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5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2020년 9월 25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루가 9,18-22)
Who do you say that I a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짧게 보도하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라는 말이 덧붙여지는 것은, 루카 복음의 지속적인 서술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루카 복음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루카 복음의 의도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와 서로 친교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공간적 흐름이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집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다만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길에 십자가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이 복음서 안에서 늘 논쟁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른바 승리의 그리스도이셔야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음일 수밖에 없는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길이 성직자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혜택과 위로를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성직자들이 누리는 모든 혜택과 위로는 그들의 인간적 능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지라도, 성직자들은 꽤나 풍성한 대접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받고 또 받는 데 익숙해지면, 주고 나누고 함께하는 데 인색해질 수 있다는 것은 제 경험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아무리 영성 훈련을 한들 제 삶이 풍요로우면 이웃의 배고픔을 어찌 알겠습니까. 제 삶에 부족함이 없으면 하루 끼니가 아쉬운 이들의 형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리에 배부른 이만 모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진 이든 그렇지 못한 이든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는 잔치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자리를 마련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십니다. 특정 계층만을 위한 그리스도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별로 고생도 하지 않고 전쟁이나 혁명 등을 겪어보지 않아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세상에 대한 판단력도 부족하다.”
정말로 그럴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이는 인터넷을 하면서 자란 세대라서 정보 습득이 빠릅니다. 따라서 나이 든 세대보다도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 역시 젊은이보다 더 나은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가지고서 현재의 어려움을 현명하게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른은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현재를 바라보지만, 젊은이는 미래를 지향하면서 현재를 살아간다.’
서로 간의 이렇게 좋은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즉, 어른에게는 지혜를 얻고, 젊은이에게는 실행하는 추진력을 얻어서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길거리에 떠도는 소문들을 추려 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과거에만 매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지금 함께 계시는 살아있는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있었던 한 분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마침내 베드로에게 빛이 비치어, 그분께서 바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므로 어떤 예언자보다 큰 분임을 알아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육화하신 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것이므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이렇게 모든 시간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향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한순간에 머무시는 주님이 아니라, 또 미래에만 희망을 둘 수 있는 주님이 아니라, 모든 시간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독서에 나와 있듯이,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코헬 3,11 참조).


2020년 1월 12일(주일). 갑곶성지에서 어느 성당의 구반장님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했습니다. 새해의 기쁨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날, 올해에도 강의가 많겠구나 싶었습니다. 계속해서 강의가 끊이지 않았으며, 곧 다가올 사순시기에도 강의가 너무 많았고 심지어 연말인 12월의 대림 특강까지 잡혀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월 12일 이후 강의를 할 수 없었습니다(참, 5월 28일에 한 번 하기는 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며칠 이러다 말겠지 싶었습니다. 흔한 감기와 똑같거나 더 약하다고 방송에서는 말했고, 날이 조금 따뜻해지면 사라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코로나 확진자는 멈추지 않았고, 사람들은 마스크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비대면의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강의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사도 못할 지경이었는데 강의를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강의로 이제까지 바쁘게 살아오다가 마치 실업자가 된 기분으로 강의가 없는 한가한 생활을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다른 상황을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변화의 길로 나아갈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 현존 연습
-전삼용신부-
진화론에서는 모든 것들이 ‘저절로’ 진화, 발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태어나서 부모 없이도 저절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진화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화할수록 부모에게 더 의존합니다. 어떤 인간도 부모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현존 안에서 두 발로 걷고 말도 하고 사회생활도 배웁니다. 부모의 ‘부재’(不在)는 아이들을 다시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반대로 부모의 ‘현존’(現存)은 아이들을 부모의 수준이 되게 만듭니다. 앞에서 끌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혼자서는 진화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혼자 기도하시지만 실제로는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현존 연습’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의 ‘법’(法)이 함께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사람이 지닌 뜻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이 됩니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과 친구가 된다면 그 친구도 다이어트를 할 확률이 45%나 된다고 합니다. 저도 살을 빼니까 주위에 살을 빼는 분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함께 머물면 이렇듯 변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세례자 요한처럼 될 수도 있고, 엘리야처럼 될 수도 있으며, 예언자 가운데 한 분처럼 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녀까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함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온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세상 누구보다 힘이 듭니다. 하느님을 옆에 두고 사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니 하는 일뿐만 아니라, 생각과 욕구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그 마음마저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물으시고 곧바로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누구도 베드로만큼 빨리 하느님의 자녀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래서 교회의 반석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의 현존 안에서 아기가 인간으로 자라나듯,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삽니까? 얼마나 기도합니까? 자주 주님의 현존을 잊고 내 뜻대로 살아서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기도하며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개신교 책 중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 있습니다. 1605년 프랑스 로렌느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에 있는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의 평수사로 살았던 로렌스(Lawrence) 수사의 영성을 담은 책입니다. 그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상처를 입고 평생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리고 50세라는 늦은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가 주방 허드렛일이나 신발을 수선하는 일을 하면서 매우 빠른 영성의 진보를 보입니다. 장상의 명으로 이것을 기록한 것들이 지금 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느낀 것은 나무를 보면서였습니다. 잎이 떨어지고 다시 나고 하는 이 순환 속에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시작한 수도 생활 안에서 오랜 기간 쌓여온 세속의 때는 좀처럼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삶이 그리워졌습니다. 주방 허드렛일이 의미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마치 나무를 보고 주님을 느꼈듯이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의미 없게 느껴지던 일들이 참으로 달고 기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거창하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하나 줍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의 변화에 많은 형제가 감명을 받았고 그 방법을 묻자 “매 순간 호흡할 때마다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하는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영성과 기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저에게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저는 현존을 연습하기로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일하는 시간이 기도 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성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처럼 깊은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소유합니다. 저는 세상에 하느님과 저밖에 없는 것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자상한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자녀로 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 훈련이 쉽고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훈련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 훈련을 계속해나갔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하는 이 훈련을 제 본업으로 생각하고, 마치 하루 전체가 정해진 기도 시간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오로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 살아오다 보니 때로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이 몰려옵니다. 가끔 제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을 잊기라도 하면 하느님은 즉시 저의 내면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고백 드립니다. ‘하느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기쁘신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러면 곧 사랑의 하느님은 저의 고백에 흐뭇해하시며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편히 쉬며 거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아주 작은 고난도 주님을 위해 받을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저는 앞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할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며 나머지 것은 아무것에도 정신을 주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소명과 의무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출처: 『로렌스 형제의 생애; 하나님의 임재 연습』, 유튜브 성결출판사]
현존 자체가 법입니다. 법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진화시킵니다. 그 현존을 연습하고 체험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라고 말합니다. 현존 연습을 하며 모든 시간이 기도와 찬미와 사랑이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누구를 두고 살아갑니까? 자아라는 뱀일 수도 있고, 사랑의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내 곁에 누구를 두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조재형신부-
신문사 홈페이지에 매일 오늘의 묵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홈 페이지에 접속하려는데 인터넷이 굳게 닫혀서 열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컴퓨터를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성당의 사제관에서 인터넷을 열고 오늘의 묵상을 올렸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컴퓨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날 강풍으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인터넷 선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선을 다시 복구하였고, 인터넷은 다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추적, 검사, 치료입니다. 추적하지 못하면 검사할 수 없고, 검사하지 못하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민들의 협조가 중요합니다. 코로나19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던 한국에서 다시금 확진자가 늘어난 것은 종교적인 이유로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의 방역체계를 믿지 못하고,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 행위는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습니다. 바이러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대립은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습니다. 바이러스는 정당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고, 정부의 방역지침을 지키는 것이 최선의 방업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잠시 내려 우리는 누구인지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안식일’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해서, 병들어서, 직업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던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지키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소중하다고 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목회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실 것 같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바이러스가 전파되고, 이웃의 생명에 위험을 준다면 그런 예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웃’입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강도당한 사람을 뒤로하고 예배하러간 제사장입니까? 율법을 이유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레위인입니까? 이방인이었지만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하고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진료를 거부하는 의료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실 것 같습니다. ‘누가 아픈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꽃길만 걸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을 움켜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타인에게 짊어지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꽃길만 찾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어떤 때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 수시로 하느님께 여쭈어봐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어제 허무에 대한 소중한 가르침에 이어, 오늘 코헬렛 저자는 우리에게 그 유명한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말씀을 주제로 가르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어찌 그리 마음에 절절히 와 닿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코헬렛 3장 1~5절)
때와 관련된 코헬렛의 말씀을 곰곰히 묵상해보니, 정말이지 천번 만번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일천한 경험과 보잘 것 없는 지난 삶을 통해서도 때의 중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런 때가 있더군요. 때로 인간적으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도무지 방법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였습니다. 그때는 그저 마음 크게 먹고, 인내하며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철저하게도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 같은 경우도 평생에 걸쳐서 하느님께서 침묵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순간은 바로 인간의 때입니다. 인간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입니다.
이상하게 움직일 때 마다 좌충우돌, 여기 상처 저기 상처, 상처 투성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행동거지를 조신하게, 입도 굳게 다물고, 조용히 침묵 속에 자숙하고 성찰할 때입니다.
순풍에 돛단듯이 만사 형통, 승승장구할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 마다 잘 되고, 탄탄대로를 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더 겸손해지고, 더 예의 바르게 처신 할 때입니다.
곳간마다 추수한 곡식이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쌓일 때, 갑작스레 은행 잔고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것들을 주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눌 때입니다.
적당한 때를 파악하지 못해 패가망신하고 동네방네 창피스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해먹을만큼 해먹었기에, 이제 연세도 연세인만큼, 모든 것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물러설 때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기 남아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체 얼마나 더 추한 모습을 보이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마다 늘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겸손되이 여쭈어야겠습니다. ‘지금은 제게 어떤 때입니까? 오늘 이 순간은 제가 어떤 일을 할 때입니까?’
코헬렛이 강조하는 ‘때’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말로 ‘카이로스’, 곧 인간이 행동해야 하는 올바른 때(제 때)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아무 때나 의미나 가치가 있고, 아무 때나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올바른 때의 선택을 할 때만 의미와 가치가 있고, 성공에로 이끕니다.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어떤 때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 수시로 하느님께 여쭈어봐야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무엇인가?
-반영억신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합당한 답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정하신 분"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은‘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고, 저를 위해 죽으셨고, 저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우리는‘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아빌라의성녀 데레사는“나는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 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과 성령없이 예수님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마태6,17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을 고백하고 그분이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하기 위해 항상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0-22).”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저희는 스승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엄중하게’ 분부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그리스도는 ‘정치적 해방자’였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다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 지도자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고,
또 로마제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려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올바르게 알고 믿게 된 것은 수난, 죽음, 부활 후의 일입니다.
“사도들과 몇몇 신자들은 수난 전부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과
부활 후에 믿은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혹시 차별이 아닌가?”
차별은 아니고, 수난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른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 특별히 선택되고 뽑힌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믿음도 완전하지는 않았고,
그들도 예수님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완전하게 믿었습니다.
수난 전에는 머리로만 믿었고,
부활 후에 비로소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만 믿는 것은 그냥 ‘아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어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아는 것’은 지식으로만 그치고 ‘삶의 변화’가 없지만,
‘믿는 것’은 그 믿음 때문에 ‘온 삶’이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신 것은, 아직 머리로만 믿는(아는)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믿어야 남을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 없이 그저 ‘아는 것’만으로는
남을 믿게 만들지 못하고, 역효과만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에도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마태 17,9; 마르 9,9).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즉 당신이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셨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본 것만으로는’(‘아는 것’만으로는) 증언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온전히 믿게 된 다음에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입장에서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았을 때에도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지는 못했고,
예수님의 신성을 ‘아는 것’으로 그쳤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 설교는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증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앞의 신앙고백이, 머리로만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또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진술이었다면, 오순절 날의 설교는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고백(증언)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은 이제 사도들이 온 세상에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하고 증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음을 확인해 주신 일이기도 하고,
그 선포와 증언을 도와주기 위해서 ‘힘’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은,
당신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 또는 과정에 관한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고,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죽음을 당신이 직접 짊어지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일이었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에 대해서,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냥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로 직행할 수는 없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은 개인의 십자가에 대한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 여정에서 만나는 온갖 십자가를 건너뛰고
그냥 부활과 생명으로(또는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니 그렇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 좋은 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한 번에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옮겨 놓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긴 세월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
우리는 그 방랑의 이유와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서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 생략할 수 없습니다.
그 고난들은 바로 “믿음의 순수성을 위한 단련”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7).
신앙생활은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한 생활입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의미가 없고,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치가 없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9,18-22: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이었고, 예루살렘에는 십자가의 길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예수님은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를 지셔야 하며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셔야 하는 중요한 때였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올바로 보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19절) 예수님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 그 소문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틀린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즉시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혼란을 겪지 않도록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대하신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임금으로 혹은 예언자로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20절) 라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여기서 제자들은 그 기적에 놀랐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도록 칭송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길로써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에 그리스도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영광을 입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해야 할 내용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수난과 육신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다. 제자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루카 9, 22)
-한상우신부-
고난이
시작된 곳에
구원이 있다.
예수는 고난을
온 삶으로
이겨내셨다.
죽이는
고난이 아니라
살리는 고난이다.
고난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고난은
아프게도
필수사항이다.
고난을 통해
배우게되는
삶의 겸손된
여정이다.
고난이 없는
삶은
그 어디에도
없다.
고난이 우리를
아름답게 머리를
숙이게한다.
고난을 통해
사람이
되어간다.
고난이
실은 은총이다.
배척과 고난이
영혼을
되찾아 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고난을 주셨다.
고난속에서도
가을하늘을
맞이한다.
하느님께서는
고난을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니라
고난을 이겨낼
은총을 주시는
분이시다.
고난이
믿음을 이룬다.
고난을 통해
빚어진
빛나는
열매이다.
고난을
비껴가시는 분이
아닌 고난을
믿음으로
통과하시는
분이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때"에 대해 일러 줍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군중은 그분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옛 예언자가 되살아난 것으로 여기는데, 예수님은 바로 당신 곁에서 생활하고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과연 당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듣고 싶으신 듯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베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고백합니다. 루카 복음서와 달리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대답이 베드로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라고 부연하지요.(마태 16,7 참조) 지금은 베드로가 주님의 영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고백하는 때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루카 9,21)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침묵해야 할 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스승이 명하시니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루카 9,22)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지요. 사람의 아들이 맞이해야 할 "때"입니다. 고난, 배척, 죽임, 부활까지 단 몇 단어로 표현이 되고는 있지만 그 여정을 입에 올리는 것도, 듣는 것도 사실 두렵습니다. 고통의 길임을 뻔히 알고 향하는 여정은 모르고 가는 것 이상으로 어려우니까요.
제1독서에서 코헬렛 저자는 "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하느님의 계획 아래 세상은 저마다의 "때"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코헬 3,11)는 말씀이 참 멋지게 들립니다.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의 때에 자신만의 충만함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창조 계획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피조물은 그 본성 안에 하느님의 때와 스파크를 일으키며 피어날 자기만의 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 3,11)
그토록 정교하고 섬세하게 정성을 들인 하느님의 계획이 온 세상 모든 역사의 날줄 씨줄 안에서 면면히 흐르지만, 우리 인간은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저 당장 눈 앞에 닥친 일들을 감당하면서 한발짝씩 내디딜 뿐이지요.
그런데 이 무지가 반드시 저주나 불운만은 아닐 듯합니다. 각자의 "때"를 깨닫지 못하면서 묵묵히 나아가는 우리 인간은 어쩌면 몰라서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르니 희망하고, 모르니 기대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오늘 복음 속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미처 다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스승의 때가 오면 그 영광을 어떻게 받아 누릴지, 누가 가장 높은지가 내내 그들의 관심사인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침묵을 명하시는 것은 지당합니다.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운명과 그들의 욕망이 아직 화해하지 못한 지금은 코헬렛의 단언처럼 "침묵할 때"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말할 때"(코헬 3,7)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때가 완성된 후 제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변화될 것이니까요 제자들은 자기들이 들은 바와 본 바, 체험한 바를 증언하고 선포하게 것입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때가 과연 "말할 때"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코헬 3,11)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심어 주신 "시간 의식"은 단순히 숫자로서의 시간 감각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시간 의식" 안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아버지 뜻에 대한 순응, 결국 사랑으로 이끌리는 순리에 대한 신뢰, 마침내 이루어질 주님과 우리의 영원한 일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지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의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무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 나의 때는 과연 언제인지, 찬란히 아름답게 빛날 "제때"를 속절없이 흘려보내고 만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올 것인지...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우리 여정이 "반드시 고난과 배척과 죽임을 당하실" 예수님의 여정과 별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두렵지만 진실입니다. 우리의 때는 이런 주님의 때와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을 겁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기시고 평화의 존재로 우리에게 되돌아 오셨으니 우리는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이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견디게 합니다. 이 희망 앞에서는 무지조차도 축복입니다.
그러니 언제일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이루실 것이니까요. 사랑 안에서는 "때"를 알려고 날을 세울 필요가 없답니다. 주님의 "때"에 나의 "때"를 결합해 그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행하며 순례의 여정을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모르는 길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꿋꿋이 나아갑시다. 그 때를 기다리면서...

시의 적절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1438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길 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루가 9,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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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자체가 법입니다. 법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진화시킵니다. 그 현존을 연습하고 체험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라고 말합니다. 현존 연습을 하며 모든 시간이 기도와 찬미와 사랑이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누구를 두고 살아갑니까? 자아라는 뱀일 수도 있고, 사랑의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내 곁에 누구를 두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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