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19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10. 18. 06:35

2020 10 20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5-38)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오늘 복음은 ‘주인을 사랑하는 종’의 이야기입니다. ‘종’이 ‘주인’을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종업원이나 사원이 고용주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열에 하나, 고용주가 자신을 가족처럼 대하고 자식처럼 아껴 준다면 고용된 이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은 주인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 구절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어떤 주인이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을 들겠습니까? 오히려 종이 주인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혼인 잔치에 다녀와 피곤할 터인데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듭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는 주인을 사랑합니다. 종은 늘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깨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며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어 있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우리를 귀하게 대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너무나 좋아했던 군것질이 있습니다. 바로 번데기입니다. 학교 앞에는 손수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번데기를 파시는 아저씨가 계셨지요. 이 아저씨에게 돈을 내고서 동그란 원판에 화살을 잘 던지면 번데기를 더 먹을 수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종이 고깔에 가득 담아 준 번데기, 번데기가 입안에서 터질 때 느껴지는 고소함은 어린 저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종이도 아니었음에도 맨 밑에 남아 있던 국물까지도 아까워서 쭉쭉 빨아 먹었습니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이 번데기를 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사 먹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징그럽다고 도망가는 사람도 꽤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긴 어느 방송을 보니 번데기가 세계 혐오 음식 7위에 올라와 있더군요.

어렸을 때는 모두가 즐겨 먹었기 때문에 혐오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하긴 남미에 가니 우리나라의 치맥처럼 그 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꾸이’라는 음식이 있더군요. 저는 이것을 죽어도 먹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음식은 쥐와 거의 똑같은 ‘기니피그’ 요리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는 것을 우리는 멀리하지 않습니다. 함께 함은 좋은 기억을 계속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함께 함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탐욕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정의를 위한다고 예수님께 청을 했겠지요. 그러나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형과 함께 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돌아갈 돈인 유산을 원했던 것이지요. 이런 탐욕은 이 형제가 함께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합니다. 탐욕은 오히려 형제를 갈라지게 합니다. 많은 성인·성녀들께서도 이 탐욕을 경고하셨습니다. 이 탐욕이 하나의 우상숭배라고 말이지요. 우리의 형제와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 원리를 가지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이어집니다. 이 부자는 하느님 사랑이, 장차 올 세상에 필요한 유일한 준비물인 선한 행실이라는 습관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이들은 준비 없이 최후를 맞아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것이란 재물이 아니라 덕행을 사랑하는 것이며, 생명과 구원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연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짓는다(루이스 파스퇴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분이 빵집에 갔다가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케이크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맘고생크림케이크’

자기 자신도 요즘 힘들어서 맘고생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맘고생을 하면 이런 이름의 케이크까지 생겼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빵집 직원에게 이 케이크를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여기 맘고생크림케이크 하나 주세요.”

그런데 직원이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네? 네?”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직접 가리키면서 “이거요.”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이 케이크 이름을 잘못 읽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케이크의 이름은 이러했습니다.

‘망고 생크림 케이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보는 것도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긍정적이고 사랑이 담긴 마음, 희망과 기쁨이 담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도 그렇게 보입니다.

비우려면 가져야 하는 믿음, 내 것-근심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어떤 억울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형이 모든 유산을 가로챈 것입니다. 아마 형도 예수님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예수님께 형을 좀 설득해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 청원에는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하시며, 그런 청을 하는 동생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탐욕을 없애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탐욕은 모든 인간들 안에 원죄로 남게 되었고, 그 탐욕이 모든 죄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콜로 3,5)라고 말하고,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합니다.

 

      저에게도 많은 분이 돈에 대해 기도를 해 달라고 청하십니다. 물론 딱한 사정들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 그런 기도를 드릴 때 들어주실지 항상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기껏해야 돈이나 벌어다 주는 그런 분으로 만들어버리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도 그런 기도의 청을 받을 때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친애하는 자매들이여, 우리가 할 일은 세속의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 집을 찾아와 기도를 부탁하면서 연금이나 재물을 하느님께 빌어달라고 할 때, 나는 우습다가도 곧 슬퍼지곤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모든 것을 박차버릴 수 있게 주님께 빌었으면 싶은 것입니다. 그들의 뜻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경우, 하느님께서 그런 일에는 결코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정성을 보아 나는 응하여 줍니다.”(『완덕의 길』 1장)

 

      돈이 나쁜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이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욕구를 없애러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꾸 그런 것을 청하면 구원과 멀어지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뺄셈을 하며 살아야지, 덧셈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이렇게 청하는 마음 안에는 많이 가질수록 행복하다는 잘못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먹고 입고 잘 것은 있어야 하지만, 생존 이상의 것은 더 가질수록 더 근심스럽습니다.

 

      2017년 3월 27일, 미국 뉴욕시 맨해튼 한 호텔 24층 객실에서 50대 남자가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찰스 머피’였습니다. 찰스 머피는 월가의 소위 잘나가는 투자관리자로 수백만 달러의 투자를 연달아 성공시켜 이름을 날리며 백만장자 대열에 들어선 그야말로 성공의 신화가 된 사람입니다.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우울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난한 사람들이 우울증에 많이 걸릴 것 같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나라 부자들이 모여있는 서울 강남 3구가 인구 10만 명 당 우울증 치료 건수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물론 돈이 있어서 그만큼 많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이유도 있겠으나 돈이 있다고 기쁘지 않은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의 억만장자 아돌프 메르클레(74)가 2009년 1월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일도 있습니다. 그는 독일 내 5위의 부자이며 ‘포브스’ 선정 세계 부자 순위에선 94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지구적 금융위기로 자신의 피땀으로 일군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논평에 보면 그가 모든 것을 처분하고 빚을 갚고 나도 1조 원 정도의 돈이 남았을 것이라는 글도 있었습니다. 통장에 1조 원이 남아도 자살하게 만드는 것이 재물입니다.

 

      많이 소유하면 많이 행복하다는 헛된 가르침을 아이 때부터 치워버려야 합니다. 많이 가지면 그만큼 근심이 늘어납니다. 이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에서도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옷이 많으면 무엇을 입어야 할지 근심하게 되고, 차가 많으면 어떤 차를 타야 할지 근심하게 됩니다. 애인이 많아도 어떤 애인과 결혼해야 할지 근심이고 가진 책이 많아도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근심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사람들은 한 가지 옷과 신발만 입고 신었습니다.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이유는 많이 외롭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공허함을 물질로라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느낌으로 자란 아이들은 커서 안 쓰는 물건도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심하면 병이 되어 집안이 쓰레기로 가득 차기도 합니다. 걱정이 많아서 물건이 많아지는 것인지, 아니면 물건이 많아서 걱정이 많아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둘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하기도 하였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뺄셈하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많이 비워야 채워질 사랑의 공간이 넓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탐욕을 경계하라 하시며 곳간을 새로 짓는 부자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곳간만 짓다가 구원을 못 받는 사람입니다. 집에 수납장이 있으면 반드시 채워집니다. 쓸모없는 것으로라도 채워집니다. 사실 채워지지 않아도 걱정이고 채워져도 걱정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탐욕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십일조’입니다. 십분의 일을 주님께 봉헌하며 나머지 모든 것도 주님 것이라고 고백하고 내 것처럼 여기지 않으면 그것들이 더는 근심거리가 되지 않게 됩니다. 가진 것으로 친구를 사귀십시오. 재물이 아니라 관계가 행복입니다. 그러기 위해 재물을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근심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내 것은 곧 근심거리입니다.


-조재형신부-


불나방은 불을 좋아해서 불 속으로 날아갑니다불 속으로 들어가는 나방을 우리는 어리석다고 합니다죽을지도 모르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나방만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사람들도 명예재물권력이라는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도박마약도벽의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욕망시기질투라는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허영교만위선의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평생을 힘들게 쌓아왔던 명성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기도 합니다평온했던 가정이 깨지기도 합니다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도 합니다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손가락으로 정보를 쉽게 검색할 수 있습니다그러기에 식별의 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가짜뉴스와 거짓뉴스의 불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가짜뉴스와 거짓뉴스는 자극적이고선동적이기 때문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릇된 뉴스의 불 속으로 들어가고다른 사람까지 초대하고 있습니다분노와 비방을 유발하는 뉴스를 검색하는 시간을 줄이면 좋겠습니다따뜻하고 아름다운 뉴스를 검색하고 이웃과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어리석은 자야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어머니의 장례에 함께 해 준 동창신부님들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습니다뉴욕에 있어서 갈 수는 없고 동창회장 신부님께 송금을 해 드렸습니다기분 좋게 송금했는데 나중에 보니 동그라미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순간 당황했습니다동창회장 신부님도 저의 마음을 받았고일부는 돌려주었습니다저도 예전에 지구장 신부님의 착각으로 적지 않은 금액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신부님께서는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본당 건축기금으로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신문사에도 후원금을 보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그분들은 선행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선행은 잘못 전달되는 경우가 없습니다선행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선행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선행은 연옥에 있는 분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식당 탁자 위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산다.’ 분명 우리는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과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 끝이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합니다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여유가 없어서가난해서몸이 아파서 선행을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선행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기도자선희생봉사나눔친절온유겸손도 선행입니다시간이 없어도여유가 없어도가난해도몸이 아파도 우리는 충분히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영원히 썩지 않고사라지지 않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십니다세상의 것들은 사라지고좀이 생기고남이 와서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고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우리는 어디에서 와서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가장 믿을 만 한 분은 누구일까요그렇습니다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세상의 곳간에 쌓아 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선행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썩어없어질 창고가 아니라, 영원히 안전한 창고인 하느님의 창고 안에 부(富)를 쌓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살다보면 참 특별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청빈을 서원한 수도자에 대한 개념이 없으셔서 그런지,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다. 금방 갚아드릴테니 돈을 좀, 그것도 엄청난 금액을 빌려달라 하십니다.

  

어떤 분은 때만 되면 골백번도 더 전화하셔서, 그 유명한 족보를 강매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벨기에 출신 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하시다 돌아가신 구신부님께서는 강권에 못이겨, 결국 구씨 족보 책을 두권 사기까지 하셨습니다. 백과사전, 전집류, 20부작 다큐멘터리 영상물 등등...

  

복음선포 활동에 매진하시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군중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사람이 불쑥 튀어 나오더니 한다는 말!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복음 12장 13절)

  

참으로 희한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들 유산 문제를 자기들끼리 해결하지, 왜 정신없이 바쁘신 예수님께 부탁하는지,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척 당혹해하시고 어이없어 하시며, 세상 웃기는 청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루카 복음 12장 14절)

  

예수님께 세상 웃기는 청을 한 그 사람은 아마도 장남인 형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게 유산을 배당 받았는가 봅니다. 너무나 억울했던 나머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개석상에서 예수님께 청을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지만, 그가 너무나 재물에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유산을 적게 배분받은 것에 대한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에게 진리나 영원한 생명이나 구원 같은 더 중요한 요소들은 뒷전으로 완전히 밀려나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생각에 온통 빠져있었기에, 영적인 삶이나 신앙이나 하느님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늘 우리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호회나 취미활동, 만남이나 티비 드라마에는 몇 시간, 몇일이고 투자하지만, 생명과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 찬 성경이나 영성서적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보다 본질적이고, 보다 중요하고, 보다 우선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선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것이 흠뻑 빠져 있습니다. 재물이 하느님보다 훨씬 우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복음 12장 20~21절) 

 

예수님 말씀 하나도 틀린 것 없습니다. 백번 천번 지당한 말씀입니다. 세상 떠나시면서 평생 모은 재산이 들어있는 통장 손에 들고 떠나시는 분, 단 한명도 못봤습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우리 모두는 빈손으로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그분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는 사람들 많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원한 안전은 오직 하느님 손길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부(富)는 하느님 앞에서의 부입니다. 그 부는 영적인 부이며 살아생전 나눔과 희생, 봉사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쌓아올린 부입니다.

 


그 부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안전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썩어없어질 창고가 아니라 영원히 안전한 창고인 하느님의 창고 안에 부를 쌓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참부자가 되십시오  

-반영억신부-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참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잘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자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재산을 쌓아놓고 다투며 사는 것보다 야훼를 경외하며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잠언15,16). “돈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돈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욕심을 부린다고 더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전도5,9). 재산에 욕심이 생기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해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제 재산을 가지고도 즐겁게 살 줄 모릅니다(집회14,5).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마저 버리십시오(잠언23,4). 인간에게 주어진 욕구는 정당한 영역이나 이미 충분한데도 욕심을 내는 것은 탐욕입니다. 모든 탐욕은 우리를 멸망에로 이끌어 갑니다.

“재물은 조금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집니다”(하바2,5). 그러므로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올바른 마음으로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황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토비12,8).

사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현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결코 부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부자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가 되십시오. 석가모니도 말했습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느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만 믿고 자신이 옳고,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때로는 욕심을 부려야 하겠지만, 정당한 욕구의 수준을 넘어선 욕심을 탐욕이라고 합니다. 충분한데도 욕심을 부리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신명기 (8,17-18)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하느님께서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당신의 계약을 이행하셔서 오늘 이처럼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여라”.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탐욕을 조심하여라. 
-송영진신부-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3-15)”

지금 이 상황은, 형제간에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툼이 생겨서
예수님께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들어주기를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듣는 앞에서 ‘탐욕’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형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라는 말씀은,
세속의 일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1) 이 말씀에서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가 다투는 것은 ‘죽은 이들의 다툼’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다툼을 해결하는 것도 ‘죽은 이들’이 할 일입니다.
2) 예수님 말씀을, “나는 너희의 탐욕을 채워주려고 온 것이 아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속의 부귀영화를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께 청해야 할 것도
세속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3) 뒤의 말씀을(탐욕에 관한 가르침을) 그 사람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즉 형제간의 다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 유산 상속 문제에 관한 다툼이 생긴 원인은 ‘탐욕’이기 때문에,
둘 다 탐욕을 버리면, 또는 한쪽이라도 탐욕을 버리면 그 다툼은 바로 해결됩니다.
(만일에 둘 다 끝까지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그 다툼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생명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돈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그 돈으로 선행과 사랑 실천을 많이 할 수 있고,
그러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만일에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선행과 사랑 실천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선행과 사랑 실천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마음과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됩니다.
마음속에 선도 없고 사랑도 없이 돈으로만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서 그 돈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서 더 유리하다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다는 뜻이고,
그러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어떤 부자가 진심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한다면, 언젠가는 ‘빈손’이 될 것이고,
‘빈손’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어차피 돈이라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자였던’ 사람이 많지만,
‘부자인 채로’ 생을 마친 사람은 없습니다.



탐욕에 관한 가르침 뒤에 이어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많이 가진 자들이 잘난 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혜가 아니고,
어리석은 탐욕일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가 모은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또 그는 자기의 목숨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또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세상 만물은 주님이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재산도, 목숨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시간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이웃에게 고마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죄 - ‘탐욕’입니다.
또 그는 혼자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죄 - ‘방탕’입니다.
또 그는 내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고,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죄 - 교만입니다.
여기서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은,
“누구의 차지도 되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늘 밤에’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에게 몇 시간의 여유는 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12,13-21: 어리석은 자야!

너희는 주의하여라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고 하신다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한다그런데 탐욕을 경계하는 것이 사랑으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 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사랑을 자기 몫으로 물려받은 우리는 그분을 성가시게 할 것이다그러나 청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내가 가지고 있는 이 좋은 신앙을 나누어 가지도록 일러 달라고 할 것이다.


탐욕은 악마의 함정이며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이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막대기와 돌을 섬기는 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탐욕은 악한 영들의 올가미이다그것을 인간을 옭아매어 멸망으로 끌어간다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조심하여 크고 작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신다이 탐욕은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인류가 다 싫어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엄청난 소출을 거두고 근심에 빠져 한심한 말을 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17그는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다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도 않았고괴로워하는 이들을 동정하지도 않았다그는 땅에서 소출을 거두듯이 자기 목숨의 길이를 정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19). 그러나 부자는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재산은 사람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잠언 13,8)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그런 재산이 없다그는 최후의 심판 날에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2)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그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가 자신의 곳간보다 더 안전한 창고라는 것을 몰랐다그 재산을 가난한 이들의 배에 쌓았더라면세상에서는 모두 없어졌겠지만하늘에는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재물을 쌓아 둔다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사는 동안 모은 재물은 유산으로 상속된다선행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가 된다자비만이 우리를 따라온다그것이 우리를 하늘나라와 첫 번째 거처로 인도한다그래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말씀하셨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며영광스러운 희망을 지닌 사람이다누가 그런 사람일까재물보다 덕을 사랑하는 사람그의 손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모든 힘을 다해 없는 이들의 슬픔을 달래 주는 사람이다그는 하늘에 있는 곳간에 보화를 쌓는다그는 덕행과 바른 삶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누가 주인인지 물으십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형제 간 유산 다툼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재산 문제는 비단 예수님께 와서 호소한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예수님은 비유까지 들어 이르십니다.

살려면 재물이 필요하지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정신적 영적 존재이기는 하나 육신을 지녔기에 생명을 유지하는 각종 수단이 필요하고, 그 수단을 얻으려면 상응하는 물질이 지불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자본주의 사회, 자유경제 체제 아래 살아가려면 재물 없이는 곤란합니다.

문제는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수단으로  재물을 균형 있게 사용하기보다, 재물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재물은 인간의 주인 자리를 꿰어차고 또다른 우상 자리를 차지해 버렸지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제공되는 공평한 미래입니다. 그 때를 미루는 데 재산이 활용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영원히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죽음 앞에서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절감합니다. 생명을 자기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으니까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비유 속 부자는 줄곧 자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의 시선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 "내 모든 곡식과 재물", "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등등 그에게 재물은 오직 자신의 안위와 평안, 영화를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에게는 이 모두를 허락하신 주님께 대한 감사도, 함께 수고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도, 굶주리는 이웃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그는 이처럼 철저히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의 부유함"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부유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유형의 재물로는 그분 앞에서 부유함을 뽐낼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분의 것이고 어떤 연유로 잠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일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베푸시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9-10)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물질적인 재물들과 영적인 선물들 모두는 하느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재산과 관계, 성품과 이성, 믿음과 은총까지 그 어느 것도 우리 자신에게서 저절로 생긴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제 것도 아니면서 자랑할 수는 없지요. 그저 주신 분의 의향을 잘 살펴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선행"

사도는 우리 창조 목적을 콕 짚어 이야기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자녀로 창조된 우리기에 선행을 하도록 존재적으로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을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선한 목적으로, 선한 방식으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욕망과 재물을 과도하게 탐할수록 선함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각박하고 인색해지며 오늘 비유 속 부자처럼 자기중심적, 이기적으로 변해갑니다.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응당 그래야 하고 그게 당연하다는 유혹에 쉬이 영합하지요. 그게 사람의 시선을 하느님에게서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재물'이라는 우상이 바라는 바이고, 탐욕의 속성입니다. 이런 이는 지상에서 사용하는 숫자 상으로는 부자일지 모르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분과 어울릴 수 없는 가련하고 비천한 존재일 뿐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에페 2,10)


완전한 선이신 분이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시고는, 선을 행하도록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창조의 본질은 그래서 선입니다. 우리는 본래적으로, 태생적으로  받은 선함을 마음껏 발휘하고 한껏 꽃피우며 살아가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이를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곧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이지요.

주님께서는 재물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많이 가진 부자들을 부정적으로 보지도 않으시지요. 오히려 세상은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재산을 선하게 사용하는 착한 부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받은 능력을 십분 활용해 재화를 모았다는 성취감에, 나눔이 주는 보람이라는 선물까지 덤으로 받을 것이고, 사람 앞에서도 하느님 앞에서도 부유한 이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진리만 잊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한 번 허락된 생명을 누리면서 내 것도 아닌 것을 움켜쥐느라 하느님에게서 점점 멀어진다면 참 부질없는 삶이 되어 버리겠지요.

주님께서 허락하신 재물을 감사히 사용하고, 지혜를 다해 잘 관리하며, 사랑으로 나누는 주님의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쌓이고 쌓인 선행의 기쁨과 보람이 우리를 진짜 부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아멘.

하느님의 작품   

-김찬선신부-


“너희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돈이 없어서 죽는 사람이 아직도 많고
전 세계로 눈을 돌리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난했다면 벌써 죽었을 사람이 돈 때문에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모 재벌 회장은 몇 년 동안 생명을 연장하고 있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모르긴 하지만 만약 그에게 의식이 없다면,
또 의식이 있어도 정상적인 생활을 그가 할 수 없다면
그렇게 연장하는 생명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며 그래서
생명은 어떤 생명이어야 하고 존재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생각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오늘 복음과 독서가 답을 줍니다.
비유의 끝에 주님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을,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은총과 구원을 받아
하느님의 작품답게 사는 사람을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생명으로부터 줄이 끊긴 생명은 물줄기가 끊긴 연못처럼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그대로 놔두면 얼마 안 있어 시들어 말라 버리는 생명에 불과하지요.

그러므로 이 생명을 빚으신 작가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도록
온전히 맡기고자 합니다.

하느님 생명의 법칙이 아니라 욕심과 욕망에 따라 살아서 벌로 병이 났다면
빨리 약을 달라고 하느님께 떼쓰지 않고 앓아야 할 병을 끝까지 앓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치유의 은총을 주신다면
그 은총의 약이 하나도 낭비되지 않도록 모두 흡수하겠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치유를 위해 몸의 고통을 약으로 주셨다면
그 약이 온몸에 스며들도록 고통을 은총으로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다 낭비해버려 덕은 쌓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아무 소용없는 돈만 쌓은 것입니다.

돈은 몸뚱이를 살찌게 하고 살아있게 할 수는 있지만
생명을 살아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있을 때만 유지될 뿐 아니라
그런 생명이라야 생명답고 하느님의 작품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작품답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그 작품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을 어찌 감히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작품인 우리 인간을 몸뚱이만 창조하시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가고 사랑을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셨으니
하느님의 생명과 하느님의 사랑을 지닐 때만
우리가 하느님 작품다운 존재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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