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1. 14. 07:14

2021 1 14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마르1,40-45)


A leper came to him

and kneeling down begged him and sai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Moved with pity, he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the leper, and said to him, 
“I do will it. Be made clean.”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and he was made cle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치유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나병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에 걸린 이들은 사제로부터 부정한 이로 선언되었고, 다시 건강해져 사제로부터 건강한 이로 판명된 뒤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치유되었음을 인정받을 때까지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쳐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사람임을 표시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환자가 아니라 죄인으로 여겨졌기에 육체적 고통만큼 심리적인 소외가 그들을 힘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나병 환자의 처지가 무척이나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각이 마비되고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육체적 고통보다 사람들에게 눈총받고 소외당하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병든 몸과 닫힌 마음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 또한 지나간 시간들 가운데 상처로 썩어 문드러지고 떨어져 나간, 말하지 못하고 숨기고 있던 아픈 마음이 있다면 주님께 내보이며,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정성을 다하여 오늘 예물 기도처럼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소서.”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한 적이 있습니다. 식당 안에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마침 어떤 대학 교수가 나와서 이야기합니다. 이 모습을 본 일행 중 한 명이 “나는 저 사람 꼴도 보기 싫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무조건 부정적인 말만 해서 싫다는 것입니다. 물론 생각의 자유니까 좋을 수도 싫을 수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말만 해서 싫다는 이분 역시 부정적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 대학교수에 대해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반대로 좋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인기 있는 책도 출판했었고, 이곳저곳에 많은 강의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조건 싫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싫다는 극단적인 생각은 우리의 사고를 좁게 만들어서, 쉽게 볼 수 있는 좋은 점도 전혀 못 보게 합니다. 또, 이런 사람을 주위 사람들이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랑과 평화를 생산하는 사람 곁에 함께 머무르고 싶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치유의 기적을 베푸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직접 손을 대시어 그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부정한 사람이기에 똑같이 부정해질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율법의 계명을 어기십니다. 외적 불결이 혐오 사항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의 모습은 끔찍합니다. 더군다나 나병이라는 병에 걸리면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몸이 아픈 것을 넘어서 마음의 고통이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픔을 아시기에 주님께서는 그냥 의지만으로 치유해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마음까지 치유해주시기 위해, 그의 몸에 직접 손을 대신 것입니다.

겉모습만 보고서 쉽게 판단하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늘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빠져 있다면 그 어떤 행동도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고, 따뜻한 당신 품으로 끌어안으십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생텍쥐베리).


최고의 노래

짧은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웬델 베리의 ‘최고의 노래’라는 시입니다.

모든 노래 중에서
최고의 노래는
고요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
하지만 먼저
그 고요를 들어야 한다.

무릎을 딱 치게 만드는 시였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새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 새소리가 완벽하다고 느껴질 때는 ‘고요’ 속에서였습니다.

고요를 간직하고 있을 때, 내 주변의 최고의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요와는 거리를 두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미 내 옆에 있는 최고의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은총을 받기 전보다 받은 후가 더 중요하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는 큰 믿음을 보이고 병을 치유 받아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지만, 결국엔 예수님께 불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그가 널리 퍼뜨리고 다녀서 예수님은 더는 다른 고을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실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내용의 복음이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나병 환자가 그 이야기를 퍼뜨렸는지에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루카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그 이야기가 저절로 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만 유독 치유된 나병 환자 때문에 복음 전파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 사가가 불순종이 교회를 얼마나 분열시키고 복음 전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특별히 지적하고 싶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던 것처럼 모두가 그리스도를 찾으면 사실 옳고 그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도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싸움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보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그분의 뜻에 불순종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치유된 나병 환자도 좋은 의도로 이 사실을 알렸겠지만, 사실 예수님의 명령보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이런 교만은 마치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악령이 다시 들어온 것처럼 큰 해악을 끼칩니다. 그러면 그의 운은 거기까지입니다.

 

      신학교에서 모든 신학생의 소원은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생들은 더 나아가 ‘멋진 사제가 되는 것’을 꿈꿉니다. 그러나 무엇이 멋진 사제인지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제가 수업을 하다가 신자들이 가장 바라는 사제 상을 말해보라고 하면 ‘강론 잘하는 사제’, ‘인사 잘하는 사제’, ‘신자들과 잘 어울리는 사제’ 등을 대답합니다.

      그런데 제가 기억하는 1, 2위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조사에서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상을 조사했는데, 2위는 ‘기도하는 사제’였고, 1위는 ‘겸손한 사제’였습니다. 아마 신자분들은 당연하다고 하시겠지만, 막상 신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이 두 가지는 대답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저도 ‘강론 잘하는 사제가 제일 인기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다가 이것을 보고 조금은 충격이어서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은총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은총을 받으면 교만이 커져 순종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오히려 교회에 해가 되는 인물이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교회를 위해서라도 은총을 청할 때보다 은총을 받고 난 후의 자세를 더 중요하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선물을 주어서 그 사람 상태가 더 나빠지면 안 되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은총을 얻기 위해 지금의 상태를 주님께 청하는 것보다 그것을 받고 난 후의 자세를 청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어떻게 1위를 그렇게 오래 하시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유재석 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마는 그런 거 같습니다. 정말 하루하루 맡겨진 일을 하기에도 바빴습니다. 사실 뭐 제가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개그맨으로서 울렁증에 여러 가지 콤플렉스도 있습니다.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뭐 그리 설득력 있는 대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 그는 문득 20년도 더 전에 무명시절 때 절실하게 매일 바치던 기도내용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어서 말했습니다.

 

“제가 워낙 예전부터 참 많이 기도했어요. 자기 전에. 방송이 너무 안 되고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그랬을 때 매번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진짜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저에게 개그맨으로서 기회를 주신다면, 나중에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지금 마음과 달라지고 초심을 잃고 이 모든 것이 나 혼자 얻은 것이라고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생각한다면, 정말 그때는 정말 엄청난 이 세상의 어떤 고통보다도 큰 아픔을 나에게 주신다고 해도 저는 ‘저한테 왜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나요?’라는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요

      이런 기도를 드린 이유는 이것입니다.

 

“주변에서 정말 많은 사람이 스타가 되고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느낀 점은 정말 뜨고 나서 변했다는 사람은 되지 말자. 항상 겸손하고, 항상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노력하고,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재석 씨가 이렇게 오랫동안 1위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가 무명시절부터 기도했던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명 때 뜨기만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는 뜨고 나서도 겸손하겠다는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도 무언가 청할 때 지금 부족한 것을 하소연하는 것보다는 받고 나서 더 겸손하겠다는 결의를 말씀드리는 것이 은총을 받기에 더 나을 것입니다. 어쩌면 어떠한 은총을 청할 때 더 겸손해지고 더 기도하겠다는 결심이면 못 받아낼 은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작년 겨울에는 몰랐는데 올 겨울에는 뉴욕의 눈을 경험했습니다밤새 내린 눈이 무릎까지 닿았습니다세상이 온통 하얀 겨울왕국이 되었습니다눈을 밟고 성당에 가서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시간 정도 눈을 치우니 겨우 빠져 나갈 길을 생겼습니다다들 익숙한 방법으로 눈을 치우고 있었습니다성당은 눈 치우는 기계가 넓은 주차장을 치웠습니다눈 치우는 삽을 들고 집 앞의 눈을 치워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넓은 길은 시에서 눈을 치워서 인지 다니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하얗게 변한 세상처럼 코로나19로 인한 근심과 걱정도 모두 깨끗하게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하얗게 변한 세상처럼 갈등과 분쟁도 모두 사라지고 기쁨과 평화가 오면 좋겠습니다.

 

눈을 보면서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났습니다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눈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이 대답했습니다. ‘길이 지저분해져요옷이 더러워져요차가 지나가면 물이 튀겨요.’ 눈이 녹은 것에 대한 부정적인 대답이 많았습니다그런데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봄이 와요.’ 아이는 눈이 녹는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눈이 녹으면서 계절이 바뀐다는 시간의 흐름을 보았습니다사랑하는 아내가 아프다고 하면 병원에 가봐라는 남편의 대답은 정답이지만 아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아내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사실 저도 현상에 머물 때가 많았습니다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문제를 같이 고민하고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주고배려하는 것이 정답인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라는 현상에 머물렀습니다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잊어버렸습니다홍해 바다를 건넜던 놀라운 기적을 잊어버렸습니다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렸습니다광야라는 현상에 머물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잊어버렸습니다광야는 거칠고 황량한 땅입니다마실 물도 귀하고 밤에는 추운 곳입니다그러나 광야는 나쁜 관습을 버리는 정화의 땅입니다광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거룩한 땅입니다눈이 녹으면 봄이 오듯이광야를 거쳐야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불평과 원망의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감사와 찬미의 마음이 있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는 죄인처럼 살아야 했습니다육체가 병들어가면서 절망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사랑하는 가족과도 헤어져서 외롭게 살아야 했습니다그러나 나병환자는 바람결에 주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예수님께 다가와서 간절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육체의 병이 치유되는 것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나병환자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우리도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주님 안에서라면, 사나 죽으나 행복한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신부-

 

데레사 자매님의 영안실에 다녀왔습니다.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날, 바람에 흩날리는 한송이 눈처럼 그렇게 홀연히 떠나가셨습니다. 아직 떠나기엔 이른 나이였는데...큰 아쉬움과 많은 여운을 남긴 채 그렇게 떠나셨습니다.

  

데레사 자매님께서는 자녀들을 훌륭하게 잘 키운 다음, 세상 착한 형제님과 함께 저희 살레시오 나눔의 집으로 건너오셨습니다. 남들은 한번 하는 육아를 두번이나 하신 것입니다. 혈기왕성한 우리 사고뭉치 아이들 양육하시느라 마음 고생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어떻게 소식을 전해들었던지, 이제는 늠름하게 성장한 청년들이 영안실을 찾아왔더군요. 깊은 슬픔에 잠긴 형제님을 꼭 끌어 안아주며 위로해주었습니다. 천상에 계신 자매님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환한 미소를 짓고 계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러 갔을 때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살레시오 협력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이 참으로 행복했다고...돈보스코를 만나고, 돈보스코 때문에 좋은 아이들과 인연을 맺은 것이 정말 큰 축복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실을 나서며 참으로 마음 훈훈한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데레사 자매님께서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늘 주변 사람들을 극진히 챙겼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10년 세월 동안 지극정성으로 양육하셨던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해주신 고마운 분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선물로 맛있는 사과를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선물을 받은 분들은 다들 감동의 눈물을 철철 흘리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자녀분에게 한 가지 신신당부를 하셨답니다. 장례식을 가급적 간소하게 치러달라고, 따로 수의 마련하지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입혀달라고, 조금이라도 아낀 몫은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 위해 후원해달라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주변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 생각하시며 큰 사랑을 남기셨습니다. 한 신앙인으로서, 수도원 담 밖의 돈보스코의 제자인 살레시오 협력자 회원으로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자매님의 삶과 죽음을 지켜보며, 죽음이란 게 그렇게 두려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죽음 조차 초월하고 극복할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는 어찌 보면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 진단을 받는 즉시 인간 사회로부터의 즉각적인 추방과 격리가 이루어졌습니다. 가족들과 생이별 과정은 장례 절차와도 비슷했습니다.

  

이런 나병 환자가 오늘 주님을 만나, 새로운 피부,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삶을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님과의 ‘찐만남’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는 일종의 파스카 체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코 복음 1장 41~42절)

 

우리 역시 이 지상에서부터 예수님과의 찐만남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는 파스카를 체험하면 좋겠습니다. 살아생전 수도 없이 절절한 주님 체험을 하셨던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과 함께라면, 주님 안에서라면, 사나 죽으나 행복한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스스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율법규정(레위 13,45-46 참조)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저기에게 접근해 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도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해줍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입니다.

이는 동시에,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공가이요 장소로 자신을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바를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저도 바라게 하소서.

당신이 하시고자 한 바를 저도 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만지소서.

저의 바람과 하는 일을 깨끗하게 하소서.

저를 새롭게 하시고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라

-반영억신부-


편찮으신 분이 많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은 살리는 일입니다. 인간됨의 회복에 있습니다. 차별과 소외로 공동체에서 갈려나간 이들이 다시 공동체 안에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치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송영진신부-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0-45).”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전반부만 보면,

이 이야기는 다른 병자 치유 이야기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간청했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그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후반부를 보면,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람의 이야기이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려고

하시는 것과 사람들이 받기를 바라는 것이 어긋나 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고,

예수님께 무엇을 청해서 받아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다른 병자 치유 이야기들과는 많이 다른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1)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가 간청했기 때문에 그를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무슨 의무감 때문에 그를 고쳐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일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이 말씀에서 ‘알고 계신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알고 계셔서 그것을 주신다.’입니다.

아버지 하느님만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는 예수님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청원 기도를 하는 것은, 주시는 그것을 ‘잘 받기 위해서’입니다.

 

2)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의 희망’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영육 간에’ 건강해지는 것, 그래서 지치지 않고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까지 잘 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고,

그것을 바라셔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고 표현할 때가 많은데,

그 순종도 당신이 원해서 하신 일입니다.

 

3)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당신이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뜻인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 병자 자신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만 믿고 있었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믿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의 치유를 원해서 몰려든 사람들의 간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시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의 건강’만을 원했고,

건강을 얻은 다음에는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미련 없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물론 ‘몸의 건강’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지까지 잘 가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몸의 건강’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영혼’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안 믿고, 오로지 ‘몸’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몸’을 가꾸는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몸’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간청해야 할 것은 바로 ‘영혼 구원’입니다.

‘병의 치유’와 ‘몸의 건강’을 청하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4)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라는 말은,

그 병자는 예수님께서 ‘단단히 이르신’ 말씀을 따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좋은 뜻으로 생각하면, 그는 아마도 병을 고친 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그리고 그 기쁨을 도저히 누를 수가 없어서,

그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부탁’이기도 합니다.

그는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사람이고,

‘생명의 은인’의 부탁을 안 들어 준 사람입니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는 아마도 “예수님의 명령은 이해할 수 없다.

이 기쁜 소식을 왜 감추라고 하시는가?” 라는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따르는 것, 그것이 순종입니다.

그의 불순종은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믿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에서 순종이 나옵니다.

 

5)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무르셨다.” 라는 말은,

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예수님께서 ‘거리 두기’를 행하셨다는 뜻입니다.

(‘들어가지 못하시고’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들어가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들어가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 ‘덕분에’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예수님은 그 병자 ‘때문에’ 바깥 외딴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예수님의 활동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내 기분대로, 내 입맛대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복음: 마르 1,40-45: 깨끗하게 되어라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한센병 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하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셨다. 그러자 한센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한센병 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그분은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티토 1,15) 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즉 한 사람 안에 있는 불결이 다른 사람에게 옮지 않으며, 외적인 불결이 내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한센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한센병은 사라져 버린다. 주님의 손은 한센병 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한센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가족들도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또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세상에는 이름 없는 천사들도 많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한센병 환자를 사제에게 보내시어 사제직을 존중하셨고, 치유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셨다.(마태 8,4; 마르 1,44; 루카 5,14)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이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치유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 42)

-한상우신부-


변화!
깨끗한 변화가
필요한 우리들
삶의 공동체이다.

한 사람의
새로운 변화가
공동체에
생기를 준다.

사람과
공동체를
변화시키신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사랑하게
만드신다.

나병환자같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최악의 상황이
최선의
상황으로
바뀌게된다.

공동체도
공동체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사랑과
신뢰로
바뀌게된다.

예수님과 함께
다시 치유되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사랑은 먼저
마음을 치유한다.

고립과
자아도취
교만을
치유한다.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공동체의 삶은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

소중하게
보아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된다.

사랑의
존재임을
깨닫게된다.

사랑으로
깨끗하게
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때로는 버겁고
힘겨운 시간이
새로운 변화의
은총이 된다.

공동체의 방향은
새로운 변화인
용서와 사랑이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깨끗하게 되는
용서의 여정을
사랑으로 함께
기도하며
걸어가는 것임을
믿는다.

마음 깊은 곳에서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 소리가
들린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식별에 대한 지침'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마르 1,41)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청합니다. 당시 관습 안에서 그는 함부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처지였지요. 그런데도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가까이 온 건, 예수님 안에도 자기가 깨끗해지길 바라시는 마음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주춤주춤 당신께 다가오는 그를 보자마자 예수님 마음에서 연민의 사랑이 솟으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부정하고 불결하다고 낙인 찍힌 그를 피하기는커녕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십니다. 사람보다 문자를 우선시하던 완고한 금기가 자비 앞에서  맥없이 무너집니다. 그의 두려움과 갈망을 아시는 예수님은 주저없이 그가 바라는 대로,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바를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마르 1,43)

예수님께서는 깨끗해진 그에게 단 하나를 명하십니다. 그것도 "단단히" 이르시지요. 방금 전 환자를 위로하고 어루만지신 걸 보면 그분이 마냥 선하고 부드러울 것 같지만 그렇다고 정색을 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을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치유된 이는 분명 감사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 말씀을 꼭 지켜야겠다고 생각도 했을 테구요. 그런데 그간 겪은 지독한 고통의 상처가 사라졌음을 사제뿐만 아니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도 싶었나 봅니다. "단단히" 이르시는 내용을 겸손이나 공치사 정도로 간과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 섣불리 알려지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권력과 건강과 재물을 보장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목숨을 바쳐 인류의 죄를 속량할 메시아이심이 드러날 때까지 답답하더라도 기적을 입은 이들과 제자들은 기다려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왜 이스라엘에 분노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마음을 완고하게, 시험, 반항, 떠보며 시험, 마음이 빗나간자들, 밎지 않는 악한 마음..."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유연하게 수용하고 순종하는 마음, 곧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마음을 가지라고 권고하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히브 3,14)

"그리스도의 동료!" 참으로 영광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의 제자이고 벗이며 형제인 우리는 그분의 연민, 자비, 사랑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이 어질고 겸손하신 예수님, 제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라는 '예수 성심 호칭 기도' 안의 한 대목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그저 분별 없이 착하게 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의 결심을 굳건히 지님"
우리는 복음 속에서 치유된 이에게 예수님이 보이셨던 단호함도 '가엾이 여기는 마음' 못지않게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선하고 착한 연민과 자비의 마음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유야무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미숙함과는 다르니까요.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고집하는 완고함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제대로 식별해야 하지요. 필요한 순간에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를 선택하고 따르는 식별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감히 "그리스도의 동료"라 불리우는 우리에게는 '연민의 사랑'과 '굳건한 따름의 의지'가 동시에 중요할 것입니다. 은총을 그득 받고도 자칫 주님의 뜻과 그분 말씀이 이 세상에서 퍼져나가는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 균형은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를 식별하고 실천에 옮기는 영적 여정을 더 성장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율법 정신 안에서, 예수님처럼 그때그때 연민의 사랑이 시키는 대로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니까요. 완고히 고착되어 있을 수 없고, 그래서 모든 상황을 케이스로 만들어 대응할 수 없지요. "그리스도의 동료"로서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자유로이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마음이 없는

 -김찬선신부-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히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

저도 마음을 주제로, 완고한 마음과 가엾은 마음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마음에 대한 많은 이론이 있고 특히 근자에 와서 심리학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가히 심리학 전성시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심리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래서 학자들 이론에 크게 관심두지 않기에 마음에

대해서도 제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는데 그 거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란 이성과 감성과 의지의 종합적인 작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음이 복잡하다.'는 말이나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유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고,

이것에 영향을 주는 것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육체도 영향을 주고, 욕구도 영향을 주고, 정신도 영향을 주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뭔가 결핍을 느낄 때

욕구가 생기는데 이 욕구에 이성이 반대를 하더라도 감성이 강하게

작용하면 욕망으로 발전할 수 있고, 욕망이 생겼다 하더라도 의지가

동의하지 않으면 욕망으로 그치지만 의지가 동의하면 욕심으로 발전하지요.

 

그런데 육체나 본능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이 있는데

어제 이미 얘기한 바 있는 영성 생활이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정신/영을 추구하는 것이 영성 생활이라는 것은 어제 말씀드린 바입니다.

영성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정신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영/정신에는 육의 영과 주님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의 육체와 본능을 따르는 썩어빠진 정신이란 것이 육의 영이라면

고귀한 정신은 육체와 본능을 따르거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치 않고

초월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거라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기도와 헌신의 영/정신은 성령과 교감하는 정신이라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와 헌신의 영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마음이 민감하게

되어 오늘 히브리서가 인용하는 시편 말씀처럼 오늘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흘려듣거나 목석과 같이 듣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에 늘 깨어있을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라는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마음이 민감하지 않고 완고하다는 것은 아예 아무 말을 듣지 않는 것도

포함하지만 옛날 얘기만 간직하고 오늘 듣지 않는 것도 포함키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말만 기억하고 오늘 들리는 말에 무디기 쉬운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정확히 똑같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면 하느님 말씀에만 민감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처지와 필요 특히 아픔과 고통들에 대해서 민감해야 하는데

이웃의 아픔과 고통들에 민감함이 바로 가엾은 마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심코 지나친다는 우리말이 있는데 이 무심하다는 말을 뜯어보면

마음이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세상에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있다면 그런 사람 무시무시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이 무심한 사람이 꽤 있습니다.

모든 일에 무심한 사람도 있고 귀찮은 일에만 무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곧 아프리카 난민 돕기 광고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것처럼 또는

전기의 퓨즈를 끊듯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는 사람인데

나는 어떤 사람인지,

마음이 없는 사람인지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월 17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마르1,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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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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