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2020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루가 14,7-11)
For 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but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예전에 어느 선배 신부님이 다음과 같은 묵상 내용을 나누어 준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땅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모든 것이 너무나 작게 보이고 하찮게 보입니다. 신부님은 이를 보면서 ‘세상에서 목에 힘을 주고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을 이처럼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반면 비행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땅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산, 강, 건물, 자동차 등 모든 것이 분명하고 크게 보이며, 각각의 형태를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늘에만 머무시지 않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를 작게만 보시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잘 아시고자, 더 잘 이해하시고자 내려오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되시는 겸손을 갖추셨던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낮은 자리는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 필수적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정녕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을 낮추시어 그들이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이끄시고,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을 높이시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음을 겪으신 당신과 함께 부활의 삶을 누리도록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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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당연히 해킹했을 리가 없지요. 그분을 잘 알지도 못하고, 이런 사연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분이 간과한 것은 자기 생각을 남도 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경험만이 아닌 남도 할 수 있는 경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 매번 특별한 고백이 이루어질까요? 다 비슷합니다. 나만 특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두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비슷한 삶을 살 뿐이었습니다.
모두가 비슷하다는 생각, 이 생각이 있어야 이웃과도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연인들이 어떤 말로 헤어질까요? 대부분이 이런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 달라.”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공통점을 찾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겸손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추구하지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특별한 자리를 인정해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허영은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그보다는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의 삶을 본받으라고 권면하십니다. 이렇게 스스로 낮추는 모습은 주인으로부터 올림을 받아 영광스럽게 된다고 하십니다.
또,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앉으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온전하게 실천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철저히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높이는 삶이 아닌 낮추는 삶, 차이점을 찾는 삶이 아닌 공통점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리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신 주님께서 결정해주심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주님 말씀에만 충실히 따라야 합니다. 온유와 겸손의 길을 따를 때 비로소 주님과 온전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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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된 아이의 언어 이해력을 평가하는 문제입니다.
“청소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리고 바닥에는 많은 사진이 펼쳐져 있었지요. 펼쳐진 사진 속에서 정답을 찾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이는 과연 어떤 사진을 선택했을까요? 청소기였을까요? 하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사진을 찾더니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답이 없어요.”
청소기 사진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답이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아이는 아무리 봐도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답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먼지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먼지가 있어야 청소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틀린 답일까요? 아닙니다. 이 역시 맞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먼지가 있어야 청소기도 필요하겠지요. 3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서도 진리를 배웁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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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집중하였고 그들은 과거의 율법 조항에 집중하였습니다. 사람이 꼰대가 되는 이유는 현재와 이웃사랑의 가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잔치에 초대받거든 항상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과거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교만’이 사람을 꼰대로 만든다는 것을 알려주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이웃사랑에만 집중하려면 나 자신만 생각하는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해지려 해도 잘 안 됩니다. 어느 순간엔가 윗자리를 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겸손이 힘들까요?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 더 행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겸손은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아니면 겸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조금씩 겸손하여지라고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의 가치를 오히려 교만으로 여겨 그냥 무시하고 흘려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 한 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불자들을 부를 때 ‘보살님’이라고 부릅니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구도자를 말합니다. 보살은 어찌 보면 부처가 되기 직전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이 불자들을 들어 높이며 자신들이 먼저 합장하고 불자들에게 인사합니다. 우리로 치면 신자들을 거의 예수님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스님들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아서 자신을 보살이라고 믿게 되면 교만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을 보살이라 불러주지 않으면 스스로 그렇게 불림을 받으려고 명성을 구걸하게 됩니다. 그 비굴함이 나중에 스스로 자신을 부처로 만들려는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보살 대접을 받으면 오히려 합당하지 않다고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고 더 보살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신자들을 부를 때 ‘성도님’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성불이나 같은 뜻입니다. 불교에서 부처가 되면 성불한 것이고 개신교에서 그리스도가 되면 성도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성인입니다. 신자를 부를 때 이미 ‘성인’이라고 여기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신교 목사님들은 교회를 ‘섬긴다’라고 말합니다. 성인들을 당연히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가 자신을 성인으로 섬겨준다고 교만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아무도 성인으로 여겨주지 않을 때 그 사람 스스로 그렇게 여겨달라고 거룩한 척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남이 보지 않을 때는 모든 죄를 짓고도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물론 천주교도 이 모든 의미를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왠지 신자들을 부를 때는 그저 ‘신자’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믿는 자’라는 뜻입니다. 믿으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런 의미로 쓰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그 앞에 ‘평’자를 붙이며, 스스로 비하하듯이 ‘병신도’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어떤 평신도분이 사제들 앞에서 강의하실 때, 당신들은 사제들과 비교하면 아는 것도 없고 믿음도 부족하니 ‘병신도’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분의 말에서 평신도라는 말이 성직자들이 신자들과의 구분을 두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라는 비판이 담겨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사제들이 신자들을 평신도라고 부를 때 신자들은 겸손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뭐가 잘나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사제들 앞에서 자신들도 사제들과 같이, 혹은 더 나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스스로는 평신도라고 말하며 성직자들과 차이가 난다고 여기는 것이 교만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런 비굴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겸손은 당당함과 함께 가고 교만은 비굴함과 단짝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겸손해지고 당당해집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제가 우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래서 하느님으로 불려도 된다고 말하면 교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이 있어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해도 되고, 또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성체를 하느님이라고 해도 된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데 왜 우리는 하느님이라 하면 안 될까요? 겸손은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당당함에서 나오는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비굴하게 ‘그저 나는 조금 믿는 신자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그것 이상은 살고 있어서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이웃을 높여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살이요 성도를 넘어서 이미 부처가 되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온종일 내가 예수님이라 믿고 살아보십시오.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기 때문에 나도 그리스도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나 자신을 미리 낮추는 비굴함은 오히려 교만으로 표현됩니다. 가난하기만 해서 부자들에게 비굴하게 돈을 구걸하던 사람이 복권이 당첨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비굴해지기를 바랄 것이고 그래서 교만하게 첫 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겸손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그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웃을 하느님처럼 부를 수는 없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리스도나 성체처럼 여겨주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겸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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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잠시 10월 달을 돌아봅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을 한 것은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기도 한 시간들은 적었습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좀 더 웃고, 기도하고, 배려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실수와 잘못은 비슷한 면도 있지만, 차이도 있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면에서 비슷하고, 본인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면에서 비슷합니다. 하지만 실수는 의도적이지 않은 면이 많고, 다른 사람들도 쉽게 이해해 주곤 합니다. 잘못은 본인의 의도와 생각이 있으며, 잘못에 대해서 인정하고,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도 제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이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무수한 저의 실수와 잘못을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실수와 작은 잘못이 아니라, 이웃과 하느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내는 죄를 지었어도, 참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국 뉴햄프셔 주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Live free or die"라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자유롭게 살던가 아니면 죽겠다는 의미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보았는데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가치와 이상의 문제였습니다. 삶과 죽음이 생명이 가지는 본능의 문제라면 가치와 이상은 인간이 가지는 의식의 문제입니다.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이룩하고, 종교와 철학을 통하여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이 세상에 왔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입니다. 인간도 생명이기에 삶과 죽음은 소중합니다. ‘의, 식, 주’의 문제는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로병사’의 틀을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통해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벗어나려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만 있다면 사는 것도 의미가 있고, 죽는 것도 상관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새남터에서, 절두산에서, 서소문에서 순교한 신앙의 선조들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만 있다면 감옥에 갇히는 것도, 매를 맞는 것도,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도, 목숨을 잃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인류가 놀라운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적자생존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살신성인의 이타적인 유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것은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 때문에 흐려진 나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게 비추면 좋겠습니다. 내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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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최선의 태도는 겸손 뿐입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한 거물급 바리사이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음식을 잡수시고 계실 때, 참으로 볼썽 사납고 꼴불견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식사 문화는 독특했습니다. 디귿자(ㄷ) 모양으로 식탁이 길게 배치되었고, 트인 곳을 통해 종들이 음식을 나르거나 서빙을 했습니다. 만찬의 주인은 가장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았고, 손님들은 주변으로 쭉 둘러 앉았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다들 나름 한 가닥, 한 자리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나 봅니다. 누가 율법학교 선배인지, 누가 더 연장자인지, 누가 더 서열이 높은지에 따라, 주인과 더 가까이 앉았습니다.
물론 그런 관례는 오늘날 관료 사회 안에서도 통상적으로 적용되는 문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런 외적, 형식적, 가식적인 관례나 전통을 혐오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자연스러움의 극치, 겸손의 극을 달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서로 정담을 나누고, 서로 삶을 나누고, 서로 친교를 나누는 자리가 만찬 자리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자리에서 조차 ‘누가 높은지? 나는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저 친구는 왜 나보다 서열이 낮은데, 저 위쪽에 앉아있지?’ 하고 신경쓰며 스트레스를 받는 유다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게 보였을 것입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복음 14장 8절, 11절)
생각으로는 쉽지만 삶 속에서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덕이 겸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겸손의 덕은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시작됩니다.
겸손의 덕을 지니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알아야겠지요. 그 다음 단계로 그에 비해 나란 존재는 얼마나 작고 미소한 존재인지를 파악해야겠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나는 지극히 상대적인 존재이며, 필연적이신 하느님 앞에 나는 우연적인 존재입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나는 유한한 존재이며, 무죄하신 그분 앞에 나는 죄투성이인 존재입니다.
이 모든 상황들을 종합해보니 결국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최선의 태도는 겸손 뿐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무상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크신 그분의 은총에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맨끝자리라 할지라도 감사하면서 앉아야겠습니다.
주제넘게 자신을 끝도 없이 올려놓고, 하느님께 속하는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겸손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이며,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겸손의 덕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덕이니, 지상에서 부터 겸손의 덕을 갖추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겸손의 덕은 특별한 사람들만 갖춰야 하는 덕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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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질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각자 “자리” 혹은 “위치”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또한 그 “자리”에 따른 역할과 사명을 부여받아 살아갑니다. 이는 때로는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와 빈부귀천을 형성하고 우월감과 열등감을 건네주기도 하고, 이에 따른 열망은 출세와 입신양명의 성공 페러다임을 만들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8-10)
이 비유 속에서 초대받은 사람의 관심은 온통 “자리”와 타인의 “대우”에 쏠려 있습니다. 혼인잔치의 기쁨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윗자리’에만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초대 해준 사람의 호의에 대한 감사보다, 자신에게 대해주는 “대우”에만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잔치에 초대받은 이에게 중요한 것은 ‘자리’가 아니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요, 자신에 대한 ‘대우’가 아니라 초대해주신 분의 호의에 감사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관심이 쏠려 있는가?
자리와 대우인가? 아니면 호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인가?
혹 초대해주신 하느님의 호의와 자비에 대해 감사드리며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자리와 역할과 대우에 시선이 쏠려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질 것입니다.”(루카 14,11)
그렇습니다. 사람의 ‘높고 낮음’이 자신의 욕심이나 자기추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신 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종결어미는 ‘낮아지고’ 혹은 ‘높아질 것이다’는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곧 높낮이는 자신이 정하거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배정되는 것이며 주어지는 것이요 부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초대한 혼인잔치에는 말씀과 성찬의 밥상이 너끈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이 밥상은 윗자리에나, 맨 끝자리에나, 그 어느 자리에나, 모두 풍성합니다. 그렇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것만으로 이미 행복입니다.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초대하신 분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 밥상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하시어 차려놓으신 밥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밥상을 차리셨듯이, 우리 역시 자신을 내놓아 온 몸을 낮추어 형제들의 밥이 되는 자리에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루카 14,8)
주님!
잔치에는 상이 너끈하게 차려져 있고,
기쁨은 어느 자리에나 차고 넘칩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게 하소서.
감사할 줄을 알게 하소서.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이미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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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사람
-반영억신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가14,11). 주님께서는 몸소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마구간에서 그 낮아진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필리2,7-8).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하신 대로 벌거벗은 채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위엄에 대해 대단히 까다롭게 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특별한 예우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였고 윗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역시 그런 위치를 당연히 차지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혹 누가 만일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에 앉는 척한다면 그는 끝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잘나가는 파리들만 모여 사는 높은 동네에 어느 날 밑바닥에서 놀던 파리 한 마리가 냉큼 날아들었습니다. 잘나가는 파리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저 밑바닥 파린데 어떻게 여기까지 날아왔소?’ 그러자 밑바닥 파리가 말했습니다. ‘예, 줄을 잡았지요. 소꼬리를 꽉 잡고 있다가 소가 휙 꼬리치는 덕에 이곳까지 올라오게 됐죠.’” 우리도 줄을 잡아야 하나요? 줄을 잡고 올라온 것이 그리 배가 아프던가요?
자신을 낮추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힘써 조심할 일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이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더 저 사람을 알아주는군.’하는 따위의 말은 물론 그런 생각조차 마음에 두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십시오.” 하고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하루라도 겸손함으로 주님을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시편에는 “주님께서는 높으셔도 비천한 이를 굽어보시고 교만한 자를 멀리서도 알아보신다”(시편138,6). 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샘’은 겸손한 자의 '마음의 골짜기’로 흘러듭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겸손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깊은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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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4,1.7-11: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다가, 사람들이 모두 상석에 먼저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라고 하셨다. 잔치의 초대를 받았을 경우의 예를 들으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겸손의 덕을 갖추라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8절) 이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창피할까! 이것은 도둑질하다 붙잡혀서 훔친 물건을 도로 내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으므로 가지고 있던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그 자리를 남에게 양보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그를 헛된 자만에 차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받아 마땅한 명예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 앉게’ 할 것이다.”(10절) 하신다.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마땅히 빛나는 덕행으로 다른 사람을 앞서야 한다. 덕행의 법칙은 뽐내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다.
겸손한 신앙인이 있고 교만한 신앙인이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를 자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 우리가 만일 참된 겸손으로 오를 수 있는 높은 곳에 닿고자 한다면, 선행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야곱이 보았던 사다리이다. 사다리의 양쪽 장대는 우리의 영과 육이며, 가로대는 겸손과 수양으로 만들어져 있어 그것들을 밟고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 겸손의 덕을 어떻게 갖추라는 것인가? 그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여 인정하는 데 있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겸손하게 하느님께 자비를 청했던 세리의 기도 자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들어주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세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삶의 균형을 이루신 예수님의 마음과 삶 앞에, 복음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서 살펴본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 들고나오는 교만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언제나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진정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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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 11)
-한상우신부-
고운
나뭇잎이
낮은 자리로
내려앉는다.
언제나
낮은 자리에
계시며 우리를
맞아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을 향한
마음의
자리또한
낮은 자리이다.
낮은 삶이
우리의 허세를
치유한다.
낮은 삶이
서로의 교만을
정화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는 자리또한
낮은 자리이다.
낮은 삶은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낮아짐의 방식이
복음의 방식이다.
삶의 완성은
낮은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또한
낮은 자리이다.
막힌 삶을
열어준다.
낮아지고
낮추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낮은 삶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를 위해
사랑은 먼저
낮아지고 낮추는
것임을 다시금
일깨워 주신다.
자녀를 위해
낮아지고
낮추셨던
높은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마음을 낮추면
모든 것은
감사가 되고
은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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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지 물으십니다.
"윗자리에 앉지 마라."(루카 14,8)
안식일에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게 된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자리"는 참 민감한 요소지요. 집주인들은 손님을 맞이할 때 자리 배치에 고심을 하고, 손님들도 자기에게 적합한 자리를 찾느라 나름 신경을 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좀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것이 육의 본능인가 봅니다. 자기가 배운 것보다 더 아는 것처럼, 가진 것보다 더 가진 것처럼, 본래 생긴 것보다 더 잘난 것처럼 보이려는 욕망이지요. 그저 잠시 좀 더 낫게 보이는 것으로 끝나면 허영과 위선 정도로 그치지만, 이를 고수하다 보면 결국 허세와 거짓으로 발전합니다.
"윗자리"는 인간의 이런 욕망들을 대변하는 단어 같습니다. 초대해 준 데 대한 감사와 주인공에게 전하는 축하로 충분한 자리에서 자기 위상과 영광을 고심하는 모습이 예수님께 참 안타깝게 비친 것 같지요. 사실 재산을 표시하는 숫자와 누리는 권력의 양으로 스스로 높다고 여겨도 진심으로 그를 높게 보아주는 시선이 없다면, 그 "윗자리"는 그저 자기 만족의 외딴 섬일 뿐인데 말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자기가 스스로 분투하여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쟁취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실상 사람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그 자리 역시 어떠한 이유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일 뿐이지요. 주어진 만큼 하느님과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을 지게 되는 것이 이치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끝자리 신세여도 스스로 자존감이 충만하고 타인의 마음 한켠에서 선한 영향력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위아래 상관없이 귀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공간적 자리 개념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겉꾸밈도 가면도 허세도 필요 없지요. 이런 이는 이미 하느님께서 들어높이신 존재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거취에 대한 바람을 진솔하게 드러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필리 1,23-24)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때문에 당장이라도 죽음으로 건너가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이득인 셈이지요. 하지만 신생 교회들이 겪고 있는 성장통을 생각하면 아직은 지상 여정을 지속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 또한 그에게 부여된, 보람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삶과 죽음에 대해 자유로운 그에게는 윗자리, 끝자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상이든 천국이든, 상석이든 말석이든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그는 어디에 있든 초연합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가장 끝자리의 두려움을 넘어선 이에게서 우러나는 진정한 자유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영원한 천상 혼인잔치를 희구하는 이는 세상이 규정해 놓은 윗자리, 끝자리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보이는 자리에 거짓으로라도 발끝을 걸치고 싶어 기웃거리지도 않지요. 육신은 여전히 지상에 묶여 있지만, 이미 그의 영혼이 주님에 가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허영과 자리 다툼이 그의 영혼을 흔들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자신을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더 이상 외적 자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성생활의 관건은 '우리 영혼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지요. 우리가 주님 곁으로 가까이 갈수록 더,더,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거기 계시니까요.
우리는 가장 초라하고 가난한 바로 거기서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가 천상의 주인이신 분의 옥좌가 아닐 수 없겠지요. 거기서 그분과 하나된 우리는 자연히 높아집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서 계신 자리를 찾아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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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대와 희망은?
-김찬선신부-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오늘 서간은 삶과 죽음과 관련한 바오로 사도의 기대와 희망을 얘기합니다.
어떻게 살다가 죽고 싶은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희망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으로도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죽음으로도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거라고 얘기하며
그래서 빨리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자기에게는 더 좋지만
이웃과 함께 더 있는 것이 이웃에게 유익하다면 그것도 좋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불치병으로 너무도 고통스러운 엄마가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빨리 죽어서 하느님께로 가고 싶지만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면
자기가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성인 중에 최양업 신부님의 부모님이 계시지요.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순교하여 이미 성인품에 올랐지만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순교하였어도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하고
현재 복녀인데 그것은 그가 한때 배교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교의 이유가 자녀들, 특히 갓난 자식 때문이었지요.
내 한 몸 죽는 것은 두려울 것도 없고 순교하고 싶었지만 감옥에서
갓난아이가 굶어 죽게 되자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배교하였던 겁니다.
이렇게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삶을
묵상하며 나는 어떻게 살다가 죽고 싶은지
저의 기대와 희망에 대해 성찰을 해봤습니다.
우선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저 목숨이나 연명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습니다.
뒤집으면 사랑하는 삶을 살다가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피정 중에 피정자들에게 제가 자주 하는 그 질문, 곧
천당 가길 원하느냐 물어 모두 천당 가길 원한다고 답하면
그다음 질문으로 '지금 당장 가고 싶으냐?'고 묻는 그 질문을
다른 사람이 아닌 제게 한다면 저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더 사랑하다가 가고 싶을까요, 당장 죽어도 좋을까요?
이 지점에서 제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드러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사람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사랑하여도 그리스도는 사랑하지 않거나
그리스도를 사랑하더라도 인간을 더 사랑한다면
저는 이 세상에서 더 사랑하며 살다가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고
어차피 죽게 되면 그때에야 죽어 천당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해야지만 당장 죽어도 좋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체인 사람들을 위해 더 살아도 좋습니다.
저에게 사랑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사랑하며 살다가 죽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사랑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모두를 사랑하는 것인지는 헷갈립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는 저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두렵고 거기서부터 사랑 출발을 하는 것도 두려워
이렇게 모호한 Stance/태도를 취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