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10. 19. 05:53

2020 10 20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5-38)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오늘 복음은 ‘주인을 사랑하는 종’의 이야기입니다. ‘종’이 ‘주인’을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종업원이나 사원이 고용주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열에 하나, 고용주가 자신을 가족처럼 대하고 자식처럼 아껴 준다면 고용된 이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은 주인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 구절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어떤 주인이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을 들겠습니까? 오히려 종이 주인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혼인 잔치에 다녀와 피곤할 터인데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듭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는 주인을 사랑합니다. 종은 늘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깨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며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어 있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우리를 귀하게 대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부부로부터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10년 전에 본당신부로 사목을 할 때의 본당 신자였는데, 저를 잊지 않고 연락을 주신 것입니다. 이 부부에게는 아이가 둘이 있는데, 정말로 많이 컸더군요.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어있었고, 너무나 어린 꼬마였던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어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큰아이의 사춘기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얼마 전에 자녀의 사춘기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어느 어머니와의 대화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감사했어요. 정말로 혹독하게 사춘기를 보냈거든요.”라고 아이의 엄마가 말하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 아이는 사춘기라는 것을 모르고 컸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축하할 일이 아니라고 많은 심리학자는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성장은 위기를 헤쳐나갈 때만 주어지기에, 사춘기가 없었다는 것은 그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또 한 가지는 ‘더 큰 위기’가 언젠가 찾아올 것이기에 그때 더 큰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 아이들의 부모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사춘기가 온 것을 오히려 감사해했습니다.

어렸을 때의 사춘기가 성인이 되었을 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삶의 고통과 시련의 문제에 대한 시각을 다시 갖게 합니다. 피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정면에서 부딪히고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삶은 또다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면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육과 영과 정신이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언제 오시는지 알 수 없는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라고 하시지요. 이는 인간의 세 시기인 소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의미합니다. 이 세 시기 내내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새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좋은 벗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된 그 많은 추억, 함께 겪은 그 많은 괴로운 시간, 그 많은 어긋남, 마음의 격동, 우정은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생텍쥐페리).



고통과 시련에 대해....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참 많습니다. 암과 같은 중병,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 오해나 순간의 실수로 생기는 불명예의 순간, 그리고 무엇보다 큰 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것입니다. 분명히 큰 고통이여 지금을 충실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시련입니다. 이를 마주했을 때 보이는 반응이 보통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고통과 시련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사람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은 이런 유형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 고통과 시련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며 견디어 내는 사람입니다.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 내기가 힘들어 술이나 약의 힘을 빌리기도 합니다. 아무튼, 위축된 삶을 살아가는 유형입니다.

마지막은,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오히려 한 걸음 나아가며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이 안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찾으며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삶의 기회가 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역사 안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도, 소위 금수저로 태어나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근심, 우울, 무기력, 공황: 사막 위의 펭귄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깨어있음’이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라고 충고하십니다. 당시 혼인 잔치는 일주일 동안 지속하기도 하였기에 종은 일주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하다시피 하여 언제 올지 종잡을 수 없는 주인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깨어있음’을 넘어서서 ‘삶의 활력’에 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이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시중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은 종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자신이 따르는 뜻의 주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먹어야 힘이 나는데, 그 힘은 깨어 주인의 뜻을 따를 때 그 주인에게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2019년 6월, 방송, 연극, 영화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전미선(50)씨가 갑자기 극단적인 선택을 했었습니다. 출연 예정이었던 드라마도 있었고 송강호씨와 함께 한 영화 개봉도 앞둔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하던 30년 차 중견 배우가 무엇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그녀는 우울증 치료중이었습니다. 당시 전미선의 소속사는 전미선의 사망 원인에 대해 “평소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됐다”며 “충격과 비탄에 빠진 유가족을 위해 확인되지 않은 루머에 대한 자제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전미선씨는 “죽기 전까지 연기하고 싶다”, “기억력이 없어질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우울할 이유도 없는데 남편과 자식까지 남겨두고 극단적 선택을 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본인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고인이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우울증 증세가 있는 것을 알아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중견 배우로서 이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이고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삶의 에너지를 충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은 생명체가 마치 신이나 된 것처럼 삶의 에너지를 자신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처럼 믿게 합니다. 저절로 진화했으니 에너지도 저절로 충전되는 것처럼 믿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맘만 먹으면 우울함과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렇게 진화론을 믿는 일부 상담가들도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더 큰 무기력과 절망으로 이끌 수도 있음을 간과합니다.

      누군가가 무기력은 ‘사막 위의 펭귄’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펭귄인데 사막 위에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때 무엇을 먹어야 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근심, 초조함의 증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막과 같은 환경에서 음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울하게 느껴집니다. 삶의 에너지가 소진되지만, 음식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상담을 받으면 끊임없이 움직이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음식을 발견할 것이라 말해줍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써서 살아갈 힘을 찾지만, 사막에서는 좀처럼 펭귄의 음식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어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만약 운 좋게 오아시스라도 발견을 하면 상담가는 “그것 보세요, 되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펭귄은 오아시스에서도 오래 살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충고는 끊임없이 한 방향으로 걷다 보면 탈출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향을 알려주지 않으면 사막을 헤매다 끝납니다. 혹은 적도만 걷다가 지쳐 쓰러집니다. 펭귄은 온도가 낮은 쪽으로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먹이가 충분하고 살기에 적당한 곳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사는 환경은 내가 따르는 ‘뜻’입니다. 나의 뜻일 수도 있고, 부모의 뜻일 수도 있고, 나라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누구의 뜻이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태어날 때의 자기 뜻만을 따른다면 모기나 기생충처럼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공동체에 속할 수도 없게 됩니다. 만약 부모의 뜻만을 따른다면 착한 마마보이로 자랄 것입니다. 나라의 뜻만을 따른다면 애국자라 불릴 수도 있지만, 국수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에너지가 소진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따르는 뜻을 주는 그 대상이 자신에게 그 뜻을 이룰 양식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양식을 줍니다. 그 양식 안에 자기 뜻도 함께 넣어줍니다. 뜻이 내가 사는 환경이고 그 뜻을 주는 대상이 에너지도 줍니다.

 

      하지만 피조물이 피조물을 배부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몸은 배를 불려도 영혼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영혼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순종해야 할 뜻은 나를 만든 이의 뜻이어야 합니다. 내가 사람인데 늑대의 뜻을 따른다면 늑대가 주는 양식을 먹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늑대 수준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러면 다 채워지지 않은 배고픔으로 끝없는 공허함과 배고픔을 느낍니다.

 

      아이는 태어나서 부모의 뜻을 따르고 부모가 주는 양식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춘기를 넘으면 이제 새로운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 뜻을 주는 대상은 반드시 자신을 창조한 이여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충전시킬 수 있는 능력은 그것을 만든 인간뿐이고,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 운전할 수 있는 대상도 인간뿐입니다. 만든 대상을 만나지 못하면 뜻도 알지 못하고 에너지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면 무기력과 우울증으로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믿어도 속으로는 배고픔에 쓰러지고 맙니다.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창조자를 만나지 않으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은 자신의 영혼도 만든 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영혼이 배고프면 영혼을 만든 분을 찾아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양식이 충분한 곳에 살게 됩니다. 그분의 뜻을 따를 때 펭귄은 사막에서 벗어나 남극에 머물게 됩니다. 뜻을 바꾸어야 먹이가 풍부한 환경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르는 이에게 당신 손수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이가 50대가 되면 지금까지 추구해 온 모든 것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옵니다. 많이 이뤄놨어도 배가 고픕니다. 그러면 사막에서 펭귄이 먹이를 찾는 것처럼 또 고생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음식을 주지 못하는 누군가의 뜻을 따르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따르는 그 뜻을 바꾸지 않으면 사막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지배하게 만듭시다. 그러면 내가 하느님 나라에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먹고 마실 것이 풍부합니다.


-조재형신부-

서양의 사상과 종교는 ()’를 이야기합니다도는 율법과 계명이 됩니다도는 기준과 원칙이 됩니다도는 진리와 생명이 됩니다그러기에 도와 도가 아닌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빛과 어둠선과 악진실과 거짓본질과 현상죄와 벌전쟁과 평화천국과 지옥남과 여삶과 죽음이 있습니다이런 도는 나와 너를 구별하게 합니다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게 합니다행복과 불행을 구별하게 합니다공존을 위해서 대화와 타협을 하기도 하지만 도가 아닌 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폭력과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이러한 삶의 태도는 지금도 계속이어지고 있습니다종교적인 신념의 차이로 폭력이 벌어집니다국가의 이익을 기준으로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이 생깁니다. ‘G7, G20, OECD'와 같이 경제적인 규모와 힘에 의해서 국가를 구별하기도 합니다서양의 사상과 종교가 가지는 장점이 분명 있습니다현대문명의 토대가 되었고산업화와 자본주의로 인류를 풍요롭게 하였습니다과학과 기술로 인류의 수명은 길어졌습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라고 항상 말하는 도()는 없다.” 현상과 본질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선과 악이 하나라고 합니다자연과 인간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부분을 보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를 보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지금은 남한과 북한이 둘로 나뉘었지만 원래는 하나였습니다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분단의 벽을 높이 쌓고 있지만 언젠가는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한민족입니다과학자들은 미토콘트리아를 분석하면서 인류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피부색은 달라도사는 곳은 달라도종교가 달라도문화가 달라도 결국 우리는 하나에서 시작되었고하나가 되어야 합니다양자역학은 노자의 도덕경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격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에는 파동과 입자가 동시에 존재합니다미시세계에서는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존재하기도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물질이 있어서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생기는 겁니다우주는 에너지와 기로 연결되어 있습니다차별과 구별이 아니라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아버지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0 -23) 우리가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위격으로는 구별되지만 같은 하느님이십니다예수님께서는 도는 항상 같은 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셨습니다첫째가 꼴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가난한 사람우는 사람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하나였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도라고 항상 말하는 도는 없다.’는 말을 자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반영억신부-


베드로의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

‘깨어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을 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요즘은 가정방문을 하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본당신부를 할 때에 가끔 예고 없는 방문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말입니다. 그러면 행복해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집안 정리를 잘해 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열심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그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하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물론, 집안 정리가 잘 되었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이 맑은 것도 아닙니다만 열심히 활동하는 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안 정리를 하지 못해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깨어 있어 행복한 오늘입니다. 항상 깨어서 안밖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종은 그 신분상 겸손할 수밖에 없고 순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참으로 겸손하고 순종적이면서 바로 이웃에겐 그토록 교만하고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깨어 있는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깨어, 기다리던 주인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깨어 있어라. 
-송영진신부-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는 말씀은,
“항상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라.” 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종말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은,
종말과 재림이 오늘 이루어져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주님을 잘 맞이합니다.
또 종말과 재림이 늦어져도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과 ‘구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이라는 말씀은,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가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이라는 말씀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그 문을 여는 일은 우리가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은 손님으로서 오시는 일이 아니라, 주인으로서 오시는
일이고, 문을 두드리는 일은 당신 집의 문을 두드리는 일입니다.
(묵시록의 말씀에는 ‘그의 집’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그래도 집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문을 두드리는 것은 주인의 권한으로 하는 일이고, 만일에 우리가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제 때에 문을 열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주인의 권한으로 우리를 처벌하게 될 것입니다(루카 12,46).
<우리 인생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12,35-38: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이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하신 말씀과 비슷하다. “그것을 먹을 때는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이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라 하였다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이것은 정의와 연관된 것이다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우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허리에 띠를 동이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의 영에 좋은 것을 함께 찾아야 한다가야 할 길을 끝까지 다 가지 않으면 한평생 믿음으로 산 것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바르나바의 편지 4,9) 때문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그 종들은 행복하다!”(38주님께서 어느 때 오시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사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사랑받으시기를 원하신다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 삶이며이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한상우신부-

주님과의
관계가
행복을
결정 짓는다.

행복은
선택이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행복의 기쁜
시작이다.

우리에게
주시는
참행복이다.

행복은 주님을
향해 있는
마음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의
모든 행복이
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그 주님을
향해
깨어있는
것이다.

행복을
일상안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를
보아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믿을수록 기쁘고
사랑할수록 행복한
주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행복은
공간의 의미가
아닌 깨어있는
마음의 자세이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행복은
주님께서 주시는
주님의 것이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신다.

행복은 최선을
다하는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깨어 있고
사랑하기에
기다리고
사랑하기에
기쁜 것이다.

서로 행복한
주님과 종의
관계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두 존재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인과 종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과 우리 관계를 이야기하십니다. 주인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돌아올 때 종이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는지 보여 주시지요.

으례 혼인 잔치는 며칠씩 계속됩니다. 요즘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교통 수단도 변변치 못한 때니, 집에서 기다리는 이는 출타 중인 사람에게 마음이 많이 쓰입니다. 도착이 언제일지 모르니 긴장의 끈이 쉬이 놓아지지 않겠지요.

"허리에 띠를 매고"

외적인 자세입니다. 쉬거나 잠들지 않고 언제라도 당장 일어나 움직일 수 있는 태세지요. 옷을 단단히 허리띠로 여미는 건 맞이하고 여독을 풀게 도울 때 걸리적거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는 무언의 상징이지요.

"등불을 켜 놓고"

캄캄한 어둠이 닥쳐도 주인이 멀리서 불빛을 보고 찾아올 수 있도록 등불을 켭니다. 상대의 안전을 위해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이겠지요.

거기에 더해 이 말씀은 영혼의 준비까지도 포함합니다. 마치 등불이 반짝이듯 영혼도 밝게 빛나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이지요. 이는 육신을 회복시키는 물리적 잠을 거부하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 주인(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이 계속 타오르게 하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주인의 도착으로 깨어 기다린 보람을 느낀 종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또, 지금 이 순간에는 주인 역시 그에 버금가게 무척 행복합니다. 누군가 기약없는 나를 충실히 기다리며 기억하고 고대했다는 뜻이니까요. 그것도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과 "종"으로 비유하셨지만, 사실 비유 속 두 존재의 모습은 연인에 가깝습니다. 기다리는 이는 충심을 다해 열렬히 기다리고, 오는 이도 사랑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 옵니다. 이 좁혀지는 거리를 관상하다 보면, 아가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내게 문을 열어 주오, 나의 누이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여!
내 머리는 이슬로,
내 머리채는 밤이슬로 흠뻑 젖었다오."(아가 5,2)


그렇게 만난 두 존재는 행복합니다. 기다린 이는 갈망하는 이를 맞아들였기에 행복하고, 달려온 이는 드디어 그를 만나서, 그의 사랑을 확인해서 행복합니다.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만큼 주인은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종도 더 바랄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이 벅차도록 설레는 해후의 절정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 언젠가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에페 2,13)


하느님을 모르던 우리가 하느님과 가까워집니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 제사와 속량을 통해 우리가 그분께 나아간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도 기꺼이 우리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8)


그리스도의 제자요 벗이며 신부가 된 우리는 어느 민족, 어느 태생이든 관계없이 한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각자 출발점은 다르지만 하느님을 향해 점점 모여듭니다. 이 좁혀지는 거리의 정점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거기 그분 안에서 우리는 만나고 일치하며 하나가 됩니다.

이 상태가 곧 평화입니다. 저마다 다른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서로 존중하고 포용하며 일치를 이루는 그때, 우리는 자신을 잊은 채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는 완전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능력으로 끊임없이 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있고, 그분께 "나아가는" 중입니다. 서로가 결합하여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에페 2,22)

사랑하는 벗님! 이렇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점점 좁혀지고 있습니다. 무한히 근접하는 정점을 향해 서로 나아옵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듯, 주인이 설레며 달려오듯 하느님과 우리는 서로를 향해 움직입니다. 상대가 가까워질수록 흡족하고 충만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 내부를 꽉 채울 때, 묵직한 평화가 밀려듭니다.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벗님! 말씀이 우리를 종이라 부르시든, 신부라 부르시든 사랑을 마음에 한가득 안고 열렬히 주님을 기다립시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기쁨에 겨워 달려오시는 주님을 향해 마주 나아갑시다. 기다림은 갈망이 연소되어  더 큰 사랑의 불을 일으키는 시간입니다. 이 여정 안에 계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우리, 지치지 말고 사랑하는 분을 충심으로, 열렬히, 반짝이며 기다립시다. 

주님께서 상을 차려주시면   

-김찬선신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을 들 것이다."


얘기를 들은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이번 인사이동 때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그래서 허락이 된다면 저는 협동조합의 <여기 밥상>이라는 사업 중에서
이라는 밥상머리 봉사를 할 계획입니다.

이것은 제가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사목이었습니다.
제가 육신의 식탁 봉사도 하고, 영혼의 식탁 봉사도 하는 것이고,
그래서 육신의 양식도 제공하고, 영혼의 양식도 제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뜻깊은 만남을 신앙적으로 갖고 싶은 분들,
예를 들어 생일이나 서약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뜻깊은 날을 맞아
그것을 축하하는 식사를 하고자 할 때 일반식당에서 축하하기보다
저의 에 오시면 저는 다른 손님은 받지 않고, 오직
그분들만을 받아 하나의 밥상을 마련하고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양식을 취하기 전에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영혼의 양식도 드시게 하겠다는 것이고, 특히 서약 피정이나
단체 피정 또는 교육을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선 피정 강의도 해드릴 겁니다.

제가 이런 꿈을 갖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께서 하신 것을 따라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데,
최후 만찬 때 주님께서 만찬을 마련하시고 식사를 같이 나누신 것이나,
밤새도록 고기를 잡은 제자들을 위해 생선을 구워 상을 차려 주신 것이나,
당신을 충실하게 기다린 종을 위해 밥상을 차려 주시고 시중을 드시겠다는
오늘 복음의 주님을 본받아 식탁 봉사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의 육적, 영적 식탁 봉사를 통해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주님의 시중을 받고 있다는 행복을 여러분도 느끼게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오늘 비유의 뜻은 자명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종이란 이 세상 삶을 열심히 살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천국에 든 종이고, 거기서 주인님이신
우리 주님은 풍성한 천상 식탁을 제공하고 시중까지 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즉시 떠오르는 것이 시편 23편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몸 뉘여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내 원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향기름 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외다. 한평생
은총과 복이 이 몸을 따르리니 오래오래 주님 궁에서 사오리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 잔치와 밥상은 너무 황공하고 부담스럽다고 초대에 거절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오늘 비유에 나오는 행복한 종이 아닙니다.

그런 밥상과 잔치는 관심도 없다고,
또 다른 비유에서 잔치에 초대받고서 아랑곳하지 않고 밭 갈러 가고
장사하러 간 사람들처럼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행복한 종이 아닌 것 정도가 아니라 불행한 종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행복한 종이고자 한다면 좀 이기주의적이고,
염치가 없을지라도 이런 잔치와 밥상을 차려 주심에
주님께 감사드리고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도 이 초대에 같이 가자고 초대하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 대신 주님 밥상을 차리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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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이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시중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은 종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자신이 따르는 뜻의 주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먹어야 힘이 나는데, 그 힘은 깨어 주인의 뜻을 따를 때 그 주인에게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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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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