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2020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루카. 4,16-30)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lad tidings to the poo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바빌론 유배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잃은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소의 거룩함 대신 시간의 거룩함을 선택하여 ‘안식일’을 중요시하였고, 하느님 말씀을 바탕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회당’을 세웁니다. 간소하였던 회당 전례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회중 모두 일어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 뒤 율법서를 봉독합니다. 유다인들의 신앙 고백인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5 참조)를 낭송한 뒤 시편과 ‘18조 기도문’(2마카 1,24-25 참조)을 바칩니다. 이어서 독서자(히브리어로 ‘마기드’)가 율법서를 봉독하고 설교한 다음, 또 다른 독서자(히브리어로 ‘마프티르’)가 예언서를 읽고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회당 전례는 회당장의 축복문(민수 6,24-26 참조) 낭송으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 전례에 참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독서자(마프티르)가 되시어 이사야 예언서를 봉독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어서 설교를 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이 누구의 아들이신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특히 오직 메시아에게만 주어진 ‘눈먼 이들이 다시 보게 되는 일’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다는 말에 화가 잔뜩 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 맙니다.
주님의 영이 내린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분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성령의 힘이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기에 앞서, 그 말씀의 신비를 깨우칠 수 있는 성령의 힘을 청합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 처방전에는 몇 가지 열매와 허브, 그리고 플레인 요구르트가 적혀 있었습니다. 위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해서 낸 처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환자는 처방전에 적혀 있는 것을 따라 먹은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서 계속 처방전만 꼼꼼하게 읽기만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병이 더 심각해져서 용하다는 이 한의사도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의 병이 낫는 방법은 그저 처방전만 읽는 것이 아니라, 처방전을 따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성경만 읽는다고 주님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까요? 그저 성당에 나가서 미사에 참석하면서 미사를 주례하는 신부님 얼굴만 본다고 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릴까요? 이런 식으로 보기만 해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서 우리 구원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 말씀을 따라야 하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저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다 함께 기뻐할 일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오히려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고, 고향 사람들은 어떤 하느님의 은총도 체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그저 예수님을 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쫓아내면서 자기들에게 다가온 은총 자체를 걷어차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혹시 보고만 있으면서 주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은총을 나의 것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은총 속에 사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양을 치다가 지루해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정작 늑대가 나타나서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외쳤을 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이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계속된 거짓말에 이제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고 결국 아무도 듣지 않는 힘없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실한 말을 사용하는 것은 내 말에 힘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거짓된 말로 진정성을 없애고 결국 힘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말에는 힘이 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바로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 진실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진정성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내 욕심을 채우는 기도를 통해서는 주님께 실망만 드릴 뿐입니다.

왕이 '된' 사람은 모든 이를 왕으로 대한다
-전삼용신부-
미국에서 요즘 인종차별에 관한 기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5월 흑인 남성의 체포 과정 중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조지 플로이드가 질식사하였고, 며칠 전에는 세 아이가 보는 앞에서 제이컵 블레이크가 경찰이 쏜 총 7발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블레이크는 비무장 상태였고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말리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가 유학할 때도 유럽인들에게 인종차별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중국 사람이라고 하면서 차별을 할 때는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그러며 ‘나도 중국 사람을 차별하는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월드컵에서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겼을 때는 정말 조심해야 했습니다. 독일에 갔을 때는 어떤 사람이 어깨로 일부러 치면서 하이! 히틀러!를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한국 사람들도 인종차별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끼리 흑인을 지칭할 때는 ‘검둥이’, 혹은 ‘연탄’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백인들을 대할 때는 자세가 아주 달랐습니다.
이런 인종차별은 어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어떤 필리핀 사람이 부자 동네 벽에다 인종차별을 하지 말라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마을 주민 부부가 이렇게 묻습니다.
“여기가 당신 집인가요?”
필리핀 남성은 그건 왜 묻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사유 재산이거든요.”
부부는 화장품 회사의 경영자였습니다. 그리고 낙서를 하는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부촌 퍼시픽 하이츠였습니다. 한 필리핀 남성이 자신의 자랑스러운 동네 벽에다 그런 낙서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낙서하든 뭘 하든 당신 맘인데 여기에 이렇게 하는 건 안 돼요.”
필리핀 남성이 말합니다.
“만약 내가 여기에 살거나, 이것이 나의 사유 재산이라면 문제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내가 여기 살거나 여기가 내 사유 재산인지 당신은 모르고요.
당신들이 여기에 살고 있군요, 그렇죠?”
여자가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렇진 않지만, 여기에 누가 사는지 알기 때문이에요.”
상당히 부잣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필리핀 남성이 말합니다.
“그럼, 여기 사는 사람한테 전화하든가 경찰한테 신고하세요.
당신이 나를 범죄자 취급하니까요.”
그러자 여자는 진짜로 경찰에 신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왔다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냥 갑니다.
벽에 글씨를 쓰고 있던 남자는 그 집에서 18년째 살고 있던 필리핀 출신 제임스 후아닐로 씨였습니다. 그리고 인종차별 반대 움직임에 동참하고자 자신의 집 담벼락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글을 쓴 것입니다.
백인 부자 동네에 아시아계 황인종이 살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 때문에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페이스라는 소규모 화장품 회사 CEO였던 리사 알렉산더는 ‘인종차별’이라는 거센 비난에 회사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도 닫아야 했습니다.
차별의 원인은 ‘선입견’입니다. 그런데 그 선입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교만함’에서 옵니다. 자신이 그러한 위치에 있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백인으로 태어난 것이, 한국에 태어난 것이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 나자렛에서 박해를 받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30년 동안 보아오던 예수님께서 메시아일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 선입견은 그들의 생각이 옳다는 교만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에겐 이 교만을 꺾을 수 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교만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서 나오기에 믿음만이 치료약입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광해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광대를 왕으로 앉힙니다. 광해는 그동안 사람들을 깔보는 권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양귀비에 중독되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천민인 하선은 오랜 시간 왕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하다 보니 자신이 정말 왕처럼 느껴졌습니다.
왕이 된 천민 출신 하선은 억울하게 갇혀 있는 사람이나 빚에 팔려서 무수리가 된 사람들에게 다정히 대해줍니다. 그런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 같은 사람도 왕이 될 수 있다면, 당신들도 왕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왕이었던 사람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나 있어서 그렇게 된 줄 압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가질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사람도 귀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유는 잘나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차별과 편견은 교만에서 오는 것이고 그 교만은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열등감에서 옵니다. 열등감이 자존심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교만입니다.
참다운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 안에서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을 보고 존중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목마르다”라고 말하는 한 노숙자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도 믿기만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믿기만 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왕이 되었다면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누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작년 12월에 LA엘 다녀왔습니다. 여행사와 함께 ‘멕시코 청년 봉사활동’을 추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행사는 구체적인 일정을 기획하고, 신문사는 홍보를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멕시코에서 선교하는 신부님과도 협의를 하였습니다. 청년들은 노력봉사도 하고, 영어도 가르치기로 했었습니다. 아쉽게도 코로나19로 모든 일정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당시 오랫동안 한국학교에서 봉사하셨던 형제님을 만났고, 형제님께서는 순례 중에 쓰신 ‘산티아고 순례길 따라 2,000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시고, 통일에 대한 관심도 많으시고, 시인이신 형제님이십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가지는 못했지만 형제님의 글을 통해서 순례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형제님께서 문단에 내신 시(詩)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산이 좋아, 나는 길 따라 올라가는데
물은 산을 버리고 떠나는구나.
한세월 더불어 살다보면 싫증날 때도 있겠지
버리고 떠나는 저 길이 그리움의 시작인 줄을
세상 내려가 살다보면
산 만한 친구도 없다는 것을
촐랑거리며 흐르는 저 물이 알기나 할까?
산이 좋아 오늘도
나는 산길을 올라가는데”
형제님의 글은 신문에 나왔다고 합니다. 어느 날, 형제님에게 메일이 한 통 왔다고 합니다. 감사의 글이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갈등이 심해서 헤어지려고 했는데 신문에 나온 시를 읽었고, 남편과 계속 살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말썽을 부리고, 불평과 불만이 많은 자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도 나중에 너 같은 자식을 낳아 보면 지금 내 심정을 이해할거다.’ 물의 속성이 늘 어딘가로 흐르는 것이듯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도 늘 어딘가를 향하여 나가려고 합니다. 영어의 ‘Animal’을 우리는 동물(動物)이라고 부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고,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물이 산에서 흘러나왔듯이,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알고, 언젠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도 흘러간다고 표현합니다.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고, 지금 내가 걸어가는 길이 미래 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채워 넣은 것이 국가이면 역사가 됩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채워 넣은 것이 신앙이면 교회사가 됩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채워 넣은 것이 나의 삶이면 그것이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이렇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가거든,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 지금 너의 발걸음이 뒷사람들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성공, 명예, 재물, 권력’을 채우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나눔, 희생, 겸손, 친절’을 채우려고 할 것입니다. 2020년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도 한국을 떠나온 지 1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제가 원하는 것을 채우려 한 적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이지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새롭게 신발 끈을 매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순교자의 달, 9월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반영억신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발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가지고 계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통찰한 것처럼 힘이 빠지고 내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고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너 죽을래!’'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송영진신부-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바람과 파도를 고요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고 말씀하시면(루카 5,20), 그 사람은 곧바로 용서를 받은
상태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루카 23,43), 그 사람은 그날 중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먼 훗날에나 이루어질 일에 관한 소식도 아니고, 어디 먼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관한 소식도 아니고,
‘지금, 이곳에서 시작된’ 일에 관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신 순간,
하느님 나라와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예언을 읽으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신 일이고,
메시아로서 온 세상에 해방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 그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기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선포는 말로만 그치는 선포가 아니라,
선포하는 순간 인간 세상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고,
또 예수님께서 해방을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의 해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시작되었고,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선포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구원(해방)되었다.<내가 너희를 구원(해방)하였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분이고,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해방은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 구원과 해방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자동적으로 우리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해방을 받아서 우리 것으로 만드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만 생각하고서
예수님을 안 믿었고, 예수님의 복음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자렛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해방의 열쇠를 주셨는데도, 받아야 할 열쇠는
보지 않고, 그 열쇠를 주신 분의 옷차림과 외모만 보고
의심하면서 안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해방을 거부한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로마제국 황제의 아들로 오셨다면, 또는 예루살렘 대사제의
아들로 오셨다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제국 황제라는, 또는 예루살렘 대사제라는
배경을 믿은 것일 뿐이고, 진정한 믿음은 아닙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루카 4,23).”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 없이,
기적을 통해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일으키면 믿겠다고 말했을 텐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도 트집을 잡으면서 다른 요구를 또 했을 것입니다.
(기적은 믿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은총이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이 말씀은, “하느님을 안 믿던 이방인들도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나를 믿기 시작했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환영’이라는 말은,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신 것은 환영받기를 바라셔서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언급하신 것은(26-27절),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자만심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선택된 민족이라면 선택된 민족답게 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29절),
예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는 말씀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은 회개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더욱더 겸손하게 회개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나에게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화를 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만으로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바람과 파도를 고요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고 말씀하시면(루카 5,20), 그 사람은 곧바로 용서를 받은
상태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루카 23,43), 그 사람은 그날 중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먼 훗날에나 이루어질 일에 관한 소식도 아니고, 어디 먼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관한 소식도 아니고,
‘지금, 이곳에서 시작된’ 일에 관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신 순간,
하느님 나라와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예언을 읽으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신 일이고,
메시아로서 온 세상에 해방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 그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기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선포는 말로만 그치는 선포가 아니라,
선포하는 순간 인간 세상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고,
또 예수님께서 해방을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의 해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시작되었고,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선포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구원(해방)되었다.<내가 너희를 구원(해방)하였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분이고,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해방은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 구원과 해방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자동적으로 우리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해방을 받아서 우리 것으로 만드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만 생각하고서
예수님을 안 믿었고, 예수님의 복음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자렛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해방의 열쇠를 주셨는데도, 받아야 할 열쇠는
보지 않고, 그 열쇠를 주신 분의 옷차림과 외모만 보고
의심하면서 안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해방을 거부한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로마제국 황제의 아들로 오셨다면, 또는 예루살렘 대사제의
아들로 오셨다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제국 황제라는, 또는 예루살렘 대사제라는
배경을 믿은 것일 뿐이고, 진정한 믿음은 아닙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루카 4,23).”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 없이,
기적을 통해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일으키면 믿겠다고 말했을 텐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도 트집을 잡으면서 다른 요구를 또 했을 것입니다.
(기적은 믿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은총이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이 말씀은, “하느님을 안 믿던 이방인들도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나를 믿기 시작했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환영’이라는 말은,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신 것은 환영받기를 바라셔서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언급하신 것은(26-27절),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자만심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선택된 민족이라면 선택된 민족답게 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29절),
예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는 말씀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은 회개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더욱더 겸손하게 회개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나에게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화를 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한상우신부-
오늘 우리
마음에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오늘은
참 좋은 날이다.
말씀이 길을
열어준다.
말씀이 우리의
결핍을
채워준다.
오늘을
되살리는
말씀의 힘이다.
오늘의 빛은
말씀의 빛이다.
오늘은 말씀이
열매를 맺어야 할
오늘이다.
나와 너
사람과
사람 사이
말씀이
이루어진다.
말씀을 통해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할지를
듣게된다.
오늘을
오늘답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과 오늘은
하나이다.
생명의 모습은
말씀의 모습이다.
우리의 오늘을
하느님께
올려 놓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처럼
말씀따라
오늘을
살고싶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공생활이 요약되어 나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
예수님의 공생활은 성령과 함께 시작합니다. 세례 때 성령께서 그분께 내리셨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지요. 예수님은 기름부음받은이,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에게서 파견된 참 그리스도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봉독하신 이사야서의 대목(이사 61,1-2)은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입니다. 이는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나 50년째 해인 희년에 종들을 자유롭게 내보내라는 주님의 명을 근거로 하지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자유와 해방의 주체이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말씀이신 분의 입을 통해 그 말씀이 발설되어 다양한 억압과 빈곤과 장애의 고통을 겪고 있는 청중의 귀로 들어가 마음에 스며들면서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실현되고 완성되는 것이지요. 나자렛 회당에서 울려퍼진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 즉 그분 사명의 청사진과 같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간적 계보를 너무 잘 알아서 걸려 넘어집니다. 기적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께 출신과 권한을 따져 묻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미리 비추는 듯합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 닥칠 미래를 암시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게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그러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한 번 피한다고 수난과 죽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나, 예수님께는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복음 선포자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의 말과 복음 선포는 ...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4)
바오로 역시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그의 사도직분은 언변이나 인간적 출신 성분,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영감과 도움으로 지탱됩니다. 사도로서 그의 출발이 인간적 조건이 아니라 "성령의 힘"이었기에, 열두 제자에 속하지도 않는데다 예수님 추종자들을 박해하는 자였으면서도 주님께서 부여해 주신 소명을 꿋꿋이 펼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 2,5)
그래서 사도는 우리에게 당당히 요구합니다. 믿음이 출신과 지혜, 신분 등 인간적 조건과 자격에 기인하게 되면 역시 인간적 조건 때문에 쉽게 무너지고 약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 논리와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힘을 믿을 때에는 실패와 업신여김과 모욕과 죽음까지도 견딜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 신비를 우리는 믿음이라 부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복음 속에서 한눈에 조망된 예수님의 삶과 사명은 사도 바오로나 다른 제자들, 우리들의 그것과 별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길에 들어선 주님의 동반자들이니까요.
주님의 길에서 저마다 고유한 소명을 살아가면서 너무 인간적 시각으로 주님을 가늠하고 재단하게 되면 나자렛 주민들처럼 자기 오류와 모순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고 마음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는 성령의 힘을 믿고, 자격도 조건도 안 되는데 불러주신 하느님의 힘을 믿으며, 온갖 어려움과 죄악과 나약함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예수님과 함께 뚜벅뚜벅 나아갑시다. 예수님과 사도 바오로에게 내렸던 그 주님의 영이 벗님에게도 충만히 내리시길 축원합니다.
8월 한 달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혀뿐 아니라 귀까지
-김찬선신부-
지난날을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그것이 대부분 교만했던 저의 행위에 대한 거지만
그중에서 저의 강의와 강론에 대한 부끄러움도 많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고 오늘 서간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저는 너무 자신만만하게 강론이나 강의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모든 강론이나 강의를 미리 많이 준비하고 하지만
옛날에는 미리 준비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수녀원 연피정을 동반하면서 그 8일 피정을
아무 준비 없이 가서 그날그날 떠오르는 주제를
아무 원고 없이 강의하곤 했는데 그런데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그렇게 한 것은 오늘 서간의 말씀과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르고자 함이었습니다.
오늘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하지요.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도 같은 맥락으로 설교를 하곤 하였지요.
그러니까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를 하기 위해 그는 미리 준비하지 않고
설교하곤 했는데 한 번은 설교를 잘해야겠다고 마음에 준비를 많이 했건만
막상 설교를 시작하니 말문이 막혀 한 마디도 못하고 내려온 적이 있지요.
우리는 운동을 하거나 무엇을 할 때 힘을 빼라고 하지요.
힘을 빼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헛발질하거나 망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힘을 뺀다는 것을 신앙적으로 바꿔 이해하면
자기 힘을 빼는 것이고 그것은 성령에 힘입기 위해서입니다.
아무튼, 제가 그렇게 강의한 표면적인 이유는 성령에 이끌리는 강의를 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적인 교만함과 자신만만함이
교묘하게 숨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을 뽑아 읽으시지요.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영이 당신 위에 내리셔서
그 성령의 힘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성령께서 제 위에 내리셨다면 저도 주님처럼 그리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나 프란치스코처럼 강의했겠지요.
그러나 저는 앞서 애기했듯이 제 힘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교만도 깨지고 힘도 점점 빠지니까
옛날의 그 자신감도 없어지고 실제로 옛날처럼 강의할 수 없게 되었지요.
제 힘은 빠졌지만 아직 성령으로 충만함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힘을 빼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을 힘입는 것이 더 중요하고,
내 힘을 빼는 이유도 성령을 힘입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내 힘도 빠지고 성령을 힘입지도 못하면 사실 저는 죽도 밥도 아니지요.
그런데 성령에 이끌려야 함은 말할 때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성령에 이끌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적으로만 해석케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혀가 성령에 이끌리는 것보다
귀가 성령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