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12. 14. 06:39

2020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
마태오 21,28-32)

 

 “Amen, I say to you,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are entering the Kingdom of God before you. 
When John came to you in the way of righteousness,
you did not believe him;
but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d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스바니야는 히브리말로 ‘주님께서 피난시켜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레미야 예언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성전 주위에 머물며 심판을 예고하고, 동시에 열심히 살려는 이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와 민족들에 대한 심판, 복구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 세 장뿐인 스바니야 예언서의 마지막 장 전반부를 대림 시기의 한가운데인 오늘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스바니야는 이방 민족들의 회개와 흩어진 백성의 귀환을 언급한 뒤, 남은 이들의 신앙 자세를 ‘가난한 자’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가난함이란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영성적으로 ‘마음이 가난함’을(마태 5,3 참조) 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 가난한 사람의 삶의 자세가 과연 무엇인지는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에 싫다고 답하였지만 마음을 바꾸어 밭에 가서 일하는 맏아들과, 가겠다고 답하였지만 실제로는 일하지 않는 다른 아들의 태도에서 무엇이 중요한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실 분을 기다리는 이때에 가난한 자로 산다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순종을 뜻하는 라틴어는 ‘집중해서 잘 듣는다.’라는 표현에서 나왔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귀기울이며 자신의 생각을 접는 기도와 함께, 그분 뜻대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가난한 자로 사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계 성공학의 대가를 뽑으라고 하면 아마 곧바로 이 사람을 말할 것입니다. 힌트 하나를 더 말씀드리면, 이 사람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썼습니다.

맞습니다. ‘스티븐 코비’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리더십의 기초를 세웠으며, 어마어마한 판매 수입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깜짝 놀랄만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2012년에 사망한 스티븐 코비가 파산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책을 출판하고서 말이지요.

사람들에게 성공에 대한 영감을 주는 책을 저술한 사람이 어떻게 파산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의 책 내용 모두가 거짓일까요? 기자들은 그 이유를 스티븐 코비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파산 이유는 내가 쓴 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실천하지 않으면 헛일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어떨까요?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 말씀을 읽었다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은 분명히 우리에게 커다란 힘이 될 수 있고, 진정한 성공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단, 성경의 내용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 말씀입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맏아들은 싫다고 했다가 생각을 바꿔서 일하러 갑니다. 그러나 다른 아들은 가겠다는 말만 했을 뿐 정작 가지 않지요. 그러면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느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줍니다. 처음에 부정하고 실천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뉘우치고 실천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하러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은 아들처럼 말만 하는 사람은 꾸지람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리와 창녀들이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시지요.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믿은 뒤에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작은아들처럼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내 모습은 맏아들의 모습인지, 작은아들의 모습인지를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노력의 가장 값진 대가는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존 러스킨).


거리

접근학을 연구한 에드워드 홀에 의하면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에 비례해서 가까울수록 거리는 짧아진다고 합니다. 보통의 경우, 아주 가까운 가족이나 연인은 언제라도 안아줄 수 있는 팔의 반 정도 거리인 15~46㎝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이것을 ‘친밀한 거리’라고 합니다. 어른들이 ‘품 안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야말로 품 안에 들어오는 거리니까 친밀한 거리입니다.

그리고 친구나 직장 동료는 팔을 쭉 뻗어서 악수하거나 등을 두드릴 수 있는 거리인 46㎝~1.2m 정도의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이것을 ‘개인적 거리’라고 합니다.

낯선 사람이나 배달원, 가게 주인과 같이 잘 모르는 사람들과는 1.2m~3.6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를 방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편안하게 느끼는데, 이것을 ‘사회적 거리’라고 합니다.

낯선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과의 거리는 멀수록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거리를 당연히 두어야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힘들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관계가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로 좁힐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자기 암시에 불과하다고?

-전삼용신부-


제가 오직 믿음만으로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예도 있습니다. 신학을 배우거나 오랜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들이 그렇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능력으로 노력해서 삶이 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교리인데도 모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강조하면 개신교 신앙이냐고 하고, 믿음으로 변한다면 연기자들이나 가수들이 긴장될 때 거울을 보며 ‘난 잘할 수 있어!’라고 수없이 되풀이하는 ‘자기암시’와 뭐가 다르냐고 합니다. 교회 내에서 믿음을 그저 자기암시 정도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에서 옵니다. 이 말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믿음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이런 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변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맏이는 결국 ‘그래, 그래도 난 아버지의 아들이지!’라는 믿음을 회복한 것이고, 둘째는 ‘근데 그분이랑 나랑 뭔 상관이야?’라며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러며 이렇게 결론을 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세리와 창녀까지 요한이 제시하는 ‘의로운 길’을 믿으니 변화하였는데, 왜 그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운 길’이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이면서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믿음이 단지 거울을 보면서 ‘나는 할 수 있다!’라며 자기암시를 하는 것과 같을까요? 물론 자기암시도 효과가 있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정체성 자체가 변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음으로써 우리 삶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변화를 보면서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지 못함이 아니라 오히려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자신이 변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위선적인 신앙인으로 남습니다.

 

      가톨릭에서도 믿음으로 삶이 완전히 변한 신앙인들이 많지만, 오늘 복음의 세리와 창녀의 변화를 생각하다 보니 ‘CBS 새롭게 하소서’에 나와 간증한 조윤숙 목사가 생각이 납니다. 그녀는 화류계의 여왕으로 살다가 회개하고 목사가 된 분입니다.

조윤숙 목사는 강원도 정선에서 가난한 5남매의 딸로 자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서울에 있는 어느 집의 수양딸로 보내졌습니다. 자녀들이 다 뿔뿔이 흩어진 것입니다. 그녀는 고아로 성장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유명한 요정에서 마담으로 화류계를 시작하였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까닭에 인기가 높았습니다. 자신의 요정을 차리고 바닥에 뿌리고 발로 치우며 다닐 정도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고급 외제차에 고급 운동,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과 담배, 나이트클럽을 돌아다니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헛헛한 마음은 무당을 찾아다니며 달랬습니다.

 

      요정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사채업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뒤를 봐주던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부도를 맞고 빚쟁이들과 형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죽기 위해 설악산에 갔습니다. 부모님 산소에도 형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갈 수가 없었고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만날 수 없다는 고통이 더 깊이 사무쳤습니다. 수면제 60알과 동맥을 끊기 위한 면도칼, 그리고 소주 한 병 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는 길 아스팔트 위에 작은 틈을 비집고 자라는 새싹이 보였습니다. 삶의 무상함 속에서 작은 생명의 위대함이 묵상이 되었습니다. 생명을 보니 창조주를 찾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녀본 적이 있어서 하느님이 계신다면 내 꼴이 이게 뭐냐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죽어야겠다고 더욱 굳게 결심하고 계속 올랐습니다.

 

죽으려고 하기 직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순간부터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사진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 뒤에 엷은 천으로 가려져 있고 누군가가 서 있었습니다. 모든 자신의 삶 뒤에 똑같은 사람의 모습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네가 ‘엄마 죽지마’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너를 떠난 적이 없었다.”

이 음성을 느끼는 순간 자신을 경직되게 만들었던 어떤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감히 할 수 없었던 말을 하게 됩니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12시간 동안 수면제를 하나하나 계곡물에 던지며 이전의 삶을 버렸습니다. 꼬박 12시간 동안 울고 나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중에 여자 두 명이 다 찢어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며 “미친년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머리를 잡고 싸웠을 텐데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저 미친년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내려왔습니다.

 

      경찰들이 말하기를 빚쟁이들이 그녀를 감옥에 넣어봤자 어차피 빚을 갚을 수 없으니 요정을 다시 일으켜 빚을 갚도록 하는 게 좋다고 고소를 취하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술집을 하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빚쟁이로 도망치는 것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술집을 하니 교회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몰래 다녔다고 합니다. 빚을 다 갚고 목사가 됩니다.

      조윤숙 목사가 변한 것은 소위 ‘자기암시’ 때문이었을까요?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런 변화를 이뤄낼 수 없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자기암시가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가 길거리에 있는 걸인을 예수님으로 믿게 된 것은 자기암시가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김하종 신부가 가난한 아저씨에게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목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어떤 이들이 신앙은 그런 자기암시가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앙은 무엇이란 말일까요? 결국, 혼자의 노력으로 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유다 지도자들의 메마른 신앙이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셨다는 믿음, 이웃이 그리스도로 보이는 믿음, 또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믿음, 이 믿음만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 않으려 하고 본인 노력으로만 변하려 한다면, 한다고 해놓고 하지 못하는 둘째 아들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만으로 변하고 믿음만으로 구원됩니다. 결코, 교회 내에서 유일한 의로움의 길인 믿음의 힘을 깎아내리는 생각들이 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드라마 바바리안(barbarian)’을 보았습니다독일에서 제작된 드라마입니다드라마는 2,000년 전에 있었던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영상과 내용도 좋았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만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로마라는 강대국이 가지는 문화와 군사력은 당시 게르만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했습니다게르만족은 로마에 공물을 바치고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드라마는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는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됩니다. 20세기에 강대국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고유한 문화와 전통은 무시되었고자원과 사람은 수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우리는 당시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이런 일은 15세기 아메리카 대륙에도 있었습니다. 21세기에 우리는 더 이상 제국주의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자유와 독립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장은 로마와의 평화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었습니다족장의 아들은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고군인이 되었습니다그러나 결국은 부족을 위해서 로마와 싸우게 됩니다아직 로마의 군인이었을 때입니다각 부족을 돌아다니면서 아들을 빼앗았습니다족장들은 분하고억울하지만 아들을 내어 주었습니다힘으로는 로마와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주인공은 족장들을 모두 모아놓고 빼앗았던 아들들을 돌려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아들을 빼앗으러 갔을 때 저항하지 못했습니다모두 아들을 내어 주었습니다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나의 아버지가 예전에 나를 로마에 빼앗겼습니다왜 입니까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하면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물론 우리는 두렵습니다많은 희생과 죽음이 있을 것입니다우리의 자유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싸웁시다.” 족장들은 모두 힘을 합하였고드디어 로마와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일치와 화합으로 바꿀 수 있다면두려움과 걱정을 용기와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과 꿈을 전하고 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은 주변 강대국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겼고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바바리안의 젊은이들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서 희망을 잃어버린 부족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자유를 찾았습니다그들에게 더 강한 힘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그들의 마음이 변하였고그들이 하나 되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우리는 매년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대림초는 켜져 있고구세주를 기다리는 말씀을 듣습니다대림초를 보고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두려움과 걱정으로 대림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우리가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꾼다면 매일 매일의 삶이 설렘과 희망의 대림이 될 것입니다. 


건방진 당나귀는 하루 온종일 불상(佛像) 대신 무거운 바위를 몸에 싣고 날라야만 했습니다!

 -양승국신부-

 

동물 중에 꽤 재미있는 녀석이 당나귀입니다. 말과에 속하지만 말보다는 훨씬 인물이 떨어집니다. 체구도 작고 웃기게 생겼습니다. 속도도 느린 관계로 주로 짐을 운반할 때 활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당나귀 등에 멋진 불상(佛像)을 안치하고 돌아다녔습니다. 불심(佛心)이 있는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깊이 절을 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당나귀 목에 걸린 불전함 속에 헌금을 넣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절을 하니 당나귀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한다고 여기고 우쭐해졌습니다. 고분고분하던 처음과는 달리 당나귀는 점점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건방진 녀석으로 변해갔습니다.

  

당나귀는 주인이 자기 때문에 먹고 산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조금만 걸어도 힘들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좀 쉬라 소리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주저앉기 일쑤였습니다.

  

할수없이 주인은 그 건방진 당나귀를 채석장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불상을 지고 다닐 성격좋고 고분고분한 새로운 당나귀를 샀습니다. 건방진 당나귀는 하루 온종일 불상(佛像) 대신 무거운 바위를 몸에 싣고 날라야만 했습니다. 

 

곰곰히 돌아보니 저 역시 건방진 당나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왔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실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제 등 뒤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격려도 해주시고 도움도 주셨는데, 저는 그것을 간과하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서에도 비슷한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사제들 중에서도 수석 사제들이었으니 다들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입고 다니던 옷도 보통 사제들보다 훨씬 치렁치렁 화려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요. 처음에는 겸손하고 고분고분했을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봉사자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로서의 직분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멋진 복장에, 쩌렁쩌렁 심금을 울리는 강론 말씀에 큰 매력을 느끼고 깊은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길에서 만나면 정중하게 인사도 했습니다.

  

어딜 가나 제일 높은 자리로 안내를 받았고, 특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 역시 점점 건방진 당나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주인도 몰라보고, 주인께 감사하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영적 생활이나 이웃 사랑의 실천은 잊어버린지 오래였습니다. 그저 돈만 밝히고, 잘 먹고 즐기는데만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이런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날카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21장 31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 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인 말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개석상에서 펀치 중에서도 초강력 펀치를 한방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먹이신 것입니다. 주인도 몰라보는 건방진 당나귀 같은 그들에게 적당한 선물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면서도 메시아로 오신 당신을 끝끝내 거절하고 부인한 그들에게 ‘빅엿’을 하나 제대로 선사하신 것입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권한에 대해 논쟁을 마감하신 후에 세 개의 비유, 곧 ‘두 아들의 비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모두 하느님 나라가 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거듭 밝히십니다. 이 세 비유에는 ‘아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오늘 <복음>인 ‘두 아들의 비유’에서는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간 아들과,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서도 일하러 가지 않은 아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원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예수님께서는 ‘누가 응답한 사람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실천한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곧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인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26)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1-32)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에서 가서 일하는 것은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응답은 하여 포도밭에 오기는 하였지만 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해당하며 믿는 이들의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수도원)이라는 포도밭에 들어오기는 했어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해당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 믿는 이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누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였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물으십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주님!

당신의 뜻을 제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응답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실행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고, 당신 의로움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을 듣는 사람

-반영억신부-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21,28) 하였을 때 말을 들은 사람은 포도밭에 가서 일한 사람입니다. 대답은 하고 밭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는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러므로 언제나 삶으로 말하십시오. 사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소위 한자리하는 사람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21,32). 고 한 말씀은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하라는 요한의 말을 들었고, 들은 그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소위 내로라하는 사람들,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니 결과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의 부름은 주어졌고,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작은 이들은 받아들였고, 똑똑한 이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며 끝내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아는 게 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가 7,29-30).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회개의 초대에 기쁘게 응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를 거부하는 이상 하늘 문은 늘 닫혀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며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그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들읍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두 아들의 비유

-송영진신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28-31ㄱ)”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1ㄹ-32).”

 

여기서 ‘너희’는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바리사이들’이고(마태 21,23.45),

이 말씀은 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기득권층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죄인 취급하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데,

너희는 왜 회개하지도 않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느냐?”

 

1) 이 말씀에서 ‘포도밭 일’은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은 좋든 싫든 아버지를 위해서 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일’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또 ‘내가’ 원해서 하는 ‘나의 일’입니다.

바로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신앙생활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신 ‘노동’을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생활이고, ‘기쁜 일’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억지로 해야 하는 노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쁨도 없고 사랑도 없고 보람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1코린 15,19)입니다.

신앙생활은 강제 노동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또 내가 기뻐서 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라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참석하기를 원해서 참석하든지, 참석하기 싫어서 참석하지 않든지 간에

그것은 각자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는 쪽을 선택한 사람은 자기가 안 받아서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2) 아들들은 ‘종’도 아니고, ‘삯꾼’도 아니고,

아버지의 포도밭을 물려받을 상속자들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7).”

따라서 아들들이 포도밭에 가서 일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들의 밭에서 자기들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가 상속받을 밭에서 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밭’에서 ‘나 자신을 위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는 것은, 또는 일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상속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면 상속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3)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을 하느님의 ‘맏아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상속권이 있는 적자(嫡子)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속권 없는, 또는 상속 때 순서가 뒤로 밀리는 서자(庶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했던 자들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 즉 “저 군중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을 ‘맏아들’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누구든지 먼저 회개해서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누구나 하느님의 적자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입니다.

(교만한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반성하지는 않고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화를 내기만 합니다.)

 

4) 비유에는 회개한 죄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하느님 나라는 ‘먼저’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나라가 아니라,

‘들어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나라입니다.

시간 순서만 보면 스테파노 순교자가 먼저 들어갔고 바오로 사도는 나중에

들어갔는데, 그 ‘먼저’와 ‘나중’ 사이에 어떤 차별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나중’에 회개하겠다고 미루다가는

그 ‘나중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생활과 회개는 언제나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지금’입니다.

비유를 보면, 맏아들이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 ‘나중’은 긴 시간이 흐른 뒤가 아니라 ‘오늘 중에’ 한 일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고치지 못할 병이 없는

분이지만, “나는 건강하다.” 라고 주장하면서 ‘치유의 은총’을 받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고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병자 자신이 거부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나는 이미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의인이다.” 라고 주장하는

교만한 위선자들은 구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위선자들 자신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이고 병자들입니다.

그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은 못 받을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오늘 복음은 유다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죄가 크다는 것과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른 민족들에게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하시는 비유이다. 첫째 두 아들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노아의 후손들인 다른 민족 사람들을, 작은아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맏아들이 바리사이들을, 작은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28절)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현세에서 정의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 포도밭은 우리의 본성에 심어진 정의를 뜻한다. 그래서 포도나무들은 각기 다른 정의를 나타내며 각 사람은 자신의 덕에 따라 포도나무들을 많게 또는 적게 가꾼다. 그러니 포도나무 전체를 잘 가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맏아들은 “싫습니다.”(29절) 하였지만, 나중에 일하러 갔다. 아버지 앞에 “싫습니다.”라는 말은 하느님과 그분의 정의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떨어진 이교인들이 ‘우리는 당신에게서 배운 정의를 실천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먼저 자기 마음속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싫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정의를 실천하러 포도밭으로 간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30절) 작은아들로 묘사되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와 세례자 요한에게 지시를 받았을 때,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딴 나라 사람들이 저를 속였습니다.”(시편 17,45 칠십인 역)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께 거짓말을 했다.

 

“이 둘 가운데에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절) 라는 물음에 그들은 “맏아들입니다.”(31절) 대답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이 비유의 뜻을 자기들한테 불리하게 해석하고 만다. 아버지의 뜻을 행한 맏아들은 다른 민족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고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하셨다. 이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자극을 주어 그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라고 하신 적이 많다. 우리도 잘못 살면 주님께 그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 32)

-한상우신부-

회개는
1인칭이다.

그 누구도
대신하여
줄 수 없다.

절박함으로
더 깊어지는
우리들 삶이다.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는 것이
회개이다.

끝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들
신앙이다.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약한
우리들이다.

고결한 정신도
어느 순간
무너질 수 있다.

무너져도
우리의 모습을
되찾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무너짐이
있는 곳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개가 있다.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믿음도 있다.

극과 극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다.

높고 낮음이
없다.

모두가 소중한
주님의
자녀들이다.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무감각한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실천의 회개이다.

생각을 바꾸는
실천으로
우리는
새로워진다.

우리의 아픔을
넘어서는
새로움이다.

절박함과
갈망으로
다시 찾게 되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참된 회개와
절박한 신앙은
마침내 다시
만나게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다.

과거의 것을
허물고
새것을 짓는

회개의 대림이며
실천의 대림이다.

생각을 바꾸는
거기에 예수님의
탄생이 있음을
믿는다.

하느님의 나라는
더 깊어지는
회개의 나라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아픈 손가락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세리와 창녀들을 죄인 취급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예수님께서 비유로 물으십니다. 아버지의 명을 처음에는 거역했지만 뉘우치고 뒤늦게라도 따른 맏아들과, 그 자리에서는 순순히 응하고는 실제로 실행하지 않은 또 다른 아들을 대비시키신 겁니다.

누구에게나 모범적 종교인으로 추앙받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지만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 눈에는 다르게 비칩니다. 그들은 제도와 형식 안에서는 "예" 했으나, 마음으로는 완고히 "아니오" 하고 있는 "또 다른 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반면 누구에게나 손가락질 받는 세리와 창녀들은 당장은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고 사는 "아니오"의 대표주자들 같지만, 자신이 약하고 부족한 만큼 회개를 꺼리지 않고 돌아서서 진심에서 우러난 "예"를 올릴 수 있는 이들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스바 3,12)

유배 때 소위 배우고 능력 있고 기술 있고 잘난 사람들, 또 왕족이나 귀족들은 대거 이국땅에 끌려가서 이민족을 위해 일해야 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약하고 병들고 별볼일 없는 이들은 이스라엘에 남아 황무지처럼 유린된 땅에서 삶을 이어가야 했지요.

그런데 이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신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제 업적으로 가로채 허세부리지 않고, 축복과 은총을 당연한 듯 삼켜버리지 않을 것이니까요. 좋은 머리와 기술을 남 속이는 데 쓰지도 않고, 힘으로 남을 위협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들은 가난하고 가련한 만큼 주님의 이름에 피신합니다. 주님 외에 자기들을 돌보고 보호하며 살려 주실 분이 없음을 아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화답송)

가난하고 가련하다고 죄를 짓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알기에 회개도 빠르고 진실합니다. 약해 빠져서 금새 또 넘어지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들을 안타깝게 연민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진정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께 달아들 때마다 매번 지치지 않고 끌어안아 주시지 않을 수 없지요.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이야말로 자비의 하느님을 자비하신 분답게 만들어 드리는 이들입니다. 자비의 아버지다움을 최대치로 발휘하게 만들어 드리는 이들이지요.  
   
아마도 수석 사제들이나 백성의 원로들은 하느님께 선택된 자기 민족 안에 세리나 창녀 같은 이들이 공존한다는 것을 못마땅하고 수치스럽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함께하지 못할 족속이고 상종 못할 말종이라 여겨 낙인 찍고, 나와는 다란 사람이라고 대놓고 소외시켰지요. 하지만 자칭 의인들이 죄인이라 부르는 이들이 곧 아버지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더 보듬고 애틋이 돌보시는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과 사회, 공동체 안에도 그런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만 아니면 우리는 꽤 폼 나고 괜찮은데 싶은 사람 말입니다. 또 한 사람 안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을 수 있지요. 요 부분만 빼면 스스로 제법 괜찮은 사람 같은, 그런 죄스럽고 나약한 부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에서도 말씀하시듯, 사람이든 어떤 부분이든 우리 존재와 우리 공동체에 그런 부분과 그런 사람을 남기신 것은 주님의 의지입니다.

그 부분, 그 사람이 있어야 우리가 삽니다. 주님의 자비와 연민, 은총이 그 때문에 오니까요. 그래서 그 부분이나 그 사람을 대하는 척도가 그와 그가 사는 공동체의 영적 수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신분이나 업적, 숫자가 아니라, 믿음과 회개로 의롭게 됩니다. 믿고 회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절박하고 가난한 이들이 결국 의로움을 획득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현세의 삶에서 안위와 풍요와 무탈을 누리며 이것이 구원인 양 착각하고 있다면 잠시 멈추고 주님의 뜻을 살필 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자신 안의 가난하고 가련한 부분,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 안의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을 포용하고 보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는 떼어내버리고 싶은 수치가 아니라 우리와 공동체를 구원으로 이끄는 "진홍색 실로 된 줄"
(여호 2,18)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난을 껴안고 주님 자비 아래로 피신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사랑의 총동원령

-김찬선신부-


지금까지 제가 저에 대해 자랑하듯이 얘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도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인사이동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적이 없을뿐더러 인사이동에 대해 관구장님이 제 의견을 물어오셔도

제 뜻을 말하지 않고 백지 수표 맡기듯 관구장님 손에 맡겼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자랑할 것은 못 된다는 것이 오늘 성찰이고,

그 이유가 과대포장이거나 눈속임의 측면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가 인사이동에 있어서 어떤 명령이든 그것에 순종하고,

그 이전에 아예 아무 의견도 가지지 않으려 함은 그것이

진정한 순종이라고 프란치스코가 가르치기 때문이었습니다.

 

토마스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 전기는 프란치스코의 초기 형제들이

"거룩한 순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순종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들은 명령을 수행할 채비를 차렸다."고 전하고 있고,

프란치스코가 "요청을 해서 허락을 받는 것도 순명이지만, 요청 없이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거룩한 순명이라고 말하였다."라고 전합니다.

 

저도 이 가르침대로 살려고 했고,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의 것은 어떤 소임이든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고,

그러니 이것을 대단한 순종인 양 얘기할 것이 못 되지요.

 

실제로 저의 삶을 보면 인사이동과 같이 큰일들에 있어서는 이러했지만

일상의 작은 일들중에 싫어하는 것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니 저의 삶 대부분은 제좋을 대로 불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지요.

 

실상 이것이 문제입니다.

수도생활 중 십여 번의 인사이동에 순명을 잘한 것을 가지고

일상의 수만 번, 아니 수십, 수백만 번을 순명치 않고

제좋을 대로 했음에도 순명을 잘한 것처럼 생각하고

더 나아가 자랑까지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의식의 순종을 아무리 잘했다 해도 무의식의 순종을 잘하지 않으면

우리의 순종생활을 잘했다고 절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행위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우리는 물을 먹으면서 물 마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생각지

않고, 반찬을 먹으면서 무엇을 먹는 것이 하느님 뜻일까까지 생각지 않지요.

그냥 생각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지 그 사소한 것까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까 생각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옛날 제가 아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식당에 들어가면 주님께서

앉을 자리까지 지정해주시고, 무엇을 먹어야 할지도 가르쳐주셨답니다.

 

물론 이것은 병적인 것이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깨어 있으라는 주님 말씀대로 의식이 깨어 있지 않으면,

그리고 무의식까지 주님 원하시는 것에 맞춰져 있지 않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제좋을 대로 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까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려고 우리의 전 존재가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주님을 사랑해야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은 총동원령입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의식은 물론 무의식까지 그러니까

우리 전 존재가 사랑하는 이에게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기도 묵상>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넋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기력과 영혼의 감각과

육신의 감각을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치고 다른 데에 쓰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나이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2월 13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마태오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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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맏이는 결국 ‘그래, 그래도 난 아버지의 아들이지!’라는 믿음을 회복한 것이고, 둘째는 ‘근데 그분이랑 나랑 뭔 상관이야?’라며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정체성 자체가 변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음으로써 우리 삶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변화를 보면서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지 못함이 아니라 오히려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자신이 변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위선적인 신앙인으로 남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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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총동원령입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의식은 물론 무의식까지 그러니까

우리 전 존재가 사랑하는 이에게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기도 묵상>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넋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기력과 영혼의 감각과

육신의 감각을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치고 다른 데에 쓰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나이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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