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9월 5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0. 9. 4. 05:13

2020 9 5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가 6:1.5)

 

 “Why are you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루카 복음은 구원의 완성과 그 기쁨을 노래하는 복음입니다. 더 이상의 기다림도, 더 이상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신 주님을 맞이할 넉넉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애써 가꾸어야 할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 스며든 시간적 배경도 끝자락의 완성을 암시합니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것은 추수할 때의 행동이지요. 대개 성경 안에서, 추수는 이른바 종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과도기가 아니라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예전의 약속이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추수’라는 이미지가 밝히 드러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도,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도, 좀 더 나은 내일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논박할 이유도 없습니다. 완성의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성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이 부족해 보이고, 아직 멀었다 싶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모두 부자고 성공하였으며, 그래서 값진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행여 누가 배고플까, 행여 누가 울고 있을까, 그래서 행여 누구라도 완성의 시간에 누릴 기쁨의 잔치에서 소외될까 고민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입니다.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배고프지 않게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그리고 변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뒷배가 아주 든든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넉넉하여 나눌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전문 코치에게 가서 탁구를 처음 배웠을 때가 생각납니다. 조그마한 배트로 스매시를 하고 드라이브로 멋진 공격을 하는 모습, 또 탁구대에서 멀리 떨어져서는 커트로 강한 공격을 받아내는 모습에 홀딱 반해서 탁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탁구를 배울 때 하는 것은 스매시나 드라이브, 커트가 아니었습니다. 거울을 보고서 자세에 맞게 쉼 없이 스윙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자세를 취해서 스윙하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웠습니다.

이렇게 혼자서 거울을 보고 자세교정 연습을 한 뒤에 코치와 일대일로 훈련합니다. 그러나 거울 보고 스윙하는 시간이 워낙 길기에 코치와의 훈련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후회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보았던 그 멋진 모습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몇 달 뒤에 저를 이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세교정을 하고 그 뒤에 코치를 받으며 탁구를 한 것뿐인데 말이지요. 가장 기본인 자세교정이 이루어진 뒤에 실력 향상이 쭉쭉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번에 일류 선수가 되지는 않습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기본기입니다. 기본기 없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데도 기본기가 필요합니다. 그 기본은 사랑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도 사랑임을 말씀하시면서,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지키는 것보다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사랑이라는 기본기를 보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면서 고발합니다. 밀밭 사이를 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는 것을 두고서 한 말이었습니다. 밀 이삭을 뜯은 것은 추수의 일을, 비빈 것은 타작의 일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 나아가는데 필요한 기본기는 율법의 세세한 규정을 확대해석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을 바라보면서 실천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행동도 허락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이라는 기본기는 주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합니다.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남들에게 우습게 보일 수도 있고, 바보스러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기를 익히지 않으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 것처럼, 사랑 없이는 주님 앞에 제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행해야 할 기본기, 오늘도 이 기본기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명예롭지 못한 성공은 양념하지 않은 요리와 같아서,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지만 맛은 없다(조 파테이노).



우연히 책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프리랜서의 가장 큰 장점은 출근이 없다는 것이고, 가장 큰 단점은 퇴근이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 19가 시작하면서부터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불만입니다. 왜냐하면, 온종일 일에 묻혀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퇴근이 따로 없기에 ‘조금만 더 있다가, 이것만 보고, 이것만 하고…….’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종일 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부들의 대부분은 재택근무입니다. 성당에 살면서 성당 일을 하면서 살지요. 그러다 보니 특별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아도 온종일 바쁘게 됩니다. 일과 쉼이 구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쉬는 것도 일이 되기도 합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도 강론 자료를 찾기 위한 ‘일’이 됩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술자리를 갖는 것도 ‘사목’을 위해 필요한 일이 됩니다.

일과 쉼이 구분되는 삶이 필요합니다. 바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의 경우 절대로 컴퓨터를 켜지 않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이 시간은 제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시간이지요. 물론 강론과 강의 자료를 모으는 데 필요한 시간이지만, 좋아하는 시간이기에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과 쉼을 구분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와내는 사람은 전부터 화가 나 있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또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이번엔 안식일에 남의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 때문입니다. 과연 바리사이들이 안식을 참으로 지내고 있는 것인지, 제자들이 안식을 지내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도 화가 나 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안식일에도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요?

      ‘tvN 어쩌다 어른’에서 상담학 전문가 ‘권수영 교수’가 나와 강의한 내용 중 ‘분노 조절 못 하는 아빠의 충격적 비밀’에 관한 것을 소개해드립니다.

경제적으로도 유복하고 자녀들도 잘 성장한 평범한 집의 가장입니다. 근데 이분이 권 교수에게 상담을 받으러 왔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 때문이란 것입니다. 차가 깜빡이 켜지 않고 끼어들면 보복 운전을 하고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휴게소까지 쫓아 들어가 폭력을 행사하여 벌금과 구금, 심지어 감옥까지 갈 정도였습니다.

      두 자녀에게 물질적 지원은 충분히 했지만,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두 자녀는 각자 방으로 그냥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분은 “너희가 아빠를 무시하는 거야?”라고 하며 급기야 아들에게 손찌검까지 합니다. 그렇게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고, 이혼하기 전에 상담 한번 받아보라고 해서 권 교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상담하던 중, 어린 시절 두번의 큰 상처를 기억해냅니다. 어렸을 때 바쁜 어머니가 큰아들을 묶어놓고 다녔습니다. 그때 엄청난 공포와 좌절, 분노 등이 자신에게 내재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은 엄마가 외삼촌에게 애가 말을 안 듣는다고 혼내주라고 하였습니다. 외삼촌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흙탕물에 들이박고 숨이 멎어서 죽기 직전까지 가게 체벌하였습니다. 이 두 사건이 그의 심장에 커다란 분노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권수영 교수는 자녀에게 사과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하였습니다. 자녀도 건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권 교수는 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자신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말하면서도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입니다. 아직도 그것 때문에 영향을 받는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자녀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자신이 싫었을 것이고, 그렇지만 그렇게 한 이유를 제대로 보게 되어 마음이 편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더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군대 가기 전 아버지와 단둘이 여행을 갔습니다. 그때 아들이 한 번도 못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아빠, 사실 나 중학교 때 자살하려고 했어. 아빠 때문에. 근데 엄마가 불쌍해서 못 했어.”

이젠 아버지가 폭풍 눈물을 흘렸고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나의 상처를 타인에게 털어놓으면 이젠 나는 그 상처의 주체가 아니라 제삼자가 됩니다. 사실 상처는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내 자아가 받은 것입니다. 그 상처 입은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 믿어온 것이 문제입니다.

두 물통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 물통은 상온이고 한 물통은 들어가서 오래 버티기 어려운 온도입니다. 어렸을 때의 상처를 안고 용서가 안 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다시 그 고통을 느끼기를 두려워합니다. 거의 온천수의 온도의 물에 들어가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1도만 더 높아져도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그 1도의 온도를 높일만한 일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이 표출되는 것이 분노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모든 상처를 다 용서하면 그만이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용서가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용서를 위해서는 ‘피’가 필요합니다.

 

      이철환 작가의 예를 많이 드는데, 태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소매치기하며 사는 청년이었습니다. 동생을 통하여 어머니가 아파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말을 듣고도 병실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담배만 피우다 지하철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한 여자의 핸드백에서 돈뭉치를 소매치기합니다.

 

      몇 달 뒤 동생에게 전화가 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왜 돌아가셨느냐고 묻자 병원비가 없어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태수는 펄펄 뛰었습니다. 돈 없으면 죽어야 하는 나라, 이러니까 내가 이 꼴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동생도 말합니다. 여자친구가 찾아오던 결혼자금만 있었어도 엄마를 살릴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것을 소매치기한 장본인이 자신임을 안 태수는 더는 말을 잊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피가 자신의 심장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얻는 것이 ‘안식’입니다.

 

      자기 심장에 그리스도의 피가 떨어지면 두 가지 큰 효과가 일어납니다. 내가 더 큰 죄인임을 알아 용서하게 되고, 또 그 피가 떨어져 죽은 내가 참 내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자아가 나인 줄 알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문설주에 피가 발라진다고 집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당사자임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그렇게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내가 바로 자아였음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설설 끓고 있던 물에서 나와 그 물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개미가 물고 뜯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집의 문설주였습니다.

      상온의 물통이든, 뜨거운 물통이든 들어가 있지 말고 나와야 합니다. 상온의 물도 오래 끓이면 끓습니다. 나와서 제삼자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이 끓든 말라버리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더는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참된 안식입니다. 파라오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끓는 물속에서 빼내 주실 분은 나를 위해 피를 흘린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나의 구원자요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을 얻은 이는 그래서 나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뉴욕에는 강풍이 불 때가 있습니다강풍이 불면 커다란 나무들의 가지가 꺾이기도 하고나무가 쓰러지기도 합니다강풍을 피할 수 없는 나무의 숙명입니다동물과 식물의 사는 법은 다릅니다동물은 자유롭게 움직이며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더위를 피해서 시원한 곳으로 갈 수 있고추위를 피해서 따뜻한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다만 동물은 움직이기 위해서 에너지를 섭취해야 합니다동물이 움직이는 이유는 자유를 찾아서 일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먹이를 찾아서였습니다.

 

이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성서는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야기입니다식물은 한 곳에 정주하면서 살고 있습니다이동에는 제한이 있지만 식물에게는 시간이 많습니다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움직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물과 햇빛만 있으면 몇 십 미터 높이로 자랄 수 있습니다동물은 오래 살아야 100년이지만 식물은 2,000년을 넘게 살기도 한다동물과 식물은 각자의 방법으로 생존의 길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집을 방문했을 때입니다마르타는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리아는 예수님의 곁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예수님의 시중을 듣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음식을 마련하고집안을 청소하고사람을 초대하는 일입니다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를 강조하셨습니다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나가서 마귀를 쫓아내고병자들을 고쳐주고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따로 기도하셨습니다핸드폰은 충전을 해야만 사용할 수 있듯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명상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겟세마니 동산에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제자들에게도 같이 기도하기를 바라셨습니다수도회도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곳이 있고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곳이 있습니다수도회의 영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어떤 분은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곳이 본인의 성격과 신앙에 적합하기도 합니다어떤 분은 관상을 중심으로 하는 곳이 본인의 성격과 신앙에 적합하기도 합니다.

 

낯선 곳에서 힘들어하는 딸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마치 감옥 같다고 하였습니다원주민들하고는 말도 통하지 않았고도시에서와는 달리 편의 시설이 없었습니다그런 딸에게 아버지가 답장을 보냈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 중에는 창 너머의 별을 보는 사람이 있단다그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이 있단다바닥의 바퀴벌레와 쥐를 보는 사람이 있단다그리고 절망 속에 머무는 사람이 있단다.” 아버지의 답장은 간결했지만 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딸은 원주민들하고도 대화를 하려하였고원주민들은 딸이 원하는 것들을 선물로 가져왔습니다딸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글을 썼고책을 출판하였습니다주위의 환경이 바뀐 것은 없었습니다다만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그러자 원주님들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아름다운 자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신앙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환경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바꾸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십자가를 지고가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안식일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과 같습니다식물에게는 움직일 수 없지만 물과 햇빛만으로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동물은 음식을 외부에서 얻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식물이 동물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스스로 양분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감사하면 좋을 것입니다동물이 식물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감사하면 좋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지금도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환경을 바꾸려하지 않았습니다주어진 환경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였습니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소중합니다!

 -양승국신부-

 

사람들 사이에 살아가면서 늘 조심하고 경계해야할 태도가 있습니다. 확대해석이나 과잉반응입니다. 침소봉대(針小棒大)란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작은 바늘을 보고 큰 몽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 아주 작은 일인데, 마치 세상 끝나기라도 하는 듯, 난리를 치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성향 가진 사람들 견뎌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과도하게 편향되고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에 백성들은 크게 환호하고 박수를 쳤지만, 그들은 늘 부정적이고 삐딱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물어 뜯고 늘어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소인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대인배였습니다. 적대자들이 아무리 헐뜯고 비난해도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좁은 마음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그들의 회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매사에 여유가 있고 넉넉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복음 선포 여행을 떠난 예수님과 제자단의 행보는 지극히 소박하고 가난했습니다. 많은 짐을 실은 낙타 부대며, 여러 명의 노예며, 큼지막한 가마를 갖춘 럭셔리한 여행단이 아니었습니다. 

 

손에 든 것이라고는 고작 뱀이나 전갈 방어용 지팡이 하나씩 밖에 없었습니다. 짐보따리도 없었습니다. 갈아입을 여벌 옷이나 비상 식량도 없었습니다. 우르르 무리지어 다니면서 누군가가 숙소를 제공해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습니다. 한끼 식사라도 제공해주면 감지덕지하면서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발길 닿는 고을 마다 환대한 것이 아니었기에, 때로 몇 끼니나 쫄쫄 굶으며 건너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밀밭 사이를 걸어가던 제자들이었기에, 자동으로 손이 밀 이삭으로 갔었겠지요. 지독한 허기를 조금이라도 면하려고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입에 털어넣었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은 이게 웬떡이냐며 즉시 태클을 걸어왔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오?”(루카 복음 6장 2절)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한 가지 포인트! 안식일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과도한 해석입니다. 이스라엘 전통 안에 이런 예외가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밀이삭을 자르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이웃의 포도밭에 들어갈 경우, 원하는 만큼 배불리 포도를 먹을 수는 있지만 그릇에 담하서는 안 된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기 23장 25~26절)

  

바리사이들은 특별히 안식일 규정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과도하게 해석했고, 무리하게 적용시켜 가난한 백성들을 억눌렀습니다. 그들은 밀 이삭 몇 가닥 자르는 것도 추수의 한 형태로 봤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어기고 훼손시키는 노동 행위 29가지를 나열했고, 29가지는 각각 또 다른 가지를 쳐서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 그 얼마나 답답하고 고약한 안식일 규정이었겠습니까?

  

만일 부주의로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면 1차 경고를 받고 벌로 속죄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1차 경고를 받은 사람이 또 다시 목격자가 있는 앞에서 안식을 규정을 어기게 되면, 그 벌로 돌로 쳐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비인간적으로 가혹한 안식일 규정의 폐단을 똑똑히 당신 눈으로 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중요시 여겼던 안식일 규정을 보란듯이 산산조각 내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안식일을 선포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다.”(루카 복음 6장 5절)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소중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율법 조항 하나 하나에 얽매이신 작은 분이 아니라 자비로 충만한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6,1-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예수께서는 율법의 안식일이 아닌 은총의 안식일영원한 부활의 안식일을 주시는 분이시다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처신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비난해 왔다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그리고는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다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본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예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해 응답을 하신다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그 관례에 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하기보다그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할 것이다그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즉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라고 하신다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 5)

-한상우신부-

수해
복구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구원의
여정안에
안식일이
있습니다.

안식일이
무너져 버리면
사람에 대한
존중도 무너져
내립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 안식일의
기쁨을 되돌려
줄 때입니다.

참된 안식일을
잃은 우리들에게
안식일을 다시
찾아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안식일의 뿌리는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연장선
안에 있는
안식일입니다.

지켜야 할
사랑이며
실행해야 할
주님의
방식입니다.

사람이 소중하듯
모든 생명또한
소중합니다.

안식일의 관점은
생명의 빛을
드러냅니다.

사람의 상처는
안식일의
상처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안식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안식일의
족쇄까지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시킵니다.

안식일이란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안식일은
사랑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안식일 법의 진정한 의미를 묻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추수에 준하는 노동으로 간주한 것이지요. 아마도 장정인 제자들이 긴 선교 여행 동안 허기가 져서 그랬을 것 같습니다. 남의 밀밭 사이를 이동 중이었으니 곡식을 거두어 이득을 취하거나 음식을 장만하는 노동의 의도도 아니었을 터이고요.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사람 보호와 존중의 가치로 법을 활용하기보다 트집을 잡으려고 들이대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루카 6,3)

예수님은 대답 대신, 유다인이 자랑으로 여기는 성왕 다윗의 일화를 상기시키십니다. 다윗 역시 굶주렸을 때 사제들만 먹게 되어 있는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이 있으니까요(1사무 21,2-7 참조). 사실 모든 인간의 일거수일투족과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정교한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법의 정신이 대부분의 상황을 해석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당시 유다 사회에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을 듯합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나름 삶의 이득을 취하는 부류와, 안식일이나 평일이나 생활을 유지하는데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부류, 그리고 안식일의 정지와 멈춤이 쉼은커녕 생계에 큰 위협이 되는 부류입니다. 사사건건 안식일 규정을 들어 예수님과 제자들을 공격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전자에 속할 것이고, 그들이 죄인이라 단죄하는 가난한 이들이 후자에 속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득권자라는 이유로 사회 종교 지도층을 소외시키지 않으셨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사실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이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이미 많은 관심과 위로와 이득을 충분히 받아 누리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근본도 모르는 가난뱅이 예언자 설교가의 애정이 그다지 절실하지도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다릅니다. 율법도 포기한 죄인이라는 손가락질과 멍에를 치우고 다가오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인격을 존중하고 존재 자체를 받아들여 주시는 아버지 같고 엄마 같고 친구 같은 스승입니다. 예수님은 배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이에게 법을 들이대기보다 "저런, 배가 많이 고팠구나." 하고 연민하는 분이시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전히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1코린 4,8)

사도는 그토록 열성을 다해 지도한 코린토 신자들이 자기들을 이끌어 준 사도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스스로 이미 하늘 나라를 차지하여 하느님의 통치권을 함께 행사한다는 망상에 빠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1코린 4,11)

사도는 주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현실에서 겪어내고 있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술합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명예나 호의호식, 분파나 교만이 스며들 자리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닮고자 따르는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동안 배고픔과 피로에 지칠 때까지 양떼를 찾아 먼 길을 오가셨고, 결국 죄인까지 끌어 안는 사랑 때문에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으니까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1코린 4, 15)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도록 도운 영적 "아버지"가 이처럼 고군분투하며 하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데, 그 자녀들이 그토록 쉽사리 자기 주제와 복음의 정신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참 가슴 아픈 일이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언젠가 후회를 할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따끔한 말로 코린토 신자들을 일깨웁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예수님 역시 바리사이들에게 단호히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그들에게 어쩌면 선전포고일 수도 있고,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돌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 사람의 생명과 인격과 존엄성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자의로 또는 타의로 법의 해석을 그르치는 오류가 있을 따름이지요. 하느님께서도 사랑이라는 기반 위에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고 당당히 선언하십니다. 당신이 율법의 정신을 바로 세워 완성하실 것이니까요.

안타까워서 하는 사족 같은 말씀입니다만, 바리사이들이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약자들을 보듬는 율법의 정신을 수호하는데 자기들에게 부여된 지식과 특권을 집중했다면, 그들은 더욱 겸손하고 포용력 넓은 현자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스승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듭니다. 그러했다면 예수님께 대한 불필요한 저항과 소모적인 선동, 무고와 무죄한 사형 따윈 없었을 테니까요. 오늘날의 기득권층의 행태가 이들의 모습과 겹쳐 떠오르는군요.

무엇이 진리인지 헷갈릴 때는 본질로 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삶의 곳곳에서 밀려드는 다양한 요구와 도전들 속에서 자신이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지 혼란스럽다면, 잠시 멈추어 "내가 사랑하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일부러 말씀을 거스르거나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지요. 앞질러 단죄하지 않고 스스로를 심판자라 착각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러니 아직 사랑하고 있다면 괜찮은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돌판에 새긴 법을 넘어서 우리 심장에 새겨 주신 사랑의 법이 우리를 온전히 지배하기를 주님께 청합시다. 그 사랑 안에서 더욱 자유롭게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연민하며 나아갑시다. 사랑으로 사랑을 완성해 나갑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멘.

하느님처럼 쉬고, 하느님 안에서 쉬는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밀이삭을 뜯어 먹자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왜 하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것이 무슨 뜻입니까?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데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어떤 일이건 해서는 안 되는데 일을 했다는 뜻일까요?

바리사이의 뜻은 안식일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율법에 있는데 왜 일을 하여 율법을 어겼냐는 뜻일 겁니다.
그러니까 문제의 본질은 일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어긴 것이지요.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법의 규정이 아니라 법의 정신이 중요하고,
그러므로 안식일을 규정대로 그저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안식일이 왜 있는지 그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면 일하지 않고 놀면 되고,
더 나아가 일만 하지 않는다면 갖가지 쾌락을 즐겨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목적이랄까 정신은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안식일이 주님의 날이라고 해도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일에 쉬도록 하신 것은 하느님 당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안식일에 인간의 예배를 받지 못하면 안달이 나서
아무렴 안식일 법을 제정하게 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안식일 법을 제정하시고 안식일에 쉬게 하신 것은
당신이 예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코로나 시국에 일부 개신교들이 주일 예배가 자신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거라고 한 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고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이런 면에서는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만 자신들에게 생명과 같은 예배가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이 되는 반 생명적이고 반 사랑적인 예배이기 때문에 문제이고,
내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한
그 보편적인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아무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고,
그래서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며,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의 말씀처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거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에서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인간 위에 어떤 것도 없어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망가뜨리고 불행케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어야 합니다.
만일 하느님일지라도 우리를 비참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분이라면
그런 분을 우리가 섬기고, 그분 계명과 율법에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며칠 전 복음에서 봤듯이 더러운 마귀의 영은 하느님을 그런 분으로 믿기에
상관치 말고 떠나가 달라고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이 그런 분이 결코 아니고
구원자라고 믿기에 그분을 섬기고 그분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든 계명과 안식일 계명은 우리가 소처럼 일하지 않고,
하느님이 쉬신 것처럼 쉬고, 하느님 안에서 쉼으로써 인간품위를 지니고
하느님처럼 창조적인 일을 하도록 주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이런 묵상을 하다보니 문득 제가 사랑하는 옛날 Pop Song, "You needed
me"의 다음 가사가 이 새벽부터 떠올라 흥얼거리게 됩니다.

"And held me up and gave me dignity, Somehow you needed me.
You gave me strength to stand alone again to face the world out
on my own again. You put me high upon a pedestal so high that
I can almost see eternity. you needed me, you needed me.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9월 3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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