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24일 연중 제3주일

Margaret K 2021. 1. 24. 07:39

2021년 1월 24일 연중 제3주일  


 예수께서 갈릴레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르코 1,14-20)

 

 As Jesus was walking along the shore of Lake Galilee,

he saw Simon and his brother Andrew

casting a net in the lake,

for they were fishermen.

And Jesus said to them,

"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

At once, the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9년 9월 교황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통하여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구원과 신앙, 일치와 자비는 성경과 그리스도를 알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복음의 삶에 초대되어 마음을 연 첫 번째 제자들은 구원과 신앙, 일치와 자비의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통하여 과거의 삶에서 용기를 내어 ‘바뀐 삶’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준 위로와 용기는 제자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힘은 현대에 부르심을 받은 우리 또한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 화답송에 나와 있듯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게 하고, 하느님의 진리로 이끌며, 올바른 길을 걷게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갈릴래아로, 병자와 허약한 이들 그리고 죄인들을 용서하셨던 곳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 말씀과 함께 걸어가기를 바라시고, 삶의 가장 힘든 곳으로 가서 모든 것을 그분의 말씀으로 변화시켜 새로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어쩌면 오늘 제1독서의 요나처럼 우리가 바라지 않는 일을 하라고 초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은 요나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습니다. 요나의 깨달음은 요나 자신을 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 말씀을 통하여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는 삶입니다.

회개는 마음 깊이 감취진 등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키엣대주교_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제 설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모두 처음 맞는 세상으로 두렵고 혼란스러웠던 한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해에는 자신과 이웃을 위해 사랑과 관대함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할 것입니다.

창세기의 주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보면 단 10명의 의인만 있어도 죄악의 도시 소돔 성읍을 파멸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구원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 요나예언서에는 니네베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기시작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네베로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하느님의 도시 니네베에 재앙이 내릴거라는 것’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요나가 성읍에 가서 이 소식을 알리자 니네베 사람들은 그제야 하느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성안의 높고 낮은 사람 모두 자루옷을 입고 단식을 하며 진실된 회개를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의 진실된 회개를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회개가 자신들을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삶을 바꿈으로써 주님의 마음도 바꾸게 할 수 있습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과 회개

새로와지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죄를 보고, 자신의 실체를 보고 그 위험을 인식해야 합니다.

니네베 백성들은 사십 일이 지나면 도시가 무너진다는 하느님 말씀을 믿고 한치의 망서림도 없이 단식을 시작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루옷을 입고 회개를 했기에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반성과 회개는 마음 속 깊이 감춰진 등불과 같습니다. 그 불이 밝혀진다면 꼭 꼭 숨겨놓은 아주 작은 죄라도 환히 비춰 드러내 줄 것입니다. 반성과 회개는 오랜 시간 깊게 파묻어 두었던 죄와 양심을 캐내는 과정입니다.

죄를 깨닫게 되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동안 무관심했던 쓰레기가 가득 쌓인 집을 더럽다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회개는 영혼에 낀 먼지와 더러움을 깨끗이 닦아냄으로써 그 본질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깊이 회개할수록 죄로부터 멀어지고 깊이 회개할수록 영혼은 더욱 더 빨리 부활합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영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반드시 새로운 삶을 약속합니다. 회개란 구부러지고 낡은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새로운 길을 떠나기 위해 자신들이 머무르고 소유했던 가족과 재산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 새로운 길은 바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며, 형제 자매를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영적인 삶을 맺게 해 줍니다. 그 새로운 길을 걷다보면 다가 올 주님의 왕국에 도달할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로운 희망을 가집니다. 새로와진 영혼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영혼을 새롭게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결심을 한다면 주님의 은총으로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정확히 알 수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안에서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십시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을 만나기 위해 어느만큼 갔습니까?

2. 새로운 삶은 어렵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 익숙한 것들을 버려야하고 나 자신까지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고집과 편견, 자기애, 자만 폐쇄적인 마음 등 …)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자매님께서 남편에 대한 걱정이 늘 컸습니다. 바로 ‘담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울 수 없는 세상인데도, 남편은 도대체 담배를 끊지 못합니다. 담배 끊으라고 그렇게 바가지를 박박 긁어도, 남편은 “나의 유일한 낙인데 어떻게 끊을 수가 있니?”라고 말하면서 담배를 피웁니다. 그래서 아내도 점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도저히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무엇을 보고 왔는지 마구 우는 것입니다. 아들이 본 것은 금연 광고였습니다. 목에 구멍도 뚫리고 죽을 수 있다는 광고 내용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늦은 저녁 회사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안긴 어린 아들이 펑펑 울면서 말합니다.

“아빠! 제발 담배 끊어. 계속 담배를 피우면 목에 구멍 뚫리고 폐암 걸리고... 엉엉... 아빠 죽는데... 엉엉...”

아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드디어 담배를 끊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말에도 절대 흘리지 않았지만, 어린 아들의 울음에 결국 지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힘의 크기는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힘없어 보이는 것이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엄청난 힘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힘을 따라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사람들 앞에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큰 힘으로 다가왔던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라서 어떤 사람을 죽을 수도 또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믿으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율법이 진짜 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더 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진짜 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서 하느님을 믿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구원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믿으라는 외침이 들려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믿으라는 희망의 외침입니다. 그런데 이 말보다는 세상의 가짜 힘 있는 말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바오로의 말씀처럼,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1코린 7,29참조). 우리의 말과 행동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꿈을 날짜와 함께 적어 놓으면 그것이 목표가 되고, 목표를 잘게 나누면 그것은 계획이 되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꿈이 실현되는 것이다(그레그 S.레잇).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와 상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학력고사 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2외국어인 독일어를 선택해서 학력고사 시험을 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업은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학력고사에서 보지 않을 과목이고, 선생님도 상업을 선택하지 않은 학생들은 다른 공부를 하고 있어도 눈 감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체능을 비롯해서 학력고사에서 보지 않는 과목은 모두 소홀히 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다른 과목 공부를 하면 얼마나 집중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시간 관리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그런데 쓸모없다는 생각에 그 시간을 충실하게 살지 못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지금의 자리에서 충실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만남도 필요한 사람,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만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사람 역시 내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어떤 자리이든 어떤 만남이든 지금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름답고 멋집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들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

-전삼용신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 지배받는 나라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께 지배받지 않으면 악령에 지배받게 됩니다. 하느님께 지배받으면 하느님 나라에 살고, 악령에 지배받으면 지옥에 삽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중국 후배이성. 11층에서 떨어지는 여성을 맨손으로 받아내려던 남성이 있습니다. 펭닝이란 이 남성은 충격에 얼마 동안 쉽사리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청년의 다리는 부러졌고 인대가 손상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성은 끝내 사망하였습니다. 펭닝은 정신을 차린 뒤에도 자신의 몸보다는 여성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청년은 말합니다.

“제 행동을 후회하지 않아요. 다만 여성분을 구하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워요.”

      이 이야기를 11층에서 떨어지는 여성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동영상이 있어 소개합니다.

 

“10층에서는 금실이 좋고 화목했던 부부가 싸우는 게 보였고 9층에서는 밝고 유쾌하고 잘 웃던 남자가 우는 게 보였습니다. 8층에서는 남자들과 말도 하지 않던 여자가 바람피우는 게 보였고, 7층에서는 건강하기로 소문났던 여자가 약 먹는 게 보였습니다. 6층에서는 돈 많다고 자랑하던 남자가 일자리를 찾는 게 보였고, 5층에서는 듬직하고 정직했던 남자가 여자 속옷 입는 걸 보았습니다. 4층에서는 닭살 커플로 엄청나게 사랑했던 연인이 헤어지려고 싸우는 걸 보았고, 3층에서는 남녀관계가 복잡하다던 할아버지가 혼자 지내는 걸 보았습니다. 2층에서는 이혼하고 남편을 욕했던 여자가 남편을 그리워하는 걸 보았습니다.

      11층에서 뛰어내리기 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사람마다 말 못 할 사정과 어려움이 다 있었네요. 사실 내가 너무 불행한 건 아니었군요. 내가 보았던 사람들이 지금 나를 보고 있네요. 그들도 나를 보며 자신들은 괜찮다고 자기 위안을 하겠죠.”(출처: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느낄 때」, 감성힐러 JAy, 유튜브)

 

      이 세상에서의 지옥은 아무래도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올 수도 있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사는 것이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겉만 보고 자신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들이 위로를 얻으려는 방법이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삶이 이렇게 남과 비교하고 힘들어지는 이유는 이 세상의 욕망에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갈 때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았겠고 자신보다 많이 잡고 더 큰돈을 버는 사람을 부러워해야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베드로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자신의 배 밑에 물에 빠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전재용 선장이 참치보다 96명의 베트남 선상 난민을 건져 올렸던 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건져 올릴 때 물고기는 더는 나에게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어지고 그래서 우울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떨어지는 여성을 구하려다 몸을 다치고도 구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던 펭닝과 같습니다.

 

      펭닝 주위엔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자신은 자살한 여자보다 행복하다는 위안을 받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곧 또 누군가와 비교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사랑이란 힘에 지배받기 전까지는.

 

      며칠 전 바다까지 얼어붙은 추운 날씨에 배에서 일하던 한 작업자가 바다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본 다른 배의 한 선장은 긴 막대를 이용해 익수자를 구하려 했지만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명튜브를 던졌지만 역시 익수자는 그것을 잡을 수 없었고 계속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배에 손짓했지만 보지 못한 것인지 그냥 지나칩니다.

      이 남성은 한참을 망설입니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바다에 뛰어듭니다. 익수자의 몸을 바치고 한참을 물에 떠 있던 남성은 해경에 도착한 뒤에야 물 위로 함께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엔진을 수리하고 있던 김인학 선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려주소, 살려주소.’ 하는 소리가 나서 뛰어나오니까, 사람이 곧 (물속으로) 내려갈 그런 상황이다 보니까, 제가 생각도 못 하고 (바다에) 들어간 상황입니다.”

      김 선장은 어깨 수술을 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물속에 바로 뛰어들지 못한 것에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구조된 남성은 김 선장에게 고맙다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 도와주는 게 대단하신 것 같고, 저도 본받아서 그런 일이 생기면 사람을 도와가며 살도록 하겠습니다.”(출처: 「얼어붙은 겨울바다에 ‘풍덩’ 익수자 구한 선장」, UBCUHDTV, 유튜브)


      예수님은 베드로를 포함하여 우리를 구하신 분이십니다. 생존 욕구에 지배당하지 않고 이웃의 영혼을 구하도록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저절로 물속의 고기는 관심이 줄어들고 함께 빠진 사람들에게 눈이 더 갑니다. 그리고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전 삶이 지옥이었고, 이것이 하느님 나라구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될 것입니까, 물고기를 잡는 사람으로 남겠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을 잡다 보니 물고기도 걱정 없이 잡힌다는 것입니다. 전재용 선장은 베트남 96명을 구해주어서 직장을 잃었지만 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엔 조금 고생했을 수 있겠으나, 하느님께서 지켜주셨고 나중에는 그들이 미국으로 초대하여 큰 영광과 보답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물고기 잡는 어부입니까, 아니면 사람 낚는 어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조재형신부-


오늘은 장자에 나오는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왕이 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고 있을 때입니다섬에 있던 원숭이들은 왕의 배를 보고 두려워 숨었습니다그러나 한 마리의 원숭이는 나무에서 재주를 넘고배를 바라보았습니다왕은 숨지 않고 재주를 부리는 원숭이를 향해서 화살을 하나 쏘았습니다원숭이는 화살을 피하지 않고 손으로 잡았습니다그러자 왕은 부하들에게 화살을 여러 발 쏘라고 명령하였습니다화살을 피할 수 없던 원숭이는 그만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가끔씩 공직에 나오는 분들의 기사를 봅니다언론은 검증이라는 화살을 쏘게 됩니다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은 질문이라는 화살을 쏘게 됩니다공직에 나서지 않으면 밝혀지지 않았을 일들이 드러나는 모습을 봅니다심한 경우에는 공직에 나서지도 못하고 검찰의 조사를 받기도 합니다공직에 나서는 사람은 본인과 가족들의 삶이 투명해야 합니다본인과 가족들에게 허물이 있다면 공직에 나서지 않은 것이 좋습니다신상 털기의 검증과 질문보다는 능력과 업무추진력에 대한 검증과 질문이 되면 좋겠습니다.

 

원숭이는 사람보다 빠르기 때문에 원숭이를 잡기 어렵습니다그런데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입구가 좁은 항아리를 땅에 묻어 놓는다고 합니다항아리에는 원숭이가 좋아하는 과일을 넣어 둡니다원숭이는 손을 넣어서 과일을 잡습니다입구가 좁기 때문에 원숭이는 과일을 꺼낼 수 없습니다사람이 다가오면 과일을 놓고 손을 빼야 도망갈 수 있습니다하지만 원숭이는 과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결국 원숭이는 잡히고 맙니다.” 원숭이보다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약도박게임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습니다본인은 물론 가족과 이웃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성공권력명예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양심을 속이고이웃을 속이고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탐욕교만시기탐식욕망나태함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방향을 잃어버린 난파선처럼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유혹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전해주고 있습니다첫 번째는 회개입니다회개는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고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교만에서 겸손으로 바꾸는 것입니다집착에서 배려로 바꾸는 것입니다니네베 사람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회개하였고삶이 방향을 바꾸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습니다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우리가 회개하면삶의 방향을 바꾸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우리 죄가 다홍처럼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고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응답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셨습니다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문득 버려야 할 그물과 배는 무엇인지 생각합니다아직 오지 않은 일들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버려야 합니다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나는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담아 주셨습니다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다음에 하자는 게으름을 버려야 합니다많은 사람이 게으름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2021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근심과 걱정열등감게으름이라는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라고 응답하며 힘차게 길을 떠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좀 더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인간 관계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시는 분들 참 많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동료, 연인, 친구 등 가장 가까운 사람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틀어진 관계로 인해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일찌감치 퇴직하셔서 매일 집에 계시는 영감님들 때문에 상습 편두통에 시달리는 할머님들 위해 제가 단골로 건네는 멘트가 있습니다.

  

“영감님께서 안 계신다고 생각하고 한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나마 영감님이 계셔서 마음 든든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디 영감님과 함께 산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까칠한 사춘기 청소년 한명 양육한다고 생각하시기를..”

  

아마 바오로 사도께서도 관계가 힘든 부부들 대상으로 신앙 상담을 많이 해주셨던가 봅니다. 오늘 두번째 독서에서 그런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코린토 1서 7장 29~31절)

 

인간 관계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이 우리를 인간다운 삶과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재산이나 부동산, 귀중품이나 소장품들... 

 

그런 세상 것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과욕은 깊은 상처나 좌절을 남깁니다. 때로 가장 우선적 가치를 두고 있는 그 대상들로 인해 우리네 삶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비참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어느 정도 살만하면 대폭 내려놓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욕심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걸고 쥐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실상은,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머지 않아 순식간에 형체가 사라지고 마는 것임을 잊지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은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오랜 세월 쌓아올린 이미지를 놓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고수해온 정치적·사상적 성향 역시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만의 영역, 나만의 틀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나약함과 비참함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수십년 전에 받은 상처와 수모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말이 쉽지 놓아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좀 더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때,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할 때,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서로 다투며 소송을 걸게 되지요. 소유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매우 위험한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을 가지지 않습니다.”(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연중 제 3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제2독서> 말씀도 바로 이 하늘나라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둘째>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회개와 믿음에 대한 요청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바로 이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셋째>는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신 일이 그저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시고 줄곧 준비해온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제시해주는 방향이요, 목표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이 “나라”는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곁에 와 있다는 말씀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현재에 와 있는 나라요,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루가 11,20 참조).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회개”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곧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바꾸되, 나아가야 할 목적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곧 ~어디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와 함께, ~어디에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결국,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회개”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 역시, “하늘나라”라는 “복음”을 믿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임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회개하여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듯이, 이제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당신께로 부르신 이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당신께 “오너라.”는 것입니다. 곧 자신에게서 “떠나” 당신께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가는 길을 “따라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함께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데려고 함께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데리고 함께 하늘나라로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을 준비하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지고 있던 것, 의지하고 있던 것들, 배도, 그물도, 삯꾼도, 아버지도, 모두 버려두고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바로 이 따라나서는 것이 회개의 실천적인 모습이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 버림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보다 더 큰 가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위한 배나 그물보다도, 또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아버지보다도 더 값지고 중요한 “그분”을 향하여 믿고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버려야 하는 이유, 곧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버리는가?’ 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향하여 있고,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진정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따라 나선 자신을 따르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지,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 와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라나서야 할 일입니다. 복음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님께서 부르시면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은 일상 안에서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시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님께서 부르시면‘나’ 달려가지요.

하던 것 멈추고, 있는 것 버리고……

님께서 부르셨으니‘나’ 응답하지요.

두려움 버리고, 망설임 없이,

임이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 ‘예’ 하며…. -홍요한-

 

예수님께서는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마르1,18-19). 이것은 일상생활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부르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물을 버리고, 더욱이 아버지까지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것은 기존의 생각, 가치관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앞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루가9,62) 때문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그래서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사도는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7,31).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남겨두는 것은 편안함과 안전, 기득권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 생각을 바꿔라. 불의한 기존 질서를 따르지 말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내 뜻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멀리 있지 않고 일상 안에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온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천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2,17). 따라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늘 생각해야 하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것은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가,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주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그물을 버리듯, 아버지와 삯꾼과 관계를 끊어버리듯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4,23-24). 응답한다는 것은 결국 새로워진 회개의 삶이 전제된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모르는 것은 좁은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여름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건 더운 여름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래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여러 가지를 모르는 것은 그 한 가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내 안에 갇히면 다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의 잣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머니의 위치에서 아내의 자리에서 혹은 아버지의 위치에서 가장의 자리에서, 남편의 위치에서, 자녀의 위치에서. 직장의 상사로, 사원으로, 좋은 이웃으로……… 지금 삶의 자리에서 당신의 뜻을 실천하길 원하시며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 마음에 드는 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 하느님, 당신을 만나 뵐 수 있을 때 당신을 찾게 하소서. 당신이 계실 때 당신을 부르게 하소서……죄인은 제 길을 버리고,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떨쳐 버리게 하소서. 당신이 가엾이 여겨주실 때 저희가 돌아오게 하소서. 당신의 생각은 저희 생각과 같지 않고 당신의 길은 저희 길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길은 저희 길 위에 있고 당신의 생각은 저희 생각 위에 드높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싹을 틔우듯이 당신의 말씀이 저희에게 심어져 당신이 뜻하신 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당신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뒤따라간 제자들의 대열에 저희가 들 수 있도록, 당신의 말씀이 헛되이 돌아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이사 55,6-11참조).

 

매 순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곧 바 로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6-20).”

 

1)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그들은 물고기를 잡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실한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말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루카 16,10-12)”

이 말씀에서, ‘작은 일,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일,

남의 것을 다루는 일’이라는 말은, ‘세속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큰일, 참된 것을 맡는 일, 자신의 몫을 차지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일, 복음을 선포하는 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일로 해석됩니다.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부르심’에도 성실하게 응답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매사에 불성실한 사람은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거나

응답하더라도 그 ‘응답의 삶’이 불성실하고 불충실합니다.

(사제성소의 경우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성소를 받고 싶다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의 성실함을 눈여겨보시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0-12).”

(여기서 ‘무질서하게 살아가는 자들’은 게으른 사람들을 뜻합니다.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은

게으르게 살면서 민폐만 끼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부르심’을 ‘은총’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기를

바란다면 자기가 하고 있는 일들부터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불성실하면서

은총을 받기만을 바라는 것은 염치없는 일입니다.

 

2)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사람 낚는 어부’ 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도”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지금까지는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어부로 살았지만,

나를 따라오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서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바라느냐?”)

그런데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도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 자신이 먼저 구원받은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만이 남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따라오너라.” 라는 말씀은,

“내가 주는 구원을 받아라.”로 해석됩니다.

어부들은 예수님을 따라가서 구원을 받았고, 그 다음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첫 만남’ 장면을 보면(요한 1,35-42),

어부들은 부르심을 받기 전부터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업에 열중하면서도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먹고사는 일보다 더 높은 차원의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부들은 허무한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의 그 갈망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갈망하면서 찾고 있었던 그것을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3)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물을 버리고’ 라는 말은, 뜻으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성직자가 아닌 신앙인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기는 어렵지만,

그렇더라도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은 해야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례를 받은 뒤의 삶은 받기 전의 삶과 달라야 합니다.

만일에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면,

즉 세례를 받은 뒤에도 안 믿는 세속 사람들처럼 산다면,

그것은 세례만 받고서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곧바로’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부들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부르심을 받자마자

바로 응답했음을 나타내는데,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응답할 준비를 한 상태에서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곧바로’ 라는 말은,

자기들이 버린 것에 대해서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삶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제성소나 수도성소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의 부르심’은 다릅니다.

‘신앙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응답함으로써 얻게 될 큰 은총을(구원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일이고,

그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께서 네 명의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계속되지만, 오늘의 강조점은 부르심보다 구원을 위해 ‘회개하라.’라는 초대에 있다. 그 기회는 놓쳐버리면 사랑과 생명으로 개방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제1 독서에서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즉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동정'의 가치를 주님께 대한 '갈라지지 않는 마음'으로 일치하게 하는 것임을 제시한다.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가치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벽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동정자'라는 것은 하느님께만 의지하기 위해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유희에서 눈을 돌려 피안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 풍요성은 그것을 알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복음: 마르 1,14-20: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이제 복음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고찰을 해보자. "때가 차다."(15절). 이 말씀은 시간이 밖으로부터 '차게 됨'을 말한다. 즉 하느님께서 시간 속에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함으로써 그때를 완성해 주심을 의미한다. 바로 이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때이다. 그래서 연대기적 시간(Chrόnos)이라 하지 않고 구원의 때(Kairόs)라고 한다. 즉 의미로 가득 찬 시간이며 우리의 구원과 멸망을 가늠하는 시간이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바로 이 순간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구원으로 가득 찬 때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5절). 이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것은 강생의 신비를 통해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써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사람들에게 이미 전해주고 있고 그 결과 이 세상 모든 것이 죽음까지도 그에게 복종하게 될 때(1코린 15,27-28 참조), '하느님 나라'의 통치권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이미 들어와 있으며, 그 때문에 인간은 그곳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밖에 머물러 있든지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하느님의 나라'가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조건으로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즉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그 '하느님 나라'에 동화할 수 있도록 하고, 필요한 모든 요구에 응답할 수 있어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하신다. 회개하고 믿는다는 두 개념은 내용상으로 다 같이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이 '새로움'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영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정신세계의 변화 즉 우리 자신의 가치 기준의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이성의 범주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내용을 보면 그렇다(마태 5,3.10 참조).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논리이다. 이 논리를 받아들일 때만이 가능하다.

 

"복음을 믿어라."(15절)는 것은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겨 그분의 구원과 생명과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 여기서 '믿는다.'라는 것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복음을 통해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체험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란 그분의 가르침뿐 아니라, 당신의 현존을 통해 실현하는 구원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처음부터 항상 살고 기록해야 할 영원한 복음이시다.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며 그분을 닮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18절).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절박하게 요청되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신속한 응답의 표본이 바로 첫 번째로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부르심이나 응답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즉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나선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아무런 미련도 남겨놓지 않은 그러한 모습이다. 그들은 과거를 떠날 줄을 안다. 가족까지도 이차적인 문제가 된다. 그들은 이미 그들 가운데 와있는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따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다. 이 제자들의 부르심의 사화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변화하고 진정으로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선택의 순간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려 나를 위해 다시 호숫가를 지나가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때 우리 자신의 변화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한상우신부-


우리의 생명
우리의 호흡
안에

회개가
있고 복음이
있고 믿음이
있다.

회개는
우리 삶
전체를
변화시킨다.

삶의 시각이
하느님께로
통째로
바뀌는 것이다.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다.

피조물을
새로
나게하는
회개이다.

하느님의
계획안에
회개의 참된
때가 있다.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맡기는 것이
회개의
체험이다.

회개와 믿음은
따로 뗄 수 없는
하나이다.

회개의 삶이
곧 믿음의
삶이 된다.

믿음은 생활로
이어져야 한다.

전체가 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그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이 회개이고
믿음이고
복음이다.

복음은 충만한
기쁨을 맛보게
한다.

우리모두를
살리시는
하느님이시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살게하는 것이
회개이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고

함께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길 위에
예수님이
계신다.

 -오상선신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인 오늘, 미사의 독서들은 그분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주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때"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게 언제인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해하지만, 천년도 하루 같으신 하느님의 "때"는 인간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 무지 덕분에 희망도 가질 수 있고, 삶도 뒤돌아보며 성찰할 수 있게 해 주는 선물이기도 하지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8)

말씀이신 분께서 말씀하시자 이루어집니다. 그분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어부들의 순종으로 말씀이 완성됩니다. 어부들은 "곧바로" 즉각적으로, 당장 순종하지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갈망을 예수님께서 건드리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장 자신들의 생계와 가족을 뒤로 하고 예수님께 응답한 것이지요. 말씀이 힘이 있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 내면의 생각과 지향, 꿈과 바람을 꿰뚫어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말씀은 모두 아십니다. 그분 앞에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도 말씀이 역동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요나 3,3)

첫 부르심에 줄행랑을 놓은 요나는 한바탕 호되게 삶과 죽음을 오가는 사건을 치르고 나서, 이번에는 즉시 순종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니네베 성읍에 들어가 멸망을 예고하지요. 그런데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은 놀랍게도 요나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믿고 자신을 낮추어 회개합니다. 먼저 요나가 말씀에 순종했고, 또 이방인들도 그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말씀을 거두십니다. 당신이 하신 말씀에 스스로 순종하지 않으신 셈이네요. 예고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전한 예언자나 하느님이 무능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하느님은 그래도 상관 없으십니다. 하느님의 목적은 그들의 회개이지 멸망이 아니기 때문에 백 번 줏대 없이 보여도 괜찮으신 겁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행동에 앞서 말씀을 보내시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지요. 구약 시대에는 무수한 예언자가 그 역할을 했고, 때가 차자 말씀이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당신께로 돌아서도록 촉구하신 것입니다. 이 기회를 잡은 이들은 니네베 사람들처럼 회개하여 멸망을 유예하고, 이 기회를 대수롭지않게 여기는 이들은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31)

사람들은 또 묻고 싶을 겁니다. 이 말씀이 공상과학영화에서 말하는 그 종말을 의미하느냐고요. 당시 예수님과 사도들이 선포한 "하느님의 때"가 단순히 인류의 종말이라면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는 세상에 대해 할 말들이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결정적인 최후의 날을 맞이할 겁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을 거두어 들이시는 저마다의 마지막 날도 예외 없이 다가올 것이고요. 그때가 언제인지 전자도 후자도 우리는 모릅니다. 몰라서 용기 내어 살고 있고, 몰라서 마음대로 살기도 하지요.

이 세상 형체의 사라짐은 눈에 보이는 소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결국 "무"임을 깨닫는 과정을 지나는 중이니까요. 우리 자신을 포함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목적으로 지어졌습니다. 그 목적을 살아갈 때 우리 자신과 그 대상은 함께 충만하고 행복합니다. 반면 자기중심성, 지나친 소유, 집착, 과시, 남용 등은 존재의 그 아름다운 빛을 퇴색시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과 그 대상이 새로운 우상 자리에 등극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하느님만, 말씀만 남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이 지상에서 우리가 주님과 나눈 복되고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뜨겁게 해후하게 해 줄 겁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지치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십니다. 매일 만나는 미사의 말씀들을 통해, 성경통독과 필사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바치는 기도문들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선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들과의 대화와 나눔을 통해 말씀은 끊임없이 우리를 초대하고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두 번째 맞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인 오늘,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에 마음을 활짝 열어 드리면 좋겠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을 마냥 미루는 우리에게 그분은 너무 늦지는 말라고 애타게, 또 간절히 속삭이십니다. 이제 바쁜 세상 걸음을 멈추고,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주님께서 행동하시기 전에 먼저 보내신 말씀께로 방향을 돌려 "곧바로" 응답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말씀과 함께 행복하실 겁니다. 말씀이 보증하시고 저도 보증합니다. 말씀의 사람으로 거듭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즉 시

 -김찬선신부-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신 주님 얘기가 연중 제1주일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한 주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신 얘기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오늘 제3주일 복음은 지난주 요한 복음의 첫 제자 성소 얘기와 달리

공관 복음의 첫 제자 성소 얘기인데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시고

오늘 첫째 독서는 요나가 회개를 선포하자 니네베가 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는 회개와 복음을 선포하시는 주님을 즉시 따르는 제자들,

요나의 회개 선포에 즉시 회개를 시작한 니네베 사람들 얘기이니

즉시 회개하고 즉시 복음을 믿는 삶에로의 부르심과 그 응답이 주제일 겁니다.

 

그러니 오늘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이 '즉시'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회개해야 한다는 마음이 아예 없는 사람도 있지만

신앙인인 우리는 회개의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다만 회개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뒤로 미루는 것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주님은 때가 찼다고 하십니다.

때가 찰 만큼 찼으니 이제 더 이상 실행의 때를 미루지 말고,

즉시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의 회개와 복음을 살라 하십니다.

 

우리는 숙제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회개와 복음은

숙제가 아니라 복권과 같이 행복의 기회이지요.

 

문제는 하느님 나라의 회개와 복음이 내게 숙제냐 복권이냐 그 점입니다.

하기 싫은 숙제인지 어서 빨리 사고픈 복권인지.

또는 하느님 나라가 밭에 묻힌 보물인지 아닌지.

 

성인들 그러니까 회개를 하고 하느님 나라를 복음을 산 성인들은

하느님 나라가 밭에 묻혀있는 보물임을 발견한 분들이고,

모든 것을 팔아 그 복권을 사신 분들입니다.

 

성인들 중에서도 프란치스코의 회개와 복음 실천은

매우 극적이고, 급진적radical이라고 하고 그래서

이 급진성Radidality이 프란치스칸적인 복음 실천의 특징인데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 전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복음 전파하도록 어떻게 파견하셨는지에

관한 복음이 봉독되었을 때, 이 말씀을 듣고 프란치스코는 즉시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그러더니 환희에 넘쳐 자신 방금 들은 말을 완수하기 위해 서둘러 댔다.

그리고 자기가 들은 바를 이룩하는 데 있어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즉시 발에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손에서는 지팡이를 치워 버렸다."

 

제가 수차 얘기했듯이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 첫 제자들이

성소를 받는 얘기가 루카 복음의 얘기에 비해 매우 간단합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도 허탕을 친 뒤

주님 말씀대로 다시 그물을 치자 엄청나게 고기를 잡는 체험을 한 뒤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더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처럼 생판 모르는 예수가 길을 가다 뜬금없이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그 부름에 제자들이 하던 것 즉시 그만두고,

가진 것 모두 버리고 따른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부르심-따름>만 간략하게 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주님 부르심의 절대성과

제자들 따름의 즉시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찼으니

오늘 우리도 이 <즉시>만 잘 그리고 꼭 기억하면 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월 21일 연중 제3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