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1일 목요일 한가위

Margaret K 2020. 9. 30. 05:44

2020년 10월 1일 목요일 한가위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 12,15-21)

 

‘You fool, this night your life will be demanded of you;

and the things you have prepared,

to whom will they belo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왜 부자를 두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시며 그의 목숨을 되찾아 가시려 하실까요? 사실 그가 특별히 죄를 지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데 말이지요. 가령 일꾼들을 무임금으로 부렸다던가, 탈세하였다는 식의 불의한 모습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땀을 흘려 수고하였고 그 결과로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되었으니, 어떤 면에서 그는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눈으로 볼 때 열심히 일한 만큼 안락과 편안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부자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이에 대하여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는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더 큰 곳간을 짓고 모든 곡식과 재산을 쌓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소출이 있기까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제물을 바칠 것이고, 자신을 도와준 일꾼들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하며 평소에 주는 품삯에 상여금을 얹어 줄 것입니다. 또 주변 이웃과 친지, 특히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도 자선을 베풀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에 등장한 부자는 탐욕의 노예였기에 어리석게도 하느님과 이웃에게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눈길이 쏠려 있었습니다.
한가위입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맺어 주신 햇곡식과 햇과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친구와 놀다 보면 종종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구름 사이를 지나는 비행기를 보면서, 이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마치 명나라 때의 장편소설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이 타고 다니는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있는 느낌이 아닐까 싶었지요.

부제 때, 졸업 여행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요. 긴장되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꿈꾸었던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에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서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어땠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생각처럼 근두운을 타는 느낌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구름 사이를 지나가는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을 통과할 때는 마치 옅은 연기 사이를 지나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실제와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생각이 실제에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실망에 이르게 될 때가 참 많습니다. 또 이로 인해 갖지 않을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울 때도 많아집니다.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의 한 형태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보다는 나의 욕심을 채울 탐욕에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지금 약간의 손해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랑 대신 탐욕을 취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선물 받은 것을 쌓아 둘 뿐이었지요. 지금의 행복이 재물을 쌓아 두는 것에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물 받는 것을 나누는 것만이 탐욕의 죄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특히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이들은 준비 없이 최후를 맞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것이란 재물이 아니라 덕행을 사랑하는 것이며, 생명과 구원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일까요?

오늘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중의 하나인 한가위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고 수확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웃과 서로 나누며 살아왔던 조상님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낯선 사람에게 길을 알려 준 순간을 떠올려 보자.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친절함이나 관대함이었을 것이다. 그 행위로 분명 당신도 행복에 가까워졌다(캐서린 센더슨).


자신감을 북돋우는 최고의 방법

자신감을 키워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그 최고의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문가들의 표현에 의하면, 나의 능력을 믿고 지지해 줄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족, 친구, 선생님 등 나의 응원자가 있으면 자신감을 느끼게 되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변화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탁할 사람이 없다고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선생님도 그리고 그밖에 어떤 사람도 자신을 응원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눈물 흘리십니다. 이를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해줍니다.

“부탁할 사람이 없다면, 스마트폰의 시리나 빅스비 등의 개인 인공지능 비서에게 도움을 청해보세요. 이것도 괜찮습니다.”

우선, 도움을 청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서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 말을 듣고자 할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라도 말입니다.

이런 노력만으로도 자신감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명절은 자녀에게 감사를 교육하는 장이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축제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함께 모이는 것도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가족끼리 오랜만에 모이지 못하고 사람들이 더 많은 곳에 놀러 가는 것도 썩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나라의 큰 명절을 잘 지키며 힘을 얻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축제를 지내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축제라도 어떤 때는 뒤끝이 좋지 않고, 어떤 때는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끝이 좋은 축제를 지향해야 합니다. 뒤끝이 좋지 않은 축제 안에는 항상 인간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946년 미국의 한 의과대학 2학년생 ‘모턴’은 실험을 하던 중 강력한 마취기능을 가진 에테르라는 약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마취 없이 수술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에테르의 발견은 외과 수술 역사상 획기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해 낸 사람은 축제를 즐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에 에테르 특허를 신청하려 했던 모턴은 그의 지도교수인 ‘웰치’와 그에게 실험실을 내어준 화학과 교수 ‘잭슨’에게 저지를 당했습니다. 서로 자신의 이름이 의학 역사에 기록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은 결국 법정 싸움까지 갔고 축제가 되어야 했던 이 발명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잭슨은 정신병에 걸렸고, 웰치는 사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모턴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마취시키는 물질을 개발해 낸 그들이 명예욕으로 곪은 정신은 마취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참조: 『멈추어야 할 때 나아가야 할 때 돌아봐야 할 때』, 쑤쑤, 유튜브 채널: 책읽는 다락방]


      아무리 축젯날이 되어도 인간의 욕심이 개입하면 축제가 비극으로 끝납니다. 물론 장례식은 축제는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어떤 장례식에서는 돈 문제로 가족들이 다투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모습은 아닌듯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합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듯이, 돈을 사랑하면 믿음에서 멀어지고 결국 고통으로 끝나고 맙니다. 아마 모든 것이 가장 풍성할 때 추수감사절이나 추석 명절이 있는 이유는 돈에 대한 욕심이 가장 줄어드는 풍요의 시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브라질은 삼바축제로 엄청난 관광소득을 올리는 나라입니다. 매년 2월에 열리는 이 축제에 약 4천만 명이 몰립니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축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올해 2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확산할 위험에 있었습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축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나는 무렵에 첫 확진자가 발생했고, 현재 확진자가 470만 명을 넘었습니다. 사망자도 14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코로나는 그저 감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걸리고 가족도 걸렸습니다. 그런데도 마스크 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등 거친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겉만 보고 이렇게 말해서는 온전한 판단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삼바 축제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라는 명확한 근거도 없습니다. 다만 그런 축제를 지내는 정신이 코로나 확산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제가 오염되었음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보통 삼바축제라고 하는 ‘카니발’은 ‘카르네 발레’(Carne val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카르네 발레는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에 당분간 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그 전에 충분히 먹어두려고 하는 가톨릭 전통이 축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로 시작된 이 축제가 그 정신은 사라지고 돈과 쾌락의 축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뒤끝이 좋지는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명절과 축제의 참된 의미를 되살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전통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축제’는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그 기억을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교육’적인 차원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식 때마다 자녀들이 그 예식은 왜 행하는 것이냐고 부모에게 묻고, 부모는 하느님께서 이래저래서 그 감사를 잊지 않기 위해 이런 예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자녀를 교육합니다. 교육하면서도 부모 자신도 더 배우고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2천 년간 나라 없이 떠돌면서도 이런 축제 기간을 중요시 여기며 후대에도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잊지 않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 없이 살면서도 축제를 통해 하느님은 감사한 분이심을 자녀들에게 교육했기 때문에 지금의 이스라엘이 있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설과 추석이라는 좋은 명절이 있습니다. 설에는 세배하며 감사하고 추석에는 풍요로움이 있게 해 준 조상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왜 그런 제사를 지내야 하고 성묘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하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부모와 조상들의 덕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제주도에 30만 명이 몰린다고 합니다. 제주도 주민은 자녀들에게도 이번 명절엔 오지 말라고 했는데, 30만 명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아름다운 전통의 축제 정신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명절이 어떤 교육보다 자녀들에게 큰 교육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부모를 공경하고 물려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을 여러 번의 명절을 거치며 배워왔던 것 같습니다. 놀러 가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이런 특별한 때야만 가능합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부모도 자신들도 없었음을 깨닫게 하십시오. 그 감사가 진정한 예배로 이루어질 때, 명절은 기쁘게 끝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명절이 자녀에게 감사를 교육하는 장으로 길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


지난날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저는 사진을 모아 놓은 앨범을 보곤 합니다군대에 있을 때 후배들이 만들어 준 추억록이라는 앨범이 있습니다신학생 때 동창들과 함께 했던 앨범이 있습니다어머니께서 간직하신 몇 장 안 되는 사진도 있습니다동생 수녀님과 고양이를 앞에 두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저는 6수녀님은 4살 때인 것 같습니다형들과 장화를 신고 뒤뜰에서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저는 4작은 형은 7큰 형은 9살 때인 것 같습니다어머니는 시간이 흘러 빛바랜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셨습니다예전에는 사진을 찍을 일이 많지 않았고찍었던 사진들도 이사를 다니면서 없어지곤 하였습니다사진기에 필름을 넣고 뚜껑을 닫고사진을 찍으면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무슨 일이 그렇게 바빴는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본당 별로 앨범을 만들었습니다이 8권의 앨범에 사제생활 29년이 담겨있습니다보좌 신부 때의 사진에서는 열정과 순수함을 볼 수 있습니다주로 주일학교 교사청년주일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행사에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사진 속의 모습은 모두 밝고즐거워 보였습니다젊은 날이었고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나가는 시간들이었습니다본당 신부 때의 사진에는 여유와 웃음을 볼 수 있습니다주로 어른들과 함께한 사진이 많았습니다사목위원노인대학구역 봉사자성가대전례 봉사자구청직원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식사하는 자리마이크 잡는 모습이 많았습니다본당에는 행사가 많고사람 좋아하는 저는 가능하면 함께 했습니다교구청에 있을 때는 사진 찍을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사목이기보다는 직장과 같았습니다교구장님과 교구청 신부님들과 함께 낚시 가서 찍은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5년 동안 교구청에 있으면서 1번 여행을 같이 갔습니다그만큼 각자의 자리가 바빴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사진 찍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스마트폰으로 저장하기 때문입니다스마트폰에는 너무 많은 사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안 보게 됩니다스마트폰 때문인지게을러서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앨범도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내가 미처 알지 못하지만 나의 삶이 저장되는 곳이 있습니다나의 글이 저장되는 곳이 있습니다인터넷의 공간입니다제가 있던 본당 홈페이지에교구청 성소국의 홈페이지에 저의 글과 사진이 저장되어있습니다우리는 살면서 기억하는 자리에기억하지 못하는 자리에 삶의 추억들을 남기고 있습니다내가 기억하고내가 저장하는 곳의 추억과 기억들은 더 오래 간직할 수 있고지워버릴 수 있습니다그러나 어떤 것들은 원하지 않아도 계속 남아 있기도 합니다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입니다걱정되거나 두려워서는 아니지만 이왕 세상에 왔으니 좋은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따듯한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누군가를 사랑하고도와주고위로해 주었던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언제부터인지 한가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가족들과 즐거운 시간들 보내고 계시는지요여성분들은 음식 준비를 하시느라 바쁘실 것입니다남성분들은 모처럼 가족들과 만나서 한잔 하시느라 즐거우실 것입니다남성분들이 설거지를 도와 드린다면 더욱 행복한 추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가족들이 모여서 윷놀이고스톱을 하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 대화를 나누고시간이 있으면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예전에 어르신들은 둥근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습니다고향 가는 모든 분들이 가족들과 정겨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넉넉한 마음으로 안전하게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코로나19도 자기가 살던 곳으로 가서 다시 안 오면 좋겠습니다치료약과 백신이 개발되면 좋겠습니다예전처럼 일상의 기쁨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여러분들도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마음으로 바라는 것들을 하느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내가 세상에 쌓아 놓은 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어쩌면 하늘에도 앨범으로 기록되는 것은 아닐까부자가 세상의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보관하며 즐거워했지만우리가 쌓아야 할 것은 하늘의 창고가 아닐까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창고에 보물을 쌓으려하지 마십시오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안전한 하늘의 창고에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모든 재물과 물질의 진정한 소유주는 바로 하느님이심을 깨달으면 좋겠습니다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물과 물질을 이웃과 나누며 우리 마음의 창고에 사랑과 희생 그리고 나눔과 섬김을 쌓으라는 것입니다추석을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조상과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풍요와 여유로움의 이면에는 땀 흘리는 노력과 수고가 있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겠습니다아울러 말뿐인 사랑보다는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추석이 감사와 고마움의 축제가 되고풍요와 기쁨의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조상을 공경하며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너희는 주의하여라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송영진신부-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6).”
인간이라는 존재는 먼지보다 나을 것이 없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원성을
인간들이 나누어 받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복음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면
하느님의 영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시편 8,4-7).”
믿음 없는 자들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같은 말을 하면서
마치 무엇이나 된 것처럼 우쭐거리지만,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교만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을 이렇게 높여 주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필리 2,12ㄷ-16ㄱ).”
신앙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신호등과 같은 등불이 되라는 뜻인데,
이 말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마태 5,13-16) 예수님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5-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야고보서에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 4,13-16).”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라는 ‘어리석은 부자’의 말은, “재산이 많이 쌓여 있으니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 라는 뜻인데, 그가 생각한 ‘여러 해’는
그의 헛된 욕심이고, 허세이고, 쓸데없는 자랑이고, 악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시간은 ‘오늘 밤이 되기 전 몇 시간’입니다.
그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만일에 그가 그 몇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즉 회개하지 않고 그냥 낭비해 버린다면, 그의 인생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하느님 말씀은,
우리 목숨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은,
지금 내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는(하느님 앞에서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목숨과 인생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깐 동안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재산, 명예, 권력, 무엇이든지 간에 다 마찬가지입니다.

<몇 시간 전이라도 미리 예고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루카 12,46)
하느님 앞으로 불려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지금 살아서 회개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어리석은 교만과 허세를 버리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감사드리는 생활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12,15-21: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일 년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생명의 길을 가도록 신앙을 전해주시고이 땅을 물려주신 조상들의또 친지들의 영혼들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 추석을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제 때에 비를 주시고태양을 비추어주시어 오곡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또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내온 분들이다그리하여 이날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며 지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로 많은 분이 가기도 했지만또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이때를 기해서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우리 모두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더욱 가족들 간에 화목한 사랑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서로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기쁘고도 감사하여야 할 일이다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감사드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한 주간을 마치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감사드리고한 달을 감사하면서 지난날 모두를 감사드릴 수 있는그래서 오늘 추석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또한우리의 형제들은인들과 친척들 모두를 기억해 드릴 수 있다또한그리스도 안에 신앙 안에 우리의 모든 형제였던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로 하여야 하겠다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을 때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면서 그 외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더불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이러한 가운데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그래서 기쁨이 넘치는 한가위가 되도록 하자.


오늘 복음에서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가세상의 재물이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자기의 재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영적으로 파산을 했다고 하셨으며하느님의 눈에는 그가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우리가 가진 재산은 무엇이건 좋은 것이다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옛 성인은 재물이란 것이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지, ‘소유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님의 은혜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 형제 친척 은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시도록 기도하자또한난 1년간의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지금 우리와 함께 제사를 봉헌하지 못하며이 기쁨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그러면 잠깐 머리 숙여 눈을 감고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 기도드리면 좋겠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부르심’과 ‘따름’에 대한 세 편의 ‘상황어’입니다. 본문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는데”(루가 9,57)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는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앞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심부름꾼을 보냈는데 배척을 받게 되어 다른 마을로 길을 가신’ 것을 알려줍니다.

<루카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을 갈릴래아에서 배척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듯이, 이제 예루살렘 상경기도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당하게 될 고난을 미리 암시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게레사인들의 지방에서도 배척을 받으셨고(루카 4,28-30;8,37), 나중에는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르고자 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먼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설익은 고백을 깨우치면서 낮고 겸손한 삶에로 부르십니다. 그것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입니다.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라라”하고 초대한 사람인데,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죽은 이의 장례는 매우 중요한 일었습니다. 그들의 불문율법을 해설한 미쉬나에 따르면, “장례를 치르는 사람은 쉐마(신앙고백문)나 18기도문(축복기도문)이나 기타 기도들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되어 있으며, 후대에는 “율법에 명시된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바빌론 탈무드)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장례를 선행의 극치로 여겼습니다(토빗 4,3-4;6,15). 그러니 그가 장례를 먼저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율법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를 거절한 것은 장례를 치르는 일보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루카 9,60) 일을 더 중하게 여기십니다. 죽음의 나라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늘나라가 더 중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람>도 스스로 먼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되돌아보는 자는 하느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을 따르는 삶은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 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인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요,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그 무엇에게도 첫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는 말씀이요, 뒤를 돌아다보지도 말며, 오로지 임을 향하여 진리를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제자 됨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 본질인지,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잘 아는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배척과 고난을 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죽으시러 가시는 길에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당신과 함께 가야 할 고난을 암시해줍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주님!

당신은 저의 탯줄, 저의 보금자리, 저의 무덤이오니

제 머리가 항상 당신 가슴에 기대어 있게 하소서.

제 몸이 당신 밭에 머물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진리의 밭을 갈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재산을 다루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해 주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탐욕은 인간의 기본적 도리와 품위가 무너질 정도의 지나친 욕심을 가리킵니다. 탐욕이 지나간 자리에는 분배와 소유의 균형이 깨어지고 착취와 손해의 상처가 남지요. 누군가의 이득이 누군가의 상실을 부릅니다. 그래서 탐욕은 얻은 재산의 수량 문제가 아니라, 탐욕한 만큼 누군가 공격받고 소외됨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과도히 탐욕을 부리는 이의 존엄성도 실은 당하는 이 못지않게 훼손됩니다. 소유의 쾌락에 들떠 천박해지고 무도해지고 병드는 영혼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따름이지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색하게도, 많은 이들은 생명이 재산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돈으로 첨단 과학과 의학의 결실을 우선 점유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이야기이긴 하지요.

하지만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는 명백히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은 육적 생명뿐 아니라 영적 생명까지 포함하니까요. 오늘 비유 속 부자의 잘못은 그가 영적 생명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자신을 위해 모은 재화란 제 만족을 위해 쌓은 지상 재화를 의미하지요. 그 재산을 허락하신 만물의 주인을 잊고 모든 것이 제 것인 양 즐기고 누리면서, 협력하고 양보하고 기여한 이웃들의 몫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실책입니다. 그들의 가난에 무심히 눈 감은 탓에, 그 부유한 이의 천상 곳간은 기초가 놓일 땅조차 얻지 못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인간을 배불리고 풍요롭게 하는 모든 열매들이 어디서 오는지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요엘 2,23)


땅의 곡식과 과일은 주님께서 내려 주신 비를 먹고 자랍니다. 그리고 사람은 주님의 은총과 도움, 축복을 먹고 자라지요. 세상에는 이 진실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이와 망각하는 이가 있을 뿐입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요엘 2,26)


이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애써 일한 보람으로 한껏 배불리 먹어도 좋고 신나게 즐겨도 좋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좀 더 부여된 주님의 은총을 당연하다고 여겨서는 안 되지요. 자격 없고 합당치 못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에 놀라워하고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분께는 찬양이 필요하지 않지만, 감사와 찬양은 이를 바치는 이의 영혼이 숨을 쉬는데 꼭 필요한 양분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의인들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묵시 14,13)


주님에게서 받은 것에 대해 우리가 올린 탄성과 감사와 찬양은, 심판하시는 분 앞에 서게 될 우리를 따라옵니다. 이미 우리 영혼에 아로새겨졌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감사의 마음으로 사심 없이 내어준 자선과 희사의 자취는 심판하시는 분의 심장에 인장처럼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지상의 가난한 이웃들을 거쳐, 거쳐서 결국 그분이 받으셨고 그분이 누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의 빈부의 격차는 소유한 물질로 생기지만, 영혼의 격차는 비우고 나누고 내어준 자취로 생기기 마련입니다.     

흔히들 풍요와 결실의 한가위라고 하지만, 올해 추석은 예년의 흥겨움을 떠올릴 때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실직과 병고와 소외를 겪는 이들이 늘어가고, 단절과 고립이 키우는 마음의 병 역시 중차대한 현실이지요. 가난한 이들이 더욱 처절한 빈곤의 늪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에,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시는 오늘 되면 좋겠습니다. 국가와 사회, 교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굶주리고 외로워하는 이웃, 형제는 없는지요... 올 추석은 국가적, 세계적 위기 속에서도 더 따뜻한 사랑이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없이 살아도 성체와 성혈로 배부르고 흥겨운 우리가 그 작은 불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가위 명절을 축하드립니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 준 조상들과 부모님들께 감사하며 보름달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두루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인생   

-김찬선신부-


한가위 명절이 올해는 특별한 한 해일 것이고,
좋은 뜻에서가 아니라 안 좋은 뜻에서 특별하다고 모두 생각하실 겁니다.

한가위 명절이라는 것이 한 해의 풍성한 결실에 대해 감사하는 명절이고,
그리고 명절이라는 것이 같이 기뻐해야 하는 것인데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결실도 초라하고 기쁨을 같이 나눌 수도 없으니
올해 한가위는 명절 같지 않은 명절이 되었지요.

그래서 여러분을 생각할 때 안쓰러운 마음이 큽니다.
저는 원래 명절이란 것을 일생 평일처럼 지내왔기에
올해 이러해도 그리고 지금 제주도에서 혼자 지내도
별로 쓸쓸하지도 않고 어떤 면에서는 좋기만 한데
여러분은 가족이 있기에 이런 마음이 드는 거지요.

그러나 그렇기에 이 기회에 우리 인생을 더 잘 성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 인생의 가을에 한가위 명절을 지낼 수 있을까? 뭐 이런 성찰입니다.

한 해의 가을에 수확을 풍성히 거둔 기쁨을 나누는 것이 한가위이듯
우리 인생의 가을에도 수확이 풍성하고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을 우리 인생의 한가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한가위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까 성찰하자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면 욕심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면
코로나로 인한 올해 한가위처럼 우리 인생의 한가위도
한가위 같지 않은 한가위가 될 것입니다.

왜냐면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욕심 많은 부자가 계획한
수확의 기쁨을 하느님께서 빼앗으실 거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의 가르침은 풍성한 수확은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결과이며 욕심의 결과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고,
그러기에 수확의 기쁨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누릴 수 있다는 거지요.

우리는 참 안타깝게도 은총을 살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이제 은총을 살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은총을 살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모든 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수많은 실패의 체험으로
알 수 있고 알아야 하며 그러기에 은총에 자신을 맡겨야 하는데
늙어갈수록 조금 남아 있는 것, 그것마저 잃을까 움켜쥐고 있지요.

제가 옛날 노인 요양원에서 일할 때 할아버지들 목욕과 사물함 정리를
도와드렸는데 그중 한 할아버지는 눈만 뜨며 빵봉지나 병 뚜껑과 같은,
우리에게는 쓰레기 같은 것을 주어다가 사물에 쌓아두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달에 한 번 그것을 싹 정리하면 할아버지는 며칠 멍하니 계시다가
다시 쓰레기를 갖다 쌓는 숨바꼭질 같은 월례 행사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실까 나름 추측해보니 젊었을 때 있던 것 다 날려버리고,
나이 늙어 이제 가진 것 하나 없으니 허전하여 뭐라도 사물함을 채워야
덜 허전하여 그러신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늙어갈수록 하느님께서 건강도 뺏으시고
가지고 있던 것들 중에 천국 가는 데 필요 없는 것 하나하나 뺏으시는 건데
우리는 천국 가는데 필요한 것은 거두지 않고,
필요없는 것들을 오늘 비유의 부자처럼 자기 창고에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욕심으로 세상 재물을 많이 쌓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하다고 오늘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하느님 앞에 갈 때 부유한 것일까요?

사랑을 비롯한 온갖 덕들과 선행을 비롯한 온갖 덕행들이 아닐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13일 금요일 한가위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