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Margaret K 2020. 10. 27. 06:06

2020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시몬 성인과 유다 성인은 열두 사도의 일원이다. 시몬 사도는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었다가 제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주로 페르시아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약 성경』의 유다 서간 저자인 유다 사도는 유다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도는 예수님의 친척일 가능성도 있다. 예수님의 형제로 언급되는 복음 구절에 같은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  

☆☆☆

 

예수께서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Jesus went up to the mountain to pray,
and he spent the night in prayer to God.
When day came,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self,
and from them he chose Twelve, 
whom he also named Apostl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몇 년 전에 나온 공익 광고 내용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태극기를 다는 국경일 하루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국가 대표 축구 경기를 보는 90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순국선열을 위하여 묵념하는 1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독도에 관한 뉴스를 접하는 그 순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나라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 광고 내용을 하느님 나라의 백성에게 맞추어 바꾼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그 짧은 순간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가를 부르며 감동을 받는 순간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비신자인 배우자가 오늘도 성당 가냐고 구박을 할 때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힘든 일이 생겨서 주님께 기도를 해야 하는 경우에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외국에 가면 누구나 다 애국심이 생기고, 국가 대표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도 성당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순간 교회의 대표, 하느님 나라의 국가 대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사도란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 열두 명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녕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도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에는 기도하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시간표를 듣게 되었을 때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규칙적으로 또 오랜 시간을 기도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묵상할 때 분심도 참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어려움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서품을 받기 전, 한 달 피정을 받았습니다. 한 달 피정에 들어가기 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자신은 매일 6시간 이상 묵상을 했다는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1시간 묵상도 힘든데 어떻게 6시간 이상을 한 달 내내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한 달 피정 들어간 첫날과 둘째 날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기도와 묵상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6시간도 짧았습니다. 온종일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성녀 마더 데레사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더 많이 기도할수록 기도는 그만큼 쉬워집니다. 기도가 쉬워지면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기도가 쉬워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기도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기도가 어렵다고만 말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가 어떻게 쉬워질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주님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교회의 사도적 전통의 토대가 될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이름 지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주님께서 먼저 하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는 ‘왜 이런 사람을 뽑았을까?’ 싶은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들은 왜 제외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런 선택을 위해 산에 가시어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를 이룰 수 있었고, 하느님 뜻에 맞게 당신의 일을 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잘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섣부른 판단을 하게 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보다는 자기 뜻을 내세우는 데 더 집중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기도는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어렵고 힘들기만 한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먼저 많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바뤼흐 스피노자).


어머니의 기도

서울 신학교를 다닐 때, 한 선배님으로부터 자기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위로 세 명의 신부님과 한 분의 수녀님이 있는데, 어머니께서는 아들 신부의 서품식이나 딸 수녀의 서원식에 한 번도 가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시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참석을 하지 않으셨을까 싶었습니다. 신부, 수녀 되는 것을 반대하셨기 때문일까 싶었는데, 그 이유가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멀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집 근처를 벗어난 적이 없으시다고 합니다(막내아들의 서품식에는 참석하셨다고 합니다).

이 신부님 어머니의 신심은 정말로 대단하셨습니다. 기도를 멈추지 않으시는 삶으로 4명의 사제와 1명의 수녀를 만드셨고, 손주 중에서도 한 명의 사제가 나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어머니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하신 말씀은 “100여 년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보니 사랑밖에 없는데 그동안 많이 베풀지 못해서 가슴 아프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장례미사 때 오신 분들을 웃게 하라고 막내 신부에게 당부하셔서, 감사 인사 중에 선글라스를 꺼내 쓰는 바람에 엄숙한 미사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기도…. 우리가 모두 생각해 볼 대목이 아닐까요?

<배우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전삼용신부-


오늘은 열혈당원 시몬과 유다 타대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시몬은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혹은 나병에 걸렸다가 치유되어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다 타대오는 예수님의 사촌으로 알페오의 야고보와 형제지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여러 다른 환경에서 살던 이들의 스승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전에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신중하게 뽑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는 당신을 팔아먹을 가리옷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머물 열정이 있는 사람들 기준으로 당신 제자를 뽑으셨던 것 같습니다.

 

      교토 대학 영장류연구소의 학자들은 어린 침팬지가 어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어미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미에게 몇 개의 색에 각각 반응하는 일본어 글자를 알아보도록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빨간색은 ‘ㄱ’, 노란색은 ‘ㄴ’ 식으로 연상하도록 교육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한 색을 보여주었을 때 그 색에 상응하는 글자의 스위치를 누르면 그 보상으로 동전이 나오도록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어미 침팬지는 그 동전으로 자동판매기에 가서 자신이 원하는 과일을 뽑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미 침팬지가 새끼 침팬지를 안고 있었습니다. 새끼 침팬지는 어미 침팬지가 하는 행동을 보고 혼자 색과 글을 스스로 터득하여 어미가 없을 때 그 기계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 글자를 맞추고는 동전을 받아 어미가 한 것처럼 자판기에서 자기가 원하는 과일을 뽑아먹었습니다. 어미가 자녀에게 가르쳐 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새끼는 그저 어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따라서 배운 것입니다.

 

[참조: 『당신의 주인은 DNA가 아니다』, ‘제7장: 생각이 있는 부모 노릇’, 브루스 립튼]

      누군가와 함께 머문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배우고 싶어지고 배우고 싶어지면 그 배우고 싶어지는 대상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이 제자들을 뽑는 기준은 자신과 오래 머물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기준으로 제자들을 뽑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리옷 유다는 조금 다른 의도로 머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서 영화를 얻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통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들어와서도 예수님과 같은 스승 앞에서는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집불통인 유다는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머물려는 의지가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배우지 못합니다. 새끼 침팬지는 어미를 사랑하였기에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사랑하면 배우고 싶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용하고 싶어집니다. 가리옷 유다는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닮을 수 없었습니다.

 

      경제, 정치, 스포츠, 연예 등 어떤 분야에서건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반드시 그가 사랑했던 스승이 있게 마련입니다. 만나지는 못해도 적어도 동경하며 닮으려고 한 스승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승이 없으면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없다면 자녀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비방을 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비방하는 그 존경받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닮고 싶은 스승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현재 은퇴하고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빌 앤 멀린다’ 자선 재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 워런 버핏도 수십조 원을 그 단체에 기부하였습니다. 빌 게이츠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설립한 이 재단은 아프리카의 물 부족과 질병을 없애기 위해 인분을 처리하는 장치를 개발하여 시공해주고 있습니다. 식수로 마시는 강에 인분이 들어가는 것을 막고 그것으로 마시는 물까지 생산하는 방식입니다. 세계 제1의 부자가 미래 삶의 환경을 위해 변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이런 루머도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가 인구수를 줄이려고 일부러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사는 인구가 너무 많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누가 빌 게이츠를 닮으려고 할까요?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이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재벌들의 모델이자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싫어하는 부자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지 않기 위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그런 분들을 비방하여 자신들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루머로 그들을 본받으려 하는 이들에게 스승을 잃게 만듭니다.

 

      이런 예는 간디나 마더 데레사에게도 적용됩니다. 간디는 어린아이를 성추행했다는 누군가의 말에 의해 폄하되고 있고, 마더 데레사도 아이들을 학대하고 팔아넘겼다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도 미신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객관적인 행위들은 분명 우리가 모두 본받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루머들은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그들을 본받으려는 이들에게는 치명타입니다. 증명되지도 않은 내용을 퍼뜨리며 인간이 그렇게 닮아야 할 세상의 스승들을 없애버리려는 시도는 미래를 위해 좋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그런 스승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폄하되는 가장 대표적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엔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기는 이들보다 어리석은 사기꾼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남이 잘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누구도 닮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가리옷 유다와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스승을 찾고 스승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게 됩니다. 닮고 싶은 어떤 스승도 가지지 않는 것은 조금도 나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사랑한 스승이 곧 미래의 나의 모습입니다. 내가 사랑할 스승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조재형신부-


2020년 1월에 시작한 코로나19는 어느덧 2020년 10월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는 원인이 있습니다다른 질병은 증상이 나타나면서 바이러스가 전파되기 때문에 확진자를 알면 전파를 막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코로나19는 무증상인 사람에게서 바이러스가 전파되기에 전파시키는 사람도 모르고감염되는 사람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코로나19의 확진자 80%는 가벼운 증상으로 넘어가거나 아예 증상이 없이 지나간다고 합니다그래서 코로나19의 전파를 막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대영제국이었던 영국의 총리도 코로나19를 피하지 못하였습니다세계 최고의 경호를 받는 미국의 대통령도 코로나19를 피하지 못하였습니다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을 방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잘 지키지 못하는 방법입니다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입니다손을 자주 씻는 것입니다이 두 가지만 잘해도 대부분의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미국의 대통령은 마스크 착용이 의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말했습니다영국의 총리는 집단면역이 생기면 코로나19를 이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지난 10개월의 결과는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가 효과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악의 유혹도 코로나19와 비슷합니다평소에 신앙심이 있던 사람도사제와 수도자도 악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바이러스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악의 유혹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바이러스는 기침발열호흡곤란과 같이 증상이 나타나면 치료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악의 유혹은 우리 눈에는 좋아 보이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도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악의 유혹은 그만큼 달콤하고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담배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금연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도박이 본인은 물론 가정에도 큰 피해를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박에서 손을 떼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악의 유혹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능력과 재능을 가리지 않습니다직책과 직분을 따지지 않습니다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유다는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예수님께 칭찬을 받고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도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표징과 말씀을 보고 들었던 제자들도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그만큼 악의 유혹은 집요하고악의 유혹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하느님을 사랑하고신앙심이 깊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님 위해 우리를 내셨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내 영혼이 평안하지 않나이다.”

 

코로나19를 예방하는 방법은 이외로 간단하였습니다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였습니다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도 이외로 간단합니다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쉽게 하지 않는 방법입니다첫째는 기도입니다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으셨습니다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피와 땀이 흐르도록 기도하셨습니다둘째는 겸손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겸손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첫째가 되고 싶은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은 늘 새로운 백신과 치료제가 필요합니다그러나 모든 악의 유혹을 이겨내는 백신은 기도와 겸손입니다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와 시몬 사도는 기도와 겸손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냈고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셨습니다우리가 기도와 겸손으로 살아가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양승국신부-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 사목자들과 교우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고, 어떻게 영성생활을 하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하나 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 역시 살아 생전 감염병과 맞서 싸우신 경험이 있습니다. 돈보스코가 39세 되던 1854년 7월초, 제노바에서 콜레라가 발생해서 300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에 전해졌습니다.

  

7월 말경에는 토리노에도 첫 감염자가 발생했습니다. 왕과 왕족들은 일찌감치 특수 제작된 감염 예방 마차를 타고, 도시 외곽의 안전한 성으로 떠났습니다. 귀족들과 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 확진자는 발도코 오라토리오에서 아주 가까운 보르고 도라라는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은 이주민들이 정착한 판자촌이었는데, 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영양결핍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8월 한 달만에 800명이 전염되었고, 500명이 사망했습니다. 토리노 시장은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고 환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할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했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라 다들 망설였습니다.

  

돈보스코는 8월 5일 오라토리오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만일 여러분이 하느님 은총 안에 있고, 아무런 대죄도 범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콜레라에 걸리지 않을 것임을 제가 보장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콜레라 환자들을 운송하고 간호하기 위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시장님의 호소를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런 일을 하기에 아직 어리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형들 가운데 저와 함께 환자 간호나 이송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 아주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아이들 가운데 14명이 지원했습니다. 며칠 뒤 나이가 어린 아이들 30명도 합류했습니다. 아이들은 세 그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첫번째 그룹의 큰 아이들은 병원이나 환자들의 집에서 하루 종일 간병했습니다. 두번째 그룹은 혹시라도 새로운 환자가 발생했는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확인했습니다. 세번째 막내 그룹은 오라토리오에 남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돈보스코는 감염 방지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에 철저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그만 식초병을 하나씩 나눠주고, 환자들과 접촉한 후에는 반드시 손을 씻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팬데믹 시대 돈보스코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감염병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국가나 지방 정부의 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두팔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협조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을 자원봉사자로 모집하는 과정에서 감염되지 않도록 잘 교육 시켰고, 철저한 방역조치를 취했습니다. 

 

돈보스코를 밀착수행하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에 남긴 레뮈엔 신부의 증언입니다.

  

“감염자들에게는 홑이불, 담요, 옷가지 등이 자주 부족했다. 아이들은 그런 상황을 돈보스코의 어머니 맘마 마르가리타에게 알렸다. 그녀는 오라토리오의 옷장을 활짝 열어 뭐든 다 내주었다. 즉시 오라토리오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루는 한 아이가 맘마 마르가리타에게 와서 환자 한명이 홑이불도 없이 침대에서 몸부림치고 있다고 하면서, 그를 덮어줄 적당한 것이 없겠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맘마 마르가리타는 성당으로 달려갔다. 제대포를 벗겨 소년에게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환자에게 갖다 주렴. 아마 주님께서도 눈감아 주시겠지?”

  

돈보스코는 전염병을 하느님의 진노나 징벌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정부나 지도층 인사들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이 순간 전염병에 감염되어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할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에 질문 하나를 던져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지금과 같은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셨다면, 과연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물론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기에 그에 충실했겠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인류가 겪는 고통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 악령들린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듯이 감염병의 퇴치와 종식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18~19절)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뽑혔느냐보다 누가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습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가진 자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 그렇고,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열혈 당원 시몬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었습니다. 곧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힌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뽑으셨기에 거룩한 사도들이 된 이들입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뽑힌 후에도 여전히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유다와 시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시몬이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지 타대오, 곧 “용감한 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십니다,”(에페 2,20)

 

그렇습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처럼,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말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나 봅니다. 이처럼, ‘교회의 기초’인 사도는 교회를 떠받들면서도 자신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이들을 당신의 사도로 부르시어 파견하시고,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겸손한 이들은 세상에 녹아,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합니다. 우리도 겸손한 자 되어,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참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내리사랑 

-반영억신부-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열둘을 따로 뽑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혁명당원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반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26,31)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나약한 사람들이 뽑힌 것입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파견을 받은 당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반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을 전제로 합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요한15,6). 이것이 스승의 참모습입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이지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함 투성이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혁명당원 시몬은 늘 전투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투와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새 삶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아직 사랑이 여물지 못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여자는 결혼 후 남자가 변하길 바라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 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는 반대로 변한답니다. 또한 “남자는 결혼해도 여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여자는 변한답니다”. 여자도 역시 남자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한답니다. 집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그야말로 아줌마가 된답니다. 서로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데 부족함에 대해 서로 잔소리만 늘어가면 불행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한 후 평지로 내려 오셨습니다. ‘평지’라는 공간은 예수님의 ‘소명’을 말해 줍니다. 제자들과의 만남, 군중과 함께 지내심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면 소명에 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함께 어울리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대방과의 다름을 생각하고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도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움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립3,21). “그리스도교는 올라감도 내려감도 동시에 이루어지는 교회입니다”(김정원신부).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이웃과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중간 달자

 -송영진신부-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루카 6,17-18).”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는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마이크도 앰프도 확성기도 없었던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셨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을까?”

그 시절에는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뒷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맨 뒤에 있는 사람들도

맨 앞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도들’이 바로 그 ‘중간 전달자’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고,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겼을 것입니다.)

 

‘중간 전달자’의 임무는, 자기가 들은 ‘말씀’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일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른 말을 덧붙여도 안 되고,

들은 ‘말씀’에서 글자 한 자도 빼면 안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그 해석을 덧붙여도 안 되고, 표현을 바꿔도 안 됩니다.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알아들었든지 못 알아들었든지 간에,

들은 그대로 전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좋은 예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아마도 대부분의 ‘중간 전달자’는 자기가 듣기에도 ‘너무 거북한’ 말씀이었을 텐데,

그래도 자기가 들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생각이나 해석을 덧붙여서 전달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6,51-52).”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말다툼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척 하는 사람들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말다툼일 수도 있고,

‘중간 전달자’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덧붙이거나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 벌어진 말다툼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설교 현장에서는 ‘말씀’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 주는

‘중간 전달자’ 역할을 했겠지만,

나중에는 모든 일에서 예수님을 대리하는 ‘중간 전달자’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삶’ 자체가 ‘중간 전달자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루카 9,1-2)”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힘과 권한’을 주신 일은,

그들에게 그것을 아주 넘겨주신 일이 아니라, ‘위임’해 주신 일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힘과 권한을 사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 힘과 권한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에 그것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복음을) 선포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선포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복음 선포는 사실상 예수님의 복음 선포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거짓 사도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다른 예수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듯이 예수님도 성령도 한 분이고, 복음도 하나뿐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인 길입니다.)

다른 복음과 다른 길이 있다고 선전하는 자는

백 퍼센트 이단이고, 사탄의 하수인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사탄과 사탄의 하수인인 거짓 사도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라는 말은,

사탄과 거짓 사도들은 하느님의 엄한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자들이 처벌을 받을 때 함께 휩쓸려서 처벌받지 않으려면

거짓 복음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마태 5,13-16).

(이 말은 각자 한 사람의 사도가 되어야 하고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산상 설교에는 자신이 받은 빛을 감추지 말고 사람들 앞을 비추는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만 강조되어 있는데(마태 5,15),

우리는 ‘빛’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는 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어디서 이상한 심리학 이론을 가지고 와서 복음을(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신앙생활을 변질시키는 자들도 있고, 성경은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다른 종교의 책만 읽고서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회 내부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 특히 더 위험합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 안에서 살면서 ‘말씀’대로 충실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 복음을 물리치는 힘은 ‘말씀의 힘’ 밖에 없습니다.


-조욱현신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두 사도는 열두 사도 중의 두 사도로서, 시몬은 사도들의 이름 목록에서 열한 번째에 놓인 사도이고, 가나 출신으로서 유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혁명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성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하며 최후 만찬 때 주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여쭈어본 사도였다. 성서에서는 유다를 가리옷 사람 유다와 구별하고 있다.

 

복음: 루카 6,12-19: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할 제자들을 선택하신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마르 3,14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즉 제자의 신분은 그분의 도구나 심부름꾼이나 종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함께 생각하고 염려하고 기쁨을 나누는 친구의 신분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죄 많고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친구로서 대하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큰 은총이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서로가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모두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한 공동체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각자가 모두 다르지만, 주님 안에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당신을 각자가 처한 삶의 장에서 증거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또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이 그렇게 특별한 교육도 받은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보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인간의 힘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모두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당신 사업의 중책을 맡기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절) 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제자는 본시 배우는 사람이요, 스승이란 가르치는 분이다. 여기서 제자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우고, 자신도 스승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말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배우고 따르며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부름을 받은 우리의 할 도리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께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뵐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열두 사도들이 믿음에 있어서 또 실천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은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선택해 주신 그분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산다면 우리도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이란, 즉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생활하고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께 다가가는 이유를 물으십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

예수님께서 바쁜 공생활 중에 시간을 내어 아버지 앞에 나아가십니다. 하느님 현존의 장소, 고요와 침묵의 장소인 산으로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그 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당신을 온전히 내어드린 선물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제자들을 뽑으시는 큰일를 앞두고 계셨지요. 아버지 안에 머물러 아버지 마음을 찬찬히 헤아리셨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당신의 뜻으로 받아안는 시간이 되었을 거고요. "밤새"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인 채로 완전한 사랑의 시간을 보내셨을 겁니다.

"그들을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루카 6,18)

예수님 곁에 모여든 군중은 나름 뚜렷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고, 또 치유도 원하지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예수님의 출현은 희망입니다.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루카 6,19)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닿고자 손을 뻗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힘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질병에서 구해준다는 걸 믿고 또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닿음으로써 영혼과 육신, 정신과 마음의 병이 달아난다니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드는 게지요. 군중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사실 접촉은 두 존재 사이의 매우 내밀하고 정감 있는 관계 맺음입니다. 이 터치에서 육신의 체온은 물론 마음의 지향까지 전달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전인적인 행위가 외적 의도만으로 욕망될 때 상대를 도구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선물을 주시는 주님을 마치 자판기처럼 왜곡할 수도 있지요. 

예수님께 힘껏 손을 뻗는 군중의 모습은 기도하는 영혼의 형상화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영혼의 손을, 영혼의 촉수를 길게 뻗어 하느님께 가닿고자 하지요. 눈먼이처럼 더듬거리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하면서 그분을 만지고자 애를 씁니다. 이 기도의 이유는 단 하나 오직 "사랑"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고 관계맺음이며 사랑입니다. 기도 내용이 청원일 때도 있고 하소연일 때도 있고 찬미와 찬양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목적 없이 그저 사랑 때문에 주님 앞에 머무르기도 하지요. 기도가 치유나 성공, 이윤 등의 목적에서 차츰 정화되어, 밤새 산에서 아버지 앞에 머무르신 예수님의 기도처럼 그저 "사랑"이 되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의 정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바랄 것도 없이 구원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 형성된 사도와 예언자들과 우리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 2,2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와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건물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신 거룩한 성전으로, "하느님의 거처"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사도, 예언자, 우리 모두는 한 생명을 지닌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이 여정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그래서 미완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불완전하고 약하지요. 그런데 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목적 지향의 자기중심성에서 서서히 벗어나  오직 "사랑"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깨닫고 체득하게 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분도 그걸 바라시고,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무엇도 바라지 않고 주님 앞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오직 숨은 이유, 바로 "사랑" 때문이지요. 주님은 간절히 이 또한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 온 존재와 힘을 다해 손을 뻗는 우리의 이유가 "오직 사랑"이 될 때까지 지치지 맙시다. 기도가 사랑 때문에 이어질 때, 우리도 사도들처럼 아버지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게 됩니다. 각자 삶의 필요를 잠시 내려놓고 그저 사랑만 지니고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심장 깊숙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지배할 때까지... 

성 시몬과 타대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관점의 변화  

-김찬선신부-


성 시몬과 유다를 한 데 묶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시몬과 유다가 주님과 형제였을 가능성 때문일 겁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


사도 시몬과 유다가 이 복음의 시몬과 유다인 것이 맞다면
시몬과 유다는 육신의 형제이면서 영적인 형제이고,
또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파견까지 받은 분들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다른 데서 환영받는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신 주님 말씀과 달리 주님의 신적인 소명을
진작에 알아보고 그 소명의 길에 합류한 드문 존재들인 셈입니다.

아니, 주님의 신적인 소명을 알아봤더라도 주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
메시아심을 몰라봤을 수 있을 것이고,
주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봤더라도 그 메시아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로마의 지배에서
구원하는 그런 메시아 정도로 알아봤을 것입니다.

혁명당원이었던 시몬이 주님의 사도가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보통은 자기 고향 사람을 예언자로 인정치 않는 법인데
어떤 이유에서였건 두 사도는 주님을 특별한 분으로 인정하고 존경하였으며
적어도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사촌이 아니라 주님을 시기치 않은 분들입니다.

사실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서 신성을 보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보통의 사람에게 나의 남편은 나의 남편이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나의 남편을 나의 남편으로 만나고 받아들인 것이지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받아들였거나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아들은 더할 것입니다.
나의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일지라도 나의 아들이고,
내 아들로 있기를 원하지 하느님의 아들로 내어주기 싫습니다.

그렇습니다.
속물인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사람은
사람에게서 신성을 보기 힘들고, 가까운 사람에게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형제들인 시몬과 유다가 예수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따른 것이 다른 제자들이 따른 것보다 어려운 것이고 대단한 것인데
우리도 지금은 보통 사람이기에 가까운 사람에게서 신성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성인들을 그저 추켜세우자는 것이
아니라 본받아 점차 사람들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자 되어가야지요.

사실 그러자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독서의 기도에서 성 치릴로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처럼 당신도 제자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면, 그 제자들의 모방자가 되어야 하는 우리'라고 합니다.
시몬과 유다가 주님의 형제에서 주님의 사도가 되기까지 
주님을 인간 형제로 보는 것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보는 
관점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고, 우리도 이런 두 사도의 모방자가 될 겁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0월 28일 월요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