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

Margaret K 2020. 11. 7. 06:30

2020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마태오 (25,1~13)

 

 Stay awake,
for you know neither the day nor the hour."

 

The parable of the ten virgin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힙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 앞에 서서 문을 열어 달라고 청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말씀은 다소 냉정하게 들립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비로운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간청하는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주인은 문을 열어 줄 법하지만 그리하지 않습니다. 유다교에서 ‘닫힌 문’은 놓쳐 버린 기회를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마지막 때에,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준비가 필요하며 그 준비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등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서 받을 수 있거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을 말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열 처녀의 비유는 마지막 때가 아닌 지금의 삶에 관심을 두게 만듭니다. 지금이 혼인 잔치를 위한 기름을 준비할 때입니다.
현재의 삶에 따라 슬기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금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유다교의 ‘닫힌 문’의 의미를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고 여전히 우리의 삶 안에서 종말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수많은 기회가 있음에도 그것을 잡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

-키엣 대주교-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행복을 신랑을 맞이하는 등불로 아름답게 묘사하셨습니다. 결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결혼이며 신랑은 주님이시고 처녀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기름이란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갖고 주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오시는 시간이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어둠이란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맞는 고난과 시련이며 신랑이 늦는다는 것은 죽음이란 예상치 않게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둠은 등불을 든 행렬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밝게 빛나고 그 가치도 커집니다. 하지만 등이 없거나 켜지지 않는 등을 가진 사람에게 어둠은 곧 불행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름과 기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깨어있는 채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며 언제 올 지 모르기에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늦었다는 것을 깨닫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순간입니다.

어두운 밤, 밤늦게 신부를 찾아 온 신랑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찾기 위해 우리가 있는 곳까지 조용히 혼자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인류 모두가 구원되어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열명의 처녀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신랑을 맞을 수 있게 선택된 사람들이며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등을 밝게 비추고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밝게 빛나는 등을 들고 있는 사람이란 주님을 간절히 사랑하며 항상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등불이 꺼진 사람들 역시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싶지만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때 믿음을 가졌지만 이제 믿음을 버린 사람,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교회에 오는 사람, 세례명부에 이름만 올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비록 등을 가지고 있지만 기름이 떨어져 등을 밝힐 수 없는 것처럼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법을 알지만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의 만찬에 초대된다는 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한 식탁에 앉는다는 것입니다. 성체는 인류를 위해 헌신하신 주님의 사랑이시기에 성체성사는 행복의 만찬입니다.

성체가 모셔진 감실 옆에는 언제나 불이 켜져 있습니다. 미사를 보는 중에도 미사가 없는 시간에도 감실옆의 불은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기도가 감실 옆의 불빛을 더욱 밝게 빛나게 하고 우리의 삶도 밝게 빛나게 합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밝게 빛나게 살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바로 성체의 신비로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위해 자신을 낮추고 이웃과 나누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위안을 주어야 합니다.

성체성사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불빛이 꺼지지 않고 언제나 밝게 빛날 수 있도록 기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 손 위에서 작은 성체가 밝게 비추일 때 우리는 성체이신 주님의 위안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오실 때 그 불빛을 들고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결혼식에 초대받기 위해 언제나 성체성사를 하고 주님의 길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께서 주신 기회를 잃지 않도록 언제나 일깨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께서는 언제나 예상치 않은 시간에 오십니다. 주님을 맞기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 지 생각해보세요.

2. 등이 꺼지지 않도록 충분한 기름이 준비되어 있는 지 돌아보십시오.

3.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깨어있을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평신도, 파견되는 사도들

-임상만신부-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다. 그리스어로 ‘하기오스’,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 평신도라는 말은 ‘거룩한 백성’, ‘하느님께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신자’(로마 1,7), ‘아버지 하느님께 복받을 사람들’(마태 25,34),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로마 1,6) 등 신앙 안에서 이미 복을 받은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평신도에 대한 정의 가운데 진정한 의미 하나를 선택한다면,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1테살 5,6-8)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평신도들은 대체로 주일에 성당에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흩어져 한 주간을 세상 속에서 사회인으로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올바른 평신도의 삶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미사가 끝나고 서로 흩어진 후에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초대 교회의 모습은 평신도들이 각자 신앙의 공동체에서 흩어진 후에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수행하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사도 8,4-6)

하느님께서 주일마다 평신도들을 당신 교회로 모으시는 것은 그들이 함께 모여 미사와 전례만을 행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평신도들의 사명을 재확인하고 다시 세상으로 흩어지는, 아니 ‘파견’되는 주님의 사도가 되도록 이끌어 주시는 섭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평신도들은 주님의 신비체인 교회에서 지체로서 공적 예배와 신앙 고백을 통해 신앙의 성장과 더불어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세상에 나아가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책임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자들인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에페 1,23). 이 말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신비체인 교회의 지체로서 다 중요하며 각자가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평신도’이기에 교회의 모든 일을 성직자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비조직적 구성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신학자 칼 라너 신부는 교회론을 통하여 평신도라는 말이 교회에서 사라져야 교회가 정상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평신도라는 말이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고 전파해야 하는 모든 책임을 사목자에게 전가시키고 자신들은 이 책임을 회피하는 용어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비유로 알려주셨다.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마태 25,10ㄴ)는 말씀이다. 등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안심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결국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우리도 평신도 사도로서의 복음적 삶과 선포를 통하여 등에 기름을 채우고 잔치에 들어가도록 해야 하겠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그리스도인의 놀이터

-장재봉신부-


이런 세상을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고작 미물에 불과한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그 동안 쌓아 온 인간의 규범이 망가진 기분입니다. 하찮은 바이러스에게 바깥 생활을 차단당하고 보니 긴 세월동안 축적했던 인간의 사회론이 묵살당한 기분도 듭니다. 함께 어울려 형성하던 우리의 갖은 행위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로 둔갑했고 더불어 누리던 행복과 기쁨을 반납당한 이즈음, 이 낯선 공간에서 어찌 지내시는지요?

삶은 악과의 끊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서 깨어 살아가는 것은 악과의 힘든 투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악을 해명하지 않으십니다. 악을 설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으십니다. 악한 세력을 없애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처럼 악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하늘의 힘으로 악에 맞서서 승리하라 하십니다. 악에 대한 승리는 악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 안에서 생성되는 것임을 몸소 살아내라 하십니다.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복종”시키는 단호함을 챙기라하십니다. 부디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강권하십니다(1코린 9,27 참조).

그런 의미에서 더욱 오늘 독서 말씀이 심오하게 들립니다.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에 따순 위로가 듬뿍 담겨있으니까요.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예지라는 것, 오롯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사모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니까요.

솔직히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던 우리입니다. 제발 한가하게 ‘멍’을 때릴 수 있는 여유를 우리는 갈망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시간도 충분히 은혜입니다. 은총의 때입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서 주님과 훨씬 더 친해질 수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없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결코 그분을 알아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지 못하기에 더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기에 더 알고 싶어 해야 옳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에 성경을 통해서 오붓하게 그분과 깊게 교류하려 애쓰며 지냅니다. 그분과 조우하며 힘을 얻어야만 이겨낼 수 있는 사안이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께 아뢰며 봉헌하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임을 수없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페터 폰 코르넬리우스 ‘열 처녀의 비유’


어제, 손님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가게를 지나며 우리 주위에 널려있는 절망의 민낯을 보는 듯 했습니다. 많은 교우님께서 겪고 계신 어려움이 불쑥 다가왔습니다. 어서 두려움을 벗기고 희망의 옷을 입혀드리고 싶었습니다. 온 세상을 덧칠하고 있는 어둠의 그림자를 얼른 씻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교우님들께 간곡한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자주, 눈을 감고 하느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더 자주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며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채워”(로마 5,5)주시는 성령을 체험하기 바랍니다. 좋으신 우리 아빠 아버지로부터 세상의 것들에 실망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부여받으시길 원하고 원합니다.

아울러 그 동안 시간이 없어서 미뤘던 성경읽기에 도전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영의 놀이터입니다. 그분께서 마련해주신 영의 놀이터에서 탄탄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놀이터에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 중에도 최고의 축복을 얻어내는 비법이 숱합니다.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붙들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하는 비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주님께서 주신 삶의 교과서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 땅에서의 행복은 ‘천상행복의 그림자’일 뿐임을 알고 있는 지혜인입니다. 때문에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끝없이 갈망하는 마음이 자리해 있습니다. 저는 이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이야말로 훗날, 이 땅에서의 여행을 마친 당신 자녀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영혼에 심어주신 내비게이션이라 믿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엉뚱한 길에서 헤매지 않도록, 곧장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귀향할 수 있도록 세워놓으신 하늘 길의 이정표라 믿습니다. 하느님 자녀의 자긍심으로 세상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붙들어주는 주님의 손길이라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마음을 반듯하게 펴서 원상복귀 시킬 수 있는 능력자이십니다. 마음의 허기를 그분 사랑으로 채우도록 합시다. 그분 사랑에 벅차오른 마음으로 복음을 자분자분 살아내는 향기를 지니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꾸며주신 세상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주님의 조력자가 되어 봅시다.

평신도 주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꾸며주신 말씀 놀이터, 성경의 애용자가 되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말씀으로 하늘의 힘을 충전 받아 계속 타오르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조성풍신부-


전례력 ‘가해’의 마무리를 앞두고 ‘평신도 주일’을 다시 맞이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 19라는 초유의 상황으로 ‘사 회적 거리 두기, 언택트(untact), 온택트(ontact)’ 등의 용어뿐 아니라,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 등을 보다 생활화하며 살 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활동이 취소 또는 축소되거나 비대 면으로 진행하게 되는 상황에, 더구나 내년까지 지속될 지 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걱정 가운데 모두 이 어려움을 이 겨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세상 곳곳에 주님 께서 주시는 ‘평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 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이사 6,8)라는 주님의 말씀 에 이사야 예언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 오.”(이사 6,8)라고 응답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구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이사야처럼 우리 시대에도 누 군가 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 누군가가 누 구일까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면서 희망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해야겠지만 특히 평신도들이 그렇게 살 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길이고, 평신도 주일을 기념하는 의미입니다. 평신도 사도직은 교 회 공동체 안과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평신도 사 도직은 교회의 구원 사명에 대한 참여이며, 모든 이는 세 례와 견진을 통하여 바로 주님께 그 사도직에 임명된다. … 평신도들은 특별히 교회가 오로지 평신도들을 통해서만 세 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장소와 환경 안에서 교회를 현존하게 하고 활동하게 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 관련되는 이 사도직에 더하여 평신도들 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계 사도직과 더 직접적인 협력을 하도록 불릴 수도 있다.”(「교회헌장」, 33항)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제의 동반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일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눈과 귀,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마음이 어떠하실지?’를 헤아려 봅시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무한한 사 랑을 느껴봅시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합시 다!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 는 사람들과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고, 세상 만물을 사랑합시다! 이렇게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그분의 사랑에 기초한 희망의 메시 지를 모든 사람, 장소, 만남에 전하는 삶, 이것이 바로 평신 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가 되면, 특히나 위령 성월이 되면 어릴 적 읽었던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스크루지 영감이 떠오릅니다. 나의 ‘비문’에는 무엇 이라고 써질까? 기름을 준비해 두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 가 되어야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 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구원의 기름

-윤정환 신부-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열 처녀의 비유는 구원과 심판의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 깨어 준비하 라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는 몇 가지 이해가 잘 안 되는 장면이 등장하지요. 먼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다섯 처녀들은 이런 볼멘소리를 할 지도 모르지요. “하필이면 신랑이 밤에 올게 뭐랍니까. 낮에 왔으면 등불을 켤 기름은 필요도 없었을 것 을.” 또한 신랑을 만난 다섯 처녀들 도 그래요. 기름을 나눠 쓰면 될 것 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자기들만 들 어가지요. 게다가 신랑은 늦게라도 기름을 마련해온 처녀들을 받아들 이지 않아요. 그래서 결국 문은 굳 게 닫히고 맙니다. 하지만 그게 전 부는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다 단순하 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혼인잔치 는 곧 구원의 잔치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기다린다면 구원될 것이며, 구원받는 것이 어려 운 일이 아님을 말하지요.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지 다른 이가 대신해줄 수 없음을 보여줍니 다. 그런 기름을 우리는 어디서 어 떻게 준비할까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다른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는 예복을 입지 않 은 사람들이 잔치에서 쫓겨난다고 하였습니다.(마태 22,12) 여기서도 예복 은 잔치에 함께 하는 마음이지요. 결국 잔치 예복이나 기름은 같은 것 이 아닐까요. 사도 바오로가 “예수 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 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1테살 4,14ㄱ) 라고 말하는 대로, 그것은 바로 하 느님에 대한 믿음이며, 구원의 희망 인 것이지요. “하느님의 나팔 소리 가 울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 다 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 할 것입니다.”(1테살 4,16~17) 지혜서 저자는 말하지요.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 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 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지혜 6,12~14)고 말입니다. 그만큼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으며, 또한 우리는 이미 구원의 문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 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깨 어 기다리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 니다

 

우리가 준비할 기름

자비와 배려심

장경원신부-


오늘 복음은 신랑이 올 때를 기다리는 처녀들의 이야기 를 들려줍니다.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이들과 그렇지 못 했던 이들이 맞이하는 결과는 정말 다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정성의 기름 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기름은 신망애 삼덕의 등잔에 채 워 넣을 측은지심과 배려심의 기름일 것입니다. 믿는다 고 말하지만, 희망한다고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면, 그것은 거 짓일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보다 세상 것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져가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내 이익을 먼 저 계산하고, 남을 낮추어 자신을 높이는 일들이 우리 안 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슬프기까지 합니다. 종종 우리들은 수직적인 신앙생활만을 생각합니다. 그 래서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만 생각하고 나 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지닐 때가 있습 니다. 그러나 이제는 수평적 신앙생 활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가 그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이웃 가운데 예수 님께서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 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 는 이웃에게 얼마나 관심을 두 고 자비심으로 배려하고 있는 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믿음, 희망, 사랑의 절대가치와 함께 하느님께 로 향하는 우리의 삶이 참 신앙인의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해 왕직, 예언직, 사제직이라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직무를 살아가도록 요청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생 활 안에서 자애로운 마음과 배려의 태도를 잊지 않으려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영미는 엄마에게 말합니다. “올 한 해는 아름다운 해가 되겠지!” 엄마는 묻습니다. “한 해 는 매우 긴 시간이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 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그러자 영미는 대답합 니다. “엄마, 나는 하루를 보내면서 그때마다 그 하루가 아름다운 날이 되게 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어요. 따지고 보면, 일 년이라는 긴 시간도 하루가 모여서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하루가 모여서 아름다운 한 해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엄마는 “그렇다면 정말로 영미의 올해는 참으로 아름다운 한 해 가 되겠구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매일이 아름다운 날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예 수님의 마음을 잊지 않고 사랑으로 채워져가는 생활을 하 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문이 닫히지 않도록 깨어 준비하고 기도하자

-한병성-


나는 문에 대한 트라 우마가 있다. 어린 시절 동생과 술래잡기하던 어느 날, 동생 술래 차 례에, 좁고 어두운 다 락방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어렵게 올라가 다락문을 닫는 순간 밖 에서 문고리가 잠겨버렸다. 이곳은 평소 어머 니가 곶감이나, 알사탕, 또는 일꾼들에게 줄 담배 등을 숨겨두는 무엇이 들어 있나 궁금 증을 갖게 했던 어머니의 보물창고다. 찾기를 포기하고 밖으로 나가는 동생의 기척에 즐거 웠다. 시간이 흘러 숨기를 포기하고 나오려다 문이 잠겨있는 것을 깨닫고, 무서움이 엄습해 와, 울다 잠이 들었다. 어둠이 깔린 늦은 시 각, 밭일을 끝내고 동생과 함께 귀가하신 어 머니는 내가 보이지 않자, 내 이름을 부르며 온 동네를 헤맸다. 찾기를 포기한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울음을 터트렸고, 울음소리에 눈을 뜬 나는 다락문을 두드려, 어머니 도움 으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일을 겪은 후론 문이 무섭다. 그것도 안이 캄캄한 작은 문을 열려면 두려움으로 망설여진다. 문은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한, 또 하나는 밖에서 안으 로 들어오기 위한 경계이다. 안에서 밖을 향한 문 바깥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문을 지나야 한다. 특히 작은 문을 수월하게 통과하려면 가졌던 것을 버려야 한 다. 신앙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느님 나라인 바깥세상으로 나아가려면, 그간의 잘못된 습 관, 죄악 등을 버려야 한다. 또 우리가 경험하 지 못한 문밖 미지의 세계에서는 필요한 것이 오직 지혜뿐이다.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 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지혜 6,12)” 이 지혜는 “갈망하고 갈구하는 이 들에게 알아보게 해 준다(지혜 6,13 참조).”는 말 씀을 통해 구할 수 있다. 밖에서 안을 향한 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문안은 문밖에서 지쳤던 삶을 내려놓고 쉬는 곳이다. 이곳은 하느님이 계시는 거룩하고 편 안한 곳, 쉬며 위로받을 수 있는 곳 “죽은 이 들이 다시 살아나고,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1테살 4,17 참조)” 그곳이 바로 문안의 세 계다. 어린 시절 내 어머니 보물 창고와 같은 내 꿈의 고향이요, 선망의 대상이다. 하느님 의 품 안과 같다. 문 열어 주기만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마음도, 공포로 울며 떨었던 어린 시 절 내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문밖에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태 25,12).” 하는 답을 들 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문이 닫히지 않도 록 항상 깨어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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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하긴 아이를 많이 낳아 키우지 않기에 사랑을 더 많이 주려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100점짜리 사랑을 전하려는 마음입니다. 과연 가능할까요?

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아빠가 있었습니다. 자녀를 위해 열심히 일했고, 집에 와서는 100점짜리 아빠가 되기 위해 늘 함께 놀아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리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아이가 평소처럼 안아달라며 자신의 품으로 뛰어듭니다. 아이를 안는 순간 허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면서 짜증이 나서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100점짜리 아빠에서 0점 아빠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소아정신과 의사들은 말합니다. 100점짜리 육아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이런 육아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조금 부족한 듯해도 꾸준한 70점짜리 육아가 아이의 정신 상태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최고의 사랑만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꾸준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주는 것도 욕심이 과하게 되면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70점짜리 사랑도 가짜는 아닙니다. 꾸준한 사랑으로 그 점수를 조금씩 높이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종종 “왕년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냉담 중이시더군요. 왕년에 100점짜리 사랑의 활동이 지금 0점짜리 사랑의 활동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열 처녀 비유’ 말씀은 최후의 심판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부활과 심판의 날에는 선행에서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믿음과 행동에서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을까 봐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가 어리석은 처녀에게 기름을 나누어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늘 깨어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는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면서도, ‘아직 멀었겠지’라는 생각으로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만 생각하고 앞날에 대비하지 않은 모습을 ‘어리석은 처녀’라는 호칭이 붙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단 한 번의 사랑이면 충분할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절대 주님의 사랑처럼 완벽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꾸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맞이할 확실한 준비가 될 것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베르길리우스).


못 생길수록 추위 더 느껴!

몇 년 전, 인터넷에서 본 기사 제목입니다. 너무 인상 깊은 제목이라 적어놓았는데, 우연히 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못 생길수록 추위를 더 느낄까요? 사실 뉴스에 나온 것처럼 편집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물론 합성이었고 또 근거도 없는 말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늘 어깨를 쫙 펴고 힘차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늘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요. 남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말입니다. 그 모습이 잘생겨 보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잘 생기지 않더라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면 잘생긴 것으로 보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는 시대에 따라 그 기준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항상 인정받았던 사람은, 열등감을 가지고 좌절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 있게 지금의 이 순간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움츠러들고 숨으면 숨을수록 마음이 자꾸 추워질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 나를 드러내 보십시오. 열정으로 인해 마음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지옥까지 가겠다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 말씀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는 지금 심판에 관한 복음이 나오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준비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얻는 방식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꾸준해야 합니다. 사막 달리기 대회에서 가끔 탈수로 죽는 사람들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규칙적으로 물을 마셔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목마를 때 물을 마시려고 하면 늦습니다. 아플 때 치료하려고 하면 늦는 것과 같습니다. 연료가 다 떨어져 도로에 섰을 때 기름을 넣으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지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 쉬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름을 넣으려고 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천국으로 들어가는 현명한 처녀들의 오늘 행동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기름이 떨어진 동료들에게 자신의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행동입니다.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라도 좀 나누어주어 다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면 좋은 일 아닐까요? 기름을 좀 나누어달라는 동료들에게 현명한 처녀들은 이렇게 모질게 말합니다.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현명한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주어도 기름이 모자라게 될 것이란 확신은 없습니다. 다만 추측으로 그럴 것 같아서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처녀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천국으로 들어갈 사람의 자세일까요?

 

      어떤 유명한 스님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랬습니다.

 

“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놓고, 자기는 천국에서 잘 살고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을 모른 체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신이라면 지옥으로 가서라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데려오겠습니다.”

      불교에는 ‘지장보살’이 있습니다. 그는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모두 구제하기 전까지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한 보살입니다. 그 스님은 이런 것이 사랑이지 지옥을 만들어놓고 그들을 내버려 두는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불교에서는 모기도 조상으로 봅니다. 그러면 모기를 구제하기 위해 모기떼 가운데 가서 뜯기고 있을 스님이 있습니까? 혹은 뱀이 득실대는 곳에서 교화하려는 스님이 있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기가 회개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모기보다 더 그 본성이 모기다워진 지옥의 영혼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자기 자신을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명한 처녀들이 등잔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잘한 일입니다. 자칫 자신의 등잔이 꺼지면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가 되면 나누어주고, 어느 정도가 되면 상대가 지옥에 가더라도 나누어주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상에서 유다를 가차 없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거기까지가 그분이 기름을 나누어주실 수 있는 한계였습니다. 우리는 이 한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강의 부탁을 많이 받아서 강의를 많이 하다가 지쳐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가면 안 됩니다. 이는 수영도 못 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겠다고 무작정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결국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살겠다고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영화 ‘그랑 블루’(1988)는 프리다이빙을 하는 엔조와 자크, 그리고 돌고래와 바다, 또 자크를 사랑한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엔조와 자크는 친구 사이지만 또한 누가 산소통 없이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지를 겨루는 경쟁 관계기도 합니다. 자크는 특별한 폐를 가지고 있고 특별히 돌고래와의 소통이 마치 가족과 같습니다. 이 와중에 자크를 사랑하게 된 조안나가 등장합니다. 조안나는 자크를 사랑하지만, 자크는 자신보다 바다와 돌고래를 더 좋아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다와 돌고래와 함께 하는 시간의 1/10 정도만 자신과 함께 하는 자크를 몇 번이고 떠나고 싶지만, 임신까지 합니다.

      엔조와 자크의 경쟁에서 엔조는 경쟁심을 못 이기고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에 죄책감을 느낀 자크도 무언가 찾기 위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조안나는 자신에게 아기가 있다고 말립니다. 하지만 자크는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자크는 밤 속 깊고 어두운 곳에서 돌고래의 인도를 따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립니다.

 

      이야기는 엔조와 자크가 무언가 고향을 찾은 느낌을 주지만 혼자 남겨지는 엔조의 어머니와 임신한 자크의 애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자크는 물속 깊은 곳에 들어갔을 때의 기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잘 모르겠어. 물에 들어가면 항상 나와야 하는 더 큰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자신의 아기를 가진 자신만을 바라보는 한 여인의 사랑보다 물속의 돌고래가 더 좋다면 그 물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보다 지옥에 떨어진 내 친족이 더 좋으면 자신도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이것 때문에 현명한 처녀들은 남은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선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저는 대죄를 짓지 않을 정도의 기도시간을 찾아냈습니다. 세 시간 정도는 기도해야 알고 짓는 죄를 간신히 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소 기도시간이고 이것은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내는 것이 더 많은 영혼에 도움을 줄 힘이 된다는 것도 압니다.

      내가 어느 정도의 기름까지 내어줄 수 있는지 알려면 기도를 통해 죄를 이겨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최소량의 기름의 양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나누어주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현명한 처녀는 규칙적인 기도를 할 뿐 아니라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되는 그 기도시간도 명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읽은 이야기입니다어떤 사람이 방안을 샅샅이 살피편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친구가 물어보았습니다무엇을 찾습니까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반지를 찾습니다친구가 물었습니다반지를 어디에서 잃어버렸나요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집에 오는 길에 잃어버렸답니다그러자 친구가 이야기합니다그렇다면 집 밖에서 등불을 들고 찾아야지방에서 찾으면 됩니까잃어버린 반지를 찾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장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집 밖에서 잃어버렸다면 집 안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반지는 없을 것입니다집 밖은 어둡고무서울 수 있습니다하지만 잃어버린 반지를 찾으려면 반드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부처님은 편안한 궁궐을 포기하고 깨달음의 세상으로 나갔습니다궁궐에는 부처님이 찾는 진리와 열반의 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보리수 아래서 오랜 시간 성찰하면서 생로병사의 업보를 넘어 깨달음의 반지를 찾았습니다그것은 집착을 버리면서 시작되었습니다제자들에게 반지를 찾는 팔정도(八正道)의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찾아야 할 반지는 무엇일까요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시면서 우리가 찾아야 할 반지가 무엇인지 성찰하셨습니다사탄이 유혹했던 재물 속에는 반지가 없었습니다명예 속에도 반지는 없었습니다권력이라는 곳에도 반지는 없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 반지를 찾았을까요하느님의 말씀에서 반지를 찾았습니다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희생에서 반지를 찾았습니다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는 겸손에서 반지를 찾았습니다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반지를 찾았습니다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그다음으로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살아서도죽어서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반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생로병사의 업보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다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기쁘게 사용하면 됩니다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무익하면 과감하게 버리면 됩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이제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하였습니다쓰러져가는 교회를 일으키는 기둥이 되었습니다몰로카이의 성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본인도 나병환자가 되었지만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25살의 젊은 나이게 순교하였습니다. 1년 동안 사제생활을 하였지만 한국교회 사제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잔에 기름을 채웠던 슬기로운 처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채워야 할 기름은 무엇일까요우리가 채워야 할 첫 번째 기름은 믿음입니다예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믿음이 있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우리가 채워야 할 두 번째 기름은 희망입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비록 지금은 작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느님 나라에는 세상 모든 것들이 머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에 곡식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순교자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채워야 할 세 번째 기름은 사랑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믿음희망사랑의 기름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당신은 저의 하느님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성인(聖人)이란?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양승국신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번째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성인 후보자입니다.

  

저는 가끔씩 우리 형제들 가운데, 성인 후보자가 있을까? 싶어서 형제들을 살펴봅니다. 정말 깜짝 놀란 일은?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몇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은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늘 자주 차 한잔 했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완전 동떨어진 별세계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도 아닙니다. 

 

대신 그들은 우리 보다 조금 더 기도에 집중했던 사람들, 그래서 우리보다 조금 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긴 호흡을 지녔던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겸손했고, 우리보다 조금 더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반영억신부-


사랑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사랑함으로써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세상의 종말에 있을 심판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리 준비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종말에 심판이 올 것이지만 준비하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1고린 3,13)이기 때문에 준비한 사람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코린4,5).

 

오늘 복음을 보면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가 명백하게 구분되는 순간은 한밤중에 신랑이 도착하고 나서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정말로 선한 사람이 누구인지 악한 사람이 누구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듯이 착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어리석어도 속이 꽉 찬 사람, 충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12,14).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입니다”(마태3,12). 따라서 우리는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는 날 잡아서 한꺼번에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매 순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연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여인들은 기름을 넉넉히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여인들은 기름이 모자랐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복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실천하느냐? 아니면 내 뜻대로 행동하고 내 뜻을 관철하려고 하는가에 기름준비를 한 사람이 판별됩니다. 그러므로 기름이 모자랐다는 것은 “주님, 주님”하고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고백에 따라 생활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앙생활만이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깜박 잠이든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왔습니다. 잘 준비하고 있다가 잠시 한눈판 사이에 오고 말았습니다.‘하필이면, 그때 올게 뭐람!’ 그러니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김유신 장군은 말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생집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어야(마태25,13)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8절-9절에서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준비하는 것입니다. 준비한다는 것, 또한 깨어있음을 말해줍니다. 가장은 가장으로서, 엄마는 엄마로의 역할이 있고, 자녀는 자녀로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 역할에 충실하면,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제 아내가 신부님께 하는 것에 반만 저에게 해도 행복이 넘칠 것입니다.’하셨습니다. 신부에게는 예의를 갖추고 잘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아내에게, 남편에게, 어른께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공로가 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부모님께 해야 할 바를 먼저 하십시오.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십시오. 사랑의 실천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1요한4,16-17). 그리고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많은 사람들이 남의 속을 알려고 애를 씁니다. 저 사람의 성격은 어떨까? 어떤 생각을 하고 살까? 저 사람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그는 무엇을 위해서 살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음에도 남의 속을 알고 싶어 하고 궁금해합니다. 정작 알아야 할 내 속은 알려 하지 않고 남의 속만 궁금해합니다. 내 마음이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한지, 그분 마음에 드는지를 먼저 알아야 처신을 바로 하지 않겠습니까? 깨어 있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의 역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속에 대해서 궁금해 말고 먼저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기도 안에 머물기 바랍니다. 그것이 영적인 삶이요 준비된 기름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

1. 와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았다.

2. 못 올 것 같은 사람이 거기 와 있다.

3. 내가 거기 와 있다.

 

 처녀의 비유 

-송영진신부-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5,11-12).”

마태오복음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의 마지막 장면은

루카복음 13장에 나오는 다음 장면과 같습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문이 닫힌 뒤에 온 사람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도 같고,

주인이 “나는 너희를 모른다.” 라고 말하면서

문을 열어주기를 거절하는 것도 같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이 장면 다음에,

주인이 그들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루카 13,26-27).”

그들은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지만, 주님을 외면하고, 또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또 그들은 주님께서 길거리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았을 뿐이고,

그 가르침을 듣지도, 받아들이지도, 실천하지도 않은 사람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그냥 구경만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라고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불의를 일삼는다는 것은 죄 속에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할 자격 자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루카복음 13장의 내용을 ‘열 처녀의 비유’에 적용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신 사람들이고,

또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그것을 구경만 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능동적인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불의를 일삼는 것과 같습니다.)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는 ‘슬기로운 처녀들’은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사랑 실천을 한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반대로, 나중에 저쪽 세상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지금’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슬기로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것은,

또 믿기는 하지만 믿는 대로 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과 같고,

믿고, 믿는 대로 충실하게 사는 것은 슬기로운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마태 25,5-10).”

이 이야기에서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놓고 생각하면,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온

신랑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항의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신랑이 제때에 왔다면 기름이 모자라는 일은 안 생겼을 것이다.

신랑이 너무 늦게 와서 기름이 모자라게 된 것이 아닌가?”

지금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강조하시는 것은 ‘평소의 준비 자세’입니다.

신랑이 늦게 오거나 일찍 오거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 오든지 간에 평소에 늘 준비를 잘하고 있는 사람은 잔치에 들어갈 것이고,

평소에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잔치에 못 들어갈 것입니다.

도대체 신랑은 언제 오는가?

(우리가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는 때는 도대체 언제인가?)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해서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4,50).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회개를 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능동적인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을 해야 할 시간도 ‘바로 지금’입니다.

나중으로 미루면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 적용하면, 상인들에게 가서 기름을 사야 할 때는

신랑이 도착한 다음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다른 이유로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라 기름을 사러 가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문을 닫아버리고,

그리고 그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면,

조금 나무라고 나서 문을 열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재림과 심판에 관한 비유입니다.

심판이 끝나면, 즉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신랑의 도착 시점이 곧 심판 시점이고, 어리석은 처녀들이 그 때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그때서야 기름을 사러 가는 것은, 지옥에 떨어진 다음에야 후회하게 되는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옥에서 하는 후회는 회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뜻으로는, “항상 깨어서 준비하여라. 그 날과 그 시간이

‘지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심판은 모두에게 공평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깨어 기다려라.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가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한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등불을 밝혀 들고 혼인 예복을 입어야 한다.(마태 22,11-14) 이 때문에 전례 주년 마지막 세 주간의 전례는 신자들에게 항구하게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

 

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의 비유

오늘 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체에 있어야 하는 ‘깨어’ 기다림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신랑의 집에서 신부의 집으로 신랑을 기다리던 열 명의 처녀들에 관한 이야기이다(1-4절). 이야기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던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비교이다(6-12절). ‘슬기로움’은 신랑이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등불을 계속 켤 수 있는 기름을 따로 준비하고, 그것이 열 처녀 모두에게는 부족한 양이라는 이유로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하는 것이다(9절). 실제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우리에게나 남에게나 해를 끼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는 처녀들 모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신랑이 늦게 오는 바람에 모든 처녀는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처녀들은 결정적인 방심을 한다. 또한 ‘슬기로운’ 처녀들까지도 깨어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모습은 초기 교회가 가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고 있고, 나중의 자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말한다.

 

등잔불 기름은 준비해야 하지만, 곧 당도할 것 같지 않은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평온한 상태에서 기다리는 상황, 즉 초대 교회 시대에 열화와 같던 기다림의 열망이 누그러져 이천여 년간 교회가 처해오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깨어 기다리는 슬기로운 자세를 잊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면서 ‘평온하게’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분이 언제 오시든지 더 기다릴 수 있는 기름이 잘 준비된 ‘등불’을 밝혀 들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우리에게 매일 매일의 현실에 열심히 참여하며 현실 도피적이거나 터무니없는 교설이나 몽상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를 충실히 삶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적 삶의 의무에 대해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의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거기서도 슬기로움과 미련함을 가늠하는 척도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만이 아니라 ‘행하려고 하는 자세’이다.

 

이 비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의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슬기’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 ‘슬기’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목적이 달성되도록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등불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랜 여정을 위해 충분히 마련된 기름이라는 사랑의 행위가 필요하다. 행동으로 실천되고 깨어 기다림의 자세로 표현되는 사랑에 관한 주제가 이 비유 전체에 ‘혼인’의 개념을 주축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에는 ‘신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지만, 주님을 맞으러 나가는 처녀들이라는 개념 자체에 포함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돌아오심을 혼인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당신과의 결정적인 만남이 기쁨과 사랑의 표징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혼인’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신랑’을 더욱 정성스럽게 마음을 다하여 기다려야 한다. 당황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이어야지 두려움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두려움을 영원히 몰아내셨기 때문이다(1요한 4,18).

 

그러므로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라.”(13절)는 말씀은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속에 삶으로써 언제라도 당신이 원하실 때,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뵐 때, 그분께 합당한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산다면 그분이 ‘한밤중에’ 오시더라도 대낮같이 그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등불이 환히 켜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이러한 평온한 기다림의 자세로 이끌어준다. 사도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상기시킨다. 가)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4,13) 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담보이다(4,14). 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사람들과 살아있게 될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사람들이 더 먼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4,15-17). 여기서 ‘살아있는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4,17절)의 의미는 그들 모두가 주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살아있게 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 대목의 메시지는 ‘위로’(4,18)부터의 메시지요, ‘희망’(4,13)의 메시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 신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정적인 영광의 만남이기 때문이고, 둘째, 신자들의 공동체는 죽음 뒤에 다시 모여 부활의 기쁨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과 항상 함께 있기 위하여”(4,17)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4,18).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고 쓸데없는 생각과 지나친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있지는 못하더라도 다섯 처녀처럼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슬기로움’이다. 이러한 ‘슬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분은 그것을 제1독서가 말하듯이(지혜 6,12-16 참조), 그것을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아주 기꺼이 나누어주실 것이다. 항상 깨어 기다림으로 주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오시더라도 기쁨 중에 혼인의 만남과 같이 맞아들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마라나, 타! 우리 주님, 오소서!”(묵시 22,17)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한상우신부-

등불은
타올라야 한다.

등불은 단풍처럼
타오르는 삶이다.

기도의 등불과
봉사의 기름은
우리 신앙인들의
기본이다.

기본은
교만이 아닌
겸손을
전제로 한다.

겸손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드러나는 복음의
충실한 삶이다.

복음의 삶은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실천의 삶이다.

실천은 반성과
기도를 언제나
포함한다.

신앙인들의
진정한 힘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믿음의 영역은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를 향해
열려있기에
서로를
아름답게 한다.

믿음은
존중이기에
서로를 치유하고
서로를 살립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믿음의 등불은
봉사의 등불이다.

이기적인 판단을
멈추고
함께 살아가는
화해와 협력을
배우며 실천하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는
함께하는
인격으로
드러나는
맑은 사랑이다.

십자가와
함께하는
인격이다.

이렇듯
모든 성장은
성찰과 배움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
열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갔듯이

신앙인의 공동체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성장한다.

하느님 백성의
하나되는
이 여정은

사랑의 본질과
생명의 의미를
깨닫는 여정이다.

여정은
일상을 가리키고
일상은 오늘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삶에서
구체화된다.

평신도들의 행복이
신앙 공동체의
행복이다.

참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의
약함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관계가 기도의
관계이길
기도드린다.

오늘도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신자분들이
나의 스승이며
나의 예수다.

멀리있는
신앙이 아닌
일상에서 가득
펼쳐지는 생생한
신앙, 그 신앙안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바에 대해 들려 주십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4)

복음사가는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를 슬기로운 이 다섯과 어리석은 이 다섯으로 나눕니다. 원래 슬기로운 이들이 마침 기름까지 넉넉히 준비한 건지, 기름을 준비해서 슬기롭다고 불리는 건지 인과관계가 모호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기다리던 바를 얻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마태 25,10)

슬기로운 처녀들의 준비는 하루 아침에 뚝딱 이루어진 일회성 임기응변의 산물이 아닙니다. 슬기는 원하고 사랑하고 노력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깨어 있음은 단지 잔칫집 문 앞에서 졸음을 떨쳐내며 버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깨어 있음은 전 생애 동안 지니고 가야 하는 호흡과도 같은 필수적 내공입니다.

제1독서는 지혜의 특성을 아름답게 풀어놓았습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지혜 6,13)

지혜서는 "지혜"를 마치 사람처럼 의인화해서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지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모든 '계시'와 동일시"된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하지요. 그래서 지혜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현하고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예시한다고 봅니다.

지혜는 자신을 드러내고 나누기 위해 역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십니다. 지혜를 찾고 갈망하는 이를 먼저 알아보고,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당신을 보여주시지요. 지혜를 알고자 하는 마음은 세상 표면 위로 흘러가는 질서 이면에 어떤 심오한 이치와 원리가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허락됩니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지혜 6,15)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지혜 역시 어느 한 순간 즉흥적인 호기심이 발동해서 불러 본다고 얻어지지 않습니다. 지혜가 나지막이 말을 건넬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껴안을 수 있는 힘은 영혼이 지혜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상태에서 발휘됩니다. 이것이 곧 깨어 있음일 것입니다.

제2독서는 삶에서 죽음으로, 곧 삶에서 새 삶으로 이어지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1테살 4,13)

우리 모두는 누구도 예외없이 언젠가 주님의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지상에 사는 동안 깨어 있으면서 지혜, 슬기를 얻은 이에게 그 건너감은 새로운 행복의 시작이 되겠지요. 평생 갈망하고 그리던 신랑과 함께 영원한 혼인 잔치에 들어갈 것이니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 뛰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7)

오늘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간 복음 속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신앙과 사랑으로, 성체와 말씀으로 늘 주님 현존 안에 머물던 우리가 마침내 삶의 질곡과 고통에서 벗어나 가장 순수한 영혼으로 가장 아름다우신 그분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얼마나 큰 행복을 부르는지요!

몰라서 그토록 두렵고, 또 그토록 기대되는 행복의 "그 날과 그 시간"을 기다리며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설렘으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지만, 깨어 있기 때문에 지혜와 슬기가 우리 영혼의 등잔 안에 차오릅니다. 사랑의 불은 이 기름으로 타올라 빛을 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제 전례 주년으로 이 한해가 두어 주정도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 주님 향한 사랑의 불을 밝혀 줄 지혜를 얻기 위해 깨어 갈망하며 애쓰시길 기원합니다. 지혜께서 우리 집 문간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묵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지혜를 발견하고 얼싸안는 기쁨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고인현 신부 OFM-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기름과 등불을 비유로 들면서 어떻게 깨어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등불은 그 불빛으로 인하여 어떠한 생존 즉 하느님과 인간의 현존을 상징합니다. 인간의 영은 하느님의 등불처럼 창조 되었다고 잠언은 얘기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안에는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하느님께 충실하며 또한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표시로 지성소 안에 언제나 등불을 켜 놓았습니다. 등불이 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하느님을 저버렸다는 표시었습니다.
구약에서 기름은 밀과 포도주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부르게 하신 중요한 음식의 하나였습니다. 또한 기름은 하느님의 축복의 여부를 나타내는데 그것이 모자랄 때에는 불충실에 대한 처벌이 되고 넉넉할 때에는 구원의 표지와 종말론적 행복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기름은 흉년이 들었을 때도 일용식품일 뿐 아니라 향유로써 몸을 향기롭게 하고 사지를 튼튼히 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등불입니다. 다시말해서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은 하느님의 등불을 끄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등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는 등불의 원천인 기름이 잘 준비되고 유지되어야 합니다. 기름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쁨과 평화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사랑을 느끼고 일상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하느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내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입니다. 시련과 고난 그리고 비참함 가운데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 상태를 성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 토마스는 참된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중의 하나를 기쁨이라고 말하고 이 기쁨은 하느님의 선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면 기쁘지 않을 수 없고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행복해질 때 하느님의 평화와 선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기쁨을 잃지 않고 늘 내적 평화를 간직하고 하느님 사랑안에 늘 머무는 삶을 살아나가는 사람은 늘 깨어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이 닥치더라로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는 항구한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11월 영적 수련 성월 2주간 용서/화해☨
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2-9장
☨일요일 성체의 날☨
<스테파노 M 마넬리의 성체성사에서 만나는 예수님 사랑>
란치아노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
기적의 성체는 처음에는 성당 앞부분의 큰 제대 옆에 위치한 소성딩에 보관되었으나. 1636년에 성당 중앙부 옆에 있는 소성당으로 옮겨졌고. 1902년부터는 새로 만들어진 기념 제대 위에 보관되고 있다. 순례자들은 두 줄의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서 이 기적의 성체를 공경할 수 있다.
12세기가 지난 지금도 살 모양의 성체는 불그스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래된 수정 성작 안에 담겨 있는 성혈은 다섯 개의 핏덩이로 남아 있다. 전체 무게는 16 .5g이고, 얼핏 보면 빛이 바랜 것 같은데, 밝게 하여 보면 황토색에 가까운 색을 띠고 있다.
이 기적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퍼져갔으며, 1971년에는 과학적 검사에 이어 장엄한 공인(公認)이 있었다. 1574년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관할 주교들의 인정이 있었으나, 1970년과 1971년에 해부학, 병리 조직학, 화학 및 임상 현미경학 교수이며, 아레초 병원의 수석 의사였던 오도아르도 리놀리가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맡고 있던 수사신부들의 요청에 따라 기적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조사를 시행했다.
검사는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리놀리 교수가 기적의 성체와 성혈의 샘플을 채취하여 아레초 병원의 실험실에서 검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리놀리 교수의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샘플이 채취된 것은 1970년 11월 18일이었는데, 그 지리에는 란치아노의 패란토니 대주교가 침석했다. 아브루치 지방의 콘벤투알회 및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관리하는 수도회 전체가 페란토니 대주교의 관할하에 있었던 것이다.
오전 10시 15분에 대주교는 자신의 선임자였던 프란치스코 페트라르카 주교가 1886년에 봉합했던 함을 다시 열었다. 교수는 성체에서 20mg 정도의 아주 작은 샘플 두 개를 채취했으며, 성혈에서 318mg을 채취하였다.
리놀리 교수는 거의 3개월에 걸쳐서 그 샘플들을 조사하였다. 그는 검사 기간 동안 시에나 대학교의 인체 해부학 교수였던 유명한 로저 베르텔리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1971년 3월 4일,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그 성딩에 수많은 학자들이 모였으며, 그곳에서 리놀리 교수는 그의 분석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는 구두 설명과 함께 수많은 사진들과 문서들을 제시했다.(173)

연중 제32주일-2017   

-김찬선신부-

 

연중 제32주일의 주제는 지혜로서 1 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


그리고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지혜에는 여러 가지 지혜가 있습니다.
신 김치 먹는 법이나 콜라를 이용해 창을 닦거나 녹슨 볼트를 푸는 법을
아는 것과 같은 생활의 지혜라는 것이 있지요.
인터넷을 뒤지니 1300가지의 생활의 지혜 모음집까지 있더군요.
이런 생활의 지혜를 많이 알고 있으면
쉽게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고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요.

이런 지혜보다 우리가 지녀야 할 더 중요한 지혜가 있습니다.
사리 분별과 상황대처의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리 분별과 판단이 안 되어
먼저 할 일과 나중 일이 뒤바뀌고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
더 가치 있고 덜 가치 있는 일이 뒤바뀝니다.

예를 들어 젊었을 때는 돈 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물불 가리지 않고 일을 하는데 그러다가 건강을 잃고 난 뒤에야
건강을 잃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건강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런가 하면 저같이 프란치스칸으로서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칸 가난이 아무리 중요해도 어디까지나 가난은
사랑을 위한 가난이고 형제애보다 더 중요한 가난이 아닌데
사랑보다 가난을 더 중시하여 어리석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이 말하는 지혜는 좀 특별합니다.
종말론적인 지혜와 인격적인 지혜에 대해 얘기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삶과 죽음과 영원이 아닐까요?
젊었을 때는 돈이 중요하고 연애가 중요하고,
나이를 먹으면 그런 것보다 건강이 중요한데
더 나이 먹어 죽게 되면 영원이 중요하겠지요.

그리고 영원을 살고자 한다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도 사랑이 중요하고 인격적 관계가 중요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하느님 사랑이 중요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하겠지요.

죽음을 앞두고는 정말로 하느님과의 관계와 인격적인 사랑이 중요합니다.
어머니가 저에게만 말씀하셨을 것 같은데
저의 어머니는 생전에 몇 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두 살 때 저희 6남매를 남겨두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니도 건강이 아주 좋지 않으셨는데
저희 아버지는 자식 걱정도 없으신 듯,
6남매를 아내에게 남겨두고 가는 것이 미안하지도 않으신 듯
당신이 죽고 나면 당신을 위해 미사 100대를 드려달라고 하셨답니다.

이 얘기를 여러 번 하시며 어머니는 아들이 사제가 되었으니
이런 아버지의 바람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아버지가 무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 먹어 지금 생각하면 지금 여기서 살 때는 지금 여기서 열심히
사랑해야겠지만 천국 길 떠날 때는 이런 사랑 다 놓고 떠나야겠지요.

이것이 영원을 위한 종말론적이고 인격적인 지혜입니다.
이때는 아무리 중요한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다 놔야 합니다.
오직 죽음과 함께 영원으로 오시는 주님을 슬기로운 처녀처럼
사랑과 갈망의 기름을 가득 채운 등을 들고 맞으러 나가야겠지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