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11. 11. 06:08

2020 11 12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가 17,20-25)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cannot be observed,
and no one will announce, 

‘Look, here it is,’ or, ‘There it is.’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among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복음서에서 말하는 가장 큰 주제는 하느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 역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비유는 대부분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보다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둡니다. 사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을 궁금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리사이들은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지 질문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라고 답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어느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양한 비유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빵 속의 누룩처럼,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크게 자라는 작은 겨자씨처럼 쉽게 우리 눈에 띄지 않지만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으로 찾을 수 없습니다. 저기 또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지 묻기보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는 연예인 중에 ‘백종원’ 씨가 있습니다. 그는 요식업 사업가로 출발해서, ‘골목식당’ 등의 방송 프로그램, 그리고 각종 CF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지요. 그가 ‘골목식당’ 100회를 하면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원래부터 착한 놈이 어딨어요? 제가 사실 입도 거칠어요. 그런데 방송하려니 도리가 없어요. 겸손한 척, 착한 척, 순화해야지…. 방송에서 하던 대로 밖에서도 말하니, 처음엔 직원들이 ‘어디 아픈가?’ 했대요. 참 이상한 게, 사람들이 저의 ‘척’을 진심으로 받아주니까, 자꾸 ‘이런 척’, ‘저런 척’ 더 하고 싶어져요. 그렇게 출연료, 광고료 여기저기 기부도 하면서 마음 부자가 되어가요. 저 원래 그런 놈 아닌데, 점점 ‘척’대로 되어가요.”

큰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백종원 씨가 ‘척’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에게 원래 그런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척’ 한다는 것은 나에게 보여 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삶이죠. 이런 삶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에게 이미 있었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있는 모습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척’하는 노력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나에게 있는 본 모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절로 찾아오길, 그냥 세속적으로 이득 되는 것만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미 우리에게 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완성할 수 있을까요? 우선 그 하느님 나라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그날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하겠지요.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자기 안의 사랑을 키워나가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를 찾아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찾을 수 있도록 ‘척’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척, 믿는 척, 희망을 두는 척…. 그 밖의 주님께서 원하는 ‘척’을 하다 보면, 진짜 나의 덕목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 가운데에서 찾게 될 것입니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자각하는 건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내디뎌야 할 중요한 한 걸음이다(사이토 다카시).


무의식중에 하게 되는 차별의 말.

사회복지 쪽의 활동가나 연구자들이 말하는 모욕적인 표현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 이주민을 향한 말로 “한국인 다 되었네요.”라는 표현.

- 장애인을 향해, “희망을 가지세요.”라는 표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자는 이주민이 한국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칭찬이며, 후자는 지금 어려움 속에서 절망하지 말라는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모욕감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인이 다 되었다’는 말은 ‘네가 한국말을 잘하고 한국문화를 잘 알아도 한국인은 아니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한국인이 되고 싶지도 않은데 한국인에 빗댄 것은 그만큼 자기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희망을 가져라’는 말도 모욕이 됩니다. 이는 현재의 삶에 희망이 없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중에 말하고 있는 차별의 말이 정말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조심하고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니까 피조물이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 오느냐?”라는 질문을 합니다.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다윗 시대처럼 외적으로 로마를 몰아낸 강력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시기 위해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내적인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입니다. 동시에 행복의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와는 뱀에게, 아담은 하와에게 지배당했습니다. 자아나 사람에게 지배당하면 하느님께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만이 남습니다. 반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아닌 우리를 사랑하는 하느님에 의해 지배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므로 우리를 사랑할 줄 아는 분에 의해 지배되어야 합니다.

 

      창조자 외에 다른 어떤 피조물도 본성상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찾게 됩니다. 피조물은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먹고 지배해야 합니다. 어떤 피조물도 본성상 누군가를 위해 피를 흘리지 못합니다. 다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삽니다.

      물론 무리생활해야 하는 고등동물일수록 사랑을 조금씩 부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기적 본성에 지배당합니다. 만약 개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일까요? 사랑과 매우 가깝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인간에 의해 사랑받고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본성적으로 알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동물들은 사랑에 대해 조금은 배우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피조물은 다 이기적입니다. 이기적이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조차도 이기적 본성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17장』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

이타심은 배워서 실행하는 것이고, 이기심은 모든 피조물의 본능입니다. 배워서 나오는 행위는 본능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1700년대 후반 영국은 죄수들을 호주로 보내어 신대륙을 개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에서 호주로의 여행은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배의 선장들은 형기를 마치면 자유인이 될 죄수이자 신대륙 개척자들을 최대한 사망사고 없이 호주로 이송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3년간 12.2%의 죄수들이 험한 항해를 견디지 못해 사망하였습니다. 아무리 죄수지만 너무 가혹하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영국은 그래서 새로운 시도들을 해 봅니다. 죄수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신앙심이 깊은 선장을 선발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획기적인 성과를 낸 묘안이 나왔는데, ‘성과보수 원리’를 이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선장에게 출발할 때의 죄수 숫자가 아니라 도착할 때 살아있는 죄수 1인당 호송비를 지급한 것입니다. 결과는 이후 세 척의 배가 422명을 호송했는데 사망자는 단 1명뿐이었습니다. 신앙심으로도 안 되고 도덕적 당위성으로도 안 되던 것이 돈으로 된 것입니다.

 

[참조: 「인간 세계의 불편한 진실, 이기심」, 유튜브 채널 ‘Hunet’]

      인간이 나에게 의리 없게 이기적으로 대한다고 뭐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본성을 갖게 태어났습니다. 다만 그런 본성으로는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기에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지 못합니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본성상 이타적일 수 있는 존재는 피조물일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본성상 타자의 에너지를 빼앗으며 사는 본성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존재할 때부터 내어줄 수 있는 본성을 지닌 분은 사랑의 에너지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자만이 본성상 이타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피를 흘려 아기를 낳을 때 이타적입니다. 어쩌면 가장 창조자를 닮는 시간입니다. 피를 흘려 생명을 낳는 분이 창조자이고, 남의 피를 흘려 자신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삶에서 창조자의 삶으로의 변환을 꾀하는 인간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본성의 변화를 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받아야만 하는 것이 ‘창조자의 피’입니다. 본성은 새로 태어나야만 바뀌는데 우리를 창조자의 본성으로 바꿔줄 수 있는 분의 피는 창조자의 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전쟁 추운 겨울에, 어머니가 자신을 겉옷으로 감싸 자신을 살려준 것에 대해 아이도 성장하여 “엄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하며 겉옷을 벗어 어머니 무덤을 덮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겉옷을 벗을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처럼 사랑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유일한 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시며 동시에 수난의 필요성도 말씀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나를 위한 누군가의 죽음은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은 피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본성을 변화시킵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으면 늑대로,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으로 삽니다. 이 믿음은 그 부모의 피 흘림의 열매입니다. 오직 자신이 하느님과 같은 창조자라 믿어야 누군가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랑의 본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났음을 믿으면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피를 흘려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창조적 본성에 지배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으니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 읽은 동화 중에 나무꾼과 선녀가 있습니다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깊은 산속의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올라간다는 이야기입니다어느 날 나무꾼은 선녀의 옷을 몰래 감추었고선녀는 나무꾼과 살게 됩니다선녀는 하늘의 이야기를 하며하늘을 그리워하였습니다나무꾼은 선녀의 옷을 주었고선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나무꾼이 슬퍼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왔고나무꾼은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선녀와 아이들을 만났습니다이야기에서는 선녀도 내려오고두레박도 내려왔습니다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이야기도 비슷합니다평강공주는 궁궐에서 나와 바보온달을 만났습니다평강공주는 바보온달의 가능성을 보았고바보온달은 평강공주를 믿었습니다바보온달은 온달 장군이 되었고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어쩌면 어릴 때 읽은 동화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으로 왔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고죽어서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갈릴래아의 어부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던 데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비참하게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두려움과 걱정으로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이제 제자들은 사도가 되었고사도들은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수호하였습니다나무꾼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만났습니다바보온달은 궁궐에서 온 평강공주를 만났습니다제자들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우리의 선행과 믿음으로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라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전쟁터에서도 꽃은 피듯이코로나19의 엄중함에도 사랑의 꽃이 피는 것을 봅니다비대면의 시대를 살면서 수녀님이 신부님들에게 세정제와 마스크를 바구니에 담아 올려 보냈다고 합니다신부님들께서는 수녀님들이 드실 커피와 빵을 내려 보냈다고 합니다수녀님들은 신부님들이 드실 과일을 올려 보냈다고 합니다신부님들은 수녀님들이 드실 맛있는 케이크를 내려 보냈다고 합니다멀리 남미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의 글을 읽으면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팬데믹 상황에서 바구니로 정을 나누는 선교지의 수녀님과 사제들의 바구니에 하느님의 나라는 있습니다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습니다종이었던 오네시모스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을 것 같습니다바오로 사도는 더 이상 오네시모스를 종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오네시모스의 주인인 필레몬에게도 종이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 대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선녀 옷을 입고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하느님 나라는 궁궐에서 나온 공주를 만나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예수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 실천하면 이미 이곳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보라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생활은 인간 사회 안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과 장벽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가까이 있는 한 인간 존재, 특히 노예였던 오네시모스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따뜻한 마음과 자비심이 경탄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는 신분제가 엄격히 준수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 노예는 인간 취급을 못받고 거의 가축 취급을 받았습니다. 몸값을 치르고 산 주인은 노예에 대한 생사여탈권까지 지니고 있었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내야할 정도로 슬픈 운명의 소유자였습니다.

  

당시 큰 도시에는 요즘 가축 시장처럼 노예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노예상들에 의해 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 시장 한 모퉁이에 앉아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예를 원하는 사람들은 매물로 나와있는 노예들을 가축 고르듯이 골랐습니다. 

 

입을 벌려 치아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해봤습니다. 근육이 단단한지 만져보기도 하고 때려보기도 했습니다. 피부는 괜찮은지 여기저기 샅샅이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노예상과 흥정을 시작합니다. 참으로 슬프고도 비참한 광경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노예 오네시모스를 향해 바오로 사도는 ‘내 심장’ ‘내 아들’ ‘내 동지’ ‘사랑하는 내 형제’라고 칭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런 모습은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노예 제도를 당연시 여기고 있던 사람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는 시대를 앞서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바오로 사도는 노예 해방 운동에 일찌감치 뛰어든 분이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생각은 예수님이 지니셨던 보편적 인류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오네시모스는 원래 필레몬의 노예였습니다. 어찌어찌하다가 필레몬의 집에서 도망을 쳤고, 바오로 사도를 만나, 크게 감화를 받고, 바오로 사도의 옥바라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노예 오네시모스의 소유주가 필레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바오로 사도는 제발 오네시모스를 용서해달라고, 그를 선처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부탁하는 뉘앙스가 얼마나 간절한지,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스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심장과도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이제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필레몬서 10~17절)

  

사실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오로 사도의 이런 발언은 당시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탈주 노예에게는 가차 없는 체벌이 가해졌습니다. 대체로 노예를 놓친 주인은 크게 분노하며 잡혀온 노예를 인정사정없이 다뤘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그가 세례를 받았으니 제발 좀 잘 봐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 기강이나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로 간주될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이토록 간절한 이유는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는 더 이상 주인이나 노예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더 이상 귀족이나 천민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이 좋은 것이 주님 안에 모든 구성원들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모든 신자들은 빈부나 지위 여하에 상관없이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생활은 인간 사회 안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과 장벽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오네시모스를 동지요 벗으로 받아들이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필레몬에게 편지를 썼던 당시 바오로 사도의 처지를 생각해봅니다. 놀라운 것이 그 역시 깊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오네시모스보다 훨씬 더 못한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또한 스스로의 표현처럼 이제는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처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오네시모스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척박하고 피폐한 세상에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가 지녔던 그 따뜻한 마음입니다. 자신의 상태가 어떻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코가 석자지만 이웃을 먼저 생각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이영근신부-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또 재림은 언제 오는지? 혼란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 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입니다.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전자에 해당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후자에 해당하는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가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말의 때에 이루어지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 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을 요청하십니다. 곧 그 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그 장소는 “너희 가운데”라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라기보다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공간이며, 그 성격에 있어서는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동시에 당신의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나라의 왕국을 물리적으로 또 시각적으로 확인하려 했던 유대인들의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우쳐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 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소서.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소서.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소서.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사랑이 있으면 천국  

-반영억신부-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 는 새 계명 안에 성장 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느님 나라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예수님 말씀을 보면,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종말의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 오는가?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어디로 오는가?”였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세속의 나라들이 세워지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나라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또 사람들이 예상하고 기대하는,

그런 표징과 함께 오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하느님 나라는 인간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그러나 이 세상 안에 있는 나라입니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어떤 특정 지역에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은, ‘말할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든 사람 안에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는 말씀은,

시간적으로는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이고,

공간적으로는 “이 세상 안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그 완성이 진행 중인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특정 시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건설 과정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그때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는 말은,

그때 종말이 완성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바로 종말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인류가 ‘멸망’하는 때로만 생각하는데,

‘멸망’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고,

구원받을 자격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은 곧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두려운 날이 아니라 ‘기쁜 날’이고,

‘잔칫날’입니다.

“그래도 심판은 두려운 일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은 구원을 최종적으로 선고받는 ‘기쁜 날’이고,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살았거나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멸망을 최종적으로 선고받는 ‘공포의 날’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만 그 날이 무서운 날이 됩니다.

사실 심판의 결과는, 즉 어떤 선고를 받게 되는지는

각자 자신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그대로 심판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과 멸망은 각자 자신들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나타나서 목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은,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고,

동시에 메시아의 나라(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 나라의 표징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떤 정치 지도자나 군사 지도자가 등장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는 말씀을,

“사람들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실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 있고,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 안에(우리의 생각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안에, 또 우리 곁에, 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존’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게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느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기도하고 묵상할 때에 그런 체험을 할 수도 있지만,

사랑을 실천할 때에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더욱 잘 느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라고 표현할 때가 많은데,

이 말은 “사랑이 있는 곳에만 하느님이 계시고 그곳에만 하느님 나라가 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더욱 잘 체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깨닫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그런데 하느님 나라와 우리의 구원이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듯이 우리 가운데에는 사탄의 세력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악한 영향력이 끊임없이 우리의 구원을 방해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요한 2,11).”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모르고,

그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조욱현신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그들도 군중들도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행위를 통하여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왔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질문은 ‘당신이 말하는 그 나라가 오기 전에 십자가와 죽음이 당신을 덮칠 것이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사랑과 인내로 그들의 비방을 비방으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1베드 2,23)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다시 일어나 다가오겠느냐고 그때를 묻지 마라. 오히려 너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애써라.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의 의지에 달렸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합당한 이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사탄이 쫓겨나고 더는 죄가 다스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무지, 즉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나라나 사탄의 왕국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의로움에 대한 사랑이나, 죄에 대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의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의로움이요 평화이며 기쁨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악마의 나라의 시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삶 속에 무엇을 끌어안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 나라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세상 종말에 그분은 하늘로부터 희미하게 또는 은밀하게 내려오시지 않고,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하느님 같은 영광에 싸여 내려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번개가 빛을 내는 것처럼 오시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위엄을 입으시고 천사들을 거느리신 채 만물의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이제 먼저 수난과 죽임을 당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는 먼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당신 육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이 세상의 지배자를 파멸시키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가 때가 되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시편 96,13)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 우리 자신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3)

-한상우신부-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이다.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진심어린
마음이다.

부정적인
판단을
내려놓으면

우리의
일상(日常)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감사가 된다.

올바른 마음이
올바른
하느님의
나라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마음을 드러내는
실천도 있다.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우리의 시간을
빛나게 하는 것은
마음이다.

속이지 않는
우리들 마음에
이미 와있는
하느님 나라이다.

새로운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

마음 속에
담겨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안을
살피는 것이
성찰이며
기도이다.

마음이 마음을
만나고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듯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을
채워주시고
우리 마음을
살리신다.

마음을 살리는
것이 사랑이다.

하느님 나라의
원천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마음이다.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삶이 있고
기도가 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루카 17,20)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으로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그간 간절히 기다려온 메시아 시대의 도래로 알아듣습니다. 외세의 침략과 착취, 가난과 질병과 마귀들림의 고통 속에서, 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는 해방과 자유를 꿈꾸었겠지요.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요. 사실 기득권층과 민중이 하느님 나라에 기대하는 바는 꼭 같지만은 않을 겁니다. 민중은 당장 주린 배를 채워주고 억압에서 구해줄 메시아가,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권한을 보장해 줄 제도와 힘이 더 절실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선명히 눈에 보이게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모두의 바람이 충족된 완성 상태로 눈 앞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어서 차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진행형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17,21)

그들이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 예수님이 오셔서 현존하는 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지요.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 행위를 통해 스며들어 번져가는 사랑과 자비의 열매들이 그 증거입니다. 깃발을 휘날리며 칼과 불을 휘두르지 않으셔도 마음을 열어 믿을 준비가 된 이들에게는 "이미" 온 구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노예 문제를 지혜로이 풀어나가는 사도 바오로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형제로 돌려 받게 되었습니다."(필레 16)

바오로는 필레몬에게서 도망친 종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에게 간곡한 마음을 담아 서신을 보냅니다. 편지를 받게 될 필레몬은 바오로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고, 콜로새 교회에서 평판이 좋은 인사로 추정됩니다.

당시 노망친 노예에 대한 사회의 벌은 엄격했습니다. 그 노예를 바오로가 함부로 숨겨 주거나 이용해도 안되었지요. 바오로는 드러내놓고 노예 제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를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하지요.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필레 17)

사도 바오로의 이 말은 바로 예수님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차례에 걸쳐 가장 작은 이를 받아들이는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또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가난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사도는 오네시모스의 생명과 안위를 걱정하며 필레몬의 신앙과 사랑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갚겠습니다."(필레 19)

사도 바오로의 서간을 묵상할수록 사도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어가는 이유는, 그의 인간적인 매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매력 때문입니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속량하셨듯이, 범법자가 된 노예의 모든 허물을 대신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내용을 직접 쓰는 사도의 마음에서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따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미 사도는 그리스도와 철저히 일치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해지던 조선 후기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놀라고도 설레게 했던 가르침이 곧 '하느님 앞에서의 평등과 하느님 자녀로서 형제됨'였을 겁니다.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니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기득권층에게는 몹쓸 사교로 보였지만, 당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기쁜 소식이었지요.

사도 바오로는 굳이 노예 제도의 부정적 측면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누리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규정지은 신분을 넘어 모두가 하느님의 한 자녀인 세상이 곧 하느님의 나라이니까요.

필레몬에게 "그대 덕분에 성도들이 마음에 생기를 얻었다"
(필레 7)고 치하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필레 20) 달라고 오네시모스에 대한 부탁을 마무리합니다. 교회를 위한 필레몬의 관대하고 자비로운 처사가 이 문제에서도 발휘되기를 기대하며 일깨우는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취향이나 이익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자유와 해방이 절실한 고통의 현장에 두루두루, 차츰차츰 퍼져나가는 진행형인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고대하는 각 개인이 끊임없이 인내와 나눔, 희생과 자비를 선택하고 결심하고 실행하면서 완성을 향해 가지요.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 25)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 오늘의 복음 대목은 이처럼 수난 예고로 마무리됩니다. 이 덕에 "내가 갚겠습니다." 했던 사도의 비장한 선언이 가능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안고 오셔서 당신 존재를 바쳐 완성해 나가셨습니다.

저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달리는 이들이라면 하느님의 나라가 별 의미 없는 관념에 불과하겠지만, 자신과 타인의 구원을 위해 존재를 던진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놓칠 수 없는 희망이요 위안입니다. 희망으로 확신하는 행복한 미래이고, 영의 눈으로는 이미 세상을 점유하고 있는 생생한 현재이기에 위안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이용 가능한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형제요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하며 내어 줄 때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난과 희생이 양분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는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를 고대하는 동시에 지금 여기서 누리며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여러분 마음에 그리스도의 생기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    

-김찬선신부-

 

연중 32주 목요일-2010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이 말씀은 지금도 그 감동이 생생합니다.
제가 처음 부산의 본당에 있을 때 매일 복음을 묵상하고
수녀원에 가서 미사 강론을 하였는데,
그때 이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고 가슴 벅찼던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대단하고 벅찬 사실입니까?

이것은 이전에
제가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러
가방 만드는 공장에도 가고
난지도 쓰레기장에도 가고
넝마주의자들에게도 가고
야학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갔던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고
그 후에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은든소로 가거나
산과 들로 가거나
선방으로 가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로 가게 했던
가르침이었고
깨달음이었고
흔들림 없는 확신이었습니다.

물론 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물론 들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물론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물론 봉쇄 관상 수녀원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은 여기에만 계신다고 누가 얘기한다면
거기에만 계시기에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만 만나지는 하느님은 저기에서는 못 만나지요.
하느님은 여기와 저기, 장소에 매이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장소의 하느님이 아니라
인격의 하느님이고 관계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너와 나’입니다.
‘나와 그’가 아니고 ‘너와 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은
너와 나 안에 계시고
너와 나 사이에 계시고
너와 나 가운데 계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이신 하느님은 다른 어디에 계시지 않고
무엇보다 우리 각자 안에 계시며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사랑으로 계시며
우리 사랑의 한 가운데 중심으로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을 다른 데서 찾지 않고
이미 내 안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서로 안에서 만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