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Margaret K 2020. 9. 7. 05:44

2020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 신심이 계속되면서 동방 교회에서 먼저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7세기 무렵부터 이 축일을 지내 오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세워진 ‘마리아 성당’의 봉헌일(9월 8일)을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로 정한 것이다.

☆☆☆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 1,1-16.18-23)

 

 Behold, 
the virgin shall be with child and bear a son,
and they shall name him E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대개 족보는 그 집안의 근본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집안을 드러내는 듯하나, 동시에 이스라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용인되기 어려운 다섯 여인(타마르,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을 등장시킴으로써 꽤 복잡하고 심오한 의미를 담아냅니다.

마태오 복음을 가리켜 ‘교회의 복음’이라고들 합니다. ‘교회’라는 용어를 유일하게 사용하는 복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합체’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강조하기 때문이지요.

교회는 특정 기준에 부합하는 이들만의 고결한 모임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지언정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이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세상 기준으로는 어둡고 불결하다고 여긴 여인들이 족보에 등장한 것이지요. 더욱이 예수님마저 ‘처녀’의 몸을 통하여 탄생하셨다고 기술하고 있는 대목은 보란 듯 우리의 관습과 전통, 그리고 상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혼인도 하지 않은 딸이 나가서 아이를 배어 들어오는 상황을 맞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찢어 놓고 갈라 놓아 아픔마저 느끼지 못하게 하는 처절한 호소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아무리 법과 질서를 지키고 윤리적으로 흠이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초대와 호소는 얼마간 제 삶을 흔들어 놓고 뒤집어 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혼란 속에서 당신의 믿음을 지켜 내신 분이십니다. 그분에 대한 기억과 존경은 삶의 익숙함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신앙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속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늘 새로운 도전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 심리학자 마크 쉔은 말합니다.

‘편안함에 길들여지면 불편함에 과민해진다.’

이 말에 큰 공감이 되었습니다. 갑곶성지에 처음 왔을 때인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는 할 일이 너무 많고 불편한 것도 많았습니다. 제가 직접 하지 않으면 대신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꾸역꾸역 일을 혼자서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6년 1월에 다시 갑곶성지에 왔습니다. 그동안 제 전임신부들이 많은 것을 해 놓았더군요. 직원도 많아서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 안에서 저도 편안함에 길들여졌었나 봅니다. 영성센터를 전담했던 신부님께서 올해 본당으로 발령받아 간 뒤에, 성지뿐 아니라 영성센터까지 담당하다 보니, 그리고 봉안당까지 운영하다 보니 힘들다는 생각만 가득해집니다. 분명히 예전보다 훨씬 더 편안한데 말입니다.

작은 흔들림도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편안함에 길들여 있을 때였습니다. 편안함에 길들여 있을 때는 감사한 지도 모르고, 모든 것을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불편함에 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 사람은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내면서 성모님의 삶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참으로 행복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참으로 복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볼 때는 절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불편함만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으면서부터 불편함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인 요셉으로부터 배척을 당할 뻔하기도 했고, 결혼 전에 아기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인데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산후조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에집트로 피난까지 가게 되십니다.

도대체 성모님의 삶 안에서 편안함이 있었을까요? 그런데도 불평불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는 마음으로 불편함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믿음을 키워나가십니다.

우리 삶 안에 항상 편안함만 있을 수 없습니다. 분명히 불편함이 있게 됩니다. 그때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범을 따라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불편함 안에서 커다란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큰 일이 우리를 죽이는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실망하는게 무서워서 거절하지 못한 수천 개의 작은 의무가 우리를 죽게 한다(알랭 드 보통).


이미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이미 가진 자들은
아프지 않다

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미 뜨거운 것들은
말이 없다

‘이미’라는 제목의 최영미 시인의 시입니다. ‘이미’라는 단어로 표현한 시인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무심코 썼던 단어 하나에도 여러 가지 깊은 뜻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 각자는 어떨까요? ‘이미’ 많은 뜻을 간직하며 사는 우리입니다.


인간 본성의 신분 상승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말하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전합니다. 보통은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심성 상 자녀는 남자가 낳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태어나게 하는 주체입니다. 하지만 유독 그리스도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십니다. 마리아가 낳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 마리아께서 다윗의 후손임을 알 수는 없으나 아브라함의 족보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 사가는 한 이스라엘 여인을 구원의 족보에 끼워놓습니다.

      족보는 구원의 계보입니다. 그 사람에게서가 아니면 다윗의 후손이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가 아니면 이사악이 태어날 수 없고, 이사악에서가 아니면 야곱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마태오는 요셉이 아닌 마리아에게서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수 없음을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족보에 끼일 수 있는 남자가 아님에도, 또 다윗의 후손임을 알 수가 없는데도 어떻게 그 족보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 성모님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는지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 성모님만이 아닌 다른 네 여인이 더 들어있습니다. 그들이 성모 마리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타마르’입니다. 타마르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결혼한 유다의 두 아들이 죽자 유다는 그녀를 쫓아내다시피 합니다. 그녀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집안의 씨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창녀의 모습을 하고 지나가던 시아버지인 유다의 씨를 받습니다. 그녀가 위대한 이유는 세상의 평가가 아닌 누구의 씨를 받느냐가 더 중요함을 알았다는 데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남편 요셉으로부터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온 사람으로 취급된 적이 있습니다.

      또 ‘라합’이라는 여인도 나옵니다. 라합은 예리코의 창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리고를 무너뜨리고 점령하였습니다. 라합은 비록 이스라엘 적국의 여자였지만 이스라엘의 씨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배신하는 일이었지만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구원되는 길이 바로 그 길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라합과 그의 가족이 이스라엘에 의해 구원을 받습니다. 이 모습도 성모 마리아의 상징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이 세상 사람들의 씨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하늘의 씨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씨로 태어난 분이 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세상과 싸워 이기러 오시는 분의 씨를 받았기 때문에 성모님은 이 세상에서 영혼이 칼이 찔리는 아픔을 겪으며 사셔야 했습니다.

 

      그다음엔 ‘룻’이 있습니다. 룻은 남편을 여의고 이스라엘의 씨를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의 권고대로 라합의 아들인 보하즈의 밭에서 일하며 보하즈의 씨를 받습니다. 보하즈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룻을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룻은 마치 예수님이 계시지 않던 무덤에서 울고만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연상시킵니다. 룻은 이방인이었지만 구원 백성의 씨를 받기 위해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인이었습니다. 밭은 소명을 의미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 구원 소명에 끝까지 항구함으로써 하느님에게서 오는 아드님의 씨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다 보면 그분의 씨가 잉태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그녀도 역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우리야라는 남편이 있었지만, 다윗에게서 씨를 받았습니다. 다윗에게는 이것이 큰 죄가 되는 것이었지만, 어쨌건 그 덕분으로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요셉이라는 남편이 있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씨를 받아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분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부산에 가고 싶어 하십니다. 가족이 보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부산에 내려가셔도 가족은 잘 보지 않으십니다. 사실 호적만 있는 가족이지 친어머니는 어디 계신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연세가 드시니까 당신의 진정한 핏줄을 찾고 싶으신 것입니다. 분명 연세로는 돌아가셨을 것이 당연하지만, 그냥 어머니가 사셨던 부산이 당신의 어머니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족보는 어쩌면 마지막 때에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분의 핏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그 방법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씨를 받아야만 함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씨가 바로 주님의 뜻임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족보를 변화시키고 신분을 변화시켰는지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외도하거나 바람을 피우라는 말이 아니라 구원의 씨가 어디서 오는지 알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씨란 ‘하느님의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들의 뜻이나, 이 세상에서 그 사람들에게 무언가 바라는 사람들의 뜻을 들어준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 백성의 족보에 들 수가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뜻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족보를 바꾸심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씨를 받는 여인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이 신분 상승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 분이셨습니다.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더 높은 신분을 가진 이의 씨를 받아야 하는데, 그 씨란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종이 되는 길만이 합당하지 않은 이방 여인들이 하느님 자녀의 족보에 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프란치스코 성인은 두 번에 걸쳐 가슴이 뛴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한번은 아시시의 벌판에서 나환자를 만났을 때입니다가진 것을 나누어주고나환자를 보듬어 주었다고 합니다술을 마시고거리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느낄 수 없었는데 나환자를 만나면서 가슴이 뛰었다고 합니다두 번째는 허물어져가는 성당에서 십자가를 보았을 때입니다성당의 이름이 다미아노 성당이었기에 다미아노의 십자가라고 부릅니다프란치스코는 쓰러져가는 성당을 일으켜 세우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얼마나 강한 느낌을 받았는지 모든 것을 팔아서 성당의 신부님께 드렸다고 합니다그러나 신부님은 프란치스코의 돈은 되돌려주고 성당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예수님께서는 성서를 설명해 주셨고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식사하셨습니다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함께 있었을 때 가슴이 뛰었음을 깨달았습니다무덤으로 예수님을 찾아갔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동산지기인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가슴이 뛰었습니다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성령을 주셨습니다제자들은 가슴이 뛰었습니다이제 더 이상 두려움도 걱정도 없어졌습니다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눈을 뜨게 된 소경듣게 된 귀머거리깨끗해진 나병환자걷게 된 중풍병자도 가슴이 뛰었을 겁니다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용서 받았습니다역시 가슴이 뛰었을 겁니다.

 

산보 가는 길에 차에서 누가 저를 불렀습니다길을 물어보는 줄 알았습니다그런데 제게 사제냐고 물어보았습니다제가 사제복을 입었기 때문입니다아내가 임신했는데 축복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기쁜 마음으로 마리아와 안드레아 부부 그리고 태어날 아기를 축복해 주었습니다임신한 아내를 위해 기도를 청하는 남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묵주도 축성해 주었습니다. ‘사제입니까?’라는 질문이 저의 가슴을 뛰게 하였습니다신문을 제작하면서 사장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30년 가까이 사제로 살면서 어쩌면 사제라는 직분에 너무 익숙해서 소중함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도 가슴이 벅찰 것 같습니다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봉헌하는 미사도 가슴이 벅찰 것입니다오를 하루 가슴 뛰었던 순간을 기억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탄생 축일입니다예루살렘 성전에는 성 안나 성당이 있습니다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의 부모님입니다성당은 공명이 좋아서 성가를 부르면 아름답게 들렸습니다순례를 가면 그곳에서 성가를 부르곤 했습니다성당에는 어린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구세주의 어머니교회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마리아의 탄생은 부모였던 요아킴과 안나에게는 가슴 뛰는 기쁨이었습니다세상의 모든 탄생은 그렇게 소중하고아름다운 사건입니다하느님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이들을 부르셨고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세상의 모든 탄생은 임마누엘입니다세상의 모든 탄생에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탄생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기도인 성모찬송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우리의 생명기쁨희망이시여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귀양살이 끝날 때에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을 뵙게 하소서너그러우시고자애로우시며 오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천주의 성모님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기도합시다하느님외아드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을 마련해 주셨나이다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이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오니 저희가 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아멘.”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당신의 통로이자 사다리로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모님의 탄생이나 어린 시절, 그리고 부모님에 대해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 전승을 통해서 개략적인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실망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성모님의 고향인 나자렛은 낙후된 지역 갈릴래아에서도 아주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전체 인구를 다 합해봐야 4백명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해봤기에, 당시 유다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 나자렛의 마리아 역시 얼마나 팍팍한 삶을 살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즉시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산골 소녀 마리아를 총애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당신의 통로이자 사다리로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마카오 출신 저희 살레시오 수녀회 수녀님 가운데 고하퐁 수녀님이라고, 유명한 성경 학자 수녀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쓰신 책 제목이 참 특별합니다. 

 

책 제목이 이렇습니다.‘하느님 참 묘하셔라’ 수녀님께서는 당신의 글을 통해 우리 인간의 통상적인 사고방식이나 보편적인 논리를 늘 뛰어넘으시는 묘하신 하느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 나름 잘 나간다고 자부하던 왕실 가문이나 고관대작들, 대학자들이나 대사제들과 친하게 지내신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적 약자들, 이방인들, 가난한 사람들, 여인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셨음을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하느님 참 묘하십니다. 기를 쓰고 위를 향해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은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트리십니다. 한사코 아래로 내려가려는 겸손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선택하시고 총애하시며 위로위로 높이 끌어올리십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복음서 안에서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성모님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다 합쳐봐야 몇장 안됩니다. 구세주 예수님을 낳으시고 양육하신 어머니의 행적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주로 예수님의 행적과 제자 공동체의 성장에 대해 촛점을 맞추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만큼 나자렛의 마리아는 조용하고 겸손하게 사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사업이 아무런 차질없이 예정대로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언제나 구세사의 무대 뒤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조력했던 결과가 복음서 상 지극히 부족한 마리아 관련 스토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척박한 산골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마리아께서 평생에 걸친 순명과 기도, 각고의 노력 끝에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도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하느님의 큰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자기홍보(Pr)시대

-반영억신부-


현대를 자기피알 시대라고 합니다. 자기를 알려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이력을 과대 포장하고 심지어 거짓으로 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지는 법이고 마침내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으로 피알시대의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째든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바라며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모습에 견주어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접한 요셉은 그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마태1,19). 그는 법대로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입니다. 마리아를 위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친절하며 그의 성숙한 인간성이 하느님의 계명과 잘 융화되어 빛을 발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 인간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에 걸맞게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조사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으니 요셉에게는 얼마나 큰 고뇌와 의혹, 심사숙고, 마음의 동요, 당황스러운 모습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드러내어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도 바보이지만 그는 역시 의로운 사람으로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는 온유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천사의 말을 듣고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버지의 특권과 아이를 낳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마태1,24). 마리아는 아기를 낳고 요셉은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마태1,21).

요셉의 마음고생 못지않게 마리아의 마음도 고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까닭입니다.(루가1,45). 마침내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았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 안에 항상 함께하시며 한 번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기에 행복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즉 육화,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성모님을 거치지 않고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모님은 신앙의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입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의 은혜를 못 누릴 따름입니다(차동엽). 그러므로 성모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마리아처럼 굳은 믿음과 온유함 속에 꿋꿋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주님 안에 머물면 주님께서 필요할 때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묵묵히 위엄과 사랑과 믿음 안에서 피할 것 피하고, 알릴 것을 알리는 지혜를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리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시간표 ♣
송영진신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29-30).”
이 말에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 가운데에는 ‘우발적으로’, 또는 ‘즉흥적으로’
하시는 일은 하나도 없고, 또 하느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도
전혀 없다. 모든 일은 하느님의 의지와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라는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어떤 일이 하느님께서 예상하지 못한 채로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생긴다면, 그래서 당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면, 그러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이고,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하느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하느님께서 미리 만들어 놓으신 ‘프로그램’대로
진행되고, 인간은 로봇처럼 그 프로그램을 수행할 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죄를 짓는 일이 없겠지만,
인간이 실천하는 선은 선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신앙생활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거부하면 차질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인간의 불순종이나 죄 때문에, 또는 마귀의 방해 때문에 하느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도,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즉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힘의 작용으로 결국에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모를 때가 많지만,
그래도 어떻든 우리는 그렇게 되는 것을 ‘하느님의 섭리’ 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인용한 바오로 사도의 말에서 ‘미리 정하신 이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연히, 또는 갑자기 나타난
인물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하시고 뽑으신 인물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하셨고,
때가 되었을 때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셨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은
구원 역사의 주연급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떤 계획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떤 일에 쓰시려고 이 세상에 보내셨고,
당신이 정하신 때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또 아무 쓸모없이, 우연히 태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입니다.
또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어떤 이는 주춧돌의 역할을 하고, 어떤 이는 작은 벽돌의 역할을 하는데,
주춧돌만 중요하고 작은 벽돌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똑같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인데, 단순히 그 이유만 있었다면
중간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생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예수님을 연결하는 모든 이름을
다 기록하고, 또 특별한 사연이 있는 여자들의 이름까지 기록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또 하느님의 구원 역사와 인류의 역사에서
무시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각 개인은 ‘한처음’과 ‘종말’을 연결하는 긴 역사의 연결 고리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이들’을 ‘미리 정하신 때’에 세상에 보내시거나
부르시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시간표’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시간표를 보았거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를 모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3,32).
그런데 모른다는 것은 그것이 없다거나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시간표는 천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마지막 종말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때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때의 일을 보면,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난 일, 또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난 일, 세례자 요한이 태어난 일, 예수님이 태어난 일 등이 모두
하느님의 시간표가 정말로 있고,
모든 일이 그 시간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면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언제 그 일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지만, 언제 이루어지든지 간에,
하느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금’ 준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난 일은(루카 1,26-27), 마리아 입장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갑작스러운 일이었는데,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과 인사말 때문에 몹시 놀랐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응답하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잘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평소에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리아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1,1-16,18-23: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이다교회가 성모님의 성탄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구원의 역사적 측면에서 마리아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마리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즉 창세기의 원복음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뿐 아니라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히 하려는 그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시작이다마태오는 복음을 예수님의 족보(1,1-7)로 시작한다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첫째, ‘다윗의 후손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둘째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로서의 합법성셋째구원 역사의 정점이며 종합이신 예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태오의 이 족보는 우선 우리나라의 족보가 장자 중심으로 되어있는 것과도 다르지만당시의 유다이즘에서도 여인들의 명단이 열거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그들은 다말라합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바쎄바이다또 하나는 요셉과 관계없이 오직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탄생이다.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가 아니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마태 1,16)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네 여인은 죄인들이며예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며둘째로 그들은 이방인들이다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의미이다셋째로는 이 여인들이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넷째로 이 여인들의 결혼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결혼이 아니었다마리아도 요셉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이건죄인이건또 평범하지 못한 결혼을 한 사람이건 상관없이인간적인 결함이나 부족하지만하느님의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마리아 역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 구원계획의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인간이 지닌 어떤 결함에도 상관없이 당신의 주도로서 이루어진다즉 선택된 마리아는 인간적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하느님 섭리의 표징이 되고 있다.


둘째예수의 족보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요셉과 예수 사이에 모종의 단절이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가 출생하였다.”(마태 1,16). 여기서 예수의 출생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예수의 진정한 아버지가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이 족보는 예수를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메시아로 제시하면서도,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역할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이렇게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보증하는 요셉의 기능도 등한시하고 있지 않지만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더욱 중심이 되는 것은 마리아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면서 마리아에게서 동정으로 잉태되고 태어난 사실을 명확히 한다요셉은 예수님의 탄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이 점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에 그가 당황스러워하고 파혼까지도 생각하며 고민했던 모든 상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그 탄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무엇보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임마누엘로서(이사 7,14),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아라는 사실과 더불어 마리아는 일찍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지내는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다즉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이다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우리는 이제 역시 작은 마리아로서 그리스도를 낳아 주어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이러한 삶을 우리가 잘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 20)

-한상우신부-

이 가을
태풍속에서도
구절초가
피어난다.

모든 탄생의
현주소는
하느님이시다.

탄생은 탄생
그 자체로
뜨겁고
행복하다.

아프고 힘겹지만
생명의 시작은
고마운 탄생으로
시작된다.

하느님과 사람을
다시 묵상케하는
시간이다.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안에
마리아의 탄생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태어난다.

구원의
아름다운
첫걸음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는
탄생의 첫걸음이다.

모든 탄생은
하느님을
드러낸다.

보호자이신
하느님께서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신다.

탄생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들에게는
신앙이며
섭리가 된다.

마리아의
탄생은
마침내 시작되는
희망의 기쁨이다.

희망의 기쁨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교회는 마리아의 탄생을 경축하며, 성경이 말하지 않는 마리아 탄생 일화 대신 예수님 잉태에 얽힌 후일담을 전합니다. 미사의 말씀은 기나긴 다윗 가문 족보 안에서 이어진 구원 역사가 예수님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어떻게 열매를 맺었는지 들려 주지요.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먼저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가문에서 탄생하실 구세주에 대해 미카 예언서의 한 구절을 들려 줍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예수님 족보의 요약인 셈입니다.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보잘것없는" 신분의 여인들을 통해 맥이 이어져 온 역사임이 오늘 마태복음 첫머리의 족보에서 드러나니까요.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

다윗 가문의 족보에 등장하는 다섯 여인은 하나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이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양갓집 규수들의 조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 조상인 그녀들의 근본과 이력, 신원에 대해 포장하거나 덧칠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족보는 이스라엘 구원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 역사를 담고 있는 자취가 되기도 합니다. 세대를 거쳐 우리를 품어 온 태, 우리와 연결된 핏줄 역시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고, 그 덕에 지금 여기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마태 1,19)

약혼녀의 임신은 혼인을 기다리는 신랑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입니다. 배반한 여성에게 어떤 조처를 취해도 율법과 관습이 눈감아 주고 편들어 줄 처지일 겁니다. 하지만 의로운 사람 요셉은 마리아를 위해 물러나 주기로 합니다. 사랑과 겸손 위에 자라난 그의 "의로움"은 결국 순종의 열매로 완성될 것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복음사가는 예언서의 한 대목을 들어(이사 7,14 참조) 요셉의 결정을 숨죽여 바라보는 우리까지도 이해시키고자 합니다. 인간적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신비를 믿음으로 껴안아야 한다고 요셉과 함께 우리에게도 말을 건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 대목에서 사건의 서술 안에만 등장하는 마리아나, 그 사건 앞에서 고뇌하는 요셉은 족보 속에 등장하는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박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입니다. 실제로 성왕 다윗도 자신에 대해 "나처럼 가난하고 천한 몸"
(1사무 18,23 참조)이라 일컬었고, 후일 불리울 마니피캇에서 마리아 역시 "그분께서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루카 1,48 참조)다고 고백하지요. 주님 앞에 선 인간의 가난함과 비천함은 적나라한 실존인 동시에 희망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것이니까요.

사람은 태생이나 가문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곧, 자기 가문이나 집안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만큼 부질없고 민구스런 일도 없다는 뜻도 되지요. 이미 자기 집안의 역사를 보아서 알지만, 흠결 없이 완벽히 고귀한 족보는 희망사항이나 은폐의 증거일 뿐, 실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있게 한 집안 역사의 흠 많은 자취들에 대해서 솔직해도, 당당해도 괜찮습니다.

구세주를 일으킨 "보잘것없는" 집안의 족보가 말해주듯,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죄인인 바로 우리가 구원 역사의 한 줄기, 한 토막을 끗꿋이 연결하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연민하고 사랑하며 겸손히 순종하는 우리를 통해 인류에게 이루실 주님의 구원이 끊이지 않고 맥을 이어가는 중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신앙의 길을 묵묵히 걸어오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벗님은 마리아와 함께, 구원의 신비와 우리 삶을 잇는 견고한 허브처럼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구원의 핏줄은 이렇게 믿는 우리 모두를 통해 오늘도 면면히 흘러간답니다. 마리아를 닮은 벗님은 복되십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이 되신 마리아의 탄신을 축하합니다. 그 구원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벗님의 탄생도 더불어 축하합니다.

마리아 축일에 제2의 마리아로 태어나기  

-김찬선신부-


그제는 기후위기 비상행동을 하는 젊은이들이 공동체를 방문하여

미사도 봉헌하고 나눔도 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후위기와 관련한 운동만 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의미 있는 행동을 하고자 하고 있고,
예를 들어 통일운동도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하려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저하고 차이점도 있었는데 저는 사업과 운동 사이에 사업을 하는 편인데,
그들은 거창한 사업을 욕심부려 하기보다 운동Movement을 하는 편이고,
그래서일까 저처럼 근심 걱정하며 하지 않고 기쁘고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떻게 저렇게 젊은 사람들이,
그중에는 이제 곧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젊은이도 있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생각을 품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좋게 남았기 때문인지 오늘 성모님 탄생 축일에 대해
묵상하면서도 <품는 것>을 주제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품는 것이란 잉태와 같은 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가씨가 톡톡 털고, 튀기고, 밀어내는 존재라면
어머니는 수더분하게 품는 존재란 생각을 한 거지요.

물론 악한 생각이나 악심을 품을 수도 있으니
품는 것이 다 좋다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므로 제가 품는 것을 좋은 뜻으로 얘기하는 것은
선한 생각이든 선의든 선한 것을 품는 것을 말함이고,
그러기에 덕德을 얘기하는 것이며 덕으로서의 품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품이 좁지 않고 넓음을 얘기하는 것이며
수용 능력으로서 품과 품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품이 좁은 사람은 품을 수 없고 넓어야 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품이 넓다는 것,
선을 품을 수 있는 품이 넓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모든 선을 품을 수 있을 정도를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선에는 이런 선, 저런 선이 있고,
최선, 차선, 차차선, 차차차선, 곧 차이가 나는 선들이 있으며
이렇게 선이 밑으로 내려가고 내려가면
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악으로 느껴지는 선들도 있다는 거지요.

그렇지요.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악들은 사실은 선인데 우리가 최선을 욕심내고,
웬만한 선으로는 만족지 못하기 때문에 악으로 느끼게 되는 선들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꽤 좋은 사진기인데 어떤 사람은 안 좋다, 나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선일지라도 그 작은 선으로도,
그 낮은 선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때 모든 선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품이 넓다고, 또는 덕이 많고 후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르게 얘기하면 무엇이 주어지든 'Yes'할 수 있을 때,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느껴지는 선까지, 그리고
심지어 내게는 악이고 십자가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기에
그것을 선으로 품을 수 있을 때, 모든 선을 품을 수 있고,
모든 선을 품을 수 있을 때 모든 선이신 하느님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마리아가 이렇게 하셨고,
우리도 똑같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선으로 품을 때
우리도 오늘 하느님을 품는 마리아로 탄생케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탄생 축일에 우리도 제2의 마리아로 탄생하는 겁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9월 8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