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2020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성모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 교회 때부터 생겨났다. 이러한 믿음은 여러 차례의 성모님 발현으로 더욱 깊어졌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조선교구의 수호자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로 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이러한 요청을 허락하면서 요셉 성인을 공동 수호자로 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요셉 성인과 함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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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은, 마리아께서 세상에 존재하시는 순간부터 죄에 물들지 않는 특전을 지니셨다는 뜻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이시며 임금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열 달 동안 품고 계실 분이시기 때문에, 탄생은 물론이고 잉태되실 때에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깨끗한 몸이셨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이를 깨우쳐 줍니다. 제1독서는 사람이 뱀의 유혹에 빠져 원죄를 지었다고 알려 주며,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구세주 잉태 소식을 전함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자비가 주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구원 계획을 펼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미리 우리를 뽑으셨다는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찬미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자비’와 ‘모태’를 뜻하는 단어는 어원이 같습니다. 곧 구약 성경에서는 배 속의 아이를 품듯이 하느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행위를 ‘자비’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오늘 제1독서 마지막에 ‘하와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다.’라는 것과,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께서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신다고 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우리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해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강론 마지막에 남기신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우리의 온 삶이 하느님께 ‘예.’가 되게 하소서!”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의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진행된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르려고 했을 때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뜻을 내세웠을 때는 분명히 계획상으로는 완벽했어도 늘 어디에서 문제를 보였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늘 기도와 묵상 중에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아닌, 세상 안에서만 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배제되고 나만 드러내려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겠지요.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른 분을 기념합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로,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천사로부터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라는 특별한 인사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성모님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이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가 쉬웠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난관이 닥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성모님도 인간이기에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죄로 물든 상태의 몸이 아닌,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몸을 통해서 오셔야만 했습니다.
이 교리로 인해서 오늘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모든 일이 성모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모님처럼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른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일은 완성됩니다.


가장 어리석은 모습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 사람은 자기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나 역시도 나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계속 비교하면서 부러워합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부러워하면 진짜 지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못난 모습만 보고 있으니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비교해야 할 것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는 것분입니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더 나은 지금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못나게 살았던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의 나’가 더 괜찮은 모습이라면 이 부분을 노력해서 ‘현재의 나’도 괜찮은 모습으로 만들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는 어리석은 ‘나’가 아닌, 과거와 현재의 ‘나’를 비교할 수 있는 지혜로운 ‘나’가 되어야 합니다. 더 많은 성장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공경할 수 있을까?
-전삼용신부-
성모님은 잉태되실 때부터 죄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이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죄가 없는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우선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꼬시는 뱀의 말을 듣기 이전의 상태일 것입니다.
뱀은 어떠한 욕구를 자아내어 선악과를 따먹게 했을까요? 선악과를 바치지 않은 것은 더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세속’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더 먹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욕심은 결국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뱀은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으로 첫 조상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유혹이 없을까요? 우리 안에 뱀 한 마리씩 다 있습니다. 우리가 그 뱀을 뱀인 줄 모르고 인정하며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하와가 아무 생각 없이 뱀과 대화하는 것이 죄의 시작인 것처럼,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나를 나로 인정하는 것이 원죄의 시작인 것입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모든 욕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아기가 ‘나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비로소 두 발로 서고 싶고 말을 하고 싶은 욕구가 발동합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욕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은 자기 혼자서는 가질 수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 없이 홀로 무인도에서 살아남아 자신이 사람인 줄 깨닫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두 발로 걷는 일도 없습니다.
따라서 죄란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에 대한 잘못된 해답을 가짐으로써 시작됩니다. 우리가 원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나는 나야!’란 믿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라고 생각하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세속-육신-마귀의 모든 욕구가 정당화됩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는 마음과 성욕과 남을 판단하는 마음이 절제되지 않습니다. ‘나는 나’라는 믿음은 자신이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나는 왜 이리 돈이 부족할까? 왜 이렇게 맛이 없어? 짜증나네. 저 인간은 나한테 왜 이래?’라는 생각들은 다 ‘내가 하느님인데!’라는 교만을 근저에 깔고 있습니다. 내가 뭔데 돈이 꼭 많아야 하고 내가 뭔데 꼭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며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남을 심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내가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생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시스템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나’라는 믿음 => 불만족의 감정 => ‘선악과를 왜 바쳐야 하는가?’라는 생각 => 선악과를 자신이 먹고 아담에게도 권하는 행동
‘믿음(영) => 욕구 => 감정 => 생각(혼) => 행위(육체)’의 순서대로 우리가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재확립하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곧 욕구”입니다. 자기 정체성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내면에서 저절로 바뀌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육체를 통해 생각으로, 생각에서 감정으로, 그리고 그 감정이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변화시키게 만들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음식을 주면 그것이 배를 불리고 그러면 사랑받는다고 생각이 들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 좋아진 기분은 ‘내가 나’라기보다는 ‘부모의 자식’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내 맘대로 살지 않고 ‘부모의 뜻’에 따라주고 싶은 욕구가 생겨납니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는 마음이 만족스럽지 못하여 이 만족을 위해 생각이 작동하고 그 생각대로 몸이 움직입니다. 이것이 변화의 시스템이자 과정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먹이시고 가르치십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입과 귀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리면 그것이 생각을 거치며 내 안에서 정리됩니다. 그 생각이 기분을 좋게 만듭니다. 그 평화로움을 통해 우리는 내가 이 지상의 부모의 자녀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마음이 발동합니다. 이 욕구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와 반대됩니다. 나를 죽여 그 살과 피를 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죄로 만들어버리는 이기적 욕구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갖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죄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가 없으셨다는 말은 처음부터 하느님과 하나라는 믿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뱀의 유혹에 절대로 물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원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원죄에서 벗어나려면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상태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는 것이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바치면 세속적 욕구만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육체적 욕구도 절제되고 하느님처럼 되려는 교만도 절제가 됩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근접하기 위해 ‘십일조를 회복하는 것보다 더 급선무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우리나라의 수호자로 모시면서도 우리는 십일조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그분이 지켜주시기만을 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누구든 그 사람의 뜻을 따라주고 있지 않다면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아집니다. 이는 성모님도 그렇고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시니까 우리를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녀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진짜 자녀를 자녀기 때문에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뜻’이 들어있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몸 안에서는 수정된 난자가 75%나 착상하지 못하고 그냥 빠져나갑니다. 어떤 엄마가 자신의 자녀가 될 가능성이 그렇게나 많지만 그렇게나 많이 빠져나가는 그 수정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까? 하지만 아기가 뱃속에서 커갈수록 더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잘 커달라는 엄마의 뜻이 아이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처럼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수정하여 100명의 킬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시다. 이 무자비한 킬러들이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다닙니다. 부모들은 그저 자신들의 유전자를 100% 가지고 있다고 그 자식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못 사랑합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뜻을 우리가 따라주고 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지옥이 존재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느님도 사랑 자체이시지만 당신의 뜻을 아주 조금이라도 따라주는 이들만 사랑하십니다.
성모님을 기리는 날이면 성모님께 기쁜 결심을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은 선악과를 절대로 먹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선악과는 주님께 당연히 바쳐야 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십일조로 굳어졌으며 예수님도 그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속-육신-마귀에 집착하면서 그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공경한다면 그분은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원죄가 선악과 때문에 시작되었다면 성모 마리아에게 기쁨을 드리는 진정한 일은 우리도 그분처럼 봉헌을 배워나가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기가 사람임을 믿었다가 걸음마로 수천 번 넘어지면서도 조금씩 발전하는 자신을 보며 그 믿음을 견고하게 해나가듯, 우리도 우리가 바치는 십일조를 보며 우리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집니다. 하느님은 물론이요, 성모 마리아께 사랑받는 유일한 찬미의 길인 십일조를 봉헌하면 나머지 모든 것도 주님 것임을 믿으며 살겠다는 결심을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신부님들과 함께 캠핑을 다니면서 필요한 장비를 마련하였습니다. 텐트, 침대, 침랑, 의자, 매트리스를 마련했습니다. 장비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보관하는 주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주머니를 버리곤 하는데 캠핑 장비의 주머니는 꼭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주머니가 없으면 장비에 들어있는 부품들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품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장비라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주머니는 너무 작으면 장비를 넣기가 힘이 들고, 너무 크면 부피를 많이 차지합니다. 그래서 주머니의 크기는 적당해야 합니다. 여행 때 가지고 다니는 노트북도 꼭 전용 가방에 넣고 다닙니다. 전용 가방이 없으면 노트북이 충격에 노출 될 수 있고, 고장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중한 보석은 보석함에 보관합니다. 아무데나 보관하면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은 피부, 뼈, 혈관, 장기로 이루어집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뇌는 단단한 뼈로 보호 받고 있습니다. 심장, 폐, 신장, 위, 간은 척추와 갈비뼈로 보호 받고 있습니다. 뼈와 혈관은 부드럽지만 탄력이 있는 근육과 피부로 보호 받고 있습니다. 피부와 뼈가 없다면 우리의 몸은 외부의 충격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들은 모두가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주교는 교구를 관리하고, 사제들이 직무에 충실 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제는 주교로부터 파견 받아 성사를 집전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수도자는 정결, 청빈, 순명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야 합니다. 평신도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앙에 충실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소중하듯이, 교회의 지체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두가 소중합니다.
교회는 성모님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서의 말씀에 따라서 성모님을 공경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하와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왔지만, 마리아의 순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구세주를 보내 주시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미카서 5장 1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성모님을 공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제자에게도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특별한 신심을 가졌습니다. 성모님께서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다는 신심, 죽음을 거치지 않았기에 원죄 없이 태어났다는 신심,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신심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축일로 정하였습니다. 8월 15일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12월 8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1월 1월은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보석은 보석함이 있어야 하듯이,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성모님을 어머니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한 점에서 참된 신앙인의 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성모님은 어려움이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응답은 배우자인 요셉과의 관계 회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했지만 약혼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며,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멀리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을 체험하였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에 대해서 많은 영광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평생 동정이셨고,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영광과 칭송은 결과입니다. 성모님의 영광은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의탁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들 또한 빛의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양승국신부-
피정 센터에 와서 평생 안해보던 일을 참 많이 합니다. 눈만 뜨면 하는 일이 화장실 청소요 이불 빨래, 쓰레기 분리 수거요 장작 패기입니다. 어제는 건장한 청소년들이 우르르 놀러온다고 해서 하루 온 종일 쓸고 닦고를 반복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숙소를 셋팅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다음 주에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저희 공동체를 특별 방문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어디에다 모실 것입니까?
그 특별한 손님을 아무 방에나 모시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집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특실, 가장 넓고 쾌적한 방에 모실 것입니다. 물론 몇 사람이 며칠간 달라붙어 침실이며 화장실이며, 번쩍번쩍 광채가 날 정도로 깨끗히 청소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특별한 손님에 대한 합당한 예우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바라보니 조금 이해의 폭이 생겼습니다. 교황님을 위한 거처 마련에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하물며 하느님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육화강생하시는 과정에서 그분의 거처는 너무나도 당연히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룩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실 첫 거처이자 지성소로서의 합당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원죄없이 잉태되심은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자 구원계획의 성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것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대한 초기 교부들의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거룩한 딸인 마리아는 성령의 신방에서 티 없이 살았기에 하느님의 신부가 되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업하게 선포되었습니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과거 왕가에서는 왕의 부인이나 왕자의 부인을 간택할 때, 엄청난 숫자의 후보 규수들을 점지해놓고, 그 가운데서 고르고 또 골랐습니다. 평판이 좋은 가문의 여인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들, 가장 깨끗하고 흠없는 여인들 가운데서 심사숙고해서 선발한 것입니다. 건강하고 지적이며, 흠없는 왕손을 얻기 위해 그 어머니 역시 건강하고 흠없는 여인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왕의 어머니가 될 여인도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시키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분을 아무런 준비없이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사숙고 끝에 당신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여인을 고르셨는데, 가장 잘 준비된 분, 아무런 흠도 티도 오점도 없는 순결하신 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을 선택하셨는데,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였습니다.
무염시태 교리는 너무나 큰 신비와 베일 속에 가려진 알쏭달쏭한 교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교리라고 합니다.
무염시태 교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머릿칼보다 많은 일상의 죄 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다보니, ‘원죄없이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좀 덜짓는다면, 우리가 좀 더 자주 고백소에 들어가면, 좀 더 순결하게 살아간다면 무염시태 교리는 훨씬 이해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자주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좀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좀 더 하느님과 일치하며, 좀 더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무염시태 교리는 좀더 현실감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세상 사람들이 무염시태 교리 앞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의혹을 품다보니 마침내, 1858년 성모님께서는 프랑스 루르드에 직접 발현하셔서 무염시태 교리를 당신 입을 통해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1858년 2월 11일 부터 7월 16일까지 총 18번에 걸쳐 벨라뎃다 성녀에게 발현하셨는데, 마지막 발현 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 벨라뎃다야,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한국교회의 수호자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입니다. 곧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심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오늘을 주보성인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셨던 앵베르 주교에 의해 건의되어, 이 교의가 선포되기 4년 전인 1841년에 요셉성인과 함께 조선교구의 주보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898년 한국천주교회의 최초의 본당이자 서울대교구 주교좌 본당인 명동성당이 바로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봉헌되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은 1830년 11월 27일 프랑스에서 성모님께서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발현하신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발현 때 성모님 주위에는 이러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시여, 당신께 매달리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보여 주신 모습대로 메달을 만들어 지니고 기도하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 이 메달 착용이 늘어나면서 기적이 많이 일어나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54년 오늘, 곧 12월 8일에 교종 비오 9세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 선언은 세 가지 사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리아께서 지니신 특전의 성격으로, 원죄로부터의 면죄되었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 특전의 이유로,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셋째>는 특전의 방법으로, 마리아께서 원죄에서 보호된 것은 예수님께서 갈바리아에서 얻은 구원의 “선행된” 효과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보편적인 구원으로부터 예외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미리 입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거룩하시고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그 구세주를 잉태한 성모님은 당연히 거룩하고 티 없으심이 당연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교리는 겉으로는 성모님에 관한 교리이지만, 사실은 구세주 성자에 관한 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이 이러한 공식 교리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이 교리가 선포된 지 4년 후인 1858년(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에 18회에 걸쳐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성모님께서 14세의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이때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된 자'임을 밝히심으로써 이 교리를 확증해주시면서 기도와 보속과 회개를 촉구하시고 특별히 묵주기도를 권고하셨습니다. 그리고 5년 뒤인 1863년에, 오늘 우리가 드린 <본기도> 기도문이 확정되었습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일깨워 줍니다.
<하나>는 성모님께서는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이요, <또 하나>는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모님께서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은 그분께서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 되셨음을 말합니다. 당신 안에,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또 성모님께서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범죄 하기 전부터,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께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신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성모님으로 하여, 우리도 ‘은총을 입은 이’가 되어 ‘사랑의 감실이요, 거룩한 대성전’이 되었습니다. 곧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원죄에 물들어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하지만, 주님을 모심으로써 죄가 씻기게 되는 축복을 주시어 우리를 ‘복을 주는 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으로 하여, 은총을 가득히 입었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1,28 참조). 원죄로 하여 에덴동산 밖에 있는 우리를 다시 에덴으로 불러들이십니다. 하여, 오늘 우리는 이토록, 한없는 기쁨으로 성모님과 함께 기뻐합니다.
“내 영혼이 내 구세주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안 되는 것이 없다
-반영억신부-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 재물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을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답은 감당하는 책임과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바탕에 다시 ‘아기를 잉태’ 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한 후’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훌륭한 연장입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을 생각하며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한 발 나아가야겠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먼저 겸손과 순명의 어머니 마리아께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어머니께로!
어떤 사업가가 신부님께 와서 물었답니다. “신부님, 제가 1억 원을 봉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대답하셨답니다. “그거 한번 시험해 봅시다!”
봉헌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나의 이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재물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희망하였고 우리 모두를 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참된 봉헌을 통해 우리에게 구세주를 낳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
-송영진신부-
1)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음으로써 ‘한처음’의 순수함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즉 순수한 상태였을 때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느님 앞에 나섰고, 하느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8).”
예수님께서는 그때 잃어버린 그 ‘순수함’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려고,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려고 오셨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묵시 21,3)”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셨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7).”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신 분이지만, 한 가지만은 다릅니다.
그분은 죄에 오염되지 않으셨습니다.
“......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의료진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야
감염된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처음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려면, 그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신 분이 오셔야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예수님의 그 순수함이 그 무엇으로도
오염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일입니다.
<인류에게 하느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주려면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오셔야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요한 1.1).
성모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왔을 때 했던 인사말,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말은(루카 1,28),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성모님을 선택하셨고 함께 계셨음을 나타내는데,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성모님과 함께 계셨음을 나타내는 일이 바로
‘원죄 없이 잉태되심’입니다.>
2)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3-24).”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과 하와의 원죄 때문에 막혔던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완전히 개방됩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묵시 22,1-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로 인도하려고,
즉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요한 3,16).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는 분이고,
동시에 우리에게 그 생명을 줄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바로 그 생명력을 나타내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미리 준비하신 일입니다.
(유한한 그릇은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태중에 모실 어머니를 선택하셨고 그 일을 준비하셨는데,
그 준비가 바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입니다.)
3)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음으로써 ‘한처음’에 누렸던 ‘참 기쁨’을 잃어버렸고,
사람의 인생은 ‘괴로운 노동’에 시달리는 ‘허무한 나그네 여행’이 되어버렸습니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7-19).”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기쁨을 우리에게 다시 주려고 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참되고 순수하고 영원한 기쁨입니다.
묵시록에서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3-4).”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한처음의 상태’가 회복되었음을 뜻하고,
그리고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다는 것은,
‘한처음의 기쁨과 행복’을 다시 누리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인류가 ‘한처음에 누리던 기쁨’을 나타내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려고
미리 준비하신 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일은 예수님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결국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참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일생 동안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신 분으로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분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일은 성모님의 의지로 하신 일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성모님이 일생 동안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신 일은 성모님 자신의 의지로 끊임없이 노력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노력을 본받아야 합니다.

복음: 루카 1,26-38: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구원 은총을 미리 입게 하시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는 날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미 1854년 12월 8일에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고,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시다. 성모님께 관한 이 믿을 교리는 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 확인시켜 주신 내용이다. 우리는 마리아께서 처음으로 구원의 신비를 입으셨듯이 나약한 우리도 그 신비에 동참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하여 준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간의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치 처음의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세상에 은총과 구원이 오지 못하고 죄와 죽음이 왔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구원이 오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구세주는 태어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명이 아니었더라면 또한 구원의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버지께 피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그 잔을 치워주시도록 기도하면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아드님과 같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께서도 당신의 신앙을 용감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이 고백은 주님의 탄생 신비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마리아의 자세이다. 우리도 이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이 필요하다. 삶과 유리된 신앙은 무의미하다. 마리아의 이 고백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고백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체적인 실현을 통해 신비를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우리의 생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구체적인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부활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면서 신앙으로 그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은 역시 구체적이어야 한다(야고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맡겨드렸다는 것과 그리고 이웃 앞에 자신을 봉사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자세가 주님을 이 세상에 낳아주실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려 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탄생 신비를 살 수 있으며,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마리아의 고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지 않으면 안 되며, 그만한 아픔이 있게 마련이기에 고통의 신비를 더 깊이 알게 되며, 더 깊은 사랑을 우리 이웃에 전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즉시 우리는 세상을 성화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즉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탄의 신비가 12월 25일 성탄에만 갖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휴가가 없다. 연중무휴이다. 큰 것을 찾기보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쁘게 그것을 실천하며 나아가도록 하자. 신앙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야 하고, 또 살아가며 확실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와 같이 우리의 모든 순간이 주님 앞에 그대로 고백 되는 삶으로 이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하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권능이 크게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0-31)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나자렛 처녀 마리아에게 보내시어 당신의 계획을 알려 주십니다. 천사의 발현도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인데, 처녀의 잉태는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 되겠지요.
마리아처럼 경건하게 율법과 관습을 익혀온 이스라엘의 처녀라면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라는 예언서의 말씀을 익히 들어왔겠지만, 누구도 이런 상황에서 발현과 전언을 익숙하고 자연스레 수용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하느님께서 예언서에서 이야기한 인물로 그 자신을 선택하셨다는 점이 마리아가 가진 첫째 의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어서 드는 두 번째 의아함은 아마도 아기를 잉태하여 출산에 이르는 생물학적인 절차에 관한 부분이었지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그렇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이 원죄의 굴레를 져야 했지만, 신이고 인간이신 성자 예수님의 거처를 위해 마리아를 거룩하고 순결한 존재로 남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예비하셨으니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를 안타깝게 만든 원조들의 범죄는 마리아를 오염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마리아의 존재에 희망을 둡니다.
그리고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서 보듯 잉태와 출산의 생물학적 원리 역시 하느님께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하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논리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푸셨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준비도 이러하셨습니다. 우리를 항한 그분의 꿈과 기대도 이토록 진실되고 아름다웠습니다. 비록 지금은 세상살이에 휘둘려 이 고귀한 섭리의 자취보다 원죄의 상처가 짙게 드리워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처음 우리에게 품으셨던 그분의 선택, 은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5)
하느님의 "좋으신 뜻"은 불가능을 모릅니다. 당사자인 우리의 죄와 나약함과 불결함에도 그분의 "좋으신 뜻"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 됨됨이를 보고 뜻을 품으신 뜻이 아니라 "사랑으로"(에페 1,4) 시작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선택과 총애가 오롯이 하느님의 뜻이었듯이,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부르심과 은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잊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제 마리아의 응답이 우리를 재촉합니다. 마리아를 통해 얻은 희망이, 마리아의 겸손과 용기, 순종의 은혜까지도 쟁취하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겸손과 순종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고, 그로써 또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는 우리의 거울이고 모범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창조하신 주님께서 매순간 당신의 구원 사업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꼭 거창하지 않더라도 소박하고 잔잔한 일상 안에서 부르시지요. 그 부르심에 대해 각자가 느끼는 무게와 크기는 다 다를 겁니다. 주님께서 어떤 상황을 통해, 누구를 통해 말을 걸어오시더라도 마리아처럼 단순하게, 겸손히, 용기 있게 순종하고 의탁하는 나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악화되어 모두를 어려움을 겪고 계시겠지만, 내적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 대축일 되시길 기도합니다.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여,
저희와 교회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오랜 사랑
-김찬선신부-
오늘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은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고
자기 죄와 자기 선택의 탓을 여자에게 돌립니다.
여자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고
꾐에 넘어간 탓을 뱀에게 돌립니다.
이렇게 계속 산다면 아담은 앞으로도 주는 대로 다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산다면 여자는 앞으로도 계속 꾐에 넘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상처를 주면 줄 때마다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자주 얘기하듯 준다고 다 받습니까?
나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까?
나는 선택의 자유를 이웃들에게 맡겼습니까?
사랑으로 나의 선택을 이웃에게 맡겼다면 그것은 순종이 됩니다.
책임회피로 나의 선택을 이웃에게 맡긴다면 나는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이렇게
노예가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에페소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 자녀로 미리 삼으신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이
허사 되기를, 우리가 노예 되는 것으로 끝장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고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죄의 자유를 선택할 수 있고 사랑의 자유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주님을 떠나는 죄의 자유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제 아들이 아니라 품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는 여전히 아들이라고,
단지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죄를 지었어도 본래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본래성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 오늘 성모 무염시태 축일입니다.
이 본래성을 본성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천지창조 이후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우리 인류가 어떻게 되었건,
태어난 후 우리가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건
그것은 보석이 먼지에 덮인 것과 같을 뿐 본래성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느님 사랑의 작품임을 돋을새김하는 것이 오늘 축일의 의미입니다.
그렇지요.
본래 보물인데 먼지가 가득 쌓인다고 보물이 보물 아닌 것이 아니지요.
먼지를 닦아내고 죄를 씻어내면 본래성이 드러나고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죄를 씻는 것도 우리에게 중요하고 그래서 그리 해야 하겠지만
죄를 씻기 위해서도 나의 본래성과 진면목이 뭔지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본래성과 진면목을 모르면 자기 먼지를 닦으려 들지도 않겠지요?
닦아봤자 막사발이라면 누가 닦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당신 피로 세상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라고 하고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만 충분한 답은 못 되지요.
만약 우리가 죄짓지 않았다면 주님도 안 오셨을 거라는 말이 되잖아요?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오시기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 이전부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기로 작정된 분이시며
그러기 위해서 그 어머니 되실 분도 계셔야 했고 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축일의 의미인데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신 그 오랜 사랑을 감사드리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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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은 잉태되실 때부터 죄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이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죄가 없는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우선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꼬시는 뱀의 말을 듣기 이전의 상태일 것입니다.
뱀은 어떠한 욕구를 자아내어 선악과를 따먹게 했을까요? 선악과를 바치지 않은 것은 더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세속’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더 먹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욕심은 결국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뱀은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으로 첫 조상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유혹이 없을까요? 우리 안에 뱀 한 마리씩 다 있습니다. 우리가 그 뱀을 뱀인 줄 모르고 인정하며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하와가 아무 생각 없이 뱀과 대화하는 것이 죄의 시작인 것처럼,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나를 나로 인정하는 것이 원죄의 시작인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가 없으셨다는 말은 처음부터 하느님과 하나라는 믿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뱀의 유혹에 절대로 물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원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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