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

Margaret K 2020. 9. 26. 05:49

2020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
마태오 21,28-32)


Jesus said to them, "Amen, I say to you,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are entering the kingdom of God before you.
When John came to you in the way of righteousness,
you did not believe him;
but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d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오늘 복음은 꽤나 불편합니다. 나보다 못한 이들, 죄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꽤나 불편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잘한다고 생각해서 한 모든 일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불편하고,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용인되는 듯하여 불편하고, 그래서 복음의 예수님이 얄밉기까지 합니다.

불편한 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니 그냥 두기로 합시다. 그런데 왜 불편한가를 되묻는 것은 어떨까요? 무슨 기준으로, 어떤 상식으로 우리의 불편함을 파헤쳐 볼 수 있을까요? 대개 불편함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에서 비롯한다고 봅니다. 둘째 아들을 찬찬히 묵상해 봅니다. 그는 포도밭 일을 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들 된 이가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기도 힘들었겠지요. 일은 하기 싫으나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둘째 아들은 포도밭에 가겠노라 답하였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네 삶의 모습이니까요. 하기 싫은 일이 더 많고, 그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웬만하면 쉽고 하고 싶은 일만 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관계 안에서 어정쩡한 중간적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닌,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말과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세, 이런 자세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보다 더 얄밉지 않으신가요?

맏아들은 솔직하게 ‘싫습니다.’라고 말하였지만 스스로 생각을 바꾸어 일을 하였습니다. 세리와 창녀들도 솔직하였습니다. 시대의 죄인으로서 솔직한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는 이들이었지요. 믿음도 그렇습니다. 긴가민가 뭉그적거리는 자세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솔직히 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저는 믿음이 약합니다. 너무 약하여 포도밭까지 걸어가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빌고 빌 뿐입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사, 저를 위하여 빌어 주십사 신앙 공동체에 함께하시는 여러분에게 부탁드릴 뿐입니다. 세리와 죄인 취급받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 뿐입니다. 이 못난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가고픈 마음이 있으니까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말보다 실천하는 사람, 우리는 어느 쪽인지요?

죄인과 세리들은 비록 죄를 짓고 살고있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 진정한 참회와 회개를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오. 7,21)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 2,17)

사람에게는 변화할 수 있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약점이자 장점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아버지에게 “네”하고 대답한 아들은 실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효성스런 아들인 것 같았는 데 결국 아버지를 기만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아니오”라고 한 아들은 후회하고 아버지를 위해 포도밭에 갔습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희망입니다.

비록 지금 죄를 짓고 있지만 돌아 갈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부족함을 정확히 직시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깨달고 주님께 의탁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굳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잘못을 저지르기에 사람입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은 자랑할 것도 의지할 곳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면 쉽게 마음을 바꾸고 주님께 의지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도덕적이라고 자부하는 오만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주님의 말씀이 스며들 자리가 없습니다. 그 자만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지 않는다면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피해를 준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께 용서를 구해야합니다. 참 회개만이 용서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참회의 영혼을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주님, 마리아를 용서하신 주님, 착한 도둑을 용서하신 주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십시오. 회개를 함으로써 비로소 낡은 삶을 버릴 수 있습니다. 회개를 통하여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말에 책임을 지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비판해야 하는 사람은 남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면 즉시 회개하십시오. 참 회개만이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회개를 함으로써 비로소 거룩한 주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과 형제에게 많은 죄를 지은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는 말과 행동 중 무엇을 먼저하는 사람입니까?

2. 항상 나를 돌아보고 있습니까? 잘못을 깨달았을 때 무엇을 하였습니까?

3. 용서할 수 없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 회개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나는 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이민의 날- 지금은 "예"라고 답할 때이다

-임상만신부-


오늘 복음은 특별히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맏아들과 다른 아들의 비유이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요구하자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거절했으나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반면 다른 아들은 처음에는 가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가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내용을 다시 보면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28절)면서 아버지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맏아들은 “싫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아버지의 요청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맏아들은 자신의 싫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접어두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포도원으로 가서 일을 하였다.

이 비유에서 우선 ‘오늘’이라는 말로 사전에 어떠한 예정이 없었더라도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주목해본다. 맏아들에게는 아버지가 갑자기 포도원 일을 시키니 못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오늘 급한 다른 계약 건도 있어서 잘못하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었을지 모르고, 오늘 병원에 중요한 예약이 있거나 놓칠 수 없는 약속 등의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왜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았느냐고 불평할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는 아들에게 주어진 일 중에서 가장 우선이 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즉 의미 부여와 가치 부여의 문제 그리고 인생의 우선순위의 문제를 결정하게 만드는 대목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오늘’이라는 말에는 최종적으로 건네시는 하느님의 명령과 사명의 종말론적 시급성이 내포되어 있기에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도 결단할 것을 요구하신다.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아버지를 속인 다른 아들보다는,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향했던 맏아들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의 뜻에 더욱 합당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하시면서 비록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지금이라도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발걸음을 돌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았다면, 지금이라도 이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따르고자 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국 속담에 “바닷가의 조약돌도 무의미하게 놓인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바닷가에 조약돌 하나도 그 놓인 위치에 따라 하느님의 뜻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과 사명이 없겠느냐는 것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 ‘바로 지금’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든 일에 앞서 우선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일, 하느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다시 한 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오늘’ 해야만 하는 것으로 절대로 우선순위를 미룰 수는 없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2코린 1,19) 

 

진리 안에 사랑이 구원의 길이다

-김창선-


연중 제26주일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주님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일상에서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가 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제 ‘진리의 성령’과 함께하는 삶으로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오늘 미사에서 은총을 구합니다.

9월의 마지막 주일은 이민의 날입니다. 우리 이웃에 실향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국내 실향민에 관한 사목 지침」(2020.5)을 발표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코로나바이러스19의 위기 속에 가중된 실향민 고난을 이해하고, 형제애로 다가가 귀를 기울이며, 나눔과 환대에 동참하기를 당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기원전 6세기)는 이스라엘 멸망과 바빌론 유배는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속죄와 정화를 위한 하느님 정의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과거의 죄 때문에 공동체에 연대책임을 내리는 벌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어찌 넘어갈 수 있느냐며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에제 18,25)하고 주님 정의를 판단합니다.

예언자는 주님께서 개인 공적에 따라 심판하시기에 개인 책임임을 일깨우고, 악습을 버리고 회개하여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생명을 얻는다(에제 18,27-28)고 선포합니다. 연대책임 때문에 고통을 겪어도 회개하고 변화될 주체는 사람이지 하느님일 수는 없습니다. 의인도 공동체 내에 악과 불의와 싸워서 공멸을 막을 책임이 있습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제3차 선교여행 중에 투옥된 에페소 감옥에서 에게해 건너 필리피 교우들에게 보낸 서한의 일부입니다. 주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돕고 은총을 누리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한마음 한뜻으로 기쁨을 누립니다. 이기심과 위선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당시 교회에서 즐겨 노래하던 ‘그리스도 겸손의 노래’(필리 2,6-11)를 전하며, ‘성덕의 모범’이신 예수 성심을 우리 안에 간직하라고 권고합니다. 참 하느님이시면서도 자신을 비우고 낮추신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기에 성부께서는 부활의 영광과 함께, ‘주님’이란 호칭과 세상의 주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 권한을 문제 삼는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마태 21,23 이하)에 연결된 내용입니다. 그들이 그 자격의 출처를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요한의 세례 권한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반문하십니다. 백성들은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지만 지도자들은 그를 믿지 않았기에 말문이 막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도 답변을 거절하는 대신 그들의 태도를 자성토록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마태 21,28) 하시며 이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안드레이 미로노프의 ‘두 아들의 비유 ’ .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전하는 이 비유는 다른 형식의 필사본이 두 개나 더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과 본문 내용은 같으나 아들의 순서가 바뀝니다. 맏아들은 ‘예’라고 대답만 해놓고 포도밭에 일하러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 한 뒤 뉘우치고 밭에 나가 일했기에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입니다. 또 다른 필사본은 내용까지 바뀌어 혼란스럽습니다. 맏아들은 싫다고 대답한 뒤 뉘우치고 간 반면, 둘째 아들은 ‘예’라고 대답만 하고 일하러 가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은 맏이가 아니라 둘째라고 전합니다.

중동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방문지에서 이 비유 이야기를 자주 나눈답니다. 그들에게 ‘어느 아들이 더 좋습니까?’ 물으면, ‘싫다’ 해놓고 실천한 아들보다 ‘예’라고 공손히 대답하고 실천하지 않은 아들을 더 좋아한답니다. 그들 문화의 핵심가치는 ‘명예’이기에 가정의 중심인 아버지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은 가문의 수치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명예롭게 행동했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고 물으십니다. ‘싫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회심하고 포도밭에 가서 일한 맏아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믿고 회개하여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먼저 얻은 사람은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죄인이던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께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 21,28).” 이르십니다. ‘포도밭’은 주님의 돌보심 아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교회의 은유이고,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사랑의 보금자리(이사 5,7; 요한 15,1; 아가 1,6)입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이고, 교회는 살아계신 하느님 목소리입니다. 주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고 실천하는 사랑의 삶이 은총 속에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바라시는 아버지 뜻과 기도 속에 발견한 개인의 소명이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아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자만이 들어간다(마태 7,21).”

 

생각을 바꾸어..., '좋은 이웃' 되기

-이광휘 신부-


제가 함께 만나고 사목하는 분들은 ‘국내 이주민’들입니 다. 이들은 이주 노동자들, 결혼 이민자들, 이주민의 자녀 들(다문화) 그리고 난민들입니다. 이들은 때론 이유 없는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차별속에 살아가곤 합니다. 특히나 난민 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목숨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 의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 먼 나라 이곳 한국 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종교에 대한 편견, 잘못된 선입견과 오해들 그리고 그들의 피부색으 로 인해 ‘잠재적인 범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우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이주민 활동가 한 분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 었습니다.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철저한 준법 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좁은 도로의 횡단보도 하나라도 파란불을 지키며, 길거리에서도 침도 뱉지 않으려 한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혹시나 작은 잘못 하나로 추방되거나 그것이 이유가 되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누구 보다 모범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제106차 이민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 서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이주민’이라고 말씀하시며, 이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돕는 것이 각 나라의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 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시급한 일이라고 강조하셨습 니다. 


또한 교황께서는 요셉, 마리아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셔야 했던 예수님께서 ‘이주민’의 표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헤로데의 박해를 피하여 강제로 피신하셔야 했던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주민’ 안에 현존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얼굴에서 굶주리시고, 목말라하시며, 헐벗으시고, 병드시고, 나그네이시며, 감 옥에 갇히신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해야 합니다(마태 25,31- 46 참조·제106차 이민의 날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담화 일부 발췌). 


오늘 복음에서 맏아들은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포도밭 에 일하러 갔다”(마태 21,29 참조)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민의 날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 다. 


이주민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차별의 마음을 바꾸어, 세상이라는 포도밭에 가서 사랑을 실천하고, 가련하고 절망에 빠져 있을지 모르는 외국인들의 ‘좋은 이 웃’이 되어 주라고 말입니다.


올해 이민의 날의 주제 성구는 “모든 이를 차별 없이 환 대하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참 조)”라고 정해졌습니다. 이러한 차별 없는 환대와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줄 때, 그들 도 우리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줄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제 2독서인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라는 말씀에 따라, 예수님이 지니셨던 이방인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교회의 맏아들입니까? 작은 아들입니까?

-윤용남신부-


준비되지 못한 채 성큼 다가온 교회의 미래가 걱정스럽습니다.

코로나19가 몰고 온 충격은 교회 안에도 폭풍으로 다가 오고 있습니다. 

미사 재개와 중단이 반복되며 슬픔과 고통의 순간들이 심장을 한숨 짓게 합니다. 


교회가 전염병의 진원지가 되고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고 영향력이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 이 갈팡질팡하며 불확실한 코로나 이후의 교 회 모습을 염려합니다. 교회의 원로들과 사제들이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나갈 묘책을 강구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열심히 밭에 나가 일을 하라고 합 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 지만 나중에 뉘우치며 일하러 갑니다. 둘째 아들은 일하러 간다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죄 인으로 낙인찍혀 살던 맏아들과 같은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를 먼저 간다고 합니 다. 존경받고 권위를 인정받던 수석 사제들 과 원로들은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따른다고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들이 작은 아들처럼 말로만 가겠다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맏아들입니까? 작은 아들입 니까?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교회의 공동 체의 선익을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교회의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직도 교회 안에는 말만 앞세우며 걱정만 하는 교 회의 원로들이 있습니다. 코로나19의 폭풍으 로 흔들리는 교회에 현 상황을 타개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필요할 때 입니다. 그럴듯한 미사여구나 담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뒤덮여 가는 폭풍에 견딜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코로나19가 우리 곁에서 당분간은 머물러 우리를 단련시키기 위해 고통의 순간들을 더 깊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처럼 전개 되고 있는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현실 앞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 해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기준을 기억하고 행하자

-안성준신부-


개인적으로 저는 무슨 날이라는 기념일을 좋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념할 정도로 중요한 날 이라면 매일매일의 삶이, 순간순간의 생각과 판단 이, 기념일이 기억하고자 하는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 니다. 


그럼에도 기념일은 세상살이에 지쳐, 그저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들에게 다시금 그 가치를 떠오르게 하고, 타성에 젖어 잊혀진 그 가치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다 시금 기념일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고, 그에 맞갖은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 주기에, 나약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날 이라고 생각됩니다.


늘은 연중 제26주일이자 이민의 날입니다. 공정과 정의가 화두로 떠오르는 요즘 시대. 무엇이 공 정이고 무엇이 정의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사람 들이 말하는 공정과 정의는 과연 올바른 기준을 담고 있 을까?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 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 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세상 사람들은 주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하지만 주님 은 오히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합니다. 곧 적어도 믿는 이들에게 공정과 정의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당연하다 여겨왔던 세상의 기준들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이주민이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들 외국인들을 생각 하지만, 사실 하느님 나라를 떠나온 우리 모두가 이주민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 안에서 여러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겪으면서도 하느님 나라에 참 여하기 위해 주님이 보여 주신 삶의 모범을 기준으로 삼 아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그때 비록 내가 부족하고 나약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천국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 다고 믿습니다. 이런 희망을 담고 살아간다 한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삶의 부정적 요소를 다시금 경험하고 싶 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이민의 날, 특별히 낯선 문화와 환경과 언어 안에서 삶의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부정적 요소보다는 긍정적 요소를 더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은 중 요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8년 세계 이민의 날 담 화를 통해 “이민과 난민을 환대하고, 보호하고, 증진하 고, 통합하기”라는 네 가지 동사를 제시하셨고, 2020년 담화문을 통해, 네 가지 동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 한 여섯 쌍의 동사를 제시하셨습니다. “이해하기 위하여 알기” “봉사하기 위하여 가까이 다가가기” “화해하기 위 하여 귀 기울이기” “성장하기 위하여 함께 나누기” “발 전하기 위하여 참여하기” “건설하기 위하여 협력하기”. 부디 우리 모두가 이 동사를 기억하고 행함으로써 내 가 만나는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우리 그리스 도인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듯 삶의 긍정적 요소를 느 끼길 희망합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나?"

-이장환신부-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이릅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큰아들은 “싫습니 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 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고, 작은아들 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 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라고 수석 사제 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큰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처음엔 싫다고 한 큰아들보다 아버지의 뜻을 처음부터 따르고 실천까지 잘하는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당연히 자신들의 것이라 여겼으나 세례자 요한의 말도 따르지 않았고 예수님의 말도 듣기를 거부하는 그 들은 ‘작은아들’이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이었으나  한의 말을 듣고 회개했던 ‘세리와 창 녀들’이 ‘큰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아들일까요, 작은아들일까요? 보좌신부 시절 함께 계시던 수녀님이 저에게 ‘착한 목자’라는 별명 을 붙여주셨습니다. 별명이 마음에 들었던 저는 그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신자들이 무언가를 부 탁하면 즉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많은 생각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인가? 형평성에 맞는 일인가? 너무 몰캉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등 대부분은 안 할 핑계를 찾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냥 기쁘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저는 그 당시의 사제들과 원로들처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작은아들’이 될 가능성을 늘 안고 살아가는 것 같습 니다. 


한편 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당신부가 신자들에게 뭔 일을 시키면 하기 싫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일을 맡게 되고 맡은 일은 열심히 합니다. 마음이 약해서인지 신앙심이 깊어서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큰아들’이 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두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큰아들에게서는 속상함에서 안도의 기쁨으로, 작은 아들에게서는 든든함에서 서운함으 로 바뀌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버지가 가지셨을 속상함과 서운함은 빼고, 든든함과 기쁨만을 드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적어도 ‘큰아들’로 살아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살아갈 때, “예. 제가 아버 지의 뜻을 실천하였습니다.”라고 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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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실수로 회사 동료의 바지에 콜라를 쏟았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떻게 해요? 엉덩이까지 홀딱 젖었어요.”라고 말하자 회사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괜찮아요. 엉덩이가 조금 더 달콤해졌을 뿐이에요.”

바지에 콜라를 쏟은 사람은 이 회사 동료를 앞으로 어떻게 볼까요? 이제까지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 바지에 콜라를 쏟았다고 화를 낸다면 좋은 감정을 갖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화내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유머로 넘기는 모습에서 좋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며칠 전, 성지를 방문하신 자매님으로부터 자기 본당에 찾아온 손님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론하시는데 본당 신부님을 계속 칭찬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순간 누가 다르게 보였을까요? 칭찬의 대상인 본당 신부님이 아니라, 칭찬하는 손님 신부님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다르게 보일 때는, 지금 자신을 높이려고 할 때가 아닙니다. 또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고 할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좋고 선한 일을 행할 때였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특히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좋고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분명 나의 이웃들에게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서로 정반대인 두 아들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두 아들에게 일렀는데, 맏아들은 싫다고 했다가 생각을 바꿔서 일하러 갑니다. 반면 또 다른 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이 그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고서 이행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고서 나중에 생각을 바꾼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했습니다. 일하러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은 아들은 꾸지람을 듣습니다.

이처럼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믿은 뒤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은 그들에게가 아니라 너희에게 먼저 왔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았다. 그들은 거부하지 않고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지금 당장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짐이 무거워진 이유는 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의식하는 내 생각에 있었다(서영은).


품위있게 삽시다.

가정 폭력으로 상처받은 아이는 오랫동안 정신치료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한 정신과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작 치료받아야 하는 사람은 안 오고, 그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들만 병원에 온다.”

정신치료를 받는 아이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지요. 그 상처를 준 사람이 문제이고, 상처 준 사람의 정신을 올바르게 치료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늘 피해자가 세상의 이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상처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상대의 문제까지 내 문제로 끌어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
 

'나 담배 끊었어"와 "나 비흡연자야"라는 말의 차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런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습니다. 맏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고 이릅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일하러 갑니다. 둘째는 처음엔 간다고 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는 싶었지만, 몸이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맏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상징하고, 둘째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상징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처음엔 따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뜻을 받아들여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은 처음엔 하느님 뜻을 따르는 듯하였지만 실제로는 계속 죄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일어난 것일까요? 어째서 어떤 사람은 변하고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는 행위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 행위에 대한 태도는 ‘믿음’에 의해 좌우됩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도자들이 요한이 가르치는 길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가리켰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삶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분을 믿으면 행위에 대한 시각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젊을 때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현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발언을 하였다가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사형 집행인은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5분을 주었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러시아 황제가 계획한 일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사형시키느니 그런 척하면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 5분은 평생만큼 소중한 시간이었고 1분씩 쪼개어 많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인생은 신의 선물이고,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다”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순간마다 그 5분처럼 아껴 쓰며 의미 있게 살고자 결심했습니다. 4년간의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종이 대신 머리로 소설을 쓴 그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그는 훌륭하게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책을 판 돈을 마약과 술, 도박에 탕진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사람은 변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변한 이유는 아내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그에게 도박 자금으로 줄 것이 없다며, ‘마지막으로 시집올 때 가져온 반지와 보석’을 내어주었습니다. 이 선물은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녜요. 나는 당신이 언젠가 돌아올 것을 믿어요”라는 말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믿음을 받아들여 모든 것을 끊고 새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버리면 지금 하는 행위들은 마치 사람이 개같이 네 발로 걷는 것처럼 어색해집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은 머리로 변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 없이 계명을 지키며 변하려는 사람은 마치 “나는 담배를 끊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는 원래 담배를 안 피워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또 피울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원래 자신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란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래 안 피우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어색하게 됩니다. 실수로 피워도 곧 영원히 피우지 않게 될 것을 압니다.

      유다인들이 열에 하나 계명을 지키면, ‘나 하느님 자녀 맞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자녀는 ‘어 이상하다? 앞으론 죄 안 짓겠지!’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걷는 것이 이상했을까요, 물에 빠지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을까요? ‘당연히 걸어야 하는데 왜 빠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두세 발 걸은 것으로 물 위를 걸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죄짓는 게 당연한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고, “하느님 자녀이기에 죄짓는 게 이상한 거지!”라고 반박하는 사람은 곧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도 계획을 세워놓고는 실행을 못 하는 의지 박약자였습니다. 1년 안에 책을 써서 주겠다고 계약을 해 놓고 좀처럼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830년 여름까지도 빈둥대던 빅토르 위고를 보고 출판사는 1831년 2월로 마감을 못 박았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옷장 안의 모든 옷을 꺼내 봉인한 뒤 치워버렸습니다. 속옷까지 치워버렸습니다. 옷을 치워서 외출을 할 수 없게 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던 것입니다. 그가 걸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숄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마감 시한보다 2주 빨리 『노트르담의 꼽추』를 탈고하여 제출했습니다.

 

      이전의 행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임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물 위를 당연히 걸을 수 있는 존재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행위는 그 사람의 존재입니다. 의사가 치료하지 않고, 선생이 가르치지 않고, 사제가 미사 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존재와 직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치료를 몇 번 해서 의사가 되는 게 아니고, 가르쳐서 선생이 되는 게 아니며, 미사를 거행한다고 사제가 아닙니다. 먼저 의사이고, 선생이고, 사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언젠가 다시 물속으로 우리를 빠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행동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 방법은 거리 지키기와 마스크 착용입니다꼭 필요한 모임만 참석하고 가능하면 모임을 자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손을 자주 씻는 것도 코로나19의 감염을 막는 방법입니다정부의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고 방역지침을 지키고 있습니다답답함을 감수하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그럼에도 코로나19의 확산이 멈추지 않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습니다박해도두려움도환난도칼도 그리스도와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확진된 목회자가 예배를 통해서 신도들을 감염시킨다면 결코 착한 목자가 아닙니다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중세에 페스트는 많은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페스트는 신앙을 통해서는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종교적인 신념으로 이웃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은 광신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대규모 모임을 가지면서 거리두기를 하지 않기도 합니다위치 정보를 감추기 위해서 휴대폰의 전원을 꺼놓기도 합니다확진되었으면서도 동선을 알려주지 않기도 합니다검사를 거부하기도 합니다코로나19는 정치적인 대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코로나19는 사상과 이념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정치적인 이유로 무고한 사람이 감염되어 사망한다면 반드시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손실을 주고삶에 불편을 준다면 이 또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이스라엘 백성이라서종교인이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이방인이라고 해서죄인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바이러스가 사람을 구별하지 않듯이 하느님께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바이러스는 정부의 방역지침을 준수하고개인위생을 철저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이방인일지라도죄인일지라도 회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바이러스는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도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해도재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개인위생을 소홀히 하면 쉽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마귀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듯이 바이러스는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삶에 커다란 피해를 주게 됩니다율법학자라고 해도바이사리파라고 해도종교인이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지게 됩니다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기름부음 받았던 다윗도하느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였습니다다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본당에서도 여러 교육기회가 있습니다성서공부레지오성령기도회대림특강 같은 기회입니다평일미사는 하루의 삶을 돌아보고 말씀 안에서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그런 자리에 열심히 참여하는 분들은 축복의 말씀을 듣기 때문에 신앙이 더욱 강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기회에 함께 하지 못하면 뜨거웠던 신앙도 점차 식어가는 것을 봅니다저의 동창 중에서도 교구의 행사나피정교육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그런 친구들은 교육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기 때문에 본당에서의 사목도 기쁘게 하게 됩니다하지만 그런 교육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친구들은 동창 모임에도 자주 오지 않는 친구들은 나중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처음에는 거의 표시가 나지 않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훨씬 기쁘게 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받은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무슨 일을 할 때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 예배를 강행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빙자한 이기적인 태도입니다검사를 거부하고동선을 알리지 않는 것도 이기적인 태도입니다자가 격리의 대상으로 통보를 받았으면서도 공공장소에 다니는 것도 이기적인 태도입니다확진 판정을 받고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이기적인 태도입니다코로나19는 나만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웃을 아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라고 합니다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나의 건강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의 행동이기도 합니다코로나19가 대구와 경북에 심각한 피해를 줄 때였습니다전국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대구와 경북으로 달려갔습니다전국의 소방대원들이 자원해서 달려갔습니다우한에서 온 교민들을 받아들인 천안과 아산의 주민들이 있었습니다지치고 힘든 사람을 우선적으로 보듬어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해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언제든 기회가 왔을 때 결정적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는 개방성이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의 무대 위에는 전혀 다른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츤데레’ 맏아들과 ‘따로 국밥’둘째 아들입니다. 때는 농번기였던가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침 식탁에 앉은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 좀 하자고 초대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먼저 맏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니,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흔들며 “싫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침부터 날씨는 푹푹 찌는데, 오늘 하루는 집에서 푹 좀 쉬고 싶었는데, 아버지로부터 ‘일하러 가자!’는 말을 들은 맏아들은 갑자기 짜증이 확 났던 것입니다.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밥 숟가락을 식탁 위에 탁 놓은 다음, 자기 방으로 들어온 맏아들의 모습이 참으로 솔직하고 인간적입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의 얼굴과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몇초 지나지 않아 즉시 후회합니다. ‘동생 저거는 분명히 밭에 안갈거고, 혹시 아버지 혼자 퇴약볕 아래 일하시다가 쓰러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마음도 밀려왔습니다. 맏아들은 즉시 마음을 고쳐먹고, 궁시렁궁시렁, 투덜투덜거리면서 포도밭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분명 싫다고 말해놓고, 어느새 포도밭에 먼저 도착해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맏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하고 기쁘겠습니까? 아버지의 흐뭇한 미소를 바라보는 아들의 마음 역시 눈녹듯이 풀렸을 것입니다. 참으로 훈훈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말 따로 행동 따로’‘따로 국밥’ 둘째 아들은 어떠했습니까? 대답 하나는 시원시원합니다. 말로는 순식간에 만리장성을 쌓습니다. 입으로는 뭐든 못할게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요청 앞에 둘째 아들은 지체없이 대답했습니다. “가겠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솔직히 가야겠다고 마음도 먹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침 밥 먹고 나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가야지!’했는데, 마침 티비를 트니 절찬리에 방영중인 아침 드라마가 한창입니다. ‘요것만 보고 일어나야지!’했었는데,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요란스레 전화기 벨이 울려 받아보니 친구들이 다 모여있고, 선수 한명이 부족하답니다. 이미 포도밭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신나게 축구 한 게임 뛰고 난후, 뒷풀이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해는 벌써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사람 많습니다. 세례나 성사(聖事), 서원이나 서품을 통해 엄숙하면서도 단호하게 ‘예!’라고 대답은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믿습니다!’ ‘끊어버립니다!’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절대 순명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저 말 뿐입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계획서는 거창하나 결실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전형적인 둘째 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크게 슬퍼하시고 실망하실 모습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바는 둘째 아들에서 맏아들로 건너가려는 노력입니다. 결국 참된 마음의 변화, 진정성 있는 회개입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와 창녀들은 사실 바르지 못한 길을 걷고 있었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죄 덩어리였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개심(改心)의 요청이 당도하자 즉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가 선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걱정할 수 있겠지만, 교회 안에 속해 있다고 안심해서도 안됩니다.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것, 결심하고 서원한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크게 고쳐먹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금 즉시 생활을 개선을 마음의 태세가 중요합니다. 언제든 기회가 왔을 때 결정적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는 개방성이 필요합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이영근신부-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의 믿음도 익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 회개의 행동 믿음의 행동에로의 초대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음의 뉘우침만 있는 회개가 아니라 행실로 돌아오는 회개와 말로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행하는 믿음에 대한 촉구입니다.

 

<제1독서>는 그릇된 견해로부터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를 당하게 되자, 조상들의 죄 때문에 자신들을 벌하시는 하느님은 공정하지 않고 복수심이 많아 자신들을 멸하신다고 여기고 불신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에제케엘 예언자를 보내시어 그들을 그러한 그릇된 견해로부터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정하지 않다는 말이야?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27.32)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공동체의 불화에 대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면서, 예수님의 낮춤과 순명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대한 순종으로 누리시는 영광을 필리피 신자들이 깨닫기를 촉구하며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지 그 상황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수석사제들과 원로 백성들의 재정수입과 권위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지 추궁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위에 대해 반문하시고 이를 대답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는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간 아들과,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서도 일하러 가지 않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원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예수님께서는 ‘누가 “예”라고 응답한 사람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뜻”은 “예”라는 응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응답에 따르는 순명의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당신의 양식’(요한 4,3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야고보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26)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계명을 매일 행동으로 채워라.”(4,63) 하시고, 창설자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성인은 ‘실행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았으며, 말한 바는 모두 실행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실행’에 대한 주제를 대할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니, 히틀러 암살에 연루되어 처형된 예언자적 신학자인 본회퍼입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너무도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당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존경받는 이들이었고, 직업적, 형식적으로 이미 부르심에 응답한 의인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의 잘못보다 남들의 허물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어쩌면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창녀들은 그 당시 천시를 받던 이들이었고, 드러난 자신의 죄를 항상 부끄럽게 여기며 사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남들의 허물보다 자신들의 잘못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곧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들과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종은 이런 풍자를 들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면, 놀랄 일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기 같은 죄인이 천국에 오다니 하고 놀라고, 둘째는 교황, 주교, 신부들, 독실하기로 유명했던 신도회장들이 천국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놀라고, 셋째는 평소에는 소위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천국에 많이 와 있는데 놀란다.”

 

이러한 말씀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마태 21,32) 끝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겠느냐?”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주님!

당신의 뜻을 제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응답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실행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고, 당신 의로움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엄마가 보고 있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시길 희망합니다.

순종한다는 것,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대로 하겠다고 말해놓고 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 사람은 말을 잘 듣는다.’고 하면, 귀로 듣는 것을 뛰어넘어 행동으로 옮겼을 때 말을 잘 듣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의로운 길을 가르치는 요한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했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한의 말을 “믿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믿었기에 그분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귀로 들었으면 그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그때 말씀을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1).

예수님께서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은 그야말로 “폭탄선언”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전포고”로 들렸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스스로 내로라하는 사람으로 뽐내고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머리가 큰 것이 아니라 가슴이 커야 하고 결정적으로 손발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싫습니다.” 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또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면서 시원스레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더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신뢰하고 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못한다’고 하면 다른 방안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선이 무엇인지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떤이는 말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 말을 잘 듣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결정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 집은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마태7,24-27참조). 듣고 실행할 때 결정적으로 심판의 폭풍 속에서도 든든히 서 있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매일 매 순간 주님의 뜻을 행하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자기가 취해야 할 태도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작 들어야 할 사람은 듣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끝내 뉘우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극약처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인 취급을 하고 무시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흉보고 험담하며 욕하지마라. 먼저 자신을 속이는 네 속을 봐라.

말만 있고 행동이 없는 사람은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와 같습니다.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도 기름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은 쓰레기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십시오. 민첩하게 후회없이! 행동이 없으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고, 시작은 아무리 늦어도 빠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실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학교에서 반 ‘급훈’을 응모하였는데 ‘엄마가 보고 있다.’가 뽑혔습니다. 이걸 제안한 친구는 수업 중에 장난을 치다가도 이 급훈을 보면 열심히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집을 떠나 외지에서 공부하는데 엄마와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그 방에 놀러 왔는데 한 아이가 책상 위의 사진을 엎어놓으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엄마가 나가셨다. 신나게 놀자.”

누군가 보고 있으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쳐다볼 때 자기도 모르게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 사람의 길은 주님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분께서는 그의 모든 행로를 지켜보신다”(잠언5,21). 사람에게 인정받고 잘 보이려 하지 않고 주님 눈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언제 실행할 것인가? 지금 당장 하시기 바랍니다. 제일 적당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시험공부 일곱 단계입니다. 1.집에서 해야지 2. 저녁 먹고 해야지 3. 배부르니 좀 쉬었다 해야지 4. 지금 보는 TV만 보고 해야지 5. 밤새워 열심히 해야지 6.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해야지. 7. 이런 젠장!

‘할까 말까?’ 할 때는 ‘하고’, ‘갈까 말까?’할 때는 ‘가자.’ 미루지 말고 지금!

 

두 아들의 비유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또 ‘겉으로만’ 하는 ‘위선적인 신앙생활’로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자주 경고하셨습니다(마태 7,21; 23,3).
‘위선’은 사람들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는 ‘큰 죄’입니다.
(자기 자신도 속인다는 것은, 자신이 위선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위선자들은 모두 그런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사제들의 위선을 꾸짖으실 때마다
그들이 심하게 반발한 것은,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온 마음’과 ‘온 삶’으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는 ‘삶’ 전체가 달라야 합니다.
‘회개’의 경우에도 “회개합니다.” 라고 말은 하는데, 보속도 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회개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두 아들의 비유’는,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말로만 회개하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고,
동시에 진실하게 회개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격려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28-32)>

여기서 ‘두 아들’은 ‘두 부류의 죄인’이고,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지시는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싫다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아들은,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꿔서
회개와 보속을 한 사람들, 즉 “죄인이었지만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일하러 가겠다고 대답했지만 가지는 않은 아들은, ‘죄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회개한다는 말만 잘하고 실제로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싫다고 대답하고, 끝까지 일하러 가지 않은 세 번째 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겠다고 대답하고, 즉시 일하러 간 네 번째 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부류의 죄인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은
진실한 회개와 위선적인 회개를 비교하고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을 언급하신 것은
그 당시에 죄인이라고 낙인찍혔던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을
하나의 예로 들어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들 전체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말씀의 뜻은,
“먼저 회개한 사람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말씀이 “먼저 죽는다.” 라는
뜻일 수는 없고, 또 연옥은 회개하는 곳이 아니라 보속하는 곳이기 때문에,
연옥에서 천국으로 먼저 들어간다는 뜻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언제’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지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어떻게’ 얻게 되는지에 관한 말씀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자격을 얻는 방법은 ‘회개’와 ‘충실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끝이 좋으면 그만이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회개와 보속은 아주 길고 힘든 과정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렇고, 죽은 다음에도 그렇습니다.)
긴 세월 동안 죄를 짓고 살다가 죽기 직전에 1초 동안 회개한다고 해서
모든 보속을 면제받고 천국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연옥이 필요합니다.
만일에 “인생 전체를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막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그때 회개하면 되겠지.” 라고 지금 생각하고 있다면,
또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면, 마음대로 막 살고 있는
그 생활도 죄가 되지만, 그런 회개 자체가 위선이고 죄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죽을 때’와 ‘회개할 때’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려고 하는 그 생각이 대단히 오만하고 신성모독적인 생각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회개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것입니다.
(실제로 회개와 신앙생활을 계속 미루기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요한이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쳤다는 말씀은, 그의 ‘회개 선포’를 가리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요한을 믿었다는 말씀은,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회개했음을 뜻합니다.
(그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고, 사회적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이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회개를 했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대부분의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았고, 자신들의 삶을 바꾸지 않았음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 전체가 위선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나타나엘처럼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율법학자도 있었는데,
그 수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회심 전에는 바리사이파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다른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는 아니었습니다(필리 3,5-6).>

<다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고,
또 그 판단 자체가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마태 7,1-5).
지금 나에게 중요한 일은,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지 않는 것,
그것도 위선이고, 하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일에 대해서
‘어쩔 수 없었다.’ 라고 변명하는 것, 그것도 위선입니다.
“내가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심한 위선자는 아니다.” 라고
스스로 자기 위안을 하는 것, 그것도 위선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의 주제는 회개이다자신들의 운명을 조상 탓으로 돌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즉 개개인의 운명은 하느님 앞에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이스라엘의 이러한 사회 관념론이 오늘날에도 일반 사회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우리 자신들보다는 사회적 구조에다 그 탓을 돌리려고 한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28당신께 돌아서기만 하면 다시금 살려주시는 분이시다.


복음마태 21,28-32: 맏아들은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오늘 복음의 두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유다인들의 자세를 말한다즉 율법에는 !’하면서도 그리스도께는 아니오!’라고 하는 모습이다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가지 질문즉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28와 마지막에 나오는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라는 말씀은 듣는 사람들에게 경각심 내지는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또한자신들이 어떤 아들과 같은지 판단하게 될 것이다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는지를 잘 분별하고 있다면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두 아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초대에 인간들이 응답하는 두 가지 형태의 태도를 의미한다. ‘!’하고 대답은 했으나 실제로는 회피하는 둘째 아들의 형식적인 존경에 의한 행동과 처음에는 거부하였지만나중에 행동으로 옮긴 맏아들의 갈등과 깊은 사고에 의한 일치 행동이 그것이다맏아들은 무례하긴 했으나 사실상 아버지의 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또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종교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하나는 추상적으로만 신앙을 받아들이는 형식주의적 종교로서 의지적 노력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요구를 실현하는 행동주의적 형태로 많은 수고를 치르는 형태이다즉 처음에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나중에 힘겨운 자기반성과 생각을 바꾸어 다시 받아들인다즉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29).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종교를 만나셨다바리사이파 사람들율법학자들과 같이 신앙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규정을 엄격히 지켰던(마태 23,13-32)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 그들의 과 일치할 때 쉽게 !’하며 응답하며 그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다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이 그들의 뜻하는 길과 일치하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써서 반대하고그들이 예수께 한 것처럼 물리적인 폭력까지 쓰기도 한다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였을 때그 뜻은 더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한편 이들 주변에는 강도들세리들창녀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힘겹게 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또한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복음은 해방의 메시지로서 그들을 아버지의 집에 떳떳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복음은 그들의 인간적 품위를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켰다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자신들이 비교된다는 것 자체를 치명적인 모욕으로 느꼈을 것이다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라고 하신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2).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회개할’ 수 있으나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올바르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뜻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이 때문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자신들을 첫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빛으로는 꼴찌가 될 수 있음(마태 19,30; 20,16 참조)을 표현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범적 태도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8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일치하신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5하도록즉 하느님의 뜻에 완전한 순명의 태도를 보이도록 권고하고 있다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앞에 의심이나 재고의 여지가 없는 철저한 !’의 태도였다즉 '아니오!‘의 부정적인 태도도 아니었고 게으르고 무기력한 !‘의 태도가 아니었다두 아들의 비유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이해관계로 빚어지는 내적 분열이며이기심과 교만에서 야기된다고 한다(1-4절 참조). 사도 바오로는 이 점을 깊이 새겨주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의 모범을 예로 든다(6-8절 참조). 그러나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 높이 올려주셨고’ 온 세상의 주님으로 세워주셨다(9-11절 참조).

하느님의 뜻에 대해하느님의 일에 대해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철저한 선택과 이에 따른 철저한 응답으로 살아간다면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담을 수 있으며그분을 닮아갈 수 있으며그분의 향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하겠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 31)

-한상우신부-

지상의 모든
시간은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남긴 것은
구원의
기쁜소식이다.

예수님을 통해
온 세상이
환해진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이 사랑을
맛보게 된다.

예수님은
맑은 실천이다.

맑은 실천은
믿음을
동반한다.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으로
가득차기에
너무나도 뜨겁다.

다시 일어난
이들의 뜨거운
이야기로
가득찬 나라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이다.

그들을
먼저 알아
보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먼저
예수님께로
달려 온
세리와
창녀들이였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죄인들의
마음을
읽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먼저 알고 계셨다.

맑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길을
사랑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먼저 마음이
가는 것에
맑은 기도가
있다.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주는
가난함이 있다.

예수님과
먼저 만나는
세리와
창녀들이다.

끝내 그들을
되찾으시는
주님의 따뜻한
구원이다.

믿음을 먹고
사랑을 만나는
생명의 기쁜
소식이다.

올바른
믿음이 있고
실천이 있는 곳에
하느님 나라가
아름답게 있다.

복음은 그래서
하느님
사랑을 찾으려고
다시 일어서는
이들의 가장
큰 기쁨이다.

그 복음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영혼의 유연성에 대해 물으십니다.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마태 21,29)


예수님께서 두 아들을 비유로 질문을 던지십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거부했으나 곧 뉘우치고 생각을 바꾸어 명을 수행한 맏아들과, 대답은 넙죽 잘 했지만 따르지 않은 다른 아들 중에 과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것인지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율법 조항의 문자적 의미를 철저히 지킬 뿐 아니라 이를 가르치고 또 그 기준으로 민중을 단죄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 찍힌 세리와 창녀들을 대비시키십니다. 죄인들과 동일 선상에서 비교되는 것부터 탐탁치 않은데, 그들 스스로 답한 비유의 결말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종교 지도자들은 내심 불쾌할 겁니다.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2)


예수님은 진리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은 그들을 지적하십니다. 율법과 관습에 고착되어 하느님의 새로운 선물에 눈을 감은 완고함을 꾸짖으시는 겁니다. 완고한 마음에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오만과 자만심이 깔려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회개와 구원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에제 18,27)


아무리 죄인이라도 회개하여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옛 죄악에 연연하지 않으시겠다고 참 쿨하게 말씀하십니다.

반면 아무리 의인이라도 마음을 바꾸어 불의를 저지르면 죽는다고 하시니 좀 냉정해 보입니다. 그동안 일껏 쌓은 정의의 자취도 선처의 이유가 될 수 없는 듯합니다. 아마도 각별히 사랑하셨던 의인의 전향이 더 아프시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돌아서되 방향을 제대로 잡고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진리와 사랑과 선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잘 나가다가 애먼 곳으로 방향을 틀지 않도록 영혼이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우리가 지녀야 할 영적 유연함의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우리는 모든 역사를 통틀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전향만큼 극적인 방향 전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음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하느님이 나약한 인간으로 오신 이 엄청난 신비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마음 때문입니다. 자비와 용서의 마음, 애간장이 녹을 정도로 절절한 사랑과 자애의 마음,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이지요. 사랑하는 존재와 같아지기를 바라고 그 때문에 모든 것, 신분과 가르침과 율법까지도 내려놓으실 수 있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분의 유연함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히 옳고 바르고 성공적이기는 어렵습니다. 실수도 하고 착오도 겪으며 넘어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니까요. 오늘의 말씀은 '그 자리가 어디이건 거기서 일어나 당신을 향해 돌아서면 된다'고, 이토록 나약한 우리에게 던지시는 자상한 메시지입니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을 알게 하신다."(화답송)


사랑하는 벗님! 당신 자신이 "길"이신 주님은, 우리가 언제 돌아서야 할지, 어디로 방향을 돌려야 할지, 무엇을 솎아내고 내버려야 할지 헷갈리고 고심하고 방황할 때 친히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돌아서려는 마음만 먹는다면, 깨우쳐 주시고 이끄시는 분은 그분이시니까요. 양심과 자연과 말씀과 이웃을 통해 그분은 매순간 우리에게 사인을 보내십니다. 선하고 진실한 채널들이 우리 곁에 늘 열려 있지요.

오늘 진리와 선과 정의는 고수하고, 사랑 아닌 것을 떠날 날 때에는 신속하고 유연하길 주님께 청합시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사랑을 향해 돌아섭시다. 거기서 우리는 주님을 마주할 것입니다. 그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사랑을 발견할 것입니다. 꼭 그리 될 것입니다. 아멘.

 

잘못되었다면 바꾸라!   

-김찬선신부-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나이를 먹어 이제 늙어가면서 다시 말해서 인생의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젊었을 때보다는 더 크게 인생을 돌아보게 되지요.

먼저 과거적으로 나를 돌아봅니다.
나는 과연 잘 살아왔는가?

이렇게 돌아볼 때 옛날에는 또는 젊었을 때는 내가 참 순수했고, 뜨거웠는데
열정도 식고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인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인생도 있고,
젊었을 때는 참 방황을 많이 하고 잘못 살았는데 이제는 그 고달픈
인생의 방랑을 끝내고 평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생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이 늙어 인생을 크게 돌아볼 때 과거보다 더 절실하게 던지는 질문은
미래적인 질문이고, 이런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지금 옳게 그러니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이는 마치 온종일 온 산을 신나게 뒤지고 다니다가 이제는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모를 때와 같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한 생명으로 태어나서 한 생을 살다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삶을 향해 계속해서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죽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까?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입니까?

그러나 과거적으로 돌아보든 미래적으로 돌아보든 이렇게 돌아보는 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과 하고 있는 일이 옳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지금 심고 있는 사과를 계속 심겠다는
그런 확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느님께로 향하는 삶이었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살아온 삶이라면 어디로 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 와 생각하며 당황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나를 바꾸고 삶을 바꾸면 되겠습니다.
잘못되었다면 바꾸라는 것이 오늘 주님의 가르침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고인현 신부 OFM-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죄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고 참된 회개와 믿음이 수반된 행동하는 실천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들려 주시는 복음 말씀을 통해서 참된 실천신앙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7,21 참조) . 바로 실천 신앙, 행동하는 신앙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시금석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게 될 때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되어 주님의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해야 합니다(에페 6,6)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그러한 믿음은 헛된 믿음이 되어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 자기의 실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실천 신앙안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입니다. (야고보 1,23; 2,14; ;2,24 참조).

누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만 하면, 이 가르침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시고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분의 친구가 됩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행복론입니다.(요한 7,17; 13,17; 15,14 참조)

사도 바오로는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로마 2,13 참조).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1 요한 1,6).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보 2,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하느님으로부터 난 사람은 그분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닫고 의로운 일을 실천하게 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요한 2,29; 3,7.10 참조)

하느님의 뜻을 말에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정하도록 합시다.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1537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4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9월 27일 일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마태오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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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28절)면서 아버지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맏아들은 “싫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아버지의 요청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맏아들은 자신의 싫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접어두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포도원으로 가서 일을 하였다.

오늘 비유에서 우선 ‘오늘’이라는 말로 사전에 어떠한 예정이 없었더라도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주목해본다. 맏아들에게는 아버지가 갑자기 포도원 일을 시키니 못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는 아들에게 주어진 일 중에서 가장 우선이 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즉 의미 부여와 가치 부여의 문제 그리고 인생의 우선순위의 문제를 결정하게 만드는 대목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오늘’이라는 말에는 최종적으로 건네시는 하느님의 명령과 사명의 종말론적 시급성이 내포되어 있기에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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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살아갈 때, “예. 제가 아버 지의 뜻을 실천하였습니다.”라고 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장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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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은 머리로 변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 없이 계명을 지키며 변하려는 사람은 마치 “나는 담배를 끊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는 원래 담배를 안 피워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또 피울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원래 자신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란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래 안 피우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어색하게 됩니다. 실수로 피워도 곧 영원히 피우지 않게 될 것을 압니다.

      유다인들이 열에 하나 계명을 지키면, ‘나 하느님 자녀 맞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자녀는 ‘어 이상하다? 앞으론 죄 안 짓겠지!’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걷는 것이 이상했을까요, 물에 빠지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을까요? ‘당연히 걸어야 하는데 왜 빠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두세 발 걸은 것으로 물 위를 걸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죄짓는 게 당연한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고, “하느님 자녀이기에 죄짓는 게 이상한 거지!”라고 반박하는 사람은 곧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물 위를 당연히 걸을 수 있는 존재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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