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0. 10. 13. 05:52

2020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루가 11,42-46)


Woe to you!
You are like unseen graves over

which people unknowingly wal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어느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매번 음반 제작 제의를 퇴짜 맞던 무명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한 음반사에서 거절당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허리가 굽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노인이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노인의 행색이 안타까워 청년은 얼른 노인을 부축하였습니다.
낑낑거리며 길을 다 건널 무렵, 노인이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어떤가, 기분이 좀 나아졌나?” 청년은 어리둥절하였지만 솔직하게 “네, 조금 나아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노인이 굽은 허리를 쭉 펴고 똑바로 섰습니다. 청년이 깜짝 놀라자 노인이 말하였습니다. “사실 나는 아주 건강하지만 근심이 가득한 자네 얼굴을 보 고 잠깐 연기했지.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 때 한결 기분이 나아지거든.”
행복은 언제 찾아올까요? 정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에게 아쉬운 것이 다 채워진다고 행복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행복이란 ‘나’ 자신만 잘살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때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불행하여라.”라고 네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자기 몫만 챙길 줄 알고, 자기 명예와 안위만 챙길 줄 알았지 다른 사람의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방송에서는 코로나 19로 인한 마이너스 성장에 대한 염려를 쏟아냅니다. 그런데 마이너스 성장이 무조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나라도 이 마이너스 성장을 막기 위해, 바이러스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에도 봉쇄조치를 풀고 사람들이 예전과 같은 활동을 해야한다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아픔이 커지는 성장이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제의 목표는 온 국민이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장 자체를 목표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마치 성장 자체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목표인 것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순간의 만족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바라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주는 순간의 만족만을 먼저 생각하기에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늘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순간의 만족을 주시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즉, 순간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상의 것이 더 크고 중요해 보이지만, 주님을 따름으로 인해 계속된 행복의 시간 안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불행하여라”라고 하시면서 바리사이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해주십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내고 회당 앞자리에 앉으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신경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참된 의로움과 사랑을 보여 주는 일이나 하느님의 사랑은 소홀히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민수기 19,16을 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해지기 때문에 회칠하여 표시하도록 명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회칠하지 않거나, 땅속에 묻혀 있어서 무덤인지를 몰랐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해질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러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만을 내세우면서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표시하지 않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처럼, 자신의 부패를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자기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가장 중요한, 주님의 뜻을 놓치지 않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래야 다른 이도 올바르게 이끌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된다(백범 김구).


지금을 즐기세요.

한 20년 전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교육을 받았는데, 다음 날 일정이 의정부에 있는 어느 산 중턱에 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정상에 모이는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가는 시간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컸습니다(당시는 운전하지 않을 때라서 전철을 타고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본당에 급한 일이 생겨서 일 처리를 한 뒤에 전철을 타고 의정부로 향했습니다. 늦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대로 늦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흔하지도 않을 때라서 연락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늦어도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약속 시각보다 1시간 늦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내려오는데, 산행이 너무나 싫은 것입니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납니다.

바로 그 순간 다른 등산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어두운 표정으로 산을 오르지 않았습니다. 모두 즐거워 보였습니다. 똑같이 산행하는데, 저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즐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지금을 즐기고 계십니까? 이런 명언이 생각납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면 안 된다.’

율번 학자의 초대

-전삼용신부-


어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에게 초대받으신 것이 인격적인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그저 율법 조항처럼 머리로만 초대받으셨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름을 증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하지만 율법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우리 마음에 초대받으시면 그 율법으로 우선 우리 죄가 드러나기에 누구도 심판할 수 없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심판하고 질책하게 된 이유는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자신 안에 초대하지 않고 지식적으로 머리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 학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와 마찬가지로 율법 학자들도 예수님을 자신 안에 초대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자신을 들어 높이는 데 이용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시자 율법 학자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타인들의 시선을 매우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거부했다가는 하와가 자신을 싫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인정보다는 사람의 인정을 더 추구한 것입니다. 만약 선악과를 주님께 바치는 것만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굳이 사람에게 더 인정받으려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강생하신 율법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율법을 지킬 때 그분이 미소 짓고 인정해주시는 것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자신 안에 초대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들은 타인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선이 명확합니다. 자신을 죄짓게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은 타인의 평가가 아닌 자신 안 그리스도의 평가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롤프 젤린’의 『나는 단호해지기로 결심했다』라는 책은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사람들에 대한 처세술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희생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데도 그들로부터 미움이나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이 두려워 과감하게 관계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책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이런 병에 걸려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인정받지 못한 것을 채우려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이들을 집으로 비유하자면 담장의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은 집과 같습니다. 어느 선까지 들어가야 주거침입죄로 걸리는지 도저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아주 사소한 침입으로도 화를 내는가 하면, 어떤 때는 당연히 주거침입죄로 신고해야 하는데도 당하고만 있습니다. 이런 삶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집의 담장을 명확히 쌓아야 상대도 나를 대할 때 편하고 들어오려고 할 때 초인종을 누르게 됩니다. 나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경계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관계에서 항상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 롤프 젤린의 친구도 정신과 의사인데 그는 외모도 출중하고 말도 잘해서 TV에 출연해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그 인기에 기분이 너무 좋았으나, 몇 달 뒤에 만났을 때는 우울증 걸리기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알아보고 상담을 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자니 유명해져서 교만해졌다는 소리를 들을까 겁나고 그들을 다 받아주자니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상담하는 시간을 정하고 그 외에는 절대 상담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사람도 생겨났으나 결국 자신의 삶을 찾았고 다시 기쁨과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 안에서 먼저 인정을 받아야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으로 지쳐 쓰러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 바로 다른 이로부터의 인정입니다. 이 인정받음은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자존감은 자신의 힘이 아닌 타인의 인정으로 높아집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면 사람들의 노예가 됩니다. 율법 학자들이 율법이라는 무기로 사람들의 시선에 노예가 되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는 것 같으면 자신들이 잘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자신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짓누릅니다. 이는 아담이 비록 선악과는 따먹기 전이라 할지라도 그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못했던 상태와 같습니다. 하느님이 옆에 계심을 인식했다면 굳이 하와의 애정을 잃지 않기 위해 선악과를 받아먹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초대할 때,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처럼 율법으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율법을 주신 분이 동시에 그 율법을 지키는 이를 인정해주시기에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요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율법 학자를 넘어서게 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고 또 남의 심판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초대한 것이 맞습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읽은 동화의 이야기입니다아버지 쥐는 딸을 무척 사랑했습니다딸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에게 시집을 보내고 싶었습니다하늘의 태양을 보니 강해 보였습니다아버지 쥐는 말했습니다. ‘태양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합니까?’ 태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것은 구름입니다구름이 나를 가리면 힘을 쓸 수 없답니다.’ 아버지 쥐는 구름에게 물었습니다. ‘구름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합니까?’ 구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것은 바람입니다바람이 불면 나는 옮겨 가야 합니다.’ 아버지 쥐는 바람에게 물었습니다. ‘바람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합니까?’ 바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것은 벽입니다벽은 나의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벽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합니까?’ 벽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것은 쥐랍니다쥐는 나에게 구멍을 내고 다닌답니다.’ 결국 아버지 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같이 사는 라는 걸 알았고사랑하는 딸을 쥐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육의 행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그것은 곧 불륜더러움방탕우상 숭배마술적개심분쟁시기격분이기심분열분파질투만취흥청대는 술판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세상 사람들은 육의 행실을 따라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성서는 육의 뜻을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아담은 교만함으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카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다윗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충실한 신하인 우리아를 죽도록 했습니다헤로데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와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그러나 신앙인들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입니다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부귀권력명예가 아니라 성령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식과 위선 그리고 허영에 빠진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너희 바리사이들아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2000년 전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목자와 신앙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花無十日紅이고 權不十年이라고 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곧 사라지고 마는 것들 때문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립니다돈 때문에 소중한 가족을 등한시하기도 하고권력 때문에 우정을 팔기도 합니다세상의 것을 추구하다가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蘭香千里 德香萬里라는 말이 있습니다난의 향기는 멀리가야 천리이지만 사람의 덕은 만리까지 간다는 뜻입니다우리의 희생사랑나눔봉사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제때에 열매 맺고잎이 아니 시들어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꾸중을 감당하라  

-반영억신부-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에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
-송영진신부-


관례적으로, 어떤 직업이나 직책 명칭 뒤에 ‘님’자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 직업이나 직책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제대로 일하라는 요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당신과 당신이 하는 일을 존경할 테니 당신도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되어라.”)
만일에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존경받기만을 바란다면,
그러면서 자신의 직업이나 직책 명칭 뒤에 ‘님’자 존칭을 붙이라고
먼저 요구한다면, 존경받기는커녕 멸시만 받게 될 것입니다.
(존경이 멸시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힘에 눌려서,
속으로는 멸시하지만 어쩔 수 없이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이 겪는 서글픈 상황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 존칭을 듣고서 자기를 존경하는 줄로 착각하고
흐뭇해하고 좋아하는 것은 ‘헛된 허영심’과 ‘교만’입니다.
자기가 정말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인지 먼저 반성해야 하고,
상대방이 사용하는 존칭에 대해서 겸손해야 하고,
진짜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여기서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내는 일”은
하기 쉬운 일,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일, 생색내기 좋은 일입니다.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하기 어려운 일,
사람들의 눈에 안 보이는 일, 열심히 해도 생색이 안 나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십일조를 잘 낸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불우이웃을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였고,
열성적인 신앙인이라는 칭찬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은, 실천하기도 어렵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라서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11,42-46: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면하며결과적으로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42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단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다자기들에게 편한 것만 찾아 지켰으니 나머지 계명들은 지키지 않은 것이니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너희 바리사이들아!”(42하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신다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이라고 하신다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27참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교사들이 많다그러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시편 5,10)이라 한 것 같이 그들은 무덤이다.


위선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역겨운 것이다위선자는 겉모습과 말로 자기를 감춘다좋은 평판을 듣는 행위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것을 감추려고 한다그러나 자기가 찬미하고 칭송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만 지키라고 요구한다그 위선은 오래 감출 수 없다잠깐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머지않아 본색이 드러난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자 율법 교사들이 이에 대해 분개한다. “스승님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까지 책망하신다사실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들어 마땅하였다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그들 또한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성찰해 보아야 한다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율법주의자 되지 않고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루카 11, 44)
-한상우신부-


가을 햇살은
꽃을 피우고
무덤을 환히
비춘다.

교만은
모든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교만의 끝에는
언제나
무덤이 있다.

무덤과 같은
교만의 삶이다.

다시
겸손에서
길을 찾는다.

높은 자리
높은 사람이
아니라
작아지고
낮아지는 삶이다.

낮아지는 것이
행복이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하느님보다
높아지는 데 있다.

우리의 삶이란
무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들 인생이다.

낮아지시는
하느님이시다.

행복은 무덤에
있지 않다.

행복은
작아지는
생활에 있다.

무덤같은
우리의 일상을
깨우신다.

그분은 바로
낮아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이다.


-오상선신부-


오늘부터 며칠간 우리는 말씀 안에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매서운 질책을 듣게 됩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식사 전에 손 씻는 예식을 건너뛰신 그분을 보고 놀라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초대한 이의 체면을 봐서 에둘러 표현하지 않으시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데 철저했던 바리사이들에게 삶은 지켜야 할 구체적 규정들의 연속이었을 겁니다. 늘 기억하고 챙기며 어느 하나라도 어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행여 어겼을 경우에는 율법이 정한 예물을 바쳐 부정함을 씻어냈지요. 율법을 준수하는 바리사이들의 겉모습은 누가 봐도 충실하고 올바른 의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속까지 보는 분이시지요. 바리사이들의 문제는 자신을 단속하는 시선을 타인에게까지 투사하여 율법의 척도로 심판하고 단죄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 눈에 사람은 의인과 죄인, 즉 정결한 이와 부정한 이로 나뉠 뿐, 개개인이 처한 다양한 현실과, 어떠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하느님 모상이라는 존엄성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탐욕과 사악"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올가미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남의 몫까지 움켜쥐려는 탐욕과,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악의 유혹이 많은 이들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도 없을 정도지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ㅣ


바리사이들의 탐욕은 물질적 부의 축적뿐만 아니라, 그들이 독점하다시피 점유한 종교 권력에까지 미칩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위선을 벗고 진정 깨끗해지기 위한 해법으로 '
자선'을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내면에서 자비심이 발동해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자선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죄인이라 치부한 이들에 대해 자비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자선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자선은 그들이 지닌 과한 재물과 완고한 율법주의를 덜어내고 해체하여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또 자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유다교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 민감한 주제인 할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갈라 5,5-6)


할례라는 옛 계약의 표지는 성자의 희생 제사로 맺은 새로운 계약 안에 녹아 있습니다. 몸에 내는 할례의 표시로 하느님 백성을 가늠하던 옛 관습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상처로 대체되었지요. 이제 율법의 규정들은 성령의 불로 녹아내려 사랑이라는 결정체로 응축되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사라진 게 아니라 완성된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사도의 이 대담한 단언은 오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제시하신 '자선'과 맥락을 같이하는 듯합니다. 율법 규정과 문자에 매여 노심초사, 주춤주춤,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한 발짝씩 떼는 이는 제 안위 챙기기도 급급할 터이니, 곁에서 굶고 울고 쓰러져가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어렵겠지요.    

반면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이는 율법의 모든 내용이 사랑 안에 들어 있음을 알기에 문자에 매이지 않고 두려움 없이 성큼성큼 나아갑니다. 그에게 자선이란 그가 가진 물질뿐만 아니라 내면에 가득 흐르는 기도와 연민과 눈물을 나누는 연대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얼마간 의인이고 얼마간 죄인입니다. 얼마간 순수하고 얼마간 위선자기도 하지요. 그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닮아 "모든 것이 깨끗해"지는 길이 오늘의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나누고 내어 주고 비우고 베풉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덜 비난하고 덜 불평하고 덜 단죄하게 될 것입니다. 더 믿고 더 사랑하고 더 기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벗님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위선에다 위애까지 하는 나   

-김찬선신부-

 

요즘 제 얘기를 많이 해서 죄송한데 오늘도 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한 20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고백성사 볼 때
제일 많이 본 죄는 저의 독선과 위선에 대한 것입니다.

독선이란 나 혼자만 선하다는 뜻이지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이것은 다른 사람은 선하지 않고 나만 선하다는 뜻이지요.
이것과 비교할 때 위선이란 조금 다른 뜻이 있는데
그렇게 선하지 않지만 선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자 함입니다.

결국 독선이나 위선은 다 다른 사람 앞에서 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는 너보다 선하다고 하거나 선하지 않을 경우 거짓으로라도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이러던 제가 요즘 고백성사를 볼 때는
독선이나 위선의 죄를 거의 고백하지 않고 있고,
제가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위선에 대해 묵상하다가
요즘 제가 이 죄들을 고백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제가 이 죄들을 더 이상 짓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까 생각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게 독선이나 위선이 전혀 없을 리 있겠습니까?
그래서 생각을 더 해보니 독선이나 위선이 다른 사람 앞에 있을 때
짓는 죄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 성찰해야 할 것은
하느님 앞에 있지 않을 때 짓는 죄 그러니까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을 때 짓는 죄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느님 앞에 있으면 절대로 독선할 수 없고,
오히려 홀로 선하신 하느님 앞에서 선이 하나도 없는
저를 고백할 수밖에 없으며
저를 샅샅이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선을 겉꾸밈 할 수도 없겠지요.

그러므로 제가 독선과 위선의 죄를 요즘 고백치 않음은
죄에 대해 제가 무뎌진 측면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저를 이해하면
제가 조금씩, 조금씩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 앞으로 이동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있으면서도 하느님 선 앞에 있기도 하지만
하느님 사랑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이 더 들기에
이 죄들을 고백치 않는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앞서 얘기했듯이 제가 하느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선 앞에 있다면
저의 독선과 위선을 더 아파하고,
저의 독선과 위선이 전보다 작아도 더 크게 뉘우쳤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하느님 사랑 앞에 있다고 느끼기에 뻔뻔해진 겁니다.
하느님 사랑을 믿으면 뻔뻔해지는 면이 미성숙한 사람에게 있잖아요?
하느님은 저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너그럽게 봐주실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저 자신을 합리화하고 심지어는 저를 미화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회칠한 무덤 같다고도 하시고,
하느님 사랑과 의를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시는데 저는
그래도 하느님 사랑 앞에 있고,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러한 제가
이제는 위선僞善하는 것이 아니라 위애僞愛하는 것이요,
이러한 저는 위선자에다가 위애자이기까지 한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또 저를 합리화합니다.
제가 아무리 지금보다 위선과 위애를 하지 않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저는 위선자와 위애자자가 아닐 수 없으니 
그저 이를 겸손히 인정하고 자비를 빌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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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7일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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