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5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2020년 12월 5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마태 9: 35―10,1.6-8)
The harvest is abundant but the laborers are few;
so ask the master of the harvest
to send out laborers for his harve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우리에게, 대림 시기 동안 굳건한 믿음과 함께 간직해야 할 덕목의 하나로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 희망은 정거장에서 다음에 올 버스를 막연히 기다리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도록, 그분께서 바라시는 대로 준비하는 적극적인 자세의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당신의 직무를 몸소 보여 주십니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결정적인 동기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가여워 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복음 선포는 물론 병자를 치유하는 권한까지 주시면서 두 가지를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일꾼들을 청하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구절로 예수님의 이 지침을 이해하면 대림 시기를 지내는 적극적인 희망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그렇습니다. 오실 분을 믿고 기다리는 적극적인 희망은 우리도 큰 사랑을 받았음을 깨닫게 하고, 이를 통하여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실천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괜찮아. 이 정도로는 안 아파.”
그 소리의 크기로 볼 때, 안 아플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아빠는 아프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아빠는 아프지 않습니다. 아빠가 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사자인 이 아이는 너무나 아팠을 것입니다.
물론 아이 아빠는 아이의 고통을 잊게끔 하려고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이런 모습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의 아픔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는 남의 아픔만이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픔도 공감할 수 있을 때, ‘나’를 제대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삶은 곧 공감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고 표현합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군중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즉, 그만큼 사랑한다는 표시였습니다. 당신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수확을 아무리 해도 열매의 풍성함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시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수확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수확할 일꾼이 단순히 성직자, 수도자에 해당할까요? 아니면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분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들 역시 수확할 일꾼이지만, 이는 좁은 의미에서 주님의 일꾼입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뜻에 맞춰서 자신의 삶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주님의 일꾼이 됩니다.
일꾼을 보내달라는 주님의 청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능력이 많아 어떤 일이든 잘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무조건 인정을 받을까요? 어떤 경우에도 100%의 인정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 100%의 인정과 지지를 못 받으면 아파하고 힘들어할까요? 더 열심히 노력하지만, 이로 인한 상처만 더 커질 뿐입니다.
어느 신부가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 맡기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믿지를 못합니다. 이 일을 할 사람이 없다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남을 인정하지도 또 지지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자신 역시 다른 사람에게 인정과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또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남을 지지하고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맡기지 못할 뿐입니다.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그 사람을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것입니다.

기쁘지 않게 주는 것 안에 기쁜 소식이 어떻게 섞이겠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시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서 병자도 고쳐주고 더러운 영들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십니다. 복음은 물질적인 축복 안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밥은 안 주고 인간의 도리만 가르친다면 아이들은 집을 뛰쳐나가고 말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있듯, 복음도 물질과 영의 결합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빵 하나 전해주는 것은 복음이 될 수 있지만, 배고픈 이들에게 공부만 시키는 것은 고문에 가깝습니다.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담기듯 우리가 내어주는 것 안에 복음이 담깁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준다고 다 복음(기쁜 소식)이 되지는 않습니다. 내가 내어주는 것이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주는 것이 나의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나의 것을 내어줄 때는 기쁘기보다는 아깝거나 짜증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것을 나의 것에 넣어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어주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고 그 안에 담기는 기쁜 소식도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내어줄 때 항상 자신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거저 받은 것을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전에 ‘선생님이 달라졌어요’란 프로그램에서 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짜증만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을 체벌하고 야단쳤습니다. 그 선생님은 학교에 출근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선생님을 포기할까 생각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고 있다고 착각하면 내가 하는 고생만큼 상대에게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보상이 따르지 않기에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준다고 생각하면 받는 사람도 짜증 나고 주는 사람도 짜증 납니다. 짜증 나는 일을 오래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영성 강의를 들으시는 분이 다시는 그 강의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강의하시는 분이 짜증을 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밤을 새우고 몇 번이고 연습해서 오는데 듣는 사람이 졸고 있으니 짜증을 냈던 것입니다. 그렇게 짜증을 내는 것은 ‘나의 것’, ‘내가 고생해서 얻은 것’을 준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엔 복음이 섞일 수 없습니다. 짜증과 기쁨이 어떻게 섞일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어줄 때는 그래서 나의 것이 아닌 받은 것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깝지 않고 짜증도 나지 않습니다.
어떤 신부님이 계셨는데 그분도 복음을 전하면서 짜증을 많이 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답답해하셨고 집중이 흐트러지는 신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1시간 강의하려면 10시간 준비해야 하는데 듣는 사람들 자세가 안 되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그분은 옷을 벗고 사제직을 포기하셨습니다. 기쁘게 주지 않은 것 안에 기쁜 소식이 섞일 수 없습니다. 기쁘게 주지 않으면 나도 상대도 기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사랑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쁘게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은 역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내가 가진 능력, 수입, 시간 등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입니다. 이런 신앙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그 사람이 내어줄 때는 기쁜 마음으로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복음전파의 효과도 배가됩니다. 기쁘게 주는 것 안에만 기쁜 소식이 섞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온전한 정신으로 실천하면 기쁘게 내어주고 그러면 나도 즐겁고 받는 사람도 즐겁습니다.
십일조를 통해 깊이 묵상해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받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주고 싶은 마음’까지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주고 싶은 마음조차 받은 것이라면 주는 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떼어놓아 홀로 자라게 한 원숭이는 남에게 무언가 줄 줄 모르게 성장합니다. 자기만 압니다. 내어줄 줄 모르니 다른 원숭이 무리에도 섞일 수 없습니다. 억지로 자녀를 탄생하게 만들어도 자녀를 사랑할 줄 모릅니다. 자녀가 무서워서 어미에게 달려들면 어미는 발로 차버립니다.
격리 원숭이와 대비되는 것이 ‘치료자 원숭이’, 혹은 ‘구원자 원숭이’라고 불립니다. 태어난 지 약 4개월 정도 되었고 어미로부터 사랑만 받아서 온 세상이 사랑인 줄 아는 원숭이입니다. 이 원숭이는 격리 원숭이를 쫓아다니며 기쁘게 털을 골라줍니다. 결국, 격리 원숭이도 자꾸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치료자 원숭이의 털을 골라줍니다. 그리고 무리에 적응할 수 있는 원숭이로 바뀝니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면 다 모기나 기생충처럼 남의 생명을 먹어서 자신을 생존시키려는 욕구만을 가집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관계에서 오는 행복의 맛을 알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관계의 기쁨을 알려주시기 위해 내어주고 싶은 마음과 내어주고 싶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내어주는 행복과 그것을 통해 얻는 관계의 행복도 다 거저 받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안다면 내어주면서 짜증 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기쁘게 주는 것 안에만 기쁜 소식이 담긴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기쁘게 주려면 그 주려는 마음까지도 거저 받은 것임을 기억합시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십일조를 생활화합시다. 그러면 나도 기쁘고 받는 사람도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관계가 형성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기쁘게 주는 것 안에서만 기쁜 관계가 형성됩니다.

-조재형신부-
토마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서 패러다임(한 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의 전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프톨레마이어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입니다. 1,400년 동안 천동설은 천문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종교, 문학, 과학, 예술은 천동설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천동설로는 설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새롭게 지동설을 주장하였고,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동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생각은 우리의 인식을 넓혀주었고, 우주의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주에서 아름다운 지구를 볼 수 있게 되었고, 달을 넘어 화성으로 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근대 물리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뉴턴은 3가지의 법칙으로 우주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근대 물리학은 뉴턴의 운동 법칙이라는 뿌리에서 줄기를 뻗었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주의 힘은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300년 동안 우주의 힘은 뉴턴의 법칙으로 설명하게 되었고,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의 질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뉴턴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미시세계에서는 뉴턴의 법칙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새롭게 상대성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변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빛의 속도에서는 시간이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양자역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양자컴퓨터의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과학혁명의 구조와는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는 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상관이 없습니다. 천동설과 지동설도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이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시간과 공간의 ‘틀’까지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의 신비에는 4가지의 힘이 있습니다. 천주존재, 상선벌악, 삼위일체, 강생구속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말씀으로 권한을 주셨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 겸손해지고, 더 친절해지고, 더 신중해지고, 더 자애로워지겠습니다!
-양승국신부-
12월 5일은 돈보스코의 후계자이자 살레시오회 3대 총장인 복자(福者)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1856~1931)의 기념일입니다. 그는 교구 사제로서의 과정을 밟고 있던 중, 돈보스코를 만났고, 그에게 마음이 빼앗겨, 22세에 살레시오회 입회하였습니다.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은 원래 기질적으로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돈보스코의 친절하고 자상한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를 자신의 롤모델이자 이상향으로 삼고, 일거수일투족을 본받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얼마 가지 않아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은 돈보스코를 꼭 빼닮은 제2의 돈보스코, 목소리만 빼고 모든 것이 판박이인 성인(聖人) 사제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런 탈바꿈의 과정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원이나 서품, 피정 등 영적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결심에 또 결심을 계속했습니다.
1889년 필립보 리날디 신부가 스페인 원장으로 발령나자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앞으로 청소년들에게 더 따뜻하게 대하겠습니다. 더 자주 그들과 대화하겠습니다. 가능하면 더 자주 그들 가운데 머물겠습니다.
관구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는 필립보 리날디 신부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앞으로 더 겸손해지고, 더 친절해지고, 더 신중해지고, 더 자애로워지겠습니다. 더 이상 거친 태도를 보이지 않겠습니다. 지치거나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이런 계속된 결심들이 그를 더 따뜻한 사람, 더 성숙한 사람으로 변모시켰습니다. 그는 새파란 수련자들을 만날 때 마다 이렇게 당부헀습니다. “여러분들은 나중에가 아니라 바로 지금부터 따뜻한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은 1883년 사제가 된후 48년간 장상만 했습니다. 이분이 돌아가셨을 때,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증언했습니다.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은 매일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언제나 격려하셨고, 환대하셨으며, 용서와 아량 베푸셨습니다. 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따뜻하고 정겨웠습니다. 끝없는 인내를 보이셨고, 자주 우리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농담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한 고른 관심이 돋보였습니다.”
한번은 같은 공동체 형제과 대판 싸우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젊은 사제가 면담을 하러 방문했습니다.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은 산책을 좀 하자며, 그를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한 시간 동안 같이 걸었습니다.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은 걸으면서 그의 속상한 이야기를 묵묵히 경청했습니다. 그리고 고생이 많다고 위로하고 따뜻하게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했습니다. 신기하게도 한 시간이 지나자 그 젊은 사제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해맑은 얼굴로 자기 공동체로 돌아갔습니다.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을 단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들은 다들 한결같이 그에게서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버지 느낌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했었다고, 휴식과도 같은 순간, 천국 체험의 순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어쩔수 없는 이 사회 현실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찾아오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정말이지 가장 절실한 교육적 노력은 어떤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다양한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물질적 지원도 필요합니다. 좋은 시스템도 필요합니다. 그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교육자의 따뜻한 시선, 측은지심,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없은 마음이 드셨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 전례>는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도 말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지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시 147,3)
<복음>에서는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들을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같이 지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연민 혹은 자비심”,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 보여주듯이,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말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이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오늘도 그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그분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또한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우리는 그분의 이 마음이 ‘이미’ 안에 들어와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당신께서는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소서.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제가 그들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아멘.

복음: 마태 9,35-10,1.6-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그분은 하느님의 복음과 병의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두고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그들에게 가셨으며 아무리 작은 마을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두루 다니셨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도 우리는 선행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욕을 먹고 선행을 그만둔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36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엾이 여기신 것이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데려갈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거두지 않았다. 성령의 선물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보내 주십사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일꾼이 적다는 것은 교사들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바로 일꾼들,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을 파견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네 명은 어부고, 두 명은 세리이며, 한 명은 배반자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자신의 약함과 주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그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열두 번째 사도에게까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가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복음이 우선은 유다인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그다음에 전해지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자 사도들은 다른 민족들을 부르러 돌아섰다. 유대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난 일이 다른 민족들에게 더 큰 은총이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은 모두 거부하였고, 다른 민족들은 모두 돌아왔는가? 아니다. 유대인 중에도 회개한 이가 있었고, 다른 민족도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한다. 자신의 임무를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권능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아담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닮음을 가졌던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과 닮음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중심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의 삶이 되었다. 하늘 중심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능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저’ 사용한다. 우리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 36)
-한상우신부-
사도직의
근원은
가엾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연민에서
실천으로
이어진다.
마음을
나누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연민의 마음이다.
함께 살아가는
나와 너는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서로를 향해 있다.
대림시기는
연민으로
우리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다.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다.
연민이 마음의
길잡이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연민으로
우리를
기다려주신다.
우리에게 주셨던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에게 주실
사랑을 되새기자.
가치있는 삶을
되찾는 것이다.
연민의
마음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다.
얼어붙은
마음을 여는
연민이다.
연민을
덮어버리는
이기심에서
벗어나길
기도드린다.
주님의 뜻은
연민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연민이다.
대림은 연민의
여정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연민이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도달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예수님께서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베푸십니다. 치유가 필요한 이들은 고쳐 주시고, 구마가 필요한 이들에게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시지요. 또 말씀에 목마른 이들에게는 가르침을, 사람 대접이 그리운 이들에게는 벗이 되어 존중과 격려를 보내십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연민의 사랑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활동의 원동력입니다. 이는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이지요. 성부 하느님은 당신의 이 마음을 실현하라고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가 실현되리라는 약속을 전해 줍니다.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
"반드시"라는 말씀 안에는 하느님의 굳은 의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반드시"가 훗날 예수님의 육화로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야말로 우리 부르짖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친히 백성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파견하시어 당신이 하셨듯이 그들을 돌보게 하십니다. 이에 별 재주나 능력이 없던 제자들이 치유와 구마의 권한을 받아 그분의 일을 이어가게 되지요.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이사 30,20)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듯이, 하느님은 당신을 더 이상 감추지 않으십니다. 성자 예수님을 통해 당신을 완전히 드러내셨고, 이제는 예수님에게서 파견된 제자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고 계시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마나 치유의 권한만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까지도 나누어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한 연민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받은 권한과 능력들 뿐만 아니라 양심과 연민을 다해 자기들에게 맡겨 주신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현존과, 제자들의 사도 직무는 하느님께서 긴 침묵을 끝내시고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을 숨기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는"(화답송) 하느님의 손길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지금 여기서도 크고 작은 기적으로 열매를 맺는 중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
누구도 주님께 값을 지불하고 권한이나 능력을 얻지 않았습니다. 별 자격이랄 것이 특출히 없는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이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니 제자들은 받은 것을 무상으로 내놓아야 합니다. 제 것으로 사유화하고 제 한 몸의 안위를 위해 비축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느님에게서 시작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자비와 연민과 은총에 대해 우리도 책임이 없지 않다는 걸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당신처럼 연민하고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라고 우리에게 쏟아주신 마음과 능력과 재물들이 우리 안에서 세상 누군가를 향해 흘러가기를 고대하고 있지요. 그래야 하느님의 사랑이 완수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거저 받은 모든 것 중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주님이시지요. 아무 자격 없는 우리에게 주님은 매일의 말씀으로, 성체로 당신을 거저 내주십니다. 주님께 받은 유형 무형의 모든 자원을 통해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연민으로 연민하며, 주님의 자비로 자비를 베푸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비록 우리의 행위는 미소해도 우리를 통해 전달되는 분은 주님이실 터이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손을 활짝 펼치셔도 좋답니다. 사랑이신 주님의 사랑의 일꾼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그저 받고, 거저 받아라!
-김찬선신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내시며
몇 가지 사명을 주시는데 사명이기에 명령어의 형태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여라.
-병자를 고쳐주고 망자를 일으켜 주어라.
-나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이런 사명은 주님께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당신이
메시아로서 완수하실 사명인데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사명을 주시고 완수케 하심으로써
당신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도래케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 파견의 얘기를 이 대림절에 읽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림절에 하느님 나라 도래를 그저 기다릴 뿐 아니라
도래를 위해 우리도 파견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오늘 저는 마지막 말씀에 좀 더 집중하겠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은 거저 주라는 말씀에 방점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거저 주기 위해서는 거저 받아야 한다는 데
저는 방점을 찍고 오늘 묵상을 했습니다.
우리는 받아야 합니다.
받아야 줄 것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얘기지만 없는데도 주거나 없는 것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가진 것이 있어야 줄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줄 것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 힘으로 버는 것,
애를 써서 얻는 것,
주니 그저 받는 것.
이 세 가지 중 하나인데 우리 신앙인은 받아서 가지게 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애쓰지 않으면 누가 공짜로 주냐?'며
네 힘으로 벌어먹고 스스로 벌지 못하면 빌어먹기라도 하라고 하지만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니 주시는 것을 잘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 인간은 받는 존재인데
주시는 것을 잘 받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해드리고,
우리는 우리답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다 해결하려고 하면
해결할 수 없기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도 문제지만
부모로 하여금 혼자 발버둥치는 자식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문제를 넘어 몹쓸 짓이지요.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시는 걸 기쁨삼으시는 하느님을 주실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몹쓸 짓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고 제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며
우리는 사랑을 받아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햇빛은 그저 받으면 됩니다.
햇빛을 받으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도 그저 받으면 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마태 9: 35―10,1.6-8)
---
기쁘게 주는 것 안에만 기쁜 소식이 담긴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기쁘게 주려면 그 주려는 마음까지도 거저 받은 것임을 기억합시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십일조를 생활화합시다. 그러면 나도 기쁘고 받는 사람도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관계가 형성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기쁘게 주는 것 안에서만 기쁜 관계가 형성됩니다.
-전삼용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