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Margaret K 2020. 11. 8. 06:13

2020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한 2,13-22)


He was speaking about the temple of his Body.
Therefore, when he was raised from the dead,
his disciples remembered that he had said this,
and they came to believe the Scripture
and the word Jesus had spok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모든 복음서에서 전할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성전 정화 사건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께서 세상에 머물러 계시는 장소로 생각되던 성전은 더 이상 없습니다. 실제로 성전은 기원후 70년에 파괴되었고 그 이후 새로운 성전은 건립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전을 대신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시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은 하느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사건 또한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허물어지지 않는 성전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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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내비게이션 없이는 어디를 못 간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만큼 운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특히 알고 있는 길이라도 실시간으로 교통 상황에 맞춰서 안내해주니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외출 나갔다가 성지로 돌아오는데 이제까지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워낙 신호등이 많아서 느릴 수밖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호등을 생각하지 않고 안내했구나.’

그래서 안내를 무시하고 원래 다니던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후회할 수밖에 없었지요. 공사 중이라 교통체증이 너무 심각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틀린 것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정의 마음이 드는 상황에 자주 처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확신하곤 합니다. 그러나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일뿐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거부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평화의 하느님이며, 사랑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견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도 폭력적인 부분이 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여 주시지요.

주님께서는 성전 환전상들을, 교회에서 이득을 보려 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는 자들과 같이 여기십니다. 나중에 채찍질 당하실 분께서 여기서는 먼저 채찍질을 하십니다. 이는 당신 아버지와 그분의 집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과 소들을 쫓아냄으로써 성전이 시장이 아니라는 사실뿐 아니라, 제사 제도가 끝날 때가 다가왔음도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성전이듯이 영혼도 그분의 성전이며 우리의 교회 역시 그분의 성전입니다. 여기서는 도둑과 강도, 사는 사람들과 파는 사람들이 모두 쫓겨납니다.

성전 정화를 하시는 주님의 모습에 대해 유다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라고 묻습니다. 성전에서 환전하고, 성전에서 양과 소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옳고 예수님의 모습은 주먹을 휘두르는 미치광이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몸을 ‘성전’이라 부르심으로써 그 안에 머무르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깜짝 놀랄 표징만을 요구하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의 뜻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살고 있나요?
우리가 사랑의 본질을 물을 때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프랭크 탤리스).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하느님은 계시지 않아요. 계신다면 이럴 수가 없어요.”

언젠가 어느 청년에게 들었던 말이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겪는 고통의 크기가 너무 커서 억울하다는 것만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자기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행했던 모든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하느님을 전혀 모르고서 하는 자기의 말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자기 입맛대로 움직여지길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묻어나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라는 말을 자주 하는 우리이지만,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니?”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럴 수 없다는 불평불만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는 하느님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넘어

-전삼용신부-


오늘은 베드로 대성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교황의 거처였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성전에 들어가면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되었던 식탁이 대표적인 유물로 남아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한 식탁은 그 위에서 성찬례가 제정된 숭고한 유물입니다.

      저는 그 유물을 보며 생각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성찬례가 교회의 중심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묵상하곤 합니다. 교회의 성찬례는 바로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 잔치를 상징합니다. 한 아버지를 둔 교회 가족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식탁 주위에 진정 ‘가족’으로 모여야 합니다. 분명 성당도 그런 분위기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가족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꼭 성공해야만, 혹은 성공을 위해서만 가야 하는 곳이라면 참 가족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업자금을 챙기기 위해, 혹은 다른 형제들보다 성공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찾아가야 하는 곳이라면 그런 가족은 가족의 참 의미를 잃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거대한 라테라노 대성전을 보면 그 거대함 속에 약간은 성만찬 식탁의 의미가 묻혀버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성당이 너무 크고 화려해서 전통시장처럼 편안한 것이 아니라 백화점처럼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백화점이 크고 화려한 이유는 그 크고 화려함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지 느끼게 만들어서 새 옷을 사게 만들고 새 구두를 신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성당이 백화점과 같아서 그곳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주눅 들게 된다면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채찍을 들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저도 본당신부를 할 때, 어떤 분의 “신부님은 돈 있는 사람들과만 어울리세요!”라는 충고의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따로 돈 있는 사람들을 만나려 한 적은 없었지만 사실 사목회나 본당에서 굵직한 여러 봉사를 하시는 분들은 비교적 넉넉한 분들이었기에 가난한 분에겐 그렇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교회 시스템 자체가 가난한 이들은 바빠서 봉사할 수 없는 처지이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봉사하며 사제와 어울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성전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연극 ‘금관의 예수’에서 거지는 신자들이 성탄 미사를 마치고 갈 때까지 밖에서 떨고 있어야 했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이들은 자녀들 대학 걱정, 새로운 사업에 대한 걱정들을 아기 예수님께 쏟아붓고 갔습니다. 내년에 잘 되게 해 주면 비단 이불과 금관을 씌워주겠다고 아기 예수님께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거지는 그들 틈에 끼일 수 없었습니다. 부자들이 자녀들에게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손가락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 돌아가고 아기 예수님께 자기 누더기를 벗어 덮어준 사람은 바로 그 거지였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 사람은 거지 한 명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시하는 교회를 말한다면 부자들로서는 역차별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교회에 부자들도 부담 없이 올 수는 있지만, 부자인 교회에 가난한 이들이 편안하게 올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난한 지역보다도 부자 동네에 가톨릭 신자 비율이 높다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이들도 부담 없이 성당에 나와 주님을 찬미하게 할 수 있을까요? 백화점의 모습이 아니라 전통시장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게 로마로 들어오는 돈 수레들을 보며 “‘이제 나는 은도 금도 없소!’라고 말하던 시대는 지났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도 “맞습니다. ‘자 일어나 가시오!’라고 말하던 시대도 지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라테라노 성전의 최후의 만찬 식탁은 황금 장식품으로 거의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으로 화려하다!”라는 감탄이 나오는 성전이 아니라 ‘내가 꾸미고 싶다!’라는 마음이 드는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지라도 자기 누더기를 덮어드리고 싶은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 아기 예수님과 같은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지도 부담 없이 성전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 유튜브에 「자신을 끔찍이 학대한 주인을 법정에서 다시 만난 반려견」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행인이 쓰레기통 안에서 개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여행 가방 안에 넣어져 버려진 개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주인은 동물 학대죄로 7년이나 이어지는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개가 죽었는지 알고 가방에 넣어 버렸다고 말했지만 실상 학대를 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재판관은 그럼 마지막으로 개를 만나보게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7년 만에 주인을 만난 개는 멋쩍어하는 주인과는 다르게 바로 달려가 꼬리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자신을 가방에 넣어 버릴 때부터 개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그전에는 개의 그런 반응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반응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난한 이가 필요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한겨울 마구간에서 벌거벗고 추위에 떨고 계셨습니다. 어른이 된 예수님은 세상에서 박해받고 옷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헛간이라도 있다면 좀 쉬고 가시라고 내어드리고 싶고, 수건 한 장이라도 있으면 그분의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게 만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되찾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며 참 성전의 모범이 십자가에 매달린 당신 모습이어야 함을 깨우쳐주려 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나 성당이 온전한 성전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십자가의 예수님 모습을 닮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대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짓는 성당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가난함으로 지어진 성전이라면 가난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성당이 되려면 가난한 이들보다 더 가난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넘어 가난한 이들이 필요한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스페인 속담에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시고사람은 가끔 용서하지만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측은지심이 있어서 잘못한 사람을 용서합니다그러나 언제나 용서하지는 못합니다사람의 측은지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 용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용서라고 생각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그러나 그런 용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자연은 하느님과 같은 자비가 없습니다자연은 사람과 같은 측은지심이 없습니다자연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반응할 뿐입니다그러기에 자연에게는 용서가 없습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은 인류에게 풍요로움을 주었지만 자연과 생태계에는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우리는 기후변화지구온난화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인간의 행동에 자연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녹고 있습니다폭염과 가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호주와 미국 서부에서는 몇 개월씩 꺼지지 않는 산불이 발생하고 있습니다강력한 태풍이 발생하고 있습니다학자들은 코로나19도 자연의 반응이라고 이야기합니다우리가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연대하지 않는다면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자연은 반드시 반응 할 것입니다사람의 체온이 1도가 오르면 피로감을 느끼고의욕이 없어진다고 합니다체온이 2도가 오르면 몸에 심각한 증세가 나타나고 자칫하면 사망에 이른다고 합니다지난 100년 동안 지구의 온도는 평균 1.5도 상승했다고 합니다지구는 사람의 몸처럼 피로감을 느끼고 있습니다앞으로 지구의 평균온도가 1도 정도 더 오른다면 지구는 심각한 증세가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그 결과는 엄청난 자연재해를 동반할 것입니다인류가 쌓아온 문명과 문화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노아는 방주를 만들었고 홍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당시의 사람들이 노아처럼 방주를 만들었다면 홍수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하느님께서는 지금의 인류에게도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노아는 나무와 역청으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인류는 무엇으로 방주를 만들어야 할까요소유와 욕심으로는 방주를 만들 수 없습니다재물과 기술로는 방주를 만들 수 없습니다우리는 지구별에 잠시 머물다가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방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져야 방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공기바람나무물짐승과 들짐승과 날짐승은 우리가 정복하고 다스리는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하는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방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회칙 신앙의 빛찬미받으소서모든 형제들을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방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우주에 수많은 별이 있지만 오직 지구만이 다양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방주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우주라는 망망대해에서 일엽편주처럼 외롭게 떠있는 것이 지구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지구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머물 수 있는 방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허물어라내가 새로 세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이란 건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바로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를 의미 할 것입니다성전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주는 구원의 방주입니다구원의 방주인 성전은 기본적으로 4가지의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하고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성전은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성당은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곳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이 감사의 기도를 하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셋째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도 하지만미사는 형제들이 함께 모여 빵을 나누는 축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많은 단체들이 성당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친교를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넷째성전은 섬기는 곳입니다예수님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그리고 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늘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전기도하는 성전친교를 나누는 성전서로 섬기는 성전은 어느 곳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우리들의 성전도 바로 그런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교우들로 인해 교회가 빛납니다. 신자들은 사목자들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양승국신부-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가 의식있는 분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성전, 참된 의미의 교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많은 사목자들이 텅텅 빈 성전에 홀로 기도하면서 교우 한분 한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가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교우들로 인해 교회가 빛나는구나, 신자들은 사목자들의 존재 이유로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위용을 자랑하는 높이높이 올라간 교회 첨탑,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성전도 교우들이 사라져버리니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걸작 성화나 성상들로 장식된 위풍당당한 건물로서의 성전도 가치가 있지만, 더 중요한 존재는 교회 구성원 한명 한명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목자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고 성전에서의 현장 예배를 포기할 수 없다며 윽박지르며 신도들을 혼란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전에 대한 개념 파악을 하지 못한 과오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성전에 대한 종래의 개념을 완전히 폐지가 되었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이제 새로운 차원의 성전 개념이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복음 2장 19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이 격렬했습니다. 분노에 치를 떨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예수님을 성전 모독죄로 고발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요한 복음 2장 20절)

  

예수님께서는 성금요일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극도로 훼손되고 속화된 성전을 완전히 허무셨습니다. 당신의 영광스런 부활을 통해 새로운 성전을 재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전은 이제 더 이상 허물어지지 않는 영원한 성전입니다. 예수님 존재 그 자체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매일의 성체를 영하는 우리 각자가 또 다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매일의 삶속에서 구체화시키는 교우들 한명 한명이 또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둘이나 셋이 모여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정은 그 어떤 성전보다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은 세상속의 성체요, 세상 속의 예수님이요, 예수님께서 가장 각별히 사랑하시는 개별교회입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한국 교회는 진지하게 지난 순간들을 성찰하며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의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순간입니다.

  

기원후 79년 대역병이 로마 제국을 휩쓸었습니다. 로마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타기투스의 ‘연대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로마인들이 집안 마다 시체가 가득 쌓여 있고, 거리 곳곳에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로드니 스타크는 ‘그리스도교의 발흥’이란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로마가 대 역병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급성장했다. 당시 인구의 2/3가 죽어 나갈 때, 그리스도인들과 공동체는 환자들의 간호에 전념했다. 사람들이 모두 도시를 떠날 때에도 끝까지 남아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로마 사회에 새로운 네트워크를 제공했다.”

  

이 특별하고 어려운 시기,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깊이있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반영억신부-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 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을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 전

-송영진신부-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고치고 바로잡으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개인뿐만 아니라 종교 전체의 잘못된 일들을 고치고 바로잡으려고

오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또 성전에서 장사하는 일 자체를 금지하신 일은,

그 일이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성전에서 가축을 팔고 환전을 해 주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허락하고 자릿세를 받은 사제들이나

그 장사꾼들에게서 가축을 사고 환전을 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일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성전에서 파는 가축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용 가축이었고,

또 ‘환전’도 외국 화폐를 봉헌용 이스라엘 화폐로 바꿔주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 일을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장사를 해서 얻은 수익금을 하느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차지했고,

사제들은 자릿세를 받아서 자기들이 챙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는 일이었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일이었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대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 말씀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

성전은 모든 사람이 기도하는 집이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니 성전에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짓을 하는 것은

성전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께 바쳐야 할 돈을 가로챈다는 점에서 하느님을 상대로

강도짓을 하는 것이고, 만일에 다른 곳에서는 물건을 사지 못하게 하고, 자기들이

비싸게 파는 것만 사라고 강요한다면 그것도 역시 강도짓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집에서 강도짓을 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입니다.

성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상 종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종교는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곳이고, 사람들을 섬기는 곳입니다.

‘섬김’이란, 나를 버리고, 섬기는 대상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일입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면서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것은 ‘섬김’의 반대쪽에 있는 일,

즉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이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일이고,

하느님을 거스르고 반역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은 잘못되어 있는 종교를 개혁하신

일이기도 하고, 잘못되어 있는 신앙생활을 개혁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옛날 유대교의 잘못된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을 반성하고 쇄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과거 역사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

종교 간판을 걸어놓고서 개인의 물욕을 채운다면, 그것은 사이비 종교입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일만 한다면, 그것은 사이비 신앙입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8-22).”

 

여기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라는

유대인들의 말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라는 뜻입니다(마르 11,28).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내놓으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은 허물고 성전을 새로 지으라는 명령이고,

또 그런 종교는 개혁하고 쇄신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에게서 온 권한이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감히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이고, 하느님께 반역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까 예수님의 권한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으니까 예수님의 권한도 안 믿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일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말씀이고, 강도들의 소굴을 없애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종교로 새롭게 쇄신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종교로

개혁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종교와 성전은 ‘나의 구원’을 위한 곳이고, 동시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곳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짓은 결코 하면 안 됩니다.

또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고 있다면 곧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라떼란 대성전 봉헌 축일

-조욱현신부-


라떼란 대성당 봉헌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라떼라노에 세운 대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다. 라떼란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사도좌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라떼란 성당을 들어가다 중앙 문을 보면 문 상인방에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즉 “로마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 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들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성당의 봉헌 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시는 베드로 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이다.

복음: 요한 2,13-22: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과월절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금하시고 정화시키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성전의 본 의미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분의 선물을 받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모든 것은 형식으로 변하고, 성전이 이익집단이 모여 이권전쟁을 하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대로하신 것이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이다.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은 이때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객들이 200만 명이 되었고, 제물로 바치는 양의 숫자도 30만 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에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가축들을 성전에서 준비한 것만 바치게 하였고 성전세도 성전에서 만든 돈으로만 바치게 하여 이런 횡포가 있었던 것이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노하셔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고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8-19절). 이 말씀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성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46년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이 성전이시며, 아버지와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몸은 거룩한 성전이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어떤 의미에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자녀들인 우리 자신이 성령을 모시는 궁전이다.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성전으로 항상 가꾸고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이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 성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알았다면,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복음일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성전이 거룩할 때에 우리 교회 공동체가 모두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고 보존하여야 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 19)

-한상우신부-


하느님께
하느님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봉헌이다.

많은 사연들을
안고 라테라노
대성전이 세워진다.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곳이
대성전이다.

그리스도의
기쁨과 희망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세워질 수 없다.

성전의 주인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성전을 봉헌하듯
우리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성전 봉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우리들 삶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삶이 곧 성전의
삶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대성전처럼
다채롭고
다양하다.

성전을
빛나게
하는 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사랑하는
우리들 삶이다.

삶이 빠져버린
대성전은
공허하다.

예수님께서
세우려고 하신
성전은 당신의
충만한 삶이셨다.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삶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고
기쁨이 되었다.

성전의 여정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닮아가는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이다.

성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드러납니다.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요한 2,15)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러 온 백성들과, 그들에게서 이득을 취하려는 상인들이 북적이고 있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안에서 통용되는 단위의 화폐로 환전하고 예물로 바칠 동물들을 구입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상인들과 종교 기득권층이 나름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선량한 백성들에게 과중한 짐을 지우는 행태와, 본모습을 잃어가는 성전의 분위기에 채찍을 휘두르신 것입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과 맞지 않는 모든 것을 치워버리라고 단호히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장사"라는 말씀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물질과 재물은 인간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라서, 거룩함마저 재물과 적당히 버무리면 이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이 하느님의 집, 성전에서 이용당하고 착취당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는 결코 하느님의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성전은 하느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기도의 집"
(루카 19,46 참조)이니까요. 백성들은 성전에 와서 진심에서 우러나는 예물을 주님께 바치고 사랑을 고백하는 가운데 그분에게서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그간 져온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놓고 주님 품에서 쉬며 그분과 더욱 가까워지는 곳이 바로 성전이지요. 예수님은 성전이 진정한 본질, 정체성, 역할을 회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이야기합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에제 47,12)
에제키엘 예언자가 본 환시 안에는 생명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닿는 모든 것을 되살리고 생동감을 일으킵니다. 우글거리며 역동하는 모든 생명의 환성와 환희가 들리는 듯하지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성령"이기도 하고, 또 성전에서 선포되어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전이 깨끗하고 거룩한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고 존재할 때, 세상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성전에 온갖 물질주의와 탐욕, 형식주의와 편가름이 들어차면 세상에 내어 줄 것은 절망과 냉소의 기운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성전인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교회와 공동체, 우리는 세상에 선하고 온유하고 진실된 기운을 불어넣는 존재로 불리웠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되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는 성전 본연의 정수를 되찾아 꼬옥 간직하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이처럼 크게 뒤흔들어 주십니다.

영성생활 안에서 주님의 성전인 우리 마음도 악의 각축장이 되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은 생각과 기억과 상상과 감정이 우리를 들쑤셔 주님을 정향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주님 안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분산시키지요. 그럴 땐 마치 마음이 소란스럽고 분노 가득한, 어둡고 음습한 악의 소굴이 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두를 쫓아내시고 쏟아 버리시고 뒤엎어 버려 주시기를 청합시다. 우리 개개인이 주님의 거룩하고 정결한 성전이니 그 본모습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예수님과 협력할 수 있습니다. 영적 여정에서 성령의 현존을 청하고 다가오신 말씀에 반복해서 깊이 머무르는 기도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입니다.

사랑하는 벗님!우리 모두 고통 가득한 세상을 되살리고 생명을 주는 "생명의 물"이 되어 봅시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가 우리다울 때 가능합니다. 주님을 품고 그분과 맞닿은 채 살아가는 모든 이는 이미 생명이기에, 그에게서 성령이, 말씀이 전해집니다.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생명이 되려 애쓰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730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9일 금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