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2월 6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Margaret K 2020. 12. 5. 07:26

2020년 12월 6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르코 1.1-8)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his path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이사야 예언서의 두 번째 부분인 40―55장은 바빌론 유배 말기의 삶을 전하면서 ‘위로’를 주제로 삼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위로의 책’의 시작 부분으로서, 예언자를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의 자비를 통하여 일어나는 위로와 변화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 자비의 힘을 강력한 자연의 모습에 비유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주님께서는 자비의 힘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변화시키십니다.
복음서를 집필하며 예수님께서는 과연 누구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 고민하던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사야가 예언한 하느님의 자비를 통하여 일어나는 위로와 변화의 힘을 복음서의 첫 장에 인용합니다. 마르코는 복음서 첫머리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며, 이사야의 예언을 세례자 요한의 외침으로 전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이처럼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합당하게 맞이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이었고, 그 방법이 ‘회개’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례자 요한은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힘으로 위로와 변화를 가져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에 앞서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풉니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날을 앞당기도록 회개해야 할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회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주님과 소통할 수 있는 곧은 길

-키엣 대주교-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길은 그 나라의 경제발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들이 불편함없이 이동하고 원활한 물류 수송을 위해서는 길이 좋아야합니다. 좋은 길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도로의 유지 보수가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수 많은 길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길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만든 것입니다. 도로가 없다면 가까운 거리도 쉽게 갈수없고 멀리 돌아가야 합니다.

마음의 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입니다.  때로는 정체되고 단절되어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어렵게합니다. 두 사람이 아무리 가까이 앉아 이야기를 한다해도 그들을 이어주는 마음의 길이 없다면 가까이 있어도 고독함을 느낄 것입니다.

영혼의 길은 나와 주님을 연결해주는 길입니다. 이 길이 막힌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영혼의 길은 아무리 작은 잘못이라도 주님 앞에 고하고 마음을 정결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루 하루 미루게 되면 우리의 잘못이 산같이 쌓여 주님께 다가가는 길,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은 단절되어버릴 것입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영혼의 길이 필요합니다. 아마 아주 오래전에 주님께서 오셨지만 길이 단절되어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오만이라는 산 꼭대기에 영혼을 높이 올려놓아 나의 부족함과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고 남을 용서하지도 않습니다. 탐욕과 명예의 큰 구덩이가 파여 있어 주님이 오시는 것을 막습니다. 거짓으로 왜곡된 영혼은 울퉁불퉁한 길을 만들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거룩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의 길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오만한 자존심을 버리고 탐욕과 분열, 불화로 깊어진 구덩이들을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채워 반듯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열정과 욕망의 구덩이를 채우고 거짓과 위선으로 왜곡된 길, 잔인한 말과 행동으로 거칠어진 길을 반듯이 펴십시오. 

세레자요한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만든 길을 따라가보면 반드시 주님께 다다를 것입니다.

사막이란 홀로 주님과 만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속세를 떠나 황량하고 처절한 사막의 고독 속에서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계신 주님을 만나보십시오. 

낙타 털 옷과 가죽 띠만 걸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이러한 겸손과 소박한 태도가 바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메뚜기와 꿀만 먹고 사는 고행을 통해 몸 속에 잔재해 있는 나쁜 것을 없애고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언제든지 영혼의 부름에 따르는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처럼 어려운 삶을 살았기에 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대림시기에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마음 속 주님의 길이 아름답게 다듬어져 주님을 맞이하는 영광스러운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저의 죄를 구원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의 영혼의 길은 어떤 모습입니까? 

2.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실천하였던 고행 중 어떤 것이 나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까?

3. 이번 대림절에 주님을 만나는 영혼의 길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주님의 길은 낮아지는 길입니다.

-나승구신부-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농공상이 있었고 양반과 상놈이 있었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분명했습니다. 평민은 귀족과 달라야 했고 노예는 인간의 축에 끼지도 못하고 팔려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불과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차별을 두고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이라 비웃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인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유한 권리임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나라는 지금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오랜 유배 기간을 보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며 희망의 노래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힌 길은, 가두었던 벽은, 가려졌던 주님의 영광은, 뚫리고, 열리고, 드러날 것입니다. 이 예언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타향살이 유배에 시달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고향 땅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둘러쌓던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지배자의 결심과 한 마디의 명령으로 가족들과 가문이 몰살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실질적인 해방입니다.

우리 시대의 해방도 쉽게 얻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같이 소중하다는 귀한 신념을 인류 공통의 가치로 품어 안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의 열과 성, 투쟁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모두는 소중하다, 한 인간은 온 지구를 품고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소중한 가치는 여기저기 할퀸 자국으로 상처 입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우려하신 것처럼 나이 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될 만큼 인간의 가치는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를 비판하면서도 우리 안에서조차 차별은 존재합니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보는 눈,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보는 눈, 배운 것이 많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보는 눈은 분명 다릅니다. 우리 안에 차별은 그렇게 존재합니다. 그런 차별이 없다면 흙수저와 금수저 같은 이야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주변에서 이런 안타까운 일들을 한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안타까운 일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으며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길은 낮아지는 길이었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 것은 우리도 역시 그분이 찾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모두를 귀하게 여기시어 먹이시고, 안으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대림에 차별과 혐오 없는 주님의 길을 마련한다면 임마누엘은 비로소 복음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매일 기다렸습니다. 아기 예수님!

-장재봉신부-


세상에는 아름다운 표현이 많습니다. 저는 그중에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아끼는데요. 무언가를 기다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에 담긴 행복의 향기가 너무 좋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대림 시기는 애틋하고 복됩니다. 귀한 만남을 기다리는 참 행복한 때이지요.

지난해, 성전의 구유를 치울 때였습니다. 교우분들이 아기 예수님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 정경을 카메라에 저장하는 모습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퍼뜩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을 기다리는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고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기다림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묘수를 찾고 싶었습니다. 혹여 구유가 차려진 그 시기에만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런 사목적 잘못은 다시 없으니 말입니다. 만약에 만에 한 분이라도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다면 ‘이야말로 큰일이다’라는 노파심이 일었던 겁니다.

그러다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일 년 내내 간직할 수 있는 묘안이 떠올랐는데요. 곧장 교우분들께 제안을 드렸지요. 이제부터는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내내 간수하기 위해서 구유예물을 매일 혹은 매 주일마다 모아보자고요. 2020년 성탄에는 일 년 동안 모은 정성 어린 예물을 아기예수님께 선물해드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계획이 너무나 좋고 좋았던 저는 그날부터 당장 실천에 들어갔는데요. 이제 한 해가 다가오니 예물주머니가 제법 두둑해졌습니다. 스스로 기특해서 오늘 아침에도 ’쓰담쓰담‘ 셀프칭찬을 날렸더랬습니다.

솔직히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 약속을 기억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과연 몇 분이나 그 약속을 실천하고 계신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처럼 잊지 않고 매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을 간직하신 분들이 꼭 계시리라 믿습니다. 어쩌면 올해 우리 본당의 구유예물이 전국 최고치를 경신할 것만 같아, 으쓱한 마음도 생깁니다.

그런데 오늘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의 첫 구절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마도 복음서의 제목이었으리라 짐작되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선명한 문구가 심상치 않게 다가왔는데요. 무엇보다 “보라”라는 강한 명령어로 복음서를 열고 있다는 점이 그랬습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베드로 사도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요. 이를테면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 공생활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던 베드로 사도의 증언이며 고백인 셈인데, 그 첫 어휘가 “보라”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복음의 시작으로 이 단어를 선택했을까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고 알리기 위한 서두를 허투루 골랐을 리가 만무하니 말입니다. 수도 없이 앞에 놓은 이야기와 뒤를 이을 사연을 재편집하며 고심했을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고민한 끝에 ‘예수님을 보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테니 말입니다.
 

바르톨로메우스 브레인베르흐 ‘요한 세례자의 설교’(1634)

오늘 우리는 사도의 권유에 따라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며”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삶이 온통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에 바쳐졌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또한 평생을 메시아를 기다리는 일에만 집중하여 살았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로부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고 칭찬을 들었던 사실을 되새깁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오롯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순수한 믿음의 자세를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신다는 고백으로 들어도 무방하리라 싶습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굳센 믿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만으로 주님께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설사 우리의 생각이 한참 모자라고, 우리의 믿음이 약간씩 흔들거리고, 우리의 회개가 반나절에 그친다 해도 우리와의 만남을 기다리시는 주님 사랑은 끝이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됩니다. 크신 하느님 앞에 작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주님께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니요? 아,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복음생활은 이토록 단순하고 쉽다는 뜻이라 새겨봅니다.

물론 예수님을 ‘보라’는 사도의 권고에 오롯이 따라 살기 위해서는 ‘보지 말아야 할 것’에 예민해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순결한 시선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지 않아야 하는 것들에 단호해져야 할 것입니다. 보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지혜만이 주님을 뵙는 밝은 영안을 갖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은 인권 주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세상의 이웃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라’고 선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3요한 8)임을 선명히 알려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대림, 예수님께서 우리와의 만남을 우리보다 더 손꼽아 기다리시는 때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땅으로 보내심에 감사드리는 마음이 우리 몸과 영과 혼에 가득 차오르기를 기도드립니다.

 

가난과 겸손

김태형신부-


오늘 대림 제2주일 복음은 두 가지를 드러내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자 요한의 직무와 인격에 대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설교에 대해서 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설교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메시지는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선포되었던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라는 메시지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되돌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하느님의 오심’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오심’을 통해 드러나는 그분은 요한 다음에 오시는 분이지만 요한보다 더욱 강한 분이 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의 권능과 함께 오시 는 분이기에 악을 쳐 이기는데 더욱 강한 힘을 가지 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 하러 오시는 목자이시며, 부서지기 쉽고 결핍된 것들을 배려하고 보살피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십니다. 오시는 분을 백성들이 받아들이기 위해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 고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것 을 회개의 삶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회개의 삶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덕목을 갖추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대림 2주간을 보내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의 삶의 태도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통해 배우도록 복음은 요한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을 통해 배워야 하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 는데 꼭 필요한 본질적인 덕목은 가난과 겸손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모든 이는 이 두 가지 덕목 안에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가난의 덕은 주님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것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탄생할 때 화려한 궁궐이나 도시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골의 작은 마을 마구간에서 가난하게 받아들여졌습 니다. 그러기에 가난은 2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 늘날에도 구세주가 탄생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되 는 것입니다.


구세주를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가난 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힘을 부여할 수 있 는 모든 부유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 에게 오시지 못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만이 그리스도 를 영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덕목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면서, 특별히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데 더욱 필요한 덕목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교만함을 통해서 교회로 부터 멀어져 갔음을, 반대로 주님을 닮은 수많은 이들이 가난과 겸손의 덕을 갖춘 이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대림 시기는 그리스도를 닮는데 필요한 덕목을 증진시키고자 노력하는 내적인 발걸음을 걷는데 시간과 공간을 할애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 노력들이 오시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 길을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부디 모든 교우 여러분들이 이러한 노력을 통해 오시는 주님을 더욱 기쁘게 맞이 하기를 기원합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

-김용태신부-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인 ‘인권’은 이 마땅한 사실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존엄한가? 모든 피조 물 중에 지능적으로 가장 뛰어난 ‘만물의 영장’이라서? 그것이 존 엄함의 이유일까? 원숭이보다 낫다는 사실이 인간 존엄성의 이유인가? 존엄함이란 것이 그 무엇과의 비교 우위를 통해 이루지 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는 안 된다. 만일 존엄함이란 것이 그 무언가보다 더 낫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 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교와 차별은 각자 의 존엄함을 위한 정당한 행위로 자리하게 된다. 

인간 의 존엄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는 사실에서 온다. 나보다 못한 것과의 격차를 통한 존엄함이 아니라 세상 가장 존귀하신 분과 가깝다는 사실에서 오는 존엄함이다. 존엄함이란 것이 그런거 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어도 인간은 얼마든지 존엄할 수 있다. 재산, 학력, 지위, 출 신, 성별 등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 엄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그런 것이라면 인간성이 회복되고 인권이 존중되는 삶이란 결국 우리가 자신을 포함 한 모든 인간의 모습 안에서 지존하신 하느님의 모습 을 발견하고 그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력을 통해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노력을 ‘사랑’이라 부르신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사랑이며 결국 그 사랑이 우리를 존귀하신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마태 25,31-46 참조). 

보다 크고, 높고, 강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이다. 격 차와 차별이 자신의 존엄함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러한 세상 안에서 작고, 낮고, 약한 것들은 무시당하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세상이야말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 개”(마르 1,4)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정녕 모든 사람 을 존엄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가로 막는 모든 것들을 우리 안에서 치움으로써 ‘참사랑이 신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마 르 1,3 참조) 참된 회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사랑의 길

박인수신부-


모든 인간은 존엄하 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인 ‘인권’은 이 마땅한 사실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존엄한가? 모든 피조 물 중에 지능적으로 가 장 뛰어난 ‘만물의 영 장’이라서? 그것이 존 엄함의 이유일까? 원 숭이보다 낫다는 사실이 인간 존엄성의 이유인가? 존엄함이란 것이 그 무엇과의 비교 우위를 통해 이루지 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는 안 된다. 만일 존엄함이란 것이 그 무언가보다 더 낫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 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교와 차별은 각자의 존엄함을 위한 정당한 행위로 자리하게 된다. 인간 의 존엄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 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이 아 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 는 사실에서 온다.

나보다 못한 것과의 격차를 통한 존엄함이 아니라 세상 가장 존귀하신 분과 가깝다는 사실에서 오는 존엄함이다. 존엄함이란 것이 그런 거 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어도 인 간은 얼마든지 존엄할 수 있다. 재산, 학력, 지위, 출 신, 성별 등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 엄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그런 것이라면 인간성이 회복되 고 인권이 존중되는 삶이란 결국 우리가 자신을 포함 한 모든 인간의 모습 안에서 지존하신 하느님의 모습 을 발견하고 그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력을 통해서 이 룰 수 있을 것이다

. 예수님은 그 노력을 ‘사랑’이라 부 르신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사랑이며 결국 그 사랑이 우리를 존귀하신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 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마태 25,31-46 참조). 보다 크고, 높고, 강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이다. 격 차와 차별이 자신의 존엄함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하 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러한 세상 안에서 작고, 낮고, 약한 것들은 무시당하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 고 보면 지금 이 세상이야말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 개”(마르 1,4)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정녕 모든 사람 을 존엄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가로 막는 모든 것들을 우리 안에서 치움으로써 ‘참사랑이 신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마 르 1,3 참조) 참된 회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대림절, 다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정민신부-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 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 에 길을 곧게 내어라.” 오십 년 동 안 바빌론 땅에서 유배살이를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사 야는 이제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해 방의 날을 맞게 될 것이니,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광야에 길을 닦으라고 선포합니다. ''

이사야의 선포는 이중적인 의미 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바빌 론 땅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할 광야를 뜻하지만, 성경에서 광야는 인간 내면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울퉁불퉁하고 거칠 고 험한 길이 이어지는 내면의 광 야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 내 면의 그 광야에 주님을 위한 곧은 길을 닦으라고 이사야는 외치고 있 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선포는 다시 세례자 요 한의 목소리에 담겨 오늘 복음에서 울려 퍼집니다.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입 니다. “회개하라.”는 요한의 설교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 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역할은 뒤에 오실 분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성령 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그리스도께 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서의 첫 대목처럼 바야흐로 “하느 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최상의 준비는 말할 것도 없이 ‘회개’입니 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 은 자신의 회개밖에 없습니다. 삶을 돌이켜 주님을 마중 나갈 때, 주님 은 비로소 그 인생 안에 오십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팬데믹 상황이 길어지면 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모든 이 에게 주님의 다정한 위로를 전하는 이사야의 외침이 울려 퍼지기를 기 도합니다. 제가 있는 본당은 미사 에 오시는 교우님들의 수가 팬데믹 이전의 60% 남짓 회복되었습니다. 다른 본당들도 비슷한 상황일 것입 니다. 자의든 타의든 아직 돌아오 지 못하고 있는 교우님들에게도 주 님의 오심이 기쁜 기다림이 되기 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 음이 다시 시작되는 대림절이기를 기원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칼럼니스트 김경의 책,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에서 소설가 김훈과의 인터뷰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작당해서 자신을 욕할 때, 이렇게 생각했다고 소설가 김훈은 이야기합니다.

“네놈들이 나를 욕한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닐 거다. 그러니까 너희들 마음대로 해 봐라. 너희들에 의해서 훼손되거나 거룩해지는 일 없이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

강력한 메시지가 보였습니다. 다른 이로부터의 삶이 아닌, 나로부터의 삶을 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솔직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때가 많았습니다. 욕을 들으면 기분이 안 좋아지고, 반대로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때 한순간의 기분만 좋거나 안 좋거나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말로는 내 육체의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존감이 상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래서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것을 쫓으려 한다면 자존감이 상하는 순간에서도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창조목적을 떠올리면 어떻겠습니까? 분명히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대림 제2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제대 앞에 켜져 있는 2개의 대림초를 봅니다. 주님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했던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명문가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인이 누리고자 하면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편하고 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구세주의 탄생, 이 구세주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낙타털 옷을 입고 있었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지요.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당시 세상 사람들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비교되었거든요.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당신이 먼저 그분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비교를 막습니다.

그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주님을 충실히 준비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맞이할 겸손을 가지고 있나요?
과거를 자랑하지 마라. 옛날 이야기밖에 가진 것이 없을 때 당신은 처량해진다(세익스피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어느 식당에서 주방, 홀 서빙 등 일을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완벽한 사람은 없는 것일까요? 일을 너무나 잘했지만,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종종 손님과 언쟁이 붙는다는 것이 이 직원의 단점이었습니다. 이 부분이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이런 직원을 어디에서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제까지는 달래가면서 함께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직원과 손님이 크게 다투게 되었습니다. 사장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 직원을 사람들 앞에서 크게 혼냈습니다. 이때부터 직원은 열심히 일하는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고 혼을 낸 사장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손님 음식의 양을 정량보다 훨씬 많이 담기 시작했지요. 더 많이 담아주면 재료비가 늘어나서 식당에 큰 손해가 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효과가 있었을까요?

그 뒤 이 식당은 푸짐한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줄을 서서 식사할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고 합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기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닐까요? 나쁜 마음도 좋은 결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됩니다.

회개했다면: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삼용신부-


지난 주일은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 곧 ‘사랑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과 그의 낙타들에게 물을 마시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맞아들일 줄 알았던 마구간과 같은 사람들 안에서만 태어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랑실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의 세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하시려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나의 뜻은 죽는 나라가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맞아들인다고 하면서 자신을 믿고 자신의 힘을 믿는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위해 파견된 인물이 있었으니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 목적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맞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길쌈을 하거나 경작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의존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옷을 만들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광야는 그저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 죽는 곳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을 믿지 않게 될 때야만 하느님의 힘에 맡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회개의 세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 윤치영 목사가 ‘감옥조차 하나님 나라로’란 제목으로 간증을 한 내용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윤치영 목사는 전도사 때부터 호주에서 사역하였습니다. 특별히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좋아 교회는 나날이 발전해갔습니다. 그런데 고3짜리 여자아이 때문에 교도소에 가게 됩니다. 그 아이는 남자친구와 문란한 생활을 하고 부모에게조차 폭력을 쓰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연락을 받고 윤 전도사는 다른 청년들을 동원해 그 아이를 강제로 교회로 데려옵니다. 하도 떼를 쓰는 바람에 아이의 등을 몇 대 때립니다. 그리고 뉴질랜드로 가려 하는 아이를 말리기 위해 스마트폰과 여권을 빼앗습니다. 부모는 윤 전도사가 한 일에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불만이었고 전도사를 고발합니다. 죄목은 납치, 집단폭행, 강도였습니다. 사실 죄목만 가지고는 수십 년의 형량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치소에서의 생활은 끔찍했습니다. 모든 옷이 다 벗겨지고 마약 등을 몸속에 넣어오지 않았는지 개가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런 수치는 처음이었습니다. 1년 이상의 징역을 살면 호주에서 추방당한다고 합니다. 윤 전도사는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는데 자신을 이런 처지에 몰아넣은 주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니 고통 때문에 주님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재판이 다가옴에 따라 두려움이 급습해와서 머리를 벽에 처박고 싶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벽에 부딪히는 순간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그날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머리에 손을 얹으셨는데 그때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던 두려움의 고통이 싹 사라졌습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내가 가르쳐주고 싶은 게 있다”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자 자신과 함께 있는 수감자들도 신앙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렇게 재판에 나아가게 됩니다. 아이의 부모가 많은 변호를 해주었지만 어쨌건 강제적인 위력이 행사된 것은 사실이기에 실형 1년을 살게 됩니다. 윤 전도사는 또 실망합니다. 그래서 이전처럼 아주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께 삐져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감옥에서 이슬람교도들과 마찰이 있게 됩니다. 교도소 막사는 A에서 E까지 있다고 합니다. 처음 들어오면 A막사에 살고 E막사는 출소 직전에 있는 수감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A막사에 있던 윤 전도사를 어느 날 갑자기 E막사로 옮기라는 명이 떨어집니다. 그런 것은 거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사를 옮기고 나서 이슬람 사람들이 자신을 그다음 날 죽이려는 계획을 다 짜 놓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본 윤 전도사는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쥐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목숨까지도 주님께 맡기기로 합니다.

 

      1년 형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아이에 대한 분노로 공황장애와 공황발작, 폐쇄공포증 등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목사 안수를 몇 시간 남겨놓지 않고 눈물이 터졌습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며 목사 안수를 받는데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분노가 다 사그라지고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임을 알았습니다.

 

      어느 광고에 자주 나오던 문구가 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You can do it!)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 안에 가진 생각입니다. 하지만 회개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더 깊이 공감합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윤 목사는 처음에 자신의 힘으로 한 아이를 회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자유를 빼앗고 위력까지 행사했습니다. 이렇게 무언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셔도 곧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넌 나 없이 아무것도 못 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야 그분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윤 목사의 광야는 감옥이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크건 작건 이런 무너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 힘을 빼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내 힘을 믿는 사람이고 아직 내 힘을 믿으면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적당한 집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은 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는 베들레헴의 큰 여관들이 아니라 광야의 마구간처럼 오직 주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나를 만들어갑시다.


-조재형신부-


미국에서 지내면서 한국과 다른 점을 봅니다그중에 하나가 의료보험입니다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국가의 주도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채택하고 있지만 미국은 민간 의료보험이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한국은 전 국민 의료보험이 제도화 되어 있습니다암과 같이 중증의 질환은 의료보험의 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전 국민이 의료보험의 혜택으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미국은 아주 잘 살거나아주 못 살면 의료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아주 잘 살면 본인의 부담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아주 못 살면 정부의 부담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산층은 부담이 되는 비용을 지출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이 제도화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교구에 속한 사제들도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비용을 부담한다고 들었습니다직장에 다니는 분들은 회사에서 비용을 지불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인의 부담은 1년에 10,000불정도 된다고 합니다자영업을 하는 분들은 1년에 30,000불정도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감당하기 부담스러운 비용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국민들이 엄청난 비용의 의료비를 지출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미국의 역사를 통해서 분석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유럽에서 미국으로 온 이민자들은 두 가지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광활한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물론 그 땅은 미국에서 살았던 원주민의 땅입니다원주민들은 땅을 소유의 개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이주민들은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하였습니다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힘든 노동은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들이 하였습니다광활한 땅에서 노예들의 노동으로 수익을 얻은 이민자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국가가 국민들의 의료비를 지원해주는 전 국민 의료보험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땅이 있었고땅에서 일할 노예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민간의료보험을 선택 할 수 있었고충분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오마바 케어를 비롯해서 국가가 부담하는 의료보험을 제도화하고 있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합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은 아직도 많은 이민자들이 오고 있습니다예전의 이민자들은 땅을 거저 얻을 수 있었고노예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의 이민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거저 얻을 수 있는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노예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흑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피부색으로 인해서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많은 이민자들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불안정한 신분으로 충분한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제조업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미국의 제조업이 더 싼 임금을 찾아 다른 나라로 공장을 옮겼기 때문입니다축복의 땅꿈의 땅인 미국에서의 삶이 긴장과 불안의 삶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총기 소유의 자유는 역사의 유산이지만 그로인한 피해가 심각합니다해마다 총기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미국은 엄청난 자원을 가진 나라입니다막강한 부를 소유한 나라입니다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나라입니다첨단의 과학과 기술을 가진 나라입니다생각을 바꾸면행동을 바꾸면 아름다운 나라젓과 꿀이 흐르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연중 제33주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일로 선포하셨습니다교회는 약한 이가난한 이병든 이외로운 이억울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교황이 되신 후 가장 먼저 찾아 간 곳은 이민자의 섬 람페두사였습니다람페두사 섬은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교황님은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이웃 형제자매들에 대한 책임감을 상실했습니다우리는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언급하신 사제와 레위인의 위선에 빠져버렸습니다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형제를 보면 아마도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가련한 영혼이여!’ 그리곤 그냥 가던 길을 가버리는 겁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이것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두 가지 질문입니다동시에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여기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이 (죽음의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이야기 합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산은 깎아져서 평평하게 되리라.’ 교만과 욕망의 산을 깎아서 겸손과 온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어둠과 절망 그리고 고통과 걱정은 희망과 사랑 그리고 나눔과 봉사로 메워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베드로 사도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랑하는 여러분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세상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실천하고 있습니다이제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바로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외국인 노동자들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희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합니다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보라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고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는 지금, ‘광야’에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음성을 듣습니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홀로 자신을 마주하는 곳이요, 사방이 트여 있어서 어디 하나 숨을 데가 없으니 벌거벗고 자신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마저 침묵하는 무서움이 지배하는 곳이기에, 결국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광야에서 들려올 위로의 음성을 전합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이의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하느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을 알리며,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4)

 

이는 회개하고 가만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회개의 증표를 보여라는 말입니다. 그 증표로 세례를 받으면 용서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결코 요한은 자신이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용서하는 이’가 아니라 용서를 준비할 뿐이며,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하지만 ‘선물로 주어지는 용서’는 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분을 증언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

 

이 증언에는 예수님께 대한 세 가지 내용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첫째 증언은 그분께서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격을 만납니다. 사실, 타인을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이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보다 어리고 후배인데 인정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주는 자격, 곧 그분의 종의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데, 요한은 그런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진정 알았기에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자라야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둘째 증언은 그분께서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지만, 시점으로는 “지금” 입니다. 그래서 “오신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는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지금 오시는 분’에게 집중시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주님 되게 해드리는 일’ 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셋째 증언은 그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과 사명에서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가 용서되고 하느님의 생명을 받는 것, 곧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받은 그 새로운 생명 용서를 선포하고, 행동으로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굽은 데를 곧게 하소서.

낮아지고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가난해지는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위하여 걷고,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송영진신부-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2-4).”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곧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만이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일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만나려면 참되게 회개해야 한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라는 말은,

“회개해서 죄를 용서받으라고 선포했다.” 라는 뜻입니다.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회개했음을 나타내는 세례’일 뿐입니다.

그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참으로 회개하고 나서 세례를 받아야 진짜 ‘회개의 세례’가 됩니다.>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우리는 해마다 대림절을 맞이했고,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들었고, 회개했고, 주님의 길을 마련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무엇이 달라졌는가?

무엇이 좋아졌는가? 무려 이천 년 동안 길을 닦았으면, 이제는 주님의 길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고속도로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인간 세상 전체를

보아도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고,

나 자신의 신앙생활을 보아도, 세례를 받을 때나 지금이나, 작년이나 올해나,

별로 나아진 점이 없고...... 늘 그저 그렇게 살던 대로 살면서,

대림절은 특별하지도 않은 연중행사로 그치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더욱더 거룩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순수함과 거룩함은 잃어가고,

요령과 핑계만 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례자 요한의 첫 선포는 길 없는 곳에 길을 낸 일이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낸 다음에는 꾸준히 그 길을 잘 관리해야 하고,

부족한 부분은 개선해야 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좋은 길로 만들어야 합니다.

만일에 관리를 소홀히 하고, 방치한다면, 잡초가 자라고, 비가 오면 파이거나

무너지는 곳이 생기고, 그러다가 결국 길을 내기 전 상태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아스팔트로 포장한 도로라고 해도 그렇게 됩니다.)

회개는 한 번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죄에서 돌아서는 일만 회개인 것이 아니라,

돌아선 그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도 회개입니다.

만일에 노력하지 않으면 돌아서기 전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회개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떠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의 ‘회개 선포’를 듣고 있습니다.

(요한의 회개 선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인간 세상의 회개가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나 자신의 회개도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습관적으로 회개하고, 형식적으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인 회개와 형식적인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하는 척 흉내를 내는 것뿐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형식적인 회개를 꾸짖는 요한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7-9)”

요한이 한 말을 뜻에 따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주는 세례를 받기만 하면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한 적 없다. 형식적으로 회개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참된 회개를 하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만심을 버려라.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형식적으로 판공성사를 보기만 하면 회개한 것인가?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리고 냉담한 적도 없고,

주일미사 빠진 적도 없고, 판공성사 빠진 적도 없고, 교무금 잘 냈고,

... 기타 등등 ... 다 잘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

‘삶’이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면,

다 잘했다고 생각하는 그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이고,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회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어떤 대재난이 닥치면 “종말인가?” 하면서 두려워하고, 회개를 생각하다가,

그 재난이 지나가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개를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지난 이천 년 동안의 인류의 모습이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어떤 심각한 병에 걸리면 두려워서 회개를 생각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회복되면 금방 회개를 잊어버리고 태평스럽게 지냅니다.

눈앞에 닥친 위험이 아니라면 위험인 줄도 모르고, ‘남의 일’로만 생각하고,

자기에게는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아 있다고 착각하고, 방심하고......

그러다가 병자성사를 받을 때가 되어서야 후회하고, 절망하고......

옆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누군가에게는 올해의 대림절과 성탄절이

‘생의 마지막 대림절과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나는 아니다.” 라고 누가 감히 큰소리칠 수 있습니까?

(지혜로운 신앙인은 오늘이 ‘생의 첫날’인 것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회개하면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이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실제로 온 마음과 온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왜 이렇게 안 되는 것인지......)


-조욱현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사야 예언(40,3-4)이 실현된다는 것과 기쁘면서도 동시에 불안한 기다림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장차 일어날 중대한 ‘어떤 사건’이 있고 오셔야 할 ‘어떤 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을 기다리는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다.

 

제1독서에서는 신비스러운 ‘소리’가 당신 백성을 승리로 다시 이끌기 위해 되돌아오시는 주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라’ 권고한다(이사 40,3-5). 그러면서 슬픔과 비탄에 젖어있는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고 한다.(40,9-11). 주님의 가장 위대한 ‘오심’은 당신 나라에서의 구원사업을 위한 것이다. 그 ‘오심’은 화해와 사랑의 ‘오심’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예루살렘의 재건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분은 어미 양과 새끼 양들을 자상하게 보살피는 목자이다(40,11). 그분 안에서는 권위와 사랑이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복음: 마르 1,1-8: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이 신비스러운 ‘소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며 그 소리는 사막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다. 그의 선포는 아주 짧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온통 ‘더 훌륭한 분’ 즉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과 그 메시아가 베푸실 ‘성령의 세례’에 대한 것이다. “내 뒤에 오신다.”(7절)는 말은 오심의 긴박성을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이며,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를 섬기기조차 부당하다고 한다. “신발 끈을 풀어드린다.”(7절). 이 두 가지는 모두 주인을 위해 길을 내며 앞서가는 종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중요한 그리스도께 대한 중요한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요한 세례자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며, 또 하나는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는 것이다. “더 훌륭한 분”은 ‘더 힘센 분’의 의미로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켜”(1요한 3,8) 사탄을 쳐부수시어 구원업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성령을 베푸실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언을 따라 마지막 날에 성령이 충만히 넘쳐흐를 것을 기대해 왔다(이사 44,3; 에제 36,26 참조).

 

요한은 단순한 ‘소리’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자체로써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고 준비하였다. 그의 생활 자체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웅변적인 설교였기 때문에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5절). 낙타 털옷을 입고 들꿀을 먹으며 광야에 살았다는 것은, 그의 속죄의 정신만이 아니라 고행의 열정, 또는 그분을 찾아 얻기 위한 간절한 기도, 어떠한 상황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근본적 자유에 대한 갈구, 그리고 주님께서 지나가실 ‘광야의 길’을 다른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열망 등을 말해준다.

 

이렇게 요한은 삶과 설교를 통해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4절)의 세례를 선포한다. 즉 메시아의 오심은 마음의 ‘회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 ‘회개’가 없이는 메시아도 오시지 않는다. 만일에 오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들을 단죄하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르코 복음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절) 이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복음 전체의 제목과도 같다. 이제 복음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시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쳐야’하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잘 준비하고 우리가 모두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계속해서 참여하여야만 한다.

 

베드로 사도는 신앙인들에게 ‘주님의 날’을 기다림에 있어서 경박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 즉 신앙인들의 기다림은 무기력하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동적이고 나아가 창조의 힘을 지닌 기다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다림은 ‘은총’이 아니라 단죄를 위한 ‘심판’이 될 것이다.

 

이제 주님의 오심이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짧은 시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질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긴장을 이완시켜서는 안 된다.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까지 우리가 가진 몫을 꾸준히 채워감으로써 완성해야 할 과제를 우리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또한 나 자신과 싸움을 계속해 가면서 이루는 것이다.

 

‘대림시기’는 오랫동안 하느님을 떠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고향, 하느님 나라로 돌아오는 시기’이다. 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이 대림시기는 우리의 일생 전체가 대림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짧게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삶이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될 수 있을 때, 우리는 항상 대림시기와 성탄의 신비를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 성탄을 통하여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진정한 제물로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 7)

-한상우신부-

진정한 울림은
마음을 울리고
공동체를 울린다.

요한 세례자의
정신이 우리를
울린다.

요한
세례자같이
사랑하면
낮아진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이다.

낮아질수록
가까워진다.

겸손은
낮추고
낮아지는
기쁨이다.

더 낮은 곳에
계시는
주님이시다.

인권의 문제는
인간 구원의
절박한 문제이다.

버림받은
이들을 직접
찾아 나서시는
주님이시다.

모순과 부당함
소외와 유린
냉대와 멸시
속에서도

소중한 우리의
인간적인 삶을
되찾아 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들
삶 속으로
깊이 들어셨다.

신앙의 진리는
사회교리처럼
세상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더 큰 가치가 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

좀더 낮은
자리로
내려오는 교회의
모습을 희망한다.

인간 존엄의
울림이
퍼져나가게
하는 것이
사회교리이다.

존중으로
변화된 우리의
삶이 진정한
사회교리의
삶이다.

삶을 나누고
보여주는 것이
빛과 소금이 되는
신앙인의
참된 삶이다.

올바른
삶의 의미와
인생의 참된
가치와 행복을
일깨워주어야 할
우리의 소명이다.

인권과 대림
사회교리와
삶의 현장을
아우르는 근원은
주님이시다.

살아계신
주님처럼
살아있는
우리의 참여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것임을
믿는다.

대림의 여정은
삶의 전체를
일컫는

인간 존중의
참된 여정이기
때문이다.

존중이 없는
실천과 참여는
울림이 없다.

가장 아름다운
실천과 참여는
올바른 존중이기
때문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예수님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시지만, 분명 초점은 그분께 선명히 맞춰져 있습니다.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3-4)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이 오시기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할 "사자"(마르 1,2)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그 사람이지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마르 1,7)

백성들의 관심과 기대가 자신에게 쏠리자 세례자 요한은, 자기는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 1,3)일 뿐이고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존재임을 밝힙니다. 이 군더더기 없는 진실은 그의 담백한 겸손에서 나옵니다. 요한의 존재 목적, 곧 소명은 주님보다 앞서 와서 백성들이 그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지요.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께서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백성을 위로합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이사 40,10)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힘과 권세, 재물과 지식이 소수 계층에 비정상적으로 쏠려 질서와 균형을 무너져 버렸습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헤어나올 수 없는 가난, 빠져나올 수 없는 억압, 벗어버리기 힘든 차별에 다수의 민중이 끝간데를 모른 채 추락하고, 사람다움을 누릴 권리조차 잊은 채 체념과 비관을 강요받으며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는 메시아 시대는 공정하고 정의로우신 평화의 임금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다수가 일부 기득권층의 특권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보통 사람은 물론 작고 약한 이들까지도 사람다움을 회복하고 존중받는 나라지요.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라고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 실존과 동떨어진 저 하늘 끝의 이상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현실입니다. 아버지와 우리가 동시에 바라는 희망이지요.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박해 시대를 살아가는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당시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수난과 죽음의 위험을 곁에 두고 걸으며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리라고 믿으며 견디어 냈지요.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의 정의로 보상을 받는,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세상입니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

사도는 티도 흠도 없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주신 당신이 모상이 충만히 피어나는 상태가 곧 존재적 평화일 겁니다. 죄와 이기심은 이 평화를 훼손하지요.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2베드 3,11)은 우리가 이 기다림의 시간을 잘 견디고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 먹이시고 ... 품에 안으시며 ...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이사야 예언서의 저자는 권능을 떨치며 오시는 주님을 이렇듯 착한 목자의 표상으로 제시합니다. 어쩌면 대림 제 2주일의 모든 독서 내용이 바로 이 말씀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듯 싶습니다.

온 세상 모든 만물이 준비해서 맞이해야 하는 분, 세례자 요한이 자기보다 크시다고 이야기한 분, 그가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할 만큼 높으신 분, 지난한 세월을 참고 기다리며 티나 흠이 없도록 애써가며 준비해 맞이해야 하는 분, 그분이 바로 길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며 찾아 헤메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목자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양들을 바라보는 애틋한 눈길, 일일이 거둬먹이는 자상한 손길, 허약하고 병든 양을 안고 위로하는 따뜻한 품, 각자의 처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조심스런 관계맺음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은 힘과 재물과 권력이 몰아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이가 각자의 하느님 모상성을 활짝 꽃피우며 평화의 상태로 공존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시는 주님은 큰 소리나 강제  없이 양들을 이끄시는 온유하고 양선한 스승이고 길벗이시지요. 그런 분을 우리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지요.

대림 제2주일의 말씀을 통해 보다 선명해진 주님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와 온 세상을 구원해 주실 구세주 예수님은 우리의 착한 마음 안에 들어오시려 채비를 차리고 계신 착한 목자십니다.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로 부드럽고 온기 넘치는 구유를 마음 안에 마련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탄이 어느새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왔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고 하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합니다.

이 말을 풀어서 이해하면 주님의 길을 가로 막는 것은 우리의 죄이고,

주님의 길을 마련한다는 것은 이 죄에서 우리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뒤집어 보면 우리가 하느님께 가지 않는 것도 죄이지만

우리에게 오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길을 내지 않는 것도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종말에는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야겠지만 지금 우리는

주님 성탄을 준비하고 있으니 이 대림절에는 주님께서 거침없이 오시도록

주님의 길을 마련함이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죄이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길을 우리는 왜 내지 않는 것일까요?

 

첫째는 주님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포도밭 주인과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수확철이 되어 소작인들에게 소작을 받아오도록 종을 보내자 종을 죽이고,

아들을 보내자 아들은 상속자라고 하며 아들마저 죽인다는 비유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당시 지도자들이었는데

헤로데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 종교 지도자들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아갈 자로 생각하고 주님을 죽이지요. 

 

이들이 주님을 바로 싫어하는 이들이고, 주님의 오심을 반기지 않는 자들이며,

그러기에 주님의 오실 길도 당연히 마련치 않는 자들이지요.

 

우리는 이들처럼 주님을 싫어하지는 않고,

적어도 주님을 죽일 정도로 주님의 오심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싫어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하거나 사랑하지도 않는,

그러니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무관심한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관심하니 당연히 주님의 오심을 반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한 것이라고 흔히 말하지요.

더 정확히 얘기하면 미움보다 더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니까 미워하다 사랑할 수는 있고 많은 경우 사랑하기에 미워하지만

무관심하다 사랑할 수는 없으며 무관심하면 미움도 사랑도 하지 않지요.

 

다음으로 우리 중에는 이렇게 무관심하지는 않지만

나의 길을 닦느라 주님의 길을 내지 않는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린다는 말이 있는데

자기의 출세길에 온 신경을 쓰는 사람은 주님의 길을 닦을 수 없겠지요.

 

이밖에도 주님께서 혼인잔치에 초대한 사람들이 자기 밭을 보러 가거나

이제 막 산 겨릿소를 부려보러 가거나 장가들러 가느라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도 이와 비숫한 이유로

주님 오심에는 무관심하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길을 내는 것은 나의 길을 닦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고,

My Way/나의 길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회개라는 것을

오늘 주님 말씀에 비추어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르코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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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은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 곧 ‘사랑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과 그의 낙타들에게 물을 마시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맞아들일 줄 알았던 마구간과 같은 사람들 안에서만 태어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랑실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의 세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하시려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나의 뜻은 죽는 나라가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맞아들인다고 하면서 자신을 믿고 자신의 힘을 믿는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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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시기’는 오랫동안 하느님을 떠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고향, 하느님 나라로 돌아오는 시기’이다. 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이 대림시기는 우리의 일생 전체가 대림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짧게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삶이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될 수 있을 때, 우리는 항상 대림시기와 성탄의 신비를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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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길을 가로 막는 것은 우리의 죄이고,

주님의 길을 마련한다는 것은 이 죄에서 우리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내는 것은 나의 길을 닦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고,

My Way/나의 길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회개라는 것을

오늘 주님 말씀에 비추어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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