은 돌아와서 포도원을 다른 소작인에게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 병자들을 고치는 일, 마귀 들린 이를 치유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교회의 조직이 커지면서 다른 일들이 생겼습니다. 음식을 나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 교회를 운영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였고, 협조자를 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나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 교회를 운영하는 일은 선발된 ‘부제’들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사도들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결정과 선택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같아야 합니다. 교회 본연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일,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아픈 이들을 고치 일, 영적으로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일입니다. 이는 교회의 재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 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신산(辛酸)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삶,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양승국신부-
참혹하고 을씨년스러웠지만 장엄하고 당당했던 세례자 요한의 일몰을 묵상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사악한 복수의 화신 헤로디아의 희생양이 됩니다. 한때 그리도 각광받던 그였는데, 어둡고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힙니다.
그것도 모자라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생일날 노리갯감으로 전락합니다.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의 목은 잘려져 쟁반 위에 담겨집니다. 쟁반 위에 담겨진 그의 머리는 헤로디아 앞으로 배달됩니다. 그의 머리를 보고 깔깔대며 희희낙락했을 헤로디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의인 중에 의인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이 끔찍하고 고통스런 최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정도입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어쩌면 곧 뒤따라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이자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안에는 더 억울하고 더 천부당만부당한 예수님의 죽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억울한 죽음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계속됩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박해와 십자가 길, 그리고 억울한 죽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죄한 이들과 선인(善人)들의 고통과 시련은 또 어떻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면 참으로 이해가지 않는 측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악이란 악은 다 저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잘못한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들, 이웃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초가 참혹할 정도입니다. 이토록 공정하지 못한 현실을 신앙인으로서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까?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구약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예언자이자 예언자중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마지막 대예언자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덧없는 죽음입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예언자로서의 삶과 죽음의 본모습인 듯합니다. 쓸쓸하고 아쉽고 드러나지 않는 삶과 죽음,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빛내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삶과 죽음이 곧 예언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신산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그것이 참 예언자로서의 삶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이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항상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또 다른 예언자들인 사제들과 수도자들, 선구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보다 가난해지도록 그들이 좀 더 고독해지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그들이 갖출 것 안 갖출 것 다 갖추고 떵떵거리며 산다면, 그것처럼 예언자로서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로 산다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박해받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일, 사회 정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는 일, 남들이 마다하는 선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일,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일, 그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제대로 된 예언자의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랜 역사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참 신앙인의 길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를 뛰어넘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손해 보는 삶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언자의 길이요 의인의 길입니다.

목을 벤 그 요한이 되 살아났구나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다른 한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 줍니다.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
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박혀서도 있어도 침묵으로 외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이제 우리도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
주님!
뼈 속에 새겨져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진실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힘으로 짓눌러 가라앉힐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목이 베여도 결코 베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헛된 맹세를 하지마라
-반영억신부-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살고,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산답니다. 여자는 쉽게 감동하기에 그렇고 남자는 자존심을 세워주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건 맹세를 함부로 할 것은 아닙니다.
헤로데 왕은 요한이라는 인물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습니다(마르6,20). 그런데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왕은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6,25).하고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혹스런 일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이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의 노예가 되어 그 앙갚음의 기회를 딸을 통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약속한 것이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르6,26). 그래서 결국은 요한의 목을 베게 되었습니다.
의인의 목숨과 자존심을 건 헛된 맹세에서 하나를 선택했거늘 그 놈의 자존심이 뭔지? 체면이 뭔지?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다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만(야고5,12)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의로운 일에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떻고 체면이 좀 손상되면 어떻습니까? 요한과 헤로데,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죽어가는 한 예언자의 모습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의롭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헤로데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불안감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혹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둔 무엇인가가 있어 불안하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그 불안을 해소하기 바랍니다. 매듭은 풀어야 합니다. 풀지 않고 놔두면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3).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꿋꿋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위신, 체면을 지켜야 할 때 지키십시오!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때 내세우십시오! 그리고 헛것인줄 알았으면 곧 버리십시오! 서둘러 버리십시오! 정말로 승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고 패배한 사람은 헤로데임을 잊지 마십시오.
헤로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한을 남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 왔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미리 닦는 선구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송영진신부-
복음서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인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왜 죽었는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했고, 바로 그 ‘회개 선포’ 때문에 죽었습니다.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혼인 문제를
비판하다가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만일에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왕의 사생활을 비판하다가 왕과 왕비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살해당한 것으로,
그래서 요한의 죽음을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 전체’를 보면,
요한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당시의 권력층과 기득권층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결국 살해당했고, 그래서 그의 죽음은 공적인 일이고 ‘순교’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당시의 권력층과 기득권층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요한이 한 말은, “형식적인 회개를 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는
진짜 회개를 하여라.” 라는 뜻인데,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은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아주 대단히 엄하게 꾸짖는 말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은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요한에게 반감을 품고,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또 루카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라고 말했고,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라고 말했습니다(루카 3,12-14).
복음서에는 세리들과 군사들이 먼저 요한에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요한이 한 말들을 ‘권고’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요한의 말만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당시의 권력층 사람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꾸짖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경우에도, 세리들과 군사들 가운데에는 세례자 요한이 말한 대로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회개를 거부하고 요한을 싫어하고 미워한
세리들과 군사들(권력층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을 때에도,
또 요한을 죽였을 때에도, 당시의 여론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한을 예언자로 믿은 사람들은,
슬퍼하고 분노했겠지만 헤로데의 권력이 무서워서 침묵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을 예언자로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은 사람들은,
특히 권력층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헤로데의 살인을 방관했거나 동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그 살인의 공범들입니다.)
혹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나 또는 주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왕은(권력층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그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일반 백성들에게만 하느님 말씀을 전하라고 충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예언자로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세례자 요한의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예레 20,11).”
세례자 요한의 심정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마르 6,14.16).”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마르 6,17-21ㄱ).”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뒤의 헤로데의 행동들을 보면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루카복음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헤로데는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루카 23,8).
그리고 마르코복음에는 헤로디아만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해 준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헤로디아가 백성의 여론을 살피지도 않고
성급하게 요한을 죽이려고 한 것을 막은 것뿐입니다(마태 14,5).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은
처음부터 헤로데의(권력층 사람들과 기득권층 사람들의) 계획이었습니다.
복음서의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의 뜻은,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백성의 여론이 두려워서
헤로디아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입니다.
“좋은 기회가 왔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
라는 뜻이고, 그 기회는 헤로데 자신이 기다렸던 기회입니다.

복음: 마르 6,14-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조욱현신부-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16절) 예수님의 명성과 업적의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이제는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당황한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다. 그는 부정한 죄를 지었고 그것을 계속 지적한 요한을 죽인 것까지 항상 마음에 부담이 있는데 예수님의 소문은 그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헤로데가 혼인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을 보고, 광장에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8절) 하고 외쳤다. 우리는 동료들도 똑같이 꾸짖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에게서 배운다. 충고는 우리의 의무이다.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귀하고만 상관없지, 모두 같은 축복을 받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헤로데는 꾸짖음을 들으면서도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고 한다.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겠다.”(23절)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잔치가 열리고,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 왕비의 딸을 불러와 춤을 추게 한다. 그 딸이 간통한 어머니에게서 무엇을 배웠겠는가? 헤로데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맹세인가? 헤로데는 소녀의 춤 한판에 왕국을 넘겨줄 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어린 소녀의 춤 한판에 자기 영혼을 넘겨주고 있지 않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25절)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겼다. 여인은 헤로데가 거룩하고 의롭다고 여기던 사람에게 손을 대게 했다. 자신의 음행을 다스리려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진절머리를 치며 내쳤어야 할 간통한 여인을 갈망한 까닭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물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피를 보고 말았다. 헤로데가 괴로워한 것은 참회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뿐이다. ‘손님들’ 때문이다.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28절) 헤로데는 자기 혀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주자, 그 여자는 심판관을 살해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말려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우리 자신이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 16)
-한상우신부-
하느님을
새까맣게
잊고사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을
잊고살기에
올바른 삶의
길을
잃어버렸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다.
오고
가는 것이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사람을
오히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아픈
살인의
역사이다.
누구나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람이
가야할 길이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양심의 길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을 고치는
것에서
사람은 사람이
되어간다.
세례자 요한같이
우리또한
올바른
삶의 길을
걸어가야한다.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정신과
신앙은 결코
죽일 수 없다.
인간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다시금 묻게된다.
사악한 인간의
모습은
정화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같은
빛의 사람이
많아지길
기도한다.
하느님과 사람
하늘과 땅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길은
착한 삶을
우리가
사는 것이다.
살인의
이야기가 아닌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복음의 이야기를
원하신다.
사악함과
괴롭힘
살인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너무나
안타까운
우리 사회의
아픈 죽음들을
위해 기도드린다.
세례자 요한의
희생이
변화와
쇄신의
봄날 같은
희망임을
믿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독서 내용이 복음 내용을 설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마르 6,18)
헤로데와 요한과의 관계는 미묘합니다. 권력자와 예언자의 관계이니 그다지 속 편한 사이는 아니겠지요. 그래도 어느 면에서는 헤로데가 요한을 인정하고 존중했다고 복음사가가 전합니다.(마르 6,20 참조)
요한은 헤로데의 과실을 지적하고 바로잡도록 진언합니다. 제1독서인 히브리서에 언급된 불륜과 간음에 대한 경고가 이를 뒷받침하지요.(히브 13,4) 그래서 불륜의 당사자 중 하나인 헤로디아에게 요한은 눈엣가시였습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히브 13,1)
어쩌면 요한은 헤로데에게 지치지 않고 형제애를 실천한 것일 겁니다.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군주로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위험을 무릅쓰고 진언을 했을 테니까요. 진정한 형제애는 상대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을 하지 않고, 상대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존재가 되길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마르 6,24)
요한의 목숨이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환산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극적이고 불의하게 흘러가는 복음 속 사건 안에서 요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히브 13,6; 시편 118,6)
이 시편 저자의 고백이 곧 세례자 요한의 마음이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순교자 아가타 성녀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웠다면 걷지 않았을 길에 들어서서, 끝까지 신의를 지켜 용감히 그 길을 완수한 이들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 13,8)
그들은 지상의 삶이 끝이 아님을 알기에, 영원한 삶의 주인이신 분께 몸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히브 13,7)
이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고 권고하며, 역사 안에서 충실히 주님을 증거한 이들을 본받으라고 촉구합니다.
증거자들의 삶과 죽음이 때로 세상 눈에 어이없고 허무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바보도 아니고 딱히 모자라지도 않는 이들이 왜 세속 원리에 야합하지 않고 굳이 험한 길을 택하는지 믿음이 없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대다수의 순교자, 증거자들이 입으로 외치기보다 삶과 죽음으로써 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한 이에게는 영원히 낯설고 거북할 겁니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
헤로데는 예수님의 출현에 요한을 떠올렸지요. 착각에서 나온 틀린 말이었지만, 교회 역사 안에서 무수한 요한이, 무수한 제2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피로 믿음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왔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은 그렇게 이어져왔고 또 앞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삶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소용돌이와 고갯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평판과 지위가 없어도, 세속의 눈에 낯설고 거북해 보여도, 우리가 들어선 이 길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신 그리스도의 품으로 이어지니 힘 내어 우리의 믿음을 채워갑시다. 이 길에서 서로 힘을 주고받는 우리가 있어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짧은 행복론
-김찬선신부-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
'자신이 원하는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과
여유로움을 느끼는 상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전의 정의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듯이 행복이란 만족의 상태임을
알 수 있는데 만족이란 욕구나 욕망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짧게 만족이니 불만이니 하지만 사실 이것은
욕구 만족 또는 욕구 불만의 준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행복-만족-욕구/욕망의 세 관계가 밀접하고,
그래서 경제학자 폴 사무엘슨이라는 사람이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렸을 때
행복이란 욕망분의 소유, 곧 행복=소유/욕망이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욕구 또는 욕망하는 것을 다 소유하면 100% 만족이고,
욕망하는 것을 90%만 소유하면 90%의 만족이요 10% 불만이며
욕구하는 것을 50%만 소유하면 50%의 만족이요 50의 불만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90%의 만족인 사람이 나는 90% 만족하다고 하며 행복할까요?
아니면 10%의 결핍을 아쉬워하며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할까요?
여기서 욕심과 비움의 문제가 다시 대두됩니다.
인간이 욕구하는 것에 결핍이 있을 때 그것을 소유하고픈 욕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욕망이 생겼을 때 그것을 채울 것이냐 말 것이냐
우리가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해야 하는데 그 욕망을 끝내 채워야겠다고
의지가 동의하는 것 곧 욕심이 문제인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가지고 싶은 것의 90%만 가졌지만
이것으로 만족하자고 이성이 욕망을 달래고 의지가 욕망을 포기하면
그것으로 그는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지만
끝내 내가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져야겠다고 욕심을 부리면
욕구의 불만보다 더 큰 불만이 생길 것이고 그래서 더 불행할 것입니다.
물 반 잔의 행불행 얘기가 바로 좋은 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 곧 물잔이 다 차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물잔의 반만 채워져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때 반 잔밖에 없다고 불만인 사람은 불행하고,
반 잔이나 남았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행복하겠지요.
100%를 욕심부리는 사람은 100에서 1만 부족해도 불만일 것이고,
0%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은 0에서 5만 더 가져도 만족이고 행복이지요.
옛날 너무도 가난하여 피죽이라도 한 그릇 있으면 만족할 정도로
우리 욕망의 그릇이 작을 때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었는데
요즘 우리 욕망의 그릇은 커질대로 커지고, 그 큰 욕망을 다 채우려고
욕심부리는데 그 큰 욕심은 채울 수 없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욕심을 채우면 더 큰 욕심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히브리서가 욕심부리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은 이와 같은 뜻 그러니까 심리/윤리학적인 차원의 가르침입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가르침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니 이것으로 만족하고 다른 욕심 부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심리학에서도 얘기하는 바이지만 소유와 사랑 중에서 어떤 것이
우리를 더 만족케 하느냐 하면 사랑이 더 크고 완전한 만족을 주지요.
우리가 사랑을 잃을 때 다른 것의 소유로 대리 만족하는 것인데
사랑 중에서도 하느님 사랑이 가장 완전한 만족이라고 우리는 믿지요.
그래서 끝으로 제가 사랑하는 성가 32번 가사 중 일부를 같이 나누며
오른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산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되리.
사랑의 주 예수 홀로 모시고 영원히 여기서 살고지고.
사랑의 주 예수 홀로 모시고 영원히 여기서 살고지고.
헛되이 지나는 이 세상 영화 주님을 위하여 다 버리리.
참 평화 누리는 나의 영혼은 다른 것 욕심낼 여지없네.
참 평화 누리는 나의 영혼은 다른 것 욕심낼 여지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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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