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9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2021년 1월 9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2-30)
The one
who has the bride is the bridegroom;
the best man, who stands and listens for him,
rejoices greatly at the bridegroom’s voice.
So this joy of mine has been made complete.
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충만한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적인 보람과 만족감이 아닌,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이 무엇인지 세례자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 알려 줍니다. 전에는 자신을 따라다녔지만 지금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동향을 제자들에게서 전해 들은 세례자 요한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경쟁하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자신은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고만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기쁨은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혼인 잔치의 신부인 당신 백성을 만나러 오시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기쁨이고,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 더 크게 기뻐하는 신랑 친구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 무엇보다 큰 기쁨입니다. 구세사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목격한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이 보람을 느낄 만도 하지만, 그는 보람이 아닌 충만한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에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대로 응답하고 실천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답변입니다.
우리는 가끔 어떤 일을 마치고, 그 일에 보람을 느끼고 만족하려고만 하지는 않습니까? 그 일이 하느님의 일이었음에도 세례자 요한과 같은 기쁨을 찾기보다, 누가 쉽게 공을 빼앗아 가면 허탈해하고 낙담하는, 보람만을 찾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독서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모든 일은 세례자 요한과 같이 기쁨과 희망의 삶일 수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책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루이스 캐럴의 작품으로 1865년에 소개된 환상의 세계에서 모험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저 역시, 어렸을 때 텔레비전을 통해 봤던 기억을 통해서 이 책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줄거리만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을 뿐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 책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겨우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이렇지 않을까요? 인류 역사를 통해 하느님이 얼마나 많이 알려졌습니까? 그래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하느님을 더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인 기도도, 주님께 올리는 제사라 할 수 있는 미사도,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도…. 우리는 충실하게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느님을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많이 알수록 더 가깝고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종’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커지길 원합니다. 즉,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게 되면 감히 커지려고도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갈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바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종이 아닌 주인 행사만 합니다.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면서 종의 말이 아닌, 주인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받은 것에 만족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 안에서 자기 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때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욕심보다는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죽는 순간까지 공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연구하는 모습을 본 제자들이 묻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데, 어째서 배움을 멈추지 않으십니까?”
이에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을 ‘원’이라고 한다면 ‘원’ 밖은 모르는 부분이 됩니다. ‘원’이 커지면 ‘원’의 둘레도 점점 늘어나 접촉할 수 있는 미지의 부분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지금 저의 ‘원’은 여러분들 것보다 크다고 하겠지만 제가 접촉할 미지의 부분이 여러분보다 더 넓고 많습니다. 그건 결국 모르는 게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알려는 노력을 멈춘다면 어떨까요? 그만큼 하느님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분이 되고 맙니다.
아는 만큼 모르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를 향하는 길이 될 것인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함께 주고 있을 때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고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로 가기 위한 준비단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두 세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요한이 질투를 할 것 같아서 그리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요한은 신부가 신랑에게로 향하는 ‘길’과 같은 존재란 뜻입니다. 길은 두 갈라진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고 싶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길은 그래서 돋보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길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되고 목적지로 빨리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신랑의 친구,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려면 바로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가기 위해 밟고 지나가는 그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록 지금은 작아질지언정 영원한 분으로부터 영원히 사랑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들을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검은 돌들이 사는 산동네가 있었습니다. 이 돌들은 로마 시대에 길을 만드는 데 쓰였습니다. 두 친구 돌들도 서로 미래에 어느 길이 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멋지게 생긴 돌이 친구 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황제가 다니는 길이 될 거야. 비록 돌에 불과하지만, 황제가 다니는 길은 인간들도 부러워한다고. 너는?”
“나는 잘 모르겠어. 뭐 필요한 데 쓰이겠지. 너야 평평하고 단단하니까 임금이 다니는 길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울퉁불퉁 못 생겨서 황제의 마차가 다니기에 적합하지 않거든.”
드디어 인부들이 와서 두 돌을 파냈습니다. 역시 황제가 다니는 길에 친구 돌이 먼저 박혔습니다. 서로 헤어지며 둘은 슬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황제를 ‘네로’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마차가 자신의 머리 위로 지나갈 때는 조금 고생스럽기는 해도 사람들의 함성과 꽃이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차가 지나갈 땐 머리가 좀 아팠지만 그래도 영광을 받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울퉁불퉁한 돌은 사람이 밟고 지나다니는 시골길에 박혔습니다. 그런데 그 길 위로는 죄수들이 피를 흘리며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처형되는 사람들이 끌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돌이 평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족쇄를 찬 사람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지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바오로라고 부르는 죄수가 또 그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돌에 그 사람의 피가 떨어졌습니다. 돌은 고개를 들어 바오로라는 죄수의 목이 세 번 튕긴 자리에서 샘이 솟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황제의 길로 사용되었던 친구 돌은 마차 바퀴에 갈려져서 더는 쓸 수 없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위에 흙을 덮고 새로운 돌들로 새로운 길을 만들었습니다. 잠깐 황제의 길이 되었던 친구는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형장의 길이 되었던 돌은 사형 집행이 더는 이뤄지지 않았기에 시골에 가난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로 아직도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둘레에 줄을 쳐서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에서 기도하고 찬미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자신에게 뿌려졌던 바오로의 피가 성인의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 박힌 돌은 2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보면 어떤 길들은 ‘비아 아우렐리아’처럼 그 길을 만든 황제의 이름으로 여전히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비아 그리스도’입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죽었지만 여전히 그 황제가 기억되는 곳에서는 그 황제가 만든 길이 그 황제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로부터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향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밟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그 길을 간 그분의 신부가 영원히 그 길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아 영원히 사는 방식입니다.
나를 거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세속-육신-마귀의 자신을 죽이고 샘이 솟게 하는 바오로의 삶을 살게 됩니까, 아니면 세속-육신-마귀를 쫓는 네로 황제의 삶을 살게 됩니까? 우리가 세례자 요한과 같아지려면 어떠한 길이 되어야 하는지 명명백백합니다.

-조재형신부-
일본 NHK에서 제작하였고, KBS에서 방영했던 ‘경이로운 지구’를 유튜브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총 6부작입니다. 40억년 지구의 역사를 다양한 영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구의 역사도 수없이 많은 ‘도전과 응전’으로 여기까지 왔음을 보여줍니다. 지구는 소행성의 충돌로 지금의 크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소행성의 충돌은 지구의 환경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습니다. 지구는 수백만 년 동안 또는 수천만 년 동안 얼음으로 뒤덮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화산의 분출과 지각의 융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아름다운 지구는 수십억 년 동안의 도전과 그에 대한 응전의 결과라고 합니다.
지구에서 살고 있는 생명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5번의 커다란 멸종의 사건들이 있었지만 생명은 멸종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양한 생명으로 진화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출현은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생각할 때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이라고 합니다. 바다에서 살던 생명이 육지로 올라오기까지 30억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4억 년 전에 바다에서 살던 생명은 강을 통해서 육지로 올라왔고, 지느러미는 손과 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지라는 새로운 신세계에 생명은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잣대와 기준으로 지구를 보기보다는 기나긴 시간을 살아온 지구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기준으로 청하지 말고 하느님의 시간과 기준으로 청하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와 같으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옹기장이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질그릇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예전에 어느 공소회장님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공소회장님은 다 쓰러져가는 공소를 다시 세울 수 있도록 매일 기도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우연히 주교님께서 공소회장님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공소회장의 기도를 들었던 주교님은 공소를 다시 지을 수 있도록 남모르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주교님이 공소를 방문했습니다. 작지만 아담한 공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소회장은 공소에 사제를 보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공소회장의 기도를 들었던 주교님은 사제를 파견하였습니다. 공소회장은 자신의 시간과 기준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업적이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면 당연히 신부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기뻐하며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귀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의 핵심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양승국신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무대가 차려진 후, 서막(序幕)에서 열연했던 세례자 요한이 무대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주인공으로 등장하시는 예수님과 스쳐 지나가듯이 살짝 마주치는데, 이른바 ‘세례 원조 논쟁’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선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120 퍼센트 완수한 세례자 요한이 무대 밑으로 내려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순간, 예수님께서 등장하셔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상황 앞에 분기탱천하는 동시에 큰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는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세례! 하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세례 갱신 운동을 시작한 독보적인 존재, 세례의 특허권자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 역시 자부심이 남달랐습니다.
그간 스승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모습은 제자들에게 있어 자부심을 가질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스승님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 강을 찾아왔습니다.
평범하고 가난한 백성들뿐만 아니라 유다 고관대작들, 사제들과 지도층 인사들도 모두 찾아와서 스승님 앞에 순한 양처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 모습 앞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혼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라는 ‘갑툭튀’가 나타나 스승님의 전유물이자 특허인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스승 세례자 요한에게 쏠렸던 시선이나 환호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스승님 가게는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사람들은 모두 저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슬쩍 가서 분위기를 보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세례와 관련해서는 원조라는 자부심에 어깨 펴고 살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마음은 심하게 불편해진 것입니다. 분노가 폭발한 제자들이 이럴 수는 없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는 마음에 스승을 찾아와 다그치듯이 외칩니다.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3장 26절)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분명 스승님께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분노하시고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리라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 담판을 지으리라 희망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전혀 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중인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복음 28절, 30절)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신원의식이 유난히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때, 세례자 요한이 직면한 현실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큰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한때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는데, 한때 세상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한몸에 받았었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무대 밑으로 내려서야 한다는 것, 사실 수용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핵심과 본질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나서야 할 때, 그리고 물러서야 할 때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탁월하고도 명철한 식별력의 소유자였는데, 그것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려고 노력한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반영억시눕-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 봅니다. 어떤 이는 정치인이 되려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소신도 없어야 하고요’,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 고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헌신과 희생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요한 3,22-30: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조욱현신부-
우리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름답고 겸손한 자세를 볼 수 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 요한에게 불평한다. 그러나 요한의 답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답변으로써 3가지를 설명한다.
우선은 세례자 요한은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하느님의 단순한 전달자며 앞으로 오실 더 크신 분을 위한 선구자요 예비자로 보냄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다.
둘째로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새로이 나타난 선생이 더 많은 제자와 더 많은 개심자들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요한에게서 사람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자기들과 하느님은 너무나 밀접한 인연으로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 관계를 신랑 신부의 혼인 관계 인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표현했고, 이러한 인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신을 따를 때는 마치 정혼한 여인이 혼인한 계약을 위반하여 부정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탈출 34,15; 신명 31,16; 시편 73,27 등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랑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신부라는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락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참된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된 삶을 본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 29)
-한상우신부-
기쁨의 속성은
나눔이다.
나눔과 공동체
기쁨과
하느님은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의 기쁨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찾는 기쁨이
하느님 자녀들의
참된 기쁨이다.
충만한
기쁨의
원천은 오직
하느님께 있다.
기쁨은
하느님께
연결되어 있다.
사랑의 관계가
충만한 기쁨이다.
하느님의
기쁨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다.
하느님안에
머무를수록
더욱 커지는
기쁨이다.
하느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주시는
참기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기쁨이
되신다.
기쁨의 힘은
사랑으로
비롯된다.
생명의
방향은
기쁨의
방향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기쁘게
사는 것이다.
광야도 십자가도
풍랑도 어둔 밤도
하느님의 뜻안에
있기에 모든 것은
충만한 기쁨이
된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기쁨을 믿는다.

-오상선신부-
성탄 시기 막바지 즈음에 이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 세례 축일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요한 3,22)
오늘 복음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세례를 베푸는 이는 세례자 요한이었지요. 그는 자신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백성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 주변으로 모여들어 그를 추종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출현에 불안감을 느꼈나 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준 이가 바로 자기들의 스승이니,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이 경쟁심을 부추긴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세례는 예수님께서 직접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준 것인데도 말입니다.(요한 4,2 참조)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이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입장을 담백하게 밝힙니다. 그동안 자신이 선포한 가르침과 베푼 세례가 그에게 기득권이 되어서는 안 됨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주님의 선구자일 뿐이니까요. 그가 길을 준비한 분이 드러나신 이상 이제 그는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도 괜찮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요한 3,29)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그분의 신부입니다. 요한은 신랑 곁에서 기쁨을 나누는 친구 역할이지요. 그는 신부를 제 것으로 가로챌 수 없습니다. 신부를 보고 기뻐하는 신랑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고 아낌없이 축하를 보내어 혼인잔치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친구의 몫입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러하다."(요한 3,29)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절제와 금욕의 고행으로 다져진 그의 정신도, 다가오신 인류의 신랑, 예수님 앞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만류하지 못합니다. 이 기쁨은 주님을 알아보는 인간이 누리는 영적이고 신비적인 희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이제 그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드러나시고 요한은 물러서야 할 때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는 진정한 말씀의 등장으로 아스라히 묻혀갈 것입니다. 소리의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요한의 담담한 저물어감, 겸손한 퇴장이 참 아름답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세례를 받은 우리의 신원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1요한 5,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남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는 죄에서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지요.
원죄의 상처와 본성적 나약함, 불완전함은 언제라도 죄에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세례받은 우리는 그때의 순백색 영혼을 회복하기 위해 언제라도 하느님 자비 안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1요한 5,20)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실 겁니다. 죄 없으신 그분에게 세례는 필요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은 죄인인 모든 인류를 대신해 피조물인 강물에 자신을 담그십니다. 주님 세례의 순간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세대를 포함한 온 인류가 그분 안에 있습니다. 이로써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길로 들어서십니다. 그리고 성탄 시기는 막을 내리지요.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 물로 씻김을 받으셨고, 우리도 그 물로 깨끗해졌습니다. 번잡스럽고 혹독한 삶이 때때로 우리에게 죄의 상흔을 남기지만 우리는 지치지 않고 세례 때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려 주님께 달려갑니다. 우리는 이 세례의 은총을 소중히 간직한 채 일상으로 달려갑니다. 이것이 주님 세례 축일 이후 이어지는 연중 시기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난 성탄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너나할것 없이 코로나19의 위협과 어려워진 경제사정, 이기심과 분열로 혼돈의 때를 지나온 것은 맞습니다만, 절박한 가운데 각자의 영혼 안에 임하신 주님과의 내밀한 동행은 더 각별하지 않았을까 기대해 봅니다. 오늘과 내일, 말씀 안에 머물러 성탄 시기를 잘 마무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성탄의 은총은 여전히 진행형이랍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김찬선신부-
어제 나눔에서 공현이란 등장과 같은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등장하시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는 작자가
우리 구역에서 세례를 주는데 저거 그냥 둬도 되냐고 따지지요.
이에 세례자 요한이 자기는 누구이고, 예수라는 양반은 누군지
증언하는데 이것이 어제와 오늘의 같은 맥락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치유를 해주시고 함구하라고 하시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자신을 누구라고 얘기하지 않으심은 물론
치유를 받은 사람에게도 당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잘 알듯이 그들이 나가서 주님을 퍼트리고 공현하지요.
오늘도 세례자 요한도 주님에 대해 증언을 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내일 주님의 세례 축일을 앞두고 우리의 전례는 의도적으로
이 복음을 배치하는 것인데 자기의 세례 운동은 작아지고,
주님의 세례가 이제는 커져야 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이해해도 되고,
자기는 사라지고 주님은 점점 나타나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겸손한 자기 인식 때문에 요한이 쭈그러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 감탄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라고 요한이 얘기하는데 특히,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는
표현이 너무도 멋지고 부럽습니다.
자기의 애인이었는데 그 애인이 친구의 아내가 되었어도
자기의 애인을 뺏겼다고 생각지도 않고,
친구의 여자가 된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본래 나의 애인이 아니라 그의 여자였다고 할 정도로 가난과 정결이
높은 경지이고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 기쁜데 그 기쁨이 충만할 정도랍니다.
완전한 자기 비움이며 동시에 완전한 충만함의 모범이고,
자기를 완전히 비울 때 완전히 충만해진다는 증명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주님을 완전하게 증거 하게 됩니다.
언젠가 프란치스코와 함께 길을 가던 동료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당신을? 왜 당신을? 왜 당신을?"
당신은 그리 잘생기지도, 유식하지도, 가문이 좋지도 않은데
왜 수많은 사람이 당신을 따르냐는 뜻이었지요.
이때 프란치스코는 환희에 차서 대답을 하는데
환희에 찬 이유가 자신이 잘생기지도, 유식하지도,
가문이 좋지도 않다고 동료가 얘기한 것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자기의 무성無性과 작음을 진정 기뻐하는 경지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기뻐하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자기에게 하느님께서
엄청난 은총을 주셨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큰 은총을 강도에게 주셨다면 강도는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을 주님께 드렸을 거라고 얘기함으로써
자기는 쭈그러들고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고 공현합니다.
하느님은 거저 주시는 분이고 인간은 누구나
그 은총을 주시는 대로 받는 존재라는 건데
이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다음 말과 맥을 같이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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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신부가 신랑에게로 향하는 ‘길’과 같은 존재란 뜻입니다. 길은 두 갈라진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고 싶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길은 그래서 돋보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길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되고 목적지로 빨리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신랑의 친구,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려면 바로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가기 위해 밟고 지나가는 그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록 지금은 작아질지언정 영원한 분으로부터 영원히 사랑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들을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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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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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완전한 자기 비움이며 동시에 완전한 충만함의 모범이고,
자기를 완전히 비울 때 완전히 충만해진다는 증명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주님을 완전하게 증거 하게 됩니다.
언젠가 프란치스코와 함께 길을 가던 동료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당신을? 왜 당신을? 왜 당신을?"
당신은 그리 잘생기지도, 유식하지도, 가문이 좋지도 않은데
왜 수많은 사람이 당신을 따르냐는 뜻이었지요.
이때 프란치스코는 환희에 차서 대답을 하는데
환희에 찬 이유가 자신이 잘생기지도, 유식하지도,
가문이 좋지도 않다고 동료가 얘기한 것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자기의 무성無性과 작음을 진정 기뻐하는 경지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기뻐하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자기에게 하느님께서
엄청난 은총을 주셨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큰 은총을 강도에게 주셨다면 강도는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을 주님께 드렸을 거라고 얘기함으로써
자기는 쭈그러들고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고 공현합니다.
하느님은 거저 주시는 분이고 인간은 누구나
그 은총을 주시는 대로 받는 존재라는 건데
이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다음 말과 맥을 같이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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