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2020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 15,29-37)
Great crowds came to him,
having with them the lame, the blind,
the deformed, the mute,
and many others.
They placed them at his feet,
and he cured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법을 알려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기도를 바칠 때 먼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청합니다(루카 11장 참조).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하며 동시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우선 이사야 예언자는 산 위에 마련된 기름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베푸시는 성대한 잔치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준비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그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성대한 잔치가 열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이 비범한 잔치를 베푸시는 분께서는 ‘만물의 주님’이시며 잔치는 ‘모든 민족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 잔치에서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고 당신 백성의 눈물을 닦아 내시어 구원을 이루실 분으로 제시되십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하느님 나라에는 은총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 성대한 잔치에 앉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대한 잔치에 초대받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에 합당한 우리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설명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으십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약간의 물고기로 굶주린 백성을 모두 배불리 먹이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하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은, 주님과 함께 치유하고 용서하며 섬기는 일에 동참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을 주님 앞에 데려오고 가진 것이 부족하더라도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해야 할 일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렇게 항의나 부정적인 말을 듣게 되면 제 안에서 교만이 움터 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을 때 겸손한 사제가 되게 해달라고 주님께 그렇게 기도했으면서도 말입니다.
사실 이런 제가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바리사이들은 자신을 선택받은 사람으로 간주해서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 겸손한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교만의 시작은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다르다는 생각에 교만이 나오고, 이 교만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게 만들지요. 그런데 성경을 잘 보면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나 자신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군중이 갖가지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옵니다. 군중이 주님께 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의사도 이 병자를 고칠 수 없지만, 예수님만큼은 다른 의사와 달리 병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병자들의 믿음보다도 군중의 믿음으로 병자들의 병이 낫습니다. 심지어 별 뜻 없이 주님의 발치에 온 사람들도 병이 낫게 됩니다. 아픈 당사자가 아닌, 믿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아픈 당사자가 큰 혜택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흘 동안 굶주리고 있는 군중을 가엾이 여기셔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시지요. 그들은 빵 일곱 개와 조금의 물고기를 내어놓았습니다. 그 결과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습니다.
병자들의 믿음보다 군중의 믿음으로 병자들이 나을 수 있었고, 군중이 가져온 양식보다 제자들의 가지고 있었던 모든 양식(비록 그 양은 빵 일곱 개와 약간의 물고기로 아주 적었지만)을 통해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구 때문에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만의 자신을 만들어야 할까요? 그들이 나의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말입니다.


예전에 어떤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를 신부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이 거리를 둘 것 같아서, 신부 복장이 아닌 일반 평상복을 입고 참석했습니다. 처음 서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에 그룹원 중 한 명이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습니다.
나중에 사실을 말하더라도 지금은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글 쓰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일 묵상 글을 쓰고 있고, 책도 출판했으니 글 쓰는 사람이라고 하면 거짓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의 답에 사람들은 “그럼 작가예요?”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에 “글쎄요.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오래 글을 썼어도 작가라고 내세울 정도의 글솜씨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20년 넘게 글을 써 왔어도 이 정도인 것을 보면 재능 자체가 제게는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재능은 없지만 그래도 20년 넘게 글을 써서 이 정도가 되었다고….
재능을 뛰어넘는 노력이 더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왜 재능만 찾을까요? 재능보다 더 집중해야 할 것은 노력입니다.

기적의 시작: 한 번에 안 되면 하나씩이라도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였는데도 남은 빵이 7 바구니에 가득 찼다는 내용입니다. 나누면 부족해져야 당연하지만 나누고 났더니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아진 상황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풍족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만약 오늘 복음 말씀이 맞는다면 더 많은 이들을 먹이려는 마음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이 남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누면 가난해진다는 믿음이 강해서 좀처럼 가진 모든 것을 나눌 줄은 모릅니다.
그러면 이 기적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자들처럼 우리는 그런 기적을 할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지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우리도 그러한 기적을 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수많은 군중이 모여있는데 그 적은 양의 음식을 들고 어떻게 감사를 드리실 수 있으셨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이러한 마음을 깨닫는 것이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인천 ‘민들레국수집’의 서영남 베드로 대표는 코로나로 무료급식소가 문을 닫는 지금은 250인분의 도시락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운영은 자발적인 기부로 이루어집니다. 서영남 베드로 대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벌려놓기만 했지 정작 예산이라든가 인력이라든가 신경을 하나도 안 썼거든요. 왜냐하면,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거니 했는데, 하느님이 걱정하시기 전에 주변에 착한 분들이 먼저 더 걱정해주시고 십시일반 도와주시고 하니까 넘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 않게 우리 손님들에게 나눠드릴 수 있고 그렇습니다.”
서영남 대표는 수도회에 들어갔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다시 사회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수중에 가진 돈은 300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2003년 국숫집을 만들어 식탁 하나에 간이 의자 6개를 놓고 나눔을 시작했습니다.
17년이 지난 지금은 하루에 4~500명의 노숙자, 도시 빈민들에게 무료 음식을 제공합니다. 현재 ‘민들레국수집’, ‘민들레 꿈 공부방’,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 ‘민들레희망지원센터’, ‘노인분들을 위한 무료 국수집’ 등의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옷가지들도 나누어주고 매 월요일엔 모든 노숙인에게 식사와 함께 적게나마 용돈도 줍니다. 더 나아가 민들레국수집의 나눔은 현재 필리핀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영남 대표는 쉬는 날이면 교도소를 찾아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영치금도 넣어주는 선행을 베풉니다.
그는 말합니다.
“벌써 17년이 흘렀는데 매일매일 고마운 사람을 만나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의 기적은 300만 원에 실망하지 않고 적게나마 가난한 사람과 식탁 하나 놓고 국수 한 그릇 나누고 싶은 작은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함께 나눌 소수의 몇 명을 보았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 적은 돈에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고픈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그들에게 음식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예수님의 말에 제자들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이들은 수많은 군중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사람만이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보다는 ‘수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먹일까?’만 고민하였습니다. 그렇게는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 능력으로 감사하며 나눌 수 있는 사람만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빵 7개를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안나의 집’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김하종 신부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매일 체험한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5천 명을 먹이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저희가 하루 7백여 명씩 일주일 음식을 나누면 5천 명이 됩니다.”
김하종 신부는 이렇게 가면 하루에도 5천 명도 먹일 날이 올 것입니다. 처음엔 5명이라도 먹이려는 마음으로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큰 기적을 할 용기가 없으면 5천분의 1이라도 하려고 노력해봅시다. 그렇게 5천일이 지나면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한 명에 대한 사랑이 기적임을 인정할 때 5천 명에 대한 사랑의 기적도 가능해집니다. 1명을 먹이는 기적을 할 수 있다면 5천 명을 먹이는 기적도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한 명과 감사히 나눌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사랑에는 가치를 부여하는 아가페(십자가)적 사랑이 있고, 가치를 추구하는 에로스(선악과)적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와 지성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과 같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얻기 위한 사랑, 채우기 위한 사랑은 더 큰 갈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게 되고,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옷을 입었지만 벌거벗은 양심 때문에 부끄러워집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 때문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는데 부끄럽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데 원망과 분노가 생긴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이 신앙으로 드러나면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가진 것을 모두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함께 지냈습니다. 영성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감옥에 갇혔고, 바오로 사도는 매를 맞고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박해를 피해서 이방인에게로 갔고, 이방인들에게 신앙을 전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신자들의 삶을 보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는 이것은 선교영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이방인들 사이에 교회가 커지면서 시기와 박해가 생겼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박해가 커질수록 신앙을 지키려는 열정도 커졌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순교영성이라고 합니다.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기도 했고, 순교자들의 무덤을 찾아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이 성지가 되었습니다.
박해가 끝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독신으로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전례를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영성은 교회가 세상에 영합할 때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중심을 잡아 주었습니다. 수도원의 영성은 교회가 세상을 부정할 때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었습니다. 영지주의가 세상에 영합하는 영성이라면, 거짓 종말론과 극단적인 금욕을 강조하는 몬타누스와 마르치온 사상은 세상을 부정하는 영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의 영성은 악습을 끊어버리고, 향주삼덕과 복음삼덕을 추구하는 영성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면 영성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례와 성사에 충실하다면 영성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면 영성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을 식별할 수 있다면 영성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예수님께서도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우리가 영성생활을 충실하게 한다면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에게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는 잠깐 동안이었지만 장엄한 하느님 나라가 펼쳐졌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두개의 독서, 이사야서와 마태오 복음서의 분위기는 기쁨으로 충만한 축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 나즈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큰 무리의 군중이 예수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군중 가운데는 수많은 환자들도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예수님 발치 앞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강도 높은 복음선포 여정으로 인해 무척이나 피곤하셨음에도, 예수님께서는 한명 한명 일대 일로 환자들과 접촉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즉시, 그들 평생의 소원이었던 치유를 선물로 건네셨습니다.
오랜 불치병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간병하느라 고생했던 환자의 가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두가 행복해하고 황홀해했습니다. 모두가 경탄해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여기 저기 찬미와 감사의 찬가도 울려 퍼졌습니다. 이렇게 그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는 잠깐 동안이었지만 장엄한 하느님 나라가 펼쳐졌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둘도 없는 행운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지상생활 여정을 통해, 잠깐 동안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상 천국’을 맛보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잠깐 동안의 천국은 2퍼센트 부족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우리나라의 속담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도 듣고, 치유의 선물도 받고 뛸듯이 기뻐했지만, 뭔가 살짝 부족했습니다. 예수님께 매료된 군중은 죽기살기로 예수님 뒤를 따라다니느라 사흘간이나 굶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 지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오 복음 15장 32절)
백성을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치유 뿐만 아니라 먹을 양식까지 챙겨주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요?
예수님께서는 좋은 말씀과 삶의 모범 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육체적인 질병을 실제로 고쳐주셨습니다. 육체적인 굶주림도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사화를 영적으로, 상징으로만 해석해서는 절대 안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인 필요성을 눈여겨 보십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당신도 느끼고 계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바 한 가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건강을 잘 유지하고, 굶주리지 않고, 고통받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인간들의 추위와 굶주림, 결핍과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는 물론 육적으로, 결국 전인적(全人的)으로 구원되도록 돕고, 그를 통해 천상 잔치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동반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이영근신부-
“대림시기”는 자신의 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갈망으로 목마른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 산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 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마태 15,30)
갈망을 품고, 타인들의 손에 이끌려 산 위에 올라와 있는 이들입니다. 스스로 올라오지도 못해 이끌려와 예수님의 발치에 놓여 있지만,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슴 속에 당신의 음성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또 다가와 면전에 나와 있지만,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단지 고쳐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못 다한 말도 다 들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군중이 치유는 받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함을 보셨습니다. 마치, 당신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강도 맞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만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루카 10,35)라고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깊고 깊은 사랑의 신비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먹이시고, 미처 바라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용서하시고, 뒷날까지도 가엷게 여기시는 그 저린 마음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을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태 15,34-3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단지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러니 그것을 우리는 우리에게서 “찾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더하여 물고기도 조금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것들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광야를 순례하면서, 자꾸만 스스로를 ‘아는 사람’인 양 여깁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찾는 사람’이 순례자입니다. “참된 빵”인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 그가 진정한 순례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방황하는 이가 아니라 빛을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베네딕도의 수도규칙 58,7)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 군중이 가엽구나.”(마태 15,32)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제 안에 가엾이 보는 마음을 주소서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이 되게 하소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의 마음으로
-반영억신부-
아침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어 ‘코로나19’의 종식을 이루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베풀어 주셔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으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열매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합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시며 지니셨던 마음은 측은지심, ‘가엾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애간장이 녹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공명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질 때 예수님의 기적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모아 사랑합니다.

송영진신부-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15,30-31).”
예수님은 ‘아픈 양들’을 고쳐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는 목자이신 분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병자 치유 이야기들’은 예수님께서 목자로서,
또 치유자로서 오셨음을 나타내는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고 군중이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은,
그 기적을 하느님의 기적으로 인정하고 믿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한처음의 상태’를 보았고, 그래서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픈 양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인류 전체가 병든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의 병만 병인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병도 병입니다.
(사실은 영혼의 병이 더 심각한 병입니다.
그 병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직접 가로막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영육의 건강’을 주시는데,
자기는 건강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은총을 안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자기 병을 인정하지 않고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치료하지 못합니다.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니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들이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몸의 건강만 원하고 영혼의 건강과 구원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열 명의 병자가 예수님께 간청해서 치유의 은총을 얻었는데,
아홉 명은 몸의 병이 치유된 것에만 만족하고서 그냥 가버렸고,
한 명만 되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홉 명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가버렸고,
되돌아온 사람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기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그 한 사람의 경우에, 그가 은총을 받았음에 감사드린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영혼의 건강과 구원을 원해서 되돌아왔다는 점입니다.
(지금 당장 몸이 아프니까
낫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몸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합니다.
만일에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5,35-37ㄱ).”
예수님은 ‘배고픈 양들’을 먹이시고, 양들에게 ‘힘’을 주시는 목자이신 분입니다.
(이 ‘배고픔’은 몸의 배고픔과 영혼의 배고픔을 모두 포함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도 몸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육적 양식과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영적 양식을 모두 포함합니다.)
여기서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라는 말씀은, 군중이 사흘 동안이나 계속 굶은 것이
가엾다는 뜻이 아니라, 먹을 것도 없이 돌아가야 하는 것이 가엾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군중이 함께 지낸 사흘 동안에는 그런대로 먹을 것이 있었을 텐데,
그러다가 사람들을 해산시켜서 돌려보내려고 할 때쯤에는
먹을 것이 모두 떨어지고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무사히 집에 도착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길’을 ‘신앙여정’으로,
‘집’을 ‘아버지 하느님의 집’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예수님의 걱정은,
사람들이 신앙여정 도중에 힘을 잃고
지쳐서 포기하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해석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받아먹은 사람들은 모두
‘육적인 힘’과 ‘영적인 힘’을 새롭게 얻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빵으로도 힘을 주시고, 말씀으로도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2,1-3).”
예수님은 우리에게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걸어가시는 분이고, 우리가 힘들어하면 우리를 부축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지만,
그 힘을 받아서 걸어가는 일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헛일로 만드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분명히 힘을 받았는데도 아무런 힘도 안 받은 사람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마태 15,29-37: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심.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병든 이들을 기다리신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장애인들과 말 못 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다. 그분의 옷자락을 잡는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발치에까지 온다. 그들은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를 저는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애써 올라왔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그분의 발치에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된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외딴곳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에 지칠 줄 몰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나약성과 우리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흘 동안이나 당신 곁에 있었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32절)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33절) 하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그들이 더욱 동정심을 느끼도록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34절) 물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유대인과 다른 민족을 차별하시지 않고 골고루 대하셨다. 이 차별 없고 순수한 사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삶이 우리는 진정 은총의 삶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군중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 사화는 두 가지 형태로 전해졌다.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더 오래된 것으로 마태오는 이 두 가지를 다 전하고 있다. 복음은 이 기적 사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구약에서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는 사화(1열왕 17,8-16)를 알고 있으며,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기적 이야기(2열왕 4,42-44)를 알고 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또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는 사상도 들어있는 것 같다. 그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께서는 외딴곳에서 백성을 먹이신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우리와 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5, 30)
-한상우신부-
가야할 길이
우리에게는
있다.
밀가루가
아프다고
마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
대림의 길은
치유이며
빵이 되는
기쁨의 길이다.
길을 긍정하게
만드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치유를 지향하고
치유는 사랑으로
다시 뜨거워진다.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이고
치유이다.
서로를
보게하는
것이 사랑이고
치유이다.
사랑으로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통해
대림의 여정은
소중한 여정이
된다.
소중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소중한 관계는
건강한 관계이다.
건강한 관계는
소중함의
의미이다.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는 것이
고쳐 주시는
사랑이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바라보고
만나는 시간이
대림의 시간이다.
대림은 소외가
아닌 소중함으로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다.
사랑은
아픈 데를
싸매주고
고쳐 주고
나누는 빵의
삶이다.
빵이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고쳐 주신다.
치유는
빵이 되는
만남임을
믿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니고 계신 연민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람들을 배불리시고 위로하시는 주님의 잔치를 예언합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익은 술로 ...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주님은 우리의 굶주림을 잘 아십니다. 육신의 굶주림뿐만 아니라 영적 굶주림, 심리적 굶주림, 관계적 굶주림까지 인간 실존이 떠안고 살아가는 모든 허기와 결핍을 아시지요. 그분은 마치 어머니처럼 손수 푸짐한 상을 차려 자녀들을 먹이고 싶어하십니다. 무릇 어머니란 제 자식 입에 들어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부른 존재니까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 25,8)
주님은 배만 채워주시는 게 아니라 마음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저마다 겪는 한계로 고통스런 이들에게 더 캐묻지 않으시고 그저 위로하고 격려하며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이사 25,9-10)
우리가 주님에게서 받을 가장 큰 위안은 바로 그분의 현존입니다. 고쳐 주고 먹여 주는 일회성 행위로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하시는 현존입니다. 무언가를 꼭 해주지 않으셔도 그저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자체만으로 우리는 안 먹어도 배부르고 없어도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 오신 것이지요.
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마태 15,29)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변방인 이방인의 고을로 가시어 가난하고 단순한 이들 틈으로 들어가십니다. 이에 사람들이 치유가 필요한 이들을 데리고 몰려 오지요.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다."(복음환호송 참조)는 말씀처럼 놀라운 축복을 맛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마태 15,32)
예수님께서 연민의 사랑으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불쌍한 건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불쌍한 구석이 있게 마련입니다. 상대가 어떤 처지에 있든 그에게서 연민을 느끼는 이는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잘난 자식도 어머니에게는 안쓰럽고 염려되는 것처럼 예수님께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이, 자녀의 배고픔은 어머니에게 형벌 이상의 고통입니다. 자식이 실컷 먹고 배가 불러 흡족해하는 걸 보는 것만큼 어머니에게 흐뭇한 일은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치유도 해 주셨고 말씀도 나눠주셨지만, 거기에 더해서 그들의 텅 빈 속까지 채워주고 싶으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는 그런 예수님의 강한 의지가 뿜어 나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5,37)
제자들이 지닌 적은 빵과 물고기가 예수님의 감사 기도와 나눔으로 사천 명을 훨씬 넘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일곱 바구니나 남게 되지요. 과연 구약에 예언되었듯, 주님께서 '이 산에서 잔치를 베푸시는' 현장입니다.
"배불리 먹었다."
그 흡족함을 관상합니다. 사람들도 만족스러웠지만 누구보다 예수님이 가장 흡족하셨겠지요. 자녀들의 만족스런 표정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예수님도 세상을 다 얻은 듯 충만하셨을 겁니다.
우리는 육신의 배부름을 넘어 영혼의 배부름으로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채워주고 싶어하십니다. 우리 중 누구도, 아무리 부자에, 학자에, 권력가에, 영성가여도 주님께서 채워주고 싶으신 빈 구석이 없는 이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어머니처럼 자애롭고 애틋한 예수님의 연민의 사랑 앞에서 공연히 힘쓰지 말고, 자존심과 교만과 아집을 내려놓읍시다. 그분께서 먹이고 치유하고 살리시도록 우리 자신을 맡겨드립시다. 세상 어머니처럼 우리가 뜨는 밥 한 술이 그분께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행복일 터이니 그분의 연민의 사랑이 원하시는 대로 머무릅시다. 주님께서 퍼부어 주시는 은총을 배불리 받아 먹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다리 저는 이도 함께
-김찬선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얘기가 펼쳐지는 곳,
곧 메시아가 구원을 이루시는 곳은 산 위입니다.
이사야서는 메시아가 산 위에서 이룰 구원 행위를 열거합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수치를 치워 주시리라.
오늘 복음은 이사야서의 이 예언을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루신다는 뜻으로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가 굳이 산으로 올라가 거기에 자리를 잡으시고
이사야서에서 열거한 구원 행위를 모두 펼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호숫가에 갔다가 산으로 오르신 것은 의도적입니다.
불구자인 우리와 같이 산을 오르기 위해 호수에 가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같이 이웃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갑니다.
사실 메시아가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오실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우리를 산 위로 같이 데려가기 위함이고, 우리 스스로
산 위에 오르지 못할 불구자이기에 데려가기 위해 오신 게 아닙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산 위에 자리를 잡으시자 군중이 불구자들과 함께
산으로 오르는 것은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거대한 순례단이 천국을 향해 주님과 함께 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니 이런 순례단에 끼어 천국 순례를 할 수만 있다면
불구자인 것이 부끄러워하고 원통해야 할 일만은 아닙니다.
사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영적 불구자, 곧 천국 길 불구자이겠지요.
그렇다면 영적 불구자, 천국 길 불구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천국 갈 마음이 아예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천국이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이 너무도 좋은데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이고, 있어도 관심이 없다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주님과 같이 가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 천국에 오르려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자기 힘으로 오를 수 있으니 주님이 필요 없다는 교만한 사람이거나
진정한 천국이 아니라 하느님 없는 자기만의 천국을 꿈꾸는 사람일 겁니다.
셋째는 주님과 같이 또는 주님을 따라 가려고는 하지만
자기만 가려는 사람 또는 이웃과 함께 가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웃과 함께 가는 것이 주님과 같이 가는 것이고
이웃과 함께 가야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인데
이웃을 싫어하거나 미워하기에 같이 갈 수 없는 사람,
딱히 싫어하거나 미워하진 않지만 함께 가는 것이 귀찮은 사람,
주님만 자기에게 어울리지 하찮은 사람들은 어울리지 않기에
자기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없이 그리고 이웃과 함께 가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설사 갈 수 있더라도 혼자 먹는 천국만찬이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성대한 잔치이고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혼자 먹으면 맛없고
그렇게 먹는 만찬이 행복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아무튼, 우리의 주님께서는 다리 저는 사람까지 끌고 산 위를 오르시고
그곳에서 장정만도 4천 명, 5천 명도 많다고 생각지 않으시고
모두 배불리 먹이시는 분이십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