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3일 연중 31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11. 2. 06:12

2020 11 3일 연중 31주간 화요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루카 14,15-24)
 


For, I tell you, none of those men

who were invited will taste my dinn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하느님의 초대와 그것에 대한 거부는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주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사람들은 그 초대에 기쁘게 응답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초대와 사람들의 거부를 주제로 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언제 열리는지 미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준비되었을 때, 때가 되었을 때, 주인은 이미 초대받은 이들에게 잔치에 오라고 알리지만 사람들은 초대를 거부합니다. 이미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을 사고, 겨릿소를 부리고, 장가를 들었다는 다양한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처음에 초대하지 않았던 이들을 불러 그의 집을 가득 차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처음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던 유다인들이 아닌 다른 이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어떻게 포함되었는지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초대하셨고 우리는 초대받은 사람들이지만 초대받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때가 되었을 때, 하느님 나라가 준비되었을 때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유가 말하듯이 그 시간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준비와 응답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지금 초대에 준비하고 응답하기 위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우리가 제대로 응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레몬즙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과일을 짜야 할까요? 오렌지나 사과로 레몬즙을 만들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레몬즙을 내기 위해서는 레몬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즙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따라 그것이 내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행복’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이, ‘기쁨’을 가지고 있으면 기쁨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슬픔’을 가지고 있다면, 또 ‘화나 증오’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스스로는 행복해지고 싶어, 기뻐하고 싶다고는 말하지만 불가능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이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누구도 당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없다.”

내 안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열등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마음보다 긍정적인 마음이, 세상의 것보다 주님의 것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의 말처럼, 지금을 사는 우리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동은 그렇지 못합니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 세상일이 가득 차 있어 잔치에 올 수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잔치에 가겠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가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자기 안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을 하나도 간직하지 않으면 초대에 응할 수가 없게 됩니다. 계속 핑계만 댈 뿐입니다.

이제 주인은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자리가 남아 있다고 종이 말합니다. 이제 주인은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서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라고 하지요.

세상 모든 민족을 품으려는 예수님의 바람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세상의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자신의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는 핑계 대지 않고 주님의 초대에 기쁘게 응답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으면서 커다란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남을 위한 인생을 살 때, 가장 감동적인 인생이 되는 것은 나는 반대한다(헬렌 켈러).


인생의 문장에서 주어는?

인생을 문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문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주어입니다. 주어에 따라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물론 내가 주어가 되어서 주체적인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만 주어가 되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이 어떻습니까?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가 떨어지며, 본인 자신이 무엇을 성취해도 공허함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어가 되면 어떤지를 많은 성인·성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어의 위치에 있게 되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주어가 되면 시야가 넓어지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또 이 안에서 커다란 만족감과 행복을 찾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 정답을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성인, 성녀를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맞이하면서, 내 인생에서 누가 주어의 위치에 있을 때 하늘나라에서 행복할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더 많이 실망하기 위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을 초대한 한 바리사이 지도자 집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부자이기에 특별하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교만’이 그들 구원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식탁에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었지만,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무도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밭을 샀다고, 어떤 이들은 소들을 사서, 또 어떤 이들은 결혼했기 때문에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세상 것들이 하느님 혼인 잔치 초대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화가 나서 길에 있는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 눈먼 이들과 다리를 저는 이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초대에 응하는 사람이면 모두 데려와 잔칫상이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보다 세상 것들이 자신을 더 영광스럽게 해 줄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많은 실망’입니다. 이것을 통해 인생무상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힘에 의지하지 못하게 되고 주님 초대에 ‘감히 내가?’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30세 초반에 엄청난 영토를 정복하고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만큼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인생무상을 깨달았고 그래서 가장 비천한 이들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로 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 번의 눈물로 익어갔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익어가야 합니다.

      한번은 그가 페르시아 원정을 하였을 때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묘비를 보고 울었는데 “인생이 아무리 한때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은 한 개의 무덤밖에 남기는 것이 없으니 허무하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인더스강 강가에서 인더스강만 건너가면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데 자신의 몸이 따라주지 않고 지친 부하들도 따라주지 않고 다시 돌아가야만 할 때 거기서 목놓아 울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부하들과 모래사장에서 씨름하다가 넘어졌는데 넘어진 그 자리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렸던 부하가 하도 무안해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부하에게 져서 원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모래사장에 넘어진 자국을 보고 내가 지금은 이렇게 큰 나라를 가지고 부귀 권세를 누리지만 나도 죽으면 한 평의 땅속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니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냐고 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정복만 하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쓰러뜨린 부하도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나 자신을 쓰러뜨린 사람이나 다 한 무덤만 남기는 그런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결국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없이 깨지며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작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고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내가 세상 모든 것들이 허무하여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느낄 때 비로소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을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주님께서 나도 그렇게 초대하고 계심이 보이게 됩니다.

 

      저는 저의 대학 친구들을 계속 만나며 그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봅니다. 처음엔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사업을 하여 사회에서 잘 나가고 멋진 아내를 얻는 모습에 의기양양했습니다. 이때는 서로 바빠서 친구를 찾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십여 년 넘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사업의 한계를 느끼고 명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고 배우자와의 사이가 벌어지자 우리 친구들은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겸손해지자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이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안에는 자녀들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녀들이 그들처럼 뛰어난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이 자녀에게도 실망하여 자신의 기대를 채워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가난한 사람도 보이게 되고 하느님도 찾게 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배에 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자신들을 크게 만들어줄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런 것들을 지푸라기처럼 여겼습니다. 어차피 홍수 한 번이면 다 쓸려버리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품을 줄 알게 됩니다. 주님은 또 그런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더 많이 깨져서 더 겸손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사람은 다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도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가난하고 다리를 절며 눈이 먼 장애인 중의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요즘 재미있게 보는 지정 생존자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전직 대통령이 대통령 대행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도자는 상황에 반응하기보다는 상황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경험이 없는 대통령 직무대행은 상황을 이끌기보다는 상황에 반응하기에 바빴기 때문입니다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사목계획을 세우고미리 예산을 책정하고피정을 통해서 1년을 준비하면 상황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처음 본당으로 부임하면 상황을 이끌기 보다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본당 신부도 신자들과 공동체의 상황에 익숙해져야 했고교우들도 본당 신부의 사목 방향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코로나19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상황에 이끌리기보다는 상황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시민들이 국가의 방역 정책인 거리두기마스크 착용손 씻기를 잘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한국의 방역은 3T에 있었습니다. “조사(Trace), 검사(Test), 치료(Treatment)"입니다광범위한 역학조사를 통하여 대상을 선별하였고신속하게 검사하였고치료하였습니다코로나19라는 상황에 이끌렸던 나라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았고무증상인 사람도 많았고조사의 범위를 넘어서면 검사하거나치료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직무대행은 전직 대통령에게 국무장관의 직책을 제안하였습니다전직 대통령의 월권이 있을 수 있고전직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의지한다는 부담도 있었지만 국가의 상황이 위급했기 때문에 부탁하였습니다전직 대통령도 새로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국가의 최고지도자였던 사람이 대통령 직무대행에게 명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 자존심이 꺾일 수도 있었지만 국가의 상황이 위급했기 때문에 받아들였습니다직책과 직위가 사람의 인격과 인품을 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 신부로 있다가 보좌 신부의 직책을 받아들이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오랜 사목 경험이 있기에 본당 신부를 도와서 기쁘게 사목을 하였습니다교우들도 신부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잘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직책은 보좌신부이지만 인격이 보좌신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사제는 모두 직책에 관계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목자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직책과 직위로 인격과 인품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교구 사제들도 훨씬 풍요로운 사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젊은 사제들에게 더 많은 사목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자존심과 선입견을 버릴 수 있다면교만과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상황에 반응하며 이끌리기 보다는 상황을 예측하고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신앙인은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 받지 못하는 사람을 안타까워하십니다현실에 안주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교만과 선입견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상황에 이끌리기보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이끌 수 있다면순종과 겸손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고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멸망과 죽음의 길에서 되돌리려고 애쓰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양승국신부-

 

지하 상가를 지나가던 중, 제 눈길을 ‘확~’ 끄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한 상점 가판대에 감색 양말 몇 컬레가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딱 제 취향이라 7컬레를 몽땅 들고 계산대에 섰습니다.

  

안그래도 신고 있던 양말들이 여기저기 빵꾸들이 났었는데, 잘 됐다 싶어, 지불할 금액이 얼마인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아니 글쎄, 마음씨 좋게 생기신 사장님으로부터 복음 말씀 만큼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총 만 오백원입니다!”

  

지나치게 양호한 가성비에 저는 잘못 들었나 했습니다. 혹시나 잘못 계산하셨나 해서 재차 여쭈어봤지만, 대답은 똑같이 만오백원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게 웬 횡재냐?’ 했습니다. 잠깐이지만 큰 행복을 맛본 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지상생활을 마치고 마주할 하느님 나라에서도 비슷한 체험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권세가들이나 지도층 인사들은 마음 속으로 다들 이런 확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라 그래! 평생 성전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기도했지, 매일 율법을 공부했고 철저히 준수했지, 내게 있어 천국과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라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백퍼센트 천국!’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교만과 허세로 가득한 그들에게 단호하면서도 명명백백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이 위선자들아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에 앞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은혜롭게도 정 반대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같은 죄인들입니다. 매일 자신의 한계와 악습 앞에 가슴을 칩니다. 주님 앞에 감히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한탄합니다.

  

“나 같은 큰 죄인, 나 같이 흠집 많고 악한 사람에게 천국은 무슨 천국? 연옥이라도 감지덕지! 그저 믿을 구석이라고는 무한하신 주님 자비와 은총뿐이랍니다.”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은 조만간 깜짝 놀랄 상황 앞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자비하신 주님과 성모님과 무수한 성인성녀들이 그들을 환영하고 축하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왔다! 진심으로 환영한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 놀라운 광경, 그 뜻밖의 선물 앞에 우리 모두 크게 외칠 것입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이게 웬 횡재냐? 하느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큰 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루카복음 14장 23절)

  

“어떻게 해서라도!”라는 표현이 제 가슴을 쿵 하고 크게 쳤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를 찐하게 느낄 수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멸망과 죽음의 길에서 되돌리려고 애쓰시는 하느님,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당신 푸른 목장의 건강한 양떼로 양육하시려고 노력하시는 하느님,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당신 나라에 들게 하시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영근신부-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들은 먹는 것을 찾아다니는데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TV에서도 인터넷 주요 검색 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이 “맛 집” 입니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맛 집”에 차려진 음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혀의 유쾌함을 넘어서, “참된 맛”을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최상의 “맛 집”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라는 “맛 집”에서 먹는 음식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곧 구원의 천상음식을 먹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초대되어, 바리사이 지도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 메시아사상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큰 잔치를 베풀 것인데, 그 잔치에는 유대인 자신들만이 초대받았기에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큰 잔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를 초대하신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라면, 잔치에 사람들을 부르러 나간 “종”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종”이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초대된 이들에게 잔치가 다 준비되었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이미 초대에 약속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시간이 되자~,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라고 전하게 하였습니다.”(루카 14,17). 그러나 그들은 밭이나 가축을 샀고, 막 장가를 들었다는 핑계로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본다면, 이들은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리사이들이요, 유대교 회당의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세속의 헛된 망상에 쏠려 이 귀한 초대를 거절합니다.

이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할 복음 사명에 대해 자신의 일을 핑계로 도외시하는 우리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일방적으로 불참을 선언하고 마는 우리의 완고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초대된 사람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연되거나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주인은 또 다시 “종”을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보냅니다. “고을의 한길”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면, “골목”은 소외된 사람들이 은밀히 다니는 길을 나타냅니다. 그리하여, 지도자들이 아니라, 일반 평범한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 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들은 비록 인간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밭이나 소를 사지도 장가를 가지도 못했지만, 주인의 배려와 사랑에 응답하여 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또 다시 주인은 “종”을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보냅니다. 곧 성 밖으로 보내어, 그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오게 하라고 합니다. 주인의 애타는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성 밖의 다른 민족들이 초대를 받고 잔치에 들어갑니다.

결국,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를 무시하는 무례를 범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이 존귀한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의 호의를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루카 14,17)

 

주님!

당신은 잔치에 음식을 준비하시고, 저희를 부르십니다.

저희가 준비가 되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준비되신 까닭입니다.

당신의 사랑, 당신의 호의에 응답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당신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당신이 차린 음식을 먹게 하소서. 아멘.


이리로 데려오너라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닥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았는데 사정이 생기면 양해를 구하고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맞습니다. 밭을 샀으면 밭에 나가보는 것이 당연하고, 겨릿소를 샀다면 그 소를 잘 샀는지 부려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방금 결혼을 했다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가야 할 잔치집이 생겼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 마련되었습니다. 그 잔치에 초대를 받은 것이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핑계가 필요합니까? 더 좋은 것, 지금까지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가 눈앞에 주어졌는데 왜 망설여야 합니까? 결국, 지금까지 기다리고 희망하던 것은 헛된 환상이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 것이 더 좋은데 그것을 어떻게 놓고 가라 하십니까?

그러나 “나 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도 나 없이 나를 구원하실 수 없으십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갖는 한, 구원의 잔치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선인지를 잘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면 나머지는 다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택하면, 하느님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14,24). 결국, 처음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재산과 사업상의 관계, 결혼이라는 핑계거리로 말미암아 구원의 문에서 멀어졌습니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외면하였습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좋아했습니다. 그야말로 배가 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입니다. 그런데 헛배가 불러서 스스로 배부르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있어서 걱정입니다. 스스로 배부른 착각에 빠져 죽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데려 오너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초대에 응답해야 할 사람입니다.

뿌려진 씨앗의 비유(마태13,1-9)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이 어떤 것은, 길바닥에, 어떤 것은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은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밭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무관심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돌 밭은 흙이 얼마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시련 어려움이 오면 금방 신앙이 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핑계를 대던 사람들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말고 매 순간 하느님 앞에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안녕을 열망하며 그것을 너무 많이 고려하다가 그만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돌다리를 두드려보다가 오히려 돌을 깨뜨리고 만다고!’. 잔머리를 굴려 계산하지 말고 하느님을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함께 모여야 할 자리를 기억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느님 나라의 

-송영진신부-


1.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바로 우리를 위한 잔치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하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주려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이사 55,1-3).”

2.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바로 우리 자신이 원하고 희망하는 잔치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2-3)”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것은 아니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 잔치를 믿지 않거나

그 잔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가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스스로 원하고 희망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시는 분이 아니라,

초대하고, 권고하고, 설득하고, 타이르시는 분입니다.)

3.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더라도

초대에(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이유로 미적거리다가 기회를 잃으면 못 들어갑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한 번 문이 닫히면 아무리 후회하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기다려 주시는 시간인데,

‘주님의 기다림’이 언제까지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루카 14,16-20).”

 

이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는 것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그 잔치에서 누리게 될 영원하고 참된 기쁨과 행복보다는

눈앞의 일들이 주는 즐거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새로 사들인 밭을 보는 데에서 큰 기쁨을 느낀다. 나는 새로 산 겨릿소를

부려보는 데에서 큰 행복을 느낀다.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고,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는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다.”

그들이 그런 일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작은 즐거움에 취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하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외면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부디 양해해 주시오.” 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 잔치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또 그 잔치가 자기들을 위한 잔치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양해해 달라는 말은 손님이나 하는 말이지 주인공이 할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하느님 쪽에서 인간들의 참석을 아쉬워하는 잔치가 아니라,

인간들 쪽에서 하느님의 초대를 갈망하고 기다리는 잔치입니다.

아쉬워하는 쪽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예수님 쪽에서 뭔가 아쉬운 것이 있어서

하신 일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입니다.

(비유의 세 번째 사람은 양해해 달라는 말도 안 하는데, 그의 태도는

초대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고 꾸짖는 것 같은, 대단히 오만한 태도입니다.)

단순히 ‘몰라서’ 그러는 사람들 경우에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시지 않고, 구원의 길과 진리를 가르쳐 주셨고, 타이르셨고, 설득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을 듣고서 믿고 회개한 사람들도 많지만,

자기는 모든 진리를 잘 알고 있다고 잘난 체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잘난 체 하면서 구원의 진리를 안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4,21-24).”

 

여기서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중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라고 유대인들이 멸시했던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나중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의 대타나 대역이 아닙니다.

복음 선포의 순서가 그렇게 된 것일 뿐이지,

지금의 우리는 유대인들 대신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고, 응답하지 않으면 못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고, ‘모든 사람’을 부르시지만,

응답은 각자의 선택에 맡기십니다.

다음 말씀은, 응답하기를 거절한 사람들 모두에게 하시는 경고 말씀입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루카 13,28).”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4,15-24: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시어 말씀하신다. 여기서 하늘의 음식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증거된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실제로 하늘 음식이며 말씀께서 베푸시는 잔칫상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7-8)

 

다른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1코린 13,7-8) 사랑은 이 모든 맛 좋은 양념과 함께 하늘에서 땅으로 한결같이 내려오고 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모든 법과 말씀이 사랑에 달려있다(마태 22,40).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마르 12,30-31) 하늘에 마련된 잔칫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잔치는 대단한 잔치이다. 이 거룩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이들의 기쁨과 평화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먹으면 몸 밖으로 나오고 마는 그런 음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을 먹는다. 누가 여기 앉을 수 있을까? 그 거룩한 잔치에 초대받는 복된 사람은 누구일까?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15절) 그 사람은 누구일까?

 

깨끗하게 씻기고 이 거룩한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성화한 사람도 다시 더러워질 수 있다. 어떻게 다시 더러워지는가? “자기를 거룩하게 해 준 계약의 피를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은총의 성령을 모독한 자”(히브 10,29)는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 22,12)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잔치를 차리고 우리를 초대하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사람들을 부르러 간 사람은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아드님은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17절) 하고 손님들을 부르신다. 이 잔치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신 선물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셨고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18절) 그들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때문에 핑계를 댔다. 사람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일은 보지 못하고 있다. 밭 때문에, 가축 때문에, 자식을 얻으려고 초대를 거절한 그들은 재물이 많은, 그래서 힘들여 이익을 얻는 데 온 마음이 가 있는 탐욕의 노예이다.

 

집주인은 건방진 부자들에게서 다른 민족들에게로 돌아선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 초대를 가볍게 여겨 거절하였고, 그 초대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게로 옮겨서 갔고, 이어서 다른 민족들이 초대를 받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떤가?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루카 14, 23)

-한상우신부-

고운 단풍잎은
마치 하느님
잔치의 예쁜
초대장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대는

하느님
잔치의
초대이다.

하느님 외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필요로하는
우리들 삶이다.

용서의 잔치와
욕심의
정글 사이에서
아직도
우왕좌왕하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가
부여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반성게 된다.

여전히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우리들
신앙이다.

하느님
은총으로
가득 찬
시간을
살면서도

하느님을
외면한다.

모두가
초대 받았으나
모두가
잔치 음식을
맛보지는 못한다.

안타까운
초대이며
아픈 초대이다.

이 세상의
욕심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어리석은
우리들 모습이다.

끝내 마지막까지
거절할 수 없으며

가장 마지막까지
초대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가득 넘치는
사랑이다.

세상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시간일 뿐이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하다.

그 영원한
사랑을
향해 마음을
돌릴 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주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어떤 사람이 기쁨에 차서 고백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나누는데도 이렇게 행복한데,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그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비유의 줄거리는, 어떤 사람이 베푼 잔치에 먼저 초대되었던 이들이 참석을 거부하자, 결국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빗댄 비유지요.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참여함을 행복과 영광으로 여긴다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네가 정말로, 네가 말한대로, 정말로, 정말로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고백하면서도 관심사와 방향은 다른 것을 추구하는 피상적 신앙인지, 잠시의 감동과 흥분으로 떠들다가 이내 사그라지는 떠버리 열성인지 스스로 깨닫도록 하시는 겁니다.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루카 14,21)

처음 초대된 이들이 거부한 자리에 다른 이들이 불리웁니다. 겉모습와 능력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한없이 낮추어진 이들입니다.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루카 14,22)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나라로 우리 모두를 데려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죽음을 걸고 목숨을 바쳐 그렇게 하시지요. 그분께는 여전히 빈 자리가 많이 남아 보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하느님 나라 안에 우글대며 잔칫상을 채우고 기뻐 떠드는 우리 모습이 그분의 눈에 선하신 겁니다. 아직도 우리에 대한 그분의 허기와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루카 14,23) 

우리의 참여를 갈망하는 정도는 하느님 아버지도 예수님 못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역시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가 당신 나라에서 한 식탁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강요는 않으시지요. 완력으로라도 억지로 당신 뜻을 이루는 분이셨다면 처음 초대받은 이들에게 그리 간단한 이유들로 등돌림 당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을 향한 주님의 구애가 자주 실패처럼 보이는 이유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그리스도의 겸손은 스스로를 낮추어 아버지께 순종하는 이가 되심으로 드러납니다. 또 그분의 사랑은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심으로 드러나지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과 사랑으로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탁월한 중재자가 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3)

바로 그 마음! 겸손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고, "아직 자리가 있으니 들어오렴" 하는 환대의 마음입니다. "괜찮으니까 주저하지 말고 이리 들어오라"고 손을 내미는 자비의 마음이지요.

주님의 집은 가득 차야 합니다. 주인이신 아버지께서 그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도, 주님의 마음에도, 하느님 나라에도 우리를 위한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억지로 끌고가지는 않으시지만, 간절히 참으로 간절히 우리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 식탁의 행복을 고백했던 복음 속 어떤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정말로, 인사치레나 허세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을 갈망하는 이였을까요? 비유 속 첫 손님들처럼 주님의 초대를 밭(재산)이나 겨릿소(일)나 장가(육적 사랑)보다 헐한 가치로 넘겨버리지는 않을 사람이었을까요? 그 대답은 우리 각자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 사랑의 초대를 받고도 번번이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는 우리에게 오늘도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속삭이십니다. 
"여기 내 마음 안에 아직 자리가 많아 남아 있단다. 어서 들어와 네 자리를 차지하여라. 내 마음을 자치하여라!" 우리 모두, 힘껏, 주님 안에 마련된 자기 자리로 달아듭시다. 거기서 사랑에 취해 머무릅시다.

진정한 마음수련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660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6일 연중 31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