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2. 3. 08:59

2021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르6,1-6)

 

They said, “Where did this man get all this? 
What kind of wisdom has been given him? 
What mighty deeds are wrought by his hands! 
Is he not the carpenter, the son of Mary,
and the brother of James and Joseph and Judas and Simon? 
And are not his sisters here with us?”

And they took offense at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마르코 복음서는 그 장엄한 시작을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 마르코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예수님의 참된 신원은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각이 언급됩니다.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 이것은 나자렛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기는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시각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상반된 두 관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과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의 긴장이 오늘 복음에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께서는 그저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였을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는 다른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마르 1,22 참조), 예수님을 훌륭한 분으로 인정합니다(마르 7,37 참조).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시각이 매우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하여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만, 반대로 목수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하느님의 아드님? 아니면, 나자렛 출신 목수? 그분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를 향한 그분의 행위를 결정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독일의 철학자인 스베냐 플라스펠러는 그의 책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하는 동시에 눈을 뜨게 한다.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한 인간을, 혹은 한 대상을 그토록 자세히 관찰하게 만든단 말인가?”

정말로 한 인간 또는 한 대상을 오랫동안 자세히 관찰하게 만드는 힘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계속 보고 싶어지고, 계속 함께하고 싶습니다. 또 계속 말을 걸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 모든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도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얼마나 주님이 보고 싶고 함께 하고 싶었습니까? 또 기도를 통해 계속해서 말을 걸고 싶었습니까?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것들이 보고 싶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과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까? 또 기도하기를 힘들어하고 대신 세상과 소통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은 주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고향에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지요. 고향 사람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라면서 의심합니다. 예수님의 집안을 잘 알고 있으므로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기적을 마치 사기꾼의 행동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었던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 부정하려고만 합니다. 예수님을 보려 하지도 않고, 예수님과 함께하려고도 않으며, 예수님과 말을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모두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됩니다. 의심과 미움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 안에서만 예수님을 알아뵐 수 있으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님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으며,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 멀리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홀로 설 수 없다. 스스로 사랑을 채우고 이를 베푸는 것, 그때 사랑이 사랑답고 세상은 아름답다(발타자르 그라시안).

사랑해야 커다란 성장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전에 수영장 다녔을 때가 생각납니다. 매일 새벽마다 수영장을 다니면서 수영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을 때였지요.

어느 날, 새로운 회원 두 명이 왔습니다. 실력은 둘이 비슷한 것 같은데 성격은 너무 달랐습니다. 한 명은 잘하지 못해도 자신 있게 합니다. 그러면서 강사에게 “잘했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수영을 아주 부끄러워합니다. 그래서 강사에게 자기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더군요. 어쩌다 강사가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잘하던 영법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 둘 중에서 누가 더 수영 실력이 늘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지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자신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이 아닐까요? 자신을 사랑해야 커다란 성장도 이룰 수 있습니다.

 "너를 안다" 라는 말은 "너를 무시해"라는 뜻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방식은 ‘안다’라는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유년기와 가족 등을 다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다고 말할 때 이미 모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하고 그 고을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다라는 말은 “더는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는 것을 믿고 희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 누군가를 창조했다는 뜻입니다. 스마트폰을 아는 것은 다른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 스마트폰을 만든 당사자뿐입니다. 스마트폰끼리 서로 상대를 안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개와 고양이가 서로 상대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선 얼마나 웃길까요? 우리는 결코 남을 안다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만이 그 사람을 가두고 그 사람과의 더 친밀관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전에 말씀드린 예화지만 이 내용과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기에 한 번 더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이후 토마스가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혼자 야근을 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정말 성실한 친구네. 이렇게 열심히 일해주어서 고맙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자네 좋아하는 사람 있는가?”

“예? 아, 예. 한 명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요.”

“그렇군, 혹시 존경하는 이유가 있나?”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 그렇다면 임무를 주겠네. 오늘부터 길을 걷거나, 일하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라는 말을 500번 반복하게.”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한 번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가슴이 북받쳐 눈물이 났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지역 최고의 부동산 중개인이자 비즈니스맨이 되었습니다. 목표를 이룬 지금은 ‘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을 쉼 없이 반복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당신의 인생을 180도 뒤집는 방법’,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락 토마스에게 “난 널 알아.”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넌 뭐든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던 직장 상사 중 누가 토마스를 진정으로 안 사람일까요? 토마스를 안다고 규정하지 않은 직장 상사입니다. 안다고 할 때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고 할 때 아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우주에 관한 책을 본 기억이 납니다. 아주 어렸을 때라 광활한 우주의 흑백 사진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우주의 끝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답은 “모르겠다.”였습니다. 우주도 하나의 물체인데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이 우주보다 더 신비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주도 모르는데 한 인간을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안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한 더 이상의 믿음이나 희망, 더 나아가 사랑이 커질 수 없습니다. 믿음과 희망, 사랑은 그 사람을 마치 새장에서 밖으로 새를 풀어놓는 것처럼 내가 그 사람을 규정하지 않을 때 훨훨 날아가 더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백종원 씨하면 떠오르는 것이 ‘설탕’이었고, 음식이 맵고 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입관이 있는 사람들은 골목 식당에서 그의 레시피와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손님이 떨어지고 장사가 안되며 그 탓을 백종원 씨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백종원 씨는 남이 자신을 안다고 할 때 거기에 갇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규정하는 사람만 피해를 봅니다. 절대 내가 인간을 안다고 규정하여 그 인간을 안 하느님까지 안다고 규정하는 교만의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 하느님까지도 내가 만들어낸 한계에 가둬버릴 수 있습니다.

 

      또 남이 나를 안다고 말할 때 그 말에 갇히지 맙시다. “당신이 나를 만들었습니까?”라고 반문하십시오. 나를 아시는 분은 나를 만드신 하느님뿐입니다. 나를 안다고 나를 규정하는 사람을 벗어나야 하늘 높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존재입니다.

 

      사람을 모른다고 할 때 그 사람을 만든 하느님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믿고 희망할 수 있게 되며 그래야 사랑이 증가합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는 자신도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남도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조재형신부-


필귀정, 인과응보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옵니다. 비가 내리면 땅은 젖습니다. 산이 있으면 계곡이 있습니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갑니다. 사람도 이런 자연의 섭리를 따라서 삶의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십계명이 있고, 법전이 있습니다. 삼강오륜이 있고, 도덕이 있습니다. 공동체는 이런 질서에 의해서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제가 다니던 신학교에도 엄격한 내규가 있었습니다. 사제는 학문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는 균형 잡힌 생활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아침기도, 미사, 양심성찰, 묵주기도, 저녁기도는 기본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매일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3년이면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서를 벗어나는 경우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지난 1월 6일입니다. 미국 국회의사당에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대통령을 확정 짓는 회의를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이 사망하고, 다쳤습니다. 선거의 결과에 불복하고 계속 대통령을 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대통령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0년 전에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정치군인들이 욕심 때문에 국민들에게 무력을 사용하였습니다. 권력을 잡으려는 욕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다쳤습니다. 신학교에도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것도 가지고 싶고, 성직자의 길도 가고 싶은 학생입니다. 그런 학생은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다른 학생들의 영적인 성장을 방해합니다. 학교는 부득이하지만 그런 학생들을 내규에 따라서 다른 길로 안내합니다.

 

두 번째는 ‘사랑’ 때문입니다. 몰로카이의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들과 지내면서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손 씻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스크도 쓰지 않았습니다. 함께 식사하였고, 미사하였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하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다미안 신부님을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신부님에게서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교황님은 꿈에서 쓰러져가는 교회를 온 몸으로 막고 있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프란치스코 성인이었다고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는 1년 사목을 하였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욕심 때문에 사필귀정과 인과응보의 질서를 어긴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채찍을 드실 겁니다. 그렇게 해야만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어도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던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였고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교회를 박해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회개하였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우리가 뉘우치기만 한다면, 우리가 용서를 청한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품어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 때문에 사필귀정과 인과응보의 질서를 벗어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고난과 고통을 얻을지라도 험난함은 거름이 되어 천상에서 아름답게 피어날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높은 첨탑의 건물을 세웠습니다. 제도와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2000년 교회의 힘은 건물, 제도, 조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2000년 교회의 힘은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거룩한 사람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사랑 때문에 원수를 용서했던 진실한 사람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목숨을 바친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서 부활의 꽃이 피었습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양승국신부-

 

갑작스레 다가온 시련의 높은 파도에 힘겨워하는 오늘 우리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의 한 마디를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십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히브리서 12장 7~11절)

  

시련의 강도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다면, 신학자 클로델의 말씀을 묵상해보도록 추천해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치워버리려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분은 당신 사랑의 현존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고통을 제거하지는 않으셨지만, 고통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우리 삶에서 눈물을 없애지는 않으셨지만,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심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유형의 고통이 모두 획일적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겪는 다양한 고통의 원인을 찾아 나가다보면, 의외로 우리 인간 측의 과오나 악습으로 인한 고통, 즉 예방 가능한 고통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운전을 난폭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난폭 운전은 노력하면 충분히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남의 말 절대 듣지 않습니다. 과속은 기본이고 불법 유턴은 특기입니다. 동승한 사람들이 깜짝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정도입니다. 

 

그러다 대형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겨우 목숨만 건지는 중상을 입고 투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목숨 건진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며,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말 입에 달고 살아도 부족할터인데, 한다는 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우리가 겪는 많은 고통은 인간 측의 과욕이나 나쁜 습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불을 보듯이 뻔히 예상되는 고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어떤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아무런 잘못도 안했는데, 난데없이, 갑자기, 이유 없이 다가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십자가, 신비의 십자가입니다. 신앙으로 하느님 안에서 견디는 것이 상책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고통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불필요한 고통을 양산할 뿐입니다. 고통, 그 자체가 주는 괴로움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고통이 뜻하는 의미, 해결방안, 기능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 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보내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그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히 노력하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묵시 3,19-20).

  

십자가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강도 높은 애정표현입니다.

  

“여러분이 겪는 시련은 모두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시련들입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1 고린 10, 12-13).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

 

이처럼, 그들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잘못된 믿음, 곧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믿게 되면, 참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금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의 표현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줍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안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동시에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

 -반영억신부-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이 있으면 볼 것을 보지 못합니다.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한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능력을 얻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 판단력과 방향 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대수롭지 않은 목수라는 것,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자기들보다 별로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고향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고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 내 마음대로, 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 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1) 나자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그는 메시아가 아니다.”

(‘잘 알고 있다.’는 그 생각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진짜 메시아라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몰라야 하는데,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서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한데,

어떻든 그들은 예수님을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 7,28-).”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자렛의 목수라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를 바란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는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라는 교만은 언제나 신앙의 걸림돌이 됩니다.

욥기의 끝부분을 보면,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 42,3-).”

(신앙은 학문 연구가 아니라, ‘삶’입니다.

절대자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라는 것을 깨닫는 ‘깨달음’입니다.)

 

2) 나자렛 사람들은 원래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을

멸시하고 천대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의 말에서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라는 말과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에 대한 멸시와 천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나자렛 사람들 자신들도 그런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당시에 남부 유다 지역 사람들은

북부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을 멸시하고 천대했습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요한 7,41)”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사도행전을 보면, 최고의회 의원들이 사도들을 무시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 4,13).”

또 요한복음에는 최고의회 의원들과 바리사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7-49).”

당시의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나자렛 사람들이 가난한 목수 예수님을

멸시하고 천대한 일 자체는 이상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출신 지역, 직업, 학력, 인종 등을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멸시하고 천대하는 일이 흔히 있는데,

그것은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3) 나자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예수님이

‘지혜의 말씀’을 하시는 것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에 대해서 놀라는데,

그들의 ‘놀람’은 좋은 뜻이 아니라, ‘시기, 질투’를 나타냅니다.

(“목수는 목수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가?”가

그들의 생각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또 예수님의 직업만 보고 멸시하고 천대했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적을 기적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기 질투 때문에 눈이 멀어서

자기들에게 내리는 은총을 알아보지 못했고,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처럼 은총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시기 질투는 단순한 죄가 아니라,

하느님을 거스르고 자기 자신의 구원도 방해하는 큰 죄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에 대한 시기 질투 때문에 국가도 망치고

자기도 망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어서

예수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은, ‘일으킬 기회가 없었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라는 말은, “그들이 믿지 않아서

은총을 주어도 받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은총을 청하지 않으니, 은총을 줄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 주신 것이 아니라, 주셨는데도 사람들이 받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었고, 그들은 예수님께 간청해서

치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복음: 마르 6,1-6: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그 마을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30km 떨어진 곳으로 인물다운 인물을 내지 못한 고장이었다(요한 1,46 참조).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2-3절). 예수님의 업적에 대해서 그 기적들과 가르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즉 하느님인가 인간인가? (11,30 참조) 혹은 사탄인가? (3,22 참조).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사이에 장인으로 통했다. 목수, 미장이, 석공, 대장장이 일을 두루 다 하신 기술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절)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살아가지 않도록 이러한 상징들을 통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 나자렛에서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6절 참조). 치유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치유하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상대방이 없으면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 그분의 은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한 예언자들과 당신을 비교하시면서(4절) 당신 자신도 결국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적이란 신앙이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다.”(5절)는 것은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은총은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더 힘차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불신조차 이겨 내셨다는 뜻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 내적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좀 더 이웃의 장점을, 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 4)

-한상우신부-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차갑고도
잔인한 것이

우리들
선입견과
편견의
마음이다.

얄팍한 우리들
인간관계를
다시금
성찰한다.

자기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모두의
솔직한
바람이다.

그 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사랑과 인정에
너무나 인색한
우리들 삶이다.

그 누구도
한 사람을
선입견의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

그 사람의
상황이 되어
보지않고서는

그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상처와 약점은
우리모두의
보편적
공통분모이다.

가능성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우리자신이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복음의 참된
기쁨이다.

선입견의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예수님께서는
버려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소중한 인격을
조정하고
조작한다.

소중한
너가 있기에
소중한 내가
있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린다.

한 명의
인격체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실천임을 믿는다.

예언직의 삶이란
아는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삶이다.

그래서
사람의 가치를
높아지게 한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앎과 거룩함과의 관계를 이야기하십니다.

-오상선신부-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마르 6,2)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서 가르치시자 사람들이 놀랍니다. 보통 놀라움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움 앞에서 인간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입니다.

놀라움은 사람을 하느님과 더 가깝게 하기도 하고 반대로 더 멀어지게 하기도 하지요.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생명과 인연과 사건과 성장에 늘 감탄하며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있고, 선입견이나 편견을 고수하기 위해 새로움을 비정상이나 오류 내지는 비논리로 치부해 무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나자렛 사람들의 놀라움은 전자보다는 후자로 흘렀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출생부터 직업과 가족관계까지 훤히 꿰고 있으니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서 드러나는 거룩함, 즉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게지요.  

제1독서에서는 앎과 거룩함이 어떤 관계인지 이야기합니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브 12,14)

이중 부정으로 표현한 이 문장을 긍정문으로 뒤집어 보면, "거룩한 이는 모두 주님을 뵐 것입니다."가 되겠지요. '본다'(see)는 것은 '안다'(see)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이는 주님을 압니다. 세속의 얕은 지식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압니다.

주님 백성의 거룩함은 그분과의 관계에 기인합니다. 제도 안에서나 영 안에서 주님께 속한 이, 세상 일에 파묻혀 눈앞의 이익만 보고 달리지 않고 주님의 일을 우선하는 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 뜻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이, 사랑이신 주님을 따라 사랑에 투신하는 이, 삶의 이유와 목적이 주님인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균형을 잡고 살아간다는 것은 세속의 원리와 거룩함이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며 서로를 범람시켜 뒤덮지 않고, 한쪽을 질식시키지도 않는 조화의 상태입니다. 분열이나 위선이 아닌 식별과 질서의 상태지요. 그런데 사실 말처럼 쉽지는 않은 듯하지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오늘 나자렛 사람들이 걸려넘어진 지점이 바로 이곳이지요.*** 자기들이 인간적으로, 세속적으로 안다고 여기는 정보들이 오히려 그들을 은총에서 떼어놓고 말았으니까요. 그들의 선입견과 편견, 거부와 배척에 놀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실 수 없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서운하고 괘씸해서 도와주지 않으신 게 아니라, 믿지 않는 그들이 바라지도 청하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으셨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히브 12,15)

히브리서 저자의 이 당부는 이천 년 전 나자렛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습니다. 기껏 은총으로 부르심을 받아 주님과 특별한 관계로 초대를 받고서도, 제도나 신분에 안주해서, 욕망에 몰두하느라, 자아와 일과 재물이라는 우상에 깊이 얽매여서, 회개를 촉구하는 새로움이 낯설고 귀찮고 두려워서 내내 주님과 거리를 두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친밀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이들은 시련과 고통조차도 훈육으로 여겨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고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보고 안다고 하는 모든 것이 주님께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지혜인지, 주님을 피하게 만드는 편견인지 잘 식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알기에 거룩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께 대한 진정한 앎이 우리 삶을 사랑으로 활짝 꽃 피워줄 것입니다. 보고 듣고 알고 믿고 사랑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줍니다. 아멘.

 매든 채찍질이든 하느님께서 주시는 거면

 -김찬선신부-


어제 저는 이렇게 강론을 마쳤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련하실 겁니다.

그러나 정련의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말씀으로 정련되지 않으면

고통으로 정련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모도 말로 고쳐지지 않으면

매로 고쳐주시는데 마치 그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어렸을 때 말을 잘 듣지 않는 자녀에게 부모가 흔히 하는 말이

'너는 꼭 매를 들어야 말을 듣느냐?'이지요.

 

그렇습니다.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매를 들어야 말을 듣는 것은 아직 미성숙하고 아이 상태인 것이고,

두 말 할 필요 없이 한 번만 말해도 들으면 그만큼 성숙한 것이며,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실천하면 그만큼 더 성숙하다고 하겠지요.

 

성숙과 미성숙의 또 다른 차원이 매에 대한 이해의 차이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얘기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거라면 매는 사랑인데

미성숙한 사람은 매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지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어찌 모릅니까?

특히 우리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귀가 따갑게 들었는데.

 

그런데 그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귀로 알 수 있는 거라면 벌써 알았어야 하지요.

 

그러므로 그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이고,

자기 안의 미움이 모든 사랑 체험을 불가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자기 안에 미움이 가득한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치 못하기

때문이요 교만이 이상적이지 않은 자신을 용납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진정 성숙하다면 하느님의 매는 사랑이라는 것을 머리로

알뿐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믿을 때 성숙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하느님의 매는 우리의 죄와 잘못을 멈추게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을 나의 탓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여기지 않고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매라는 것을 알아챈다면

하느님께서 매를 대신 이유를 찾아내고 그것을 멈춰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매는 죄와 잘못을 멈추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게하는 채칙질의 의미가 더 큽니다.

 

그래서 옛날 번역은 매라고 번역한 것을 이번 번역은 채찍질이라고 했지요.

매가 잘못을 가르치는 면이 크다면 채찍질은 나아가게 하고 달리게 하지요.

주마가편走馬加鞭, 곧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는 표현이 딱 이런 뜻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다면 내게 시련이 닥칠 때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지 말고 다시 일어서라는 말씀,

일어나 어서 달리라는 격려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2월 6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마르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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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방식은 ‘안다’라는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유년기와 가족 등을 다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안다라는 말은 “더는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는 것을 믿고 희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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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자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그는 메시아가 아니다.”

(‘잘 알고 있다.’는 그 생각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진짜 메시아라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몰라야 하는데,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라는 교만은 언제나 신앙의 걸림돌이 됩니다.

욥기의 끝부분을 보면,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 42,3-).”

(신앙은 학문 연구가 아니라, ‘삶’입니다.

절대자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라는 것을 깨닫는 ‘깨달음’입니다.)

그들은 시기 질투 때문에 눈이 멀어서

자기들에게 내리는 은총을 알아보지 못했고,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처럼 은총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시기 질투는 단순한 죄가 아니라,

하느님을 거스르고 자기 자신의 구원도 방해하는 큰 죄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에 대한 시기 질투 때문에 국가도 망치고

자기도 망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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