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3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2020년 12월 3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1506년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만난 이냐시오 성인의 영향으로 수도 서원을 하였다. 1537년에 사제가 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예수회 첫 번째 회원으로 자선 사업에 헌신하였다. 그 뒤 그는 인도와 일본에서 열정적인 선교로 많은 이를 교회로 이끌었다. 중국 선교를 위하여 중국으로 향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중국 땅이 바라보이는 상촨섬에서 선종하였다.
1622년에 시성된 그는 흔히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먼 거리를 여행하며 선교에 헌신하였기 때문이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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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마태오7,21,24-27)
Everyone who listens to these words of mine
and acts on them
will be like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rock.
The rain fell, the floods came,
and the winds blew and buffeted the house.
But it did not collap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시석신부-
‘이사야의 묵시록’(24―27장 참조)으로 불리는 오늘 독서의 신탁은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어 황폐하게 하시겠지만, 당신 왕권을 보존하시고 시온산에서 구원을 내리신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하느님의 정의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노래로서, 주님 백성의 앞날을 대비하시는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찾게 될 안녕과 보호를 기념하며, 신실한 예루살렘과 개혁된 유다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예언자는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길이길이 신뢰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살아야 할 삶의 대원칙인 ‘산상 설교’를 마무리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분명한 태도로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신앙인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와 희망의 노래 속에서, 이사야 예언자와 시편 저자가 강조하는 주님께 대한 굳은 신뢰가 오히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래처럼 쉽게 무너질 사람이나 제후들이 아니라 굳건한 반석이신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생각을 다하여 오롯이 신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청소하러 이 병실에 들어가려는데 마침 이 청년의 아버지께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보호자가 없었지만 그래도 청소원은 조용히 병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아버지께서는 왜 아들의 병실을 청소해주지 않냐면서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아까 담배 피우러 나가셨죠? 그때 제가 청소하고 나왔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소원은 자기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아들의 병실을 청소했습니다.
나중에 동료가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누워있는 아들로 인해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셨겠어? 나까지 스트레스를 줘서는 안 되지.”라고 답합니다.
이 청소원은 화가 났을까요? 청년 아버지의 아픔을 이해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청소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생각하면 화낼 일도 줄어들고 기쁨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허구한 날 “주님, 주님!”하고 외쳐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삶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 많은 물질적인 봉헌을 하는 것 역시,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느님께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한 가지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좇아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먼 훗날,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심판받는 것은 우리 사랑의 크기라고 하지요. 얼마나 큰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구원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앞선 이야기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사랑이라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이웃 사랑이라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참으로 큽니다. 요즘은 그 사랑이 더 커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한 둘이지요. 그러다 보니 더 잘해주고 싶고, 자녀들이 잘 크길 소망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부모를 종종 봅니다. 돈과 시간 모두 자녀를 위해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어떨까요? 부모가 힘이 드는 만큼 아이도 힘들 것입니다. 부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돈 벌어오고, 좋은 교육 하고,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다 해주는데 뭐가 불만이야? 너는 공부만 하면 되잖아.’
그런 기대가 아이를 힘들게 한다고 합니다. 부모의 관심이 커질수록 기대가 커지고 그만큼 아이는 힘들어집니다.
주님께 감사함을 갖습니다. 우리에게 실망이 크실 텐데도 꾹 참으며 우리 스스로 할 수 있게끔 하십니다. 이 모습을 기억하며 내 자녀에게 그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의 가치는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이라며 투덜거립니다. 자신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이들은 그리스도께 합당하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한 닢에 대한 비유를 통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되찾은 어린 양과 되찾은 은전 한 닢에 대해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회개한 사람들입니까? 회개했다면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당신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영화 ‘담보’(2020)에서 사채업자 두석은 불법체류자로부터 돈을 받기 위해 그 딸을 담보로 잡습니다. 9살 승이인데 다음 날 돈을 가져다주면 담보를 넘길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승이 엄마는 그날 저녁에 불법체류자로 잡혀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승이는 두석으로부터 탈출하여 엄마를 찾으려 하지만 엄마는 추방당한 상태입니다. 두석은 졸지에 승이의 책임자가 되어버립니다. 엄마는 두석에게 승이의 작은할아버지를 소개해주며 그가 돈을 갚을 테니 승이를 그에게 맡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승이가 좋은 집안에 입양되게 되고 자신이 다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을 때면 승이를 데려가겠다고 합니다.
승이는 그때 엄마를 찾아다니다가 위험한 사람에게 유괴를 당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두석은 간신히 승이를 찾아내 구해줍니다. 그리고 승이 작은할아버지로부터 돈을 받고 승이를 넘깁니다. 승이 작은할아버지는 승이를 술집에 팔아넘깁니다. 술집 주인은 승이 엄마 행세를 하며 학교도 보내지 않고 승이에게 잡일을 시킵니다. 손님이 던지는 것에 얼굴이 상해도 병원에도 데려가지 않습니다.
승이는 울면서 두석에게 전화합니다. 두석은 자신이 담보로 맡았던 것에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승이를 다시 데려옵니다. 승이를 데려오기 위해 유일한 재산인 차를 팝니다. 그리고 승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습니다.
다행히 승이는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갑니다. 엄마도 잠시 한국에 입국하여 승이가 크는 것을 보았지만 두석이 워낙 승이에게 잘해주는 것을 보고 그냥 중국으로 돌아갑니다. 지병이 있어 자신은 오래 못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승이 아버지도 살아 있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잘살고 있습니다. 두석은 어머니도 찾아주고 아버지도 찾아줍니다. 그러나 승이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두석을 결국엔 이렇게 부릅니다.
“아빠!”
승이가 다 컸을 무렵 두석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이 망가집니다. 그렇지만 승이가 성공하여 유명한 통역사가 되고 의사와 결혼할 때 유일한 부모로서 승이를 데리고 입장합니다.
승이는 처음에 돈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을 담보로 챙긴 두석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그를 노리는 나쁜 사람에게 납치를 당합니다. 두석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도 승이를 팔아넘겼고 결국 승이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도 못 가고 술집에서 자라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승이는 이 세상에 자신을 인간답게 여겨준 단 한 사람이 두석이었음을 알고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합니다. 두석은 담보의 뜻이 처음엔 돈을 받기 위해 담보였다가 “담엔 보물이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승이에게 “너의 가치가 얼마냐?”라고 물으면 돈 때문에 팔려 다니는 물건에 불과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석과 함께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귀중한 존재가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두석은 승이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99마리 양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듯이 행동합니다. 자신의 율법을 지키는 행동들이 주님 앞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높여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그리스도가 없다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음을 압니다. 그러니 그들은 회개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깨 위에 얹혀도 꿈틀대지 않습니다. 그분의 어깨에서 내려와 자신 뜻대로 가면 곧 죽음 목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약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잃어버린 은전 한 닢처럼 주인의 손에 있지 않으면 장롱 바닥에 떨어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한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쥐어지고 예수님의 어깨에 매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 기도입니다. 저도 주님께 감사하여 “주님, 제가 어떻게 당신의 은혜에 보답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이냐? 넌 그냥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가치는 나뭇가지에 불과합니다. 내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버지!”라고 불러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에게 떨어져 나가면 버려진 가지처럼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당신의 가치는 얼마입니까?”라고 물을 때, 회개한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저 스스로는 정말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아버지로 믿고 따르면 무한한 가치를 지닙니다.”

-조재형신부-
색이 있어서 색을 보는 것 같지만 색을 보는 눈이 있어야 색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적색, 녹색, 청색 등의 3가지 광수용체만 있어서 가시광선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우는 16개의 광수용체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 보지 못하는 자외선과 편광까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본다는 측면에서 사람은 새우보다 보는 능력은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지식은 은하계를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은 우주의 시작과 끝도 볼 수 있습니다. 우주의 시작과 끝이신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색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교회의 전례는 제의 색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백색 제의는 순결과 영광을 의미합니다. 홍색 제의는 피와 열정을 의미합니다. 자색 제의는 참회를 의미합니다. 녹색 제의는 성령과 희망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색을 보는 것은 새우보다 못하지만 색을 통해서 구원의 의미를 찾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소리가 있어서 듣는 것 같지만 귀가 있어야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16에서 2만 헤르츠의 소리를 듣지만 개는 65에서 5만 헤르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개는 고막에서 소리를 22배로 증폭시킬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은 개보다 못하지만 소리를 통해서 구원의 의미를 찾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회심하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의 웃음소리는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소리는 언어가 되었고,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되었으며, 언어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은 생존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람이 생존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는 하느님과 사람이 맺은 표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었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가 되었습니다. 역사와 신화는 문명과 문화가 되었고, 과학과 기술이 되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은 사람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터넷과 양자컴퓨터의 만남은 인류가 풀지 못한 숙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견고한 성을 만들 것 같습니다.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문명과 문화를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만을 위한 성과 문명은 무너지고 말았던 바벨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만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집’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집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제후들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그렇습니다. 문화와 문명 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집이 아닙니다. 더불어 사는 모든 이웃과 연대하는 삶입니다. 환경을 보존하고 보호하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이 결코 무너지지 않는 집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누추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지만 구유는 2000년이 넘는 지금도 무너지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련의 바람, 고통의 바람, 근심의 바람이 불면 곧 무너지고 마는 집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집은 시련의 바람이 불어도, 고통의 바람이 불어도, 근심의 바람이 불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사람, 평생에 걸쳐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 주님 손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
-양승국신부-
대림 시기 접어들면서 첫번째 독서로 이사야서가 계속 봉독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구약 시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 예언자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기원전 740년경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701년경까지 남 유다에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아버지는 아모츠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여예언자였으며,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그는 왕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진솔한 조언을 건네는 것을 봐서 상류층 출신으로 여겨집니다.
이사야서를 읽어보신 분 잘 아시겠지만, 이사야서는 꽤나 깁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총 66장이나 되는 방대한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 향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 북 이스라엘은 거의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남 유다도 당시 강대국인 앗시리아 제국과 그에 맞서 싸운 이집트, 시리아, 그리고 떠오르는 신흥 강호 바빌론 사이에서, 약소국가로서의 서러움을 톡톡히 맛보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힘겨운 시기 이사야 예언자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강대국을 통한 현세에 내릴 하느님의 심판이 유다 백성 위에 곧 닥칠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하느님께 불충실한 유다, 사악하며 부도덕하며, 그릇된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유다는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사야 예언자는 강력한 질책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서 따뜻한 격려와 위로와 사랑과 희망이 가득 담긴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을 권고합니다. 진실성이라고는 1도 없는 겉치레뿐인 예배를 당장 집어치우라고 조언합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정의를 세우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사야 예언자는 진실로 뉘우치는 사람,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리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백성을 유배와 파멸로부터 구해 주실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약탈의 위협 앞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한결같이 당신 백성에게 충실하신 하느님’ ‘한결같이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선포합니다.
한결같다는 것! 충실하다는 것, 불변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지니신 여러 속성 가운데 가장 우세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결같다는 것! 충실하다는 것! 변함없다는 것! 얼마나 마음 든든한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결같은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한결같은 모습을 지니는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변함없는 충실성!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한결같은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해 천년이 가도 만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읍을 만드시겠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이사야서 26장 1절)
이어서 그 성읍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당신 백성을 초대하시는데, 자격 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사람, 평생에 걸쳐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 주님 손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야서 26장 4절)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집을 보금자리로 하여 살아갑니다. 곧 집을 자신이 머무는 거처로 삼아 살아갑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거처하고 있는 마음의 집도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가정 혹은 수도원을 육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이고, <복음>은 “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과 집이 세워진 기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반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1-4)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고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1)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영원한 반석”이라 하고, <복음>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하십니다. ‘하느님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란 영원한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그분으로부터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구이겠는가?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그 실행방법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온몸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자신을 내어놓는 쪽, 곧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곧 “십자가”가 있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곧 예수님께 의탁하여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택하는 일입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오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는 쪽을 택하는 일이요, 부당함을 당하고도 그를 감싸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제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말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해되지 않아도 인정하고,
어긋나도 침묵으로 감싸고, 먼저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알면서도 손해 볼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오해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아버지의 뜻
-반영억신부-
작심삼일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돌아보면 결심과 행동은 언제나 다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 하는데 세월이 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틀에 박힌 법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님의 계명을 합리화시키는 데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함이 없건만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물러지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로마2,13).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리고 그 실천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신앙고백이나 찬미의 말도 그 진실성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한편 실행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내 뜻을 이루려고 애달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원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닐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지순례나 기도회, 피정을 다녀와서는 너무 좋았다고 떠벌립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좋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새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좋았다는 것은, 변화된 삶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실천의 어려움을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고 적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반을 잘 다지고 그 위에 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큰바람과 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비바람을 걱정할 틈도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 오면 곧 흔들려 방황하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26). 성 마더 데레사는 말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요”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십시오”(알베리오네신부). 우리 모두가 실천하면 할수록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으니 실천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차지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날이 되기를 소망하되 한 번에 많은 것을 행하려고 욕심부리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하늘을 그리워하면서도 내 뜻을 관철하려 한다면 정도를 벗어났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
-송영진신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4-27).”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즉 생각으로만 믿고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과 같은 사람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어서 비바람에 그 집이 무너지는 것과
환난과 박해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사실상 같은 상황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뿌리 없는 믿음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곧 ‘말씀의 뿌리를 잘 내리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신앙은 곧 생활이 되어야 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라면, 즉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냉담 상태’ 라고 부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상태가 신앙생활을 잠시 쉬는 것일 뿐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신앙이 아주 죽어버린, 또는 신앙을 아주 잃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죽거나 잃은 것은 없는 것이니,
그것은 안 믿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인데,
믿을 기회가 없어서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더 나쁜 상태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총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집’은 ‘인생’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안전한 인생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즉 ‘집인 것처럼 흉내만 낸 집’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앙생활을 흉내만 내는
사이비 신앙인의 인생이고,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아예 거부한 사람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집 없이 노숙하면서
거센 비바람을 그대로 맨몸으로 맞는 사람”입니다.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자기가 집을 안 지어서
집 없이 사는 사람은 ‘어리석기도 하고 가엾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석 위에 지은 집에서 사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지은 집에서 사는 사람과 집 없이 사는 사람의 차이가
거센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만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환난도 박해도 없을 때에는, 또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기 전까지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거센 비바람을 환난과 박해로 생각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심판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집을 제대로 잘 지었는지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 비로소 드러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환난과 박해 때에 드러납니다.
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잘 살았는지는 심판 때에 드러납니다.
지금 아무 일도 없다고 해서 태평하게 살면서
나중에 생길 일에 아무 대비도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지금은 아무 일도 없지만 나중에 생길 일에 미리 잘 대비하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심판을 생각하면서 지금 충실하게 준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고 있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과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말씀하신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마태 23,3)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두 경우는 사실상 차이가 없습니다.
사도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33-35).”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고(마태 26,56), 나중에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마태 26,69-74).
그들의 생각(마음)과 실제 행동이 달랐던 것은, 즉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은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긴 일이 그때까지는 머리로만(생각으로만)
믿고 섬긴 것이었고, 아직은 그게 ‘삶’으로는 이어지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박해 때문에 겁에 질리자 그들의 신앙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때 사도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가 비바람에 무너지는 위기를
아주 ‘혹독하게’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나중에 완전히 변화되어서
믿음과 삶이(신앙과 생활이) 하나로 일치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모래 위에 지었던 집을 스스로 허물고
견고한 반석 위에 다시 튼튼하게 새로 지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든지 사도들이 겪었던 그런 위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이란 끊임없이 그런 위기가 다가오는 생활입니다.)
지금은 진심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어떤 환난과
박해를 만났을 때 자기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평소에 믿음과 삶이(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또 자신의 의지력에 대해서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과 성실한 기도생활은 ‘반석’입니다.
자만심과 위선은 ‘모래’입니다.

복음: 마태 7,21. 24-27 :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좋은 나무’는 성령을 나타낸다. ‘나쁜 나무’는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이와 반대는 가시나무와 엉겅퀴, 즉 불명예스러운 욕정들이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44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나 포도 같은 달콤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선자나 저속한 자들에게서 고상함을 기대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45절) 이와 반대되는 자는 자기 속에 깊이 감추어졌던 것을 내놓는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을 가졌다 해도 지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함을 말씀하고 계시다. 주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의 삶 속에 신앙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하신다. 덕이 있는 자는 그 품위에 맞는 말을 하고 사악한 사람은 은밀한 곳에 숨겨 둔 더러운 것들을 게워내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그 행위를 보면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닌지, 그 자세가 어떤지 예를 들어주신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43-44절). 하느님 앞에서는 마음자세에 따라 그 신앙생활도 진실한지 아닌지, 하느님을 향한, 하느님을 선택하는 삶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삶이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입으로만 헛되이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47~48절)라고 하셨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바로 이웃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사랑이 드러나고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그 앎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즉 우리의 체험을 통하여 아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더 큰 체험을 원하게 되고 그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삶으로 하느님을 이 세상에 더욱 깊이 확산시킬 수 있도록 하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한상우신부-
마음을
돌보는 것에서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된다.
실행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닌
무엇을
받아들일까의
문제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큰 실행이다.
하느님의 뜻은
무너짐과
세워짐을
반복하며
우리를
성장시킨다.
하느님의
뜻이
되기 위해선
깊어지는
기본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기본은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 간절히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 가고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향하는
올바른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 없이
뜻은
실행으로
옮겨질 수 없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 마음을
변화시킨다.
무너짐에서
세워짐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바꾸어 놓는다.
마음을
살아나게
하시는
아버지의
실행이다.
뜻과 마음
성장과 변화
실행과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삶은
시련속에서도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의 실행으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것이다.
뜻은 실행을
깨우고 실행은
삶의 중심을
잡아준다.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이 우리의 든든한 반석이심을 떠올려 주십니다.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4)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반석이라 부릅니다. 주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자애, 보호와 돌봄을 표현하기 위해서지요. 반석의 견고함과 단단함, 흔들리지 않음, 항구함은 주님이 당신 백성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이사 26,3)
그렇다면 누가 그 반석 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요? 어떤 이가 반석이신 주님께 머무를 수 있을까요? 그 조건으로 예언자는 "한결같은 심성"과 "신뢰"를 제시합니다. 주님의 백성은 한결같은 신의와 사랑을 지닌, 굳은 믿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백성은 마치 반석이신 주님을 투영하는 거울처럼, 자신의 주님을 꼭 빼닮았네요.
복음에서 예수님도 반석을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이 문제는 집을 지을 때 반석과 모래 중 어느 것을 지반으로 선택하느냐의 문제보다 훨씬 심오합니다. 아무리 반석이 모래보다 견고하다는 상식을 알고 있어도, 자신에게 다가오신 말씀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영락없이 모래 위에 집 짓고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지요. 이사야서에서 주님이 낮추시고 헐어 버리고 먼지 위에 내던지신 "높은 곳의 주민, 높은 도시"(이사 26,5)처럼 사상누각을 짓느라 헛수고만 한 셈이지요.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25)
들은 말씀을 망각과 외면의 허공으로 흩어버리지 않고 손과 발과 마음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은, 단단한 반석에 구멍을 내어 기둥을 심는 기초 작업처럼 주님과 우리 자신을 견고히 결속하는 거룩한 여정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단단히 묶인 이들, 이미 주님과 한몸인 이들은 삶에서 들이치는 비바람과 홍수에도 끄떡하지 않을 겁니다. 주님이 떠내려가시지 않는 한 우리도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요.
집을 지을 때 반석과 모래의 쓰임새를 분별할 줄 아는 이라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저자는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 1,22)라고 권고합니다.
이는 결코 손해볼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큰 영광이 되지요. 말씀을 실행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행위를 통해 육화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서 육화하신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니 실행하는 이는 이미 주님과 하나입니다.
창조 때부터 우리를 위해 준비된 그 말씀이 우리 각자의 실존과 언어로 지금 여기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절실하고 또 열렬한 덕분이지요. 그처럼 귀하디 귀한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유산되거니 사장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꼭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작고 소박하고 나지막한 사랑의 실행이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더 단단하게 하고, 세상을 더 선하고 진실되고 아름답게 만들리라 믿습니다. 이미 사랑의 실천으로 반석이신 주님 위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든든하신 주님 보호 안에 평화로이 거하시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하느님과 주 하느님
-김찬선신부-
지난달 저는 사제들 피정 지도를 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사제들 피정이 피정 중 제일 지도하기 힘듭니다.
신학이나 영성이나 신앙생활을 저보다 전반적으로 더 많이 알고,
더 훌륭한 분들이기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신학이나 영성 강의가 아니라 같은 사제로서
사는 얘기를 많이 하게 되고 그것도 실패한 얘기나 잘못한 얘기를 하며
신부님들은 저처럼 그러지 마시라는 식으로 강의가 아닌 나눔을 하지요.
그 나눔 중에서 제가 주님을 부르는 것에 대한 얘기도 나눴는데
저의 얘기를 하니 신부님들께서 많이 놀라시는 거였습니다.
제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지요.
저는 '주님'이라는 소리가 30대 중반까지도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수도원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신부가 되고도
주님 소리가 잘 나오지 않고 그래서 신학을 얘기할 때는
'신'이라는 매우 객관적인 호칭을 썼고 기도할 때는
'하느님'이라는 역시 객관적인 호칭을 쓰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주 하느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하느님으로만,
'주님, 저의 기도를' 대신 '하느님, 저의 기도를'로. 기도하곤 했지요.
그것은 하느님을 하느님이라는 면에서는 인정하지만
나의 주인님이라는 면에서는 마음에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끔 개신교 방송에서 목사님들이 통성 기도 중에 '주님, 주님' 하는
것을 보면 '주님'이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식적이라거나 낯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어서 역겨울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또한 내가 나의 주인이고 싶었고,
실제로 나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나는 그분의 종이 되고,
내 뜻대로 하고 싶은데 이제 내 뜻대로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러던 제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느님이 저의 주인이심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지요.
갈릴래아 호수의 최고의 어부였건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시몬이
예수님의 명으로 그물을 치자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자기는 죄인이라고 했던,
바로 그 변화가 제게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그 죄를 인정케 되었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케 된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고 싶지만 내 생명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잖아요?
내 마음대로 자살할 수 있다고요?
그러면 내 생명을 내 마음대로 연장할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은총과 사랑을 거부할 수 있는 것,
죄를 짓는 것뿐이고 그래서 죽는 것뿐입니다.
은총을 입는 것과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를 때뿐,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나의 주인이고 생명의 주인이심을 인정할 때뿐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명령 대로 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은 하느님 뜻/명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백성이 아니고,
아무리 주님을 불러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한 제가 요즘 어떤 때 건성으로 부릅니다.
입으로는 천연덕스럽게 '주님, 주님'하지만 하느님 뜻을 실천치 않습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부르지 않을 수 없어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제 뜻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인데 그래도 차츰
나아지는 것을 위안삼는 요즈음 저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