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2021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3-17)
“Why does he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Jesus heard this and said to them,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헨드리크 테르브뤼겐의 성 마태오를 부르심.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의 특징은 ‘말씀하시는 하느님’ 또는 ‘하느님 말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초대 교회의 어떤 기록보다도 구약 성경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면서, 창조 때부터 지속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업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이 믿음을 통하여 어떻게 교회 안에서 전해지며, 그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삶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은 입에는 꿀같이 달고 위로가 되는 달콤함을 주지만, 우리 마음에 불안을 안겨 주는 칼이기도 하여 깊은 곳을 꿰찌르고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말씀에 꿰찔림으로써 정화됩니다. 곧 말씀인 칼이 처음에는 상처를 주지만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을 베어 내어 다시 하느님께 향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레위를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빛으로 부르시며 당신 말씀의 칼로써 회개의 삶으로 이끄시어 당신의 사랑과 일치하게 하시려는 초대입니다. 우리도 매번 “나를 따라라.”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때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이름을 올렸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통 큰 기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의 검소한 생활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부자이면서도 웬만한 거리가 아니면 비행기 좌석으로 이코노믹 클래스를 이용합니다. 그 이유를 “일등석 요금으로 몇 배의 금액을 지불한다고 해서 도착하는 시간이 몇 배 빠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호텔에 투숙할 때도 “큰 방은 아깝습니다. 누울 자리와 통신만 연결된다면 그것으로 좋습니다.”라면서 좋은 방을 요구하는 법도 없습니다.
빌게이츠를 향해 사람들은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자신의 편함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기에 그는 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종종 돈에 얽매이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나눔을 실천할 생각 없이 자신의 돈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항상 부족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하긴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으면 충분하겠냐고 물어보면, 본인은 욕심이 없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이요.”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부르십니다. 그는 곧바로 주님을 따릅니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의 불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는 것도 그렇지만, 죄인이라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어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하시지요. 의사가 병자들에게 다가갔다 하여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건강을 얻으려면 병을 일으키는 행실을 바꿔야 합니다. 레위는 일어나 곧바로 주님을 따르지요. 주님과 함께 하는 행실로 바꾼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돈만을 바라보면서 살았다면, 이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의사이신 주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아, 세상에 얽매이는 삶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길에 더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도 나 자신의 행실을 바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영어의 ‘thank’와 ‘think’는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가 하이데거도 ‘생각하는 것이 곧 감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미처 깨닫지 못하는 세상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으며,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입니다. 감사할 대상이 있다면 여기에 추가할 항목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추가할 항목 자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채워야 행복할 것이라는 바람은 헛된 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고, 부유해도 비참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죄인인 줄 아는 공동체에 머물라
-전삼용신부-
어제 복음은 네 명의 믿음이 있는 공동체 안에 머무른 병자가 죄도 용서받고 병도 치유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 레위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내용입니다. 내용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만 마르코는 여기서 레위가 어떤 공동체에 머물렀는지를 알게 합니다. 바로 ‘죄인이며 병자임을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문 것입니다. 반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며 병자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무엇이 죄인지 알게 할 수 있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이끼’(2010)는 한 타락한 형사가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힘이 있는 목사와 협력하여서 한 시골 마을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형사는 큰 죄를 지은 이들을 자기 마을에 살게 하며 자신은 이장으로 권력을 누립니다. 그러나 깐깐한 목사가 눈엣가시입니다. 목사가 죽자 그들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 마을에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릴 아무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과 어울리며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몰아내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 공동체는 모두가 다 자신들이 죄인임에도 그것을 감추고 의인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누가 들어와도 다 의인처럼 자신을 여깁니다. 그러면 죄를 용서해 주러 오신 분이 필요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미리내 천주성삼 수도회 임언기 신부가 임종 직전 한 냉담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갔었습니다.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청했던 것입니다. 병자는 이미 배에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죽음을 목전에 둔 간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사실 당사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인 줄 알고 일일이 십계명을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에 고개만 끄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그때 신부님의 뒤에서 환자가 크게 외쳤습니다.
“나 죄 없어!”
물론 외적으로는 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물 줄 몰랐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모두가 눈 하나만으로 생활하는 마을에서는 오히려 눈 두 개를 사용하는 사람이 병든 것입니다. 눈을 고치려면 두 눈으로 정상적으로 사는 마을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란 영화 제목이 있었습니다. 조직 보스인 형을 죽인 한 킬러를 동생 킬러가 복수하기 위해 쫓는다는 내용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황정민, 이정재는 모두 킬러입니다. 황정민은 이정재의 형을 죽였고 이정재는 그래서 황정민에게 복수하기 위해 쫓습니다. 여기서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악에서 구해달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서로 남의 탓을 하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정민이 자신의 딸을 만났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어린 딸의 순수한 눈에 죄인으로 비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트렌스젠더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황정민은 그에게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면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결국, 황정민은 딸을 위해 희생하고 그에게 딸을 맡깁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 공동체 안에서는 내가 죄인인 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죄를 눈감아주고 타인을 죄인이라 여기며 살기에 누가 들어가도 그곳에서는 의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공동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들어와 혼자 의인인 체할 수 없습니다. 나로 사는 이상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라고 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버리는 길은 ‘기도’이기 때문에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며, 그 사랑에 따른 자아 부정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죄인 줄 알아야 ‘자아 부정’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선이시고, 선을 받아들이려면 악인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품은 공동체에 머물러야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나’가 죄이고 ‘그리스도’만이 선인 줄 모르는 공동체에 머물면 결국, 내가 의인인 줄 착각하고 살다가 그 공동체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코로나19로 바뀐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영상으로 미사를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어르신들은 점차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방에 초를 켜놓고, 미리 말씀을 묵상하고 영상 미사를 시청합니다. 성당에 있으면 분심이 드는 것들이 있었는데 집에서는 오히려 집중이 잘 된다고 합니다. 본당에서는 본당 사제의 강론만 들었는데, 영상 미사에서는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날씨가 추워도, 비가와도, 코로나19로 성당 문이 닫혀도 영상 미사는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말씀의 식탁에서 강론을 듣고, 머물 수 있습니다. 대림특강도, 성서공부도, 인터넷이 연결되는 곳이면 쉽게 찾아서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밴쿠버의 한인 성당을 위해서 영상으로 대림특강을 하였습니다. 시차 때문에 늦은 시간에 강의를 하였지만 준비만 짜임새 있게 잘 하면 굳이 비행기를 타고 밴쿠버까지 가지 않아도, 추운 겨울에 성당까지 오지 않아도 안전하게 집에서 특강을 들을 수 있습니다.
중세에 있었던 흑사병은 유럽의 문화를 바꾸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고, 성모신심이 교회에 널리 전해졌습니다. 르네상스는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성모신심은 성모님의 발현으로 드러났습니다. 성모신심은 성모님께 대한 교리가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성모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신앙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되셨습니다. 2020년 코로나19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 우리의 무력함을 보았습니다. 소중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수 없었습니다. 박해시대에도 멈추지 않았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마스크가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을 생각합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와도 공존해야 합니다. 우리가 쌓아온 물질과 자본의 탑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바벨탑과 같습니다. 개발과 발전의 패러다임에서 연대와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언제나 파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의 선택 앞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한 대기업 신입사원 연수 때, 인성교육 강사로 초대받아 간적이 있었습니다. 강의실에 앉아있는 신입사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그리 다들 깎아놓은 밥톨처럼 반듯하고 늠름한지? 어찌 그리고 예의바르고 늠름한지! 꿈에도 그리던 성소자들이 거기 우르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고스란히 단체로 성소의 길로 안내하고 싶었습니다.
생사고락은 물론이고 미래와 운명을 함께 할 인재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꿈꿀 것입니다. 지적이고, 예의바르고, 성실하고, 열정이 넘치고, 균형이 잡히고, 능력도 탁월하고...
그런데 오늘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의 첫째가는 협조자인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선택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한점 흠없고 무죄한 청년, 세파에 물들지 않은 신앙심 깊은 젊은이를 제자로 선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을 보십시오. 그분의 파격적인 선택, 말도 않되는 선택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이미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사람, 갈데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세파에 닳고 닳은 사람, 인간 세상의 잔혹함과 비정함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로마 제국은 식민지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세금징수권을 목돈을 받고 매도했습니다. 세금징수권을 매입한 개인이나 회사는 자신들이 투자한 목돈을 만회하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러한 세금 청부제의 악용은 가난한 백성들의 허리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이 저지른 악행이 얼마나 큰것이었는지를 추측케 하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찾아온 세리들을 향해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복음 3장 13절)
아마도 세리들은 적정선의 세금이 아니라 두배, 세배로 세금을 후려쳤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그리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세리는 더도 덜도 말고 그냥 도둑!” 키케로는 세리를 향해 “인간 군상들 가운에 가장 천한 족속!”이라고 외쳤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세금이 결국 침략자인 로마 제국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세리들을 향해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라 칭했습니다.
세리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 세리는 언제나 이방인들과 접촉하였기에, 상시적으로 율법을 어겼으므로, 쓰레기 중에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토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증오와 멸시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바리사이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의로움에 대한 도전장이었습니다.
그날 밤 레위의 집은 그야말로 가관이었습니다. 오랜 친구 레위가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동료 세리들, 죄인들, 나름 한 주먹 한다는 사람들,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죄다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인들 사이에 태연히 앉으셔서 주거니 받거니 포도주 잔을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자칭 의인들인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넌지시 묻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코 복음 2장 16절)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쫌생이 찌질이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고,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큰 선물로 다가옵니다. 언제나 파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의 선택 앞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코 복음 2장 17절)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이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과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과 방식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로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곧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죽으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가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회개해야 용서하겠다고 완고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자비롭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희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 생활에서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시고 주님께서는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다닐 수 있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그러기에 병든 사람들은 자기 힘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자기 힘이 아무리 세다 하여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의로운 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시편 12,2)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죄인인 채로 그냥 남아있게 하시려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
-한상우신부-
등잔 밑이
어둡다.
우리자신을
새롭게
보게된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이다.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다.
포기할 줄
모르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새로운
일이시다.
복음의
생명력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겸허함에 있다.
망가져 있는
우리자신을
부르시는
사랑에 있다.
의인의 모습과
죄인의 모습이
뒤섞여 있다.
부르심을
선물로
주셨다.
부르심은
만남이다.
숨겨져 있던
선함과
아름다움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사랑은
결국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든다.
사랑은
서로를
비추어준다.
예수님의
진정한 힘은
죄인을
부르시는
사랑의 깊이에
있다.
모두가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빼앗긴
사랑의 품위를
되찾아 주신다.
부르심은
변화와
기쁨이다.
그리고
하느님 자녀로
다시 돌아가는
회복이다.
살아볼만한
삶이다.
죄인을 다시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꾸어놓는
신비이다.
주님의 힘
주님의
그 방식을
믿고 따른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드러납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십니다. 레위는 복음사가 마태오로 알려진 인물이지요. 이 부르심 대목이 마태오복음에서는 있는 그대로 "마태오"라 표기되지만,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서는 "레위"라 불립니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2,15)
레위 집에서 벌어진 잔치에 "많은 세리와 죄인도" 함께합니다. 말하자면 레위의 직업적 동료들이나, 서로 비슷한 평판을 받는 이들이 몰려온 겁니다. 그들도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었나 봅니다. 자신들을 소외시키거나 함부로 내치지 않으시리라는 믿음도 있었겠지요.
세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혈세를 과중히 받아내어 부당한 이득을 착복하고 나머지를 로마에 상납하는 이들이고, 공공연하게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이라면 아마 율법이 정한 여러 규정을 지킬 수 없었던 이들일 겁니다. 그들과의 접촉으로 불결하게 될까봐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 사제들은 상종하기조차 꺼리는 이들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벗이 되어 주십니다. 종교 기득권층의 눈에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며 먹보요 술꾼"인 예수님이 늘 불편했을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선한 의인이면서도 상종 못할 인간들 곁에 서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니까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불평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이 오신 목적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오늘 제게는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이 슬쩍 삼키신 말씀들이 들리는 듯합니다.
"나는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이들)을 부르러 왔다."라고요.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기준으로 의인과 죄인이 갈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는 믿음이 그 기준이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끝까지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 구원의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이고요.
제1독서에서는 죄인들을 품으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를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잠시 가면을 쓰신 것도 아니고, 사람인 척 행세만 하신 것도 아니지요. 그분은 인간의 육을 취하심으로 보통의 사람이 겪는 약함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겟세마니에서의 고뇌와 십자가 위에서의 절규가 이를 생생히 증언하지요.
그렇기에 예수님은 인간의 약함을 동정하고 연민하십니다. 그분 마음에는 우리를 향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애잔히 흐릅니다. 다만 유혹에 넘어가거나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오히려 그분을 죄인으로 몰아 극형에 처했지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히브 4,14)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믿는 이는 구원 안에 있습니다. 혹시 의혹과 불안을 안고 어정쩡하게 구원을 의심하고 있다면 스스로의 믿음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약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한 확신이 되도록 여러 모습으로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성제, 그분을 모시는 성체성사, 죄를 사해 주시는 고해성사, 그리고 말씀과 기도와 자선, 선행과 희생 등 다양하지요. 그중에서 "말씀"은 우리 영혼이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믿음을 견고히 하는데 탁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고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말씀이 우리 믿음을 순수하게 해 주시고, 또 거룩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늘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지만,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에 힘입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갑시다. 매일 말씀에 머물러 그 빛에 영혼을 쬐이고, 그 손길에 의탁하는 이는 나날이 새롭고 견고해지는 영혼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히브 4,16) 이 말씀이 곧 죄인이며 의인인 우리에게 다가오신 진리입니다. 죄인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두려우면서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김찬선신부-
우리에게 하느님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무서우신 하느님과 자비하신 하느님,
초월적인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
그리고 사람에 따라 하느님을
두려움의 하느님으로 만나기도 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만나기도 하는데
보통 아버지 하느님이 초월적인 분이시고 두려움의 하느님이라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을 얘기합니다.
먼저 아버지 하느님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죄지은 후의 아담과 하와지요.
이들은 자기의 벌거벗은 모습을 감추려고 옷을 해 입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나무 사이에 숨는데 그 바람에 자기들은 하느님과 단절되지만 하느님은
감춘다고 감춘 그들의 숨은 모습을 다 보시며 너희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또한 시편 139편을 떠올립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말소리 제 혀끝에 채 오르기 전에 주는 벌써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어둠이나마 나를 덮씌워서 빛인 듯 밤이 나를 휘감는다면 할 때에도
어두움 그것마저 당신께는 어둡지 않아 밤 또한 낮과 같이 환히 밝으며
캄캄함도 당신께는 빛과 같으오리이다."
제가 너무도 사랑하는 시편인데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감출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속이 편하고 다윗처럼 벌거숭이로 나가려고 합니다.
다윗도 자기 죄 숨기려고 하다가 들통이 나니 오히려 이렇게 노래하지요.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히솝의 채로써 내게 뿌려 주소서.
나는 곧 깨끗하여지리이다. 나를 씻어 주소서 눈에서 더 희어지리다."
문제는 우리가 다윗처럼 이리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단죄와 벌만 있다고 생각되면 하느님이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우리 편인 대사제가 계시다고 오늘 히브리서는 얘기합니다.
히브리서는 하느님께서 두려워 당신께 오지 못할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 편이 되어줄 당신의 아드님을 대사제와 인도자로 보내셨는데
그분이 우리보다 앞서 하늘애 올라가 계시니 은총의 어좌로 나가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여기서 그 유명한 히브리서의 대사제론이 나옵니다.
사제란 어떤 존재입니까?
겁주는 것이 사제입니까?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무섭게 죄를 추궁하는 존재입니까?
사제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의 고통에 동병상련하고 사람들 마음을 하느님께 아뢰는 중개자지요.
그래서 우리는 두 하느님, 두려우면서도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동시에 만나야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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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서로 남의 탓을 하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리스도 공동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들어와 혼자 의인인 체할 수 없습니다.
나로 사는 이상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인 줄 알아야 ‘자아 부정’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선이시고, 선을 받아들이려면 악인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품은 공동체에 머물러야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나’가 죄이고 ‘그리스도’만이 선인 줄 모르는 공동체에 머물면
결국, 내가 의인인 줄 착각하고 살다가
그 공동체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삼용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