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2021년 1월 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은 바오로 사도의 제자요 선교 활동의 협력자였다. 티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티토는 크레타 교회를 맡아 돌보았다. 바오로 사도는 그의 서간 여러 곳에서 이들을 칭찬하고 있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둘째 서간’과 ‘티토에게 보낸 서간’에는 성직자와 신자들의 지침에 도움이 되는 권고가 많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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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 10,1-9)
"The harvest is rich, but the workers are few.
So you must ask the Lord of the harvest
to send workers to his harve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그 어떤 물질적인 유산보다 값지고 가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인 오늘 독서에서,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신앙의 유산인 믿음이 티모테오에게도 전수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신앙은 다른 이에게서 전해 받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듣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로마 10,17 참조).
우리는 험난한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신앙을 전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큰 유산을 자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정에서 배웁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신앙의 공동체며, 가장 중요한 교육의 공동체기도 합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 안에 ‘진실한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위선이 없는 믿음’, ‘진리의 정신 안에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티모테오가 이 믿음을 잘 간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사란 티모테오가 받은 사목 직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직무를 위하여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하는 것은 세례를 하나의 자격증이나 천국으로 가는 통행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교리와 신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특히 우리 가정 안에서 전수될 것이며, 이것은 가장 큰 선교며 우리의 의무고 우리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그렇다면 지금 성장기에 있는 아이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쉴 틈 없이 학원에 다니게 하고, 직장에서 원한다는 스펙 쌓기에만 온 힘을 기울여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먼저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쌓을 수 있도록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실제로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이 생기게 된 후에 공부하는 것과 무작정 시키는 공부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우선 성장 속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공부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이로써 공부가 더 재미있게 됩니다.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과 억지로 공부하는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아마 누구나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다른 아이에게 자기 자녀가 뒤처질까 봐, 남들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체성도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 공부만 시키는 부모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식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특별한 능력이나 재주가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또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지요. 그런 제자를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셨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또 잠을 자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에 파견하면서 아무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마음이라고 하면서도,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한다면서도 아무것도 마련해 주지 않으시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파견된 세상 안에서 자기의 노력으로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노력으로 그들은 세상에 외치는 자기들 말에 힘을 불어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세속적으로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하느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라고 의심 없이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자기들 마음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늘 기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두 달 전에 건강 검진을 받았습니다. 국가검진 대상자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서 병원에 갔는데, 문진표를 작성해야 한다면서 6장의 종이를 줍니다. 꼼꼼하게 제 건강에 대한 생활이나 습관 등을 적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가?’라는 항목이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 몸인데 왜 이렇게 남이 난리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제게 “왜 이렇게 살쪘어?”라고 말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지 않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전혀 관심 없음’에 표시를 했습니다. 조그마한 반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관심이 많은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 관심은 사실 나의 부족한 모습을 상대방에게서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살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사람들의 살진 모습을 먼저 보게 됩니다. 내 관심사로 남을 보는 것입니다.
어디에 관심을 둬야 할까요? 외부가 아닌 내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외적 건강보다 내적 건강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생존만 할 것인가, 살 것인가?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제자들인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에게 편지를 씁니다. 사목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열정을 식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인 티모테오 2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로 격려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의 은사는 ‘성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사도들에게 ‘불’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를 받아도 내가 노력해서 불태우지 않으면 꺼져버립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불은 열정입니다. 열정은 내가 무언가 하지 않으면 꺼져버립니다. ‘열정에 기름 붓기’란 말이 있듯, 우리 안에 열정이 들어와야 하고 그 열정이 들어왔다면 계속 기름을 부어주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이 어디론가 나아가는 ‘항해’가 아니라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물 위에 떠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표류’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항해하는 인생은 인생을 사는 것이고, 표류하는 인생은 적어도 성취감이란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주식 투자를 해서 1년에 9억을 벌었다는 ‘채사장’이란 분이 ‘어쩌다 어른’에 나와 다시 한번 강의하였습니다. 말도 참 잘하고 확실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답게 자신감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도 고3까지 꾸준히 학교 등수가 하위 3%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삶의 열정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고3이 되자 친구들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채사장은 여전히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마음으로 집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태어나서 책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책 한 권은 읽자는 마음으로 누나의 방에 들어갔더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 책으로 적당히 두껍고 유명한 책이라 괜찮다 여기고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보름을 읽은 다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멍하니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와 벌』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생을 비관하던 한 가난한 대학 청년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파를 죽이고 재산을 털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죽어 마땅한 전당포 노파였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끊임없는 양심 성찰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몸을 파는 나이 어린 소녀를 만납니다. 그 소녀는 하루라도 몸을 팔지 않으면 가족을 부양할 길이 없어서 매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삽니다. 주인공은 그 소녀 앞에서 자신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느낍니다. 소녀는 가족을 위해 몸을 팔지만, 자신은 자신을 위해 남을 죽였습니다. 주인공은 소녀의 청을 받아들여 자수하고 시베리아에 벌을 받으러 가며 책은 끝납니다.
아마 채사장은 이 책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도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하루에 한 권씩 3년 동안 1000권의 책을 읽고 130만 부를 판매한 인기도서 작가가 되고 주식으로도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는 강연을 시작하며 세네카의 이런 말을 인용합니다.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채사장이라는 사람에게 열정은 『죄와 벌』로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삶,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삶 중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을 위해 기름을 쏟아부었습니다. 대학 들어가서 1000권의 책을 더 읽은 것입니다.
지금은 『죄와 벌』을 읽고 삶의 방향을 정한 것 때문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표류한 것이 아니라 항해를 한 것이고 생존한 것이 아니라 삶을 산 것이라 느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를 만난 티모테오와 티토도 그렇게 바오로를 통해 열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그 열정을 꺼뜨리지 말라고 합니다. 은총에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그 기름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열정에 자신을 바치지 않으면 열정은 태울 게 없어 꺼집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분도 계시겠고 아니면 언젠가는 그렇게 되실 분도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늙는 것 생존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낸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 맨손으로 롯데타워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암벽을 손가락 한 마디만 이용해 오른 알렉스 호놀드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사실 대학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자퇴하고 방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무려 9년 동안 준비한 끝에 로프 없이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절벽을 오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책을 내고 그 덕분으로 결혼을 하고 지금은 강연자로 활동 중입니다. 아무리 열정이 생기더라도 그 열정을 위해 50번 넘게 로프로 오르며 나 자신을 그 열정을 위해 쏟아붓지 않으면 그 열정은 결국 꺼져버렸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헛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 각자의 마음에 분명 열정을 심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올라야 할 산이 있고 지금은 힘들더라도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나 자신을 쏟아붓다 보면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을 때 내가 오른 곳에서 위에만 올려다보는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택권은 두 개밖에 없습니다. 오르든지 구경하든지. 주님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열정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열정에 기름을 붓는 삶을 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남을 해치며 생존하는 삶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며 남을 살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작년에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미국은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위해서 몇 가지 재정지원을 하였습니다. 먼저 년 소득 75,000 불이 넘는 사람을 제외한 전 국민에게 1,200 불을 지원하였습니다. 저도 받았습니다. 긴급 재난 지원금을 주었습니다. 저희 신문사도 3,000 불을 받았습니다. 직원들의 급여 지원도 받았습니다. 저희 신문사도 28,000 불을 받았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린 실업자들에게는 월 600 불을 지원하였습니다.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원하였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 선별 지원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는 코로나19라는 큰 파도를 넘기 위해서 국민들과 기업들에게 재정지원을 하였습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공급되어서 정상이 될 때까지는 정부의 지원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백신과 치료제를 마련하기 어려운 가난한 나라에게 무상으로 백신과 치료제를 제공하는 방안을 제안하셨습니다. 그것이 애덕의 실천이며, 그것이 모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성당에 들어오는 인원이 제한되었습니다. 교무금과 헌금이 감소하였습니다. 세례, 견진 성사가 중단 되었습니다. 본당의 단체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교우들의 영적인 갈증이 커졌습니다. 많은 본당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두 번 있던 주중 미사를 매일 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미사 전에 묵주 기도를 하고, 영상으로 교우들이 볼 수 있도록 장비를 마련하였습니다. 교우들은 가정에서 함께 묵주기도를 하고, 영상 미사를 참례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세심한 배려와 준비는 교우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주일 미사를 늘리는 성당도 있습니다. 제한된 인원만 성당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미사의 횟수를 늘렸습니다. 교우들은 편한 시간에 불편 없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습니다. 매일 ‘사목단상’을 보내주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부님의 사목단상은 본당과 교우들을 신앙으로 이어주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기 보다는, 길이 없다고 단념하기 보다는 새로운 길을 찾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잠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한다면 ‘천주교’를 택하겠다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주교와 개신교를 방문한다면 어떤 느낌을 가질까? 천주교나 개신교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준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보여 줄 수 있는지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이기적인 모습, 우리들의 이율배반적인 신앙생활, 우리들의 나약함 때문에 어쩌다 성당을 찾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합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신념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바로 그런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걱정하였고, 제자들의 가족들까지 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티모테오와 티토’는 참다운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전하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위로와 희망을 얻을 것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하나씩은 감사할 일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그들은 오직 복음만 믿었고, 복음에만 의지했으며, 복음만을 살았으며, 복음만을 최고 가치로 여겼습니다!
-양승국신부-
바오로 사도께서 위대한 선교활동 중에 동고동락했던 최측근 애제자이자 협력자들이었던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에게 쓴 편지들은 읽을때 마다 큰 감동을 줍니다.
제자이자 동료인 두 사목자에게 보낸 편지에 사용된 표현들은 진한 애정과 우정, 호의와 친절로 가득합니다. 크신 주님의 은총과 자비, 그리고 강렬한 사목적 사랑과 친교 안에 형성된 관계였기에, 남자들 사이에서도 그토록 각별한 애정표현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1 티모테오 1장 3~4절)
그리스인 아버지와 유다교 그리스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티모테오는 1차 전도 여행 때 리스트라에서 바오로 사도를 만나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리스트라를 다시 방문한 바오로 사도는 여행을 동반할 협력자로 젊은 디모테오를 선택했습니다. 그때부터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둘도 없는 동반자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차 전도여행 중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 머물고 있을 때, 티모테오를 테살로니카 교회에 파견하여 중책을 수행토록 했습니다. 3차 전도여행 때는 에페소에서부터 마케도니아를 거쳐 코린토에 이르는 긴 여정의 전 전교임무를 맡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제자들 가운데 제자로 총애한 흔적이 여러 문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티모테오는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성실한 아들입니다.”(1 코린토 4장 17절)
“나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일을 성심껏 돌보아 줄 사람이 나에게는 티모테오밖에 없습니다. 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나와 함께 마치 자식과 아버지처럼 복음을 위하여 일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필리피서 2장 20~22절)
바오로 사도가 아들이자 제자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거의 ‘눈물로 쓴 편지’입니다. 오늘 천천히 다시 읽다보니 바오로 사도의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오더군요.
로마 감옥의 냉기가 얼마나 뼛속까지 파고들던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자신이 깜빡하고 트로아스에 두고 온 겨울 외투를 좀 가져달라고 당부까지 합니다.
“그대는 서둘러 나에게 빨리 오십시오. 올 때 내가 트로아스에 있는 카프로스의 집에 주고 온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지고 오십시오. 겨울이 되기 전에 서둘러 오십시오.”(티모테오 1서 4장 13절)
티모테오와 티토, 오늘 축일을 경축하는 초대 교회 두 주교님의 모습에서 오늘날 주교님들의 모습을 떠올리시면 큰 오산입니다. 그들에게는 주교좌 대성당도 없었습니다. 주교관도 없었습니다. 잘 정비된 교구 조직도 없었습니다. 양떼들은 걷기도 아직 힘든 어린 아기들이었고 결핍 투성이였습니다.
그저 황량한 빈 들판 위에 홀로 서있었습니다. 그들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목숨의 위협, 계속되는 박해, 끊임없이 다가오는 환난 가운데 힘겨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런 가운데 두 목자는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복음만 믿었고, 복음에만 의지했으며, 복음만을 살았으며, 복음만을 최고 가치로 여겼습니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함은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목자이신 당신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돈주머니 대신 당신께 대한 ‘믿음의 주머니’를 차고 여행보따리 대신 ‘희망의 보따리’를 매고 자신의 발에 맞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복음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라” 함은 머뭇거리거나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열중하라는 말씀이요,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함은 더 좋은 집과 대우를 위해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곧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되 자신의 평화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15).
또한 부활의 첫 번째 선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도 평화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루카 24,36). 또한 인사를 받으려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누라 하십니다.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음식물에 대한 유다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 받지 말고 친교를 나누며, 동시에 이는 “차려주는”대로 먹으로라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곧 유대 율법에 따라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이 차려주는 대로 음식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일꾼으로서 삯을 받음이 정당함을 말해줍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전파하고 증거 하는 것이 소명임을 알라 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이 해야 할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소서.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소서.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근본에 충실하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10,4).고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 하시며 홀로서기를 바라셨습니다. 인사는 왜 하는가? 생각해 보면, 사랑과 존경에서 합니다. 인사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을 때가 많습니다. 잘 보이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며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또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근본은 잃은 채 껍데기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인사까지 하지 마라.’는 것은 한 마디로 ‘한눈팔지 마라’,‘양다리 걸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소명을 들었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지 어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되겠습니까?
언젠가 익명의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그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라고 하시며 신자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더 많은 관계를 맺어야 할 텐데 ‘끊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오로지 주님 안에 머물라는 사랑의 충고였음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을 간직합니다. 인사를 하다 보면, 다시 말해 사람에게 매이다 보면 진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는 일깨움을 주십니다. 사람이 정에 매달리다 보면 근본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인기가 오르는 것 같은데 주님의 눈 밖에 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주님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고,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나의 가슴은 뛰노라.”)(이사61,10). 하느님만을 갈망하고 즐거워해야 하거늘 인간적인 욕망이 왜 그리 강한지 모르겠습니다. 바오로는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5-6).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도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테오 1,8). 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간적인 것들에 매이지 않는 삶을 갈망하는 오늘을 겸손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산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단순한 입으로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을 거쳐 손발에서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한편 수확할 일꾼이 적다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작 나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입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손길에 우리의 의지를 맡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주일 미사 중 신부님의 강론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성당 안에 요란한 총성이 울렸습니다. 놀란 신자들이 저마다 납작 엎드리거나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쥐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 아주머니가 부랴부랴 꼬마를 안고 성당 문을 향했습니다. 문가에 이르렀을 때 할아버지 한 분이 ‘나갈 필요 없다’며 말했습니다. “난 사람들이 오늘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댁의 아들은 신부님이 10년 동안 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한 거라구요!”할아버지는 총성이 꼬마의 장난감 총에서 난 소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역시 삶의 경륜이 중요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과 신앙생활
-송영진신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2-9).”
1) 여기서 ‘일꾼들’은 성소자들이 아니라 신앙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은 ‘일꾼들을 모집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일꾼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맡은 일의 성격과 내용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모두가 다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신앙인은 전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동시에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고,
동시에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는 생활입니다.
그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일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도 하느님을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다.” 라는 뜻입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성소자들을 많이 보내 달라고 청하라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즉 선교활동이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 선포 활동을 당연히 도와주시지만,
그래도 선교활동의 기본자세는 ‘기도’입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으면서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 일은 세속의 영업활동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2)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을 하다 보면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경우도 있고,
배척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교활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습니다.)
박해받는 상황이라면 이리 떼 가운데 놓인 양들 같은 처지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을 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은, 또 신앙생활은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 아닙니다.
‘사랑의 봉사활동’입니다.)
‘빈손’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지시를,
이리 떼 같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감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복음화는 복음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세속에 동화되는 것, 즉 세속화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의 세속화는 모든 것을 잃는 일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세속의 인간관계나 친분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재물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7-10).”
그래도 선교활동을 하려면 최소한의 활동비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또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워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돈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것입니다.>
3)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당신의 일꾼을 먹이신다.”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선교활동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라는 말씀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라는 말씀은, 어디선가, 또 누군가가 반겨 맞이하고 숙식을 제공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믿고 감사히 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말라는 지시입니다.
선교활동은 호의호식하려고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4) 복음을 전하는 활동은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심는 활동이고,
신앙생활은 그 평화를 누리는 생활입니다.
선교활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가는 곳마다 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종파가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자기의 신앙과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선교활동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의 성과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씨를 뿌리는 일은 우리가 하지만,
그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마르 4,26-29).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의 씨’를 뿌렸는데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해서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5)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활동이고,
신앙생활은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라는 뜻입니다.
그 사랑 실천은 ‘하느님의 나라’를 실제로 전해 주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라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말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복음: 루카 10,1-9: 추구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조욱현신부-
티모테오는 사도 바오로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다. 아마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첫 선교여행 중에 개종한 것 같다. 티모테오는 바오로와 같이 두 번째 여행과 세 번째 여행을 함께 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겼다.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키와 코린토의 공동체들을 맡겼다. 사도는 그에게 신약에 정경이 된 적어도 두 서간을 남겼다.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가 첫 번 감옥에 있는 동안 가까이 있었고 그 후에 에페소에서 주교직을 행하였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는 두 번째로 로마의 가는 길에 동행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또 다른 협력자인 티토는 이방인 가정의 출신이었다. 사도는 그도 사도의 첫 여행 중에 개종시킨 것으로 보인다. 티토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예루살렘까지 동행하였다. 티토는 코린토와 사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바오로가 남긴 서간에서 이미 크레타의 사목자로 나타난다. 성 바오로는 그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면서 에피로에 있는 니코뽈리와 일치하라고 적고 있다. 그는 달마치아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 보면 주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뽑아 둘씩 짝을 이루어 당신에 앞서 보내셨다. 왜 그랬을까? 이 두 사람은 이리 같은 세상에 먹이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두 제자는 그들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간 것이다. 사랑으로 모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은총이 되게 하시려고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분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일까? 어느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며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일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이 구원사업을 위해,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일꾼들을 위해, 또한 더 많은 일꾼이 나오도록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우리 가운데서 배출해야 한다.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 2)
-한상우신부-
다가오는 봄이
성큼 느껴지는
따뜻한 날들의
요즈음이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대자연의
신비이다.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믿는다.
씨 뿌리는
시간도
추수의
때도 모두
하느님으로
부터 나온다.
선하신
하느님의
계획안에
우리가
살고있다.
수확도 일꾼도
모두
하느님에게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기도가
필요하다.
일꾼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과
단순함이다.
소유욕이
아니다.
너무 많은
것들에
묶여있는
우리들 삶이다.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기도가
중요하다.
추수와
일꾼 앞에
하느님께서
계신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일꾼들은
수확하면서
더 깊은
하느님 사랑을
알게되고
제자들은
길을 떠나면서
하느님밖에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된다.
하느님께로
마음의 눈을
돌릴 때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과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일꾼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다.
일꾼은
그 행복에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일꾼과
하느님의
단순한
기쁨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격려하십니다.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을 앞서 둘씩 보내시며"(루카 10,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당신이 가시려는 곳으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과 치유로 환대의 분위기를 형성하신 데가 아닌, 불모지로 가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그러니 제자인 자기들이 누군지 더더욱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그분이 오실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예수님은 제자들이 거기서 겪을 일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믿는 이들의 신앙과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금이야 옥이야 당신 품에만 끼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 성자를 파견하실 때의 성부 마음처럼, 예수님도 각별히 아끼시는 제자들과 사랑의 기회를 공유하시는 겁니다. 사랑에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공동 운명이 파견에서 파견으로 이어집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낯선 곳에 들어서는 제자들에게는 이렇다 할 자기 방어 수단이 없습니다. 정말로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지는 양의 처지인 셈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신뢰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가 먼저 평화를 내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참 신비스럽고 매력적입니다. 평화를 빌어 준 곳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평화가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인사한 제자에게 되돌아온다니 말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던 이에게는 그대로 전해지고, 거부하는 이에게는 그를 거쳐 다시 제자에게 되돌아오니, 결국 이 세상에 주님께서 주신 평화의 총량은 사라지거나 감소하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신앙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고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세속적 성공과는 반대의 길을 향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세속의 눈에서는 스승의 약함이 곧 제자의 수치일 수 있으니, 사형수로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나, 연이어 투옥되고 순교하는 사도들이나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의혹과 부끄러움의 이유도 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나 신앙이 악세사리 정도인 이들 앞에서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신 분의 길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은 자칫 사회부적응자나 웃음거리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요.
사도 바오로는 그런 인간적 한계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되레 더 단단해지라고 촉구합니다.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성큼 더 나아가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고 초대하지요.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성령으로 받은 은사는 열정을 일깨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뜨겁게 합니다. 마음 안에 심어진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으려면, 사랑의 상태, 곧 관상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요.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 안에서도 기도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는 불이신 주님과 연결된, 불이 되어야 합니다.
낯선 이에게, 또 자신과 반목하는 이에게 평화를 건네는 힘은 주님의 불로 정화된 뜨거운 마음에서 우러납니다. 나약하고 냉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건 평화가 아니라 외면이거나 무관심이지요. 평화는 선과 정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해와 가난과 모욕에도 흔들리지 않는 힘입니다. 평화의 군왕이신 예수님이 보여 주신 힘이고, 복음의 고난에 동참하는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어 세상 곳곳을 흐르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주님에게서 받은 은사를 불태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복음의 고난에 동참해 뜨겁게 사랑하는, 평화의 전달자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같은 믿음의 행복
-김찬선신부-
아시다시피 우리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의 축일을 같이 지내고,
성 바오로의 회심 축일 바로 다음에 두 분의 축일을 지내는 것은
두 분이 바오로 사도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받은 제자였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두 분의 이름으로
소위 사목서간이라는 것을 남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세 분의 이런 관계에 초점을 맞춰 나눔을 했는데
이번에는 "같은 믿음"을 지닌 세 분의 관계에 대해서 보려고 합니다.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제 생각에 믿음에는 수평적 믿음과 수직적 믿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평적 믿음이란 우리 인간 서로에 대한 믿음이고,
수직적 믿음이란 하느님께 대한 우리 인간의 믿음입니다.
먼저 수평적 믿음을 보겠습니다.
며칠 전 우리 조선족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다가 아직 우리말에 서툰
친구가 윗사람에게 듬직하다는 말을 써서 그 말은 보통
윗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쓰는 말이라는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전적으로는 '가볍지 않아 믿음 만하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우리의 실제 사용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듬직하다 하진 않지요.
아무튼, 우리 서로 간에 불신의 관계가 아닌 믿음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이 있는데 '듬직한 사람' 또는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고,
'믿음을 주는 사람' 또는 '믿음이 가는 사람'이라는 표현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믿음직한 사람이고 믿음을 주는 사람입니까?
우선 앞서 봤듯이 사람이 가볍지 않아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을 맡기면 잘할 것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수평적 믿음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에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 뒷통수 치거나 뒷담화하지 않는 사람이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이 아니며,
사기치거나 은혜를 원수로 갚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나를 믿고 맡길 수 있고,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으며
나의 모든 것을 열어보이기에 흉허물도 비밀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니
이제라도 자기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이런 사람을 가진 사람은 인생을 잘 산 사람이고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바오로와 두 영적 아들 티모테오와 티토의 관계를 보면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을 가진 것이 제 생각에 더 행복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 서로간에 신의가 있는 부부도 행복하겠지만
하느님께 대한 같은 믿음을 가진 부부가 더 행복할 것입니다.
왜냐면 부부 서로간의 신의는 사는 동안 서로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이 영원을 보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 티토서의 바오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 관계는 부부 관계든, 대부모와 대자녀의
관계든, 친구 관계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같은 믿음과 같은 희망에
근거하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월 26일 토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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