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7일 수요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Margaret K 2020. 10. 6. 05:24

2020 10 7수요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은 세력 확장을 위하여 유럽을 침공하였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다. 훗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루가 11,1-4)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주님의 기도가 지닌 독특한 점은 예수님 시대 즈음에 유다교 회당에서 바치던 열여덟 청원 기도문(쉐모네 에스레)이나 고대 근동의 아카드인들이 바치던 양팔 기도문과 비교할 때 잘 드러납니다. 이 두 기도문에는 무엇보다도 신적 존재에 대한 호칭이 다양하게 열거되어 나옵니다. 마치 여러 호칭을 계속 반복하지 않으면 그 신적 존재가 그 기도를 듣지 않을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는 배경에는 궁정 문화가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임금에게 무엇인가를 청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문들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어전에서 멀리 떨어져 무릎을 꿇게 되는데, 이때에도 고위 신하가 눈짓으로 허락을 해야 겨우 자기가 청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에게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는 이렇게 엄숙하고 격조 높은 궁정 문화가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한 번만 부르는데, 이마저도 가족 안에서 사용하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의 기도는 가족과 나누는 친밀하고 편안한 대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보통 가족끼리는 에두르거나 거창한 말로 꾸미지 않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편안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를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그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며 그분을 붙잡고 마음 편히 우리의 바람을 아뢸 수 있는 응석받이인 셈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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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컴퓨터는 그 어떤 컴퓨터보다 좋은 컴퓨터라고 자부합니다. 물론 더 높은 사양의 컴퓨터도 많겠지만, 제가 쓰기에 약간 과분할 정도의 사양으로 조립했고 그래서 이 컴퓨터를 현재 4년 넘게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조금씩 문제가 보입니다. 느린 것도 아니고, 그래픽 작업이나 동영상 작업을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워드 작업을 할 때 자판기 입력이 잘 안 되고, 마우스 클릭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키보드와 마우스가 문제인가 싶어서 다른 것으로 교체해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4년 넘게 써서 이제 수명이 다 된 것일까요?

어떤 프로그램에서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하나하나 프로그램 점검을 하던 중에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지우고 나니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상의 작은 문제가 컴퓨터 전체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만약 프로그램 하나의 문제로 컴퓨터를 바꿨다면 얼마나 큰 낭비입니까?

자기 자신 전체를 부정하는 분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자신을 실패작이라고 표현하면서, 아무런 능력이 없다며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십니다. 프로그램 하나만 고치면 충분할 것을 컴퓨터 전체를 바꾸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전체를 바꿀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의 문제만 바꾸면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힘을 내어 지금의 작은 문제들을 극복해 보면 어떨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특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의 관계와 똑같은 관계에 들게 해주셨습니다. 이는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아버지께 드리는 모든 기도는 언제나 아들을 통해서 바쳐짐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더 가까운 분으로, 하느님의 힘을 받아서 지금 삶을 더욱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말미는 용서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해 주시는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일하셨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갈 수 있으며, 이 안에서 더 큰 기쁨과 행복의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있다. 단, 우리가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나아지는 경우에(엘링 카게).


글이 잘 써질 때.

어제는 글을 쓰는데 도무지 써지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언제 글이 잘 써지지 않는 것이지?’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언제 글이 잘 안 써질까요?

생각이 너무 많은 날, 할 말이 너무 많은 날,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은 날, 바쁜 날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꼽은 날들을 생각해보니 모든 날을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즉,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이 아니라, 잘 써지는 날이 언제인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위에 말했던 날이 또 글이 잘 써지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날이 글이 잘 써지는 날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나침반이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이 말은 스승마다 기도가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도를 바치는 것이 스승과 하나 되는 어쩌면 유일한 길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승이 주는 기도는 그 스승을 향할 수 있게 만드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기도가 나침반이 되는 이유는 기도 안에는 청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청하느냐가 나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사람이 먹다 버린 음식만을 원한다면 개일 가능성이 큽니다. 썩은 고기만 원한다면 그것은 하이에나일 가능성이 큽니다. 피만 원한다면 그것은 모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듯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내가 장차 무엇이 되는지 알려주는 척도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 자녀의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기도 안에서 청하는 것을 나도 청하면 내 존재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에 전해준 십계명과 같습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 하느님의 계명이 다 들어있고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청하면 하느님의 자녀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자아를 따라 사탄이 되게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합니다.

 

      만약 이 기도를 모르고 무조건 잘 살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리를 잃은 사람처럼 되어 완전한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갈 때 나침반을 가져가야 하는 것처럼, 인생을 살 때 주님의 기도를 가져가야 길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일본 어느 영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남편의 제자가 남편을 보겠다고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비가 너무 와서 길이 침수되어 남편에게 그날은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제자도 집에 돌아갈 수 없어서 그 집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둘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자 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남편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내는 아침에 가방을 싸고 있었습니다. 놀란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떠나 친정집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는 이유를 묻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용서했어요. 그런데 잠잘 때 내 살이 닿자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괴로워했어요. 당신은 나를 용서하느라 너무 고통을 받고 있어요. 그 고통을 덜어주려면 내가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정말 아내를 용서한 것일까요? 용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에는 어떤 청원이 나옵니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남편은 자신은 죄인이라 여기지 않는 상태에서 아내를 용서하려 하니 잘 안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오십보백보입니다. 크나 작으나 다 죄인입니다. 남편이 주님의 기도를 알고 꾸준히 바칠 수 있었다면, 아내만 그렇게 죄인으로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우리의 방향을 명확히 잡아줄 나침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영화 ‘사도’(2015)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만 잘못하고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무덤에 오랫동안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의 탓도 있습니다.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했다면 모든 인간이 주님께서 악에서 구해주어야 하는 상태임을 알고 더 자비로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파라오는 우리를 지배하는 하나의 욕구를 대변합니다. 파라오는 우리가 그 욕구를 채워줄 때마다 웃어줍니다. 그러나 그다음 날이면 다시 그 욕구를 채우라고 채찍을 듭니다. 자아의 지배하에 사는 사람은 모두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를 위해 나침반을 가져오셨습니다. 이 나침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십계명과 같습니다. 십계명을 따르면 파라오의 욕구를 따라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두 법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세로서 주신 계명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따르면 예수님에게로 향할 수 있고 결국 아버지께로 향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길의 목적은 무엇일까요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미국의 길은 동과 서를 이어주는 아베뉴(Av)와 남과 북을 이어주는 스트리트(St)로 이루어집니다바둑판처럼 길이 되어 있어서 주소만 알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작년에 처음 미국에 왔을 때도 주소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성당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비용을 지불하지만 빨리 갈 수 있는 고속도로가 있습니다트럭은 다닐 수 없는 길이 있습니다. 2인 이상이 탑승해야만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여유가 있으면 강과 경치를 볼 수 있는 길도 있습니다길의 종류와 용도를 알면 편하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성소국에 있을 때입니다매년 서품식 장소로 사용하던 올림픽 체조경기장이 내부 수리를 한다고 하였습니다다른 장소를 알아보아야 했습니다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와 주차장이 확보된 곳이어야 했습니다서울시 시설관리 공단에서 운영하는 고척 돔구장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공단 이사장님을 만나서 방법을 물어보았고이사장님은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본당에 있을 때입니다태풍의 영향으로 본당 뒷산을 깎아 내려야 했습니다피해 상황을 보러왔던 서울 시장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실무적인 일은 구청장님과 해결해야 했습니다구청장님을 만나서 방법을 물어보았고구청장님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매달 구청 직원을 위한 미사를 하였고구청장님과도 몇 번 인사를 나누웠기에 말하기가 수월했습니다.

 

오늘은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상대방의 전력이 훨씬 강했습니다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던 군인들은 성모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비록 약한 전력이었지만 군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군인들은 성모님께서 함께 해 주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날은 1571년 10월 7일이었습니다비오 5세 교황은 성모님의 도움으로 교회를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고,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훗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당시의 군인들은 성모님의 도움으로 길을 찾았고성모님께서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교회는 10월은 로사리오(묵주기도성월로 지내고 있습니다묵주기도는 사도신경성모송주님의기도영광송을 바치는 염경기도입니다그러나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관상기도이기도 합니다환희의 신비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빛의 신비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볼 수 있습니다고통의 신비에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영광의 신비에서는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성모님께서 발현하시면 묵주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묵주기도는 우리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차를 운전하면서 묵주기도가 생각났습니다잠시 차를 세우고 묵주를 꺼내려는데 바로 앞으로 큰 트럭이 지나갔습니다자칫 큰 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뉴욕에 와서는 매일 아침 산보를 하면서 묵주기도를 합니다제게는 감사하고 고마운 하루의 시작입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기뻐하소서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묵주기도와 함께 또 다른 나자렛의 마리아가 되어 정성껏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합시다!

 -양승국신부-

 

그 누구보다도 성모님을 사랑했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제2차바티칸공의회가 폐막한지 10년만인, 1974년 2월 2일자로 성모님 관련 교황 권고를 발표하시는데, 제목이 ‘마리알리스 꿀투스’(Marialis Cultus)입니다. 라틴어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마리아 공경에 대한 교황 권고’입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 교회 헌장 제8장, 다시 말해서 마리아 헌장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시킨 교황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마리알리스 꿀투스 마지막 제3부에서 묵주기도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황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묵주기도는 복음서에서 영감을 받은 묵상기도이며, 복음적 성격이 강한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철저하게도 복음에 근거하고 복음에서 출발하며, 복음을 요약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들과 기본 형태가 복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를 아주 간단히 ‘요약된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철저하게도 복음적인 기도입니다. 

 

② 묵주기도는 성모송의 조화로운 연속으로 복음의 근본적인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③ 묵주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구속사업을 이루신 과정을 순차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에는 동정녀의 잉태와 예수님 유년기 시절의 신비로부터, 파스카 신비의 절정, 곧 수난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구원사 안의 중요한 사건들이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④ 묵주기도는 교회 공식 전례는 아니지만, 교회 전례에서 비롯되며, 우리를 교회 전례로 이끌어줍니다. 

 

결국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일생, 그분께서 행하신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묵상기도입니다. 하느님 구원사업 전체를 관상하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칠 때 복음의 마음으로 바쳐야 합니다. 복음에서 출발해서, 복음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복음을 실제 삶 안에서 실천하고, 다시금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기도가 묵주기도인 것입니다.

  

묵주기도의 수준을 떨어트리고 올리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빨리 빨리 해치워야 할 숙제로 여긴다면, 묵주기도의 수준을 확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다양한 잡념 속에 설렁설렁, 대충대충 가볍게 바친다면 묵주기도의 수준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기적의 요술방망이나 자동판매기처럼 여기고 바친다면 묵주기도 수준을 대폭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바칠 때,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 생애의 신비를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잡다한 이기적인 바람들을 한데 모아 계속해서 성모님을 졸라댄다면, 묵주기도 수준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 마다, 다른 무엇보다도 성모님의 마음으로 기도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한단 한단 넘어갈 때 마다 각단이 지향하는 예수님의 일생을 곰곰히 묵상하면서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묵주기도를 그냥 생각없이 바치기 보다 지극히 겸손했던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 정겨웠던 나자렛 성가정에서의 생활, 희망에 찬 출가, 활기찼던 공생활, 연민과 사랑이 가득했던 착한 목자로서의 삶을 묵상하면서 바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 처절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영광스런 부활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칠 때, 결국 염경기도를 넘어 묵상과 관상과 더불어 묵주기도를 바칠때, 거기에서 오는 은총과 축복은 놀라울 것입니다.

  

묵주기도 안에서 또 다른 나자렛의 마리아가 되어 정성껏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다보면,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의 손길이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생활의 반석 

-반영억신부-


주님의 기도는 너무 자주, 흔하게 바치는 기도이기에 고루하고 낡은 기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완전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성경말씀을 덧붙여 길게 늘어놓아야 기도를 잘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저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만족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이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이니, 입술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생활의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서 받는데 성령의 은총 없이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도전의 순간에 언급하셨는데,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느끼지 않거나 그분의 자녀라고 여기지 않아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믿음이 없거나 어휘의 나열’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시선을 느끼게 해 줍니다. 아버지께 향하는 기도의 말은 미신에서 하는 주문처럼 소용없는 말들이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주신 분에게 향하는 목소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깨닫고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기도는 모두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잊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친밀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하고, 후반부는 우리 서로간의 용서와 화해를 청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이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비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챙겨주게 될 때 주님의 기도는 완성됩니다. 그때 하늘 아버지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이 아버지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이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실“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사랑이 통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님의 기도 
-송영진신부-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2-4).”

‘주님의 기도’ 전반부는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후반부는 ‘신앙생활의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것’과 ‘아버지의 나라가 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뜻하는데,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고난들과 시련들을 극복하는 일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보다 더 급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그 힘든 일들 때문에 기도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힘든 일들’ 때문에 바치는 기도는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와 용서를 청하는 기도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를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기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이 기도도 ‘끝까지’ 잘 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마르 8,2-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육신의 굶주림’을 염려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영적인 굶주림’에 대한 걱정이 아닙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 날마다 굶주리는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을 먼저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도와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부터 먼저 하라고 강요하면 안 되고,
먹을 것을 먼저 주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내가’ 먹을 양식을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먹을 양식을 청하는 기도이고,
따라서 이 기도는 ‘사랑 실천’과 직결되는 기도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을 외면하고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의 경우에는 ‘끝까지’ 잘 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되지만, 지금 배부른 사람의 경우에는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가 됩니다.
만일에 ‘실천 없이’ 말로만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면, 그것은 ‘빈말’이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기도한다고 먹을 것이 생기나?” 라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생긴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기적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방식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우리의 나눔과 사랑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는 용서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는
기도이고,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는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싶으면 형제를 용서하여라.”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를 하느님께서 죽 지켜보시다가, 우리를 용서하실지
안 하실지 마지막 심판 때에 결정하신다는 뜻은 아니고, 실제 뜻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이미 용서하셨으니 너희도 서로 용서하여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를 안 하면 하느님께서 용서를 취소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그 ‘용서의 은총’을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원하면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모든 이’ 라는 말은 중요합니다.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처럼 용서도 모든 사람을 향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자기가 용서하고 싶은 사람만 용서하고,
용서하기 싫은 사람은 외면한다면, 그것은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카 6,33).”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라는 말씀은, “그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즉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용서하고 싶은 사람만 용서하는 것은
용서를 실천하는 일이 되기는커녕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는
‘악의 세력’의 위협과 박해와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달라고 청하는 기도인데,
이 기도도 역시 ‘끝까지’ 잘 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기도를 하셨을 때
악마가 다가와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루카 4,1-12).
그 이야기 끝에는,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3).” 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악마가 ‘다음 기회’를 노린다는 말은, ‘끊임없이’ 기회를 노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전체 내용을 보면, 악마는 예수님을 직접 유혹하는 것은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자들을 유혹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고, 종말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악마는 기도로써 물리칠 수 있다.”입니다.
그렇지만 기도만 하면 그만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유혹을 물리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우리를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1-4: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주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게 하신다. 즉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준 기도이며, 그러기에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자녀로서 또한 큰 책임을 부여한 기도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2절)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신다. 종들을 자유라는 지위로 들어 올리신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의 대열에 있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분께 맞갖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 우리의 간청을 받아주실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2절), 이 기도의 의미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라는 뜻이다. 이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며 축복의 원천이다.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더 좋은 기도는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절) 아버지의 나라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마태 25,34)이다. 이것이 우리의 청원이다. 그 나라는 올 것인데, 만일 우리가 왼쪽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우리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3절)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빵만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또한, 영적인 양식으로 단 하루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양식을 청하는 것은 그분 안에 살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4절)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든지 용서해야 한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마지막으로 유혹자에게 끌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즉 죄만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청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루카 11,2)


먼저 우리는 무엇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 앞서 영광 받으실 아버지의 이름이 이 세상에 거룩히 드러나기를, 그리하여 사랑이신 아버지의 주권이 다스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오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사랑과 정의, 공정과 평화는 참으로 미소합니다. 몹시 불완전하기까지 하지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주도할 때에야 비로소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결핍과 편중성, 불완전함을 끌어안아 충만하게 하시는 완전함이십니다.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에서 지킴"(루카 11,3-4)


이어서 청해야 하는 바는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 기반합니다. 하루를 지탱할 양식과 용서, 유혹의 문제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상의 삶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과 예루살렘 초대교회와의 관계 형성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갈라 2,9)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계시 체험 이후 3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케파를 만나 예루살렘에서 보름을 지냈다고 했지요.
(갈라 1,18 참조) 그리고 나서 14년 뒤 바르나바, 티토를 대동해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 핵심 역할을 하는 사도들과 일치의 시간을 가집니다. 교회는 이렇게 긴 시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고 삶으로 실천한 이들을 통해 보이게, 보이지 않게 형성되어 자라나다가 일치를 이루고, 또 서로를 통해 확장되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갈라 2,10)


예루살렘 교회와 바오로 사도 일행은 서로가 받은 소명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격려합니다. 그러면서도 유다인 선교사든 이방인 선교사든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보편 소명에 대해서 언급하지요. 바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야말로 그가 어떤 신분이건 어떤 사도직에 임하고 있건 간에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모든 사람의 공동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갈라 2,11)


오늘 독서 대목의 후반부는 전반부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흘러갑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여전히 율법과 관습의 그늘에서 온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일부 사도들의 위선적 행동에 바오로가 작심하고 직언을 던진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교회의 일치 현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냉랭한 분위기에 머쓱해지고 말았네요.

하지만 바오로는 물론 교회도 이러한 공동체 안의 갈등과 분쟁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불완전한 인간들의 모임이기도 한 교회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진리는 초대교회의 형성 과정과 사도의 과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걸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전시용 박제품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시기에, 이 모두를 포용해 결국은 하늘 나라를 완성하실 수 있으시니 자신 있으신 겁니다.

유다교 제도권 밖에서 고군분투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험은 널려 있고, 그래서 더 안전에 대한 유혹도 강했을 겁니다. 자칫 유혹에 무너지면 외부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용서하기도 어려웠겠지요. 이제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용서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살다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내용 하나 하나가 삶의 구석구석에서 힘을 발휘함을 느낄 겁니다. 이 기도가 우리에게 청하라고 가르치는 바가 얼마나 통합적이면서도 구체적인지요!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그 안에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러니 우리, 과정을 너무 두려워하지 맙시다. 갈등하고 일그러지고 넘어지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자라고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이름과 뜻이 이 땅에 새겨져 사랑과 정의, 자비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되기를, 영육의 양식을 얻고 유혹을 이겨내며 용서에 지치지 않는 하느님 자녀이기를 바라고 또 바라다보면 어느새 이 아름다운 기도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더욱 정성껏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묵주 기도의 성모님'께 화해와 용서와 일치를 위해 전구해 주시도록 부탁드립시다.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내 뜻이 아니기에 하느님 뜻이다.  

-김찬선신부-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쓸데없는 궁금증인지 모르지만 오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한 제자는 누굴까,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다고 하는데
요한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와 어떻게 다를까 등의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루카 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제일 많이,
일곱 번, 언급하고,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많이 주신 것으로 기록하는데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반면
주님께서는 안 가르쳐주신 것처럼 제자들 중 하나가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정말로 기도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으신 것인가요?
아니면 그렇게 여러 차례 가르쳐주셨는데도 가르쳐주실 때는 딴청을
부리거나 못 알아듣다가 요한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보고는
샘이 나서 자기들에게도 가르쳐달라고 하는 사림일까요?
이도 아니면 제자들 중에서 제대로 기도의 정신이 박혀 있는 사람일까요?

어쨌거나 이 제자는 기도에 무관심한 사람은 적어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도에 통달하여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도
아닌 그러니까 우리와 비슷한 제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도에 무관심한 사람은 당연히 묻지 않을 것이고,
기도에 통달한 사람 그래서 배울 사람이 아니라
가르쳐 줄 사람도 묻지 않겠지요.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주님 곁에 있으면서 기도하시는 주님 모습 자주 보았고,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수없이 들었음에도 또 가르쳐 달라고 하듯
우리도 기도를 수십 년 해왔고 가르침도 수없이 들었음에도
기도에는 배움이 필요하고 그래서 오늘 주님의 기도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 가르침과 관련하여 제가 자주 주장하고
제일 많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가르침입니다.
뒤에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 나라가 오시길 청하는 기도나
일용할 양식이나 용서의 은총을 청하라는 기도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기도의 가르침이 제일 중요합니다.

기도란 행위보다도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고,
하느님께 무엇을 어떻게 청하느냐 보다도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연인 관계 이상의 사랑과 존중의 관계라면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우리의 친밀한 일치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고,
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고집하거나 칭얼대지도 않을 것이며,
오늘 주님께서 하느님을 진정 아버지로 사랑하고 받들고
그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청하라고 하셨듯이 그리 청할 것입니다.

어제 저희 관구는 관구 봉사자와 평의원들을 선출했습니다.
이 선출이 과연 하느님의 뜻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적인 선출이었을까
의아해하거나 의심하며 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경우 무조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내 뜻과 다르다고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지 않고,
나의 생각이나 내 뜻과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이며 새로운 관구장과 평의원들도 이 하느님 뜻을 받들어
저희 관구를 이끄는 분들이 되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크고 넓은 뜻을 믿고 따르고 청하는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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