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0. 10. 29. 06:08

2020 10 30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너희는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당장 구해 내지 않고 내버려 두겠느냐?"

(루가 14,1-6)

 

"Who among you,

if your son or ox falls into a cistern,
would not immediately pull him out

on the sabbath da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문제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혼인을 준비하면서 예식장은 어떠해야 하고, 혼수는 얼마만큼 해야 하고, 답례품은 무엇을 해야 하고, 혼인식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혼인하기 전부터 신랑과 신부가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혼인식의 본질은 서로의 사랑을 진심으로 확인하는 데에 있지, 예식을 ‘성공적인 이벤트’로 잘 치르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레지오 마리애 단장이 신입 단원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였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이 사람이 내가 이제 갓 입단하였다고 무시하는 것이 틀림없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도 문제를 본질적으로 풀려고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도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치료 행위가 금지된 안식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안식일 법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니, 이날만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안식일의 본질을 보셨고,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자꾸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문제를 엉뚱하게 풀어 나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인터넷 SNS(Social Network Service)에 자신의 일상을 올려놓는 사람이 많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그리고 하루의 일상을 사진과 짧은 글로 올립니다. 또 여행에 대한 기록도 남겨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이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지금 힘든가 보구나. 어렵겠는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잘 사는구나.’, ‘돈도 많아. 맛있는 것만 먹고 여행만 다니네.’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의 좋은 모습만 다른 이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합니다. 어렵고 힘든 모습보다는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이런 오해를 받습니다.

‘이런 것이나 올리는 철부지구나. 그렇게 사람들에게 자기 잘 산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을까?’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더 힘들어서 그 반대의 모습을 올릴 때가 더 많다고 합니다.

한 부분만을 보고서 쉽게 평가하는 우리의 섣부름을 지워야 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더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지방 지도자로부터 안식일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안식일 문제로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게 되지요.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라고 물으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의료 행위를 하나의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낼 수 없어서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안식일 말고도, 사람을 고쳐 줄 수 있는 다른 날도 많은데 굳이 안식일에 고쳐줘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영적 제물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이 바로 하느님께 자기를 바치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특히 바라봐야 하는 것은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수종을 앓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는 과연 안식일이라고 해서 병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1분 1초라도 빨리 병에서 해방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기준을 늘 간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주님 뜻에 맞게 온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후회는 대개 말하는 데서 비롯된다(이기주).


성공은 재능에서? 아니면 끈기에서?

심리학자 안젤라 리 더크워스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재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어. 넌 머리가 나쁜 편이니 성공하긴 어려울 거다.”

그녀는 후에 하버드 대학에서 아버지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실험을 계획했습니다.

학생 130명에게 5분 동안 전속력으로 뛰게 했습니다. 이후 연구진은 40년간 이들을 추적한 것입니다. 이들이 60대가 되었을 때, 직업만족도, 행복도, 연봉 등이 유난히 높은 사람, 소위 ‘성공한 사람’이라 부를만한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40년 전 달리기에서, ‘더는 뛰기 힘들다고 생각했을 때 몇 걸음이라도 더 뛴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성공에는 재능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재능은 타고나야 하는 반면, 끈기를 기를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의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아닌지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들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 돌려보내신 다음,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나이 들면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대답을 즉시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대답을 즉시즉시 했더니 사람들이 그 대답으로 옭아매어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해도 일단 침묵을 지킵니다.

      물론 말실수를 줄이기 위해 신중한 것은 좋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이 말을 막 할 때가 좋습니다. 어떤 것들에 일부러 침묵하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나에게 솔직해지고 싶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신중해서가 아니라 솔직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심으로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면서도 자신들이 외적인 것에만 치중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렇게 솔직하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꼰대’라는 말을 듣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꼰대들은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이날치’는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입니다. 본명은 이경숙이지만, 날쌔게 줄을 잘 탄다는 의미에서 날치라는 예명이 붙었습니다. 상민과 양반, 모두에게 두루 사랑받은 서편제의 대표 소리꾼으로, 흥선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판을 열기도 했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전해지진 않지만,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실제 새가 날아들었다는 말까지 전해집니다.

      조선 시대 이날치의 재기 넘치는 멋과 흥을 되살린 ‘이날치 밴드’가 지금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조선의 힙합’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날치 밴드가 등장하는 한국관광공사의 홍보영상은 조회수가 2억 7천만을 넘어서 해외에서도 인기몰이 중입니다. 반복되는 가사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 홍대 앞 클럽에 어울릴 법한 분위기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엉뚱하게도 판소리 ‘수궁가’의 한 장면입니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범 내려온다.”

별주부가 호랑이를 만난 순간을 묘사한 이 노래,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고, 유튜브 조회 수만 2천9백만, 이날치가 등장하는 다른 영상들까지 합하면 2억7천만을 넘었습니다.

      베이스 2명과 드럼 1명, 그리고 정통 국악을 전공한 소리꾼 4명의 조합으로, 2018년 밴드 결성 이후 국악도, 힙합도, 디스코도 아닌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국악계의 불편한 시선도 없지 않지 않습니다. 그 불편한 시선에도 음악은 무엇보다 일상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안이호 보컬은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가 만들어준 가치라는 것이 주는 압박이랄까요. 그 무게감은 사실 일상에 스며들기는 힘들잖아요. 그 가치에 스스로 짓눌려있는 것 같아요.”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추구한다는 오랜 가르침을 새롭고 독특한 음악으로 몸소 구현하고 있습니다.

[출처: ‘2억7천만 뷰 기록한 ‘이날치 열풍’, 세계 매료시킨 ‘조선의 힙합’’, 정연욱 기자, KBS 뉴스, 2020.10.28]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이전의 틀을 고수하려는 사람과 이전의 것을 익혀서 현 대중들에게 맞추려는 사람들입니다. 판소리는 여전히 현대 음악과는 거리가 먼 일부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날치’란 젊은 그룹이 판소리를 힙합과 결합해 인기몰이 하니까 일부 판소리꾼들은 그들에 대해 거북한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판소리는 조선 시대의 힙합과 같은 대중음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시대에 맞춰 이 대중음악의 틀도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대중이 알아주지 않으면 판소리는 이제 영원히 잊힌 음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전의 형식만을 강조하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처럼 꼰대 소리를 듣게 될 수 있습니다. 대중이 원하지 않으면 잊히는 것이고 잊히면 의미 없게 됩니다.

 

      이전의 가치의 무게를 벗고 현시대에 그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려면 ‘무엇은 바뀌면 안 되고 무엇은 바뀌어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며칠 전에 별세하신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중이 원치 않는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을 만드는 것에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대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확대되면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꼰대’는 젊은이들이 잔소리꾼 어른들을 일컬어 부르는 은어입니다. 이들이 잘 쓰는 말은 “나 때는 ~”입니다. 이것을 비꼬며 발음이 비슷한 ‘라떼’ 커피와 결부시키기도 합니다.

꼰대에서 벗어나려면 오늘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 법이 현재의 가치에 대해 논하십니다.

      ‘지금’ 바뀌지 말아야 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랑의 가치’입니다. ‘지금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어떻게 변해야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지금 어떻게 변해야 사람을 기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가차 없이 바꿔야 합니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고 무엇이 바뀌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라고 하십니다. ‘지금’과 ‘이웃사랑’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길 수 있다면, 절대 꼰대라 불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습니다무릇 세상을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가정과 몸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잘 지은 댐도 작은 구멍에서 물이 새면 나중에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그러기에 댐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시로 관리를 해야만 댐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미국은 개인주의가 강하고본인의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정치인의 가족 이야기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한국은 법적인 문제도 있지만 도덕적인 기준도 엄격하게 적용하는 편입니다유력 정치인의 자녀배우자부모님의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고그것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지금은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장인의 이력이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노무현 후보의 장인이 좌익운동을 했었기 때문입니다상대 후보는 집중적으로 그 문제를 거론했습니다위기에 처한 노무현 후보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그렇다면 내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 노무현 후보의 말은 언론에 보도되었고 상대 후보는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후보 경선에 승리한 노무현 후보는 2002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2019년과 2020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는 것들이 있습니다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보도한 이야기입니다장관의 아들과 딸이 고등학생 때 표창장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아직 재판 중이지만 장관이 되지 않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사안입니다재판이 끝나고 표창장을 받은 것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장관의 아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사용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국방부에서도 합법적인 휴가라고 했고검찰에서도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의혹을 제기한 사람들그것을 보도한 언론도 책임을 지지 않을 것입니다공인은 그런 검증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장관의 배우자가 해외여행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장관의 배우자가 아니라면 언론에서 보도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장관은 남편의 문제로 송구하다고 하였습니다미국이라면 아마 언론에서 보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가치는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살아 있습니다도덕적인 기준과 가치도 중요합니다그러나 때로 그것 때문에 정책과 정책을 수행하는 능력을 평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정책과 능력보다는 정치인의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와 같은 삶의 기준입니다안식일의 규정과 법규를 어기면 죄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잘 알았습니다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그러나 세리와 가난한 사람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잘 몰랐습니다알았다고 해도 삶의 자리에서 지키기가 어려웠습니다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문제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논쟁이 있었습니다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도 중요하지만 안식일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의미를 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안식일의 규정보다는 아픈 사람이 치유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코로나19의 엄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교회는 박해시대에도전쟁 때에도 중단하지 않았던 미사를 중단했습니다가장 거룩한 시간인 성주간성삼일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교우들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안식일의 규정도 중요하지만 코로나19의 위험으로부터 교우들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내가 기도하는 것은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이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무수한 저의 실수와 잘못을 덮어 주시고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있기 때문입니다단순한 실수와 작은 잘못이 아니라이웃과 하느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내는 죄를 지었어도참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나의 실수와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고나 또한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이것이 의로움의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이영근신부-


낙엽이 하늘에서 내려와 발길에 밟힙니다. 10월이 저물어 가고, 가을도 저물어 갑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낙엽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하시게 되었는데, 수종을 앓는 사람이 그분 앞에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루카 14,1).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동원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사실, 이전에도 ‘손 오그라든 환자를 치유하신 장면’(루카 6,6-11)과 ‘허리 굽은 여인을 치유하신 장면’(루카 13,10-17)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을 올가미에 걸어 체포하려고 결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오히려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그런데,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루카 14,4). 왜냐하면, 이 치유를 인정하면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대한 전통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요, 인정하지 않으면 이웃의 불행에도 자비와 선행을 베풀지 않는 비정한 인간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고, “수종을 앓는 이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셨습니다.”(루카 14,4),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5)

 

여전히,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14,5).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오히려 자신들이 말려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실, 율법에 따라 일을 맡은 관리인들은 안식일에도 정해진 희생제물을 잡고 모든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또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경우에는 안식일 법규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일과 선행을 하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까지도 이 원칙을 확대시키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은 죽이는 것과 같고, 할 수 있는데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과 같음을 깨우쳐주십니다.

이 말씀은 ‘주일’이라 해서, 마냥 게으르기 쉬운 우리에게도 경각심을 심어줍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에서처럼, 이 가을,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를 깨우쳐줍니다.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줍니다.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자신의 시간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살아야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주님!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안식일 율법 앞에서도, 올가미를 씌우려 지켜보고 있는 이들 앞에서도,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합당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합당한 까닭입니다.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사랑스러운 까닭입니다.

살아계시기에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듯,

사랑하시기에 사랑이시며 사랑을 베푸십니다. 아멘.


모든 법의 기초는 사랑이다 

-반영억신부-


법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선포한 이성의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야 하며 지켜져야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따라서 적용에 있어서 형평성을 지켜야 하지만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것이라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실정법보다는 하느님의 법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창세기 2장3절에 보면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 날에 쉬셨기 때문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쉬는 날이 아니라 감사와 찬미의 날입니다. 일주일을 잘 지내기 위해서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을 잘 보내도록 안배하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날입니다.

탈출기20장 10절 11절에 보면 십계명중 3번째 계명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다음 하느님의 백성으로써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탈출19,8)한 후 시나이산에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는 노예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노예 살이 했던 옛 상황을 기억하고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한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찬미와 감사,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함께하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속에 안식일 안에 담긴 알맹이는 사라지고 법규의 틀만 지키기에 급급해 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 규정을 만들고 해석한다는 빌미로 이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 법이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국가보안법’이니‘긴급조치 법,‘유신 법’등 정권유지를 위한 방법으로 법의 남용을 많이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사형제도라든지 낙태법을 빌미로 살인죄를 용납하고 있고,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악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모든 것 위에 있고, 안식일과 같은 거룩한 제도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취지를 살리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기득권을 누리려고 외면해 온 것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수종 병자”는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자폐증’이라고 합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병, 마음이 오그라든 병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것을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못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못된 것이 참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잘못을 범할 때 정말 모르고 범합니까?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의 달콤함을 채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합리화시키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법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인간을 앞설 수 없으며 또한 그 근본취지를 잘 살려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우리의 태도 또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날,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의무적으로 주일미사에 오신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일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법은 영원합니다. 법을 집행할 때 사랑이 빠지면 악법이 되고 맙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수종을  이를 일에 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루카 14,1-6).”

 

구약성경 마카베오기 상권을 보면,

그리스 군대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이스라엘인들을 공격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이스라엘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려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도 않고 자기들의 피신처를

봉쇄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한 채로 죽겠다. 너희가 우리를 부당하게

죽였다는 것을 하늘과 땅이 증언해 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 갔다.

죽은 이는 천 명이나 되었다(1마카 2,36-38).”

그 소식을 들은 마타티아스와 그의 동료들은 이렇게 결의합니다.

“이 형제들이 한 것처럼 한다면,

우리가 모두 목숨과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이민족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이제 곧 그들은 이 땅에서 우리를 몰살시킬 것이다(1마카 2,40).”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1마카 2,41).”

마타티아스와 그의 동료들의 결의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그들은 안식일에도 전투를 해서 크게 승리하게 됩니다(1마카 2,42-48).

 

목숨을 걸고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그 신념을 지키다가 민족 전체가 몰살을 당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라는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민족이 전멸을 당하더라도 안식일을 지켜라.”가 하느님의 명령일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는 말씀을 하실 때,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카베오기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고집스러운 태도는, 안식일을 지키려고 적군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다가

몰살당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만 그렇게 어리석은 율법주의에 빠져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강요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단순히 강요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장애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마르 3,6).>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들이나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안식일은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하는 날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율법주의는 자기 자신도 죄를 짓는 일이고,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는

위선자들이었고, 힘없는 사람들을 율법으로 억압하는 나쁜 지배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 다르게 해서 보면, 사실 그들도 가엾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그들은 ‘남의 시선’이라는

멍에 속에 갇혀 있었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그만큼,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심하게 율법의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위선도 일종의 감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것은 그들을 위선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참된 해방을 누리려면, 진심으로 회개하고,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냐?” 라는 질문이기도 하고,

“안식일은 무엇을 하는 날이냐?”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답은, “안식일일지라도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다.

안식일은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하는 날이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잠자코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어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다.” 라고 반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는 “생명이 위독한 응급환자가 아니라면 다른 날에 치료하면 된다.” 라고

주장하고 싶었을 것입니다(루카 13,14).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신 것은,

그가 응급환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은 다음날로 미루면 안 된다는 것과

요일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고,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그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하신 질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아들’이 우물에 빠지면,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은

생각할 틈도 없이, 또 그 상황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인지

아닌지 따질 틈도 없이, 곧바로 달려가서 아들을 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물에 빠진 사람이 ‘나의 아들’이 아니라 ‘남의 아들’이라면,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따지고,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따지고......

그게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고, 이중 잣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는데,

아마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반감과 적대감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잘못되고 어리석은 신념을 버리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바리사이들처럼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4,1-6: 안식일에 대한 논쟁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으시고 가셔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지켜보았다.”(1절) 한다. 그들은 무엇을 왜 지켜보았을까? 그분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하여 율법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며 올가미를 씌우려고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서 수종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신다. 그는 육체적으로 방탕한 생활로 그 영혼을 더럽히고 영의 빛을 꺼뜨린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하고 물으셨다(3절). 그들은 침묵하고 만다. 안식일은 합리적으로 잘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달콤한 영적인 향기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죄를 멀리하고, 모든 덕행에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며 거룩하고 칭찬 들을 만한 삶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날이다.

 

그들이 나쁜 뜻을 품고 침묵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몰인정과 파렴치를 설득려 있는 말씀으로 반박을 하신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 안식일에 자비를 베푸는 일을 율법이 금한다면, 어째서 그들은 우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가? 그들의 침묵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을 멈추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해 자유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그들 자신은 물론 노예나 가축들도 쉬게 하였다(신명 5,14-15). 그러므로 이 안식일이란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날이며, 해방과 자유의 날로 기쁜 날이었다(이사 58,13). 안식일은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기쁨과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큰 표징이다.

 

즉 “안식일”이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하느님의 선하심과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언제나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는 이 “안식일”에 하느님의 기쁨과 희망을 베풀어주셨다. 즉 문자적이고 법적인 해석 너머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바로 “인간의 해방”과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알려주셨다. 즉 안식일의 의미를 인간을 위한 것임을 확인해 주셨고,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회복해 주셨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계명의 문자에만 얽매여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이고 타성적으로 되면 그 신앙생활은 얼마 가지 않아 의미를 찾지 못하고 식어가고 말 것이다. 신앙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이 될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먼저 보기 위해서 눈을 크게 뜨고 깨어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느님의 뜻이, 즉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면서 그것을 실천한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 5)

-한상우신부-

생명을 위한
안식일이다.

생명이 있기에
안식일이 있다.

생명을 살리는
안식일이다.

안식일은
생명을
향한다.

우리 앞에 있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도
생명의 관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연민의 마음은
곧 안식일의
마음이다.

연민의 마음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마음이다.

안식일은
생명을 위한
날이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제도와 규정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다.

안식일은
그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안식일과 생명이
뒤바뀌어서는
안된다.

생명을 되찾는
안식일이다.

생명이
안식일이다.

서로를 향한
측은지심이
안식일의
본래 마음이다.

생명은 마음이고
원칙은 본질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생명이 있기에
생명을 돌볼
안식일이
있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각자가 지닌 합당함의 척도에 대해 물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루카 14,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의 집에 계십니다. 때마침 수종병 환자가 그분 앞에 앉아 있지요.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는 걸로 보아서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데려다 놓은, 소위 세팅된 존재가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 14,3)

예수님께서 그들의 시선과 속셈을 알아차리시고 그들에게 합당함에 대해  물으십니다. 물론 그들의 답이 무엇이든 이미 당신이 하실 일을 마음에 정하셨지요.

예수님은 율법이 무어라 하는지 물으시기보다, 그저 합당함을 물으십니다. 문자로 새겨진 율법을 적용하기 전에, 마음과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법, 생명의 법이 무어라 하는지 일깨우고 싶으신 듯합니다.

물론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수종병이 하루이틀쯤 치료가 미뤄진다 해도 죽을 정도의 위급한 질병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합당함을 가늠할 것입니다. 환자가 좀 더 인내해도 목숨까지 잃을 염려가 없으니 안식일 법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여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루카 14,4)

그런데 예수님 생각은 다르십니다. 당장 죽을 병이 아니어도 그 사람의 불편한 몸과 위축된 마음이 치유의 기준이십니다. 하느님 창조의 온전함이 훼손된 모든 상태에서 "바로 끌어내"(루카 14,5)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바리사이나 율법 교사들은 수종병자가 며칠 더 인내해도 무방하리라고 합리적으로 생각했겠지만, 예수님은 인내하지 않으십니다. 또 그에게도 인내를 강요하지 않으시지요. 그 대가가 불보듯 뻔해도 그들 면전에서 환자의 손을 잡고 치유를 감행하시고는, 먼저 그를 돌려보내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바라는 바를 기도 안에 담습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필리 1,7)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진한 애정을 표현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 은총에 "동참"(필리 1,5.7)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도는 그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마치 연애 편지의 한 단락처럼 진솔하고 따사로이 고백합니다.

이는 마치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사랑의 고백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심장 안에 간직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그분의 관심사가 됩니다. 사랑하면 그렇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필리 1,9)

사도가 그들에게 바라는 바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더욱더 성장하여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영적 여정에서 중요한 것이 식별, 곧 분별입니다.

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은 단지 머릿속 지식이나, 속없이 착하기만 한 성품으로 저절로 생겨나는 능력이 아니라, 지식과 지혜와 통찰의 영이신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에서 시작된 분별력으로 무엇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진정으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랑은 어려움을 안고 지쳐 있는 이에게 인내를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난했던 막연함을 끊어내 줍니다. 지금이 무슨 날이고 여기가 어디든 개의치않고, 공감과 연민으로, 사랑이 원하는 일에 자신을 던지지요. 아픈 그가 이미 예수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오늘의 그 수종병자는 예수님께서 덥썩 잡아주신 따스한 손길로 영혼까지 말끔히 위로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생각하는 합당합의 기준이 "사랑"에서 출발했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요. 우리의 사고와 판단이 차가운 이성과 규정과 계산기 속에 갇히지 않도록 사랑으로 분별하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마음속을 차지하였으니 그분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삼아 그분이 원하시는 바에 우리 마음을 실읍시다. 그것이 곧 주님께 "동참"하는 것이고 사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식별의 기준    

-김찬선신부-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오늘은 이 두 말씀을 엮어서 묵상을 해봤습니다.
두 말씀의 연결고리는 분별 또는 식별이고
두 말씀을 연결하여 올바른 식별은 무엇일까 성찰해보니
사랑의 식별이 올바른 식별이라는 것이 오늘 결론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을 집에 초대한 바리사이나
식탁에 함께 있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꽤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였을 뿐 아니라 함께 식사도 하고,
나무라심에 가까운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도 앙심을 품거나 주님을
해치려 들지 않은 것은 다른 바리사이이나 율법 학자와는 분명 다릅니다.
오늘 주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바리사이의 지도자급인데
요한복음의 니코데모처럼 지도자급이면서도 주님을 받아들인 존재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까 주님께 대해 개방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율법 규정에 매여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안식일에 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아직 분별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식별의 기준이 분명합니다.
사랑이면 하고 일이면 하지 말고,
사랑이면 하고 악한 일이면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일일지라도 사랑의 일이면 해야 하고,
병자를 고치는 것도 돈벌이 욕심 때문이라면 하지 말아야 하지만
병자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고쳐주려는 사랑 때문이라면
일이 아니라 사랑이기에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 중에는 주일을 이용하여
이주민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분들은 주일뿐 아니라 평일 자기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돈벌이를 위해서만 치료하지 않고 사랑으로 치료할 것입니다.

사실 한 주일 매우 힘들게 일했는데 놀러 가거나 쉬지 않고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성당만 갔다 와서 고상하게 쉬는 것보다
안식일을 더 거룩히 지내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느님이 거룩하시고 사랑이 거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안식일뿐 아니라 많은 경우 식별이 어려울 때
사랑이 그 식별의 기준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술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누구에게 이 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렇게 하면 실수하거나 실패할 일이 없는데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참사랑인지 거짓 사랑인지
그 식별이 쉽지 않고 그래서 사랑의 식별이 또 관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는 뜻 같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온갖 이해가 뭔지는 사도가 얘기하지 않는데 그게 뭘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사랑에도 예를 들어 맹목적인 사랑이나 애착적인 사랑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사랑을 참사랑과 비교하여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지식을 쌓음으로써 사랑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제가 지금보다 젊고 어리석었을 때 자주 제 사랑만 믿고 저의 사랑을
다른 사람의 견해나 충고를 통해 점검받고 수정받지 않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말아야 함을 오늘 말씀들에서 교훈받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4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