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12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1. 12. 07:32

2021 1 12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코 1,21ㄴ-28)


Jesus rebuked him and said,

“Quiet! Come out of him!”
The unclean spirit convulsed him

and with a loud cry came out of him.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예수님.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가 전하고 있듯 우리는 하느님께서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신”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 살지만 자주 하느님의 뜻을 잊고 정반대로 살아가면서 주님께 구원을 청하기도 합니다. 더러운 영이 심어 놓은 많은 것들 속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며 어둠 속으로 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과 행동으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를 구원하시며,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더러운 영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떨어지게 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과 멀어지게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신원에 관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실 이 외침은 더러운 영이 주님께 한 신앙 고백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백하였고, 더러운 영은 하느님을 알아보았지만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외칩니다.
더러운 영은 우리 인간을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막고,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을 믿기보다 세상의 많은 물질과 자기 자신을 믿게 만듭니다. 악은 끊임없이 우리를 재촉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그분에게서 도망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기를 희망하며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드리며 그분을 사랑 가득한 분으로 여깁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선생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지요. 교사가 되어 학생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면서 즐겁게 생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원했던 선생님이 되었지만, 그 꿈이 얼마나 실현되기 힘든 일인지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찾아오는 학생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존경심도 전혀 없고, 자신에 대한 호감도 없었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예전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를 친한 고등학교 동창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아주 뜻밖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너 학생 때 학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 지금도 학교를 좋아하지 않는 것 아니야?”

학생 때부터 선생님이 된 지금까지도 학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인이 좋아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고 또 존경을 표현할 수도 없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고 없고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람들은 호감을 느끼고 그래서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감도 없고, 함께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내 안에 사랑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면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라면서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베드로도 예수님에 대해 똑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통해 커다란 칭찬과 함께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얻었습니다. 하지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혼이 납니다. 그의 말 역시 정답인데 말이지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고, 악마는 두려움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얼마나 사랑을 간직하면서 생활했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혹시 자신이 받을 사랑만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사랑을 주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가장 먼저 자신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고백을 해야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게 다가가야 주님으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넘치는 우리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험한 언덕을 오르려면 처음에는 서서히 걸어야 한다(세익스피어).


평화로워지십시오.

형제여, 평화를 바란다면 스스로 평화로워지십시오.
그대의 해방된 마음만이 평화입니다.

형제여, 사랑을 바란다면
스스로 사랑이 되십시오.
그대 자신이 사랑입니다.
그대가 찾는 모든 사랑이 바로 그대 자신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평화를 구하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도 사랑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평화를 주십시오.
날마다 그대 손으로 평화를 일구십시오.
그대가 사랑을 주십시오.
사랑을 쏟고, 베풀고, 전하십시오.
그러면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대가 받은 풍요로운 사랑을 주면서 그대는 행복해질 것입니다.

마르코 구찌의 ‘평화로워지십시오’라는 시입니다.

평화와 사랑. 늘 구하기만 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미 내 안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것을 나눠야 다시 새로운 평화와 사랑이 채워집니다.

 가르침이 권위를 잃는 이유: 본질을 꿰뚫지 못하기 때문

-전삼용신부-


첫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신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시작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파자의 권위는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악령을 쫓아낼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고 악령은 성령으로 쫓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말에 성령의 힘이 더해지면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라야 권위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가르치기는 하는데 악에서 구하는 가르침이 아닌 경우입니다. 악에서 구하는 가르침이 아니라면 결국 그 가르침은 권위를 잃게 됩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전설 중에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한 생쥐가 고양이가 너무 무서워 고민하다가 뛰어난 능력을 갖춘 마술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도움을 구했습니다.

 

“마술사님, 저는 고양이가 너무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술사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생쥐를 불쌍히 여겨 생쥐를 고양이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갔습니다.

“마술사님, 제가 고양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개가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자 마술사는 고양이가 된 생쥐를 다시 개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개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간 것입니다.

“마술사님, 개가 되고 보니 이제는 사자가 너무 무섭습니다.”

할 수 없이 마술사는 개가 된 생쥐를 사자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제 동물의 왕인 사자가 되었으니 더는 무서워하지 않겠지!’ 하고 마술사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마술사님, 제가 사자가 되고 보니 이제는 사냥꾼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덩치 큰 사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는 생쥐를 어이없이 쳐다보던 마술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너는 몸은 사자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생쥐의 마음이구나. 그러니 다시 생쥐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이 우화에서 멍청한 대상은 쥘까요, 마술사일까요? 저는 마술사가 더 멍청해 보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해주지 않고 겉도는 가르침만 주어 자신은 잘났고 쥐는 여전히 못난 것만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훌륭한 마술사라면 쥐의 두려움을 빼내 주려 노력했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의 말이 잔소리가 되는 것일까요? 아이에게서 본질적인 악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게임 좀 그만하고 공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아이는 게임을 끊고 공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래 봐야 행복하지 않습니다.

 

      게임을 하는 아이는 게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을 하게 시키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게임을 포기하고 공부를 해봐야 결국 자아로부터 해방되지는 못합니다. 공부도 게임과 다를 게 없습니다. 경쟁 속에서 자아에 여전히 사로잡힙니다.

 

      그렇다 보니 부모의 말은 결국 진짜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다음부터는 부모의 말이 권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어 봐야 참으로 자아에게서 벗어나는 평화는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입교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입교 이유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세상살이의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사실 마음의 평화를 더 받을 수 있는 종교는 불교입니다. 불교는 삶의 고통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의 철학적 통찰을 제시합니다. 붓다가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를 닦은 결과물들이 교회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평화를 찾는 이들에게는 불교의 가르침이 더 신통하기만 합니다. 가톨릭교회에 입교해서도 결국에는 스님들의 가르침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는 평화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악령에게서 벗어나게 만드는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악령이 나와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에 있습니다. 사실 내 안에 있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자아내는 자아도 악령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악령과 같이 되는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는 평화는 이 악령에서 벗어나서 얻는 평화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가 곧 ‘악’이란 뜻일까요?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주님의 기도 중 “악에서 구하소서”에서의 ‘악’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교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한 위격, 곧 사탄, 악마, 하느님께 대항하는 천사를 가리킨다. ‘악마’(dia-bolos)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가로막는’ 자이다.”(285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의 평화도 지키려는 발언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인간도 자기 생각에만 집중하면 사탄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말씀에 권위가 있으려면 당연히 악령으로부터도 사람을 구할 수 있어야 하지만, 더 보편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과 동침을 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마음의 평화만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마귀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내 자신이 곧 마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 참 해방인지 먼저 신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악으로부터 해방해 주려는 말을 할 때 권위 있는 가르침이 됩니다.

 -조재형신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하였습니다구역장과 반장을 위한 월례연수를 기획하였고여 총구역장 피정을 준비하였습니다월례연수는 각 지구에서 있었기에 한 달이면 18번을 지구로 나가야 했습니다겹치는 날은 국장 신부님과 나누어서 나갔습니다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에는 교구의 사목교서를 설명하고간단한 오락을 준비하였습니다새해가 시작되는 1월에는 교구장님의 새해 인사를 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주교님의 배려로 월례연수에 참석한 구역장과 반장들에게 묵주를 선물하기도 했습니다마이크를 잡을 일이 많았습니다총구역장님들의 소개로 본당에서 대림사순 특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함께하는 여정의 봉사자 교육에도 함께 하였고성체분배자 교육도 함께 하였습니다사목위원 교육에도 함께 하였습니다.

 

사목위원들은 본당 사제와 자주 만나게 됩니다사목위원 교육을 하면서 본당 신부님의 유형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제가 보좌 신부로 모셨던 신부님들의 사목을 보면서 체험한 것들을 나누었습니다첫 번째는 기도하는 사제였습니다신부님은 하루에 4시간 이상 기도하셨습니다신부님의 기도 방에는 커다란 초가 있었습니다제방의 초는 1년이 지나도 거의 줄어들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신부님 기도 방의 초는 자주 바뀌었습니다초가 다 타들어가 재가 될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꽃의 향기가 발이 없어도 퍼지듯이 신부님의 기도는 본당의 중심이 되었습니다조용한 성당에서 기도하시던 신부님의 뒷모습이 생각납니다아이들과 함께 롤러스케이트를 타러 가셨고보좌신부들과 함께 동네 산책을 하셨습니다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듯이본당의 일들이 막힘없이 진행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정확한 사제였습니다신부님께는 시계가 따로 필요 없으셨습니다언제나 같은 시간에 산보를 하셨습니다영어독일어이태리어를 자유롭게 말씀하셨습니다건축미술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셨습니다본당의 재정도 환하게 아셨고투명하게 운영하였습니다제게도 두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책을 늘 가까이 하라고 하셨습니다서양의 고전을 소개해 주셨고선물해 주셨습니다책을 읽고 신부님과 대화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감사할 일입니다재정에 관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사제는 본당 신자들이 내는 헌금과 교무금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성당 마당에 있던 감나무에서 익지 않았던 감이 떨어졌습니다신부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감나무도 더 큰 감이 열리도록 불필요한 감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신부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경청하는 사제였습니다외국에서 유학하시고 돌아오신 신부님은 첫 본당 사제가 되었습니다많은 것을 아셨지만 신부님은 늘 먼저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수녀님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셨습니다수녀님께서는 성당 마당에 텃밭을 가꾸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사목회장님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셨습니다중요한 결정은 언제나 사목회장님과 먼저 상의하였습니다부족한 저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셨습니다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성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수녀님은 여성 구역장과 반장을 대상으로 성서공부를 하였고저는 사목위원들과 함께 성서공부를 하였습니다마르코 복음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토론했던 것이 기억납니다예수님의 권위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예루살렘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와는 달랐습니다예수님의 권위는 가난한 이병든 이외로운 이고통 받는 이와 함께하는 권위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다스림과 권위입니다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다스림과 권위를 비판하셨습니다그들의 다스림과 권위는 위선과 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자신들이 지고 가야할 짐을 남에게 떠 넘겼기 때문입니다말은 있지만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율법의 조문은 알지만 율법의 정신은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다스림은 양육강식적자생존승자독식의 다스림이 아니셨습니다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묶인 이를 풀어주고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는 다스림입니다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까지도 찾아서 양 우리로 데려오는 다스림입니다. ‘다스림과 권위를 잘못 이해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그런 다스림과 권위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기도하는 사제투명한 사제경청하는 사제는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였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전도 여행의 베이스 캠프였던 카파르나움에 계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회당 안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을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더러운 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코복음 1장 24절)

  

더러운 영이 들린 가련한 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눈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봐야겠습니다. 2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바로 그 시선으로 오늘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옛날 회당 안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마냥 ‘뭔가’에 단단히 홀린 나, 하느님 아닌 엉뚱한 대상에 단단히 빠져든 나, 한 순간 자신을 통제 못해 언제나 돌아서서 크게 가슴 치는 나를 예수님께서 자비심 가득한 눈길로 내려다보십니다.

  

이 시대 또 다른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나, 죽음의 문화에 깊이 빠져든 나, 극단적 세속주의와 편리주의에 사로잡힌 나, 배금주의와 소비향락주의에 젖어든 나, 여러 가지 중독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옛날 더러운 영에게 외치셨듯이 오늘 나에게 외치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복음 1장 25절)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더러운 영의 추방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랜 세월 더러운 영의 횡포와 올가미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이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찬 모습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외친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영들에게 명령하지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코 복음 1장 27절)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이영근신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사고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인 악마추방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당신께서 선포하신 “복음”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를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입니다. 무슨 권위 인가? 다름 아닌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곧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말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이 구마치유는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여 행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구마 할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엄의 영은 주 예수께로 가라”고 명함으로써, 예수님의 힘과 권위를 빌어 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권위를 가지고

 -반영억신부-

오늘 청주교구에는 사제, 부제 서품식이 있습니다. 2명의 교구사제, 1명의 수도회사제, 6명의 부제가 탄생될 예정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써의 삶을 충직하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제는 성령의 도구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성사 거행을 합니다. 사제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주님의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잘 사용해야 합니다. 수품 때의 첫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주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마음껏 축하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기도로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 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마르1,21)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 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 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

 -송영진신부-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요한 20,28).

이 고백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요한 사도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는 고백부터 기록했습니다.

이 고백도 역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다는 고백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했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네 복음서 모두 그 믿음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책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믿음이 없었던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만 보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하느님의 권능(힘)’을 뜻하는 말입니다.

‘권위’ 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라는 말을 해석할 때

어려움을 겪거나 잘못 해석하는데, 이 말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가르침”이라는 단순한 뜻입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그냥 ‘사람의 가르침’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놀란 것은, 아직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기적을 체험하거나 놀란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선택과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나서, 마침 회당에 와 있던 마귀를

쫓아내시는데, 그 일은 당신의 말씀이 마귀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이기도 하고,

당신의 말씀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힘’이 ‘실제적인 힘’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이기도 합니다.

(목격자들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놀랐다가, 그 힘이 마귀를 쫓아내는 ‘실제적인 힘’이라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또 예수님의 명령은 마귀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고, 자기가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이 말에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고,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들을 멸망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보다 힘이 더 강하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말을 앞의 말들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지만 나를 쫓아낼 수는 없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이고, 분노와 증오를 표현한 말입니다.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5-28).”

 

마귀에게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침묵을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마귀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른 것은

‘마지막 발악’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에 복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지옥은 마귀들의 감옥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위력’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더욱 놀라게 됩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라는 말에서, ‘새롭다.’ 라는 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명령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뜻에 따라 이렇게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들이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마귀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의 명령은 하느님의 명령인가?”

(복음서 저자는, 사람들이 놀랐고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다는 말만 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여부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텐데, 아마도 그 수는 적었을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기만 하고 믿음을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믿음과 희망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복음: 마르 1,21b-28: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조욱현신부-


사도들이 호수를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의 악습을 버렸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절)로 갔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란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오심을 예상하였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다.

 

마귀들도 아드님을 뵙고 이렇게 외친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주님을 뵌 악마는 그분을 유혹하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이라고 말한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 뵈었지만 믿음이 없었다. 성경 말씀을 증거로 들이대어도 믿지 않고 예수 아기를 죽이려 했던 헤로데는 마귀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악마가 진리를 말할지라도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우리를 속임수에 빠뜨리기 위해서 진리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8,29)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 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라고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나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 25)

-한상우신부-


고요함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믿음의
시작은
고요함의
시작이다.

시끄러움은
고요함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고요해져야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된다.

무엇을 꼭
해야지만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용해져야
하느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스럽지만
맞닥뜨려야할
순간이 있다.

뒤엉켜버린
우리 내면을
정화시키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고요함의
관계가
주님과
참된
관계이다.

고요함은
겸손함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빈 자리가 없다.

하느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이와같이
고요하다.

비워낼 때
투명하고
아름답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은

결코
요란스럽지
않다.

고요하고
조용할
뿐이다.

고요함이
제자리를 잡는
은총이다.

고요함이
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고요함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은
사람에게서
나가라.

믿음으로
고요함을
얻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보여 주십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들어가시어 가르치시던 회당 안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도 섞여 있었지요.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거칠게 저항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따집니다. 당신은 나랑 아무 상관 없으니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게다가 그는 예수님의 신원을 파악해 함부로 떠벌립니다. 증언이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가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호의도 일으키고 거부감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악이 이용하는 듯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게 휘둘려 자기도 모르는 행동을 하게 된 그 가련한 이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더러운 영은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그를 옷 입듯이 입고 사람과 세상을 공격했겠지요. 영문 모르는 이들은 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거나 피하며 소외시켰을 것이고요.

하지만 예수님은 더러운 영과, 그 영에게 고통을 겪는 사람을 분리해서 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영은 쫓아내시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던 그 사람은 구원해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악과 사람을 분리해 대하십니다. 자신에게 괜한 공격을 일삼는 이에게서라도 그 상처 입은 인격이 지닌 고귀함을 볼 수 있는 시선이고, 그를 구해주려는 자비입니다.

더러운 영이 주장한 "관계 없음"은 악의 발상입니다. 세상 모든 조물은 서로서로 모두 다 관계가 있으니까요.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누구도 예외없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며 생성하고 성장하며 소멸해 갑니다. 이 여정 안에서 누구도 완전히 홀로일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관계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히브 2,11)

예수님께는 더러운 영에 들려 인간의 존엄한 몰골을 갖추지 못한 이도, 죄악으로 불결해진 이도, 심지어 은총을 거부하는 이조차도 아낌없는 사랑을 흠뻑 쏟아주고픈 형제입니다. 당신께서 모든 피조물의 맏이시기 때문이지요.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히브 2,10)

성부 하느님은 성자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고 성장하고 소멸하여 하느님께 되돌아가지요. 모든 만물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만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목적이신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창조하시는 성부, 구원하시는 성자,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 안에서 우리 모든 피조물은 하나입니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사람들이 놀라서 서로 묻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제 편인 사람들의 말을 듣겠지요.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복종한 이유는 그 자신이 아무리 주님과의 관계성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분의 권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을 만납니다. 가장 소외되고 허약한 이를 향해 흐르는 사랑이 새로움과 권위의 골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 우리 모두가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새로움과 권위가 어떤 이들에게는 희망과 위안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경계와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에게 고유하게 다가오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새해에, 방금 들어선 연중 시기에 우리에게서 무엇을 떨쳐내 주시고, 어떻게 회복시켜 주시고자 다가오실지요... 무엇을 건드리시건 분명 우리에 대한 사랑과 자비 때문이니, 기꺼이 따르며 순종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 벗님을 새로이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리고 은총으로

 -김찬선신부-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가 우리 구원의 영도자임을 얘기하면 그러나

이 구원의 영도자가 우리 구원을 위해 잠시 천사들보다 못하게

수난을 받으시겠지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실 분이고

만물이 그분 발아래 있게 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에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라는 난해한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는데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은총으로"라는 구절이 일부 히브리서에는

"하느님 없이"로 나와 있어서 학자들 사이에

어떤 것이 맞는 말지 논란이 있을 정도입니다.

 

만일 "하느님 없이"의 뜻이라면 하느님 없이 수난을 당했다는 뜻이거나

신성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성의 예수로 수난당했다는 뜻이 될 겁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느님 어찌하여 절 버리셨습니까?'라고

절규하던 그 예수님을 뜻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두를 위해 겪으셔야 했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무슨 뜻일까 알기 위해 옛날 공동 번역을 보니 "이렇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입니다."라고 번역되어 있고, 200주년 성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의 고통을 맛보셨다."라고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위해 죽으신 것은 하느님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뜻으로 다시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수혜자가 우리인 경우와 예수 그리스도인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를 위해

죽으실 수 있었다는 뜻과 하느님 은총 덕분에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어도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에 하느님의 은총이 두 가지 다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좋냐 하면 이어지는 말씀이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그리스도)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성부)에게서 나왔습니다."라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있게도 하시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도 하신 것은

하느님이시고, 다 하느님 은총의 소치이고 덕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해도 되겠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목적은 우리 모두의 구원이고,

하느님 은총의 힘은 주님의 구원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하느님 은총에 힘입지 않고는

죽음은커녕 작은 수난도 감수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고,

설사 엄두를 냈을지라도 감당할 수도 구원의 도구가 될 수도 없을 겁니다.

 

희생이 없는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희생이 당연하다고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구원이 완전하려면 구원의 영도자가 마땅히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데

이는 말씀 한마디로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곧 능력으로 구원하실 수도 있지만 사랑으로

곧 당신의 희생으로 구원함이 더 완전하고 마땅하다는 뜻이지요.

 

구원의 영도자가 이러하다면 우리도, 본래 구원의 능력도 없기도 하지만,

설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수난의 사랑으로 구원에 이바지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코 1,21ㄴ-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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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탄과 동침을 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마음의 평화만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마귀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내 자신이 곧 마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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